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법무부장관이 법을 모름
“지우 또 사고 쳤지?”
“사고까진 아니고 살짝 부딪쳤어.”
“주의는 줬어?”
“응.”
은섭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수빈이 눈을 흘겼다.
“제대로 혼을 내. 당신은 지우한테 너무 오냐오냐해서 문제야.”
“주의 줬다니까.”
은섭이 웃으며 곤란한 투로 답했다. 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젠 혼자서도 안전벨트 풀 줄 알아서 차만 세우면 바로 뛰쳐나가잖아. 깜짝 놀랐네. 쟨 왜 저렇게 성질이 급한가 몰라.”
“누굴 닮았겠어?”
“날 닮았다는 거야?”
은섭의 농담에 수빈이 눈을 흘겼다. 그사이 지우는 벌써 빈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빈이 그런 지우에게 다가가며 타박했다.
“지우야, 천천히 좀 다녀. 엄마 주차하는 동안을 못 기다리니?”
수빈과 함께 자리로 가려다 은섭은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문 앞에서 지우와 부딪친 여자가 카페 앞에서 일행과 함께 뭐라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뒤로 돌아서 있어 여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실루엣이 눈에 익다.
선화를 닮았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던 데다 아이에게 신경 쓰느라 생김새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까 마주쳤을 때도 얼핏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은섭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처음 선화를 만나 이런저런 것들을 배웠을 때가 이미 20년도 더 전이다. 어려 보이는 외모지만 그 당시에도 선화는 어리지 않은 나이였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저런 얼굴일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얼굴이 닮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은섭은 돌아서 가족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지우는 뭐 마실 거야?”
“쿠앤크 스무디. 치즈케이크도 시켜도 돼?”
“그러렴”
웃으며 선뜻 답하는 수빈을 보고 은섭은 대체 누가 오냐오냐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수빈이 그런 은섭을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은 뭐 마실 거야?”
“스페셜티로 마셔야지. 그게 퀄리티를 잘 유지하고 있는지 파악하기엔 제일 좋으니까. 과테말라로 할까?”
강바른 검사가 비밀 수사의 대가로 차려준 카페를 기반으로 은섭은 성실히 일했다.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사업에 꽤 소질이 있었던 모양인지 카페는 점점 번창했고 분점도 하나둘 늘어갔다. 그러다 결국은 커피 체인까지 창업하게 된 것이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규모 프랜차이즈에 밀리지 않기 위해 은섭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업무 중에 메뉴 개발과 가맹점 관리에 힘쓰는 것은 물론이고 휴일에도 커피를 마실 일이 있으면 꼭 가맹점 매장을 찾아 서비스를 점검하곤 했다. 오늘도 가족과 외출을 하는 길에 커피를 마시고 가려고 들른 것이다.
“아무튼 휴일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다니까. 드라이브 가자더니 일하러 나온 것 아니야?”
은섭은 쑥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본점이잖아. 여긴 처음 새 인생 시작한 곳이라 어쩐지 애착이 가서. 틈만 나면 들여다보고 싶어진단 말이야.”
“하긴. 자기랑 나랑 극적으로 재회한 곳도 여기였으니까.”
아내는 이해할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나도 스페셜티로 해야겠다. 난 예가체프.”
“그냥 당신 마시고 싶은 거 마셔도 되는데.”
“아니야. 나도 스페셜티 좋아해.”
달달한 라떼류에 크림을 듬뿍 올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의 취향을 꿰고 있는 은섭이다. 은섭의 모니터링을 도와주려고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시키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럼 라떼로 해. 라떼에도 예가체프 쓰니까.”
“그럴까?”
아내가 반색하는 기색을 보며 은섭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갔다.
“과테말라랑 예가체프, 쿠앤크 스무디랑 치즈케이크 주세요.”
“과테말라, 예가체프, 쿠앤크 스무디, 치즈케이크 맞으십니까?”
“예.”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은섭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을 마친 후 픽업대 앞에 서서 직원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알바생들은 은섭이 프랜차이즈 업체 사장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메뉴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오갔다. 숙달된 손놀림으로 빠르게 진행하는 직원들을 보며 은섭은 교육이 잘되어 있구나 하고 내심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은섭은 왼손으로 트레이를 꼭 쥐고 오른팔 전체로 반대쪽을 받쳐 들었다. 오른손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탓에 무거운 물건을 안전하게 들려면 어쩔 수 없었다.
꾸준히 재활치료를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손가락을 섬세하게 조작해야 하는 일이나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도 이제는 꽤 적응한 탓에 일상에 큰 불편은 없었다. 아내도 은섭의 장애를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다만 더 이상 장갑을 끼지 않는 오른 손등 위로 큰 흉터가 가로지르고 있어 이따금 과거의 사건을 되새기게 할 뿐이다.
음료를 가지고 돌아오니 아내가 신문을 들춰 보고 있었다.
“웬 신문이야?”
“자리에 있던데? 누가 두고 갔나 봐.”
은섭은 아내가 보고 있는 신문을 넘겨다보았다.
[강바른 법무장관 지명, 청와대 “개혁 성과 기대한다.”]
[강바른 법무장관 후보자 청문회 준비 돌입]
은섭은 강바른의 사진과 함께 크게 찍힌 타이틀을 보고는 눈이 커졌다. 바로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거 나 좀 줘봐.”
은섭은 아내에게 신문을 받은 후 자리에 앉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강 검사가 정치에 투신한 후 지난 10년간의 행보야 뉴스를 통해 계속 접해왔지만 이제 막 쉰이 된 젊은 나이에 법무부장관에 지명되다니 새삼 놀라웠다.
수빈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기사에 정신이 팔린 은섭을 새삼 바라본다. 은섭이 커피를 앞에 두고도 다른 곳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은섭은 강바른 의원이 검사이던 시절부터 그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넋을 잃고 보았다. 언젠가 강바른 팬이기라도 하냐고 농담처럼 물었을 때 은섭은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예전에 좀 알던 사이라서.]
처음에는 오른손에 장애를 입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은섭이 내놓는 답처럼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는 일종의 농담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장애를 입게 된 이유도, 강바른과 알던 사이라는 것도 그저 농담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드는 것이었다.
은섭은 마약조직에 잠입했다 린치를 당했다고 말했고 강바른 검사는 인천지검에 근무하던 시절 마약전담반에 몸담았었다고 한다. 은섭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두 사람 사이에 연결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은섭의 말이 곧이곧대로 다 믿어지지는 않았다. 수빈은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일지 몹시 혼란스러웠다. 적어도 은섭이 범죄에 연루되어 강 검사를 만났던 것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설마하니 범죄자와 검사로 만난 사이라면 저렇게 호의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수빈은 복잡한 내심을 숨기고 슬쩍 물었다.
“강바른 의원 장관 임명 될 것 같아?”
“모르지. 야당에서 부담스러워하는 인물인 만큼 어떻게든 청문회 통과 안 시키려고 할 테지만… 정진웅 대통령이 워낙 강성이니 국회에서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 안 한다고 해도 임명 강행할 수도 있고.”
“청문회 통과 안 시킬 수가 없지 않을까? 이제까지 별다른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잖아. 그만큼 흠이 없는 인물이라고 다들 입을 모으던데?”
“흠 없는 인물이 어딨어? 오히려 치명적인 게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
은섭은 강 검사가 마약밀매업자인 최성일에 대한 폭행치사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법원은 폭행 혐의만을 인정하고 사망과의 인과관계는 인정하지 않았다. 덕분에 선고유예에 그쳤지만 은섭은 강 검사가 최성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닌가 내내 의심스러웠다. 더구나 당시 강 검사는 은섭이 최성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믿고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고 했다.
뭔가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는 듯한 은섭의 답에 수빈은 고개를 갸웃한다.
“당신 이 사람 지지하는 거 아니었어? 꼭 미끄러지길 바라는 사람처럼 말하네.”
“지지하는 거 맞아. 누구보다도 장관에 임명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러니까 더욱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야.”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얌전히 앉아 있던 지우의 인내심은 부모가 자기들끼리만 한참을 얘기하자 금방 바닥나 버렸다.
“재미없어. 엄마 아빠만 아는 얘기 하지 마.”
지우가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리자 수빈이 웃으며 대꾸했다.
“어이쿠~ 알았네요, 공주님. 치즈케이크 맛있어?”
“응!”
활짝 웃으며 답하는 지우의 얼굴을 은섭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비로소 신문을 접었다.
* * *
“조현영 한성그룹 총괄 회장님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유일의 대기업 여성 그룹 총수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젊은 여성이 그룹 총수인 탓에 한성그룹은 여성 임원진의 비율이 타 기업에 비해 높은 편이고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요.”
인터뷰어가 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영은 일단 비즈니스적인 미소로 대응하고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현영은 모 패션잡지와의 인터뷰 자리에 와 있었다. 시사잡지나 주부 대상 잡지가 아니라 트렌드를 선도하는 패션잡지와의 인터뷰라는 점이 파격이었다. 인터뷰 후에는 화보 촬영도 잡혀 있었다.
현영은 공식 석상에서도 기존의 여성 CEO들처럼 엄숙한 스타일을 취하지 않고 다소 전위적이고 과감한 패션 스타일을 선호했다. 중년의 나이까지 모델 뺨치는 피지컬에 화려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스타일도 꽤 잘 어울렸다. 게다가 한성그룹의 젊은 회장이라는 유명세까지 더해 현영의 패션은 언론에 사진을 찍힐 때마다 화제가 되었다.
대중들은 현영의 스타일을 선망했지만 그렇다 해서 완판 행렬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현영은 흔한 기성복이라면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라 해도 절대 걸치지 않았다. 대신 파리나 뉴욕의 소호 거리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숍을 선호했다. 시즌마다 해외로 나가 손수 고른 옷을 공수하는 일정을 공식 일정 사이에 반드시 끼워 넣었다. 현영의 입맛에만 맞추면 까다로운 부호들의 심미안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한 디자이너들이 공식적으로 디자인을 내놓기 전에 현영에게 먼저 옷을 보내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돈이 있어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옷이었으므로 완판이 될 수가 없었다. 대중들은 같은 옷 대신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찾기 시작했고 그럴듯하게 카피한 보세 제품들이 엉뚱하게 완판되기도 했다.
현영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연예인을 뛰어넘는 유명인이자 패션 피플이었다. 그러니 패션잡지와 인터뷰하고 화보를 찍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근무 환경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출산휴가, 육아휴직, 직장 보육 등 아이를 키우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부터가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워킹맘이기도 하고요. 그동안 직장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에게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낭비되고 있던 인력을 십분 활용해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어가 고개를 끄덕인다.
“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택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래서인지 조현영 회장님이 취임하신 이후 한성그룹의 이미지가 젊고 진취적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리는데요. 그 전까지의 한성그룹 이미지는 다소 올드하고 보수적이지 않았습니까? 조부이신 조재용 회장이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독재적인 경영방식을 유지해 오셨고요.”
슬그머니 들어온 공격에 조현영은 미소를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 * *
“그 전까지의 한성그룹 이미지는 다소 올드하고 보수적이지 않았습니까? 조부이신 조재용 회장이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독재적인 경영방식을 유지해 오셨고요.”
대놓고 독설을 하지는 못했으나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인터뷰어의 의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현영은 입이 근질근질해 보이는 인터뷰어 대신 자신이 먼저 단도직입으로 말을 꺼냈다.
“선대 회장님께서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하신 분이죠. 하지만 그와 더불어 정경유착, 부정부패, 기업 자산의 사유화 등 어두운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영이 선선히 인정하고는 덧붙였다.
“시대의 변화를 포착하지 못한 경영진들이 구태의연한 경영방식을 지속하는 바람에 한성그룹은 한때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숙부 일가가 법적 처벌을 받고 그룹경영에서 물러난 것은 저에게도 큰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어두운 과거를 털어내고 투명한 경영을 통해 한성그룹을 어느 기업보다도 정직한 기업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숙부가 경영 일선에서 밀려난 것을 안타까워하는 투였지만 실은 과거의 과오를 모두 숙부에게 떠넘기는 말이었다. 숙부 이전 세대와 확실히 선을 그음으로써 한성그룹의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의도다.
인터뷰어는 현영의 말에 의뭉스럽게 웃었다.
“역시 한성그룹의 이미지가 크게 바뀐 것은 조 회장님의 노력 덕이었군요.”
현영의 의도를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이쯤에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겠다는 뉘앙스다.
“아이들 얘기도 하셨는데요. 두 아이를 키우면서 대기업을 경영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남편이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외조를 잘해주시나 보네요.”
현영은 그저 미소 지었다. 사실상 집안일과 육아는 맡아서 해주는 고용인들이 있었다. 남편은 그저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고 딱히 현영을 도와주는 일은 없었지만 현영 쪽의 활약이 더 돋보이는 탓에 외조를 받고 있다는 오해를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해로울 것 없는 오해라 현영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큰 잡음 없이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인터뷰가 마무리된 후에는 화보 촬영이 이어졌다. 메이크업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어 가며 카메라 앞에 서 포즈를 잡은 현영을 카메라에 담으며 사진작가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훌륭하네요. 현역 모델들 뺨치겠는데요? 어지간한 배우들보다 표현력이 좋아요.”
촬영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한 아첨이 다소 보태지기는 했으나 작가는 꽤 진심으로 칭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영은 어린 시절부터 평생을 누구보다 주목받는 위치에서 살아왔으므로 카메라 앞에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한 누구나 자신을 우러러보고 선망한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다. 상당한 외모에 당당한 아우라까지 더해지니 그 능란함은 경력 짧은 햇병아리 연예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긴 시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촬영 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인터뷰어가 촬영을 마치고 일어서려는 현영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배려해 주셔서 아주 편안한 인터뷰였어요.”
“기사 마음에 드시면 또 종종 부탁드립니다.”
인터뷰어가 현영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현영이 명함을 받아 들자 인터뷰어가 몸을 기울여 오며 은밀히 물었다.
“이번에 강바른 의원이 법무부장관 내정자가 되셨던데…….”
선대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던 현영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인터뷰어는 현영의 불쾌해하는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
“아무래도 피는 못 속이는 모양입니다. 강 의원도 미남이고 한 스타일 하시잖아요? 강 의원과도 인터뷰 자리를 한번 가졌으면 하는데 좀처럼 섭외가 힘들어서요. 혹시 말씀 좀 잘해주실 수 없을까요? 함께 커플 화보를 찍을 수 있으면 더 좋겠고요.”
애초에 이 잡지 편집장은 현영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며 연예계 인사가 아닌 현영의 화보를 싣는 것이 대단한 파격인 양 얘기했었다. 그런데 실은 바른에게도 섭외 요청이 갔다가 거절당했다는 건가. 자신이 강바른보다 더 섭외가 쉬운 취재원 취급을 받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구나 원 플러스 원으로 끼워 파는 물건 취급 하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현영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강 의원과는 그런 부탁을 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요.”
현영은 자리에서 일어서 대기실로 돌아가며 손아귀에 든 인터뷰어의 명함을 구겨 버렸다. 편집장의 간곡한 인터뷰 요청을 수락하며 조금 우쭐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 후회될 뿐이었다. 자신을 모욕적으로 취급한 이 잡지와 다시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 결심했다. 아니, 한성그룹 계열사의 광고조차도 절대 넣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 * *
“강바른 후보자, 시력 미달로 군면제를 받았네요.”
“예, 맞습니다.”
국회에서 열린 강바른 법무부장관 지명자의 인사청문회 첫 질문은 군대 문제로 시작했다.
“이렇게 보기에는 전혀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요.”
“후에 일상생활이 크게 불편해 시력교정수술을 받았고 예후가 좋았습니다.”
바른의 몸에 들어온 후 신체가 초인적으로 회복되면서 시력도 자연스럽게 좋아진 것이었지만 그렇게 답할 수는 없어 태산은 적당히 꾸며냈다.
질문을 던진 야당 의원이 쯧쯧 혀를 찬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학교 나와서 사법시험까지 붙은 사람이 눈이 좀 나쁘다고 군대를 안 가다니 국민들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군대를 다녀온 태산으로서는 바른이 군면제를 받은 일로 자신이 추궁을 받다니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에게 군 문제는 민감한 것일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답했다.
군면제를 받은 과정에 딱히 부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군 문제는 태산이 성실하게 답변하자 어물쩍 넘어갔다.
“강바른 후보자는 인천지검 마약전담반에 재직 당시 독직폭행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바 있지요?”
“예.”
“당시 피의자는 그로 인해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최성일 사망 사건이 끌려 나왔다. 다른 흠이 없는 강바른 후보에게 가장 첨예한 논점이 될 주제였다. 태산 역시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 바 아니었기에 침착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실족으로 인한 사고사였습니다. 체포 과정에서 부득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폭행이었고 사망과는 인과관계가 없음을 재판부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사망과 인과관계가 없다고 해도 피의자를 폭행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야당 의원이 동의를 구하듯 인사청문회장의 다른 의원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수사기관은 피의자를 체포함에 있어서 철저히 합법적인 수단만을 사용해야 합니다. 수사기관에게는 강제적인 조치가 인정되는 만큼 위법한 수단을 이용한다면 자칫 국민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포 과정이었다고 해도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수사기관의 도덕성을 국민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의원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상대는 총을 든 마약사범이었습니다.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강 후보자의 항변에 지나지 않고요. 피의자가 사망해 버린 이상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었지 어떤지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법원이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인과관계를 인정할 증거가 없었다는 것뿐이지 실제로 인과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야당 의원 하나가 격앙된 어조로 외치자 인사청문회장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랭해졌다. 동료 야당 의원들은 발언을 한 의원을 노려보며 저놈이 같은 편인가 X맨인가 하는 얼굴이었고 의원 본인조차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당 의원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사태를 관전하고 있었다.
태산이 조금 노기를 띠고 되물었다.
“지금 말씀은 검사가 피의자를 살해하고 은폐했는데 법원이 무능해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법조계에 대해 심각한 불신을 조장하는 발언입니다. 저는 한때 법조계에 몸담았었고 지금은 법무부장관 지명자로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 제 입장에서 듣기에 몹시 모욕적인 말씀입니다. 방금 하신 발언 취소해 주십시오.”
이전까지는 겸허히 비판을 받아들이며 낮은 자세를 취하던 태산이 적극적인 공세로 돌아섰다.
발언한 의원이 곤란해하며 진땀을 흘리자 얼른 다른 야당 의원이 화제를 돌렸다.
“강바른 후보자는 아직까지 미혼이지요?”
“그렇습니다.”
“보통 정치인은 안정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특히 남성 정치인은 결혼해서 배우자가 있는 쪽이 정치 활동에 좀 더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강 후보는 늦은 나이까지 미혼에 무자녀인 상황인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무슨 문제 말씀입니까?”
태산이 날카롭게 되묻자 말을 꺼낸 의원이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이를테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든가… 성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든가.”
“말씀하신 것 같은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태산은 별 시답지 않은 질문이 다 있다는 듯 잘라 말했다.
“단지 검사로 재직 중일 당시에는 업무에 바빴고 정치에 투신한 이후에는 정치활동에 바빠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날 여유가 없었습니다. 국가와 결혼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혼에 자녀도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여러 정책문제를 판단함에 있어서 국민의 입장에 공감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책임감도 그만큼 약할 수 있겠고요.”
“꼭 당사자가 되어야 문제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자리에 계시는 의원님들 대부분은 노동문제나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태산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게다가 책임질 가솔이 없는 것이 친인척의 부정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태산의 답에 야당 의원들이 웅성거렸다. 처가 식구들의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여부로 물의를 빚고 있는 현 검찰총장을 노리고 하는 말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히야~ 강 의원이 아주 말 한번 속 씨원하게 하는디라~”
태산지주 회장실에서 범진과 함께 국회 방송 생중계를 보고 있던 병천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청문회가 무슨 소개팅 자리도 아니고. 결혼을 했느니 마느니 애가 있느니 없느니 그런 쓰잘데기없는 질문 나부랭이나 하고 자빠졌는 국회의원 놈들헌티 일침을 독하게 놔버리는구마요. 이대로 장관 되불겠는디라.”
“돼야지.”
범진은 웃으며 그렇게 답하고는 화면을 보던 눈을 손목시계로 떨어뜨렸다. 시간을 확인한 범진이 아쉬운 듯 화면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출발해야겠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봤구마요. 청문회가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소?”
병천이 범진을 따라 일어나더니 기세 좋게 외치며 앞장섰다.
“형님, 아니, 회장님! 어여 가서 HS홀딩스 싹 접수하고 오십시다!”
병천이 무슨 조직 나와바리 싸움처럼 말해 범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그러자.”
범진은 병천이 열어주는 회장실 문을 나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병천과 함께 나란히 차 뒷자리에 타자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차를 출발시켰다.
* * *
범진은 병천과 함께 HS홀딩스 본사 건물로 향했다. 오늘은 이사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범진은 태산을 도와 현영에게 한성그룹의 경영권을 넘겨준 이후 HS홀딩스의 사외이사가 되었다. 공직자라 기업경영에 개입할 수 없는 태산을 대신해 사외이사로서 한성그룹 경영에 참여해 왔던 것이다.
범진은 지난 10년간 주인호 이사를 비롯한 이사들을 꾸준히 포섭해 태산의 편으로 만드는 동시에 현재 태산건설 대표직을 맡고 있는 병천도 사외이사로 가담시켜 표결권을 더했다.
오늘은 그동안 비밀리에 행사해 왔던 태산의 영향력을 한층 더 도약시키는 날이 될 것이었다.
범진은 이사회가 열리는 회의실로 들어서다가 주인호 이사를 마주쳤다. 범진은 조용히 머리를 숙였고 주 이사도 목례로 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 딱히 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전에 미리 합의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어서 한성그룹의 총괄 회장이자 HS홀딩스 대표이사인 조현영이 동생인 기영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섰다.
현영은 영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오늘 제기될 안건을 이미 알고 있는 탓이리라.
“이사회 시작하겠습니다.”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는 것이 관례이자 정관에도 규정된 사항이었으므로 현영이 회의를 주재했다. 주요경영사항 보고와 투자의결 등 일반적인 안건은 척척 진행되었고 마지막 안건만이 남았다.
“주인호 이사님이 오늘 상정할 안건이 있으시다고요.”
현영은 주 이사에게 발언권을 넘기고는 팔짱을 끼고 물러났다.
“오늘 제가 상정할 안건은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자는 것입니다.”
현영에게 이사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현영이 반론했다.
“경영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효율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대표이사가 의장을 맡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굳이 분리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요.”
“대표이사는 업무집행기관이지만 이사회는 의사를 결정하고 업무를 감독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지요. 집행자와 감독자는 분리하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는 것이 기업지배구조 모범 규준의 권고 사항이기도 하고요.”
주 이사는 담담하게 받았다. 병천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주 이사님 말씀이 맞소. 이사회는 경영진의 독단으로부터 주주를 보호하는 것이 임무가 아니겄어라? 견제가 될라믄 CEO가 아니라 외부 인사가 의장을 맡는 것이 옳지라. 오너경영인이 지 좆대로 경영하고 이사회가 거수기 역할만 하는 것은 다 옛날이야기 아니겄소.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방식이 어디 통한다요.”
병천이 흥분해 떠들자 주 이사가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박 이사님 표현이 조금 과격하기는 합니다만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두었을 때 경영감독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다는 것은 이미 진즉에 분리를 한 타 기업의 사례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사회의 독립성과 경영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꼭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사회의 독립도 좋지만 자칫하면 신속한 의사결정을 방해해 경영진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경영감독을 이유로 내세우는 주 이사에게 현영은 업무의 효율을 해친다고 주장하며 극구 반대했다. 말이 경영감독이지 이사회 독립을 통해 경영진보다 대주주의 영향력을 더 강화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 이사는 한성 계열사 사장이자 HS홀딩스의 사내이사다. 그런 그가 경영진보다 대주주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는 개혁안을 내놓았다는 것은 현영의 독주를 견제하고자 하는 외부인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영은 주 이사의 뒤에 버티고 있는 강바른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의견은 팽팽히 대립했고 토론을 통해서도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표결에 들어갔다.
“대표이사와 의장 분리안에 대해 찬성하시는 분은 거수해 주십시오.”
주 이사를 비롯한 사내이사 몇 명과 범진, 병천을 포함한 사외이사 전원이 거수했다. 사외이사들이야 자신들의 감독권이 강화되는 데 찬성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사내이사들까지 다수 넘어간 것을 보고 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 이 정도까지 이사들을 포섭했단 말인가.
하지만 사내이사들은 이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듯했다. 이사회가 경영감독을 해야 한다는 것은 정론이었고 대주주의 영향력이 강화된다 한들 회장인 현영을 위협할 대주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영으로서는 이 모든 일 뒤에 존재하는 바른의 존재감에 등골이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현영은 쓰린 속을 달래며 선언했다.
“가결되었습니다. 다음 주주총회 때 대표이사와 의장을 분리하는 내용으로 정관을 변경하는 안건을 상정해 표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주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는 안건이 아닌 한 주총에 상정되는 안건은 대체로 반대 없이 표결을 통과한다. 주총의 결의가 남았다고 해도 거의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새로 이사회 의장에 모실 분을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김범진 사외이사를 추천합니다.”
범진은 당황하거나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의연히 앉아 있었다. 그제야 현영도 눈치챘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의뭉을 떨고 있었군.’
범진이 바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아채고 있었다. 바른에게 힘이 실릴 일이라면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리라 생각했는데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어서 내심 의아하던 참이었다.
“김범진 이사를 의장으로 추대하는 데 찬성하시는 분은 거수해 주십시오.”
분리안을 찬성했던 모든 이사들이 또다시 손을 들었다. 현영은 떨떠름하게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가결되었습니다.”
이사회를 마치고 병천과 함께 회의장을 나가려는 범진의 앞을 가로막고 현영이 인사를 건넸다.
“이사회 의장으로 추대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김 회장님.”
하지만 현영의 축하 인사에는 노골적인 비아냥이 담겨 있었다.
“이사회 의장 자리를 가져가셨으니 다음에는 또 뭔가요? HS홀딩스 대표이사 자리도 노리고 계십니까? 허수아비 하나 앉혀두고 한성그룹 전체를 주무르시려고요? 그건 본인의 야망인가요,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로 이러시는 건가요?”
점점 격앙되는 현영의 말에 범진은 대꾸하지 않고 등 뒤에 선 병천을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병천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현영의 옆을 지나 회의장을 나갔다.
“누나…….”
기영이 말리려는 듯 나섰지만 현영은 바로 쏘아붙였다.
“너도 나가 있어.”
기영이 망설이다 어쩔 수 없이 회의장을 나섰다. 다른 이사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현영은 범진을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회의장 문이 닫히자 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 회장님 뒤에 바른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습니다. 바른이는 김 회장님을 내세워 기어이 저에게서 경영권을 빼앗아 가려는 건가요?”
“너무 앞서가지 마십시오, 조 회장님. 지금 당장은 아니니까요.”
범진은 태연히 답했으나 현영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경영권을 빼앗아 가겠다는 말인가.
“강 의원님은 조 회장님의 경영권을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다만, 오너경영인이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시는 거지요. 때문에 조 회장님을 적절히 견제할 수단을 간구하시는 거고요. 합리적으로 경영을 하시는 한 경영권을 박탈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경영을 제대로 못 하면 축출하겠다… 그런 협박인가요?”
“강 의원님도 한성그룹의 대주주입니다. 경영진이 회사를 망친다면 본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대응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범진은 그대로 현영을 지나쳐 나가려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현영의 바로 옆에 선 범진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강 의원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겠다고.”
범진은 툭 던져놓고 그대로 회의장을 나갔다. 현영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자괴감에 입술을 씹고 있었다. 한성그룹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현영에게 경영권을 쥐여줌으로써 한성그룹을 차지한 사람은 결국 바른인지도 모른다.
* * *
[국회 인사청문특위는 강바른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경과보고서를 채택했다. 청문보고서에는 적격 및 부적격 의견이 함께 실렸다. 인사청문특위는 보고서에서 “강 후보자가 검사로 활동하면서 법적인 전문성을 인정받았으며 다수의 사건에서 의미 있는 수사 사례를 남기고 사법개혁에 기여하는 등 법무부장관에 요구되는 능력과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일부 위원은 후보자가 검사로 활동하던 시절 독직폭행으로 처벌받은 바 있어 법무부장관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을 갖춘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덧붙였다. 청문보고서 채택은 청문회 당시 독직폭행 문제를 강하게 추궁했던 자유대한당 일부 의원의 퇴장 속에 이뤄졌다.]
업무용 PC 화면으로 잠시 언론사의 기사를 읽고 있던 조규완 검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 정도 보고서면 대통령도 이의 없이 채택할 것이고 강바른 의원의 법무부장관 임명은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야당 의원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강바른 의원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한 야당 의원들에게 역풍이 불어 의원실 보좌진들이 연이은 항의 전화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야당 의원이라 해서 무조건 반대만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마침 내선이 울려 조 검사는 얼른 뉴스 화면을 끄고 수화기를 들었다.
[수석님, 영장 나왔습니다. 수사관님들 지금 출발한답니다.]
실무관의 보고를 들은 조 검사는 바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양복 상의를 챙겨 집무실을 나왔다. 부산하게 일어서는 수사관을 향해 조 검사가 말했다.
“같이 가입시더.”
“이번에도 현장에 같이 나가시게요?”
수사관이 물었다.
“예.”
조 검사는 짧게 답하고는 먼저 검사실을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수사 차량에 조 검사까지 올라타니 미리 타고 있던 검찰수사관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같은 검사실의 수사관이야 조 검사의 스타일을 익히 알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다른 수사관들에게는 책상물림인 일반 검사들과 달리 현장파인 조 검사가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질 만했다.
“영장 집행 하는 데까지 굳이 같이 안 가셔도 되는데… 가뜩이나 업무도 많으신데 지시만 내리셔도 저희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요.”
수사관 하나가 슬쩍 볼멘소리를 한다. 검사가 현장에 매번 동행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운 듯한 뉘앙스다.
“수사관님들을 몬 믿어서가 아이고요. 지도 검찰수사관 출신인데 설마 동료가 몬 미더워 그라는 거겠심니꺼. 현장에서 뛰는 게 버릇이 되 가 검사 되고도 발로 뛰어서 수사를 안 하믄 뭐 싸고 안 닦은 것모냥 찝찝해서예.”
조 검사의 농담 섞은 해명에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며 수사관들이 웃음기를 띤다.
“수사는 원래 발로 하는 거 아입니꺼.”
“그게 정론이긴 하지만 서류작업만 해도 워낙 바쁘니 조 검사님처럼 현장 다 같이 뛰는 검사는 좀처럼 없죠.”
“지보다도 훨씬 열혈인 분도 있었는데예. 지도 그분 하시는 거 보고 배운 겁니더.”
“조 검사님보다 열혈이라니 상상하기 힘든데요.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은사나 다름없지예. 그분 없었으면 지가 검사 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더.”
조 검사가 진지하게 하는 얘기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수사관 중 하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강바른 의원 법무부장관 될 것 같던데. 오늘 국회에서 인사청문회 보고서 채택되었다고 하더라고.”
“강바른이 되면 좀 시끌시끌해지겠지?”
“조금 시끄러워지는 정도가 아닐걸.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한번 크게 뒤집히겠지.”
은근한 기대를 담아 떠드는 검찰수사관들의 이야기를 조 검사는 모른 척 미소를 지으며 듣고 있었다.
* * *
[정진웅 대통령, 강바른 법무부장관 임명 재가]
대검찰청 배진만 반부패강력부장은 방금 전 뜬 뉴스를 핸드폰으로 확인하며 싱글벙글했다.
전화로 축하 인사를 전할까 하다가 배 부장은 망설였다. 자신이 아니라도 여기저기서 연락을 많이 받고 있을 것이고 취임 준비로도 바쁠 것이다. 더구나 검찰을 관장하게 될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에게 검찰조직원이 사사롭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조심스러움도 있었다.
배 부장은 결국 문자로만 인사를 남겼다.
[강바른 의원, 법무부장관 취임을 축하하네.]
잠시 후 바로 답장이 왔다.
[감사합니다. 언제 술이나 한잔하시죠.]
[나야 언제든 좋지.]
바빠서 시간 내기가 힘들 테지만 말만이라도 살갑게 해주는 것이 반가워 배 부장은 빙긋 웃었다.
누군가 쿵쿵 집무실 문을 두드려 배 부장은 고개를 들었다.
“예!”
배 부장이 대답하니 문이 열리며 구태호 마약과장이 성큼 들어선다. 구 과장은 입이 귀에 걸려서는 다짜고짜 물었다.
“부장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강 의원의 법무부장관 임명에 대한 소식을 말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배 부장은 계속 그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기 싫어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모른 척 되물었다.
“무슨 소식 말인가?”
“강 의원님 장관 되셨던데요.”
“아아~ 잘됐군. 검찰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겠는데? 물론 썩 환영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마는.”
구 과장은 얘기를 마치고도 나가지 않고 계속 싱글벙글하며 서성였다. 뭔가 그냥 얘기를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있는 모양이다. 우직하고 성실하긴 해도 다소 느리고 둔감한 편인 구 과장으로서는 유달리 흥분한 순간이었다.
“왜? 술 생각 나나?”
배 부장이 구 과장의 속을 짐작하고 웃음 지으며 은근히 물었다. 구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 축하주 한잔 안 할 수 없잖습니까?”
“그래, 그럼 마치고 한잔하지. 강 의원 본인을 부를 수는 없더라도 우리끼리 기분 내는 건 안 될 것 없지.”
배 부장은 그날 저녁 업무를 마친 후 구 과장과 함께 법조 타운의 실내 포차에 들러 술잔을 기울였다. 한참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배 부장을 보고 아는 척을 한다.
“어? 배 부장님 아니세요?”
고개를 들고 보니 막 주점으로 들어오던 여자 하나가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척을 한다. 사방에 산발로 뻗친 곱슬머리만 봐도 누군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장 시절에 직속 부하였던 전윤지 검사다.
“전 검사 아닌가? 여긴 웬일이야. 지금 남부지검에 있지 않았나?”
“친구가 중앙지검에 있어서요.”
전 검사의 등 뒤에서 남자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 친구도 얼굴이 익은데?”
전 검사가 킥킥 웃으며 타박했다.
“부하 얼굴도 모르세요? 서울중앙지검 최진우 반부패수사부장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최 검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각 지검의 반부패수사부와 강력부는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인 배 부장의 지휘 계통에 있긴 했지만 근무처가 다른지라 같이 일하는 직속 부하는 아니다. ‘뭔가 얼굴이 익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는 배 부장에게 최 검사가 먼저 말했다.
“강바른 의원님 인천지검 마약전담반에 계실 때 반장으로 계셨죠? 저도 그때 인천지검에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시 강바른 검사와 안소영 검사에게 종종 오가던 앳된 얼굴의 청년이 기억났다.
“아~~~ 그 친구였구먼. 강 검사랑 안 검사가 마약전담반에 오기 전에 함께 일했다던 형사부의…….”
“예, 기억하시는군요.”
최 검사가 반색하며 답했다. 안 검사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구 과장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 이렇게 마주친 이유를 짐작하겠네요. 부장님도 강바른 장관 소식 때문에 축하주 드시러 오셨죠?”
“하하하, 들켰나? 그럼 자네도?”
“네. 소식 들리자마자 바로 최 검사한테 연락해서 약속 잡았는데요. 그렇다면 같은 목적으로 모였으니 합석해도 되겠네요.”
전 검사가 일행인 최 검사와 구 검사에게 눈짓으로 동의를 구하고는 덥석 배 부장의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최 검사는 고개를 꾸벅꾸벅하며 구 검사의 옆에 앉았다.
“자네가 지금 서부지검 무슨 부에 있지?”
배 부장이 전 검사에게 새삼 물었다.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이에요.”
“자네가 부장이야? 벌써?”
“벌써라뇨. 이쪽은 후배인 주제에 차장급인 서울중앙지검 부장인데요.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라고요.”
전 검사가 최 검사 쪽을 눈짓하며 말하자 최 검사는 민망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제가 좀 어려 보여서 그렇지 적은 나이는 아닌데요.”
“어휴, 애 같은 얼굴로 그런 말 해봤자 설득력이 없네요. 넌 마흔도 넘은 주제에 언제까지 그렇게 귀여울 거야?”
“아, 누나. 진짜 자꾸 그렇게 애 취급 하면 저 정말 서운해요. 안 그래도 젊다고 무시하는 부하 검사들 때문에 죽겠다고요. 어떻게 권위를 세워야 하나 매일 골머리를 앓고 있다니까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귀여워하고 있는 걸 거야, 분명.”
전 검사는 싱글거리며 최 검사를 놀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40대에 차장급이라. 대단한데? 강바른 의원에 맞먹는 거 아닌가?”
배 부장의 대꾸에 최 검사가 손을 내저었다.
“에이~ 아니에요. 강 의원님은 마흔 막 넘어가셨을 때 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장 다셨고 저는 40대 중반인데요. 아무리 그래도 강 의원님은 절대 못 따라잡죠.”
“그러니까 비교 대상이 감히 강 의원님인 것부터가 재수가 없다고.”
전 검사의 구박에 최 검사는 뒷머리를 긁으며 허헛 웃었다.
배 부장은 검사들을 돌아보며 새삼 감회에 젖었다.
“일선에서 열심히 뛰던 자네들이 벌써 다 이렇게 부장급 이상의 관리직이 되다니. 게다가 강 의원은 법무부장관에까지 오르고.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구먼.”
배 부장의 말에 검사들도 함께 일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추억에 젖는다. 구 검사가 최 검사를 향해 슬쩍 물었다.
“저기… 안 검사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신답니까?”
안 검사의 부임지는 인사 철마다 꼭 찾아보아 지금은 서부지검 형사3부장으로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연락이 끊긴 지는 오래되었다.
그간 배진만 부장과는 몇 번 같은 지검에서 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안 검사하고는 영 인연이 닿지 않아 마약전담반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같은 지검에서 만난 적이 없다. 환송회 당시 안 검사에게 구애했다가 처절하게 차인 이후로 일부러 연락하거나 찾아가기도 애매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내막을 알 리 없는 최 검사는 무심하게 답했다.
“오늘 일이 바쁘셔서 좀 늦으신다던데요. 아마 몇 시간 있다가 오실 거예요.”
“여, 여기 온다고요?!”
구 검사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최 검사는 왜 그러나 하고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답했다.
“예, 저희가 대검 감찰부 시절에 강 의원님 밑에서 똘똘 뭉쳐 함께 일했던 삼총사거든요. 이런 소식 듣고 안 모일 수 있나요.”
안 검사가 온다는 얘기를 들은 직후부터 구 검사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순정을 알고 있는 배 부장만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최 검사가 문득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안 검사님 오신 모양이네요.”
구 검사가 잔뜩 긴장해 등을 굳히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던 최 검사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며 소리쳤다.
“안 검사님, 여기예요!”
구 검사가 최 검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가게로 막 들어서는 안 검사가 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총명해 보이는 눈빛과 반듯한 이마는 전혀 변하지 않아 구 검사는 조금 감동했다.
안 검사는 최 검사와 전 검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안 검사가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두 분도 같이 계세요?”
“우연히 만났네. 강 의원 덕분에 이렇게 왕년의 동료들이 다 같이 만나는군.”
배 부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 * *
“과중한 업무로 바쁠 텐데 이런 자리까지 불러내 미안합니다. 오늘은 일선에서 일하는 검사 여러분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 듣고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내주었으면 합니다.”
강바른 법무부장관이 부임한 후 처음으로 가진 일선검사와의 대화 시간이었다. 대화 내용은 유튜브로 생생히 중계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생중계되고 있다는 부담감에 서로 눈치만 살피던 검사들이 차츰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 형사부 검사들은 업무가 과중해 하루하루가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를 만들어 참석을 강요하는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형사부 검사들이 얼마나 바쁜지 전혀 모르시고 일방적으로 대화를 건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부임 전부터 강력한 검찰개혁을 하겠다고 선언하셨는데 열심히 일만 하고 있던 저희 일선검사들은 갑자기 멱살 잡힌 기분입니다. 왜 저희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그냥 일방적으로 대화하다가 화기애애한 척 사진 찍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시려는 의도라면 사양합니다.”
검사들의 반발에 처음에는 온화하게 시작했던 강 장관도 차츰 날을 세웠다.
“이 자리는 강요한 자리가 아닙니다. 사전에 불참을 원하는 검사는 의사를 밝히라고 했을 텐데요.”
“인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법무부장관이 주재한 자리에 감히 불참하겠다고 할 검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검사가 불퉁하게 답하자 강 장관은 매섭게 추궁했다.
“여러분의 신념은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까? 겨우 인사상 불이익이 무서워 내키지도 않는 자리에 억지로 참석할 정도 말입니다. 그래 놓고 어린애마냥 볼멘소리는 왜 늘어놓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불만이 있는 검사는 나가도 됩니다. 그로 인한 인사상 불이익은 전혀 없을 겁니다.”
강 장관의 매서운 추궁에 검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도 섣불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강 장관의 압도적인 기세에 모두 기가 눌려 고개도 들지 못한다.
강 장관은 잠깐 숨을 고르고는 다시금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톤만 가라앉았을 뿐 내용은 추상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나는 검사 출신이고 현역 시절 여러분 못지않은 과중한 업무를 겪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선 방안을 함께 논하려고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문제를 함께 논의해서 해결할 기회를 주어도 그저 ‘개혁’이라는 단어에만 과잉 반응 해 깔아준 멍석을 스스로 걷어차는군요. 여러분이 정말로 여러분의 말처럼 열심히 일만 하고 있었던 성실한 검사들이라면 조직의 개혁을 반가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똘똘 뭉쳐 개혁에 반기를 들 것이 아니라.”
강 장관은 검사들에게 일침을 놓고는 엄숙히 선언했다.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한 일선 검사들이 성실하고 모범적인 검사라는 것을 믿어 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개혁’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과잉 반응 하는 것은 여러분이 부정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단지 검찰이라는 조직을 마치 여러분과 한 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를 일소하고자 검찰복무평정규칙을 개정할 생각입니다. 인사고과에서 조직헌신 항목을 삭제하고 자기절제 항목을 추가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조직에 얼마나 충성하는가를 평가받는 대신 개개인이 독립된 수사기관으로서 도덕성과 품위를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 * *
“여러분은 이제부터 조직에 얼마나 충성하는가를 평가받는 대신 개개인이 독립된 수사기관으로서 도덕성과 품위를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일선검사와의 대화를 유튜브로 지켜보고 있던 원신영 서울중앙지검장은 강바른 법무부장관의 단호한 발언에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성이라는 거야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강 장관은 검사들을 살살 달래서 회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검찰개혁이 필요하다.
말이야 바른 말이다. 부정할 수 없는 정론이긴 하지만 검찰조직에서 강 장관의 말을 과연 사심 없이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바로 지금 일선검사들조차 강 장관에게 저렇게 반발하고 있으니 기득권을 쥔 고위급 검사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원 검사장은 얼마 전 검찰간부들의 극렬한 저항의 현장을 몸소 목격한 바 있었던 것이다.
강바른 법무부장관의 임명이 발표되고 축하 인사를 건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검찰총장이 갑작스럽게 대검찰청으로 원 검사장을 소환했다. 원 검사장만이 아니었다. 전국 검사장들을 전부 불러들여 비밀스러운 회동을 가졌던 것이다.
지검과 고검의 운영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는 명목으로 소집된 회의였지만 검찰총장은 회의 시작부터 대뜸 적개심을 불태우며 신임 법무부장관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강바른 장관은 전부터 우리 검찰을 무슨 적폐 세력이나 되는 것처럼 몰아가면서 말끝마다 개혁을 하겠다, 청산을 하겠다 어쩌겠다 하던 사람이란 말입니다. 우리 검찰의 이미지가 나빠진 것은 다 그 인사가 날조 선동 한 탓이 커요. 장관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가는 우리 검찰의 독립성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꼭두각시가 되어 장관 손에 놀아나게 될 겁니다. 다들 경각심을 가지고 절대로 순순히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원 검사장은 내심 강 장관의 주장에 정당성이 있으며 최근 검찰의 이미지가 나빠진 것은 검찰총장을 비롯한 측근 검사들의 비리 의혹 때문 아니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검사장들도 맹렬히 총장의 의견에 찬동하며 장관에 대한 성토가 줄을 이어 결국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비록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던 것이 원 검사장은 내내 마음에 걸렸다.
참석한 검사장들의 낯빛을 보면 주류의 분위기가 그러하다 보니 말은 꺼내지는 못했지만 원 검사장처럼 불편해하는 검사장들도 몇몇 있는 듯했다. 아마 자신이 대담하게 반박했으면 가담하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 때문에 원 검사장은 강바른 장관에게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원 검사장은 일선검사와의 대화 생중계가 종료된 후에도 오래 생각에 잠겼다가 결국 강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 신호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아 원 검사장은 많이 바쁜 모양이다 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괜한 얘기를 꺼내려 한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검사장님?
전화를 끊기 직전 바로 강 장관과 통화가 연결되었다. 꽤 반가워하는 기색이다.
“강 장관, 많이 바빠요? 통화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일선검사와의 대화 마치고 막 청사로 돌아온 참입니다.
“안 그래도 생중계로 봤어요. 좀 살살 하지 그랬어요?”
-너무 몰아붙였나요? 저도 모르게 그만.
검사들에게 강경하게 굴었던 것이 언제냐는 듯 강 장관은 유쾌하게 웃었다.
원 검사장은 용건을 꺼내기 전 잠시 망설였다. 강 장관도 원 검사장이 뭔가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이런 얘기 하는 게 동료들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서 조심스럽긴 한데… 그래도 난 검찰조직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강 장관의 신조에 기본적으로 동의해요. 다수는 아니겠지만 아마 나 외에도 검찰 내부에 강 장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언질을 주는 거예요.”
원 검사장은 검찰총장이 검사장들을 은밀히 소환해 회의를 가졌고 그 회의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간략히 털어놓았다.
“검찰간부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개혁 드라이브에 조직적으로 제동을 걸고 나설 겁니다. 쉽지 않을 거예요.”
원 검사장은 무겁게 경고했지만 강 장관은 웃음기를 띠고 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진즉에 각오한 일입니다. 저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강 장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장난기를 담아 덧붙였다.
-검사장님도 준비하셔야죠.
“뭘 말인가요?”
원 검사장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저를 혼자만 고생시키고 검사장님은 쏙 빠져 계실 셈입니까? 당연히 도와주셔야죠.
원 검사장은 무슨 소리인가 얼떨떨하기만 했다. 갑자기 강 장관이 부산스럽게 말했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끊어야겠습니다. 곧 연락드릴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십시오.
강 장관은 그렇게만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적인 검찰 인사가 단행되었다. 검찰총장의 핵심 측근 인사들이 대거 지방 한직으로 좌천된 결과였다.
원 검사장은 이것이 강 장관이 준비했다는 그것이었나 혀를 내둘렀다. 선전포고는 검찰총장이 먼저 했다지만 강 장관의 대응은 학살 수준이었다.
검찰총장은 인사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바로 과천정부청사의 법무부장관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강바른 법무부장관과 독대하자마자 검찰총장은 격앙된 어조로 불만을 표했다.
“이번 인사 조치는 저를 길들이기 위한 것입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측근들을 죄다 좌천시키고는 지금 시치미를 떼시는 겁니까?”
“총장이 무슨 사조직 우두머리처럼 부하 검사들을 측근이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적절해 보이진 않는군요.”
“그렇다면 정정하겠습니다. 제 참모 역할을 하던 고위검사들이 대거 좌천된 것은 어찌 된 영문입니까?”
“그랬습니까?”
강 장관은 전혀 몰랐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이번 인사에서 특정인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고위직 검사 중 친인척 비리, 과잉수사, 정치권과의 유착 등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검사들을 잠시 현장과 거리를 두게 한 것뿐입니다. 총장님과 가까운 검사 중에서도 평소 청렴하고 성실하게 직무를 이행해 온 분이라면 불이익을 받았을 리 없는데요.”
총장은 할 말을 잃고 우물거렸다. 실제로 총장의 측근 중에서도 되레 승진한 이도 있었던 것이다.
“총장님의 참모 중에 불이익을 받은 검사가 많다면 평소 가까이하는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봐야겠지요. 사람을 좀 가려서 사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롱하는 듯한 장관의 말에 총장은 발끈하여 답했다.
“다소 물의를 일으킨 검사도 있습니다만 아직 혐의가 뚜렷이 밝혀진 사안도 아닐뿐더러 정치유착에 관한 부분은 시각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장관님이야말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억울한 희생자를 만드시는 것 아닙니까?”
“고위직에게는 그만큼 높은 도덕성이 요구됩니다. 꾸준히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평소 주변을 깨끗이 관리하지 못한 실책이 있다는 얘기겠지요.”
“실책이 있더라도 문책을 하시려거든 무슨 혐의라도 확정된 후에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번 인사는 문책성이 아니고 고위직 검사로서의 자질을 판단해 시행했을 뿐입니다. 만약 범죄 혐의가 밝혀진다면 인사 불이익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책임을 따로 져야죠. 형사처벌 및 징계는 인사와 별개의 얘깁니다.”
장관과 총장은 서로 한 치도 물러남이 없이 팽팽히 맞섰다.
“저는 불편부당하게 인사 조치를 했다는 장관님의 말씀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저를 견제하고 검찰을 찍어 누르려 하신다면 장관님과 함께 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총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봉투를 꺼내 응접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봉투 겉면에는 ‘사직서’라고 쓰여 있었다.
“저는 오늘 제 직을 거는 심정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검찰총장이 검찰조직의 총수로서 독립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더 이상 압력을 행사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렇게 하실 수 없다면 저는 여기서 사직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물러난다고 해서 검찰이 순순히 장관님의 말을 들으리라곤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후임이 누구든 장관이 검찰을 쥐고 흔드는 것을 좌시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강 장관은 총장이 내놓은 사직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비실 웃었다.
총장은 그 미소를 보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사직서는 정말로 사직 의사를 담았다기보다 최후의 카드로 내놓은 일종의 협박장이었다.
하지만 장관에게 이 협박은 눈곱만큼도 먹혀들고 있지 않은 듯했다.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표정이다.
“총장님은 제가 총장님을 견제하려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만 도대체 누가 누굴 견제하려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총장은 장관이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건가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임명된 직후 전국 검사장들을 불러 모아 대화를 나누셨다죠? 거기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습니까?”
“그, 그건 그냥 정례적인 회의로…….”
총장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비밀리에 소집했던 회의건만 설마 거기서 나눈 얘기가 장관에게 흘러 들어간 것일까? 자리한 이들은 모두 자신에게 동조하는 기색이었는데.
“신임 장관은 검찰조직을 적폐 취급 하면서 개혁을 주장해 온 인물이다, 절대로 협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셨다면서요?”
총장은 파랗게 질린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저는 사실 검찰총장이라는 직함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총장은 국민에 봉사하는 검찰청이라는 정부기관의 장이지요. 따지고 보면 검찰청장이 더 성격에 맞는 명칭이겠습니다만 검찰총장이라는 명칭 때문에 마치 검찰조직의 총수이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을 주거든요. 그러니 고작 일개 정부기관의 장이 스스로 검찰 전체를 거느리고 있는 양 착각하고 부하 검사들을 선동해서 장관에 대적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 장관은 웃는 낯 그대로 가차 없이 총장을 몰아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총장님과 함께 손발을 맞춰 일하기는 좀처럼 힘들겠구나 싶었던 참입니다. 부임해서 무언가 제대로 일을 하기도 전부터 방해할 생각만 하고 있는 분을 어떻게 신뢰하겠습니까? 게다가 처가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시는 바람에 대외적으로 검찰 이미지가 상당히 손상을 입은 상황이기도 하고요. 어렵더라도 함께 가야 하나 아니면 솔직하게 사직을 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먼저 사직 의사를 밝혀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부담을 크게 덜어주시는군요.”
강 장관이 총장의 사직서를 집어 들자 총장이 자신도 모르게 사직서 반대쪽 끝을 잡았다.
최후의 히든카드로 써 온 사직서지만 정말로 사직하려는 각오는 없었다. 어차피 검찰조직의 협조가 필요할 법무부장관이니 한 번쯤은 회유하려고 할 거라 예상했다. 예의상으로라도 만류하면 금방 철회할 셈이었다.
하지만 강 장관은 말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올라온 검찰총장인데 임기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이대로 물러난단 말인가.
“왜 그러십니까? 설마 사직서 쓴 것을 후회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장관이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총장은 직위에 대한 욕심과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슬그머니 사직서를 놓았다. 장관이 기다렸다는 듯 사직서를 챙겨 넣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수리하겠습니다.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검찰총장은 장관실을 나오며 허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담판을 하러 갔다가 총장직만 내놓고 나온 셈이었다.
* * *
“당신답지 않게 뭘 그렇게 긴장해요?”
남편이 웃으며 말을 걸어와 원신영 검사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청와대 본관에서 검찰총장 임명장 수여식을 앞두고 원신영 검사장은 남편과 함께 대기 중이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청와대 내부에 걸린 사진에 눈을 두고 감상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원 검사장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어 있었다.
그런 원 검사장의 속을 남편은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 부로 원 검사장은 대한민국의 검찰총장이 된다. 강바른 법무부장관과의 대립 끝에 돌연 사표를 쓴 전임 검찰총장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수여식 시작하겠습니다.”
청와대 직원이 돌연 개식을 알려와 원 검사장은 미처 긴장을 풀지도 못하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후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이 웃으며 원 검사장의 옷깃을 정돈해 준다.
“당당하게 받아들여요. 난 당신이 누구보다도 그 자리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남편의 격려에 원 검사장도 미소로 답했다. 원 검사장은 청와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연단으로 나섰다.
잠시 후 정진웅 대통령이 보좌진들과 함께 본관으로 들어와 연단으로 올라왔다. 대통령과 보좌진 뒤로 강바른 법무부장관도 함께 입장하다가 원 검사장과 눈이 마주치고 싱긋 웃었다.
보좌진들이 연단 뒤쪽에 설치된 의자에 차례로 앉은 후 바로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원 검사장이 대통령과 마주 보고 서자 직원이 대통령에 이 임명장을 전해주었다. 원 검사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임명장을 받았다. 연단 뒤쪽에 앉은 보좌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주었고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번뜩였다.
다음은 배우자에게 축하 꽃다발을 전하는 식순이었다. 긴장하지 말라며 격려했던 남편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차례가 오니 뻣뻣하기가 이를 데 없어 원 총장은 내심 웃었다.
수여식을 마치고 원 총장은 대통령과 함께 만찬장으로 이동했다. 등 뒤로 보좌진들이 수행해 만찬장에 도착하니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과를 곁들여 원 총장은 대통령과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축하합니다. 아주 중요한 시기에 중책을 맡아주셨습니다. 국민들의 검찰개혁에 대한 요구가 큰 만큼 신임 원신영 총장에 대한 기대도 아주 높습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검찰의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어주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검찰개혁의 큰 임무를 맡겨주셔서 어깨가 무겁고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국민에게서 유래하는 국가권력인 만큼 국민의 입장에서 검찰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겠습니다.”
원 총장의 답에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간 여러 권력형 비리에 대해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엄정하게 처리해 주셨으므로 이번에도 잘해주시리라 믿어 마지않습니다. 우리 사회를 더욱 공정하게 만드는 일을 검찰의 시대적 사명으로 여기고 힘써주십시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통령과의 짧은 환담이 끝나고 자리를 파하고 난 후 간신히 한숨 돌린 원 총장에게 강바른 법무부장관이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총장님.”
강 장관은 손을 내밀어 원 총장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남편이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 먼저 자리를 피해주었다.
“주차장에 있을게요.”
강 장관과 서로 꾸벅 인사를 나눈 원 총장의 남편이 먼저 만찬장을 나갔다.
원 총장이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자리를 정리하려는 직원들만 분주할 뿐 참석자 대부분은 이미 자리를 떴다. 그제야 원 총장은 한숨을 몰아쉬며 강 장관을 타박했다.
“준비하고 있으라더니 이런 폭탄을 떠넘길 줄은 몰랐네요.”
“다시 비상하게 되면 총장님을 잊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잊지 않았습니다.”
강 장관이 갑작스러운 해외 연수를 떠나고 원 총장도 제주지검으로 유배를 가던 시절, 원 총장이 농담처럼 했던 얘기였다. 원 총장은 강 장관이 어떻게든 다시 비상할 인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했던 말이다. 하지만 강 장관이 이런 식으로 비상하여 자신을 검찰총장까지 끌어올려 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하니 뭔가 내가 인사 청탁이라도 해서 이 자리에 앉은 것 같네요.”
“제가 아무런 힘도 없이 해외로 쫓겨 나갈 때 이러한 미래를 예견하시고 미리 인사 청탁을 하신 거라면 그거야말로 대단하신 거죠. 선견지명이 있으시네요.”
강 장관의 농담에 원 총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꼭 그때의 당부 때문에 검찰총장에 추천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검찰 내부에 저와 개혁 의지를 함께하는 고위급 간부가 많지 않은 탓이 더 크지요. 저는 개혁 의지가 확실한 사람을 원했고 대통령님도 동의하셨습니다. 만약 부적합한 인재라고 판단되었다면 대통령님이 먼저 거부하셨을 겁니다.”
원 총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통령님도 그렇고 강 장관도 그렇고 굳이 어려운 길을 고집하는군요. 여성 검찰총장인 데다 자리 욕심 때문에 전임 검찰총장을 낙마시키고 법무부장관 쪽에 붙었다는 오해도 있을 겁니다. 검찰 내부에서 나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강 장관이 부정도 하지 않고 태연히 답해 원 총장은 어처구니없어 돌아보았다. 강 장관은 씩 웃어 보였다.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갈 각오가 되셨습니까?”
원 총장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수 없네요. 나 외에 누가 강 장관과 함께 가주겠습니까? 내가 가야죠.”
순간 강 장관이 흐음 하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문득 말했다.
“사실은 한 사람을 더 데려갈까 합니다. 검찰 입장에서 쓴소리를 해줄 사람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원 총장이 아아~ 하고 누군지 알 만하다는 듯 답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유사시에 강 장관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줄 사람 정도는 필요하겠죠.”
* * *
“부장님, 먼저 식사하고 계셨네요. 저희 여기 앉아도 되죠?”
구내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는 서부지검 형사3부 안소영 부장 앞에 같은 부서의 부하 검사가 붙임성 있게 인사를 했다.
“예, 그래요.”
안 부장은 선뜻 답했지만 왜 굳이 상사의 옆에서 식사를 하려는 걸까 생각하는 것이었다.
부하 검사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꼭 함께 식사를 하려는 부장검사도 많았다. 그래야 한 가족이라는 인식이 생기고 단합도 잘된다나.
하지만 안 부장은 어디까지나 업무 효율성과 검사들의 편의를 생각해 검사 각자가 시간이 허락할 때 자유롭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상사의 식사 시간에 맞춰 흐름을 끊어야 하는 것은 짜증스러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상사야 젊은 부하 검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즐거울지 몰라도 부하 검사들 입장에서는 몹시 불편한 자리일 수도 있었다. 밥 먹는 시간만이라도 편하게 먹어야 기운 내서 오후의 업무를 볼 수 있을 테다.
안 부장 나름으로는 부하들을 배려해 자유롭게 점심시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굳이 먼저 다가오는 이유가 뭘까. 자신을 소탈한 상사라고 생각하고 편히 여기는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역시 상사라는 지위가 눈에 보이면 싫어도 합석을 권할 수밖에 없는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 부장은 내심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부하 검사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안 부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그리고 밥을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잡담을 나누는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신임 검찰총장 임명된 거 봤어? 원신영 서울중앙지검장이 됐던데.”
갑자기 원 총장의 이야기가 끌려 나와 안 부장은 밥을 먹다 말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근데 안 좋은 이야기가 좀 들리던데요. 전임 검찰총장이 검사장들 모아놓고 법무부장관 보이콧하라고 지시한 것 일러바치고 전임 검찰총장 내쫓은 자리에 자기가 대신 올라갔다고요. 조직의 배신자라고 거품을 무는 간부들도 많대요.”
막내 검사가 주위를 흘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전임 검찰총장 처가 비리 문제 때문에 자발적으로 사임한 거 아니었어? 시기가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형식은 사직인데 장관한테 압박받아서 어쩔 수 없이 사직서 냈다는 소문이 있어요.”
“어디까지나 소문이지. 게다가 소문이 사실이라면 검사장들 모아서 신임 법무부장관 몰아내자고 선동한 것부터가 잘못 아냐? 나라도 그러면 같이 일 못 하지.”
확실히 간부급과는 달리 평검사들 사이에서는 강 장관에게 호의적인 여론도 꽤 있는 듯했다.
“그래, 다 양보해서 강 장관이 총장 자른 것까지도 좋은데 굳이 그 자리에 원신영을 앉혀야 했는지 그건 좀 그래.”
“왜? 될 만하잖아. 성실하고 사심 없고 이번 정권이랑 코드도 잘 맞고.”
“여자잖아. 안 그래도 삐딱선 타고 있는 검찰간부들이 여자 검찰총장 말을 듣겠어? 강 장관처럼 강하게 목줄 틀어잡고 때려잡아도 말을 들을까 말까인데 성품 유한 미녀 총장이라니 참 잘도 말이 통하겠다.”
“하긴 여자 상사는 좀 만만하게 보긴 하죠.”
원 총장의 하마평이 오가자 귀를 세우고 듣고 있던 안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자 상사는 만만하게 본다…….”
그제야 막내 검사가 옆에 앉은 안 검사를 의식하고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요! 부장님 얘기가 아니고요! 제가 아니라 일부 간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다른 검사들도 다급히 변명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부장님.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나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 여성 검찰총장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이니까요.”
안 부장은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지만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검찰조직이 강하게 틀어잡아야 말을 듣는 집단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너무 비하하는 것 아닙니까? 검찰은 대화와 설득을 통해 함께 개혁을 이뤄갈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조직입니다. 과거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다 해서 그러한 전제까지 부정해서는 안 되지요.”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해당 발언을 했던 부하 검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고요.”
안 부장이 멋쩍게 답하고는 덧붙였다.
“원 총장님이 겉으로는 유해 보이셔도 그렇게 만만한 분은 아닙니다. 크게 우려할 일은 없을 거예요. 더구나 법무부장관이 워낙 강성이니 총장은 좀 부드러운 인물로 균형을 맞추는 것도 괜찮겠지요.”
안 부장의 말에 막내 검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임 총장님과는 잘 아는 사이세요?”
“잘 안다고 하기는 그렇고요. 과거에 잠깐 밑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부하 검사들이 일제히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안 부장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심지어 강바른 법무부장관과는 오래 같이 일했으며 함께 일하는 동안 남들은 겪어보지 못했을 여러 내밀한 비밀들을 공유했다는 것을 이들이 알면 더욱 안절부절못할 터였다.
부하들이 난감해하는 눈치라 안 검사는 먼저 자리를 피해주기로 한다.
“그럼 난 먼저 일어날게요. 식사 맛있게들 하고 올라가요.”
“예, 부장님. 들어가십시오!”
부하 검사들이 그제야 안도하며 우렁차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