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69화 (69/78)

제4장 늙은 뱀

“과장님, 진짜 있었습니다!”

태산의 집무실로 들어서면서 최진우 검사는 다짜고짜 소리쳤다. 조언을 해주고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태산은 고개를 들어 그런 최 검사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뭐가?”

“수사 정보 유출한 검찰수사관들 위까지 파보라고 하셨잖아요.”

태산이 되묻자 최 검사는 싱글싱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랬지.”

태산은 그제야 기억해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관들 추궁해 보았더니 진짜로 나오더라고요.”

최 검사는 아예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신이 나서 경과를 풀어놓았다.

“얼마 전에 전관 변호사 하나가 업무상 횡령 혐의로 사무실과 자택을 압수수색당했거든요. 그 검찰수사관이 압수수색 과정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그 변호사가 담당하고 있는 사건의 각종 수사 자료 복사본이 발견되었답니다.”

태산이 깜짝 놀라 눈을 홉떴다.

“그게 왜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와?”

최 검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도 검사실에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이가 있었겠지요.”

“그래서? 압수한 수사 자료는 어떻게 되었어? 분명 문제가 되었을 텐데.”

“보고가 올라갔는데 담당 부장검사가 은밀하게 파쇄하라고 지시했답니다. 검찰수사관도 당황해서 몇 번이나 진짜 파쇄하느냐고 확인을 했는데 계속 파쇄하라고만 하더라는군요. 부장검사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별수 없이 문서파쇄기로 갈아버리고 그 건은 조용히 묻었다고 합니다.”

최 검사의 설명을 듣고 태산은 혀를 찼다.

“그런 분위기니 수사관들이 정보 유출을 우습게 알지.”

최 검사가 태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는 덧붙였다.

“어쨌든 사건이 부장급 검사까지 확대되어서요. 관련 부분은 감찰3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곧 수사 기록 받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미리 알려줘서 고마워.”

최 검사가 쑥스러워하며 손을 내젓는다.

“에이~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조언해 주신 덕에 감찰1과장님께도 모처럼 칭찬받았고요. 물론 강 과장님께 얘기하고 조언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발끈하시겠지만요.”

최 검사는 그렇게 답하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꾸 3과 들락거리는 것 들키면 혼날 거예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최 검사는 허리를 접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집무실을 나갔다.

최 검사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관련 사건 기록이 감찰3과로 올라왔다. 태산은 수사 기록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 헛웃음을 지었다. 사무실에 앉아 검사실 수사 자료를 편히 받아본 문제의 변호사 이름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우현중? 이 인간을 이렇게 다시 만나나?”

우현중 변호사. 인천지검 시절 이웅배 회장과 카르텔을 형성해 태산의 수사를 사사건건 방해했던 지검장이었다. 태산건설 시절 작성해 두었던 접대 비밀장부를 서울중앙지검으로 올려 보내 직접 지검장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인물이기도 하다.

태산은 더 이상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수사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고 결국 이웅배 회장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 변호사는 독직행위로 재판을 받기는 했으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검사 생활 동안 구축한 탄탄한 인맥을 바탕으로 화려한 변호사진을 구성해 대법원까지 올라가며 결국 집행유예를 받아냈던 것이다.

변호사 자격정지 기간은 집행유예 기간이 끝난 후 2년이다.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으면 3년 후에는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태산은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나 생각하며 착잡해했다.

태산은 번잡한 마음을 다잡으며 우현중 변호사 관련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서부지검 서봉군 부장검사에 의해 파쇄된 수사 기록은 최근 화제에 오르내리고 있는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수년 전 IT기업 셀리온 글로벌은 대규모 유상증자를 시행했다. 그와 함께 신생 알짜 기업으로 알려진 제약 회사 바이오펄스가 50억 상당의 자금을 투자해 유상증자에 참여한다고 알렸다. 직후 바이오펄스가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셀리온 글로벌의 주가는 급등하게 된다.

하지만 바이오펄스의 신약 개발 성공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셀리온 글로벌의 주가는 최고점을 찍은 후 맥없이 폭락해 버렸다. 유상증자 전 셀리온 글로벌의 주식을 대거 사 모았다가 최고점 직전에 팔아치운 투자회사만 천문학적 이익을 벌어들였을 뿐이다.

알고 보니 투자회사 회장이 주가조작 브로커, 사채업자 등과 손잡고 작전을 통해 주가를 부양한 후 먹튀를 한 것이었다.

검찰은 셀리온 글로벌의 회장과 대표, 투자회사 회장, 주가조작 브로커, 사채업자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셀리온 글로벌 경영진을 비롯한 다른 관련자들은 모두 구속되었지만 투자업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심영운 S홀딩컴퍼니 회장만은 구속을 피했다.

우현중 변호사는 바로 그 심영운 회장의 변호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심영운 회장은 구속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1심에서 셀리온 글로벌 경영진들과 주가조작을 공모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형식적으로 항소하기는 했으나 내부에서 변호사에게 수사 정보를 빼돌릴 정도라면 적극적으로 소송에 대응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과연 이러니 비싼 돈 주고 전관 변호사를 사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태산은 쓴 입맛을 다셨다.

변호사로 수임한 사건에서조차 이렇게 특혜를 받는데 과연 본인이 피의자인 업무상 횡령 건은 제대로 수사를 받고 있는 것일까? 태산은 아무래도 우 변호사가 공정하게 수사를 받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가 없었다.

태산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실무관님, 감찰2과장 연결해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감찰2과 임순철 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감찰2과 임순철 과장입니다.

“감찰3과 강바른입니다.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요. 수사 감사 한 건 부탁드립니다.”

* * *

“우현중 변호사의 업무상 횡령은 평택 공군기지 소음피해 집단 손해배상 소송 관련 건입니다. 인근 주민들이 국방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걸어 승소했는데 배상금 400억 가운데 지연이자 100억가량을 횡령한 혐의입니다.”

감찰2과 임순철 과장이 감찰부 회의에서 감사 내용을 보고했다.

“감찰3부의 요청으로 우 변호사의 업무상 횡령 혐의 수사 상황을 감사했는데 확실히 봐주기 수사로 보이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국방부로부터 입금받은 지연이자 100억을 친인척과 지인들 명의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세탁해서 일부는 현금으로 인출하고 일부는 주식 투자 명목으로 유용했습니다. 그런데 횡령 사실만 수사하고 횡령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더 추적하지 않았더군요. 우 변호사가 현금으로 인출한 것은 소비해 버렸고 나머지는 일단 주식 투자금으로 사용한 뒤 후에 오르면 주식을 팔아 갚으려 했다고 진술했는데 더 추궁하지 않고 그것을 그냥 믿어준 것 같습니다.”

원신영 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검찰이 언제부터 수사하는 기관이 아니라 변명을 들어주는 기관이 됐는지 원.”

원 부장은 임 과장을 채근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떻게 사용했나요?”

“현금 사용처는 현재로선 알 수 없습니다. 좀 더 본격적으로 수사를 해봐야 하겠지만 감찰2과는 어디까지나 수사 업무를 감사하는 부서라서…….”

임 과장이 변명하듯 말하고는 얼른 덧붙였다.

“주식 투자금이 들어간 곳은 알아냈습니다. 추적해 보니 셀리온 글로벌이었습니다.”

태산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주가조작 사건을 일으켰던 그 회사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투자 시점이 언제입니까? 바이오펄스의 유상증자 이전인가요, 이후인가요?”

“이전입니다. 주가가 최고점 찍기 전에 팔아서 차액으로 상당히 벌어들인 모양입니다.”

태산이 원 부장을 돌아보았다.

“부장님!”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 변호사가 주가조작범들한테 정보를 받고 투자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높은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다고 봐야죠. 지금 우 변호사가 수사 정보 유출로 조사받고 있는 건이 바로 셀리온 글로벌 주가조작 사건 아닙니까? 분명 심영운 회장에게서 미리 정보를 받았을 겁니다.”

원 부장도 동의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 과장이 말을 이었다.

“계좌 추적 과정에서 차명계좌를 이용한 탈세 혐의도 포착했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요청해야 할 일인데 그것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갔습니다.”

곰곰이 듣고 있던 원 부장이 물었다.

“지금 우 변호사 수사 상황은 어디까지 진척되었나요?”

“단순히 횡령 혐의만을 따지자면 이미 증거도 충분히 확보되었고 진즉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어도 마땅한 상황입니다만… 아직도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서부지검 관할이었는데 사건 수사 다 해놓고 갑자기 중앙지검으로 이첩되면서 주임검사가 바뀌어 버리는 바람에 처음부터 절차를 다시 밟은 탓입니다.”

원 부장은 흐음… 하고 신음하고는 중얼거렸다.

“확실히 수사가 비정상적으로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겠네요.”

원 부장은 이어서 단호히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서부지검과 중앙지검 주임검사들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절차 속행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임순철 과장은 감사 결과 추가로 포착한 주가조작 혐의, 탈세 혐의 정리해서 관할 지검과 국세청으로 각각 보내세요. 지검에는 현금 사용처도 끝까지 추적하라고 지시해 줘요. 그리고 장도식 과장과 강바른 과장은 담당 검사들이 우 변호사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금품을 받는 등 비위는 없었는지 면밀히 조사해 주기 바랍니다.”

다른 과장들은 부장의 지시에 두말없이 수긍하고 자리를 뜨려 했지만 태산만은 이의를 제기했다.

“부장님, 현금 추적은 지검에 맡기셔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원 부장이 웃으며 대꾸했다.

“감찰부가 태생적으로 같은 검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동료를 믿지 못하면 아무 일도 못 합니다.”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현금 사용처는 감찰3과의 일과 관련이 있을 듯한 의심이 짙어서요.”

원 부장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그 말은…….”

“아무리 전관이라지만 맨입으로 이렇게까지 도와주지는 않죠. 뭔가를 먹여야 했을 텐데 역시 먹이는 것은 현금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먹는 쪽도 먹이는 쪽도 뒤탈이 적으니까요.”

원 부장이 심각한 투로 되물었다.

“고위직 검사 중에 우 변호사에게 매수되어 비호한 인사가 다수 있을 것이다 이 말입니까?”

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우 변호사 사무실에서 발견된 유출 수사 자료를 파쇄하라고 지시했던 서봉군 부장검사부터가 매우 유력하게 의심됩니다.”

원 부장이 비로소 승인을 내렸다.

“그래요. 그럼 그 건은 강바른 과장이 수사하는 것으로 하죠.”

“감사합니다. 감찰3과가 확실히 적폐 청산하겠습니다!”

원 부장의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태산은 기세 좋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 * *

“우현중 변호사 사무실 압수수색 중에 발견된 수사 자료를 파쇄하라고 지시한 사실 인정하십니까?”

“…예, 인정합니다.”

서울서부지검 반부패수사부 서봉군 부장검사는 태산의 신문에 마지못해 떨떠름하게 답했다. 태산이 재차 추궁했다.

“보통 수사 자료가 유출된 사실을 발견했을 때 수사 책임자라면 유출 경위를 조사해 보고 관련자를 처벌하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문서까지 파쇄해 가며 사건 자체를 덮어버린 이유가 뭡니까?”

“우리 지검에 계류 중인 사건의 수사 자료였고 그렇다면 부하들 중 누군가의 소행일 텐데 제 허물을 들추는 것 같아 공론화하기가 꺼려졌습니다. 결국에는 부하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제 책임이기도 하니까요. 후에 은밀히 조사해 보고 관련자들에게는 엄중히 경고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수사 자료를 유출했는지는 알아내셨습니까?”

“그게…….”

서 부장은 말끝을 흐리며 분명히 답하지 못했다. 태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해당 사건 주임검사와 수사관, 실무관들은 유출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감찰부의 조사 과정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주임검사의 진술에 따르면 심영운 S홀딩컴퍼니 회장만 불구속기소 한 것은 서 부장님이 구속을 반대해서 결재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더군요.”

태산이 꺼낸 말에 서 부장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하며 흔들린다.

“사건 주임검사뿐 아니라 부장검사도 부하들이 담당하고 있는 사건 기록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지 않습니까? 혹시 기록을 유출한 것이 본인 소행은 아닌가요? 부하들이 아니라 자신의 범죄 사실을 덮기 위해서가 아니었냐 이 말입니다.”

서 부장은 갑자기 발끈하더니 격렬하게 부인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증거 있소? 당신 지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냔 말이오?!”

태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부들부들 떠는 서 부장을 향해 다시 물었다.

“우 변호사와는 동문이시던데요.”

“서울법대 선배님이긴 하지만, 법조계에 서울법대 동문이 어디 한둘이오?”

“고등학교까지 동문에 같은 등산회 회원이라면 결코 흔한 인연은 아니지요.”

격렬하게 반박하던 서 부장이 비로소 분노를 가라앉혔다. 감찰부 쪽도 어설프게 조사하고 하는 소리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등산회는 동문 중에 등산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형식적으로 가입한 것이고. 게다가 현직 검사가 피의자 담당 변호사에게 함부로 수사 기록을 내주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오. 설마 아무리 동문이라지만 고작 그 정도 인연으로 제 직을 거는 무모한 짓을 하겠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태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서 부장은 무슨 속셈인가 하고 태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단순히 동문이라는 이유로 수사 자료를 막 내주지는 않았겠지요. 뭘 더 받은 것이 있다면 모를까.”

태산은 빙글 웃으며 되물었다.

“우 변호사에게서 더 받은 것은 없습니까?”

서 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니 내가 무서워서 사람을 만나질 못하는 거요.”

서 부장은 그렇게 탄식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의혹을 받지 않도록 매사에 늘 조심하고 있소. 우리 부서에 걸려 있는 사건과 관련된 사람이 있으면 기존에 모이던 사교 모임이라도 나가지를 않아요. 혹시 내가 꼭 나가야 할 일이 생기는 경우에는 그쪽에서 알아서 빠져준단 말입니다.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아예 사교 모임을 안 가질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대신 잡음이 생길 소지가 있으면 눈치껏 피해주는 것이 법조인들 사이의 불문율이에요. 서로 피곤할 일 없도록 배려해 주는 거지.”

서 부장은 한심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강 과장도 법조계 인사들을 아예 안 만나지는 않을 테고 설마 그런 것도 모르지는 않겠지요?”

태산과는 같은 부장급인 데다 조사를 받는 입장인데도 서 부장은 아랫사람에게 훈계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태산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고 기수가 낮은 탓일 것이다.

태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모르겠네요. 저는 사교 모임에는 나가본 적이 없어서. 일하느라 주말까지도 눈코 뜰 새가 없는데 사교 모임에 낭비할 시간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어서요.”

서 부장은 태산의 답에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하고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나는 셀리온 글로벌의 주가조작 사건이 우리 지검에 걸려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우 변호사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서 부장은 딱 잘라 부인했다.

이어지는 신문에서도 우 변호사를 접촉한 바 없다는 서 부장의 주장은 변함이 없었다. 통화 기록상으로도 해당 기간 동안 우 변호사와 연락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더 밀어붙일 근거가 부족했다.

취조를 마치고 서 부장을 귀가시킨 후 태산은 안소영 검사를 불러 지시했다.

“서 부장이 가입한 서울법대 동문 등산회 회원들에게 서 부장과 우 변호사가 모임에서 함께한 적은 없는지 조사 부탁합니다. 법조계 고위직들 모임인지라 수사관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안 검사가 직접 수고해 줘요.”

“예, 알겠습니다.”

안 검사가 태산의 지시를 받은 후 처음으로 접촉한 인사는 서울법대 동문 등산회의 회장인 서울서부지법 부장판사 김지상이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같은 법조인으로서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드려야죠.”

김지상 부장이 미소 띤 얼굴로 안소영 검사를 맞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차라도?”

“괜찮습니다.”

안 검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서울법대 동문 등산회인 요산회 회장이시죠?”

“그렇습니다. 쟁쟁한 선배들도 많으시지만 다들 워낙 바쁘셔서 제가 중책을 맡게 되었지요.”

김 부장은 자랑스러운 듯 답했다.

“서봉군 부장검사와 우현중 변호사가 최근 등산 모임에 함께 참여한 적은 없습니까?”

“제가 기억하는 한은 없습니다.”

김 부장은 단호히 고개를 젓고는 덧붙였다.

“원래 이 등산회가 좀 그렇습니다. 회원들이 워낙 바쁜 데다 2년 단위로 부임지를 옮기니 멀리 부임해 가서 못 오시는 경우도 많고. 사건이 겹치는 경우 서로 눈치껏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모임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는 거죠. 그만큼 느슨한 모임입니다. 두 분도 최근 산행이 좀 뜸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 검사는 김 부장의 설명에도 납득한 기미 없이 재차 물었다.

“혹시 모임을 가질 때 참석 명단 같은 것을 작성해서 관리하지는 않으셨나요?”

“전체 회원 명단은 있습니다만 그때그때 참석 명단을 작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산행할 때마다 좋은 포인트 잡아서 꼭 인증샷을 찍었습니다. 삼각대를 놓고 참석 인원 전원이 잡히도록 해서 찍었으니 그 사진만 모아놓으면 참석자는 얼추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부장님께서 빠지신 산행은 없나요?”

“거의 참석하려고 합니다마는 피치 못한 경우 몇 차례 빠진 적이 있기는 하죠. 그래도 제가 회장이니만큼 정리 차원에서 빠진 산행 사진도 받아서 보관해 둡니다.”

“그러면 회원 명단과 최근 2년간의 산행 사진을 보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김 부장은 스스럼없이 답하고는 그 자리에서 안 검사에게 등산회 사진 폴더 전체를 전송해 주었다.

안 검사는 돌아와 회원 명단과 사진을 대조해 모임 날짜, 장소, 참석 인원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정리 작업이 끝난 뒤 검토를 해보니 확실히 서봉군 부장검사와 우현중 변호사가 같은 자리에 있었던 적은 없었다.

안 검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서 부장과 우 변호사가 각각 참석한 모임에 있었던 다른 회원들을 상대로 탐문조사를 시작했다. 회원들의 진술도 대체로 일치했고 일부 회원들은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을 통해 참석 인원이 기념사진과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조사상으로는 등산 모임에서 두 사람의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 검사는 모임 내역과 사진들을 정리한 자료를 태산에게 건네며 말했다. 일단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보고했으나 조심스럽게 단서를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만 등산회 회원들 역시 우현중 변호사 측에 매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과연 이 조사 결과를 신뢰할 수가 있느냐 하는 의문은 있습니다.”

태산은 안 검사가 건넨 수사 자료를 면밀히 살펴보고는 답했다.

“매수 가능성이 있다곤 해도 한두 명도 아니고 다수의 진술을 이렇게 일관되게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게다가 물적증거까지 있으니. 아마도 실제로 산행에서 두 사람의 접촉은 없었을 겁니다.”

태산은 그렇게 결론 내렸지만 안 검사는 얼굴을 펴지 못했다. 여기서 조사를 끝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행 외에도 접촉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죠.”

태산이 덧붙인 말에 안 검사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과장은 여기서 수사를 중단할 생각이 결코 없는 것이다.

“등산 뒤에 바로 귀가하는 법은 없습니다. 동동주에 파전이라도 곁들여서 피로를 풀게 마련이죠. 각 산행마다 뒤풀이 장소가 어디였는지 알아보세요. 산행 당일 영업장 CCTV도 확보하고요.”

미처 생각지 못한 지시에 안 검사가 눈을 번쩍 뜨고는 지체 없이 답했다.

“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안 검사는 직후부터 정리해 둔 산행 장소에 검찰수사관들을 보내 뒤풀이 장소를 수소문하고 산행 당일의 영업장 CCTV를 수거해 오게 했다. CCTV 보관 기간은 고작 30일. 대부분은 보관 기간이 끝나 삭제되었기 때문에 극히 일부 영상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안 검사는 수사관이 확보해 온 CCTV를 하나하나 직접 확인했다. 대체로 별다른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수확 없이 끝나는 것인가 하고 실망하려던 찰나 요산회의 단골 산행 장소인 관악산 인근 전통 주점에서 회원이 아닌 제3의 인물이 발견되었다.

회원 명부에도 없는 이 중년 남자는 회원들이 하산해 한창 뒤풀이를 하고 있던 중에 서봉군 부장검사에게 은근히 접근했다.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자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도 뭐라고 하며 인사를 받는 것으로 봐서는 회원 모두와 안면이 있는 듯했다.

서 부장은 남자와 함께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에 혼자 돌아왔는데 왜인지 내내 배낭을 메고 있었다. 수상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안 검사는 서 부장에게 접근한 남자의 CCTV 캡처를 통해 인상착의를 확정한 후 우 변호사 주변을 중심으로 신원 조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우현중의 운전기사였습니다!”

안 검사는 태산의 집무실로 뛰어들며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가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러니까… 등산회 뒤풀이 자리에서 우 변호사의 운전기사가 서봉군 부장과 접촉하는 모습이 CCTV에 잡혔습니다.”

평소의 안 검사답지 않게 격앙된 모습을 보고 태산도 빙그레 웃었다.

“수고했어요, 안 검사.”

태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쭉 기지개를 켜고는 거침없이 선언했다.

“자, 이제 이 운전기사라는 자의 통화 내역과 계좌를 한번 탈탈 털어볼까요?”

* * *

“이상진 씨, 통화 내역을 보니 요산회 회원들과 종종 전화를 했던데요. 특히 서봉군 부장검사와는 최근 꽤 자주 통화를 했군요. 무슨 용건이었죠?”

우현중 변호사의 개인 운전기사인 이상진은 취조실에 앉아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있다가 태산의 신문에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게… 우 변호사님이 안부 전화를 대신 하라고 하셔서…….”

“본인이 직접 안 하고 왜 대리 인사를 시킵니까?”

“법조인들은 여러 가지로 복잡하더라고요. 수임한 사건이 판검사님들 근무하시는 지법이나 지검에 걸려 있을 때에는 혹시라도 의심 사면 안 된다면서 종종 안부 전화를 대신 시키곤 하셨습니다.”

“따로 만난 적은 없고요?”

“예, 그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태산은 흐음… 하고 심드렁하게 반응하고는 이상진의 앞에 CCTV 캡처 사진을 들이밀었다.

“그럼 이건요? 본인 아닙니까?”

이상진은 태산이 내놓은 사진을 보고 하얗게 질려 한동안 더듬더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 그… 이, 이제 생각이 납니다. 깜박 잊고 있었네요.”

태산은 내심 코웃음을 치고는 재차 물었다.

“우 변호사도 없는 등산회 뒤풀이 자리에 왜 혼자 찾아갔죠?”

“변호사님이 모임 빠진 지 오래됐으니 대신 가서 인사 전하라 하셔서… 근처 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CCTV 영상을 보니 서 부장과 둘이서만 밖으로 나가던데요. 따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이야기는요. 제가 고명하신 검사님과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그냥 담배 피우러 나오신 거였어요. 저는 바로 귀가했고요.”

“정말로 안부만 전했나요? 혹시 다른 걸 전하진 않았습니까? 이를테면 금품이라든가.”

“어휴, 그럴 리가요. 절대로 그런 일 없습니다.”

이상진은 손을 내저으며 한사코 부정했다.

태산은 팔짱을 끼고 이상진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딱히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건만 깊이 꿰뚫어 보는 듯한 매서운 눈초리에 이상진은 절로 오금이 저려 침을 꿀꺽 삼켰다. 숨겨둔 속내를 금방이라도 들킬 것만 같았다.

태산이 문득 화제를 돌려 엉뚱한 질문을 한다.

“우 변호사와는 꽤 오래 함께 일하셨죠?”

“예, 10년 가까이 됩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겠군요. 그 정도면 가족 같은 사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네요.”

태산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다 해도 어차피 진짜 가족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페이를 후하게 쳐준다 해도 고용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 월급쟁이 처지인데. 굳이 의리를 지키려는 이유가 뭔가요?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쏠쏠한 보상을 받기라도 했습니까?”

태산의 추궁을 입을 꾹 다문 채 잠자코 듣고 있던 이상진이 마침내 툭 던져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네요.”

태산이 이번에는 문서 하나를 이상진 앞으로 쓰윽 밀어놓는다.

“보상을 받기로 했다손 치더라도 이보다 큰 금액은 아니었겠지요.”

이상진은 어리둥절해 문서를 들여다본다. 문서에는 자신의 이름이 찍혀 있고 그 아래 상당한 액수의 숫자가 쓰여 있었다.

이상진은 가만히 숫자를 세어본다. 1억? 아니, 거의 10억에 가까운 숫자다.

“이게 뭡니까?”

이상진은 멍하니 고개를 들고 태산을 바라보았다.

“수사 과정에서 이상진 씨 명의의 차명계좌를 발견했습니다. 그건 이상진 씨 명의 계좌의 계좌 내역 조회서입니다. 잔고가 상당하지요? 우 변호사가 자금세탁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진은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태산은 확인차 다시 물었다.

“본인 명의 차명계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요. 저, 전혀 몰랐습니다.”

이상진은 당황하여 더듬더듬 답했다. 태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악의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것 보십시오. 이상진 씨는 우 변호사를 가족처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우 변호사는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가족이라면 이런 식으로 몰래 뒤통수를 치지는 않겠지요. 나눠 먹을 생각을 하지.”

이상진은 충격을 받고 얼이 빠져 계좌 내역 조회서만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이상진을 바라보고 있던 태산이 불쑥 말했다.

“지금 이 신문은 녹화되고 있지 않습니다. 입회인도 전혀 들이지 않았고요. 어차피 신문이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을 테고…….”

태산은 그렇게 운을 떼고는 은밀한 어조로 덧붙였다.

“사실은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릴 셈입니다.”

이상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무슨 말이냐는 듯 태산을 물끄러미 보았다.

“만약 수사에 협조만 잘 해주신다면 이 계좌를 모른 척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전혀 의외의 말을 듣고 이상진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차명계좌 안의 잔고가 고스란히 이상진 씨의 것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기가 질릴 정도로 대담한 제안에 이상진은 얼어붙고 말았다.

“대신 우 변호사의 법조계 로비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으시고 법정에서 증언까지 해주셔야 합니다.”

이상진은 갈등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모, 못 하겠다면요.”

살살 구슬리던 태산의 눈빛이 돌연 위협의 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차명계좌는 바로 국세청으로 넘어갑니다. 그 안에 있는 10억은 10원짜리 하나도 구경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와 더불어 단순 심부름꾼이 아니라 공범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이상진 씨 주변까지 탈탈 털어드리죠.”

“혀, 협박입니까?”

이상진은 애써 눈썹을 치켜올리며 반박했다.

“이상진 씨가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단서를 포착한 이상 당연한 수사절차죠. 방금 전에 드린 제안이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고요.”

태산이 빙긋이 웃으며 재차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상진은 태산의 미소가 마치 거래를 기다리는 악마의 미소 같다고 생각했다. 함정을 파고 걸려들기를 기대하는 잔인한 장난기가 번뜩였다. 이상진은 갈등하며 우물거렸다. 태산은 잠시 기다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하기가 어려우시다면 조금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우현중 변호사는 주가조작과 탈세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본인 명의 계좌는 물론이고 가족, 지인 등 주변인들 명의 계좌까지 싹 열어보고 있어요. 이상진 씨 계좌까지 포착하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때는 제가 더 이상 막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태산은 취조실 문을 열어주며 살갑게 말했다.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더는 손쓸 수 있는 것이 없네요. 편히 보낼 수 있도록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것이…….”

담당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담당의의 호출이 왔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망이 없다는 것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새삼 눈물을 흘리기에는 그동안 흘린 눈물이 너무 많아 눈물샘이 바짝 말라 버렸다.

담당의가 이상진의 눈치를 보고는 슬쩍 덧붙인다.

“…병원비도 부담되실 테니 호스피스나 요양병원으로 옮기시는 게 어떨까요?”

“예, 선생님. 그러겠습니다. 좋은 곳으로 알아봐 주십시오.”

이상진은 병실로 돌아와 아내 옆에 앉았다. 수척하게 마른 데다 얼굴빛이 어두운 아내는 호흡기를 달고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 아이도 없이 부부 둘이서만 의좋게 살아왔다.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애써 아이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많지도 않은 나이에 아내는 암을 얻었다. 흔하디흔하다는 갑상선암이었다. 아내는 별것 아니라고 큰소리쳤고 이상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의 암은 치료 후 재발해 전이하고 또 치료하면 재발해 전이하기를 반복하며 긴 시간에 걸쳐 지긋지긋하게 부부를 괴롭혔다.

어려운 수술을 거쳐 이번에야말로 건강을 회복했나 싶었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그길로 영영 의식을 찾지 못했다.

이상진은 아내의 손을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내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입 밖에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상진은 어렵게 입을 열어 아내에게 속삭였다.

“여보,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해. 이제 너무 애쓰지 말고 푹 쉬어.”

이상진은 아내의 손등을 다독이고는 병실을 나갔다. 마지막만은 최고로 좋은 곳에서 편하게 보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수술비와 중환자실 입원 비용으로 잔고가 바닥이었다. 이상진은 마지막으로 우현중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기로 했다.

강바른 검사는 이상진이 우현중에게 상당히 큰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의리를 지키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대가를 받기는 받았으나 그게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금액으로 따진다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진이 처한 상황으로 보면 그것은 상당히 큰 도움이었다.

수년 전 아내의 치료비로 돈이 급해졌을 때 이상진은 우 변호사에게 사정을 고백하며 가불을 부탁했다. 그때 우 변호사는 가불은 물론이고 월급을 남들 두 배 수준으로 올려주겠다 했다. 대신 비밀리에 자신의 심부름을 해주는 조건이었다.

그 심부름이라는 것이 바로 법조계 로비였다. 은밀히 법조인들을 만나 봉투를 전하고 수사 자료를 받아 오며 연락책 역할을 하는 것이 이상진의 추가 업무였다.

이상진에게 대가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 절박한 상황에서 우 변호사가 자신에게 동아줄을 내려주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이 고마워서 이상진은 열심히 일했고 어떻게든 의리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우 변호사가 자신도 모르고 있는 사이 자신의 이름으로 그렇게 큰돈을 굴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일말의 배신감이 드는 것이었다.

계좌 하나에만 그 정도 돈을 숨겨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윳돈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데 모든 사정을 꿰고 있는 자신에게는 월급 인상 정도로 입을 닦으려 했다니. 월 2백이 될까 말까 한 운전기사 월급에 두 배를 받아왔다 해도 그게 얼마나 된다고.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역할을 생각하면 조금 더 받아내도 될 것 같았다.

-아, 이 기사. 대검은 잘 다녀왔지?

우 변호사는 전화를 받자마자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예, 딱 잡아뗐습니다.”

-그래, 잘했어. 앞으로도 쭈욱 그렇게 해줘. 자네만 비밀 잘 지켜주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 부탁해.

“예, 걱정 마십시오.”

-고마워. 역시 자네밖에 없어.

우 변호사가 후련한 어투로 통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 순간 이상진이 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저기, 변호사님. 제가 지금 병원인데 아내 병원비가 급해서요.”

-그래? 가불해 줄까?

우 변호사는 별것 아닌 것처럼 선뜻 되물었다.

“가불도 가불인데 목돈 좀 융통해 주셨으면 하고요.”

* * *

“가불도 가불인데 목돈 좀 융통해 주셨으면 하고요.”

아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고 이것이 마지막 요구가 될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현중 변호사의 의리에 대한 이상진 나름의 테스트였다.

하지만 우 변호사는 이상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겁게 침묵했다. 그 짧은 순간의 침묵이 이상진의 배신감을 한층 더 키우고 있었다.

-자네도 요즘 내 사정 잘 알잖나. 검찰이랑 국세청에서 아주 탈탈 털어대고 있어. 지금 내 뜻대로 유용할 수 있는 돈이 얼마 없네.

얼마를 달라는 얘기를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우 변호사는 엄살부터 했다.

-월급도 넉넉하게 줬고 요즘은 의료보험도 잘되어 있어서 암 치료비도 얼마 안 든다던데… 사정이 그렇게 어렵나?

우 변호사는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덧붙였다. 마치 이상진이 아내 병원비 핑계를 댄 것이 거짓말은 아닌가 의심하는 것처럼.

자기 사정은 앞세우면서 남의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란 말인가?

[이상진 씨는 우 변호사를 가족처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우 변호사는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강바른 검사가 했던 말이 새삼 뼈아프게 떠올랐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이상진은 실망감을 느끼며 말을 거두었다.

-아, 그래? 아무튼 안사람 빨리 회복하기를 바라네.

우 변호사는 아내의 경과 같은 것은 묻지도 않은 채 이상진이 돈 요구를 철회한 것이 다행이라는 양 얼른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상진은 허망한 마음으로 병실로 돌아왔다. 아내의 곁에 앉아 멍하니 생각하니 회의가 물밀듯 밀려왔다. 무엇을 위해 그동안 우 변호사를 그토록 헌신적으로 보필했던가.

이상진은 밤새 아내의 곁을 지키며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 고민했다.

우 변호사 덕분에 힘든 시기를 넘겼던 것도 사실이라 그를 고발한다는 것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 변호사에게 사정을 밝히고 도움을 받을 것인가?

하지만 이미 한 번 거절당했는데 구구절절 어려운 사정을 알려가며 또다시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부탁한다고 해도 우 변호사가 도움을 줄 거라는 기대조차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협박해 큰돈을 뜯어내는 건 어떤가?

그 순간부터 본격적인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 전에 우 변호사의 심부름을 했던 일도 단순히 잘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한 일이라 변명할 수 없게 된다. 강 검사의 말처럼 공범이 되는 것이다.

우 변호사는 이상진이 입 다무는 한 괜찮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혹시나 다른 증거라도 발견되는 경우 이상진 역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협박한다 해서 과연 10억 이상을 받아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하지만 우 변호사를 고발한다면 차명계좌에 남은 잔고가 고스란히 자신의 것이 된다.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해결책은 없어 보였다.

다만, 힘들었던 시절 받았던 간절한 도움이 이상진을 계속 망설이게 했다. 우 변호사가 사정을 알고 월급을 가불해 준 것은 물론 월급을 2배나 인상해 주었다고 했을 때 아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정말 얼마나 고마우신 분인지. 여보, 우리 이 은혜 평생 잊지 말고 꼭 갚아요.]

그렇게 말하던 아내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떠올라 이상진의 발목을 잡았다. 이상진은 복잡한 심정으로 갈등하다가 새벽이 다가와서야 침대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었다.

선잠에서 문득 깨어났을 때 이상진은 꼭 쥐고 있던 아내의 손이 너무 차갑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의식했다.

이상진은 번쩍 고개를 들고 아내의 얼굴을 살폈다. 아내는 잠이 든 듯 고요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이상진은 반신반의하며 아내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보았다. 약한 맥조차도 잡히지 않았다. 이상진은 떨리는 손으로 이번에는 아내의 목에 손을 가져가 대본다. 역시 생명의 징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진은 비틀비틀 물러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내의 이른 죽음에 이상진은 넋을 놓았다. 이제 그만 쉬라고 했던 자신의 말이 씨가 된 것일까? 아내는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었던 것일까?

의사가 전원을 제안했으니 적어도 보낼 준비를 할 시간은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날 줄 알았다면 우 변호사와 실랑이를 하느라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를 고민할 시간에 아내에게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더 전했을 것이다.

의료진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던 이상진이 한참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아내의 주검에 다가가 볼을 쓰다듬었다.

고통에서 해방된 아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부르면 가만히 눈을 뜰 것 같을 정도로.

“여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서둘러 갔어?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 고생했어. 정말 고생 많았어.”

이상진은 울음을 삼키며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상진도 아내도 원래 가족구성원이 단출했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할 친인척이 많지 않았다. 아내는 오랜 투병으로 두문불출했고 이상진은 아내의 간병에 우 변호사의 지인을 챙기는 것이 먼저였으므로 자신의 인간관계는 전혀 돌보지 못했다. 때문에 부고를 알릴 지인도 몇 없었다.

아내는 죽기 전까지도 우 변호사를 내내 은인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상진은 우 변호사에게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 조문을 온다 해도 아무렇지 않게 맞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대검 감찰부의 조사가 들어갔을 때부터 우 변호사는 이상진에게 당분간 출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이상진을 이용해 법조계 로비를 했으며 계좌까지 도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질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 마당이라 이상진이 알리지 않는 한 우 변호사가 아내의 죽음을 알 방도는 없었다.

썰렁한 빈소에 홀로 멍하니 앉아 있던 이상진 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상진은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아내의 영정 앞에서 분향을 하고 있었다.

이상진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며 누군가 하고 미간을 모았지만 선뜻 파악이 되질 않는다. 눈에 익지 않은 낯선 실루엣을 피로와 충격으로 부옇게 흐려진 머리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상심이 크시지요?”

남자가 영정 앞에 절을 하고 이상진 앞에 마주 서서 인사를 건네서야 이상진은 남자를 알아보고 당황했다.

“어, 어떻게?”

눈앞에는 대검 감찰부의 강바른 과장이 서 있었다. 강 과장은 이상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끝을 돌렸다.

“업무 중에 나온 거라 금방 들어가 봐야 해서요. 육개장 한 그릇만 후딱 먹고 가겠습니다.”

이상진은 얼떨떨해서는 강 과장을 접객실로 안내했다. 육개장을 한 그릇 뚝딱 비운 강 과장이 이상진의 앞에 두툼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상진은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됐습니다. 검사님과 조의금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의금 아닌데요. 어차피 공직자라 조의금 넉넉하게 드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요.”

강 과장이 다시 봉투를 밀어주고는 얼굴을 굳히더니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많이 고통스러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본인의 고통이 크실 때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만… 그 고통 때문에 미처 돌아보지 못하셨을 일들은 이제는 돌아봐 주십사 하는 마음에 드리는 겁니다.”

강 과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읽어봐 주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한 태도로 하는 말에 이상진은 봉투를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강 과장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돌아서 빈소를 나갔다. 이상진은 봉투를 든 채 멍하니 강 과장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날 밤, 문상객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지고 난 후 졸음을 이기느라 애쓰고 있던 이상진은 강 과장이 주고 간 봉투를 문득 떠올렸다. 잠이라도 쫓을 겸 열어보자 싶어 이상진은 품에 넣어둔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여러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는데 신문 기사의 일부를 프린트한 것들이었다.

기사는 공군기지 소음피해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집단소송을 청구해 승소한 주민들의 환호를 담고 있기도 했고, 주가조작으로 큰 손실을 입은 개미투자자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비관 자살을 한 내용도 있었고, 성범죄 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를 선처한 판결에 분노하여 쏟아낸 절규도 있었다.

이상진은 이게 뭔가 하고 얼떨떨한 채로 기사를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맨 마지막 장에 이르자 백지 한 장이 덜렁 나왔다. 아무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고 한가운데 검은 펜으로 단 한 문장만 흘려 쓰여 있었지만 이상진의 폐부를 찌르기에는 충분했다.

[이 기사의 주인공 모두 우 변호사의 로비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들입니다.]

이상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이상진의 손아귀에서 기사들이 우수수 흘러내렸다.

우 변호사를 대리해 로비를 하는 동안 우 변호사가 수임한 사건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려 애썼다. 구체적인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단순히 심부름을 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쓸데없는 죄책감도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통 때문에 외면해 왔던 타인의 고통이 그 안에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이 그들의 눈물에 일조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상진은 장례를 마친 직후 제 발로 대검찰청 감찰3과를 다시 찾았다.

“강바른 과장님 만나 뵈러 왔는데요.”

실무관의 안내에 따라 과장 직무실로 들어서니 강 과장이 크게 놀란 기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상진을 맞았다.

“아내 마지막 가는 길에 배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진이 공손히 머리를 숙이니 강 과장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려운 결심 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강 과장은 이상진이 어떤 결심을 하고 왔는지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제가 결국 털어놓으리라고 예상하셨습니까?”

이상진은 그렇게 물었다가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하긴 10억이 포기하기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요.”

그 정도 돈이면 누구든 넘어오지 않으랴 하고 생각했을 거라고 이상진은 짐작했다. 하지만 강 과장은 의외로 머뭇거리며 머리를 긁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만 얘기를 나눠보니 그것만으로는 쉽지 않겠다 싶더군요. 보통은 돈 얘기가 나오면 사람 눈빛부터 바뀌게 마련인데 솔깃하기는커녕 망설이는 기색이라서요. 뭔가 던질 수가 더 필요하겠다 생각하고 조사를 하던 차에 아내분의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렇게 되신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강 과장이 다시 한번 묵례를 하고 말을 이었다.

“사정을 알고 나니 결심을 하신다면 돈보다는 다른 것이 크게 작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봉투가 제가 생각해 낸 최후의 수였습니다.”

* * *

“각오는 되셨습니까?”

“예, 다 내려놓고 왔습니다. 아내도 떠난 마당에 연연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상진은 초탈한 표정으로 답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상진에게 자리를 권했다.

“약속한 대로 이상진 씨 명의의 차명계좌에는 수사가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드리겠습니다. 잔고는 원하는 대로 쓰시면 됩니다만 만일을 위해 전액 인출하셔서 본인 명의의 다른 계좌에 입금해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상진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돈은 안 받으렵니다. 저도 사람이니 돈 욕심이 안 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저도 공범인데 피해자들의 피눈물 맺힌 돈을 감히 어떻게 받겠습니까? 피해를 보신 분들에게 돌려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이상진 씨 계좌의 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불분명해서요. 피해자를 특정하는 것부터가 어려워서 딱히 돌려줄 방도가 없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일부라도 우 변호사에게 돌아가게 될 텐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상진 씨가 가지고 계시는 것이 좋겠지요.”

차명계좌가 밝혀지면 탈루된 세금이나 벌금, 민사소송 배상금 등으로 많은 액수가 추징되겠지만 어찌 되었든 일부라도 우현중에게 남는 돈은 있을 것이다.

우 변호사에게 돈을 넘겨주느니 태산은 대로에 뿌리거나 아예 싹 불 싸질러 버리는 쪽을 택할 것이었다. 그런 마음일진대 공범에게 돈을 넘기고 우현중을 확실히 처벌할 수 있는 증언을 얻는 정도야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눈먼 돈을 최고로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태산은 엄포하듯 이상진에게 말했다.

“정말 제대로 각오가 된 것이겠지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증언의 신빙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상진 씨의 치부를 남김없이 들춰 신뢰도를 낮추려고 하겠지요. 로비 상대가 하나둘이 아니고 모두 고위 법조인이니 기소하고 재판하는 데만도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고 수없이 불려 다녀야 할 겁니다. 어찌 보면 긴 기간 고통을 겪으며 정상적으로 생계 활동을 영위하기조차 힘든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상진은 태산의 말에 절로 긴장하여 꿀꺽 침을 삼켰다.

“차명계좌의 돈은 사실상 그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시일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반드시 끝까지 우현중의 죄를 고발할 것. 그 조건으로 드리는 겁니다.”

태산이 빙긋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기꺼이 받으셔도 됩니다.”

그제야 이상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굳게 답했다.

“예, 그럼 사양 않고 받겠습니다.”

이상진은 취조실로 옮겨 그동안의 일을 상세히 진술했다. 모든 것은 녹화를 통해 낱낱이 영상으로 담겼다.

고위직 법조인들이 다수 연루되어 있으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드러난 이름들은 생각보다 훨씬 화려했고 태산 역시 안면이 있는 이도 있었다.

이상진의 진술이 마무리된 후 태산은 곧바로 우현중을 대검 감찰부로 불러올렸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유감입니다.”

취조실로 안내되어 들어오는 우현중을 맞으며 태산이 인사를 건넸다. 우현중은 태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원수라도 만난 듯한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현중은 태산으로 인해 서울중앙지검에서는 주가조작 혐의로, 국세청에서는 탈세 혐의로 탈탈 털리고 있었다. 은닉했던 많은 재산이 낱낱이 추적되어 추징될 위기였다.

수사에 시달린 우현중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수년 전보다 폭삭 늙어 보였고 몹시 피로해 보였다.

우현중은 딱히 인사를 받지도 않고 자리에 앉았다. 취조를 받는 동안에도 오만한 태도로 영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공군기지 소음피해 보상금 횡령한 혐의로 서부지검에서 수사를 다 끝내놓고 기소 직전에 갑자기 중앙지검으로 이첩이 되었네요. 그래서 또 주임검사가 사건 파악한다는 핑계로 기소가 미뤄졌고요. 딱히 그 시점에 이첩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태산이 수사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현중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우현중 씨가 요청한 건가요?”

“그런 일 없소.”

“요청받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절차를 늦춰줬다고요? 대체 누구 결정입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검찰에서 이첩한다고 하니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지.”

태산이 우현중을 가만히 노려본다. 우현중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저는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요. 서 부지검장을 매수한 거 아닙니까?”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우현중은 웅얼거리면서 태산을 계속 외면했다.

“사건이 중앙지검으로 이첩된 직후 서 부지검장 부인이 신형 렉서스를 구입했던데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돈이 있으니 샀겠지.”

“그 돈이 우현중 씨가 전달한 돈 아닙니까? 기소되기 직전 서 부지검장 부인에게 현금이 든 명품 가방을 전달하셨지요?”

태산이 꺼낸 말에 우현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태산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운전기사가 이미 발설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리는 우현중에게 태산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짐작하시는 것처럼 운전기사 이상진 씨가 전부 털어놓았습니다. 부정할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태산은 이상진의 참고인진술조서를 꺼내놓고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수년에 걸쳐 법조계 전방위로 엄청나게 로비를 하셨네요. 로비 대상에 상당한 거물급들이 많습니다? 전직 검사장까지 따지면 검사장급만 몇 분이신지. 심지어 고검장급도 있네요. 신승렬 대전고검장… 서울중앙지검장 역임하셨던 그분이지요?”

태산이 쯧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대쪽 같은 척을 하더니 승진 미끄러지고 자포자기한 건가.”

신승렬은 수년 전 태산이 서울중앙지검에 근무할 당시 지검장이었던 사람이다. 대쪽 검사를 자칭하며 검찰개혁 문제를 두고 법무부장관과의 알력이 잦았던 인물이다.

서울중앙지검장을 역임한 다음이고 태산이 중앙지검에 있는 동안 짧은 기간이긴 해도 눈부신 실적을 쌓아주었다. 신승렬은 내심 검찰총장 자리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언론에서도 정부와 알력이 있긴 하지만 실적이 확실하기 때문에 가장 유력한 총장감이라고 떠들어댔다. 게다가 적이 많은 대통령에게 카드는 오직 신승렬뿐일 것이라고 띄워대기도 했다.

그러나 하마평이 오르내리며 기대감을 한껏 불어넣은 상태에서 검찰총장은커녕 대전고검장으로 발령이 나버렸다. 검찰개혁 방침을 따르지 않고 검찰조직을 비호하기에 여념이 없는 신승렬이 정권으로서는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이번 임명이 신승렬에게는 검찰총장이 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였다. 이 정권의 마지막 총장 임명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대통령이 여권에서 나온다 해도 좀 더 지지기반이 단단한 사람이라면 신승렬 외에도 쓸 사람은 많을 것이다. 새 기수가 하루하루 밀고 올라오며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야권 대통령이 나온다면 더더욱 검찰총장이 될 기회는 없다. 신승렬은 이 정권이 아니었다면 서울중앙지검장 자체를 넘볼 수 없었을 정도로 변방의 인사였기 때문이다.

좌절된 권력욕이 뒤늦게 보상받고 싶다는 심리를 자극했을까? 부끄러울 것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그 꼿꼿한 인사가 결국 부정부패에 얽혀 이렇게 낙마하고 마는 것이다. 태산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태산이 잠시 감상에 잠긴 사이 우현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반박했다.

“변호사 자격정지 풀린 지 이제 1년 남짓이오. 수임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수년 동안 법조계 로비를 펼칠 수 있겠소? 그럴 여력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요.”

우 변호사는 잘라 말하고는 이상진 기사에게 화살을 돌렸다.

“상황이 어려워져서 당분간 나오지 말라 했더니 앙심을 품은 게지. 이 기사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이상진 씨 말로는 검사직에서 물러나신 직후에 바로 지금 계시는 로펌의 고문으로 채용되셨다던데요. 물론 고용 사실은 대외비로 하고 말입니다. 주요 업무는 로펌에 걸려 있는 사건 담당 판검사들에게 로비하는 것이었고요. 심지어 집행유예 기간 중에도 선임계만 안 올라갔을 뿐 선후배 법조인들에게 전화 변론을 자주 돌리셨다던데…….”

우현중은 기가 질려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변호사 자격 정지기간 동안 로펌에서 자문료 명목으로 차명계좌에 입금한 내역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변호사법 위반도 추가되시겠네요.”

우현중은 그제야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만 없이 말 잘 듣는 충복이었던 이 기사가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우현중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악문 잇새로 노성이 흘러나왔다.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태산은 우현중의 중얼거림을 듣고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공범이 필요했으면 철저히 공범 대접을 해줬어야지요. 머슴 취급 해놓고 쌀밥 좀 챙겨줬다고 의리를 지키겠습니까? 자기가 주인이 될 기회를 잡았는데.”

태산은 우현중의 끝없는 욕심에 새삼 혀를 찼다. 우현중이 조금만 욕심이 적었어도 이러한 말로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그렇게 받아 드셨으면 반성을 하셔야죠. 정신 못 차리고 동료들에게 먹이는 위치로 옮겨 가면 어떡합니까? 다 자업자득이니 남 탓 하지 마세요.”

태산은 그렇게 쏘아주고는 신문을 이어갔다.

“자, 이제 이상진 씨 진술 내용과 한 건 한 건 대조를 해볼까요? 불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이상진 씨 불러서 바로 대질시켜 드릴 수도 있습니다.”

* * *

“…28년간의 검사 생활을 마치는 바로 이 순간 무엇보다도 더욱 저의 가슴을 메게 하고 허탈감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반평생 검찰 생활에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입고 있는 이 점퍼가 보이십니까? 이 낡은 점퍼는 15년 전 대검찰청에서 검사들이 야근할 때 입으라고 사준 것입니다. 실밥이 터지고 천이 닳아버린 이 점퍼를 무엇이 좋다고 지금까지 입고 있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나긴 검찰 생활을 마친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이 점퍼뿐입니다.”

태산이 대전고검 대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신승렬 고검장은 검사들을 앞에 두고 연단에서 한창 퇴임사를 읽고 있었다.

우현중 변호사의 법조계 로비 사건 수사가 본격화되자마자 신 검사장은 갑작스럽게 퇴임을 발표했다. 중도에 물러나려 했다면 취임 초기가 시기적으로 적절했을 것이다. 임기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퇴임 결정이었다.

로비 사건의 수사가 조여와 끌려 내려오는 일이 생기기 전에 잽싸게 제 발로 물러나려는 결정일 것이라고 태산은 짐작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구속영장 절차를 밟아 대전고검으로 달렸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신 검사장의 퇴임식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태산은 회의실 맨 뒤의 빈자리에 앉아 신 검사장의 퇴임사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저의 검찰 생활이 이 누더기 같은 점퍼의 형상처럼 비참하게 끝나 버린 것은 아닌가 자탄해 봅니다. 남들 보기에는 내가 검사장까지 지내며 호의호식한 것으로 비쳐졌을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권 청탁 한 번 없었고 돈 한 푼 얻어 쓴 적이 없었습니다. 28년 전 장밋빛 희망을 가득 싣고 들어온 저의 수레는 텅 빈 채 누더기 점퍼만 실려 있지만 이는 제가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삶에 대한 증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 검사장은 자신의 말에 취해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이제 저는 모든 욕망과 미련, 서운함을 내려놓고 검찰을 떠납니다. 이제는 검찰 밖에서 저에게 주어진 소임을 찾아 변함없이 헌신할 것입니다.”

퇴임사가 끝나고 대회의실 안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자리에 모인 검사들도 신 검사장의 퇴임사에 크게 공감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퇴임사에 자화자찬이 빈번한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마치 경제적으로 풍족히 살지 못했던 허탈함을 하소연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던 것이다.

태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웅성거리며 마지못해 박수를 치는 검사들 사이를 빠져나가 신 검사장에게 다가갔다.

* * *

신승렬 대전고검장은 연단에서 내려와 검사들의 퇴임 인사를 받으며 대회의실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태산이 다가가자 무심히 돌아보던 신승렬의 눈이 커진다. 태산은 한때의 상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승렬의 눈에 당혹감이 스친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목소리를 낮춰 제안했다.

“조용한 곳으로 옮겨서 얘기하지.”

신승렬이 검사장실로 앞장섰다. 태산은 두말없이 신 검사장의 뒤를 따랐다. 검사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신 검사장이 돌아보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꼭 퇴임식 자리까지 쳐들어와야겠나? 퇴임 후에 조용히 찾아왔어도 됐을 일 아닌가. 후배들 보는 앞에서 내 체면이 뭐가 되나?”

“충분히 배려해 드린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검찰청 앞에 수사관들이 영장 들고 대기 중입니다. 검사장님의 체면을 생각해 저만 올라온 겁니다.”

태연히 답한 태산이 문득 개탄했다.

“그런데 괜히 체면을 생각해 드린 모양입니다. 검사장님 본인이 스스로 체면을 깎고 계셨는데 말입니다.”

“대체 무슨 소린가?”

신 검사장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검찰총장 못 해보고 떠나는 게 아무리 아쉽다 해도 퇴임사에까지 그런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면 후배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알아서 챙겨먹지 못하고 청렴하게 사는 것을 바보짓이라 여기겠지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몹시 해로운 퇴임사였습니다.”

태산은 이어서 추상같이 추궁했다.

“큰 자리 못 한 것이 서러워서, 본전 생각이 나서 최후에는 결국 매수당하고 만 겁니까? 검찰 재임 기간 동안 대쪽같이 살아왔다던 그 자부심은 내다 버리신 겁니까? 심지어 정적이었던 우 변호사와 손을 잡으시다니요.”

“나, 나는 일평생 부끄럼 한 점 없이 살아왔다고…….”

신승렬은 더듬더듬 변명하려 했으나 기세는 이미 상당히 꺾여 있었고 말꼬리는 점점 흐려졌다.

“예전의 검사장님이라면 그 말을 믿어드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렇게 안 되겠습니다. 함께 가셔서 장모님 명의로 구입한 땅에 대해서 말씀 좀 나누시죠. 시세가 어마어마하게 올랐던데요.”

신승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씩씩 숨을 몰아쉬면서 태산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힘겹게 말을 뱉어놓는다.

“자네가… 자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신승렬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은근히 동질감을 느끼는 듯한 기미는 태산도 포착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 그것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저와 특별한 심적 유대가 있다고 생각하신 건 검사장님 혼자만의 착각인 듯한데요. 저는 검사장님께 동질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제가 만약 조금이라도 검사장님께 유대감을 느꼈다면 지금 이 상황이 더욱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웠겠지요. 더 철저히 수사하고 강력히 처벌하려 했을 겁니다.”

신승렬은 얼굴을 붉혔지만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한때의 인연이 있으니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태산이 검사장실의 문을 열어주자 신승렬은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주차장으로 가니 수사차량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찰수사관들이 뛰어나와 두 사람을 맞았다.

* * *

-형님, 회사 일로 상의드릴 일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바쁘지 않으시면 오랜만에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나야 맨날 바쁜 거 알잖냐. 회사 일은 니가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도.”

농담처럼 던진 말에 범진은 대꾸 없이 허허 웃기만 했다.

우현중 변호사 법조계 로비 사건도 슬슬 관련자들 수사를 마무리하고 전원 기소해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오랜만에 태산도 조금 여유가 생긴 참이었다.

게다가 범진의 얼굴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일 핑계로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범진도 아마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안부 물으러 왔다며 그냥 불쑥 찾아올 성격도 아니었고 태산이 일 없이 접촉을 삼가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었기 때문에 연락하기가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뭐든 만날 핑계가 필요한 것일지도.

태산의 오피스텔을 찾아온 범진은 처음에는 말없이 술자리를 세팅하고 가져온 술병을 따서 태산과 자신의 잔에 채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역시 별 용건 없이 함께 마시는 술이 고파 그랬구나 생각하는 태산이었다. 하지만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슬그머니 용건을 꺼냈는데 그게 꽤 진지한 내용이었다.

“고상만 회장 건강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위암 진단 받고 수술까지는 잘 끝냈는데 앞으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해서… 아무래도 회장 자리가 부담스러운 모양입니다. 이만 일선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합니다.”

태산지주의 현 회장인 고상만은 범진이 회장 자리를 고사한 후 자신 대신에 회장으로 추대한 인물이었다. 과거 와룡회의 원년 멤버이자 친임태산 세력 중 가장 연장자다. 범진의 쿠데타를 지지해 이웅배 세력을 축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었다.

“고 회장한테 그런 일이… 왜 진즉에 알리지 않았냐?”

“죄송합니다. 괜히 심려만 끼칠 것 같아서…….”

범진은 그렇게 답했지만 태산도 알리지 않은 이유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강바른 검사가 된 지금 태산이 알았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해 위로하는 작은 일조차도 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태산은 심란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고는 범진에게 당부했다.

“그래, 아플 때는 쉬어야지. 고 회장은 니가 나 대신 잘 살펴다오. 치료 끝날 때까지 자주 돌아보고.”

“예,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범진은 선뜻 대답했다. 대답하는 투를 봐서는 고 회장의 투병과 일선 퇴진이 범진이 얘기한 상의하고픈 일은 아닌 것 같다. 태산은 술잔을 기울이며 범진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범진이 머뭇머뭇 입을 연다.

“고 회장이 물러나고 나면 후임 회장을 누가 맡을지에 대해 이사회에서 논의 중입니다만…….”

망설이는 범진의 기색에 태산이 무심히 물었다.

“왜? 점찍어둔 후보에 반대가 많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에게 차기 회장을 강권하는 통에… 고민 중입니다.”

태산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왜 고민하는 거냐? 어차피 지금도 네가 중요한 결정은 다 내리고 있는 것 같은데. 이미 실질적인 회장은 너 아니냐? 게다가 딱히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범진은 곤란한 표정으로 답을 망설이다 툭 던져놓았다.

“저는 건설에 주력하고 싶습니다.”

태산은 범진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 훗 헛웃음을 지었다.

범진에게 태산건설의 대표 자리는 단순한 직위가 아니라 태산의 유지 같은 것이었다. 태산, 재호와 함께 키워온 태산건설을 직접 관리하는 자리를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니 마음은 잘 알겠다만 더는 내 유지에 집착할 것 없다. 태산건설은 물론이고 태산지주도 니 회사가 된 지 오래 아니냐. 나 역시 이사들과 의견이 같다. 이제 니가 물려받아도 좋을 것 같구나.”

“형님…….”

범진은 태산을 마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태산은 범진의 어깨를 도닥여 주고는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내가 지시했던 일도 네가 지주회사 회장이 되면 더 수월해지겠구나. 건설에서 쌓은 자금을 슬슬 풀 때가 되었지.”

태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범진을 향해 물었다.

“어때? 준비 작업은 잘되어가고 있냐?”

“예,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반응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회장 자리를 물려받으면 본격적으로 그 일에 박차를 가해라.”

“예, 형님 맡겨주십시오.”

범진이 고개를 숙이고는 태산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은근히 물었다.

“그런데 형님, 이제 슬슬 또 새로운 자리로 가실 때 아닙니까?”

“그렇지. 이제 곧 인사 철이니.”

“어디로 갈지는 정하셨습니까?”

태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게 내가 바란다고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적이 우수한 검사들은 희망지를 우선적으로 배려해 부임시킨다던데요. 형님 정도면 얼마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태산은 애매하게 답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희망보다는 임명권자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인사였기 때문에 딱히 희망지를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형님이 저한테 맡기신 그 일이 곧 가시화된다고 예상하신다면 아무래도 서울이나 수도권에 계속 계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하고 태산은 새삼 범진을 다시 본다. 범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인천으로 다시 모시고 싶지마는 그것은 안 될 일일 테고요.”

무심코 말을 꺼내놓고 범진은 당황했다.

한성그룹과의 관계도 정적들에 의해 파헤쳐져 이용당할 뻔한 바 있다. 태산건설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후에 태산의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범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태산을 가까이에서 보필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다잡고 있었지만 술이 들어가니 어쩐지 넋두리처럼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 말은 왜 꺼내냐?”

태산이 킬킬 웃으며 범진을 타박했다. 범진이 멋쩍어하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요 실없는 놈!”

태산이 범진에게 괜히 알밤을 한 대 먹였다. 범진은 “아…….”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여 정수리를 쓱쓱 문지른다. 태산이 이번에는 고개를 숙인 범진의 턱을 손바닥으로 툭 쳐 올린다. 태산의 짓궂은 장난에 범진은 곤란한 표정으로 허허 웃기만 할 뿐이다.

충분히 막거나 피할 수 있었을 테지만 범진은 태산의 장난을 그저 가만히 받아주었다. 술기운에 장난스러워진 분위기가 오랜 옛날 일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범진이 아직 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없던 시절, 태산은 회식 자리에 범진을 꼭 부르면서도 술은 마시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범진은 술자리 말석에 앉아 땅콩 같은 것을 까먹으며 형님들이 술 마시는 모습을 맨정신으로 멀뚱멀뚱 지켜보곤 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태산과 재호가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실없는 장난질을 하며 티격태격 술잔을 나누는 모습을 그 얼마나 부럽게 바라보았던가.

이후 범진은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태산과 그렇게 스스럼없이 술잔을 나눌 일은 없었다. 그것은 태산이 엄해서가 아니라 범진이 태산을 부모 이상으로 존경하고 따랐기 때문이었다. 태산은 어디까지나 범진에게 큰 어른이었고 감히 허물없이 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술을 받을 때는 항상 긴장 상태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애썼다. 장난을 걸거나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젊고 낯선 모습이 된 태산과 친구처럼 장난을 치며 스스럼없이 술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다는 것이 범진은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지금의 이 관계는 범진이 과거의 태산을 잃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태산에게는 범진 외에는 이렇게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 사실이 범진을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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