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78화 (외전) (78/78)

제8장 외전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인천

“어따~ 사람 오지게 많아부네. 잘 보이지도 않는구만 그냥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낫지 않았겄소?”

병천이 군중들 사이에 서서 투덜거렸지만 범진은 묵묵히 연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함께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다가 대통령 당선자가 확정되는 순간 범진이 광화문광장으로 가겠다고 고집해 함께 나온 참이었다.

광화문에 설치된 무대에서는 곧 강바른 대통령 당선자의 당선 수락 연설이 있을 예정이다. 밤 1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광장은 대통령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투덜거려 봤자 범진이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으니 병천도 입을 닫고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무대 위에 강바른 당선자가 나타났다. 병천이 반색하며 범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성님, 나왔구만요!!”

당선자를 알아본 군중들 속에서 함성과 환호가 파도처럼 일었다. 당선자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함성이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려 마이크를 들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강바른입니다.”

첫인사에 다시 한번 함성이 일었다. 강바른 당선자는 미소를 짓고는 군중을 향해 고개 숙여 꾸벅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국민 여러분. 정의로운 나라, 원칙을 지키고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바라는 국민의 간절한 소망과 염원이 반영된 결과라고 믿습니다. 그 마음을 결코 잊지 않고 혼신의 힘의 다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저와 경쟁하셨던 분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과도 함께 힘을 모아 정의로운 대한민국, 당당한 대한민국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강바른 당선자가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꽤 길게 고개를 숙인 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연단 아래의 국민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병천도 특별한 감회에 젖었다.

임태산 형님 시절 처음 보았을 때는 새파랗게 젊은 검사 놈이 사사건건 태산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 없었다. 하지만 후에 사내다운 모습에 감화되기도 했고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산을 떠올리게 하는 면모도 있어 반감은 사라지고 호감이 점점 커졌다. 더욱이 젊은 시절부터 오래 지켜본 탓에 어쩐지 잘 아는 지인처럼 생각되어 강바른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히야~ 이것이 꿈이다요 생시다요. 태산 형님 시절부터 아웅다웅했던 강 검사가 대통령이 다 돼부렀구마요. 옛날 생각도 새록새록 나고. 기분이 참 묘해부네요.”

병천은 그렇게 말하며 동의를 구하듯 범진을 돌아보았다. 범진의 시선은 연단에 못 박힌 채였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조명에 비친 범진의 눈가가 어쩐지 촉촉하다.

병천은 내심 당황한다. 범진이 강바른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따지고 보면 범진이 강바른을 그렇게 각별하게 생각하는 이유 자체도 불분명했다.

[태산 형님의 원수를 갚아준 사람이다.]

범진은 은인이기 때문에 깍듯이 모신다고 답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강바른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감격한단 말인가.

[너무 그렇게 미워하지 마라. 형님도 강 검사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으셨을 거다. 강 검사는 자기 위치에서 제 할 일을 열심히 한 거고. 어떻게 보면 형님과 꽤 닮은 구석도 있다.]

[대체 어디가 말여라?]

[저렇게 불도저처럼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점이 말이다.]

병천은 언젠가 범진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그때 병천은 강바른이 나중에 혹여 대통령까지 해 먹으면 그때는 배 아파서 어떻게 보냐고 투덜댔지만 범진은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썩 기분이 좋아진 듯했었다.

‘태산 성님이랑 닮았다더니 혹시 그 때문인가?’

병천 또한 강바른의 아우라가 언뜻 태산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태산의 죽음 후 범진은 마음의 의지를 잃고 좌절해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었다. 그런데 태산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 어느새인가 완전히 기력을 되찾고 태산건설을 정비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병천은 범진이 태산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힘을 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일까? 범진은 강바른에게서 태산의 모습을 보고 새로이 마음 둘 곳을 찾은 것일까?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더욱이 물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 * *

“많이 먹어라.”

짜장면을 후루룩거리면서도 연신 눈치를 살피는 범진의 앞으로 용식은 탕수육 그릇을 밀어주었다. 데려와 키운 지도 한참이건만 아직도 밥을 먹을 때면 주인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씹지도 않고 급하게 들이켰다. 태생이 들개라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범진은 입안 가득 볼이 미어져라 물고 있던 면을 꿀꺽 삼키고는 서둘러 젓가락을 들어 탕수육 몇 점을 집어다 짜장면 그릇에 올려놓았다.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봐 미리 챙겨두는 것이다. 그중 한 점을 입안에 밀어 넣고 씹기 시작하는 범진을 보며 용식은 찬찬히 말했다.

“너는 한 놈만 맡으면 된다. 와룡회랑 붙게 되면 태산건설 임태산이가 직접 나설 거다. 그놈은 항상 현장에서 선봉에 서는 놈이니. 태산건설 놈들이 임태산을 주축으로 똘똘 뭉쳐 있다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임태산 하나만 잡으면 저절로 무너질 게 뻔하다. 할 수 있지?”

범진은 탕수육을 꾸역꾸역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식은 흐뭇하게 말했다.

“그래, 임태산이만 잡으면 너한테는 삼시 세끼 짜장 말고 요리를 시켜주마.”

역시 다 불어 터진 짜장이 아니라 간짜장에 요리까지 시켜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와룡회 2인자를 잡았는데 업장 하나를 내주는 게 아니라 고작 중화요리 정도로 때우려고 하다니 도둑놈 심보였지만 범진은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더러운 숙소에서 형편없는 밥을 먹고 아직 스무 살도 되지 못한 나이에 조직의 칼잡이로 굴려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앵벌이 시절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범진에게는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가장 오래된 것조차 조마리에게 앵벌이 요령을 배우며 두들겨 맞는 기억이다. 아마도 조마리가 버려진 아이를 주워 온 것일 테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도 없는 어린아이 때부터 범진은 앵벌이를 다녔고 늘 배를 주렸으며 조마리에게 구타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조금씩 머리가 굵어지자 범진은 더 이상 맞지 않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반항기가 보이자마자 조마리는 잽싸게 범진을 용식이파에 팔아치웠다. 눈빛이 점점 더 섬뜩해지기 시작하는 것이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제대로 보복을 당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범진은 눈치가 빠르고 몸이 날래며 담이 컸다. 처음에는 소매치기쯤으로나 써먹으려 했던 용식은 범진의 싹수를 알아보고 칼 쓰는 법을 가르쳤다. 과연 적성에 맞았던지 범진은 용식이파의 비밀 병기로 자라났다.

용식은 상대 조직과 한창 싸우고 있는 도중 범진을 뒤에서 자객으로 투입해 방심하고 있는 상대 조직의 우두머리에게 칼침을 놓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따지고 보면 비겁한 방법이었고 조폭 중에서도 그나마 도의를 지킨다고 내세우는 임태산 같은 놈들은 양아치 같은 짓이라고 힐난할 것이었다.

그러나 용식은 어차피 조폭이면 다 같은 조폭이지 조폭의 세계에서 도리를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는 놈이 장땡이다. 그것이 용식의 신조였다. 그렇기에 어린애를 칼잡이로 내세워 등 뒤를 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범진 또한 용식이파에서의 생활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범진은 보살핌이 원래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쓰레기 같은 음식일지라도 배를 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 더러운 숙소일지라도 춥지 않게 잘 수 있는 것, 상시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일만 잘하면 노상 구타당하지는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해서 마음의 허기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항상 가슴이 텅 빈 듯 허전하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뱃속에 들어앉은 아귀는 언제까지라도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범진은 씹고 있던 것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어떻게 생긴 놈입니까?”

“보면 바로 알아볼 거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팔뚝이 남들 세 배쯤 되니까. 얼굴은 꼭 몽골 씨름꾼처럼 험하게 생겼고.”

“그래 봤자 칼 앞에 장사 있겠습니까?”

범진은 두려운 기색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니 말이 맞다!”

범진의 맹랑한 답에 용식은 무릎을 치며 껄껄 웃었다.

와룡회와 붙는 날은 태산건설의 갑작스러운 급습으로 용식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

“형님, 태산건설 애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벌써 2층까지 밀고 올라왔습니다.”

밖이 시끌시끌하다 싶더니 조직원 하나가 우당탕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다급히 알렸다.

“이, 이렇게 빨리?”

용식의 눈에 두려움이 서린다. 부하들에게는 붙어볼 만하다고 자신했지만 와룡회에서 선전포고를 한 날부터 상시 범진을 곁에 두고 있었다. 범진은 용식이 겁을 내고 있음을 진즉에 알아보고 얕보는 마음이 들었다.

와룡회가, 임태산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한 것이 당시의 범진은 기술이 무르익고 치기가 하늘을 찔렀던 터라 칼 한 자루만 쥐고 있다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범진은 밥값이나 해볼까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그, 그래?”

더 어렸을 적에는 형님들의 싸움에서 틈을 보고 있다가 뒤나 곁을 파고들어 상대를 찌르는 전술을 주로 썼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도 않을뿐더러 범진도 그 대단하다는 임태산과 정면 대결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용식 역시 범진이 자신의 곁을 계속 지키도록 하기보다 먼저 나가 임태산을 막아줄 수만 있다면 그 편이 나을 것이다 생각했다. 여차하면 도주할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다.

“범진이가 임태산이랑 붙도록 엄호해라.”

용식이는 집무실에 모여 있던 호위들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예, 형님!”

호위들이 범진을 에워싸고 복도로 나갔다.

“김범진 나간다! 터줘라!”

호위 중 하나가 그렇게 외치자 복도를 빽빽이 막고 있던 어깨들이 양쪽으로 좌악 갈라지며 길을 내준다.

그 끝에서 범진은 태산을 보았다. 용식의 말처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남다른 체구도 체구였지만 거대한 아우라가 무시무시했다.

일순 위축되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범진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꺼내두었던 칼을 꺼내 들고 다짜고짜 태산을 향해 달렸다.

누구보다 날랜 발을 자랑하는 범진이다.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고 기습하려는 의도였다. 칼을 빼 들고 순식간에 가까이 육박하면 백이면 백 위축되어 헛발질을 하게 마련이었다.

범진이 달려들자 등 뒤에서 다른 조직원들도 와아~~!!! 하고 함성을 올리며 뒤를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의심할 만큼 빠른 범진의 속도와 새삼 등등해진 용식이파의 기세에 태산의 곁에 있던 수하가 더 당황해 다급히 태산을 불렀다.

“형님!!!!”

그러나 태산은 당황하지 않고 범진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씨익 미소를 머금으며 팔을 들어 가드를 올리고 범진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 하는 거지?’

주춤거리며 물러나거나 적어도 수세를 취할 거라고 생각한 범진은 잠깐 당황했다. 그 덕분에 태산이 휘두른 주먹에 하마터면 정통으로 맞을 뻔했다. 범진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태산의 주먹을 피해 복부로 파고들며 손에 든 단도로 태산의 복부를 난자했다. 예리한 칼이 무디게 느껴질 정도로 단단한 복부였다.

그래도 이 정도 칼에 맞았으면 뒤로 물러나거나 칼을 잡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틈을 보인 순간이 임태산의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태산은 물러나거나 칼을 잡지 않았다. 가드를 올린 그대로 바짝 다가와 간격을 줄이고는 그대로 범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태산의 배를 연달아 찌르고 있던 범진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다.

태산의 얼굴에서 회심의 미소가 어리는 순간 범진은 뒷골이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태산은 그대로 범진을 번쩍 들어 올린 후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작고 가벼운 범진은 거의 천장에 닿을 듯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이 가슴을 강타해 범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간신히 신음했을 뿐이다.

태산은 아랑곳없이 다시 범진의 멱살을 잡아 이번에는 벽으로 패대기쳤다. 태산은 범진을 장난감처럼 휘둘러 양쪽 벽으로 이리저리 집어 던졌다. 칼을 맞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완력이었다.

범진은 충격으로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 침대 위였다. 범진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만약 태산건설이 용식이파를 접수했다면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을 리 없다. 진즉에 어딘가 묻히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용식이파가 임태산을 막아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을 소모품 취급 하는 용식이 바로 병원으로 보내 제대로 치료를 받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병실로 쓱 들어온다. 범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임태산의 얼굴을 보고 간이 오그라드는 공포를 느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강렬한 두려움이었다. 압도적인 힘에 단숨에 제압되고 난 후라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범진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으려다 아픈 신음을 흘렸다.

“누워 있어라. 갈빗대가 몇 개 나갔단다. 뇌진탕 기미도 있고.”

범진은 태산의 강권에 슬그머니 다시 머리를 눕혔다. 임태산이 이렇게 멀쩡히 오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용식이파는 태산건설에 접수된 모양이다. 그런데 왜 자신을 살려두었을까?

범진은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으로 차마 태산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태산은 대수롭지 않게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몇 살이냐?”

“…여, 열여덟입니다.”

범진은 망설이다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작고 앳되어 보여서 더 어릴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나이가 있구먼.”

태산이 범진의 얼굴을 살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나를 찌른 근성은 대단하다만 아직 이 바닥에서 일하긴 어리구나. 집이든 학교로든 돌아가라. 어른이 되어도 이쪽 일을 하고 싶으면 날 찾아오고. 우리 사정 알고도 모른 척 치료해 주는 곳이 여기뿐이라 병원이 좀 허름하다. 지내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겠지만 퇴원해도 된다 할 때까지 푹 쉬다 가라. 병원비는 내가 낼 테니 걱정 말고.”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나가 버릴 기세라 범진은 그제야 다급히 태산을 돌아보았다.

“저, 저기…….”

태산이 돌아서려던 발을 멈추고 범진을 돌아보았다.

“용식이 형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나와바리 내놓고 물러나야지. 좋게 얘기할 때 말 안 들은 대가로는 싼 거 아니냐? 목숨 보전했으니. 조직은 쓸 만한 놈들만 남기고 해산시킬 거다.”

용식이파가 없어지면 범진은 갈 곳이 없었다. 불안정하게나마 자신을 감싸고 있던 울타리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범진은 태산과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공포를 느꼈다.

태산이 가만히 범진을 보더니 범진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물었다.

“너, 갈 데가 없냐?”

“예.”

“부모님은?”

“고압니다. 앵벌이 하던 것을 용식이 형님이 거둬주셨습니다.”

범진은 조금 기대감을 담아 태산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까? 칼부림을 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이렇게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다는 것은 칼잡이로 쓰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태산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의자에 와 앉았다.

“이름이 뭐냐?”

“김범진입니다.”

“범진이… 이름에 범이 들어가는구나. 내 아우인 재호도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가고 나는 범띠다. 인연이 있을 모양이구나.”

기대치 않은 따뜻한 말에 범진은 못내 당황했다. 평생 누구에게든 이렇게 다정한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일단은 치료 잘 받아라. 다 낫고 난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태산은 확답하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그 뒤로는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신 처음 태산과 마주쳤을 때 곁에서 호위하던 심복이 종종 들렀다.

“어따, 성님은 이런 눈빛 싸나운 꼬맹이가 뭐라고 자꾸 들여다보라시는 거여.”

재호는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히 범진을 챙겨주었다.

“병원 밥이 어디 먹을 게 있냐? 우리 성님 배는 헤집어놨어도 너는 내장이 다친 것도 아닌게 뼈 붙으려면 잘 먹어야 헌다.”

잘 먹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핀잔을 섞으면서도 들여다볼 때마다 꼬박꼬박 먹을 것을 챙겨 넣어준다. 서툰 보살핌이었지만 처음 받아보는 보살핌에 범진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재호의 아내가 끓였다는 곰탕은 이제껏 먹어본 어떤 밥보다도 따뜻하고 맛있었다.

드디어 퇴원 결정이 내려졌을 때 범진은 따뜻한 일상이 사라지는 아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재호가 사다 넣어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이대로 태산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데 태산이 병실 문을 열고 불쑥 나타났다.

“짐은 다 쌌냐?”

“…짐이라고 할 게 없어서…….”

범진은 우물쭈물 답하면서도 태산이 찾아준 것이 반가워 반색했다. 태산은 범진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가자.”

범진은 태산이 결국 자신을 데려가 주는 것인가 하고 두말없이 따라갔다. 하지만 태산이 범진을 데려간 곳은 의외로 근처 사우나였다. 태산이 보기에 그렇게 못 볼 꼴이었을까 싶어 범진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범진의 몸은 옷을 입었을 때 보이는 것보다 더 깡말랐고 온통 오래된 상처투성이였다. 굶주리고 학대받던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진 몸이었다. 범진은 그런 자신의 몸이 부끄러워 움츠러들었으나 태산은 묵묵히 범진의 등짝을 벅벅 밀어줄 뿐이었다. 굵은 때가 끊임없이 나와 범진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목욕이 끝난 후 범진은 재빨리 로커로 가 옷부터 입으려 했다. 얼른 몸을 가리고 싶었던 것이다. 뒤따라 로커로 다가오던 태산은 바지를 막 추켜올리려던 범진을 보고는 혀를 찼다.

“너 빤스가 그게 뭐냐?”

오래 입어 속이 비칠 듯이 얇아져 있는 데다 구멍도 몇 개 숭숭 나 있는 속옷은 스스로 생각해도 초라했다. 범진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바지를 추켜올렸다.

“재호가 속옷까지는 못 챙겼나 보군.”

태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카운터로 가더니 팬티를 한 장 사다가 범진에게 던져주었다.

“그걸로 갈아입어라. 안 보인다고 걸레짝 같은 거 입고 다니지 마라. 그것도 자존심이다.”

“예.”

범진은 고분고분 답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주는 태산에게 내심 감복했다.

“사우나 온 김에 머리도 좀 자르자.”

태산은 눈을 찌를 듯이 삐죽거리며 자라 있는 범진의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사우나에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오니 평상에 앉아 식혜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던 태산이 돌아보고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오~ 김범진! 의외로 인물 괜찮네. 이렇게 보니 꽤 잘생겼잖아?”

범진은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칭찬이라는 것을 제대로 들어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칼을 잘 다뤄서 용식에게 칭찬을 받은 적은 있지만 용식은 범진이 자신에게 쓰임이 되는 것을 기뻐한 것이었지 범진의 재능 자체가 기꺼워 칭찬한 것은 아니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칭찬이었지만 범진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기뻤다.

태산은 조심스럽게 옆에 앉는 범진의 입에 빨대를 꽂은 바나나우유를 물려주며 말했다.

“너는 덩치를 좀 키워야겠다. 사내는 스물 넘어서도 크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많이 먹어라.”

그것은 범진을 조직에 받아들여 키우겠다는 얘기일까. 범진은 한편으로는 기대하고 한편으로는 실망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우유를 단숨에 들이켰다.

“일단 밥부터 먹자. 밥 먹으면서 할 얘기도 있고.”

사우나에서 나와 태산은 범진을 근처 설렁탕집으로 데려갔다.

딱히 배가 많이 고픈 것은 아니었는데 일단 밥이 나오니 범진은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 범진을 가만히 보던 태산이 쯧쯧 혀를 차더니 수저 위에 깍두기 한 점을 올려주었다.

“천천히 먹어, 인마. 체한다.”

태산의 타박에 멈칫한 범진은 잠깐 먹는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어느새 원래의 속도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태산은 범진이 설렁탕 한 그릇을 국물까지 싹싹 비우기를 기다려 말을 꺼냈다.

“난 원래 뼈마디도 안 여문 놈들은 안 받는다.”

막 숟가락을 내려놓은 범진이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결국 거절인 건가. 범진의 매달리는 눈빛을 마주하고 태산이 곤란한 듯 웃었다.

“근데 뭐 갈 데가 없다니 별수 없구나. 아우들 숙소에서 같이 지내라.”

범진은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이렇게 진심으로 기쁘게 웃는 것은 평생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이내 범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형님.”

처음으로 태산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범진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따뜻한 인품을 가진 태산을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다 다짐했다. 평생 받아보지 못한 인간 대접을 이 사람만은 해주었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산이 짐짓 엄격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아직 조직에 받아들인 건 아니다.”

범진이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들고 태산의 말에 귀 기울였다.

“스무 살 되기 전까지는 조직 일에 나설 생각 말고 공부를 해라.”

뜻밖의 말에 범진이 얼떨떨해 되물었다.

“예? 공부요?”

“요즘은 건달도 무식하고 멍청한 놈들은 못 쓴다. 난 최소 고등학교 졸업장은 가진 놈들만 받아. 너, 공부는 얼마나 했냐?”

범진은 답을 하지 못했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을 뿐이다. 제대로 된 교육은 전혀 받아본 적이 없다. 한글과 셈만 겨우 깨쳤을 뿐이다.

“그럼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까지는 따라. 그러면 받아줄 테니까.”

태산의 말에 범진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란 것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태산의 지시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해낼 각오였다.

그렇게 와룡회 조직원들의 숙소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범진은 조직원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미성년자는 받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굴러 들어온 어린애인지라 고깝게 보는 눈도 있었지만, 누구도 크게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감히 태산에게 칼침을 놓은 미친놈인 데다 태산이 꽤 애착을 가지고 돌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지저분한 일을 뒤처리할 해결사로 키우고 있다는 뒷말도 있었다.

태산의 지시로 시작한 공부였지만 의외로 공부는 재미가 있었다. 그동안 전혀 해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오히려 흥미를 느꼈다. 어려운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태산의 명이다 생각하면 투지가 불타올랐다. 태산이 하라고만 했다면 전국 수석이라도 해냈을지 모른다.

태산은 범진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영리한 자식 놈을 보듯 신기해하고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두 번에 걸친 검정고시를 순식간에 통과하자 어쩐지 생각이 복잡해진 듯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어느 날 불쑥 물었다.

“너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없냐? 계속 공부하겠다면 내가 끝까지 밀어주마.”

태산은 범진의 머리가 아까워 다른 세계로 갈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범진은 추호도 태산과 조직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범진은 그런 말은 들은 적도 없다는 듯 그저 비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태산과 만난 지 약 1년 반이 지났을 때 3번의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고 일말의 미련도 없이 책을 정리하고 바로 공부를 접었다. 그것으로 자신을 떠나보내려는 태산에게 단호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 * *

범진이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한 19세 여름, 태산은 재호와 함께 일식집에 자리를 마련하고 범진을 불러냈다.

“너도 그동안 짬밥 좀 먹었고 시험도 다 마쳤으니 이쯤에서 입회시킬까 한다.”

“고맙습니다, 형님!”

태산의 선언에 범진은 감격해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이 뜨거워져 한참을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축하한다, 인마!”

재호가 그런 범진의 등을 요란하게 두드려 일으켜 세웠다. 고개를 일으킨 범진의 눈가는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범진은 태산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떤 조건이든 못 지킬까?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함부로 연장 꺼내지 마라.”

범진이 눈을 크게 뜬다. 자신의 가장 큰 쓸모는 솜씨 좋은 칼잡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칼을 쓰지 말라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나는 아우가 필요한 거지 칼잡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태산이 한마디 덧붙이자 범진이 그제야 태산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복했다.

“예. 알겠습니다, 형님.”

일단 대답은 했으나 범진은 끝내 토를 단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재호가 이놈 이거 맹랑한 놈일세 하는 얼굴로 범진을 보다가 태산을 다시 본다. 슬슬 기어오르는데 받아줄 거냐고 묻는 얼굴이다. 태산은 재호의 시선을 외면하고 짐짓 무심히 물었다.

“뭐냐?”

“형님이 위험하실 때는 허락 없이 칼을 뽑게 해주십시오.”

범진은 태산에게 가장 큰 쓰임이 될 자신의 칼을 이대로 썩힐 생각은 없었다. 대신 태산의 안전을 위해서만 쓰겠다고 결심했다.

태산은 범진의 답에 황당한 표정으로 재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재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그래, 그러마. 아주 든든하구나.”

태산은 선뜻 받아들였지만 재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타박했다.

“이놈이 햇병아리 주제에 꿈이 아주 크구마요. 이 물색없는 놈아, 성님 곁에는 항시 내가 있는디 니가 칼 뽑을 때까지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겄냐?”

태산은 큭큭 웃으며 범진에게 입회주를 따라주었다.

“와룡회 식구가 된 것을 환영한다.”

범진은 태산이 따라준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술병을 받아 태산과 재호의 잔에 차례로 술을 따랐다. 범진은 와룡회에 입회한 다음 해에야 비로소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 그 후 10년 넘게 태산의 곁을 가깝게 따르며 몇 번인가 태산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범진조차도 태산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 * *

와룡회 소유의 유흥업소 룸에서 이웅배 회장을 만나고 나오는 태산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재호가 태산의 곁으로 바짝 붙어 서서 방금 전 범진이 들어오며 보고했던 말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형님, 박 이사 지금 막 도착했답니다.”

“재수 없는 쌍판때기를 또 봐야겠구먼.”

태산은 낮게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재호와 범진이 바로 뒤를 따라붙는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저쪽에서 박중성 이사가 패거리를 몰고 나타났다. 검은 정장을 입은 어깨들에게 겹겹이 호위받으며 중성은 태산의 앞에 와 섰다.

“임 이사님, 웬일이십니까? 회장님이 오늘 임 이사님도 부른다고는 안 하셨는데.”

“회장님이 니한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야 허냐?”

태산은 눈을 부라렸지만, 중성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느물느물 웃을 뿐이다. 험상궂은 상판과 날카로운 눈빛은 태산 못지않다. 누가 저놈을 명문대 출신 엘리트라고 생각하겠는가?

“아그들을 많이도 데려왔네. 회장님 뵈러 오면서 뭘 이렇게 많이 끌고 왔어? 등 뒤가 서늘할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누굴 등 뒤에서 담그려는 거야?”

“말 골라서 하쇼.”

중성이 낯빛을 확 바꾸더니 이마를 들이밀며 위협하듯 가까이 선다.

무표정하게 태산의 곁에 서 있던 범진의 눈초리가 일순 사나워진다. 범진의 손이 슬그머니 허리 뒤쪽으로 향하자 재호가 급히 끼어들었다.

“하이고, 성님들! 한 가족끼리 왜 이러십니까? 회장님도 계시는데. 큰 소리 들어갈까 봐 무섭구먼요.”

재호는 서둘러 태산을 끌고 간다. 태산은 못 이기는 척 재호에게 끌려가면서도 계속 중성을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누그러지고 태산과 중성이 등을 돌리고 나서야 범진은 손을 허리춤에서 거두고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산의 뒤로 바짝 붙어 선다.

회장이 있는 룸으로 들어가려던 중성이 뒤돌아 가는 태산의 등 뒤에 대고 툭 던진다.

“그러는 임 이사님은 겁도 없이 둘만 데리고 다니시네요? 부디 밤길 조심하십쇼.”

“뭐여? 이 시불넘이!!!!”

태산이 바로 뒤돌아 달려들려는 것을 재호가 팔을 잡고 끌어당기며 눈치를 준다.

“성님, 참으쇼…….”

중성은 이미 룸의 문을 반쯤 열고 있다. 문틈으로 회장의 어깨가 힐끗 보이자 태산은 주춤하고 만다. 중성은 픽 웃고는 성큼 문 안으로 들어서며 들릴 듯 말 듯 한마디를 흘렸다.

“촌놈이…….”

태산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차마 회장이 있는 룸 안으로 뛰어들어 시비를 가리지는 못한다. 중성이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중성의 수하들이 복도 양옆으로 쭉 늘어선다. 태산은 씩씩거리며 돌아서 나왔다.

“형님 나가신다.”

재호가 주차장에 대기 중인 막내에게 전화해 차를 대라고 지시하는 동안 태산의 핸드폰에도 전화가 걸려왔다. 태산은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지만 전화를 받지는 않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전화는 이내 끊어졌으나 곧이어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읽는 태산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린다. 그 표정을 힐끔 바라보며 범진은 선화 누님에게서 온 문자임을 짐작한다.

사내라면 사랑하는 여자에게 좀 휘둘려도 괜찮지 않나 생각하는 범진이지만 태산은 그것이 영 자존심 상한지 좀처럼 선화를 아낀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가끔 보이는 저런 표정을 보면 태산이 선화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범진은 그런 속을 내색하지 않았으나 재호는 모른 척 넘어가 주지 않았다.

“형수님이셔요?”

재호가 느물느물 웃으며 물었다.

“형수는 무슨…….”

태산은 얼른 표정을 바꾸며 슬그머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곧 막내가 운전하는 차가 건물 앞에 와 선다. 재호가 차 문을 열며 묻는다.

“어디로 모실까라?”

태산은 잠시 미간을 모으고 고민했지만 결국 선화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청담동 오피스텔로.”

태산의 말에 재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태산이 먼저 차에 오르고 재호가 이어서 탄 후 범진도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했다.

“어딜 따라와? 너까지 갈 필요가 있냐?”

재호의 만류에 범진은 뚱하니 돌아보았다. 태산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범진이었다.

“그래, 범진이 너는 숙소 들어가서 쉬어라. 애들 맛난 것 좀 사주고.”

태산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를 집히는 대로 꺼내어 범진에게 쥐여주었다. 떨떠름하게 받는 범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태산이 조금 멋쩍게 덧붙였다.

“수고혔다.”

태산의 살가운 말에 뚱하던 범진이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수줍게 웃었다. 방금까지 살벌한 눈빛으로 냉랭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숫기 없는 여느 청년처럼 말간 얼굴이 된다.

“예, 형님.”

범진은 들릴 듯 말 듯 답하고는 바로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태산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90도로 허리를 접고 배웅했다. 마침내 고개를 든 범진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지금 따라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불안을 떨쳐내려 애쓰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간신히 돌렸다.

그렇게 떠난 재호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태산은 온몸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다시 만났다.

범진은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끝내 따라갈 것을.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따라갈 것을.

“…형님… 형님… 일어나십시오. 이겨내셔야 합니다…….”

범진은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고통으로 신음하는 태산의 병상을 지키며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고통인지 모른다. 그러나 범진에게는 태산이 필요했다. 태산만이 삶의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적인 소망일지라도 어떻게든 태산이 소생하기만을 바랐다.

범진은 세상의 수많은 신들에게 수없이 빌었다. 어떻게든 태산을 살려달라고.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살아오게만 해준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지옥에 떨어뜨리더라도 달게 감수하겠노라고.

하지만 무심한 신은 결국 태산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때까지 간신히 버텨왔던 범진은 태산의 사망 선고가 내려지자마자 완전히 무너졌다. 광인처럼 술을 마시고 세상을 원망했다.

태산의 사고 직후 병원으로 달려왔다가 거의 실신할 듯 충격을 받고 그 후로 다시 찾아오지 않는 선화는 차라리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지경이 되어 누워있는 것을 보는 고통이 어떠할 것인가. 범진조차도 그렇게 고통스러웠건만.

하지만 형제가 죽었는데도 무심한 웅배의 태도는 참을 수 없었다. 그런 것이 조직을 다스리는 자의 의연함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적어도 태산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태산이었다면 형제의 죽음에 진심으로 비통해했을 것이다.

더욱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박중성이 사주한 살인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정황이 있건만 이웅배는 그런 가능성에서 눈을 돌리고 오히려 박중성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부디 밤길 조심하십쇼.]

범진은 태산의 빈소에서 인사불성으로 취해 사고 당일 박중성이 한 말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어떻게든 그놈을 죽여 원수를 갚고 나도 죽자.

그런데 그런 결심을 한순간 태산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범진에게 다시 돌아왔다. 생전에 태산과 앙숙이었던 젊은 검사, 강바른의 모습으로.

“범진아, 너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냐?”

“…누군데, 니가?”

“나다, 임태산.”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범진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모습으로든 태산을 살려달라고 수없이 기도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어떤 짓궂은 신이 이런 얄궂은 방법으로 범진의 기도를 들어준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 * *

범진은 연단 위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태산을 바라보며 감격에 젖었다.

반신불수가 되더라도 태산이 살아만 있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신은 태산에게 생각지도 않은 새 인생을 선물했고 심지어 대통령이 되는 미래까지 안겨주었다.

태산의 곁에서 여기까지 오며 범진도 적잖은 성취를 거두었다. 항상 허기에 시달리던 앵벌이 고아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미래였다. 태산의 죽음 이후 생을 포기하려 했던 범진에게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인생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여한이 없다. 일생 따라다니던 허기가 비로소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한 감회에 눈시울을 붉히는 범진에게 병천이 슬그머니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성님도 이제 솔찬히 나이가 드셨나 봅니다.”

범진은 손수건을 받아 얼른 눈 주위를 눌러 닦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불퉁하게 대꾸했다.

“늙은이 취급 마라. 액면가는 니가 훨씬 더 들어 보인다.”

병천은 킬킬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요. 우덜도 이제 솔찬히 나이를 먹었구마요. 그동안 참 별별 일들이 다 있었는데 우째 여까지 와부렀네요. 회사도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크게 키웠고.”

병천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덧붙이는 것이었다.

“태산이 성님도 하늘에서 보시면 자랑스러워하시겄지라?”

비록 하늘이 아니라 강바른 대통령이 되어 저기 군중 앞에 서 있지만 병천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범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그러실 거다.”

범진은 그렇게 답해놓고는 문득 말했다.

“강바른 대통령 당선 기념으로 떡값이라도 돌릴까?”

“그게 무슨 말씀이셔라? 아니, 강바른이 대통령이 되얐는디 우리가 누구한테 로비를 한단 말씀이요?”

“그 떡값이 아니라 직원들에게 보너스라도 쏘자는 말이다.”

“아~ 그 떡값 말이요? 직원들이야 보너스 받으면 대통령 당선 턱이 아니라 동네 똥개 생일 턱이라도 무조건 좋다고 하겄지라.”

병천이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일월비입니다.

지켜봐 주신 독자 여러분 덕에 ‘검사가 법을 모름’이 드디어 완결을 맞았습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저도 법이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악인들을 초법적인 수단을 통해서라도 처단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바람으로 탄생시킨 인물이 바로 무법검사 강바른(임태산)입니다.

그럼에도 초법적인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제 마음속 양심의 소리가 이 무법검사의 폭주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나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 안소영 검사 캐릭터입니다.

강바른(임태산)과 안소영은 그렇게 저의 내면의 두 소리를 반영한 인물입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도 강바른(임태산)과 안소영이 끊임없이 싸웠을 테지요. 강바른(임태산)의 손을 들어주신 분도, 안소영의 손을 들어주신 분도,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었던 분들도 있을 겁니다.

처음 집필하면서는 태산의 전사를 꽤 길게 서술했었습니다. 하지만 초반부가 너무 늘어지는 느낌이 들어 모두 잘라내고 말았는데 덕분에 범진이 태산의 귀환을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댓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잘라냈던 전사를 범진의 시각으로 다시 구성해 3편의 외전을 덧붙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설명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힘든 시기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으실 줄 압니다.

이 또한 금방 지나가리라 믿고 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곧 다음 작품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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