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세대교체(1)
범진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 철이 다가왔다. 태산은 부임 희망지를 써내기에 앞서 범진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민했다.
확실히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면 서울에 남아 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그동안의 실적을 감안하면 아주 안 될 일도 아닌 듯했다.
태산은 조금 욕심을 부려볼까 생각하며 희망 부임지를 차례로 써넣었다.
[서울중앙지검]
[서울고검]
서울중앙지검 부장은 타 지검의 차장급이다. 대검찰청 과장은 부장급이니 중앙지검으로 간다 해도 부장으로 부임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한번 부장으로 승진시킨 검사를 다시 부부장으로 부임시킬 수도 없다. 서울중앙지검으로 보내기에는 태산의 직위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에 비해 고검 검사는 부장급이므로 고검으로 발령받는 것이 여러모로 자연스럽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이 아무래도 고검에 비해 일선에서 직접 사건을 수사한다는 느낌이 강해 태산은 서울중앙지검 쪽에 더 마음이 끌렸다.
서울중앙지검으로 발령이 난다면 어떤 부서, 어떤 직위로 보낸다 해도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태산은 서울중앙지검을 1순위 희망 부임지로 제출했다.
서울에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직위는 상관없다고 마음을 비웠던 만큼 정작 인사이동 결과가 발표된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검찰청 감찰3과장 강바른 →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장]
정말로 희망지에 발령받은 데다 단숨에 차장급으로의 승진이었다.
법무부장관은 태산을 대검 감찰과로 보내며 다음 인사는 대선 직전인 데다 자신이 그 때까지 자리를 지킬지도 알 수 없다고 엄살을 했었다. 그 전까지 유능한 인재를 확실히 부려먹고 갈 셈이라며.
그런데 정권 막바지까지 법무부장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말대로 최후의 최후까지 태산을 살뜰히 부릴 셈인 듯했다.
태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른 동료들의 부임지를 확인해 보았다.
[대검찰청 감찰부장 원신영 → 인천지검장]
원신영 부장은 대검 감찰부장으로 부임하며 차장급에서 단숨에 검사장급으로 올라 주위의 질시를 받았었지만 이번 인사로 검사장에 완전히 안착하게 되었다. 태산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할 소식은 또 하나 있었다.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안소영 → 부산지검 강력부 부부장]
안 검사가 부부장으로 승진해 발령을 받은 것이다. 연차를 따져보면 2년에서 3년 정도 빠른 승진이었지만 그동안의 눈부신 실적이 반영된 듯했다.
태산은 안 검사의 연차를 계산해 보다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감회에 젖는다. 처음 만났을 때도 안 검사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영리한 학생처럼 보이는 인상이며 태산의 원래 나이 탓에 은연중 어리게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리게 생각하기로는 최 검사만 할 것인가.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최진우 → 서울남부지검 형사6부]
남부지검 형사6부는 기업 및 금융범죄를 전담하는 부서로 반부패수사부의 업무 중 중요 기업 관련 범죄 수사와 연관성 있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남부지검은 따로 반부패수사부를 두지 않았으므로 형사6부가 그 업무를 맡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반부패수사부에서 활약했으며 대검찰청 감찰부에서도 기업의 스폰을 받은 부패검사들을 수사했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어엿한 특수통으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교복 입고 직업교육 참관을 온 고등학생쯤으로 착각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눈부신 발전이었다. 이미 30대 초반이지만 여전히 20대 같아 보이는 앳된 외모를 보면 한창 수사력이 빛을 발할 시기의 검사라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지만 말이다. 외모가 직업적으로 상당히 손해가 되는 케이스일 것이었다.
태산 자신이 파격적으로 승진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인사 발령이었다. 다만 전 검사의 경우가 조금 의외였다.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전윤지 → 수원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
안 검사는 대검 감찰부로 오기 전까지 강력통이었으므로 다시 강력부로 발령받은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전 검사는 인천지검 공판부 이후 반부패수사부와 대검 감찰부를 거쳤기 때문에 이번에도 반부패수사부나 업무가 유사한 형사부 쪽으로 발령되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성범죄와 아동학대 전담 부서라니. 여성 검사라는 것을 감안한 인사일까. 물론 여성 검사들이 이러한 사건에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전 검사 같은 인재를 조금 더 요직으로 발령해 키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과장님, 부장님이 연결해 달라십니다.
김민하 실무관이 원신영 부장의 호출을 알렸다.
“예, 바꾸세요.”
바로 원 부장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명랑하게 울렸다.
-강 과장, 승진 축하해요. 그 나이에 벌써 차장급이라니 놀랄 만큼 빠른 승진이네요. 이러다 나까지 따라잡는 거 아닌가 몰라요.
“아닙니다. 부장님도 인천지검장으로 영전하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다 강 과장이 잘해준 덕분 아니겠어요? 좋은 소식 들었으니 축하 회식이라도 해야죠. 감찰부 환송 회식이야 따로 하겠지만 특별히 인연이 있는 감찰부 어벤져스는 별개로 모여서 회포를 나눠야 하지 않겠어요? 텃세 속에서도 2년간 꿋꿋이 애써줬고 훌륭한 성과도 올렸는데.
태산은 빙그레 웃으며 원 부장의 말을 받았다.
“정말 그렇습니다.”
-회식 자리는 내가 잡아둘게요. 오늘 퇴근 후 시간 비워둬요.
“예, 알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어 집무실을 나서며 태산은 송봉근 계장과 김민하 실무관에게 말했다.
“먼저 퇴근합니다. 두 분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세요.”
“예, 검사님.”
송 계장과 김 실무관이 다투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건 그렇고 승진 축하드립니다, 과장님.”
“정말 축하드려요. 게다가 부임지도 서울중앙지검이니 길 하나만 건너면 되고 얼마나 좋아요.”
“고맙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됐나요? 인사이동지 정해졌나요?”
원래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하던 두 사람은 태산을 보필하기 위해 대검찰청으로 파견을 나온 상황이다. 태산이 옮기게 되면 두 사람도 근무지를 옮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태산의 질문에 두 사람이 웃음기를 띠며 장난스럽게 눈을 맞추어 태산은 어리둥절했다.
“과장님 덕분에 저희도 가까운 곳으로 발령 났습니다. 서울중앙지검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부서는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마 이번에도 과장님과 함께 일하게 되지 않을까요?”
태산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중앙지검에서 파견 나온 것이었으니 돌아가는 게 자연스럽겠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송 계장과 김 실무관이 즐겁게 고개를 숙였다.
태산은 부장이 문자로 찍어준 펍에 들어섰을 때 감찰부 검사들은 이미 모여 자리하고 있었다. 기다리지도 않고 이미 맥주를 한 잔씩 돌린 참이다.
태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검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최 검사가 야유하며 놀리듯 말했다.
“이야~ 역시 주인공이네요. 맨 나중에 나타나시고.”
원 부장도 맞장구를 친다.
“그러게 말이에요. 상사가 먼저 와 있는데 어슬렁어슬렁 늦게 나타나깁니까?”
“죄송합니다. 업무 마무리하고 오느라.”
태산이 멋쩍게 답하니 전 검사도 타박한다.
“아무튼 감찰부 일은 혼자 다 하시는 것처럼 열심이시라니까요. 오늘 같은 날은 좀 일찍 끝내도 되지 않나요? 승진도 하셨는데.”
“아, 맞다! 승진!”
갑자기 최 검사가 주머니에서 폭죽을 꺼내더니 줄을 당겨 터뜨렸다. 펑 소리와 함께 색색의 종잇조각이 흩날린다.
“승진 축하드립니다!”
최 검사가 목소리를 높이자 다른 검사들도 박수를 치며 깔깔 웃었다.
“뭐야? 그건 어디서 났어?”
태산이 쑥스러움에 타박했더니 최 검사가 명랑하게 답했다.
“다들 좋은 데로 발령 났고 과장님과 안 검사님은 승진까지 하셨으니 축하하려고 준비했죠.”
최 검사는 테이블 밑에서 케이크 상자를 꺼내 척 올려놓았다.
“사실은 케이크 사러 갔더니 끼워주더라고요.”
최 검사는 깔깔 웃고는 분주히 케이크를 세팅했다. 촛불까지 켜겠다는 걸 태산과 안 검사가 겨우 만류해서 다 같이 케이크를 자르고 맥주와 나눠 먹으며 즐거운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다들 부임지에는 만족하고 있나요?”
원 부장이 문득 말을 꺼냈다. 다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원 부장은 어쩐지 씁쓸한 표정을 했다.
“불만이 없다니 다행이지만 나는 새삼 욕심이 나서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즐거운 얼굴이던 검사들이 문득 긴장해 원 부장을 돌아보았다. 태산도 의외라고 생각하며 원 부장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원 부장이 겉으로는 허허실실 부드러운 타입으로 보여도 내면은 강단이 있는 사람이다. 사심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야심이 아예 없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도 상당히 빠른 승진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 이상의 자리를 바랄 만큼 욕심이 많은 타입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안 검사가 빠르게 부부장으로 승진하기는 했지만 강력부로 가게 되었고 전 검사도 반부패수사부를 벗어나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태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원 부장은 자신의 인사가 아니라 다른 여검사들의 인사가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태산도 전 검사가 의외의 부서로 가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일반 수사부서에서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조직문화를 바꾸려면 난 여검사들이 요직으로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길을 닦아놓아야 다른 여검사들도 더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요.”
원 부장의 말을 듣던 안 검사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했다.
“저는 만족합니다. 강력부 자체가 극히 남초이고 여검사들이 쉽게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제가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게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강력사건 전담 형사부가 아니라 강력부로 가는 것도 좀 더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요.”
그렇게 답한 안 검사가 원 부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승진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는데 부장님 말씀대로 앞으로는 자리에도 좀 더 욕심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 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 검사가 불쑥 말했다.
“전 완전 백 퍼센트 만족입니다. 사실 제가 희망한 부서로 발령받은 거라서요.”
검사들이 무슨 소린가 하고 돌아보자 전 검사가 쑥스러운 투로 설명했다.
“저는 희망 부임지로 검찰청을 안 써내고 부서를 써냈어요. 여성 범죄 관련 부서면 어디든 좋다고 쓰긴 했는데 진짜 희망하는 대로 될까는 반신반의했었고요.”
최 검사가 얼떨떨해서 물었다.
“전 검사님 특수 전문 아니에요? 전에 여성 범죄 관련 부서에서 일한 적 있으세요?”
“아니. 전혀.”
전 검사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런데 왜요?”
최 검사가 채근하듯 재차 물었지만 전 검사는 어쩐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 * *
왜 여성 범죄 부서를 지원했느냐고 묻는 최진우 검사의 질문에 한참을 머뭇머뭇 우물거리던 전윤지 검사가 툭 던져 말했다.
“다크웹 사건 송환 거부 판결 이후로 후유증이 오래가더라고. 남의 나라 손 안 빌리고 우리 사법부가 엄벌해야 한다는 게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잖아. 여자로서 나라 잃은 심정이지 뭐야. 여자한테 진정 조국은 없는 모양이구나 그런 좌절감이 자꾸 들고. 나라도 이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꿔봐야 하지 않을까…….”
전 검사가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끝을 흐렸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출사표라도 던진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단한 결심을 한 건 아니고. 내가 뭐 대단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명색이 검사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조금이라도 더 있는데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나 싶어서.”
“그래도 그동안 쌓아온 전문성이 있는데 그걸 포기하면 아깝잖아요. 전 검사님 전공도 특수부에 딱이고.”
최 검사가 자기 일인 것처럼 볼멘소리를 했다. 전 검사의 전공은 또 처음 듣는 이야기라 태산은 무슨 말이냐고 최 검사를 눈으로 물었다. 최 검사가 다른 검사들도 궁금해하는 눈치를 보이니 그제야 설명을 덧붙인다.
“전 검사님 원래 전공이 경제학이에요. 기업경제 전공으로 대학원 석사까지 하고 박사과정 중에 로스쿨 진학한 거래요.”
최 검사의 설명에 전 검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원래도 그냥 공부하는 게 재미있어서 진학한 거라서요. 전공에 크게 애착은 없었어요. 대학원 가보니 도저히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싶어서 박사과정은 중도에 포기했는데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결국 로스쿨로 오게 된 거고요.”
태산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입을 떡 벌렸지만 다른 검사들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 지금 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태산은 동의를 구하려 검사들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는 듯 멀뚱멀뚱 태산을 바라보았다. 원 부장만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뭘 그렇게 정색해요. 강 과장이야말로 누구보다 공부를 좋아했을 사람이면서.”
태산은 머쓱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강바른이 된 이후로는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이 꽤 있다. 하지만 공부가 재미있고 공부밖에 재주가 없다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오질 않아서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가 너무나 생경했던 것이다.
임태산이 살아왔던 세상에서는 공부가 재미있다고 했다가는 찐따 취급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어쨌든 한번 길을 크게 바꿔본 적도 있는데 또 한 번 바꾸지 못할 건 뭐 있나 싶고. 게다가 같은 검찰인데 크게 길을 바꾸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어요.”
태산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전 검사를 다시금 유심히 바라본다. 처음 봤을 때는 좀 덜렁대고 멍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일은 빠릿하게 잘했고 피의자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한 검사였다.
다크웹 사건 주범의 송환 거부 결정이 내려졌을 때 흥분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일회적인 분노 이상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심 끝에 새로운 길을 나설 정도로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니. 범죄자를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는 평소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참으로 강건했다. 겉모습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태산은 새삼 느꼈다.
하기야 태산 자신이 겉모습과 너무도 다른 내면을 가지고 있는 인물의 실례인 것이다.
“아무튼 정말 큰 결심 하셨네요. 전 검사님 너무 멋있으세요.”
최 검사가 빙글빙글 웃으며 상찬하자 전 검사는 어쩐지 눈을 가늘게 뜬다.
“니가 그렇게 얘기하니 왜 놀리는 것 같지?”
“아,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전 검사가 옆구리를 마구 쥐어박자 최 검사가 깔깔 웃으며 피한다. 친남매처럼 스스럼없는 분위기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 없는 전공 관련 이야기도 최 검사는 잘 알고 있었다.
죽이 잘 맞는 것 같긴 했지만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하고 생각하는데 안 검사가 문득 중얼거린다.
“전 검사, 최 검사한테 말 놓네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지도 두 사람은 상호 존대를 썼던 것 같은데. 최 검사가 퍼뜩 변명하듯 말했다.
“아, 그게… 같은 연구관실에서 일하다 보니까 사적으로도 얘기 나눌 일이 많아서…….”
최 검사가 인천지검으로 처음 부임했을 때 안 검사가 부재중이던 강 검사 대신 지도를 맡기도 했었고 동료로 호흡을 맞춘 기간도 훨씬 길었다. 그럼에도 최 검사는 항상 안 검사를 조금 어려워했는데 전 검사와는 친남매처럼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으니 조금 서운할 법도 하다.
최 검사는 안 검사의 마음을 의식해 지레 눈치를 봤다. 전 검사도 서둘러 덧붙인다.
“사적으로는 진즉에 말을 놓았는데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는 말 놓기가 애매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안 검사님이 최 검사한테 말을 안 놓으니까…….”
안 검사와 전 검사는 서열이 애매해 서로 조금은 불편한 관계였다. 전 검사가 대학원을 거쳐온 탓에 안 검사보다 연차는 낮았지만 나이는 전 검사 쪽이 많았다. 연차로 보면 엄연히 안 검사가 선배였지만 나이 때문에 아랫사람으로 대하기가 껄끄러울 것이었고 전 검사도 그것을 의식하는 것 같다.
“저는 상관없으니 편하게 터놓고 지내세요.”
안 검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전 검사와 최 검사는 어쩐지 좌불안석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원 부장이 웃음을 터뜨린다.
“안 되겠네요. 오늘 다 같이 야자 타임이라도 가져야지.”
“남 말 하듯 하지 마시고 부장님부터 말을 놓으세요. 따지고 보면 부장님부터가 막내에게도 말을 안 놓으시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 아닙니까?”
전 검사가 이번에는 원 부장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엄연히 상사인데 눈치 없이 너무 허물없게 굴다가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래요. 공사는 구분해야지.”
“이런 자리에서는 좀 허물없이 대하셔도 괜찮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부장님이 과장님께 말 놓는 것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과장님한테 먼저 말 놓으시는 걸로 시작하죠?”
최 검사가 신이 나서 부추겼다. 아무래도 야자 타임에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최 검사일 것이므로 흥이 난 것이리라.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다른 검사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기다렸다.
원 부장이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가만히 태산을 불렀다.
“강 과장?”
원 부장을 돌아본 태산도 미소를 지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 부장은 입을 열 듯 말 듯 계속 망설이다가 갑자기 앞에 놓인 맥주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탁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사들에게 하소연했다.
“도저히 못 하겠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 과장은 안 되겠어요.”
술자리에서 와아~ 하고 웃음이 피어난다. 태산도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아니, 뭘 그렇게 어려워하십니까?”
“강 과장 눈빛을 봐야 해요. 아무리 봐도 동년배 같은 데가 있어서 도저히 아랫사람 대하듯 하지 못하겠어요.”
원 부장의 너스레에 태산은 뜨끔했다. 겉은 아직 삼십 대라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살아생전 사십 대였던 태산이다. 죽지 않고 그대로 나이를 먹었더라면 지금은 오십 줄인 것이다. 원 부장이 다른 부하들보다 어렵게 여길 만도 하다.
꽤나 예리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검사들이 일제히 태산을 돌아보더니 이해가 간다는 듯 제각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요. 강 과장님 외모는 오히려 나이보다 어려 보이시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원숙하시긴 하죠.”
“좋은 말로 하면 원숙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아재삘?”
전 검사의 코멘트에 최 검사가 낄낄 웃으며 덧붙였다.
“엄밀히 나이를 따지면 큰형뻘인데 이상하게 삼촌이나 아버지뻘로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직급이 높아서인가 아니면 의지가 되어서인가 모르겠지만.”
“카리스마 때문이 아닐까요? 어지간한 피의자들은 기로 눌러 버릴 정도로 워낙 눈빛이 매서우시니까.”
안 검사도 한마디 보탠다.
뜨끔한 구석이 있다 보니 태산은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이 영 불편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허물없이 지내자고 시작한 야자 타임 때문에 분위기 더 불편해지겠습니다. 이제 그만하죠.”
원 부장이 반가운 기색으로 선뜻 받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번 인사 발령에 모두 만족했다는 거죠? 그거 다행이네요.”
원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사들에게 덕담을 건넸다.
“여러분은 어디를 가든 잘해낼 것이라 생각합니다. 검찰개혁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업무에 임해주세요.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덕담을 마친 원 부장이 잔을 높이 들었다. 다른 검사들도 모두 잔을 들고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부장님도 건강하십시오.”
“다음에 또 함께 일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감찰부에서 일했던 날들 잊지 않겠습니다.”
건배 후 맥주를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은 최 검사가 아쉬운 듯 말했다.
“앞으로 이 멤버 그대로 다시 뭉쳐서 일하는 날이 올까요?”
“몇몇이 같이 일하게 되는 수는 있겠지만 이 멤버 그대로는 힘들겠지.”
태산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술잔을 기울였다.
법무부장관의 특별한 지시로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들이었다. 앞으로 이들 모두가 같은 부서에서 일할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같은 생각으로 아쉬움에 젖어 한동안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다.
“감찰부 어벤저스가 이대로 해체라니 아쉽네요.”
그렇게 중얼거린 최 검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명랑한 말투로 외쳤다.
“해체하기 전에 기념 촬영은 해야죠! 자, 다들 여기 좀 보세요.”
최 검사가 긴 팔을 뻗어 핸드폰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핸드폰 액정에 술자리에 앉아 올려다보는 검사들의 얼굴이 모두 잡히자 최 검사가 소리쳤다.
“자, 웃으시고요~~~!!!!! 김치~~~!!!!”
최 검사의 외침에 따라 음성 촬영 설정이 된 카메라 앱이 한 장 한 장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표정이 굳어 있던 검사들도 한 장 한 장 넘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표정이 풀어졌다. 모두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담기고야 최 검사는 만족하고 핸드폰을 거두었다.
최 검사는 바로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며 조작하더니 어느새 촬영한 사진을 자리에 모인 전원에게 전송해 주었다.
“뭐야? 내 얼굴만 왜 이래?”
“전 검사님 원래 그렇게 생기셨어요. 타고난 걸 잊으시고 자꾸 과한 욕심 내지 마세요.”
“어디? 사진 폴더 보여줘 봐.”
전 검사가 최 검사와 머리를 모으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야단이다.
“이거 봐! 이 사진이 훨씬 낫잖아. 최 검사 내 얼굴은 어떻게 나왔는지 신경도 안 쓰고 사진 골랐지?”
“에이~ 다 똑같구만 뭘.”
태산은 두 사람의 실랑이를 한 귀로 들으며 자신도 최 검사에게 전송받은 사진을 눌러 보았다. 활짝 웃고 있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벌쭉 웃고 말았다.
* * *
해가 넘어가고 태산은 대검찰청 감찰부 동료들과 헤어져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로 부임했다. 첫 출근 후 부장 집무실에 앉자마자 내선 전화가 울렸다.
- 부장님, 검사장님이 올라오시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일어선 태산은 그 양반 참 성질 급하군 생각하며 집무실을 나왔다. 새로 부임한 부하의 인사를 받는 것이야 당연한 절차겠지만 출근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검사장실로 불러올리다니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 검사장실로 올라가니 검사장이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태산을 돌아보았다.
태산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반부패수사부에 새로 부임한 강바른입니다.”
“아, 강바른 부장. 반갑네.”
검사장이 빙그레 웃으며 태산에게 자리를 권했다.
“거기 앉지.”
태산이 소파에 자리를 잡자 검사장도 상석에 와 앉는다. 그러고는 가까이서 물끄러미 태산의 얼굴을 살폈다. 태산은 조금 멋쩍어 시선을 돌린 채 검사장이 자신을 관찰하는 동안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다.
“젊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마는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데… 자네가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지?”
태산도 자신의 나이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강바른의 몸으로 온 뒤에는 태산 자신의 나이는 사망 당시에 멈추어 있었고 강바른의 나이는 제 나이 같지가 않았던 탓이다. 주민등록증에 표시되어 있는 강바른의 생년월일을 떠올리며 태산은 머릿속으로 얼른 암산을 했다.
“올해로 딱 마흔 됩니다.”
일순 검사장이 탄성을 뱉는다.
“허어~ 마흔이라. 그래도 30대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검사장에게는 너무 젊은 간부가 부임한 것이 영 불안 요소인 듯했다.
“검찰 안팎으로 이번 자네의 인사 발령에 대해 말이 많은 건 알고 있겠지?”
태산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언론에서부터 유례없는 30대 차장급 검사가 탄생했다고 대서특필을 한 탓이다. 우리 나이로는 이제 막 마흔이 되었다지만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좋아하는 언론은 굳이 만 나이로 따져서 30대로 타이틀을 뽑았다. 파격 인사 정도가 아니라 인사 파란, 인사 파괴라고들 입을 모았다.
“남들이 부부장을 달까 말까 한 나이에 차장급으로 승진했으니 다들 바라보는 눈이 매서워. 뒷말 안 들리게 남들보다 훨씬 열심히 해야 할 거야. 아니, 열심히 하는 정도로는 안 되지. 아주 잘해야 할 거야.”
태산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검사장은 뜸을 들이며 또 한동안 태산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 아직 할 말이 더 있나 싶어 태산은 좀이 쑤셨다. 망설이던 검사장이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한성그룹 조 회장 자제라고?”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인가?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단답했다.
“예.”
“그렇게 닮아 보이지는 않는데…….”
검사장이 혼자 중얼거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이해관계자니 앞으로 한성그룹 관련 사건이 올라오면 자네는 제외시킬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사건이 그렇게 무 자르듯 딱 잘라지는 것도 아니고. 수사하다 보면 다른 사건에서 시작했다가 한성그룹까지 수사가 확대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어떻게… 사심 없이 일할 수 있겠나?”
태산은 단호히 답했다.
“한성그룹 조 회장과는 생물학적으로 친자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서로 왕래도 거의 없고 지난 십 년간은 아예 얼굴도 본 적 없습니다.”
태산의 답에 검사장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단 한 번도 없다고?”
강바른이야 친자관계니 교류가 잦지는 않았을지라도 얼굴을 본 적이야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태산 자신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 해도 법적으로 인지도 받았고…….”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서였을 뿐입니다. 딱히 인지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인지를 받아 법적인 친자가 되면 수사에 제약이 생기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흐음…….”
검사장은 진위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태산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한성그룹과 관계되었든 아니든 불편부당하게 수사하겠습니다.”
태산이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단단히 못 박은 뒤에야 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자네가 오히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집안 배경이 있다는 것이 검사로서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 수사비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력도 보탬이 될 테고.”
검사장이 손을 내밀며 덕담을 건넸다.
“한번 잘해보게.”
태산이 그 손을 맞잡으며 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태산은 검사장과의 독대를 마치고 집무실로 내려와 인계받은 사건들을 파악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반부패수사1부의 검사들을 13층 소회의실로 소집했다.
서울중앙지검의 핵심 부서답게 구성 검사 수는 10명에 달했고 부부장만 둘이었다.
“새로 부임한 강바른 부장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태산보다 나이가 많은 부부장들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반면 평검사들은 자신들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젊은 부장을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지켜보았다. 빛나는 실적을 올리며 누구보다 빠르게 요직을 차지한 태산은 젊은 검사들에게는 부럽기 짝이 없는 롤 모델일 것이었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라는 핵심 부서에서 일하는 검사들에게 그만한 야망이 없을 리가 없었다.
“부부장 이승경입니다.”
태산이 인사를 마치자 다른 검사들도 하나둘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태산은 배치표에서 보았던 이름과 매치시켜 가며 검사들의 얼굴을 기억에 담아두었다.
검사들의 소개가 끝난 후 태산은 앞으로의 수사 방향을 검사들에게 알렸다.
“인계받은 사건들을 검토해 보니 우리 부에서 수사 중인 기업 관련 범죄들이 상당히 많더군요. 그런데 계류만 되어 있고 뚜렷한 성과가 보이는 건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검사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태산의 말이 자신들을 질책하는 것 같아 제풀에 뜨끔했기 때문이다.
“제가 우리 부에 머무는 동안 중요 기업 관련 범죄들을 모두 일소하고 가려고 합니다. 지금 수사 중인 사건들에 박차를 가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수사에 오른 기업이 아니라도 유사한 범죄의 혐의가 있는 다른 기업들도 철저히 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상사들이 몸을 사려 맘껏 수사하지 못했던 젊은 검사들이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추가로 당부했다.
“특히 한성그룹을 집중적으로 감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 승계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불법이 있다면 철저히 적발해야 할 것입니다.”
한성그룹과 새로운 부장의 특수관계를 익히 알고 있던 검사들은 대놓고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앞으로 2년간 바쁘게 달리게 될 것이라 그동안에도 격무에 시달렸을 여러분에게는 미안한 마음입니다. 양해해 주길 바랍니다.”
태산은 그렇게 말을 맺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입니다.”
태산이 회의실을 나간 후 삼삼오오 회의실을 빠져나오던 평검사들이 수군거렸다.
“역시 젊은 부장님이라서 그런가 용건만 간단히 해서 좋네.”
“그러게요. 쓸데없는 일장 연설 안 하고. 라떼는 어쩌고 그런 얘기도 없고.”
“한시가 아까운 거지. 일분일초라도 부려먹어야 되니 빨리 업무 복귀 하라는 거야.”
“시간은 시간대로 뺏고 일은 일대로 시키는 상사보다 훨씬 낫지 뭘 그래요? 이번에는 확실하게 일하실 분이 온 것 같네요.”
앞서 나가던 이승경 부부장이 귀를 바짝 세우고 평검사들의 말을 훔쳐 듣다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들이! 듣자 듣자 하니까! 그동안은 그럼 일 안 할 사람이 왔단 말이야?! 쌉소리들 떠들지 말고 빨리 안 텨들어가?!!!”
이 부부장의 호통에 검사들이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흩어져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심기 불편한 부부장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느니 2층쯤이야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었다.
이 부부장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김정민 부부장이 웃으며 달랬다.
“너무 열 올리지 마세요. 강 부장도 한성그룹과의 관계 때문에 기업을 제대로 잡겠느냐는 시선을 의식해서 괜히 한번 해보는 말 아니겠어요? 대기업과 전면전 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그제야 이 부부장도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이내 얼굴색을 바꾸었다.
“나도 모르지는 않지만 물색 모르는 평검사들이 저렇게 들썩거리니 하는 말 아니오.”
“평검사들도 조금 지나보면 역시 말뿐이었구나 하고 현실을 깨닫게 되겠죠. 걱정하실 것 없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김 부부장의 입가로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 * *
“고생이 많으세요, 고모할머니.”
현영이 노파의 손을 살갑게 잡으며 말했다.
“고생이랄 게 있니. 형제라고는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제 서로 남은 시간도 많지 않고. 나라도 오라버니 곁을 지켜야지.”
노파는 조재용 회장의 나이 차 많이 나는 막내 여동생이었다. 조 회장이 워낙 장수한 탓에 아직 살아 있는 형제는 그녀가 유일했는데 그녀 역시 80대 후반의 노령이었다. 하지만 관리를 잘 받은 탓에 10년은 젊어 보였고 우기면 60대까지도 봐줄 수 있을 만큼 정정했다.
현영은 살가운 눈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여우 같은 할망구라고 생각한다. 형제 간의 정을 얘기하고 있지만 실은 이 할망구가 조부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유야 뻔했다.
이제 심신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조부가 딴생각을 품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 작은아버지가 붙여둔 첩자였다. 현영이나 다른 경쟁자들이 조부에게 접근해 바람을 불어넣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자기 마누라를 붙여두면 될 것이지만 아무리 돈과 권력이 탐이 나도 그 여자가 살날 얼마 안 남은 시부 옆에 24시간 붙어 있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포섭한 것이 이 할망구다. 장남인 현영의 부친이 사망한 이후 조부는 먼저 간 자식을 안타까워하며 장남 소생들에게 정을 많이 주었지만 이 할망구는 어디까지나 차남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다음 서열의 아들이기도 했고 현영의 모친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다.
‘하긴 이 나이의 노인네가 젊은 여자에게 그룹을 승계시킨다는 걸 상상이나 하겠어?’
그 선입견이야말로 현영이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이었다. 조부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신이 만약 아버지 세대의 남자 자식이었다면 숙부를 밀어내고 경영권을 쟁취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조부 역시 숙부가 영 마음에 차지 않으면서도 현영에게 그룹을 물려주는 것은 심리적인 거부감이 있을 터였다.
현영은 웃는 얼굴로 노파를 살살 구워삶았다.
“계속 갇혀 계시니 답답하시죠? 힘드실 텐데 바람이라도 쐬고 오세요. 제가 기사 대기시켜 놓고 카드도 맡겨뒀어요. 나가서 외식도 좀 하시고 쇼핑도 좀 하고 오세요.”
어차피 이 집에서 노인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조부의 시중을 드는 간병인이 따로 붙어 있고 자택에 의료진도 상시 대기 중이다. 하릴없이 저택에 갇혀 시간만 죽이고 있느라 얼마나 무료할 것인가.
노파는 몸이 근질근질한 듯 솔깃한 표정이었지만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작은아버지가 절대 회장님 곁을 비우지 말라고 당부했을 것이 뻔했다.
현영이 노파의 그런 기색을 살피고는 툭 던져 물었다.
“작은아버지가 절대 자리 비우지 말라고 하시던가요?”
* * *
“작은아버지가 절대 자리 비우지 말라고 하시던가요?”
현영이 대놓고 묻자 노파는 뜨끔해 현영을 돌아보았다.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
“아무리 후계 자리가 욕심나도 그렇지 연로하신 고모할머님을 이렇게 부려도 되나 몰라요. 작은아버지도 참 너무하시죠. 나중에 이 빚은 톡톡히 받아내세요.”
현영은 농담을 던지고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노파에게 짐짓 소탈하게 말했다.
“작은아버지가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는데 어차피 저는 열외잖아요. 막냇삼촌이라면 모를까 제가 경쟁이나 되겠어요? 이사진도 젊은 여자한테 경영권을 맡길 생각이 전혀 없고요. 저는 경계 안 하셔도 돼요.”
현영은 노파가 가진 선입견을 역으로 이용했다.
노파는 현영이 짐작한 대로 조카의 신신당부를 받았다.
[특히 현영이 고 여우 같은 계집애는 절대 아버지와 둘만 두시면 안 됩니다.]
노파는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회장과 다른 이들의 접촉을 막으려는 조카의 의도는 이해했다. 하지만 현영을 과도하게 경계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가 감히 그룹 승계를 노릴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저는 다른 욕심 없어요. 그냥 평소에 저를 아껴주셨던 할아버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뿐이에요. 이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그럴까? 안 그래도 좀 갑갑했는데…….”
노파가 들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현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노파를 등 떠밀어 내보낸 뒤 현영은 조부의 침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조부는 침대에 누워 오수에 빠져 있었다. 거칠게 마른 피부와 들릴 듯 말 듯 얕은 숨을 쉬며 깊이 잠든 모습이 마치 고목으로 깎은 목상 같았다. 저대로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조바심이 나려는 것을 현영은 눌러 참았다.
충분히 쉬게 한 후 명료한 정신으로 판단하게 해야 한다. 그룹의 미래를 위해 누구에게 경영권을 넘겨야 할지를.
‘아직은 가시면 안돼요, 할아버지. 제 손에 그룹을 넘겨주시기 전에는요.’
지금의 판도대로라면 숙부 일가가 그룹을 승계하게 되리라는 것이 명백했다. 하지만 아직 경영권을 넘겨주지 않은 조부가 자신의 손을 들어주게 되면 승산이 있다.
조재용 회장이 낯선 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가늘게 눈을 뜨고 흐려진 눈으로 머리맡에 앉아 있는 현영을 한참 바라본다. 현영은 조부가 그사이 정신을 놓은 것은 아닌가 아찔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뿐 조 회장은 이내 현영을 알아보았다.
“…현영이구나.”
반가운 기색이었지만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간신히 쉰소리만 난다.
“예, 할아버지. 저 왔어요. 물 좀 드릴까요?”
조 회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옆 협탁에 물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현영은 조 회장을 부축해 일으켜 앉히고는 컵에 물을 따라 먹여주었다. 목을 축이고 나니 흐렸던 조 회장의 눈에 총기가 다시 돌아온다.
“몸은 좀 어떠세요?”
“죽을 날 앞둔 노인네 하루하루 별 차이가 있겠니?”
“그런 말씀 마세요.”
현영은 조 회장의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비단 조 회장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조 회장은 부친의 사후 현영에게 거대한 보호벽이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강인한 보호자였던 조부가 이렇게 쇠약해진 데다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현영은 두려움과 함께 서글픔을 감출 수 없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은 너밖에 없구나.”
조 회장은 현영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네 숙부들은 날 뒷방 늙은이 취급하면서 한 번 찾아와 보지도 않는데 말이다.”
조 회장의 입에서 먼저 숙부에 대한 서운함이 비치자 현영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이런 때에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제 말 오해 말고 들어주세요.”
조 회장이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물끄러미 현영을 바라보았다.
“저는 숙부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아무래도 의문이 들어요.”
조 회장이 바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얘기라면 그만둬라. 부족한 자식이라는 건 나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시간도 없고 다른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괜히 동한이를 흔들었다가 그룹을 안정적으로 승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잘난 남의 자식에게 넘기는 것보다야 조금 못나도 내 자식한테 물려주는 게 낫다.”
조 회장은 완강했지만 현영도 이 정도 반발은 예상치 못한 바 아니었다.
“숙부가 수년 전 지인이 운영하는 IT 회사의 상품관리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에 거액을 투자한 것 알고 계시나요?”
“그래, 나도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조 회장은 회사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사업 자체는 조 회장도 보고를 받았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허락했지만 그 회사가 동한의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것, 그리고 거액을 투자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한동안 성과 없이 계속 투자금만 늘리고 있어 감사에 들어간 결과 사업 위험도가 높다고 결론이 났어요. 그래서 이사회의 인가 없이는 추가 투자를 못 하도록 결정했는데 그 결정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계속 투자한 끝에 현재까지 삼백억 원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조 회장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고목처럼 혈색 없던 얼굴에 일순 핏기가 돌아왔다. 조 회장은 얼굴까지 붉히며 분노해 으르렁거렸다.
“그, 그놈이 결국 그런 멍청한 짓을…….”
한성그룹의 자산 규모를 생각하면 삼백억 원 정도는 푼돈일지 모른다. 하지만 늙은 조 회장의 감각으로는 고작 컴퓨터프로그램 따위를 만드느라 삼백억을 허공에 뿌렸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현영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친구의 꾐에 빠져 사기를 당했다는 뉘앙스였다. 거대한 그룹을 여기까지 일궈낸 자신의 자식이 이렇게 어리석다니 믿을 수 없었다.
“왜 아무도 나에게 알리지 않은 거냐?”
“숙부가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눈치 못 채시게 철저히 막고 있었어요. 저도 숙부 눈치 때문에 뵈러 오기가 힘들었고요.”
“주 실장! 주 실장은?!!!”
조 회장은 주인호 실장부터 찾았다. 주 실장은 평생 조 회장을 지근에서 보필했던 인물이며 지금도 매주 그룹의 중요 현안들을 보고하고 결재를 받아 가곤 했다.
“숙부가 당연히 주 실장 입도 단속을 했죠. 주 실장도 못 이기는 척 따른 것 같고요. 아마도 지금쯤 숙부 편에 붙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바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
조 회장은 이를 갈았다.
“주 실장 그놈마저 나를 배신하다니.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군.”
현영은 흥분하는 조부의 손등을 도닥이며 달랬다.
“꼭 그렇게 보실 일도 아니에요. 주 실장 원래 계산이 빠른 사람이잖아요. 이해득실만 따졌으면 진즉에 숙부 쪽에 붙어서 할아버지를 경영 일선에서 내려오시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승부가 뻔해 보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선뜻 숙부에게 넘어가지 못하고 있어요. 주 실장이 보기에도 숙부가 못 미더운 거죠.”
현영은 경영진이 숙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어필하며 조부의 영원한 약점인 장남의 이야기를 슬쩍 꺼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 실장은 아버지 살아생전에 절친한 사이였고 아버지 소개를 통해 회사 들어온 분 아니에요? 만년 2등이었던 둘째 도련님이 눈에나 차겠어요?”
현영의 전술은 적중했다. 조 회장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확인하며 현영은 쐐기를 박았다.
“숙부는 전에도 전망이 불투명한 중국 홈쇼핑 업체를 프리미엄 얹어 이천억에 매입한 적이 있죠. 거기서 아직도 꾸준히 손해가 발생하고 있어요.”
그것은 조 회장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시에 회장은 차남을 불러들여 무릎을 꿇리고 호통을 쳤다. 니가 내 목숨 같은 회사를 망치고 있다고.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할아버지가 70년간 일궈오신 우리 그룹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이사진도 본격적인 숙부 지도 체제가 되는 데 불안해하고 있고요. 할아버지께서 더 늦기 전에 용단을 내려주셔야 해요.”
조 회장은 이채를 띠며 빛나는 손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녀가 정말로 그룹의 미래와 조부의 유지를 중요하게 여겨서 하는 말이라 해도 그 이면에 야망이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당장 차남 조동한을 제외하면 그룹을 승계할 만한 능력과 세력을 가진 인물은 현영이 유일했다. 차남의 승계가 유력하고 장남 소생들이 이를 견제하고 있는 가운데 경영에 관심 없는 망나니 삼남 조민한은 처음부터 열외였기 때문이다. 차남 일가에 가담해 승계 구도를 고착하는 역할 정도를 맡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너 혼자 감당해 낼 수 있겠어?”
조 회장이 여러 가지 복잡한 의미가 담긴 질문을 던졌다. 현영의 눈이 환희로 커진다. 드디어 조부가 자신에게 그룹을 물려준다는 발상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할아버지, 절대 저 혼자가 아니에요. 숙부의 독단적인 경영에 반대하는 모든 경영진이 제 편이라고요. 주 실장도 분명 제 편에 설 거고요.”
“핏줄 안 섞인 놈들을 어떻게 믿어? 경영정상화 하겠다는 핑계로 나중에 지들이 회사 쏙 집어삼키려는 속셈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말이야.”
“믿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주 실장만은 그룹을 장악하려면 꼭 필요한 사람 아닌가요?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치부책이니까요. 반드시 손에 넣어서 꼭 쥐고 있어야 우리 그룹,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을 전체를 주무를 수가 있죠.”
현영의 눈은 총기와 야망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주 실장을 그룹을 장악하는 데 있어 걸림돌로만 생각하는 아들놈에 비해 영악한 손녀는 주 실장의 비밀스러운 업무의 중요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그룹 지배의 발판으로 삼으려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 봐도 느껴지는 신뢰감의 차이는 확연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조 회장은 망설였다. 현영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는 사내가 아니지 않느냐?”
“성별이 약점이 되는 시대는 지났어요, 할아버지.”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사내들은 본능적으로 계집을 깔보게 되어 있어. 니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그건 변하지 않아. 나는 니가 아들, 손자 놈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다른 놈들은 승복하지 않을 게다. 끊임없이 지도력을 도전받겠지. 그건 그룹의 불안 요소가 될 거야.”
조 회장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한 현영이 아니다. 현영은 준비했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제가 여자라서 불안하시다면 다른 남자들을 내세울 수도 있어요. 저에게는 동생 기영이도 있고 바른이, 아니, 바른 삼촌도 있잖아요.”
바른 이야기가 나오자 조 회장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현영은 놓치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래도 핏줄이라고 끌리는 데가 있어서 할아버지 몰래 연락하고 지내다 보니 편하게 말이 나와서…….”
현영은 야단맞는 어린애같이 천진한 투로 애교 섞어 말했다. 실수인 척했지만 사실은 바른과의 유대가 돈독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어필한 것이었다.
“바른 삼촌이라면 분명히 제 편이 되어줄 거예요.”
검사가 법을 모름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