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74화 (74/78)

제4장 유배

“HS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으로 조현영 이사님이 선출되셨습니다.”

이사회 임시의장이 선포하자 이사회에 참석한 이사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조동한과 그 자식들은 구속되어 이사회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미 주주총회에서도 대세가 뒤집어진 것을 확인했다. 현영은 손쉽게 이사회를 장악해 결국 대표이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이사들이 다투어 축하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현영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에 화답했지만 마음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HS홀딩스의 대표이사가 되었다는 것은 한성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손에 넣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목표하던 바를 드디어 이루었으나 상처뿐인 영광 아닌가 하는 회의를 지울 수 없었다.

현영은 내심 자신이 경영권을 빼앗아 오기만 하면 바른이 한성그룹을 향한 수사의 칼날을 거두어 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바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성그룹을 포함해 재계 전반을 향해 거침없이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조동한 일가의 범법 행위에 관여한 한성그룹 계열사의 이사와 사장 등 다수의 경영진이 구속되었다. 대체로 친조동한계 경영진이라는 것이 그나마 현영의 그룹 장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비자금 조성으로 부과될 추징금이 4천억, 한성식품과 한성유통의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한 과징금이 2백억, 탈세한 세금의 추징금 또한 막대했다. 그와 별도로 피해를 입은 대리점 점주들에게 민사로 손해배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의 비자금 조성 경로가 완전히 막힌 것도 큰일이었다.

한성그룹은 그룹 역사상 유례없는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현영은 조동한 일가가 남긴 똥을 치워가며 격랑을 뛰어넘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현영은 축하 인사에 대한 답으로 이사들을 향해 간단히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스스로의 다짐에 가까웠다.

망가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손에 넣고자 했다.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룹을 원래의 궤도에 다시 올려놓겠다고 이를 악무는 것이었다.

* * *

-부장님, 검사장님께서 올라오시랍니다.

“예, 갑니다.”

태산은 한창 업무로 바쁜 도중 검사장의 호출을 받고 부랴부랴 검사장실로 올라갔다.

‘바쁜데 왜 자꾸 오라 가라야? 이번에도 재벌 수사 속도 조절하라고 한 소리 할 셈인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넥타이를 바로 매며 태산은 내심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의 수사는 대기업 전반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멈출 줄 모르는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는 반부패수사부에 검사장은 종종 제동을 걸고 나섰다. 가장 크게 내세우는 이유는 바로 경제였다.

[한성그룹이 본보기로 때려 맞는 것 보고 기업들이 모두 몸을 사리고 있어. 한성그룹조차도 저렇게 흔들리는데 다른 기업들은 얼마나 타격을 받겠느냐는 말이야.]

[자업자득 아닙니까? 합법적으로 경영했다면 타격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요.]

[기업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제의 문제야. 대기업이 이렇게 몸을 사리니 나라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겠나? 더욱이 정권 초기에 이렇게 기업을 때려잡는 것은 이 정권에도 큰 부담을 줄 수 있어.]

결국 친재벌 정책을 펴고 있는 현 정권이 태산의 수사를 부담스러워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전 법무부장관의 우려대로 두 번의 진보 정권 집권 후 대권은 보수 정권에게 돌아갔다. 태산은 전 장관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검찰개혁을 서둘렀는지, 왜 그렇게 조바심을 냈는지를 정권이 바뀐 후 실감하고 있었다.

태산이 비리 정치인과 법조인들을 숱하게 쳐냈지만 정권이 바뀌자 분위기는 다시 슬금슬금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법원으로 보낸 사건들도 솜방망이 판결을 받기 일쑤였다.

전 장관은 정권이 바뀌면 결국 어느 정도는 역행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일 테다.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큰 변화를 이뤄놓아야 조금이라도 진일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태산은 불만을 품고 불퉁하게 검사장실로 들어섰으나 의외로 돌아보는 검사장의 얼굴은 밝았다.

“강 부장, 좋은 소식이 있네.”

반기는 검사장을 보며 태산은 얼떨떨해 물었다.

“예? 무슨 소식 말씀입니까?”

“자네가 훈장을 받게 되었어. 오는 법의 날 기념식에서 홍조근정훈장을 받을 유공자로 선정되었네.”

갑자기 무슨 훈장이란 말인가. 전 정권에서도 받은 바 없는 훈장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진행해 오고 있는 재벌 수사를 몹시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 현 정권이 대뜸 훈장을 주겠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축하하네. 과천정부청사에서 전수식을 한다고 하니 일정 비워두게.”

검사장이 손을 내밀며 축하 인사를 건네 태산은 엉겁결에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법의 날 당일 오전 태산은 정부과천종합청사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법질서 확립과 인권 보장에 헌신한 수상자들의 노고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저 역시 이 자리에 자리한 유공자들과 함께 법치주의를 실현해 나가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법무부장관이 연단 위에서 간단히 축사를 한 후 유공자 훈・포장 전수식을 거행했다. 유공자들이 하나하나 호명되어 연단 위로 오른다.

“다음은 홍조근정훈장 수상자입니다. 강바른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반부패수사부장.”

호명된 태산이 연단에 올랐다. 법무부장관이 훈장증을 전달한 후 가슴에 직접 훈장을 달아주었다. 태산은 훈장증을 받아 한 손에 들고 제자리로 돌아와 기념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훈장을 받았다 해서 특별히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명예로운 일이긴 할 터이지만 상을 주는 의도가 어쩐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기업범죄 수사를 통해 깨끗하고 투명한 기업경영 윤리가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사에 제동을 걸어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상을 주겠다니 영 앞뒤가 맞지 않았다.

기념식이 끝나고 태산이 자리에서 일어서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법무부장관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바른 부장,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장관님.”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대로 돌아서려는 태산을 장관이 서둘러 붙잡았다.

“바쁘겠지만 잠깐 얘기 좀 나누죠. 장관실로 갑시다.”

태산은 묵묵히 장관을 따라 장관실로 향했다. 장관실로 들어와 응접 소파에 앉자 장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동안의 활약은 잘 지켜보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참 대단해요.”

장관은 그렇게 운을 떼고는 은근한 눈빛을 던졌다.

“한성그룹과는 특별한 관계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사심 없이, 단호하게 수사를 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보통은 본인이 불편해서라도 손을 떼려 하는 법인데요.”

“어차피 저는 관리직일 뿐 주임검사는 따로 있습니다. 제가 공치사를 받을 일이 아닙니다. 오늘 훈장을 받은 것도 저희 반부패수사부 검사들을 대표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태산은 즐겨 써왔던 변명을 꺼내 들었지만 장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장관은 허허 웃고는 다시 한번 음험한 시선을 던졌다.

“알 만한 사람끼리 연막 치지 맙시다. 주임검사가 누구든 실질적으로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강 부장 아닙니까? 대한민국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에 대중들도 강 부장을 영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필요하다면 친족은 물론 아버지도 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면서 한마디를 슬쩍 덧붙이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감 때문인지 공명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장관은 태산의 동기가 공명심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투였다. 사람은 자기가 짐작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생각하는 법이다. 장관 자신이야말로 정의감보다는 공명심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일 것이다.

물론 태산에게 딱히 정의감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태산에게는 조재용 회장과 그 자식들만 특별히 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강바른에게는 친족이라고 해도 태산에게는 생판 타인일 뿐이었다.

“정권 초반부터 이렇게 기업의 숨통을 조이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어요. 하지만 나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초장에 버릇을 확 잡아두는 것도 괜찮아요. 그렇게 하면 이후에 좀 더 다루기가 쉬워질 겁니다. 아무래도 강 부장 일하는 방식을 보면 나랑 코드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란 말입니다.”

장관이 안경 너머로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태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공안검사로 오래 일한 연륜이 느껴졌다.

태산은 순간 혐오감을 느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죄지은 놈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일해왔다. 누군가를 길들이기 위해 형벌을 채찍처럼 이용하는 장관의 방식과 비슷하다는 데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같이 손발 맞춰서 잘해봅시다. 강 부장이 협조만 잘해준다면 나도 팍팍 밀어주지요.”

그러고는 응접 소파 옆 협탁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태산이 물끄러미 파일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이게 뭡니까?”

“손발이 잘 맞을지 한번 맞춰봐야죠.”

장관은 알 수 없는 말로 답할 뿐이었다. 태산은 파일을 들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전 대통령 친인척 비리에 대한 기획수사 자료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그제야 태산은 자신이 훈장을 받은 이유를 짐작했다. 장관은 태산을 공명심에 눈이 먼 인간으로 여기고 직위와 명예를 통해 회유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유한 태산을 정권의 도구로 써먹을 셈이다.

불현듯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런 것 따위에 넘어갈 성싶으냐.

태산은 구역질을 눌러 참으며 조용히 파일을 덮었다.

“잘 알았습니다.”

장관은 태산의 답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이내 안색이 바뀌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해 보고 혐의가 있으면 기소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주신 시나리오 그대로 엮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태산은 파일을 장관 쪽으로 다시 밀어놓았다. 기대를 배신당한 장관이 얼굴을 붉히며 태산을 노려보았다.

“강 부장,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세상 혼자 사는 거 아닙니다. 쓸데없는 고집으로 스스로 입지를 좁힐 셈입니까? 지난 정권에서야 믿고 쓸 수 있는 인재가 부족해 강 부장을 이례적으로 승진시키며 과감히 밀어주었지만 이 정권은 달라요. 내가 내민 손을 거절하면 앞으로 강 부장의 앞날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법무부장관이 인사권을 두고 협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태산이 언제 그런 것을 마음에 두었던가.

“제 앞날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부디 신경 꺼주십시오. 저는 이 정권 사람이든 저 정권 사람이든 누구도 특별히 봐줄 생각이 없습니다. 더욱이 청탁받고 수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태산은 더 할 말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말씀 끝나셨으면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장관실을 나가려는 태산의 등 뒤에서 장관이 엄포를 놓았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주지. 숙고해 보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시오.”

“필요 없습니다. 제 결심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태산은 단호히 답하고는 분노로 푸르르 떠는 장관을 남겨두고 가벼운 걸음으로 장관실을 나왔다.

* * *

그로부터 약 반년간 태산은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를 지휘해 묵묵히 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부서 특성상 태산이 맡은 사건들은 권력형 범죄가 대부분인데 여당 관련 인사나 재벌이 피의자인 경우 유독 수사에 장애가 많았다.

영장을 청구하면 기각되는 일이 잦았고 대부분 통과한다는 영장실질심사에서 피의자가 풀려나는 일 또한 비일비재했다. 어려운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수사해 기소한 건들이 재판을 거치면 어김없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사법이 독립되어 있다지만 정권이 바뀌고 나니 법원에도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보수성향의 법관들이 대거 영전하면서 정권 입맛에 맞는 판결을 알아서 척척 뽑아내고 있는 탓이었다.

애썼던 수사의 결과가 초라하게 끝날 때마다 부하 검사들은 좌절하고 분노하며 태산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태산으로서는 그들을 일으켜 세워 또다시 다른 사건에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할 뿐이었다.

애초에 검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힘껏 수사하여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꼼꼼히 구비해 기소하고 최대한 무겁게 구형하는 것. 그다음은 법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태산은 그런 마음으로 결과를 생각지 않고 사건 하나하나만을 보며 정진했다.

시간은 지나 어느새 다시 인사 철이 돌아왔다. 법무부장관의 제안을 거절한 바도 있고 해서 태산은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개된 인사 결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장 강바른 → 국외 훈련에 따른 대기 발령]

국외 훈련이라는 것은 검사의 해외 연수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다. 해외에 체류하며 외국의 선진 법 시스템을 배워 오라는 취지였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젊은 검사들에게 해외 연수는 휴식하며 재충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태산은 직위상 이미 차장급이었고 새삼 해외 연수를 다녀올 군번이 아니었다. 거침없이 승진해 온 태산에게 하필 이런 시기에 해외 연수를 가라는 것은 상승세를 꺾어놓는 동시에 멀리 보내 대중에게 잊히게 만들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었다.

“허참,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태산은 어처구니없어 탄식했다. 그러고는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강바른이가 꽤 대단한 놈이 되긴 한 모양이야? 이렇게까지 견제하는 것을 보면.”

태산은 손을 뻗어 쭈욱 기지개를 켠 다음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 좀 쉬고 오는 것도 괜찮으려나?”

10년 가까이를 쉼 없이 전력 질주 해왔다. 이제는 한숨 돌릴 때도 되었다. 전력으로 일해도 한계가 있는 현실에 조금 지친 것인지도 모른다. 푹 쉬고 나서 다시 출발해도 괜찮을 것이다. 남들보다 몇 배나 앞서 있으니 몇 년 쉰다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은 없다.

굳이 저항한다면 억지로 보낼 방법은 없을 테지만 태산은 인사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애써 저항해 국내에 남아 있는다 해도 지방 한직으로 뺑뺑이를 돌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태산은 이미 마음을 비웠으나 지인들은 전혀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바로 전화기가 울려댄다. 태산이 맹렬히 진동하는 핸드폰 액정을 힐끗 바라보았다.

[최진우]

아직 대외적으로는 발표가 나지도 않았을 테지만 내부적으로는 인사 결과가 나왔으니 부러 찾아본 모양이다. 전화받기를 망설이고 있는 사이 문자 알림음도 쉴 새 없이 울려댄다.

당황하고 분노했을 동료들에게 일일이 사정을 설명하고 진정시킬 생각을 하니 태산은 벌써부터 골머리가 아팠다.

태산은 천천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 최 검사. 알고 있어. 진정해.”

태산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최 검사를 달랜 후에도 태산은 많은 전화를 받았다. 좌천성 인사가 아니냐고 기사가 크게 난 후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연락해 함께 분노하고 위로해 주었다. 태산은 새삼스럽게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느끼게 되었다. 그 무거운 기대 때문에라도 빠른 시일 내에 돌아와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자네 거취 말이네. 갑작스럽게 결정되어서 놀랐을 테지.”

“예, 좀 황당했습니다. 국외 훈련을 신청한 적도 없고 미리 언질을 들은 바도 전혀 없습니다만.”

인사 발표 후 검사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태산은 볼멘소리를 했다.

“그게 참… 위에서 내려온 결정이라… 갑작스러운 것은 아네만 훌륭한 인재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는 의도니 너무 서운해 말게. 높이 뛰어오르려면 잠시 웅크리는 때도 있어야지. 잠시 쉬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

검사장은 곤란해하며 중언부언 말이 길었다. 열심히 일한 부하를 비호해 주지 못해 은근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또 한편으로는 태산이 거부할 경우 법무부장관과 마찰이 생기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고 있는 듯했다.

“1년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군요.”

태산이 선선히 답하자 검사장은 반색했다.

“그, 그래? 잘 생각했네. 캐나다에 1년짜리 연수 자리가 있는데 거기가 좋겠군. 풍경 좋고 공기 좋고. 쉬다 오긴 딱 아닌가?”

검사장은 태산이 결정을 무르지는 않을까 싶어 바로 밀어붙였다. 1년 정도면 태산에게도, 장관에게도 체면이 선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예, 그럼 그렇게 해주십시오.”

해외 연수가 확정된 후 태산은 반부패수사부 소속 검사들과 환송회를 가졌다. 동료 검사들은 모두 무거운 얼굴로 술만 기울일 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보다 못한 태산이 웃음기를 띠며 타박했다.

“표정들이 왜 그렇습니까? 마지막 회식인데 좋은 얼굴로 헤어져야죠.”

그제야 검사들이 앞다투어 하소연했다.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부장님? 뜬금없이 국외 훈련이라니요. 이건 유배를 보내는 거나 매한가지 아닙니까?”

“맞습니다. 차라리 한직이라도 현장에서 일하도록 남겨뒀다면 이 정도로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수사를 전폭 지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열심히 일한 사람을 이렇게 홀대하다니요. 우리는 그동안 무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얘기를 하던 한 검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검사들은 침통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수사하며 겪었던 좌절감과 실망감이 한꺼번에 밀려온 탓이리라.

태산은 안쓰러움을 느끼며 검사들을 다독였다.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일 것 없어요. 고작 1년입니다. 1년 정도는 눈 깜박할 사이에 금방 지나갑니다.”

그렇게 말한 태산이 문득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여러분처럼 열정이 넘치는 젊은 검사들이 있어 떠나는 마음이 가볍네요. 여러분이 있어 검찰의 미래는 밝을 겁니다. 부디 지금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사에 임해주기를 바랍니다.”

새삼 태산을 돌아보는 젊은 검사들의 눈에서 굳은 결기가 비쳤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혼자 날뛰어봤자라니까요. 결국 정권 바뀌니 바로 찍혀서 좌천되는 것 좀 보세요.”

김정민 부부장의 말에 이승경 부부장이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환송회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함께 택시에 탄 두 부부장은 안타까워하기는커녕 고소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표정 꾸며내느라고 아주 진땀 뺐네. 아무튼 강바른 그 자식은 좌천되어 가는 마당에도 말하는 꼬락서니가 건방지기 짝이 없단 말이야. 그렇게 헛바람을 불어 넣어놨으니 평검사들이 주제 모르고 지가 강바른이라도 된 양 설치면 어쩔 거야? 괜히 골치 아프게.”

가는 마당이라고 어린 상사에게 존대는커녕 이 자식 저 자식 함부로 말하는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들이받는 것도 젊을 때 한때죠. 그래 봤자 세상 안 변한다, 별수 없다는 좌절감을 몇 번 겪고 나면 설쳐대던 놈들이 더 철저하게 변절한단 말입니다. 들이받다가 한계를 느끼고 나가떨어져 봐야 해요.”

김 부부장의 냉소에 이 부부장도 흥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고말고.”

* * *

다 내려놓고 떠나는 와중에도 태산은 마지막까지 분주했다. 한 몸 움직이는 것인데 희한하게도 정리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업무를 제대로 인수인계하고 가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나기 직전까지도 수사 자료를 붙들고 있었다.

여러 차례 송별회도 해야 했다. 반부패수사부 검사들과의 송별회에 부장실 직원들과도 송별회를 따로 했고 심지어 최 검사가 대검 감찰과 시절 동료 검사들을 몰고 와 환송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수없이 걸려오는 연락들에 답하고 배진만 부장과 구태호 검사는 직접 찾아가 인사를 했다. 마침 배 부장과 구 검사가 같은 지검에 근무하고 있어 겸사겸사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예전 마약전담반 시절처럼 말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으로 취해 ‘웃대가리들’을 성토했다. 태산은 그것을 그들 나름대로의 서툰 위로라고 받아들였다.

로스쿨에서 한창 열심히 공부 중인 조규완 주임은 출국 전에 꼭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하더니 얼굴을 보자 애석해 어쩔 줄 몰랐다.

“검사 발령이 나면 누구보다도 먼저 부장님께 알리고 감사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검사로 발령받는 데 자신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그 점이 믿음직해 태산은 웃었다.

“검사 대 검사로 다시 만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태산의 대꾸에 그제야 조 주임도 활짝 웃었다.

엉뚱하게도 태산보다 더 바빴던 것은 범진이었다. 따라가겠다는 것을 간신히 뜯어말리고 나니 캐나다에서 필요할 물건들을 준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일 년간의 짧은 체류이니 필요한 것은 가서 사 쓰면 된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쓰던 물건들이 편하고 그리울 것이라며 이것저것 챙기고 확인받는데 차마 그것까지는 만류하지 못했다.

이사 준비를 대신 해주어 손은 덜었지만 대신 간소하게 가려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고 범진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몇 번이나 체크하고 또 체크하는 통에 태산까지 덩달아 정신이 분주했다.

드디어 범진이 모든 준비가 완벽히 끝났다고 선언한 날 태산은 내심 안도하며 범진과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태산은 인천지검장으로 부임한 원신영 검사장을 찾았다. 이것이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의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다.

인천에 오니 불현듯 선화가 떠올랐지만 태산은 고개를 저어 지워 버렸다. 최근 수년간 태산도 선화도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선화 역시 뉴스를 통해 태산의 해외행을 알고 있을 것이고 연락을 하고 싶었다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선화가 굳이 연락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태산도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젠 서로 사는 세계가 너무 달랐으므로.

“강 부장!!!”

태산이 검사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원신영 검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태산의 손을 잡았다. 태산은 손이 잡힌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출국이 얼마 안 남아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잘 왔어요. 경황이 없을 텐데 나까지 챙겨줘서 고마워요.”

원 검사장이 태산의 손을 끌어 자리에 앉히고는 덕담부터 건넸다.

“여러 가지 시끄러운 말들을 많이 들었겠지마는 나는 좋은 공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가서 잘해봐요.”

“예, 감사합니다.”

태산은 그렇게 답했지만 원 검사장의 덕담을 편하게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산은 망설이다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제주지검장으로 발령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인천지검은 수도권에 위치한 상당히 큰 규모의 지방검찰청이다. 그에 비해 물 건너 제주지검은 검사장급들에게는 험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곳이었다. 인천지검에서 제주지검으로의 발령은 그야말로 좌천에 다름 아니었다.

“혹시 저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은 아닙니까?”

이어지는 태산의 말에 원 검사장은 빙그레 웃었다.

* * *

“혹시 저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은 아닙니까?”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에서 처음 만나 호흡을 맞춘 원신영 검사장과는 대검 감찰부에서도 함께 일하며 수많은 공직자들을 낙마시켰다. 그 공을 인정받아 인천지검장으로 영전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적도 많이 만든 셈이다. 태산이 좌천된 지금, 함께 쌓았던 공은 이제 원 검사장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원 검사장은 미소로 답했으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다 강 부장 덕분입니다. 이 이상 무엇을 더 욕심내겠어요. 나는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초탈한 듯한 원 검사장의 답에 태산은 다시 물었다.

“사직하고 개업하실 계획입니까?”

보통 고위급 검사들이 좌천이나 다름없는 인사를 당하면 더 이상의 출세는 물 건너 간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인사가 줄줄이 적체되어 있는 마당이나 한번 밀려나면 다시 올라오기 힘들었다. 대놓고 나가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여겨 인사 자체를 모욕적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인사 결과가 기대했던 바에 못 미치면 아예 사직을 하고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약발이 더 떨어지기 전에 빠르게 개업해서 수임료라도 크게 벌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원 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정년 퇴임까지 검찰에 남는 것이 꿈이에요. 남들 보기에 초라한 곳에서 마지막을 맞는 한이 있어도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원 검사장은 그렇게 답하고는 태산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강 부장이 크게 되려나 봐요.”

“예?”

뜬금없는 말에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크게 될 사람에게는 운명이 시련을 주는 법이죠. 원래도 아우라가 남다른 사람이었지만 지금 보니 전보다 더 빛나는 것도 같고… 진짜 대통령이라도 되는 거 아니에요?”

원 검사장이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태산은 그저 웃어넘길 따름이다.

“어쨌든 나는 검찰에 계속 남을 생각이에요. 그러니 언젠가 강 부장이 다시 날아오르는 날이 오면 나를 잊지 말아줘요.”

“물론입니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태산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원 검사장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 듯했다. 태산도 결국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장난처럼 나눈 이야기였지만 태산의 답에는 일말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원 검사장은 누구보다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고 누구보다 태산을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 후에 또 기회가 생긴다면 함께 호흡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태산의 출국 날이 되었다. 인천공항 출국장 앞에서 태산은 범진과 마주 서 있었다. 범진은 초조한 듯 서성이며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보다 못해 태산이 채근했다.

“그만 들어가라니까.”

“정말로 제가 안 모셔도 되겠습니까?”

캐나다까지 따라가겠다는 걸 간신히 말려놨지만 마지막까지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범진이다.

“내가 유학 가는 10대 꼬마냐? 보모라도 붙여야 안심이 되겠어?”

태산은 웃음을 터뜨리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 것이었다.

처음 만난 시절부터 범진은 그림자처럼 태산을 지근에서 따랐다. 그러다가 돌연 태산이 죽음을 맞고 다른 몸으로 다시 돌아온 후에도 범진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서 태산을 지켰다.

비록 1년일지라도 먼 타국으로 떠난다. 이제는 바로 달려오고 싶어도 불가능한 거리로 가게 되는 것이다.

항상 태산의 곁을 지켜온 범진으로서는 졸지에 지켜야 할 것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의지하던 주인을 잃은 충견처럼 불안하지 않겠는가.

조금 쓸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범진에게 태산은 자신 대신 지켜야 할 것을 일러주었다.

“너는 한국에서 할 일이 많지 않냐. 태산지주는 물론이고 한성그룹도 니가 잘 살펴다오.”

구체적인 임무를 맡기니 그제야 얼굴이 좀 풀리는 범진이다.

“예, 형님.”

간신히 밝은 얼굴로 대답하는 범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는데 저만치서 누군가 소리 높여 태산을 불렀다.

“선배니임~~~!!”

돌아보니 최진우 검사가 안소영 검사와 전윤지 검사를 대동하고 다가오며 있는 힘껏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범진도 힐끗 돌아보더니 얼른 몸을 물렸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짐은 부쳐두었으니 도착해서 받으시는 대로 연락 주십시오.”

검사 동료들에게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면 곤란하다고 생각해 조심하는 것이다. 범진은 다가오는 검사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최 검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가 범진이 지나간 후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더라? 아는 얼굴 같은데…….”

최 검사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이내 태산에게 주의를 돌렸다.

“선배님, 배웅하러 왔어요.”

하지만 안 검사는 빠르게 멀어지는 범진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이전부터 안 검사는 태산과 범진이 모종의 연대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어떤 연유로 손을 잡게 되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태산은 안 검사의 주의를 돌리려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환송회 하고 통화했으면 됐지 뭘 또 공항까지 나와?”

“배웅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 쓸쓸히 가실까 봐 나왔는데 누가 와 있었네요. 반겨주시지도 않는데 괜히 왔나 봐.”

과거에 범진과 마주친 적이 없는 전윤지 검사가 천진하게 농담을 던졌다. 태산이 웃으며 받았다.

“아니에요. 잘 왔어요. 최 검사가 온다기에 혼자 올 줄 알았는데 안 검사랑 전 검사까지 끌고 올 줄은 몰랐죠.”

태산이 최 검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일은 어떻게 하고?”

“연차 썼어요.”

“날 배웅하려고 귀한 연차를 내주다니 영광인걸.”

“선배님 배웅하는 건데 연차 아니라 뭐라도 써야죠.”

태산과 최 검사가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안 검사가 불쑥 말했다.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 검사의 진지한 인사에 비로소 다른 검사들도 웃음기를 지우고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헤어져서 너무 아쉽습니다.”

“돌아오시면 또 같이 일해요.”

태산은 동료 검사들과 하나하나 악수를 나누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봅시다.”

동료들이 아쉬움과 근심을 떨칠 수 있도록 태산은 씩씩하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게이트로 걸어 들어갔다. 검사들은 그 자리에 서서 태산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아… 마음이 왜 이렇지? 헛헛하고 쓸쓸한 것이…….”

최 검사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전 검사도 동조했다.

“그러게. 꼭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어쩌면 검찰로 다시 돌아오시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안 검사가 툭 던져놓은 말에 다른 두 검사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심히 한 말에 동료들이 정색하고 묻자 안 검사는 당황하여 더듬더듬 설명했다.

“아니요, 그냥… 훌훌 다 털고 떠나시는 것 같아 보여서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말았네요.”

두 검사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태산의 뒷모습을 다시금 유심히 바라보았다.

“상어 같은 분이죠. 계속 헤엄쳐서 앞으로 나가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데 강제로 발이 묶였으니 어떻게든 다른 단계로 도약하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다른 검사들의 얼굴이 절로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안 검사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냥 제 느낌일 뿐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 그렇죠? 그만둘 작정이었다면 대기 발령 났을 때 진즉에 그만두셨겠죠. 순순히 비행기를 탈 것이 아니라.”

“그렇지. 강 부장님이야 태생이 칼잡이인데 검찰 떠나서 어디로 가시겠어? 분명 다시 돌아오셔서 언제 쉬었냐는 듯 활약하실 거야.”

검사들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불안한 예감을 지우며 돌아섰다.

동료 검사들의 감상이 어떻든 태산은 검찰을 떠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았다. 기내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도전에 조금 설레는 기분으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옆자리에 앉기에 태산은 무심히 돌아보았다. 돌아본 시선 끝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익숙한 얼굴이 불쑥 들어와 태산은 흠칫 놀랐다.

“어머, 검사 오빠! 여기서 이렇게 보네. 웬일이야?”

선화가 말과는 다르게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싱글거리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태산은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선화를 노려보았다.

“놀란 척하지 마. 다 알고 탄 거지?”

“무슨 소리야? 완전 우연이야, 우연. 나 캐나다에 바이어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요즘 뷰티한류 때문에 여기저기서 거래하자는 데가 워낙 많아야지.”

묻지 않은 얘기까지 꺼내며 선화는 둘러댔다.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려고 들면 정말로 교묘하게 말을 꾸며내는 여자다. 지금의 거짓말은 영 성의가 없는 것으로 봐서 일부러 따라왔다는 것을 들켜도 전혀 상관없다는 투였다.

“당신같이 잘나가는 사업가가 해외 출장 가면서 비즈니스도 아니고 이코노미를 탄다고?”

“뭐든 아껴야 잘 살지. 자린고비 마인드가 있어야 부자가 되는 거라고.”

평소 선화의 신조와는 정반대되는 말이었다. 돈이 돈을 불러오므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도록 팍팍 써야 한다, 가진 돈을 아낄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써서 더 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선화의 신조였다.

“말이나 못하면.”

코웃음을 치는 태산에게 선화가 되물었다.

“그러는 자기는 한성그룹 상속자 주제에 이코노미를 탄다니 말이 돼?”

“내 돈 쓰는 거 아니야. 나랏돈으로 유학 가는 거니까 그렇지.”

흐응~ 하고 선화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짧게 응수했다.

“아무튼 그 속 빤히 들여다보이니까 괜한 거짓말 꾸며댈 생각 하지 마.”

태산의 엄포에 그제야 선화가 생긋 웃으며 실토했다.

“아무튼 자기 성격 진짜 만만치 않다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모른 척해줘도 될 텐데.”

“내가 이 비행기 타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알아낼 방법이야 많지.”

선화는 의뭉을 떨다가 태산이 채근하듯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털어놓았다.

“여행사 직원 중에 절친이 있거든.”

태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돈이든 정보든 친분을 이용해 뜯어내는 선화의 재주야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선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그나저나 설마 했는데 일행 없어? 정말 혼자야?”

“그럼 혼자지.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누구랑 같이 가?”

“여태 해외 가서 내조해 줄 여자 하나 못 구했어? 검사 오빠 그렇게 안 보이는데 영 맹탕이네. 그 나이까지 뭐 했어?”

선화가 쯧쯧 혀를 찬다. 태산은 어처구니가 없어 타박했다.

“이 나이까지 뭘 했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있지. 은인이신데. 유배 받아 가는 길에 돌봐줄 사람도 하나 없으면 당연히 마음이 아프지.”

“별생각 없었는데 그렇게 정곡을 찌르니까 좀 아프네.”

태산의 너스레에 선화는 쿡쿡 웃었다.

“그래서? 당신이 돌봐주려고?”

“꿈 깨셔. 바이어 만나러 가는 김에 겸사겸사 괜찮나 확인하고 위로나 좀 해주려던 것뿐이니까. 실의에 빠져서 고개도 못 들고 있으면 가엽잖아.”

“다행이네. 돌봐주겠다고 나섰다면 엄청 부담스러웠을 텐데.”

“걱정해서 온 사람한테 말 진짜 얄밉게 한다.”

선화가 태산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을 흘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선화는 좌천되어 떠나는 강바른에게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고마워 태산은 조금 애틋한 심정이 되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비행기는 밴쿠버로 가는…….”

투닥거리는 사이 기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먼 길이지만 동행이 있어 태산은 조금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가는 동안 잊을 만하면 선화가 자리 좁다고 투덜대는 바람에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무료하지 않은 비행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