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국회의원이 법을 모름
“이번 검찰 인사에서 법무부가 강바른 검사를 속초지청장으로 보낸 것 혹시 보셨나요?”
현영은 자유대한당 당대표 하상현에게 술을 따라주며 은근히 물었다.
그는 조재용 회장 때부터 친분을 유지해 오던 정치계 인사였다. 현영은 조부와의 친분을 핑계로 종종 그를 만나 정계와 재계의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은밀히 로비를 하기도 했다.
안부 인사를 핑계로 오늘 한정식집에서 회동을 한 것도 실은 바른의 인사 결과 때문이었다.
바른이 해외 연수를 간 지도 1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인사 철에 맞춰 바른이 복귀할 근무처가 정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역시 좌천성 인사였다.
“그랬나요?”
하 대표는 딴청을 하며 의뭉스럽게 답했다.
“대표님께서는 이번 인사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장관이 그렇게 한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그 의도를 어찌 다 알겠습니까?”
현영이 재차 물었지만 하 대표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다가 문득 말꼬리를 돌렸다.
“혼외자라 해도 핏줄은 핏줄인 모양입니다. 인사에 불만을 표하는 것을 보니. 다음 인사에서는 사정을 좀 봐주었으면 하는 건가요?”
“그럴 생각이라면 대표님이 아니라 법무부장관님께 직접 말씀을 드렸겠지요. 연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이 정권이 언제까지 가리라는 건 보장 못 하지 않겠습니까? 무용한 로비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현영의 조롱하는 듯한 답에 하 대표는 희미하게 노기를 띠었다.
“강바른 그 사람, 정권이 바뀐다 해서 다시 날아오르리라는 보장이 없겠던데요. 그렇게 강퍅한 인사는 좀처럼 부리기가 어렵지요. 어떤 정권이든 부담스러워할 사람입니다.”
“동의합니다. 예리하게 잘 드는 만큼 스스로 베이기도 쉬운 칼이지요. 하지만 쓰기에 따라서는 좋은 무기가 될 칼을 이렇게 칼집에 넣어두고 녹슨 채 방치하는 것이 과연 좋은 쓰임인가 의문이 듭니다. 제 혈육이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강바른은 절대 이렇게 쓰일 인재가 아니에요.”
“높은 직위에 올려두면 우리를 칠 사람인데 우리 손으로 날개를 달아줄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검찰에 남겨두기 정 부담스러우시면 정계로 데려가는 방법도 있지요.”
갑작스러운 말에 하 대표는 멈칫 돌아보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자유대한당에 꼭 필요한 인물이니까요.”
현영이 단언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정권교체를 해낸 것이 당이 잘해서입니까? 진보 측의 강력한 대권 후보들이 차례로 낙마해 마땅한 인물이 없어서였지요. 진보성향 유권자들은 도덕적 기준이 매우 높아요.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이 없으니 아예 투표를 보이콧해 버렸고 자유대한당은 그 반사이익을 누린 겁니다. 자유대한당이 새로 끌어온 표는 전무합니다.”
냉정히 상황을 상기시킨 현영이 더욱 신랄한 어조로 덧붙였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저쪽에 연이은 악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과연 자유대한당에 승산이 있었겠습니까? 어차피 도덕성으로 따지면 겨 묻은 놈과 똥 묻은 놈의 대결 아닌가요?”
현영의 혹독한 평에 하 대표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씀이 심하시군요.”
“객관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표님도 냉정하게 판단해 보세요. 이대로라면 다음 대선에 희망이 있습니까?”
현영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하 대표는 차마 답하지 못하고 끄응 신음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자유대한당은 역사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음이 있으려면 새로운 지지층을 끌어모을 수 있는 참신한 새 인물이 필요해요.”
“그 인물이 강바른이라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현영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강바른은 지금 대중에게 국민 영웅으로 떠받들리고 있어요. 지지자들의 정치 성향은 좌우를 불문하고요. 더구나 보수의 약점인 도덕성을 방어해 줄 수 있습니다. 데려가서 잘 키우면 장차 대권주자가 될 가능성도 있어요. 이 정도로 적합한 인재가 달리 있습니까?”
현영의 말에 비로소 하 대표가 빙그레 웃었다.
“그게 본심입니까? 혈육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다? 그래서 정재계를 모두 한성그룹 손에 쥐고 싶다는 건가요?”
현영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욕심이 없다고는 못 하겠네요. 하지만 그 전에 자유대한당의 명운을 진심으로 염려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떤 당보다도 친재벌적인 자유대한당이 계속 집권해 주는 것이 한성그룹에게도 이득이 될 테니까요. 한마디로 운명 공동체 아니겠어요?”
현영은 마지막으로 거부하기 힘든 딜을 던졌다.
“만약 영입을 해주신다면 한성그룹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정치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군침이 당기는지 하 대표는 입맛을 다셨지만 바로 수락하지는 않았다.
“당직자들과 한번 논의해 보도록 하죠.”
하 대표는 그렇게 답하고는 슬쩍 물었다.
“그런데 영입 제안을 한다고 해도 본인이 수락하지 않으면 헛일 아닙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현영이 자신 있게 답했다.
* * *
평생 대학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태산에게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은 생애 처음 밟아보는 캠퍼스였다. 태산은 뒤늦은 캠퍼스의 낭만을 맘껏 즐겼다.
물론 과중한 업무가 없다 뿐 그리 한가한 일정은 아니었다. 나라에서 보내주는 연수인 만큼 연수 기간이 끝난 후 완성해야 하는 논문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들보다 짧은 1년의 기간 내에 논문을 완성해야 했다.
하지만 당장 매일매일 쳐내야 할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라 마음 편하게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부가 의외로 재미가 있어서 태산 스스로도 내심 놀랐다.
녹음이 우거진 캠퍼스를 오가며 젊은이들 틈에 끼어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과에 이따금 조금 멀리 나가 낚시를 하거나 트래킹을 하는 단순한 생활이었지만 태산은 충분히 만족했다. 평생 누리지 못했던 고요함과 평온함에 절로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논문도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어느 날, 한인 커뮤니티에서 발행된 신문에 국내 검찰 인사 소식이 실렸다. 태산은 지면으로 자신의 다음 발령지를 접하고 할 말을 잃었다.
[속초지청 지청장 강바른]
충분히 예상한 바였지만 그래도 충격이 적지 않았다. 이 정권은 자신을 끝내 험지로 돌릴 모양이었다. 이만하고 나가라는 메시지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태산은 변호사 개업은커녕 검사직을 그만둔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태산은 어지러워지는 마음을 애써 달랬다. 일단 논문이 완성될 때까지만이라도 딴생각하지 말고 공부에만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논문 초고를 드디어 완성했을 때 현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속초 발령 난 소식 들었어.
현영이 슬쩍 운을 뗐지만 태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답답하다는 듯 현영이 말을 보탠다.
-아무리 젊다 해도 직급이 있는데 정권 바뀌자마자 해외 연수를 보내더니 돌아올 때 되니까 촌구석에 처박는 것 좀 봐. 그쯤 되면 위에서 보내는 메시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어? 그만 버티고 나와.
“오랜만에 푹 쉬면서 공부도 하고 좋지 뭘. 어차피 나가봐야 변호산데. 이 정권이 천년만년 갈 것도 아니고.”
반쯤은 진심이었고 반쯤은 헛헛함을 들키지 않으려 꾸며낸 태연함이었다.
한동안 조용히 침묵하던 현영이 불쑥 말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약속한 게 있어. 내가 바른이 너 꼭 대통령 만들겠다고.
태산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진심이냐? 니가 뭔데 날 대통령을 만들고 말고 해?”
하지만 현영은 개의치 않고 여전히 진지한 톤으로 말했다.
-기업가에게는 비전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너에게 청와대를 안겨주면 한성이 대한민국 정재계를 모두 지배하게 돼. 그게 바로 내 다음 비전이야.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게 과연 너한테 이로운 일일까? 니가 짜놓은 장기판에 말로 쓰일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저번 일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거야?”
태산은 현영과 손잡고 현영이 한성그룹을 승계하도록 도왔으나 결국 경영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상처뿐인 승리를 남겼던 일을 상기시켰다.
-어쨌든 한성을 내 손에 넣었잖아. 그게 중요한 거 아니야? 너와 내가 결국 대립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 손으로 이 나라를 양분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지.
현영은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태연히 답하고는 준비했던 본론을 꺼내놓았다.
-이미 자유대한당 하상현 대표와는 얘기 다 끝났어. 네 결정만 남은 거야. 정권 바뀌길 기다리면서 촌구석에 짱박혀 있든가, 지금 바로 그만두고 정계로 나가든가.
현영은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태산을 설득했다.
-자유대한당은 다음 세대의 주자가 될 인재를 열렬히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어. 니가 결정만 해준다면 나 역시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현영과의 전화 통화를 끊은 후 태산은 고민에 잠겼다.
검찰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므로 거취도 고민해 본 바 없었다. 하지만 이제 또 다른 선택지가 생긴 것이다. 그저 일축해 버릴 제안은 아니었다.
태산은 바로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낚싯대를 챙겨 오긴 했지만 물고기를 낚을 생각은 없었다. 고요한 호숫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잔잔한 수면에 이따금 일어나는 파문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강바른의 몸으로 들어와 겪었던 검찰에서의 생활을 천천히 곱씹어본다. 누구보다 열심히, 초인적인 능력으로 임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일개 검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사를 방해하는 자들은 조직 밖만큼 조직 안에도 많았다. 검찰 내부에 적을 무수히 만들어가며 부패검사들을 쳐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뀌자마자 조직 분위기는 방만해졌고 검사들의 기강도 바로 흐트러졌다.
열심히 수사해 사건을 넘겨도 손쉽게 풀어주고 선처해 주는 판사들은 어떤가. 쥐꼬리만 한 친분이라도 만들어 여기저기 전화질을 하면서 막대한 수임료를 뜯어내는 전관변호사들은 또 어떤가.
그러한 장애물을 모두 돌파해서라도 합당한 처벌이 가능했다면 태산이 사적인 수단까지 동원해 범죄자를 엄단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 한두 명의 주범은 처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동조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다크웹과 텔레그램에 숨어 있을 26만 명을 생각하면 태산조차도 기가 질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모든 범죄자를 혼자 힘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그건 슈퍼맨이나 배트맨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법을 바꾸고 제도로 못 박아야 한다.
태산은 장고 끝에 결정을 내렸다. 더 많은 악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더 큰 권력을 쥐어야 하겠다고.
결정을 내린 태산은 후련한 마음으로 낚싯대를 거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강바른입니다. 정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다만, 2년만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의무복무기간은 채우고 가겠습니다.”
국외 훈련은 국가 비용으로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비용 회수를 위해서 다녀온 사람은 훈련 기간의 2배의 기간 동안 의무적으로 검찰에 복무하도록 하고 있다.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국외 훈련 후 바로 사직하고 변호사 개업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태산은 의무복무기간만큼은 지키는 것이 지금까지 몸담았던 검찰 조직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했다.
* * *
“검사 오빠, 나 왔어.”
선화가 또 식료품 봉지를 한 아름 들고 불쑥 찾아왔다.
선화는 제가 한 말대로 정말 캐나다에 사업차 온 것인지 한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찾아오곤 했다.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밑반찬으로 냉장고 안을 채워둔 후에야 만족하고 돌아갔다.
눈치로는 캐나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종종 다녀오는 듯했다.
“이제 돌아갈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뭘 이렇게 많이 싸 들고 왔어?”
“구정이잖아. 여기서는 명절도 아니라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구정을 챙겨야지.”
선화는 주방을 서성거리는 태산을 한사코 밀어내고는 혼자 바지런을 떨며 명절 음식을 준비했다.
“대충 해. 둘이 먹을 건데. 남으면 처치 곤란이야.”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지.”
부산을 떤 끝에 간신히 식탁에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갖은 한식들에 꽤 명절 분위기가 났다.
“잘 먹을게. 이런 분위기에는 청주가 어울리겠지만 와인이라도 한 잔씩 하자.”
태산이 일어나 와인병과 잔을 가져와 선화와 자신의 앞에 한 잔씩 따랐다. 와인 잔을 들어 건배하며 선화가 태산을 유심히 보았다.
“오늘 분위기가 좀 달라 보이네. 어쩐지 후련한 얼굴인데?”
“논문 끝냈잖아.”
“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오~~ 제법 한국 맛이 나는데?”
즐거운 얼굴로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맛보는 태산을 선화는 한참 바라보았다.
“뭔가 결심한 게 있지?”
선화가 불쑥 물어 태산은 잡채를 덜려던 젓가락을 멈칫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보는 선화의 시선을 마주하고 태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여자다.
“사직하고 정계로 나갈까 하고. 당장은 아니고 일단 귀국해서 의무복무기간 마친 다음에 거취 결정할 거야.”
“흐음… 그래?”
정색하고 물은 주제에 선화는 심드렁하게 답하고는 이내 와인을 홀짝거렸다.
“난 이제 곧 귀국인데 당신은 언제 들어가?”
“나? 북미 사업 확장 중이라 한동안은 여기 남아서 캐나다랑 미국을 왔다 갔다 할 것 같아.”
“그래?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가겠군.”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선화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태산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타국에서 따뜻한 명절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데 만족하며 편안하게 와인을 들이켰을 뿐이다.
귀국 당일, 선화는 굳이 시간을 내 태산을 배웅하러 공항까지 동행했다. 출국 게이트 앞에 서서 선화는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한참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태산이 먼저 미련 없이 돌아섰겠지만 이날만은 태산도 어쩐지 등을 보이기가 힘들었다.
“그만 들어가.”
“자기 먼저 가.”
태산은 피식 웃었다. 애틋하게 이별하는 연인도 아니고 공항 게이트 앞에서 새삼 웬 실랑이인가. 영원히 못 볼 사람처럼.
“그래, 그럼 내가 먼저 갈게.”
그렇게 답하고 돌아서려는 태산의 품으로 갑자기 선화가 뛰어들었다. 선화의 돌발 행동에 태산은 멈칫 굳어버렸다. 선화가 태산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 같아. 내가 알고 있는 비밀들이 당신의 앞날에는 치명적인 것이 되겠지.”
선화는 태산이 이웅배를 죽여 복수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골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우리 이제 모르는 사이가 되자.”
태산은 선화의 결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태산을 축복하며 보내주려는 것이다.
태산은 손을 들어 선화의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잠깐 동안 그렇게 안겨 있던 선화가 손을 놓고 물러나더니 태산을 올려다보며 젖은 눈으로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선화는 발돋움을 해 태산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청량하게 울리며 담담한 뒷모습으로 멀어진다.
태산은 선화의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사랑했지만 믿지는 못했던 여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선화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좌천되어 가는 것이었지만 캐나다로 올 때는 선화가 있어 적적하지 않은 비행이었다. 그에 비해 새롭게 거취를 정한 지금 마음에 거리낄 것 하나 없었지만 홀로 귀국하는 길은 어쩐지 쓸쓸했다.
[형님, 사정이 있어 입국장에는 못 나갈 듯합니다. 들어오시면 뵙겠습니다.]
인천공항에 착륙해 내리기 직전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자마자 범진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왔다. 내내 헛헛한 기분이었던 태산은 별것 아닌 일이건만 조금 서운함을 느꼈다. 범진이라면 바로 맞으러 나오리라고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짐을 찾아 카트에 싣고 입국장으로 들어선 순간, 범진이 나올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바른이다, 강바른!!!”
“강바른 검사님!!”
“강 검사님! 여기 좀 봐주세요!!!”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취재진을 포함한 군중들이 태산을 맞았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색색의 꽃다발과 플래카드가 눈을 어지럽혔다.
[환영! 강바른!]
[강바른 검사님의 귀국을 환영합니다.]
[입국 환영! 강바른 검사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축! 귀국! 사랑해요, 강바른!]
태산은 내심 혀를 찼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정확히 자신의 귀국을 알고 모였다는 것은 사전에 어디선가 정보가 샜다는 얘기다. 정치에 투신하고 싶다 연락한 이후 이미 정계에서는 강바른을 스타로 만들기 위한 물밑 작업이 한창인 듯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순수하게 지지하는 마음으로 온 것일 테다. 태산은 다투어 손을 내미는 지지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하나하나 악수를 나누고 꽃다발을 받아 든 후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뜨려는 태산을 향해 기자들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강 검사님,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태산이 빙그레 웃으며 돌아보았다.
“속초지청으로 갑니다.”
태산은 그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입국장을 벗어났다. 군중들과 꽤 멀어졌을 때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하나가 태산에게 다가왔다.
“강바른 검사님?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장이라는 말에 태산은 현영이 보낸 사람인가 생각하며 사내를 따라갔다. 사내가 태산의 카트를 받아 밀며 태산을 주차장 한쪽으로 안내했다. 태산은 까맣게 선팅이 된 리무진에 무심히 올라탔다가 뒷좌석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반색했다.
“김범진!!”
범진이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보셨겠지만 입국장에 사람이 너무 몰려 나가지 못하고 여기서 기다렸습니다.”
예전부터 범진은 태산이 장차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 여기며 항상 접촉을 조심해 왔다. 합법적인 기업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지금이라 해도 기업인과 공직자 사이에 커넥션이 있는 것으로 의심받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건강히 잘 다녀오셨습니까?”
범진의 물음에 태산은 대답 대신 껄껄 웃으며 범진을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태산의 팔에서 풀려난 후 범진은 조금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속초로 모시겠습니다.”
* * *
속초지청장으로 부임한 후 2년간은 한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분주했다.
일선에서 뛰는 수사검사가 아니라 지청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직이 되었기 때문에 크게 바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속초지청은 워낙 작은 지청이라 대단한 사건이 올라오지도 않았다. 그나마 지역 유지들의 자잘한 비리를 밝혀내 기소하도록 지시한 것이 가장 큰 공적 중 하나였다.
그로 인한 여유 시간을 태산은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정치에 입문하려면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정치에 대해 전반적으로 공부하면서 각 당의 법률 관련 정책은 세부적으로 파고들었다. 정책 공부를 하다 보니 국가 경영 전반을 알아두지 않을 수 없었다. 행정, 경제, 외교, 국방, 복지, 교육 등 태산의 관심사는 전방위로 뻗어 나갔다.
딱히 단련할 필요가 없는 몸이긴 했지만 정신 수양을 겸해 신체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산의 몸이던 시절부터 계속해 왔던 웨이트트레이닝과 복싱은 물론이고 캐나다에 있을 때 취미를 붙인 트래킹도 계속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설악산 자락을 달리다가 정상에서 일출을 보며 호연지기를 다진 후 내려와 업무를 시작하는 것이 태산의 루틴이었다.
의무복무기간인 2년을 채운 새해 첫 출근 날, 태산은 그날 새벽도 어김없이 산에 올랐다. 랜턴을 켠 채 앞서 올라가던 등산객들이 있어 태산은 놀라지 않도록 가장 뒤에서 올라가는 사람의 등 뒤에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놀라지 말라고 건넨 인사였지만 등산객은 화들짝 놀랐다. 숨이 거칠어지지도 않았고 발소리도 없이 가볍게 달려 올라와 말하니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고, 깜짝이야!”
등산객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이내 멋쩍어하며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산객은 무심히 인사를 건넸다가 등산복도 아니고 가벼운 운동복 차림에 랜턴도 없이 산을 오르는 태산을 다시 불러 세웠다.
“아니, 밤길 어두운데 랜턴도 없이 올라가세요?”
신경을 집중하면 짐승의 눈처럼 어두운 밤길이 훤하게 보이는 태산이었지만 웃으며 둘러댔다.
“예, 매일 다니는 익숙한 길이라서요. 눈 감고도 갑니다.”
“그래도 위험할 텐데… 우리는 여럿이라 랜턴 하나 정도는 없어도 돼요. 하나 가지고 올라가요. 정상에서 돌려주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정상에서 뵙죠.”
태산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쏜살같이 등산객들을 스쳐 지나갔다.
정상에 오른 태산은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운무가 깔린 어두운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부터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먼 동해 바다에서 이글거리며 솟아오르는 태양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뒤늦게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이 등 뒤에서 일출을 보고 환호성을 올렸다.
“우와!!! 간신히 맞췄네. 까딱하면 놓치는 줄 알았는데.”
“아슬아슬했어. 사진부터 찍자고.”
깨어진 정적에 아쉬움을 느끼며 태산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등산객들에게 목례를 하고는 한달음에 산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한 후 태산은 정장으로 단정히 갈아입었다. 속초지청으로 출근한 태산은 집무실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펜을 들었다.
[사직서]
일필휘지로 사직서를 써 내려간 태산은 도장을 찍고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봉투를 비서관에게 가져가 건넸다.
“비서관님, 이거 법무부에 좀 제출해 줘요.”
“이게 뭔가요?”
비서관이 봉투를 받아 들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사직서입니다.”
“예?”
당황해 되묻는 비서관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 태산은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방금 사직서 제출했습니다. 저는 이제 준비됐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환영합니다, 강 검사. 아니, 이제 검사라고는 부르지 못하겠군요.
법무부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 민주평화당 당대표를 맡고 있는 정진웅이었다. 지난 정권 내내 태산을 살뜰하게 부려먹은 장본인인 동시에 날고 싶은 만큼 높이 날 수 있도록 큰 날개를 달아주어 정권 바뀌자마자 추락하게 만든 원흉이기도 했다. 태산은 바로 그 정 대표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 * *
“각 당의 공천 레이스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단연 화제는 민주평화당이 새로 영입한 강바른 전 검사 아니겠습니까?”
TV 시사프로 진행자가 시사평론가를 바라보며 화제를 꺼냈다.
“그렇습니다. 국민 검사라고 불리며 검사 시절부터 지지자가 많았던 스타 검사였죠. 당초 자유대한당 측에서도 영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긴 했었습니다만 결국 민주평화당행을 결정했습니다. 민주평화당은 강바른 후보를 영입한 직후 서초을에 경선 없이 단수공천 하겠다고 발표했고요. 강 후보가 서울중앙지검과 대검에서 주로 근무했으므로 지역 연고가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만 다 핑계죠. 사실상 전략공천 아니겠습니까?”
진행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서초을은 부유층과 노인인구가 많아 강력한 보수성향을 띄는 지역구 아닙니까? 역사상 민주당 계열 후보가 당선된 적이 전무한데요.”
“어차피 내줄 지역에 정치 신인을 내보냄으로써 당이 입을 타격을 줄이는 동시에 히든카드를 내세워 불리한 지역에서 판세를 뒤집는 모험을 해보겠다는 겁니다. 꽤 합리적인 전략이라고 봅니다.”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물었다.
“교수님께서는 서초을의 선거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저는 해볼 만하다고 봅니다. 강바른 후보는 40대의 젊은 기수로 진보적인 청년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만 보수층, 노인층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입니다. 자유대한당이 영입을 고려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시사평론가는 어쩐지 신이 나는 듯 미소를 머금은 채 다소 흥분한 어조로 결론을 내렸다.
“강바른 후보의 영입은 단순히 서초을에서의 승패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번 총선에서 강 후보의 정계투신이 압도적인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강 후보는 본인의 강인한 이미지를 십분 활용하며 강력한 개혁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데요. 이런 카리스마 있는 인물을 대중들은 아주 좋아하거든요. 비록 강 후보가 서초을에서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꽤 선전해 주기만 한다면 민주평화당이 이번 총선의 의제를 선점하면서 새로운 지지층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겁니다. 서초을에서 지더라도 전국적인 정당 지지율은 상당히 의미 있는 수준으로 상승시킬 수 있을 겁니다.”
거실에 앉아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현영은 끓어오르는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TV를 끈 후 리모컨을 던져 버렸다. 처음 정치 입성을 제안한 것이 바로 자신임에도 바른은 현영에게는 상의 한마디도 없이 민주평화당 행을 결정한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거실을 서성이던 현영은 충동적으로 바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바른이 받자마자 인사도 건네기 전에 비아냥을 던졌다.
“정치에는 관심 없는 것처럼 의뭉을 떨더니 나한테는 말도 없이 민평당으로 갔네? 밥상 다 차려놨는데 니가 엎어버리는 바람에 내 체면이 뭐가 된 줄 알아? 하 대표가 발끈해서 나를 아주 들들 볶았다고! 할아버지 때부터 우호적으로 유지해 왔던 관계가 너 하나 때문에 흔들리게 생겼어.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네 제안이 거취를 정하는 데 참고가 되었어. 그 점은 고마워.
현영이 격앙되어 소리치는데도 바른은 태연히 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냉랭하고 무심한 태도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네가 계획한 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거라고.
현영은 허탈해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이게 너의 제안에 대한 내 답이야. 우리가 미리 얘기 안 했다고 서운하고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현영은 이제까지 바른의 앞에서 얼굴을 잘 꾸며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바른은 현영이 자신을 경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른의 냉랭한 반응에 현영은 뭐라 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물어물 끝나 버린 그날의 통화 이후 현영은 선거 결과를 예의 주시 했다.
[박빙지역 – 서초을]
총선 당일 새벽까지도 바른이 출마한 서초을 지역구는 결과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엎치락뒤치락했다. 출구 조사 결과는 여당인 자유대한당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다고 예측했으나 안심할 수 없었다. 애초에 보수정당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이던 지역에서 박빙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만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초조하게 결과를 지켜보던 현영은 동이 터와서야 확정된 결과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초을 – 민주평화당 강바른 후보 당선 확정]
강바른이 결국 국회의원이 되고 말았다. 현영이 원했던 결과였지만 현영이 원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였다.
앞으로도 바른은 현영의 뜻이 어떠하건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현영의 바람대로 바른은 청와대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영이 그린 청사진과는 전혀 다른 궤도로 전개될 것 같다는 개운치 못한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시대가 변한 건가?”
현영이 문득 중얼거렸다.
바른을 정계로 보내면 세월이 흘러 언젠가 바른이 변하는 날도 오리라 기대했다. 노회해진 바른과 손을 잡고 다시 한번 조부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 기대가 이렇게 일찌감치 허물어질 줄이야.
친재벌적인 국가에서 정경유착을 통해 고속 성장 하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한성의 발전 전략은 정면 승부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공정을 원하는 국가와 국민의 강력한 통제 속에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현영은 희뿌옇게 밝아오는 어둠 속에 도사리고 앉아 자신의 어깨에 걸린 한성의 미래를 오래 생각했다.
* * *
선화는 카페에 앉아 신문을 보면서 빙그레 웃음 짓고 있었다. 비서가 양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와서 선화의 감상을 깨뜨렸다.
“대표님, 과테말라 스페셜티 블렌드 맞으시죠?”
“응, 맞아.”
선화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금방이라도 카페를 나갈 듯 컵을 든 채 서 있는 비서에게 말했다.
“앉아. 잠깐 이것 좀 읽고 가자.”
그제야 비서가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비서는 커피를 선화 앞으로 밀어놓으며 흘끗 선화가 읽고 있는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해외 바이어와 본사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바쁜 와중에 흐뭇한 표정으로 열심히 읽고 있는 기사가 대체 뭔지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
[강바른 법무장관 지명, 청와대 “개혁 성과 기대한다.”]
선화가 펼쳐보고 있는 정치면에는 큼지막한 타이틀과 함께 훤칠한 중년 사내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최근 스타급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남 정치인이라 비서도 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대표가 은근히 정치에 관심이 많네. 아니면 미남이 좋은 건가.’
비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선화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화는 한동안 신문 기사를 읽다가 커피를 집어 들었다. 신문에 시선을 돌린 채로 무심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선화가 맛을 음미하더니 새삼 테이크아웃 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 커피가 꽤 맛있어. 나 원래 흔하디흔한 체인점 커머셜 커피는 안 마시는데 이건 좀 다르단 말이야. 요즘은 한국 들어오면 여기 커피만 마시는 것 같아.”
“그렇죠? 저도 여기 커피 좋아해요. 예가체프 주로 마시는데 향이 정말 좋더라고요.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데 꽤 괜찮은 스페셜티를 내놓는다고 가성비 좋은 커피 체인으로 요즘 유명하잖아요. 산지랑 직접 연결해서 원가를 절감했다나 뭐라나 그러던데요.”
비서의 말에 선화는 콧방귀를 꼈다.
“흥~ 그놈의 가성비 타령.”
선화는 본격적으로 신문을 덮어놓고 비서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원가가 문제가 아니지. 좋은 물건은 그만큼 비싼 값을 받아야 하는 법이야. 좋은 물건을 싸게 판다고 누가 고마워하는 줄 아니? 오히려 이건 무슨 흠이 있기 때문에 싸게 파는 거겠지 한다고. 제값을 받아야 물건의 가치도 높아지는 법이지.”
선화는 카페 안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여기도 분위기 괜찮고 커피 맛 좋은 데 비해 너무 적게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나 같으면 싹 뜯어고쳐서 고급화 전략으로 갈 텐데. 가격도 고급화하고 말이야.”
비서는 열심히 듣는 척하고 있었으나 얼굴에서 지루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이가 드니 아무래도 방심하면 젊은 애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된다. 늙은이 티 내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선화는 슬쩍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괜히 쓸데없는 얘기가 길었네. 출발하자.”
선화는 앞장서 일어서서 카페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꼬마 여자아이 하나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선화와 가볍게 부딪쳤다. 아이는 선화의 안색을 살피며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괜찮아.”
선화는 웃으며 그렇게 답해주었다. 평생 애들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지만 요즘 들어 새삼 애들이 예뻐 보이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조심해야지.”
뒤따라 들어오던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짐짓 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아이를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남자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고는 선화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화는 미소를 띤 채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카페를 나왔다.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선화와 엇갈려 뒤따라 들어가며 투덜거렸다.
“어휴, 쟨 왜 저렇게 성질이 급해. 천천히 가라니까.”
여자의 혼잣말을 흘려들으며 스쳐 지나간 선화는 몇 걸음 걸어가다 고개를 갸웃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라 들어간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입구 앞에 서서 웃는 얼굴로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되게 닮았네.”
선화는 중얼거렸다. 아이의 아빠가 서은섭과 꽤 닮아 보였던 것이다.
선화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 서은섭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저런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산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순한 얼굴로 여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녀석이었지만 눈매가 반항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반듯해도 내면은 어둡고 비뚤어져 있다는 것을 선화는 예리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렇기에 더욱 동질감을 느끼고 가깝게 지냈는지도 모른다.
그런 서은섭이 마냥 헤벌레한 얼굴로 자신의 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본다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저 생김새가 닮은 사람이려니 생각한다. 세상에는 자신과 똑 닮은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다지 않은가.
“왜 그러세요, 대표님?”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선화를 보며 비서도 멈춰 서서 물었다.
“아니, 그냥 보기 좋은 가족이다 싶어서. 갑자기 옛날 생각 나네.”
선화의 말에 비서의 눈동자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더니 슬쩍 묻는 것이었다.
“아… 대표님… 돌싱이셨어요?”
선화는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뭐래는 거야? 나 처녀라고. 완전 처녀!”
“아, 예… 저도 그러신 줄 알고 있었는데 가족 보고 아련해지셔서 혹시 이혼 경험이라도 있으신가 하고…….”
“보통 이런 경우에는 어린 시절이 생각났나 보다 하지 않니?”
“아… 그, 그렇네요.”
선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애들 앞에서 훈계조가 되는 것도, 애들이 예뻐 보이는 것도, 갑자기 옛날에 알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상에 빠지는 것도, 사연 있는 여자 취급을 당한 것도 다 자신이 이제는 부인할 수 없이 나이가 먹었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선화는 발걸음을 옮기며 비서에게 지시했다.
“오늘 일정 끝나는 대로 갈 수 있게 청담동 피부 숍 예약해 놔. 나 자주 가는 거기로.”
“네,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