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72화 (72/78)

제2장 절치부심

HS홀딩스 임시 이사회 당일, 조재용 회장은 불편한 몸으로도 휠체어를 타고 몸소 이사회로 나갔다. 조현영이 휠체어를 밀고 주인호 실장이 함께 호위해 HS홀딩스 사옥 회의실로 들어서자 자리에 모인 이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들의 얼굴에서는 당혹감이 스쳤다. 건강이 예전 같지가 않아 거동이 힘들다던 조 회장이 멀쩡히 이사회에 나타날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왜 다들 썩은 표정이야? 내가 못 올 곳에 왔어? 무슨 작당들을 하고 있기에 총괄 회장이 계열사 이사회에 온 당연한 일에 이렇게 정색들을 하느냔 말이야!”

조 회장은 괄괄한 목소리로 이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사 하나가 얼른 답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이사회에 직접 참석하시니 놀라서 그렇습니다. 건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사의 입에 발린 아첨에 조 회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현영이 회의실 테이블 앞 상석으로 조 회장의 휠체어를 밀고 가 세웠다. 대표이사인 조동한과 그 자식들은 아직 참석하지 않았지만 회장은 절차니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회의를 진행시켰다.

“오늘 이렇게 소집한 것은 조동한 대표이사의 경영 실책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야. 동한이가 일을 그렇게 망치도록 내버려 두고 나한테는 알리지도 않은 자네들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지만…….”

조 회장이 매서운 눈으로 이사들을 노려보자 이사들은 뜨끔해 시선을 피했다.

“그 책임은 차차 추궁하도록 하고 오늘은 일단 동한이를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하는 거로 시작하지.”

“회장님, 아직 대표이사님이 출석하지도 않으셨는데…….”

“여긴 내 회사야. 손가락질 한 번으로 대표이사 모가지 정도는 자를 수 있어. 체면 생각해 형식을 취해서 교체하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지!”

이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 회장은 절차를 강행했다.

“대표이사 해임에 찬성하는 이사 손 들어.”

조 회장은 급한 마음에 자신이 먼저 손을 들며 말했다. 현영과 몇몇 이사들이 뒤이어 손을 들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이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경영 능력만 따지자면 현영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데다 눈앞에서 서슬 퍼렇게 버티고 있는 조 회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특히 주 실장에게 미리 협박에 가까운 언질을 받은 이사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이 쿠데타에 잘못 가담했다가 전세가 뒤집히면 앞으로의 거취를 장담할 수 없다. 대세는 여전히 조동한 대표이사에게 있었고 시간은 조동한의 편이다.

이사들이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을 때 조동한 대표이사가 자식들을 거느리고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조동한은 조 회장을 보고도 놀란 기색은커녕 눈도 깜박하지 않고 말했다.

“회장님, 대표이사도 없이 이사회를 진행시키시다니요. 아무리 총괄 회장이시지만 지나친 독단이십니다. 요즘은 그런 고릿적 경영방식이 통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닥쳐라, 이놈아! 니가 내 회사를 말아먹고 있으면서도 그런 뻔뻔한 소리가 나오느냐? 내가 어떻게 해서 일으킨 회사인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니가 중국에다 이천억을 꼴아박더니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또 삼백억을 날렸다더구나. 이래도 잘못이 없다고 할 테냐?”

조동한은 현영을 흘낏 바라보고는 반박했다.

“누구한테 무슨 말씀을 들으신 건지 모르겠지만 잘못 알고 계세요. 중국 홈쇼핑 사업이 지금은 적자라도 앞으로의 전망을 생각하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만한 투자가치가 있는 사업입니다. 더구나 상품관리 시스템은 우리 그룹의 물류 부문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고 당장 성과가 없다고 중단한다면 지금까지의 투자도 모두 물거품이 됩니다.”

현영이 끼어들어 반박했다.

“감사 결과 위험성이 너무 커서 이사회 승인 전에는 추가 투자를 못 하도록 막았지 않나요? 독단적으로 추가 투자 해 더 큰 손실을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히 대표이사님의 실책이죠. 지금 독단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것이 어느 쪽인가요? 회장님은 대표이사님이 앞으로도 회사 경영을 이런 식으로 하실까 봐 염려하고 계신 겁니다.”

조동한이 어린애를 보듯 한심하다는 눈으로 현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몸을 사리다가는 언제까지나 현상 유지만 할 뿐이야. 큰돈을 벌어들이려면 그만큼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지.”

“네 이놈!!!! 니가 아비를 속이고도 계속 그렇게 변명만 늘어놓을 셈이냐?!”

조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조동한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사들을 향해 말했다.

“보시다시피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경영상의 결정을 두고 근거 없이 제가 회사를 망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하시고 계시고요. 회장님께서 노령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해 도저히 회사를 경영하실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이미 법원에 성년 후견을 신청해 놓은 상황입니다.”

조동한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현영과 주 실장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성년 후견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후견인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성년 후견이 결정되면 중요법률행위를 홀로 할 수가 없다.

조 회장의 손발을 완전히 묶어놓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설령 성년 후견 결정이 내려지지 않더라도 성년 후견 신청이 법원에 제기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조 회장의 경영 능력은 도전받을 것이었다. 조 회장의 결정에 대해 사사건건 치매환자의 변덕은 아닐까 의심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조 회장은 눈을 부릅뜨고 노성을 내질렀다.

“뭐, 뭐라고? 대체 누구 마음대로…….”

조동한은 전혀 아랑곳 않고 조 회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언했다.

“이러한 관계로 오늘 제가 이사회에 올릴 안건은 조재용 총괄 회장님을 해임하고 명예 회장으로 추대하자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회장님을 이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푹 쉬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죠.”

조 회장은 황당해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뻐끔했다. 조동한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이사들을 향해 말했다.

“표결하겠습니다. 회장님의 해임과 명예 회장 추대에 찬성하시는 분 거수해 주십시오.”

조동한과 그 자식들이 우르르 손을 들었다. 이사들은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대세가 완전히 조동한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모두 분위기로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새 하나둘 거수하기 시작한다.

“이, 이놈들…….”

조 회장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이를 갈며 손을 드는 이사들을 노려보았지만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확히 해임 의결정족수를 채웠을 때 조동한이 선언했다.

“이것으로 조재용 총괄 회장을 해임하고 명예 회장으로 추대하겠습니다.”

“이, 이놈! 네놈이 감히!!!!”

조 회장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휠체어에서 일어나려 몸을 일으켰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동한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들고 한 발을 떼던 조 회장은 순간 멈칫하더니 가슴을 움켜잡고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할아버지!!!”

현영이 달려와 조 회장을 부축하며 다급히 외쳤다.

“구급차! 구급차 불러주세요!”

주 실장이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 조동한은 무감동한 얼굴로 이사들을 향해 말했다.

“다음 안건은 정신이 또렷하지 못한 전 총괄 회장을 부추겨 경영에 큰 위험을 야기한 조현영 이사의 해임 건입니다.”

현영은 숙부의 냉혹한 처사에 할 말을 잃었다. 구급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현영은 자신이 이사직에서 해임되는 의결이 이루어지는 것을 분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너무 할아버지만 믿고 있었던 것이 패인이었어. 할아버지의 지지만 얻으면 그 뒤는 척척 해결될 줄 알았는데… 숙부가 할아버지 손발을 그렇게 묶어버릴 줄이야.”

현영은 술잔을 기울이며 뼈아프게 중얼거렸다. 태산은 현영이 소개해 준 회원제 클럽 내실에 현영과 마주 앉아 잠자코 현영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고모할머니가 처음 성년 후견을 신청할 때만 해도 어림없는 얘기였지. 할아버지가 전보다 몸은 허약해지셨어도 정신만은 또렷했으니까. 그런데 이사회에서의 일로 쓰러지시면서 정말로 그런 상황이 되어버렸어. 말도 못 하시고 의식도 흐린 채 자리에 누워만 계시니. 소송으로 다툴 생각이지만 가망이 없어. 할아버지가 이대로 얼마나 버티실지…….”

현영은 짐짓 눈물마저 글썽였다. 조부가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회사 경영에서 밀려난 억울함 때문인지 혹은 그 모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숙부가 기세를 모아서 다른 계열사 이사 자리에서도 하나하나 나를 밀어내고 있어.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한성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될 거야. HS E&M 대표이사 자리만은 어떻게든 방어해 보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내 편이던 이사들이 하나둘 이탈하고 있어서 그마저도 불투명해.”

현영이 태산을 향해 간곡하게 호소했다.

“바른아, 니가 나 좀 도와줘야겠어. 미우나 고우나 해도 니 친아버지잖아.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경영에서 밀어내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형이 그룹을 독차지하는 걸 이대로 보고 있을 거니? 그건 절대 옳은 일이 아니야. 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태산은 흐음… 하고 대강 응수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옳은 일이라. 현영이 언제부터 그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인물이었던가.

더욱이 이번 일은 진즉에 승계 구도를 결정하고 물러나야 했을 노회장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이 끝까지 경영권을 쥐고 있다가 일어난 사달이었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다만 언제나 여유 만만이던 현영이 이렇게 절박하게 애원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그것만은 매우 흥미로웠다.

“바른아!”

딱히 동조하지 않는 태산의 태도에 현영은 조바심이 나 다시금 채근하려 했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달란 말이야?”

태산이 술잔을 내려놓고 불쑥 물었다. 현영이 반색하며 답한다.

“주주총회에서 다시 뒤집어볼 거야. 아니, 뒤집힐 때까지 계속 싸울 거야. 나랑 기영이가 가진 지분에 주 실장도 얼마간 가지고 있어. 주 실장 그 능구렁이는 자기가 밝힌 것 이상 숨겨두었을 것이 뻔하고.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할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주식이 추가로 상속되겠지. 우리 남매는 둘 합쳐서 아버지 몫을 나눠 받겠지만 너는 자식이니 다른 형제와 같은 몫을 받게 될 거잖아.”

현영은 손녀이므로 아버지인 조성한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받았을 몫을 동생과 함께 대습상속 받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강바른은 이미 조 회장의 인지를 받은 상태고 조 회장이 사망한다면 조동한, 조민한과 동등한 상속인이 된다.

“니가 주총에서 내 편에 서서 의결권을 행사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거야.”

“그걸로 되겠어? 내가 니 편에 선다 해도 니 숙부들이 너희 남매가 받는 만큼 더 받게 될 텐데. 단순히 계산해도 2 대 2야. 저쪽도 경쟁적으로 의결권을 확보하고 있을 테고.”

현영이 의기소침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확실히 역전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현영으로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애매해서는 안 돼. 확실해지도록 조금 더 포석을 깔아보자고.”

태산이 꺼낸 말에 현영이 솔깃해 물었다.

“어떻게?”

“조동한이 조 회장에게 했던 것처럼 일단 손발 묶어놓고 시작해야지. 아예 조동한 일가를 다 묶어둘 수 있다면 더 좋겠고.”

현영은 태산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애가 달았다. 드디어 태산이 답을 툭 던져놓는다.

“대표이사가 직무와 관련해 심각한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있으면 주총에 해임결의안 올릴 수 있지 않아?”

현영의 눈이 크게 떠진다.

“명백한 불법행위가 있고 그 건으로 구속까지 된다면 해임 찬성하는 주주들도 더 많아지겠지. 그러면 너한테도 싸워볼 가능성이 생기지 않겠어?”

현영은 말을 잃고 입을 꾹 닫았다.

* * *

“지금 마침 중앙지검에서 기업범죄를 조사 중인데 조동한에게도 비자금 조성과 경영권 불법승계 관련해 몇 가지 혐의점이 있어서 말이야. 열심히 캐고 있긴 하지만 기업 상대로 수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니가 확실한 증거를 넘겨준다면 집어넣을 수 있어. 숙부가 몇 년 콩밥 먹으며 재판받을 동안 착실히 그룹을 장악하라고.”

현영은 태산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는 잘 구슬리면 바른을 제 편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만만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바른이 내민 수를 듣고는 결코 바른을 제 편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바른은 현영이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는 위험한 수를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내 손으로 우리 그룹의 치부를 드러내라고?”

“못 할 건 뭐야?”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란 말이야?”

“필요하다면 갈라야지. 남한테 주느니 배를 가르고 털과 고기라도 취하는 게 낫지 않아?”

태산은 빙글빙글 웃으며 현영의 매서운 눈빛을 여유 있게 받았다.

“나야 아쉬울 것 없어. 힘들더라도 어차피 해야 될 일이니까. 열심히 조사해 보고 안 되면 마는 거지. 어차피 검사 일이 기소한다고 매번 재판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심드렁하게 말한 태산이 상체를 기울이며 결론을 내렸다.

“선택은 니가 하는 거야. 그룹을 건재하게 지켜서 고대로 숙부 손에 갖다 바칠 것인가, 치명타를 입고 누더기가 된 그룹이라도 니 손에 쥘 것인가.”

태산은 여유를 부리며 현영의 답을 기다렸다. 남의 손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넘기느니 내 손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해도 배를 가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게다가 한성그룹은 큰 타격을 입는다 해도 남는 것이 적지 않을 터였다. 현영이 결코 그것을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촌이 땅만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삼촌이 그룹을 통째로 꿀꺽 삼키게 생겼으니 그 복통이 예사는 아닐 것이다.

“나는 몰라. 설사 증거를 쥐고 있더라도 내가 직접 넘길 수는 없어. 회사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까지 해가면서 경영권을 쟁취해 놓고 경영진에게 나를 믿고 따르라고 할 수 있겠어? 명분이 없어.”

“그렇다면 네 복수심도, 야망도 딱 거기까지인가 보지. 잘 생각했어. 어차피 쉽지 않은 일인데 일찌감치 포기해.”

태산은 약 올리듯이 말하며 잔을 들었다. 현영이 입술을 꾹 깨문다.

“하지만… 주 실장 그 사람이라면 알 거야.”

“주인호 실장 말이야?”

“그래. 주 실장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원래 그런 거니까.”

현영은 답을 해놓고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설명했다.

“주인호 전략기획실장의 명은 할아버지의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계열사 사장들도 주 실장에게는 설설 기어. 전략기획실은 한성의 정보기관이거든. 계열사 돌아가는 정보를 수집해 중요한 것을 회장에게 보고하는 일, 친인척 포함해 한성그룹 일가 전체를 관리하고 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 뒤를 수습하는 일, 그리고 비자금을 조성해 그 자금을 바탕으로 사회 각계각층에 로비를 하는 일. 그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 실장이야. 그러니 숙부의 비자금 조성과 불법승계 건도 주 실장이 주도했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을 거야.”

현영의 말에 태산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현영은 그 눈빛을 보며 주 실장을 넘긴 것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내심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뱉어놓은 것. 이제는 무를 수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는 수밖에.

“어쨌든 나는 전략기획실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니까 협상은 주 실장이랑 해봐.”

현영은 전략기획실이 하는 일과 자신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을 셈이었다. 전략기획실의 정보가 넘어가 그룹과 숙부에게 타격을 입힐 경우 그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 주 실장이 핵심 키를 쥐고 있었단 말이지?”

태산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영이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 이제 얼마 안 남으신 것 같아. 그간 아무리 정이 없었다 해도 아버지는 아버진데 가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얼굴 보여 드려.”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태산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 재계를 주무르던 조 회장이라지만 이제는 죽음을 앞둔 노인에 다름 아니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식 얼굴 한 번 보겠다는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크게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어쨌거나 이 몸을 빌려준 강바른의 부친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지 않는다면 바른에게도 면목 없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태산은 조 회장의 병실을 방문했다. 회장은 호흡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회장이 정정할 때는 감시역을 붙여두었던 조동한도 거동도 못 하고 누워 있는 회장에게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조 회장의 막내 누이도 자식들 누구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현영과 주 실장만이 곁에서 태산을 맞을 따름이었다.

“잘 왔어.”

현영이 태산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누워 있는 조 회장에게 다가가 손을 쥐고 속삭였다.

“할아버지, 누가 왔는지 좀 보세요.”

현영의 말에도 조 회장의 눈은 뜨일 줄을 몰랐다. 현영은 안타까워 울상이 되었다.

현영이 자리를 비켜주어 태산은 조 회장 가까이로 다가갔다. 하지만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태산은 머뭇거리며 조 회장의 손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바른이가 왔습니다.”

태산의 목소리에 비로소 조 회장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떠진다. 그리고 흐린 눈동자로 아들의 모습을 찾았다.

“하, 할아버지! 정신이 좀 드세요?”

현영이 다가와 소리치자 조 회장의 흐린 눈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조 회장은 가만히 태산과 현영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조 회장의 눈빛은 평화롭고 심지어 환희에 차 있었다.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조 회장이 그 둘의 모습을 보고 미래의 화려한 청사진을 꿈꾸고 있을지도 몰랐다.

한참 자식들을 바라보고 있던 조 회장의 눈빛에서 어느새 기운이 빠져나간다. 다시 눈빛이 흐려지며 눈꺼풀이 굳게 닫혔다. 남은 기력을 너무 소진한 모양이었다.

“이제 좀 쉬게 해드리자.”

주 실장이 끼어들어 태산은 한숨 돌리며 물러났다. 태산은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병실을 나서며 주 실장에게 말했다.

“주 실장님, 저랑 얘기 좀 하시죠.”

태산이 말을 꺼내자마자 현영은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피했다.

“와줘서 고마워. 멀리 안 나갈게.”

현영은 그 말만 남기고는 병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태산은 말없이 앞장섰다. 주 실장도 조용히 태산의 뒤를 따랐다. 태산이 병원 건물을 나섰을 때에야 주 실장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갈 셈이냐?”

“휴게실이나 카페 같은 데서 대충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제 차로 가시죠.”

태산은 주차 건물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주 실장을 안내했다. 주 실장이 차에 타려는 순간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 실장은 조수석에 앉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비서가 건 전화였다.

태산이 핸드폰을 꺼내는 주 실장을 힐끗 보더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지금쯤 압색 들어갔겠군요. 그 얘길 겁니다.”

갑작스러운 얘기에 주 실장은 깜짝 놀라 정색하며 태산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검찰수사관들이 압수수색 영장 가지고 한성그룹 전략기획실로 갔습니다. 제가 주임검사에게 지시 내리고 병원으로 왔으니 타이밍이 딱 맞네요.”

태산이 그렇게 답할 동안에도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받아보시죠.”

어차피 압색이 시작된 이상 지금 사무실과 연락을 한다 해도 딱히 뾰족한 대비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주 실장은 전화를 받아 짧게 지시했다.

“상황은 파악하고 있어. 금방 들어갈 테니 일단 협조하라고 해.”

주 실장은 전화를 끊고는 태산을 노려보며 채근하듯 물었다.

“갑자기 압색이라니. 대체 무슨 근거로?”

“수년 전부터 조동한 대표의 그룹 승계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지요? 몇몇 계열사에서 신주인수권부 사채와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해 조동한 대표에게 넘겨주었다는 혐의를 포착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조 대표가 앉아서 원금의 10배 이상을 벌어들였는데 그 작업을 주도한 것이 전략기획실이라지요?”

주 실장은 당황해 말을 잃었다. 그동안 바른을 보며 느꼈던 불안감이 이러한 사태를 예감한 것이었을까?

얼굴색이 흙빛이 된 주 실장에게 태산은 태연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으세요. 어차피 회장님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모든 것은 회장님 지시였다고 책임을 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형을 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으실 겁니다. 제가 그 정도는 배려해 드릴 수 있어요.”

병실에서 조 회장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바른은 단 한 번 그렇게 불러준 것으로 할 도리는 다 하였다는 듯 계속 조 회장이라고 타인 대하듯 말했다. 그런 바른이니 배려해 주겠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그냥 공짜로 그렇게 해주겠다는 말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는 주 실장이다.

“뭘 원하니?”

“조동한 일가의 모든 불법행위에 대한 증거요.”

태산의 입에서 조건이 나오자마자 주 실장은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너 제정신이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알고 하는 말이야?!”

“물론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너 역시 한성그룹의 일가다. 알고 있는데도 한성그룹을 망가뜨리겠다는 거냐?”

태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 안 되나요? 전 어차피 이 승계전의 당사자도 아니잖아요. 당사자인 현영이조차도 조동한에게 그룹이 넘어가느니 이쪽을 원하던데.”

“현영이가?”

의외의 말에 주 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주 실장님과 담판을 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있겠지요.”

자신이 불법승계를 주도한 핵심임을 알려준 이가 바로 현영이란 말인가.

“현영이는 이미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주 실장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태산이 주 실장 앞에 분명한 선택지를 내놓았다.

“지금 주 실장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한성그룹이 자행한 모든 불법행위의 기획자로서 다 지고 가시든가, 아니면 단순 심부름꾼으로서 경영자의 비리를 깨끗이 밝히시든가.”

태산은 대답을 망설이는 주 실장의 등을 밀어주었다.

“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전자가 되면 온전한 그룹을 조동한에게 물려주고 오래 감옥에 다녀오셔야겠지요. 하지만 후자의 경우 짧게 다녀오신 후에 한성그룹 경영에 복귀할 수 있도록 힘써 드리겠습니다. 직위는 사외이사든 감사든, 고문이든 뭐든 만들어볼 수 있으니 쉬시는 동안 천천히 생각해 보시면 되겠지요.”

자신 있게 제안하는 태산을 주인호 실장은 얼떨떨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니가 어떻게?”

“현영이에게 역전의 판을 깔아준 대가는 톡톡히 받아내야죠. 현영이가 경영권을 쟁취하게 되면 그 정도 못 해주겠습니까?”

“그렇게 한다 해도 현영이가 경영권을 찾아올 수 있다고 어떻게 장담한단 말이냐? 현영이 남매와 너,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합한다 해도 조동한 일가와 조민한이 가진 지분에는 못 미칠 텐데. 게다가 주주들은 보수적이다. 이미 승계 구도가 확정되었다고 믿을 텐데 조동한을 지지하지 않겠니?”

주 실장은 회의적이었지만 태산의 여유로움은 흔들리지 않았다. 태산은 미소를 띠며 답했다.

“제가 가진 것, 그리고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을 거예요.”

* * *

“제가 가진 것, 그리고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을 거예요.”

주 실장은 대체 무슨 말인가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찔리는 것이 있었다.

바른이 친생자인지를 받은 직후 작성해 두었던 조 회장의 유언장. 조 회장 본인과 주 실장, 그리고 변호사, 공증인 네 명밖에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유언장이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 회장은 사내 법무 팀 변호사가 아니라 오래 알고 지낸 변호사에게 유언 공증 절차를 진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주 실장과 변호사가 증인을 서고 공증인 입회하에 유언장을 낭독했던 것이다.

그 유언장은 조 회장의 사망 직후 바로 효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그 내용이 상당히 파격적이긴 했다. 하지만 바른은 유언장의 내용은커녕 존재 자체도 알지 못할 텐데 생각하며 주 실장은 의구심을 가졌다.

태산이 다시 말을 이어 주 실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게다가 조동한 일가의 확실한 불법 증거까지 넘겨주시면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구속시켜서 손발을 묶어놓으면 주주들도 흔들릴 거예요. 배임, 횡령, 사기 같은 것 몇 개 걸어서 집어넣으면 어느 주주가 회삿돈 몰래 빼먹는 경영자를 흔쾌히 자리 유지하게 내버려 두겠어요?”

태산의 단정에 점점 더 마음이 흔들리는 주 실장이었다. 정말로 뒤집힐 희망이 있단 말인가?

“주 실장님이 한성그룹의 어둠의 실세였다고 들었습니다. 조 회장 사후에 그런 권력까지는 누릴 수 없겠지만 아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에는 이른 연세 아닙니까? 경영자로서 60대면 아직 한창일 때인데요.”

흔들리는 주 실장에게 태산은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의 기로가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용건을 마친 태산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 하죠. 곧 검찰청에서 소환할 겁니다. 다시 뵐 때까지는 결정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주 실장은 씁쓸한 기분으로 태산의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한참 노려보며 마음의 동요를 누르려 애썼다.

평생을 한성그룹과 함께해 왔고 한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한성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 실장은 조 회장 못지않게 한성을 자신의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거취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한성의 명운이었다.

조동한이 물려받은 한성의 미래를 상상하면 어둡기만 했다. 조동한은 무엇에 손을 대도 성과가 좋지 않은 마이너스의 손이었고 그 자식들은 더더욱 싹수가 노랬다. 머리는 제 아비만도 못한 주제에 욕심만 많은 놈들이다.

그에 비해 현영, 기영 남매의 영민함을 생각하면 그룹에 타격이 온다 해도 머지않아 회복할 것이라는 신뢰가 생겼다.

더욱이 조동한이 조 회장을 명예 회장으로 밀어낸 방식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주 실장은 자신이 경영에서 밀려난 것 같은 모욕감을 느꼈다.

실제로 조 회장이 허수아비가 되면서 주 실장의 권력 또한 힘을 잃은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주 실장의 권력이 건재했다면 검찰이 한성그룹 전략기획실을 덮칠 계획을 하고 있는데 미리 언질을 준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조동한에게 한성그룹을 넘기는 것과 썩은 부분을 과감히 도려내고 새로운 한성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한성그룹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 답은 주 실장의 마음속에서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 * *

태산이 조재용 회장의 병실에 다녀간 지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조 회장은 숨을 거두었다. 사망 선고가 내려진 직후 조 회장의 개인 변호사가 상속인들을 소집했다.

차남 조동한, 삼남 조민한 형제와 장남 소생의 조현영, 조기영 남매, 그리고 유언장의 증인이자 입회인으로서 주인호 실장이 함께 자리했다. 하지만 막내아들 바른은 직접 참석하지 않고 변호사를 대신 보냈다.

주 변, 아니, 한경욱 변호사는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강바른 검사가 갑자기 연락해 자기 대신에 어디 좀 가달라고 했을 때는 또 뭔가 성가신 심부름이라도 시키려나 하고 시큰둥했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한성그룹 자제들이 모여 팽팽히 맞서고 있는 유언장 공개 자리였던 것이다. 못 올 곳에 온 듯한 변호사는 안절부절못했다.

한성 자제들도 영 눈치가 좋지 않았다. 바른이 웬 변호사를 대신 보냈다고는 하는데 급히 나온 듯 점퍼 차림에 머리도 부스스한 것이 하릴없이 동네에 돌아다니는 아저씨 같았다.

자신들과 대등하게 자리해서 유언 집행에 대해 논의를 하려면 훨씬 잘나가고 입성도 번듯한 변호사여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시골 동네 변호사 같은 사람을 대신 보낸 바른의 처사에 한성 자제들은 일말의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 더해 각자의 이유로 유언장 공개 자리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서로에 대해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존재를 몰랐던 조 회장의 유언이 앞으로의 승계 구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유언장의 작성 시점은 약 3년 전이었다.

조동한은 갑자기 나타난 유언장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애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조 회장이 이미 자신을 후계로 결정하고 승계 작업에 착수한 이후의 유언장인 만큼 그룹의 안정을 위해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반면 조현영으로서는 조 회장이 계속된 조동한의 경영실패로 후계를 정한 것을 회의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평소 총애했으며 법적인 상속분이 불리한 자신을 돕고 싶어 했을 거라고 해석했다. 그러니 법정상속분에만 맡겨두지 않고 특별히 유언장을 작성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다 모이신 것 같으니 유언장을 공개하겠습니다.”

각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기대를 품고서, 그러나 혹시나 상대에게 유리할 가능성을 경계하며 상속인들은 팽팽히 긴장한 채 변호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재산의 분할은 모두 법적상속분에 따른다. 다만 HS홀딩스의 주식은 아래에 표시한 비율에 따라 분할한다.”

상속인들의 눈이 커졌다. HS홀딩스는 한성그룹 순환출자구조의 핵심에 있는 회사다. 다른 재산은 법적상속분에 따라 분할하라면서 HS홀딩스의 주식만은 분배율을 따로 정하고 있으니 조 회장이 유언을 통해 그룹 지배 구조에 영향을 미치려 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차남 조동한에게 4분의 1, 장손녀 조현영에게 4분의 1, 사남 강바른에게 2분의 1을 상속한다.”

조 회장은 조동한과 조현영 둘 중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강바른에게 결정권을 쥐여준 것이다. 강바른이 돕는 쪽이 그룹 승계에 유리해진다.

주 실장은 유언장을 공증받은 후 조 회장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동한이랑 현영이는 이미 가진 것이 많아. 내가 물려주지 않아도 서로 그룹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서 알아서들 챙기겠지. 하지만 바른이는 아니야. 그놈 성미에 나 죽고 재산상속 받고 나면 그룹 일을 거들떠나 보겠나. 억지로라도 큰 카드를 손에 쥐여주면 싫어도 주위에서 가만히 두지 않을 게야. 그룹 일이 자기 일이 되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것이 막내아들에게 중대한 카드를 맡긴 조 회장의 의도였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강바른이 일가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계속 한성그룹과 연을 유지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유언장 공개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무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분할에서 완전히 제외된 삼남과 손자는 물론이고 조동한과 조현영 또한 실망감과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조동한은 원래의 법정상속분대로 따져도 자식들의 수에 따라 동일하게 4분의 1을 상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른이 자신의 두 배를 물려받은 데다 현영이 자신과 동일한 지분을 받았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현영은 법정상속분의 두 배를 받았지만 결국 조 회장이 가장 사랑한 자식은 막내아들인 강바른이었다는 데 열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의는 없으십니까?”

“예, 없습니다.”

공개된 유언장 내용에 경악했다가 반사적으로 답한 한 변호사에게 한성가 자식들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진다. 한 변호사는 못 올 자리에 온 듯 좌불안석했다.

“아버지가 제정신으로 결정하신 게 정말 맞습니까?”

의구심과 비아냥을 담아 조동한이 변호사에게 물었다.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증하는 자리에 증인으로 저와 주인호 실장이 동석했습니다. 공증받은 날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직 경영 일선에 계실 때 작성하신 겁니다. 저희가 몇 번이나 내용을 확인했고 아주 또렷한 정신으로 결정하셨습니다.”

변호사가 그렇게까지 설명하니 조동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유언장 공개가 끝나고 한 변호사는 불편한 분위기를 피해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얼떨떨한 채로 변호사 사무실을 내려와 차에 탄 후 출발하기 전 강바른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일을 대강이라도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다.

“강 검사님, 다른 재산은 법정상속분에 따라 상속될 것 같은데 딱 한 가지만 다르게 정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소유한 HS홀딩스 주식 반을 남기셨던데요.”

강 검사는 얘기를 듣고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네요. 그런 줄은 몰랐는데 꽤 사랑받는 아들이었던 건가?

남 일처럼 말하는 강 검사의 말에 한 변호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강 검사님 같은 행보를 보이는 아들이면 어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한 변호사의 대꾸에 강 검사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덕분에 앞으로의 일이 좀 더 수월해지겠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상속 문제는 한 변호사님이 전담해 주십시오.

“재산 규모가 상당할 텐데 저 같은 구멍가게 변호사로 되겠습니까?”

-큰돈 버실 기회네요. 그만큼 열심히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 더 필요하면 동료 변호사들 불러다 쓰시고요. 수임료 넉넉히 청구하세요.

강 검사는 거침없이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 변호사는 혀를 찼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 예측할 수가 없는 인간이란 말이야.”

어떨 때는 살벌하게 무서운 사람인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살갑게 챙기기도 한다. 어떨 때는 조폭 같은 놈을 수족처럼 부리고 어떨 때는 재벌가의 일에 심부름을 시킨다.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인물이라고 새삼 생각하는 한 변호사였다.

한 변호사가 차를 출발시킨 후 현영, 기영 남매가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차에 탈 때까지 침통한 분위기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운전석에 탄 기영이 운전대를 잡을 생각도 없이 미간을 찌푸리고 앉아 있다가 중얼거렸다.

“할아버지가 이러실 줄은 몰랐네. 그나마 숙부한테 몰아주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러고는 현영을 돌아보며 슬쩍 말을 건넨다.

“강바른 빨리 포섭해야 하지 않아? 우리 손을 들어주면 희망이 생기는 거지만 숙부 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상황 끝나는 거잖아.”

“걱정 마. 절대 저쪽으로는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현영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바른이 먼저 모종의 제안을 했으며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동생에게도 차마 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영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누나가 예전부터 강바른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어? 참 누나도 대단하단 말이야. 이런 상황까지 예측한 거야?”

현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것이긴 했지만 할아버지가 바른에게 이 정도로 큰 카드를 안겨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부의 총애를 가로챈 바른에게 분노와 증오가 들끓었다. 하지만 별수 없이 바른의 손을 잡아야만 한다.

“가자. 장례식 준비해야지.”

현영은 동생의 시선을 피해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 * *

유언장 공개 자리에 참석한 상속인들이 모두 자리를 뜬 후에도 조동한은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결코 부친을 믿지 못했으므로 성년 후견 카드까지 써서 조재용 회장을 경영에서 밀어냈다. 그런데 조 회장은 훨씬 더 일찍 자신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새삼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조동한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망할 노친네, 가는 길까지 이렇게 엿을 먹이다니…….”

동생 조민한이 조동한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어쩌긴 뭘 어째. 강바른 그놈 아버지가 물려준 것 외에 더 가진 주식은 없어. 어차피 경쟁자가 되진 못해.”

“강바른이 현영이 쪽에 붙으면 큰일 아냐. 들리는 얘기로는 형수도 지분을 적잖이 가지고 있다던데.”

재벌가 차녀로 국제적 명성의 미술관을 경영하고 있는 현영의 모친 또한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조동한이 미리 알아본 바로는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이 가지고 있는 총지분에는 못 미쳤지만 확실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옳은 말이라도 동생 입으로 들으니 화가 치미는 것이었다.

조동한은 동생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르고 있을 것 같냐? 애초에 니가 좀 제대로 처신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야? 오죽이나 못나 보였으면 아버지가 너를 빼놓고 밖에서 데려온 놈한테 지분을 몰아주느냐 이 말이야?!”

따지고 보면 조동한은 원래 받아야 할 지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현영은 동생인 기영분을 함께 받은 셈이었다. 결론적으로 조민한에게 가야 할 지분이 강바른에게 가면서 이런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망나니 동생이라고 해도 승계 구도를 확고히 하는 데는 도움이 될 줄 알았다. 계열사들 이사 자리에도 열심히 밀어 넣어두었고 피 같은 비자금을 덜어주며 HS홀딩스 주식을 한 주라도 더 확보하도록 했다. 아버지의 재산을 동일한 비율로 상속하게 될 자식이므로 어떻게든 계속 자신의 편으로 잡아두려 했다.

그런데 정작 까보니 다른 재산은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HS홀딩스 주식을 강바른에게 홀랑 빼앗긴 것이다.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동생 놈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너만 지분 잘 쥐고 있으면 대세엔 변함없으니 정신 잘 붙들고 얌전히 있어.”

조동한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괜히 엉뚱한 화풀이 대상이 된 조민한은 어안이 벙벙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형이 자리를 뜬 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욕지거리를 뱉는 것이었다.

“씨발, 애초에 지가 회사 경영을 제대로 했으면 아버지가 어떻게든 지한테 몰아주려고 했겠지. 왜 괜히 나한테 지랄이야?”

그렇지 않아도 지분 상속에서 제외된 실망감이 컸는데 형까지 자신을 못난이 취급 하니 조민한은 생각할수록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조동한은 항상 부친에게 장남과 비교당하고 차별당하는 설움을 토로했지만 조민한은 아예 비교당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능력으로 따지자면 장남의 영민함은 물론 차남만 한 야망과 성실함도 없었기에 그룹 승계 후보에서는 애초에 밀려나 없는 자식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어차피 단독으로 그룹을 승계할 수는 없으니 가장 강력한 후보를 밀어주어 공을 인정받아 공동 승계 체제로 가는 것이 조민한의 목표였다.

조동한도 조민한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데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아무래도 조카보다는 형제간이 더 가까운 사이라고 믿고 있었다. 더욱이 장남의 그늘에서 소외당한 형제지간이라는 정서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민한으로서는 차남보다도 아버지의 관심에서 멀리 있었으므로 조동한에게 정서적 일치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기밖에 모르는 둘째 형보다는 큰형이 살아생전에도 나이 터울이 꽤 있던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껴서가 아니라 더 강력한 후보였기 때문에 둘째 형 편에 붙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도와주는 고마움도 모르고 망나니 취급을 하니 어쩐지 이쪽에 서기로 한 것에 회의감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괜히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거 아니야?”

조민한은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회의실을 나오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바빠요? 오늘 기분이 꿀꿀해서 그러는데 같이 술 한잔합시다. 전부터 말했던 그거 기분 내키면 들어줄 수도 있고…….”

아버지가 죽은 날 술판을 벌인다니 사람들이 알면 패륜아 취급을 하겠지. 형은 그룹 이미지 망친다고 펄펄 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 게 뭔가. 이래도 망나니 취급, 저래도 망나니 취급은 변함없는데. 게다가 사람들 눈 피해 조용히 술 마실 수 있는 곳은 많다. 정 신경 쓰이면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한성호텔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도 될 것이다.

빈소는 자신이 아니라도 잘난 둘째 형이 지킬 테니 상관없다. 살아서 자식 취급 안 해준 아버지에게 자신이라고 이제 와 자식 도리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조민한은 아버지와 형에게 새삼 반항하는 심정으로 오늘 밤 화끈하게 한번 놀아보자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 * *

조재용 회장의 4일장 중 세 번째 날 늦은 밤에 태산은 조 회장의 빈소를 방문했다. 많은 조문객과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이룰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선택한 시간이었다. 세 번째 날 심야 정도면 대부분의 조문객들은 조문을 끝내고 비교적 한산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역시나 도착한 빈소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장이 보낸 조화가 줄을 서 있었다. 그 외에도 재계 대표그룹의 회장들이 보낸 조화가 빽빽이 자리하고 있어 어지간한 명함으로는 조화를 들이밀 자리도 없어 보일 지경이었다.

상주인 조동한과 현영은 빈소에서 나란히 조문객을 맞았지만 그사이에 마치 투명한 벽에라도 설치된 양 냉랭한 분위기로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태산은 조 회장의 영정 앞에 분향을 한 후 조동한과 맞절을 하고 인사를 건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의 장례인 것처럼 태산은 그 한마디만으로 조문을 마무리했다. 곁에 있는 현영과도 같은 인사를 나누었지만 현영 쪽에서 눈물을 보이며 태산의 품으로 기대어오는 바람에 엉겁결에 끌어안고 위로해 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조동한은 은근히 바른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현영을 흰 눈으로 노려보았다.

현영이 몸을 추스르며 인사를 받았다.

“와줘서 고마워.”

바른과 친한 척은 했지만 현영도 어디까지나 남 대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태산은 바른 역시 충분히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지 않나 생각하며 내심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조문을 마치고 그대로 빈소를 나가는 태산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조동한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태산의 뒤를 천천히 뒤쫓아 가다가 엘리베이터 앞에 와서야 불러 세웠다.

“나랑 얘기 좀 하지.”

“무슨 용건입니까?”

돌아보고 묻는 태산에게 조동한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잠깐이면 되네.”

“여기서 말씀하시죠.”

태산은 조동한에게 내어줄 시간 따위 조금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조동한은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다행히 새벽 시간이라 조문객이 뜸한 탓에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동한은 목소리를 낮춰 급하게 용건을 꺼내놓았다.

“현영이가 어떤 사탕발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너를 가족처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추호도 아니니까. 겉과 속이 다른 애야. 충분히 이용하고 나면 가차 없이 버릴 거다.”

“가족으로 생각지 않는 것은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태산의 답에 조동한은 할 말을 잃었다.

“원래는 저도 함께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빈소에 나란히 서기는커녕 상주와 조문객으로 만났는데 그마저도 불청객 보듯 문전박대 하는군요. 그에 비하면 거짓으로라도 가족처럼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낫지 않겠어요?”

태산은 바른의 입장을 대신해 분노를 담아 말했다. 조동한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는 굳이 가족 일원으로 인정받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형제로서 나란히 조문을 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장례식 자리도 피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한테 가족이랍시고 충고할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태산은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조동한은 한동안 얼떨떨한 상태로 서 있다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빈소로 돌아갔다. 조동한의 아내가 쫓아 나오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뭐래요?”

아무래도 조동한이 바른의 뒤를 쫓아 나가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조동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이 바늘 끝 하나 안 들어가겠어. 현영이 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 같아. 아무래도 강바른 쪽은 가망이 없겠어.”

조동한의 답에 아내의 얼굴에 절로 근심이 어렸다.

“괜찮겠어요?”

“괜찮게 해야지. 방어만 제대로 해도 걱정 없어. HS홀딩스 이사진과 대주주들 이탈하지 않게 지금부터 단속 잘해야 해. 당신이랑 애들도 연락 돌릴 수 있는 곳엔 다 돌려. 확실히 우리 편에 서겠다고 약속을 받으란 말이야.”

“그건 걱정 말아요. 애들이 더 열심이에요. 앞으로 다 지들 게 될 텐데 열심히 안 할 도리가 있겠어요?”

그때 빈소 안에서 현영이 나오자 아내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현영은 무심한 눈길로 두 사람을 지나가더니 조문객을 접대하고 식당에서 나오는 기영에게로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은밀히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현영 쪽도 물밑 작업이 한창인 듯했다. 조동한은 결코 질 수 없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조 회장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이 더 지난 후 주인호 실장이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되어 들어왔다. 검찰수사관들은 주 실장을 취조실로 데려가기 전 반부패수사부장 집무실로 먼저 안내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태산이 검찰수사관들과 함께 들어서는 주 실장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검찰수사관들이 집무실을 나가자 주 실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압색 후에 바로 소환할 것처럼 엄포를 놓더니 꽤 여유를 부리는구나.”

“조 회장이 이렇게 갑자기 사망할 줄은 몰랐거든요. 가까운 사이이셨던 것 같은데 애도할 시간 정도는 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싶어서요.”

주 실장은 새삼 태산을 다시 보았다. 자신의 부친이 죽었는데 남처럼 말할뿐더러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위로받아도 부족할 상황이 아닌가.

그동안 주 실장은 자신이 누구보다 바른을 잘 안다고 생각해 왔으나 최근 들어서는 해가 거듭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아이로 느껴졌다.

“주임검사에게 예의를 다해 모시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지막으로 은근히 물었다.

“결정은 하셨습니까?”

자신이 건넨 제안을 받아들이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자.”

주 실장은 내내 궁금했었던 질문을 마침내 툭 던져놓았다.

“회장님이 너한테 HS홀딩스 지분 반을 넘겨줄 것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니?”

태산이 빙긋이 웃고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몰랐는데요.”

* * *

“회장님이 너한테 HS홀딩스 지분 반을 넘겨줄 것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니?”

“몰랐는데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허를 찔린 주인호 실장은 잠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재차 물었다.

“몰랐다고? 그런데 어떻게 승산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니?”

“말씀드렸잖아요. 생각하시는 것보다 제가 가진 것, 그리고 앞으로 가질 것이 더 많을 거라고요.”

그렇다면 조 회장에게 상속을 받기 전에도 이미 바른이 확보한 지분이 적지 않았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이미 마음을 정하고 온 길이었지만 주 실장은 짐짓 물었다.

“좋다. 그럼 단도직입으로 물으마. 현영이가 확실히 확보할 수 있는 의결권 있는 주식이 얼마나 되는 거냐?”

태산이 갑자기 펜을 꺼내 들더니 메모지 한 장을 꺼내 그 위에 숫자를 휘갈겨 썼다. 그러고는 메모지를 뒤집은 채로 응접탁자 위에 올려놓고 주 실장 쪽으로 슬쩍 밀어놓았다.

메모지를 슬쩍 들춰보고는 주 실장의 눈이 커진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은가.’

확실히 뒤집힌다고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주 실장에게는 아직 친인척 명의로 숨겨둔 HS홀딩스의 차명주식이 남아 있다. 그것까지 동원한다면 희망이 있다. 주 실장은 절로 들떴다.

“어떻습니까? 주 실장님이 가지고 계시는 지분까지 합치면 붙어볼 만하겠지요?”

주 실장은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내 지분을 합치지 않은 거라고?”

주 실장은 조 회장의 뜻에 따라 이사회에서도 현영의 편에 섰다. 당연히 자신이 소유한 지분은 현영 편의 지분으로 계산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 회장이 사망한 마당에 주 실장님이 끝까지 현영이 편에 설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으니까요. 저와의 거래가 성립하기 전까지 주 실장님의 지분은 합산을 보류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볼 것도 없었다. 굳이 차명주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해볼 만한 숫자였다.

주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보자. 니가 말한 대로 내가 넘겨줄 수 있는 것이라면 전부 넘겨주마.”

주 실장이 의욕적으로 답하자 태산이 손을 내밀었다. 주 실장도 태산의 손을 맞잡는다.

“거래 성립 되었습니다.”

태산이 빙긋 웃으며 선언했다.

주 실장이 넘겨준 조동한 일가의 불법 증거는 어마어마했다. 태산은 반부패수사부 검사들을 총동원해 조동한의 방대한 비리를 수사하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식들의 불법사실을 비밀리에 따로 정리했다.

“최 검사,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아니, 왜 안 올라오시고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최진우 검사가 주차장에서 태산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며 타박했다.

“그냥 지나는 길에 잠시 들른 거라서.”

“저기… 아버님 일은 유감입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최 검사가 조금 어색한 투로 인사를 건넸다. 지금 대한민국에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의 사망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야, 나한테 그런 인사 하지 마.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이야. 심지어 내가 조문을 했다니까. 조문객을 맞은 게 아니라.”

“너무하네요. 그건 그거대로 서글픈 일이잖아요. 그냥 위로받으셔도 돼요.”

최 검사는 태산이 쑥스러워한다고 받아들인 듯 어깨를 도닥이더니 짐짓 안쓰러운 표정으로 안아주려고 팔을 들었다. 태산은 어처구니없어 최 검사의 어깨를 냅다 쥐어박았다.

“하지 말랬지?”

최 검사가 그제야 실실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꽤 아픈지 어깨를 쓱쓱 문지른다. 아마도 피멍이 호되게 들 것이다.

“근데 진짜 무슨 일로 남부지검까지 몸소 오신 거예요? 여기까지 직접 오셨으면서도 안 내리고 차 안에서 할 얘기라는 건 아마 보안이 중요한 비밀 이야기인 것 같은데.”

최 검사가 꽤나 눈치 빠르게 말했다.

“우리 지검에서 기업범죄를 조사하다가 한성그룹 조동한 회장의 범죄 사실을 포착했어. 불법승계로 시작했다가 3조원대 비자금도 포착했고 그 외에도 가짓수가 많아.”

최 검사가 놀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선배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지 않을 건 뭐야? 어차피 주임검사 따로 있는데.”

최 검사는 가족을 조사해야 하는 태산의 심정을 생각해 물은 말이었지만 태산은 딴소리를 했다. 한성그룹과의 특수관계로 인해 수사에서 제외되지 않겠냐는 걱정을 해준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주임검사가 따로 있더라도 어디까지나 지휘하는 것은 태산이었지만 이럴 때는 관리직이라는 것이 핑계가 되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성식품과 한성유통의 공정거래법 위반이 걸려들었는데 이건 또 조동한이 아니라 그 자식들이 경영하고 있는 회사거든. 우리 지검에서 그것까지 다 건드리기에는 손도 모자라고 조동한 일가를 노린 기획수사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어서 자식들 건은 따로 빼두었어. 하지만 언제까지나 안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자칫 적절한 수사 시점을 놓쳐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자식들 건은 남부지검에서 좀 맡아주었으면 해.”

“그래요? 수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나요?”

“공식적으로 진행된 것은 없고 어디까지나 비공식으로 포착한 증거들이야. 잘 다듬고 보강증거 찾아내는 건 스스로 해야 할 거야.”

“그 정도야 뭐 얼마든지 하죠.”

최 검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위에서는 어때? 최 검사가 인지한 건이라고 들이대면 받아줄 것 같아?”

“받아들이도록 잘 설득해 봐야죠. 증거가 갖추어진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명백하다면 받아주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정 어려워하면 수사해 두고 중앙지검에서 터뜨리는 거 봐서 같이 기소하자고 하면 될 거에요. 이게 또 위엣분들이 여론에 워낙 예민하셔서.”

최 검사가 큭큭 웃으며 답했다.

“그래. 내려서 트렁크 열어봐. 거기 수사 자료 넣어뒀으니까.”

“옙, 그럼 연락드릴게요.”

최 검사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어본다. 트렁크 안에는 검찰 마크가 찍힌 푸른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들어보니 꽤 묵직한 무게다.

최 검사는 휘청거리며 상자를 차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차 트렁크를 닫고 툭툭 쳐주었다. 신호를 받은 태산이 룸미러를 통해 손을 들어 보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받은 상자를 들고 끙끙거리며 집무실로 올라온 최 검사는 바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 가득 차 있는 자료들을 빠르게 훑어보던 최 검사의 눈이 크게 떠진다.

“와! 뭐야, 이거? 어떻게 이렇게까지 내부 사정이 다 흘러나올 수가 있지? 이건 뭐 완전 빼박인데?”

부장이 아니라 검찰간부 그 누구라도 이 정도로 증거가 갖춰진 사안을 수사하지 말라고 할 이는 없을 것이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성그룹의 새 회장 조동한이 서울중앙지검의 소환을 받았다. 이제 막 그룹 총수가 된 조동한의 소환에 중앙지검 앞은 몰려든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조동한은 변호사를 대동하고 기세등등하게 취조실에 앉아 묵비권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주임검사도 피의자의 무게감에 부담스러워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매직미러 뒤에서 신문을 지켜보던 태산이 직접 나섰다.

태산이 취조실로 들어서자 주임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얘기해 보죠.”

태산이 주임검사의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조동한의 눈빛이 바뀌었다. 태산은 조동한이 매섭게 노려보건 말건 수사 자료를 들춰보며 말했다.

“회장이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그룹 승계 과정에 불법 의혹이 있어서요. 몇몇 계열사에서 신주인수권부 사채와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해 조동한 씨에게 넘겼더군요. 그로 인해 앉아서 원금의 10배 이상을 벌어들였고 그 자금은 고스란히 HS홀딩스 주식을 확보하는 데 쓰였네요. 이런 식이면 돈 얼마 안 들이고도 그룹 전체를 꿀꺽하는 건 식은 죽 먹기겠는데요. 거의 날강도 아닙니까?”

태산의 도발에 조동한이 변호사가 채 말리기도 전에 울컥해 소리를 질렀다.

“야, 강바른! 말조심해! 내가 남의 회사를 가로채기라도 했단 말이야?!”

“회장이라고 해서 그 회사의 소유주인 건 아니지요. 주식회사에는 엄연히 주주가 있는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한성그룹은 아버지 것이고 나는 그걸 정당하게 물려받았어.”

“전환사채를 넘겨받아 경영권 승계를 시도한 것, 인정하신다는 거죠? 부친과 논의해서 전략기획실에 지시하셨나요?”

변호사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것은 전 회장님께서 현 회장님께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넘겨주는 방법을 고민하시다 독단으로 하신 일로 회장님은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회장님이 그로 인해 이익을 얻은 면은 있으나 그렇다고 회장님께 법적책임이 있는 일은 아닙니다.”

“준 사람은 알았는데 받은 사람이 모른다? 아버지가 불법을 저질러 아들이 이익을 봤는데 아들은 책임이 없다? 저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군요.”

태산의 비꼬는 말투에 조동한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참으라고 눈치를 주는 변호사 때문에 애써 감정을 억누른다.

“뭐 그 부분은 차차 얘기하도록 하죠. 그 외에도 혐의점은 많으니까요. 이를테면 한성건설을 통해 3조원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한 건 어떻습니까? 졸속 부실 공사로 공사 기간을 대폭 줄이고 그로 인해 남은 공사 대금을 유용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비자금은 한성건설 임직원들 명의의 차명계좌에 분산되어 보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비자금 중 일부는 조동한 씨 가족들에게 전달되어 HS홀딩스 주식을 확보하는 데 쓰였습니다. 또 일부는 이사진을 매수하는 데 쓰였고요.”

조동한의 눈이 커진다. 이 정도로 검찰에서 디테일하게 파악하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자금을 조성한 방식과 금액, 차명계좌, 사용처까지 검찰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탈세는 또 어떻습니까? 탈세와 관련된 건은 대부분 국세청으로 이관했습니다만, 검찰에서 수사하지 않을 수 없는 건도 있더군요. 국가 상대로 소송사기를 벌이는 대담한 짓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조동한의 눈이 커진다. 그것까지 들통났단 말인가.

한성화학 사장에게 실적을 내라고 줄곧 압박을 주었더니 들고 온 카드였다. 한성화학이 GH케미컬을 인수하면서 낸 세금에 대해 국세청에 환급 소송을 제기하자는 내용이었다. 장부에 기재된 고정자산의 감가상각을 계산하지 않고 세금을 부과했다는 이유다. 2천억 원의 감가상각을 인정받으면 3백억 원이 넘는 세금을 환급받게 된다.

그런데 기발한 것은 장부에 기재된 고정자산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인수 전부터 분식회계를 위해 꾸며내 장부에 기재한 자산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거짓 장부를 바탕으로 소송을 제기하자는 것이다.

한성화학 사장의 대담한 계획에 조동한은 무릎을 쳤고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국세와 지방세를 포함해 총 3백억 원이 넘는 금액을 환급받은 후에는 스톡옵션을 크게 선물해 공을 치하해 주기도 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사장이 알아서 한 일이지 난 지시한 바 없소.”

방금전까지만 해도 태산을 하대하던 조동한은 오금이 저려 절로 말을 높였다.

“무슨 건인지 아직 말씀도 안 드렸는데 이미 알고 계시나 보네요.”

태산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해 조동한은 아차 했다.

“그럼 한성화학에서 원재료 수입하면서 한성물산을 사이에 끼워 거액의 수수료를 지급한 건은요? 그것도 사장이 다 알아서 한 겁니까?”

조동한은 궁지에 몰렸다. 검찰은 조동한의 비위를 물샐틈없이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황망하기만 했다.

‘설마… 주 실장이?’

* * *

‘설마… 주 실장이?’

이 정도까지 그룹 내부 사정을 속속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주인호 실장밖에 없다. 하지만 조동한은 주 실장이 고발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주 실장은 전략기획실 수장으로 한성그룹의 불법행위를 총괄해 지휘해 왔다. 조동한은 후계로 확정되어 가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주장해 가장 큰 덩어리인 건설과 화학 쪽 비자금을 하나하나 넘겨받았다. 하지만 그 전까지 전 그룹의 비자금 조성 작업은 모두 주 실장이 총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 실장이 조동한의 범죄를 고발한다는 것은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주 실장이 쥐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어차피 같은 배를 탄 처지라고 여긴 탓이다.

조동한은 망연자실해 중얼거렸다.

“정말 주 실장인가? 그놈이 대체 왜?”

대체 무엇을 위해 안락한 노후를 버리고 감옥행을 감수한단 말인가. 태산과 주 실장 사이에 오간 거래를 알지 못하는 조동한은 영문 모르고 탄식할 뿐이었다.

“예, 주 실장이 모두 자백했습니다. 전 회장과 현 회장의 지시에 따라 한성그룹의 모든 불법행위를 자신이 실행했다고요.”

태산이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설마 했던 조동한이 분기탱천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 아버지의 지시라고? 내 지시? 웃기지 말라고 해!”

“회장님!”

변호사가 다급히 조동한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조동한은 막무가내로 뿌리치고는 격분해 소리쳤다.

“그 인간이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기획한 일인 줄 알아?! 권력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충성한 거야. 비자금만 해도 그 인간이 예전부터 관리해 온 걸 내가 물려받은 것뿐이라고!”

조동한의 소매를 잡고 말리던 변호사는 낭패라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신문 과정은 모두 영상으로 녹화가 되고 있을 터였다. 방금 전 조동한이 한 발언은 결코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비자금 관련 혐의에 대해서는 일단 시인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체포해 구속 상태에서 계속 수사할 테니 검찰수사관과 함께 구치감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조동한은 부들부들 떨며 분을 참지 못했다. 검찰수사관들이 들어와 제자리에 못 박힌 채 움직일 줄 모르는 조동한을 채근했다.

“같이 가시죠.”

조동한은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뗐다. 취조실을 나가는 조동한에게 변호사가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장실질심사에서 뒤집을 수 있습니다. 며칠만 안에 계시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풀려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조동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거요.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반드시 풀려날 수 있게 만들어요.”

법조인에 대한 로비도 불사하라는 은근한 지시였다. 그렇게 지시하면서도 한편으로 조동한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로비를 기가 막히게 잘하던 사람이 주 실장이었다. 주 실장은 가장 효과적인 로비 대상과 그에 닿는 연줄, 그리고 로비 대상의 약점을 귀신같이 포착해 내곤 했다.

지금까지 한성그룹 임원진 중에 불법행위가 발각되고도 실형을 받은 이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이 그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은 케이스는 훨씬 더 많았다.

그랬던 그가 지금 검찰 쪽에 붙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그룹의 로비를 받아들일 강심장이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구속도 구속이지만 강바른과 현영이 작당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가 더 불안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빨리 풀려나야 했다.

그러나 조동한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장전담판사는 8시간이 넘는 장고 끝에 영장을 통과시켰다. 조동한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비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게 된 조동한에게 나쁜 소식들이 하나둘 날아들었다.

[남부지검, “부당판매 의혹” 한성식품 압수수색]

[한성식품, 대리점에 상품 강매 등 불공정거래행위 적발]

[한성식품, 전산 조작 등 조직적 증거인멸 시도 발각]

[조규영 한성식품 대표・이창석 영업총괄본부장, 공정거래법 위반과 증거인멸 지시 혐의로 구속]

[일명 ‘밀어내기’ 강요한 한성식품, 잇단 대리점주 피해 폭로에 불매운동 가속]

[남부지검,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한성유통 추가 수사]

[HS 마트・슈퍼에서 한성식품 ‘차칸 치킨’ 수수료 대폭 인하하여 독점 판매]

[동네 치킨집 망하게 한 ‘차칸 치킨’, 정말로 착한 치킨이었나]

[한성유통 조래영 대표, HS 리테일 조서영 대표 소환조사]

[조동한 한성그룹 회장에 이어 한성그룹 일가 잇단 구속]

[기업가의 도덕불감증이 초래한 한성그룹의 경영 위기]

구치소 독거실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조동한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신문을 구겨 던져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갈기갈기 찢어버려도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식들이 대표로 있는 계열사에 대한 수사는 서울중앙지검이 아니라 남부지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성식품 대리점과 HS마트가 서울 시내에 없는 곳이 없으니 관할은 어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마침 이런 공교로운 때에 일제히 자식들의 비리까지 까발려진다는 것은 기획의 냄새가 풀풀 났다. 더욱이 이렇게 빠르게 전산 조작까지 알아냈다는 것은 내부 회계 사정에 밝은 누군가가 제보했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강바른과 주 실장의 그림자가 자식들 건에서도 감지되었다.

자신의 손발을 묶는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 자식들까지 엮어놓는가. 그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강바른이 현영과 손잡고 경영권을 탈취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회장님, 면회입니다.”

교도관이 방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입가에는 아첨하는 듯 실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사를 받는 동안 조동한은 언제든 변호사의 면접 교섭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가능한 한 긴 시간을 면회실로 나가 때우고 있었다. 좁은 독거실에서 지내는 것보다 훨씬 편했고 변호사가 반입한 전화도 마음껏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사들이 수시로 불러내 신문을 하지만 않는다면 심지어 업무를 보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일상적인 변호사 면회 시간이었지만 오늘만은 조동한도 마음이 급했다. 면회실로 들어서자마자 조동한은 변호사에게 다급히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HS홀딩스 주식 의결권 위임 절차 진행해 줘요. 그리고 자식들도 만나서 가진 것 전부 위임해 두라고 하세요.”

조동한의 손 위에 변호사가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누구에게 위임하시겠습니까? 역시 조민한 대표님이실까요?”

조동한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믿을 수 없어요. 마누라에게 위임하도록 하죠.”

아내는 경영에는 전혀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못 미더운 동생 놈에게 맡기느니 자기 식솔 손에 쥐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조동한이었다.

조동한은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소식 들었어요? 우리 애들이 지금…….

“그래, 알아. 당신 내 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지금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곧 HS홀딩스 정기주총이 열려. 우리 가족 의결권 모두 당신에게 위임해 줄 테니까 당신이 어떻게든 경영권 방어해야 해. 알았어?”

-난 회사 돌아가는 것 잘 알지도 못하는데…….

“지금 징징거릴 때가 아니야. 여기서 밀리면 우리 가족 다 끝장이라고. 김 변이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말고 의연하게 막아내라고. 알았어?”

-알았어요. 현영이 고 계집애한테만은 절대 우리 회사 뺏길 수 없죠.

“그래, 부탁해.”

조동한은 전화를 끊으며 전에 없이 부부간의 정이 돈독해지는 것을 느꼈다. 위기를 함께 헤치며 싹트는 전우애만 한 것이 없는 법이었다.

HS홀딩스 정기주주총회를 앞두고 현영은 대주주 자격으로 몇 가지 중요 안건을 제출했다. 불법행위와 경영실패를 이유로 한 조동한 대표이사 회장의 이사 해임 건, 조현영 자신의 이사 선임 건, 경영상의 불법으로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자를 이사 선임 결격사유로 신설하는 정관 변경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조동한을 해임하고 조현영 자신이 이사 자리에 복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사 선임 결격사유를 신설함으로써 조동한 일가가 이대로 경영에 복귀할 수 없도록 원천 봉쇄 하려는 것이었다.

조동한은 정기주총 개최 공시상에 표시된 안건을 보며 조현영에게 이를 갈았다. 절대로 현영의 뜻대로 되게 두지는 않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사전에 행사된 의결권 집계상으로는 결말이 오리무중이었다. 재무제표의 승인은 이미 행사된 의결권으로도 문제없이 통과되었으나 현영이 낸 안건에 대해서는 유독 사전에 행사되지 않은 의결권이 많았다.

주주들은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숨죽이고 추이를 지켜보는 듯했다. 이사 해임과 정관변경 정족수를 넘길 수 있을 것인가는 주총 당일 출석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이들의 결정에 의해 갈릴 가능성이 높았다.

조동한은 주총 날까지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 * *

조민한은 정기주총 당일 형수의 채근으로 주총이 열리는 HS홀딩스 본사 대회의실까지 동행했다.

조민한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 번도 주주총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주총 안건에 대해서는 항상 형이 하라는 대로 미리 의결권을 행사해 두었다. 대주주들은 대체로 다 그렇게 했고 성가시게 주총에 직접 오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주총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달랐다. 마지막까지 요지부동인 의결권이 너무 많았다. 그 때문에 불안해진 형수가 결과를 확인하러 가야 한다고 찔러댔기 때문에 조민한은 별수 없이 주총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남편과 자식들이 줄줄이 구속된 참이니 형수로서는 똥줄이 탈 만도 하다고 조민한은 남 일처럼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HS홀딩스의 주식을 추가로 상속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승계 전쟁은 말 그대로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형이나 형수야 똥줄이 타건 말건 조민한은 이미 주총에 목을 매달 이유가 없었다.

일찌감치 주주명부를 확인하고 회의실 앞자리에 앉아 조민한은 무료한 얼굴로 귀나 후비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겠죠? 남편은 우리가 확보한 것만 잘 쥐고 있어도 경영권 방어 가능하다던데. 가지고 계신 의결권은 분명히 행사하셨죠? 현영이가 올린 안건이 절대 통과되면 안 돼요.”

형수는 옆자리에 앉은 조민한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 확인을 받았다.

“예, 예. 걱정 마십시오, 형수님. 다 반대했습니다.”

조민한은 성가신 기색을 감추며 애써 웃는 낯을 꾸며냈다. 하지만 조민한의 마음 한구석에는 내심 뜨끔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조민한은 보유한 주식의 의결권을 다 행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다 행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지분의 상당수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 있으니 평소에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대주주들이 하나하나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영과 기영 남매는 심지어 모친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형수는 그 모습을 보고 눈꼬리를 매섭게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혀서. 우리 그룹 경영과는 상관도 없는 형님까지 동원해서 세를 과시하겠다?”

형수는 탄식했지만 조민한은 형수야말로 경영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아닌가 생각한다. 의결권을 맡기려 했다면 형수보다야 자신이 적임자이겠지만 형은 결국 조민한을 믿지 못했다.

조민한은 회사 주식을 팔아치운 데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 해도 상관없다’, ‘형의 자업자득이다’라는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주총 개회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눈에 익은 얼굴이 회의장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조민한은 무심히 돌아보았다가 아는 얼굴에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상대도 조민한을 보더니 미소를 띠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누구예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형수가 경계하며 물었다.

“태산지주 김범진 회장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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