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세대교체(2)
“바른 삼촌이라면 분명히 제 편이 되어줄 거예요.”
현영은 한마디로 단정하고는 결정적으로 조재용 회장의 야심을 자극할 청사진을 던졌다.
“생각해 보세요. 제가 그룹을 이끌고 바른 삼촌이 정계를 이끄는 미래를요. 우리 한성그룹이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정재계를 전부 장악하게 되는 거예요.”
현영의 꿈같이 달콤한 이야기에 조 회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른이가 정계로 나간다더냐?”
“그만한 야망이 없고서야 그렇게 대중의 주목을 끄는 행보만 골라 하겠어요? 삼촌의 목표는 분명 대권일걸요? 설사 그럴 생각이 없어도 제가 반드시 대통령으로 만들겠어요. 제가 그룹을 승계하게 되면 우리 그룹의 다음 목표는 바로 강바른 검사 대통령 만들기가 될 거예요.”
현영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은밀히 속삭였다. 조 회장은 침대에 기대 가늘게 눈을 뜨고 백일몽에 젖었다. 그리고 아쉽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니가 사내이기만 해도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을. 아직 결혼도 안 한 어린 계집애에게 그룹의 총수 자리를 물려준다니 대내외적으로 영 체면이 안 서는 일인데…….”
“할아버지, 저 벌써 마흔이 넘었어요.”
현영이 웃음을 터뜨리며 하는 말에 조 회장이 새삼 현영을 바라본다. 이 아이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하는 얼굴이다. 돈을 쏟아부어 관리하는 얼굴이라 나이가 느껴지지 않기도 했지만 자식은 언제까지고 어리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하물며 손주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곧 결혼도 할 예정이고요. 혼담이 오가고 있어서요. 사실 오늘은 할아버지께 그 얘길 드리고 허락을 받으러 온 거예요.”
“그래? 어떤 집안이냐?”
조 회장은 상대보다 집안을 먼저 물으며 기대감을 표했다.
“일승그룹 삼남입니다.”
조 회장의 눈이 커진다. 일승은 재계 5위권 안에서 한성과 함께 엎치락뒤치락하는 재벌가였다.
현재 장남과 차남의 승계 경쟁이 한창이라고 알고 있다. 삼남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진즉에 경쟁에서 밀렸겠지만 그렇다 해도 야심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데릴사위 데려왔다가 그룹을 통째로 넘기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건 걱정 마세요. 경영보다는 공부에 더 관심이 많아요. 지금은 경영에 데뷔했지만 얼마 전까지도 MIT에서 경영공학 박사과정 밟았어요. 세상 물정 어두운 학자 같은 타입이에요. 야망이 있다 해도 자기 그릇이 거기까지인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어요. 외조를 잘하기로 약속도 받았고요.”
현영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결혼이 성사되면 재계 5위권 안의 세 그룹이 사돈으로 얽히게 되는 거예요. 제 아이들은 그야말로 로열패밀리가 되겠죠.”
현영의 외가 또한 못지않은 재력가임을 어필하는 것이다. 현영이 등에 업은 세력이 현영의 지도력이 될 것이었다. 그 강점이 약점을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현영은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호소했다.
“숙부가 제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얘기 전하지 않던가요?”
조 회장은 끄응 신음했다. 전혀 전해 들은 바 없었기 때문이다.
답은 하지 않았지만 조 회장의 불편한 기색에 현영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는 제가 결혼으로 세를 얻는 게 두려우시겠죠.”
일가의 혼담은 결혼 당사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룹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였다. 그런 일을 자신에게는 일언반구도 알리지 않았다. 조 회장은 차남의 행실이 새삼 괘씸했다. 그놈은 절대 믿을 수 없다는 확신이 점점 더해지고 있었다.
조 회장은 결심을 굳히고 현영을 향해 말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
조 회장의 말에서 엿보이는 굳은 의지에 현영은 반색했다. 조부가 결심을 돌리기 전에 빨리 밀어붙어야 한다.
“HS홀딩스 임시 이사회를 하루빨리 소집해 주세요.”
HS홀딩스는 순환출자구조를 이루고 있는 한성그룹 계열사들의 중심에 있는 회사였다. 이 회사를 장악할 수 있다면 한성그룹 전체를 차지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섭할 수 있는 이사들 최대한 확보해서 숙부를 대표이사 자리에서 해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를 그 자리에 앉혀주신다면 더욱 좋겠지요.”
“알았다. 그렇게 하자.”
결정은 신중하게 해도 한번 결정을 내리면 그것을 추진하는 것은 전광석화처럼 한다는 것이 조 회장의 신조였다. 노쇠한 지금도 조 회장의 그러한 신조는 변치 않았다.
조 회장은 손녀를 내보낸 후 바로 자택에 상주하는 비서를 시켜 주 실장에게 전화를 걸도록 했다.
“주 실장, 지금 당장 튀어 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조 회장은 딱 한마디만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조 회장의 심기가 불편할 때야 수없이 겪어보았지만 오늘은 기색이 좀 다르다고 주인호 실장은 생각했다. 긴급한 사안임을 직감하며 주 실장은 바로 자택으로 달려갔다.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서재로 들어가며 주 실장은 조 회장이 큰 결정을 내렸음을 예감했다. 기력이 크게 쇠한 조 회장은 최근 업무보고를 받을 때도 침대에 앉아 받았던 것이다. 그런 조 회장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일어날 정도의 일이라면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후계 결정을 비로소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
조 회장은 셔츠에 카디건으로 갈아입고 서재 책상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재로 들어서는 주 실장을 보자마자 호통을 쳤다.
“자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동한이가 회사를 저 지경으로 망치고 있는데 어떻게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을 수가 있어? 곧 죽을 늙은이한테 이제 충성하는 시늉도 아깝다 이건가?”
“회장님, 오해십니다. 건강에 해가 되니 일단 진정하시고 천천히 얘기하시죠.”
주 실장은 비서에게 눈짓으로 차를 준비해 오라고 한 뒤 씩씩거리는 조 회장에게 다가갔다.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조금 전에 현영이가 다녀갔어. 동한이가 사기를 당해서 큰 손해를 봤다던데. 그놈은 항상 그런 식이야!”
현영이 어떻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기를 당한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위험도가 높은 사업이었고 그에 따라 손실을 입었으나 빠질 때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뿐.
사업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판단 미스였다. 물론 그러한 실책이 반복되고 손해도 크다 보니 조동한의 사업적 능력을 높게 평가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사업하다 보면 그 정도 실책은 있을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과감한 추진력은 사업가로서 장점일 수도 있고요.”
“성한이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아니, 현영이만 되어도 그런 멍청한 짓은 안 해.”
조 회장은 죽은 장남과 손녀의 이름을 들먹이며 애석해했다. 주 실장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장님께서 다른 말씀이 없으시기에 저는 둘째 도련님을 후계로 정하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회장님 결정에 사소한 일로 흠을 잡는 것 같아 보고드리지 않았습니다. 괜히 마음만 어지럽혀 드릴 것 같고 혹여 건강을 해치시지는 않을까 싶어.”
주 실장의 해명을 어느 정도 납득한 듯 조 회장은 표정을 누그러뜨렸지만 여전히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어쩔 수 없어 그놈에게 맡겨둔 거지 내가 내켜서 정한 것은 아니야.”
주 실장이 은근히 물었다.
“혹시 결심이 바뀌셨습니까?”
조 회장은 주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현영이는 어떤가?”
경영 능력만 따지면 훨씬 뛰어나다고 주 실장도 생각해 오고 있었다. 게다가 현영은 꾸준히 주 실장을 제 편으로 포섭하려 시도해 왔다. 그에 비해 조동한은 그룹의 실권을 음지에서 장악하고 있는 주 실장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동한보다는 현영이 그룹을 승계하는 쪽이 주 실장으로서도 몸값을 더 높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 회장이 조동한을 후계자로 묵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 실장은 조동한이 그룹을 확정적으로 승계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조 회장이 마음을 바꾼다면? 그렇다면 그룹 승계 구도가 바뀔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
주 실장은 그런 내심을 숨긴 채로 말했다.
“회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조현영 대표가 더 적임자겠지요.”
조 회장이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주 실장의 답에 조 회장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튼 자네는 나이가 먹을수록 영 능구렁이 같아지는구먼.”
조 회장은 그렇게 답하고는 호쾌하게 말했다.
“HS홀딩스 임시 이사회 소집해. 대표이사 바꿀 거야. 그 전에 찬성해 줄 이사들 최대한 포섭하고. 내 의지라고 해도 통하지 않으면 자네가 쥔 카드를 활용해도 좋아. 이사들 치부 하나씩은 쥐고 있겠지?”
주 실장은 고개를 은밀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실행해.”
“예, 알겠습니다.”
주 실장은 조 회장의 지시를 받고 서재를 나왔다. 나오는 길에 마침 귀가하는 조 회장의 여동생과 거실에서 딱 마주쳤다. 양손에 주렁주렁 든 쇼핑백을 소파에 내려놓던 노파가 주 실장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주 실장이 여기 웬일이에요? 오늘 오는 날도 아니잖아.”
“회장님이 부르셔서 왔습니다.”
노파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간다. 현영의 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그제야 자각한 것이다.
주 실장은 괜한 시비를 당하고 싶지 않아 얼른 고개를 숙인 후 급히 자리를 떴다. 노파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조 회장을 찾았다. 침실로 달려 들어갔으나 회장이 자리에 없자 비서를 닦달한다.
“회장님 어디 계셔?”
“서재에 계십니다.”
비서가 당황해 쩔쩔매며 답했다.
노파가 서재로 득달같이 달려 들어가며 외쳤다.
“오라버니! 주 실장은 왜 불렀어요? 현영이 고것이 뭐라고 꼬드겼죠?”
“시끄러워. 내가 필요해서 불렀어.”
“내가 딱 자리 비웠을 때 주 실장 불러들이다니 그년이 작정하고 나를 따돌린 것이 분명해요.”
포기하지 못하고 추궁하는 동생에게 조 회장은 불호령을 내렸다.
“닥치지 못해?!”
노파는 갑자기 터진 노성에 움찔 목을 움츠렸다.
“아들놈과 짝짜꿍해서 날 가둬놓고 감시하고 있는 게 누구야?! 내가 니 꿍꿍이도 모를 만큼 깜깜한 줄 알아?!”
“오, 오빠… 그런 게…….”
“듣기 싫어! 꼴 보기 싫으니 당장 나가!”
노파는 황망히 서재를 나갔다. 거실에서 쇼핑백을 챙겨 손님방으로 들어온 노파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동한아, 주 실장이 왔다 갔어. 니 아버지 한동안 병든 닭처럼 시름시름 하더니 오늘은 팔팔하게 일어나 앉아계신다.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해.”
-주 실장과 무슨 얘기 나누셨는데요.
“그건 못 들었고.”
조동한이 대번에 불쾌한 기색을 띤다.
-제가 아무도 아버지와 독대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니 아버지가 길길이 뛰면서 쫓아내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니?”
노파는 현영의 꾐에 빠져 외출하고 왔다는 말은 쏙 빼놓고 투덜거렸다.
“아무튼 나도 더 이상은 이런 짓거리 못 하겠어. 저 고약한 노인네 성질머리 받아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곧 마무리될 테니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나중에 서운치 않게 대접해 드릴게요.
노파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전화를 끊었다. 조동한은 통화를 마친 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노친네 노망나서 허튼짓하기 전에 서둘러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