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반동(2)
“그러니까 강바른 과장이 한성그룹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가 있단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강 과장 명의로 한성의 한도 무제한 블랙카드가 발급되어 있었습니다. 자주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번 사용하면 상당히 큰 금액을 결제했는데 카드 대금은 한성그룹 측에서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검찰총장은 서울중앙지검장의 보고를 받고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지검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성그룹과의 관계를 좀 더 파보았더니 꽤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듯합니다. 인천지검 시절 장기 입원 했을 때 주인호 전략기획실장이 뒤치다꺼리를 하며 병실에 오갔다고 하더군요. 병원 측에 은밀히 확인했습니다. 한성그룹 일가의 장손녀인 조현영과는 최근에도 만나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하고요.
“허헛, 참…….”
들으면 들을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검장의 보고에 검찰총장은 혀를 차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렇게 원칙을 부르짖던 자가 뒤로는 접대받은 놈들보다 더한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찰1과장은 비리가 없다면 만들어주면 된다고 했었는데 그런 번거로운 공작을 할 것도 없이 큰 건이 걸려들었다. 반갑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기분이었다.
그런 감찰총장의 기분을 들여다본 듯 지검장이 슬쩍 말을 보탠다.
-검사들 중에 한성그룹 관리받는 인사가 한둘입니까? 한성그룹 돈은 받아도 문제가 안 된다고 믿고 그런 것이겠지요. 그렇다 해도 이건 참 대담하네요. 이래 놓고 다른 검사들 비리 잡겠다고 그렇게 설쳐댔다니 참 뻔뻔하다 싶기도 하고요.
지검장이 슬쩍 다시 묻는다.
-그런데 이거 정말 풀어도 괜찮을까요? 한성과 관련된 건인데… 다른 기업도 아니고 한성을 건드리는 건 좀… 잘못하다간 정진용 건보다 더 큰 핵폭탄이 터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걸 가릴 때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수사 확대하지 않고 딱 강바른만 떨궈내면 돼요. 한성도 강바른 하나를 지키겠다고 무리하지는 않겠지요.”
총장은 그렇게 답하고는 딱 잘라 지시를 내렸다.
“최대한 빨리 사건 정리해서 발표하세요. 공익과 관련된 문제니 서둘러 줘요.”
공익을 운운한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이유로 기소 전에 공표해도 무관하다는 언질을 준 것이었다. 수사가 부족하더라도 일단 터뜨리고 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지검장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언론 브리핑 준비하겠습니다.
한편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도 주인호 전략기획실장에게 검찰의 움직임을 보고받고 있었다.
“검찰이 강 검사 주변을 캐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 그룹과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것은 포착한 것 같고요. 아직 회장님 혼외자라는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귀띔을 하고 수사에 제동을 걸까요?”
조 회장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조용하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내 자식이라는 걸 모른다 해도 한성과 관련이 있다고 하면 몸을 사리던 놈들 아닌가?”
“강 검사가 대검 감찰부로 부임해 간 후 검찰조직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큰 건 하나를 캐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 수사를 견제하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썩을 놈들. 제 허물 덮으려고 멀쩡히 일 잘하는 내 새끼를 치겠다는 건가?”
주 실장은 조 회장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조 회장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예전 같으면 권력의 줄을 잘 잡아 출세나 할 것이지 괜한 짓을 하며 미움을 산다고 고깝게 여겼을 것이다.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해도 말만은 그리했을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 회장은 늦게 얻은 잘난 자식이 너무나 자랑스러운 늙은 아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버려 두면 강 검사가 회장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을 밝혀야 강 검사가 수뢰 혐의를 벗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검찰에 은밀하게 언질을 주면 대외적으로는 밝히지 않고 수사를 종결시킬 수 있습니다.”
주 실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조 회장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린다. 아흔 넘은 생기 없는 얼굴이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이제는 밝힐 때도 됐지.”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조 회장을 가까이서 오래 보필해 온 주 실장은 그 저의를 꿰뚫어 보았다.
노령에도 변함없이 건재했던 조 회장이건만 근자에 건강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딱히 심한 지병은 없었으나 수명을 다해가는 신체가 빠르게 쇠해가고 있었다. 최근에는 체력적인 부담 때문에 출근도 하지 않고 자택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자식들마저도 이사들을 포섭하고 주식을 긁어모으며 후계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조 회장이라고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조 회장은 더 늦기 전에 바른을 일가로 들이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다. 하지만 바른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친자인지를 하자고 애걸복걸하기에는 아직 자존심만은 건재한 조 회장이었다.
조 회장은 이번 기회에 바른이 비록 타의에 의해서라도 일가에 합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셈이다.
“내버려 둬. 바른이가 알아서 하겠지.”
“자제분들이 달가워하지 않으실 텐데요.”
조 회장이 주 실장을 물끄러미 본다. 주 실장이 조 회장의 지시에 토를 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자네도 이제 슬슬 후계가 될 놈들 눈치를 보는 건가?”
주 실장이 아차 하고 얼른 정정했다.
“아닙니다. 저는 다만 회장님과 자제분들의 사생활이 사람들 입에 이러쿵저러쿵 오르내릴 것이 썩 달갑지 않아 드린 말씀입니다.”
조 회장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주 실장의 말을 썩 믿는 것 같지는 않다.
“그놈들이 지금이야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날까 봐 노심초사해도 나중에는 알게 될 거야. 형제가 하나라도 더 있는 게 힘이 된다는 걸. 까놓고 말해 피 한 방울 안 섞인 놈들을 어찌 믿고 회사를 맡기나? 지금은 아웅다웅해도 나 떠나고 나면 바른이가 우리 그룹에 큰 힘이 될 날이 있을 걸세.”
조 회장이 그룹의 온갖 궂은일을 맡기는 주 실장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는 것을 잊은 것일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면 자신이 떠난 후 자식들이 힘을 합쳐 가업을 지키리라는 낭만적인 희망을 품게 되는 법인가 보다.
하지만 피가 섞였다 해서 남보다 나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숱한 형제의 난을 떠올려 보면 생판 모르는 남보다도 더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 형제간이었다.
더구나 바른이 그룹에 도움이 될 것이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예전의 바른은 조 회장에 대한 미움 때문에 자신의 핏줄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때만 해도 주 실장 역시 언젠가 바른이 나이를 먹고 좀 더 영악해지면 그런 어린애 같은 투정은 버리고 일가에 합류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의 바른은 조 회장도, 핏줄도, 그룹도 그 어느 것 하나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그나마 애착이 있던 자신에게도 가끔 안부 전화를 할 때면 남 대하듯 데면데면하기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애증이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소멸해 버릴 수가 있을까?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것이 대체 언제부터였나. 분명 인천지검 시절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였던 것 같다. 묘하게 생경한 느낌은 갈수록 짙어져 지금은 자신을 아버지처럼 여겼던 그 아이가 정말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지금의 바른이라면 그룹을 돕기는커녕 자신이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룹을 공격하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짙었다.
하지만 막내아들을 저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노인네 앞에서 굳이 그런 노파심을 비쳐 자극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 그럼 지켜보겠습니다.”
주 실장은 그렇게 답하고 조 회장의 서재에서 물러났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주 실장은 강바른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회장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라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만이라도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바른아, 나다.”
분명 전화를 받았는데도 수화기 너머에서 강바른은 침묵했다. 누군지 기억을 더듬는 낌새다. 예전에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아채고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하고 반색을 했었는데…….
아저씨 목소리도 못 알아듣냐, 번호 저장은 안 해놨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주 실장은 혀를 쯧 차고는 그만둔다.
“주인호 실장이다. 한성그룹 전략기획실의…….”
-아… 안녕하세요.
그제야 강바른은 누군지 기억이 난 듯했지만 딱히 살가운 호칭은 따라오지 않았다. 반가운 기색도 없다. 대신 무뚝뚝한 질문이 따라온다.
-무슨 일로…….
“바쁘냐?”
-예, 좀 바빠서요.
어련하겠나 생각하며 주 실장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빨리 끊으마. 요즘 검찰이 너랑 우리 회사 뒤를 캐고 다닌다. 너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알려는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예…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빠르네요.
강바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딱히 주 실장의 말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혼잣말로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회장님은 너와의 관계가 밝혀져도 상관없다고 하시니 혐의를 벗는 데 필요하다면 밝혀도 좋다. 조금 시끄러워지기는 하겠지마는.”
과연 조금 시끄러운 정도가 될 것인가.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스타 검사가 알고 보니 한성그룹 회장의 숨겨진 혼외자였으며 왕년 하이틴스타의 아들임이 밝혀진다면 온 나라가 들썩들썩하지 않을까.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바른이 바로 전화를 끊으려는 것을 주 실장은 서둘러 한마디 보탠다.
“회장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시다. 한번 찾아뵙지 않겠니?”
강바른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평소 연락하고 지내던 사이도 아닌데 새삼 만나기 어색하네요. 실장님이 대신 안부 전해주세요.
강바른은 그렇게 답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애정도 미움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답이었다. 예전 같으면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날을 세우며 대들기라도 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호칭도 이제는 그저 실장님이다.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던 바른이 머리가 크고 가족관계를 이해하게 되면서 슬그머니 아저씨라고 호칭을 바꾸었을 때 느꼈던 서운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아저씨’는 사적인 관계로 느껴졌지만 ‘실장님’은 어디까지나 직함일 뿐이었다.
이자가 정말 바른이가 맞나? 논리적으로는 전혀 말이 안 되는 의문이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주 실장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짙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미 끊긴 전화기를 한참 귀에 대고 있었다.
* * *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는 대검찰청 감찰3과 강바른 과장이 한성그룹과 유착한 혐의를 확인하고 현재 수사 중입니다.]
점심을 먹고 있던 최진우 검사는 TV에서 들려오는 뉴스 소리에 입으로 떠 넣던 콩나물국을 삼키지 못하고 그대로 입가에 주르륵 흘려 버렸다.
“윽! 최 검사, 뭐예요? 턱에 구멍 났나? 갑자기 왜 그래요?”
전윤지 검사는 아직 뉴스를 듣지 못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냅킨을 뽑아 뭉쳐 최 검사에게 내밀었다. 최 검사는 턱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다급하게 손가락을 들어 TV 화면을 가리켰다.
“금방 강 과장님 이름 나오지 않았어요? 저게 무슨 소리예요?”
안소영 검사도 젓가락을 든 채로 딱딱하게 굳어 눈을 부릅뜨고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검사는 어리둥절해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는 서울중앙지검의 공보전담 차장검사가 나와 언론에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강바른 검사는 한성사의 블랙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하고 그 대금은 한성사에서 처리하는 수법으로 거액을 수뢰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점심을 같이하고 있던 검사들은 모두 입을 떡 벌렸으나 태산은 TV에 힐끗 한 번 눈길을 주고는 태연히 밥을 계속 먹었다.
[강바른 검사는 대검찰청 감찰부 소속으로 검사들의 비위를 수사하는 직무를 맡고 있어 공익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판단되어 비록 기소 전이긴 하나 피의 사실을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안 검사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태산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게 사실인가요?”
태산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언젠간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는데… 저쪽도 똥줄이 타긴 했나 보네요. 수사 다 끝내지도 않고 발표부터 하는 걸 보면. 당장 내 손발부터 묶어둬야겠다는 건가.”
그때 갑자기 태산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태산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예, 올라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산은 전화를 끊은 후 바로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다 밝혀질 테니까 그렇게 안달할 것 없어요. 난 부장님이 부르셔서 이만.”
태산이 후다닥 나가 버리도록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세 검사들이다. 안 검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대체 사실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전 검사가 가장 빨리 멘탈을 회복하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곧 밝혀질 거라잖아요. 과장님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걸 보니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죠. 기다려 보자고요.”
전 검사의 말에 최 검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요. 전 우리 강 과장님을 믿습니다. 강 과장님이 어디 쉽게 매수되실 분이던가요.”
최 검사도 이내 씩씩하게 수저를 든다. 하지만 안 검사만은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 좀처럼 근심을 거둘 수 없었다. 그저 쉽게 믿기에는 강 검사가 그동안에도 신뢰할 수 없는 짓을 자주 벌이지 않았던가.
안 검사는 다시 한번 TV 화면을 가만히 노려본다. TV 속에서는 전문 공보관이 기자들의 질의를 받고 있었다. 기자들은 아우성을 치며 한마디라도 더 끌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스타 검사의 몰락이라는 특종을 열렬히 반기는 모습이었다. 내일 신문에 오를 타이틀이 머릿속에 선하게 그려졌다.
안 검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브리핑을 할 때만 해도 관심을 보이며 뉴스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질의로 넘어가자 각자 밥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안 검사는 서빙을 보고 있는 점원에게 말했다.
“채널 좀 돌려주세요. 뉴스 말고 다른 거 하는 데로요.”
점원은 아예 리모컨을 안 검사 앞으로 가져다 놔주었다.
“보고 싶으신 채널 있으시면 보세요.”
안 검사는 아무렇게나 채널을 누르다가 야구 경기 채널로 돌려놓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안 검사는 다른 검사들처럼 신경을 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강바른 검사가 피의자를 팼으면 모를까 누구한테 뇌물을 받았다는 게 어울리기나 한단 말인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솟아나는 의심을 달랬다.
세 명의 검사들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머리를 맞댄 채 차려진 백반만 열심히 먹었다.
음식점을 빠져나온 태산은 바로 대검찰청 7층의 감찰부장실로 올라갔다. 원신영 부장이 집무실에서 상기된 얼굴로 서성대며 기다리고 있다가 태산이 들어서자마자 다급히 추궁했다.
“강 과장, 대체 뭡니까? 한성과는 무슨 관계인데 지금 뜬금없이 한성과의 커넥션 얘기가 나오는 거죠? 이거 감찰부가 하는 일을 막기 위한 공작 같은 거 아니에요? 정말 카드를 받은 게 맞아요?”
평소 여유 넘치던 원 부장이건만 태산을 철석같이 신뢰하고 있었던 터라 서울중앙지검의 발표로 유례없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카드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태산의 말에 원 부장은 눈을 크게 뜨며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태산은 쓰게 웃으며 원 부장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앉아서 천천히 들으시죠.”
태산은 원 부장을 자리에 앉히고 부속실 직원에게 차를 들이라고 했다. 향긋한 홍차 향이 집무실 안에 퍼지자 원 부장도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해 봐요.”
“…음…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이 제 생물학적 아버지이십니다.”
찻잔을 기울이며 태산의 답을 기다리던 원 부장에 태산이 불쑥 뱉어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찻물을 풉 하고 뿜어냈다. 태산은 쓰게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원 부장에게 건넸다. 원 부장은 머쓱한 얼굴로 손수건으로 입가를 누르며 말했다.
“흠흠… 금수저일 것 같기는 했지만 이건 또 다른 스케일이군요.”
원 부장은 태산의 한마디에 금세 상황을 납득했다.
“그렇다면 부친에게 받은 증여이니 강 검사는 꿀릴 것이 없다는 거군요. 혹시 그동안 한성그룹 관련된 사건 배당받은 적 있나요?”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비로소 안도한 원 부장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난 또… 기획했던 수사가 이것으로 완전히 물 건너가는 줄 알고 십년감수했잖아요.”
원 부장이 태산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런 중요한 사항은 미리 좀 언질을 주면 안 되나요?”
태산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는다.
“나름대로는 출생의 비밀인데 쉽게 떠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태산의 답에 원 부장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딴에는 그렇네요.”
하지만 이내 원 부장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간다.
“부하가 그런 혐의를 받고 있는데 나한테는 한마디도 없이 바로 언론 발표부터 하다니. 미리 얘기를 했다면 해명을 들었을 테고 강 과장이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일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태는 없었을 텐데요.”
원 부장은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하지만 어차피 감찰부를 견제하기 위해 꾸민 일일 텐데 중앙지검으로서는 감찰부에 미리 알려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중앙지검에 알리고 바로잡으면 됩니다. 별문제는 아닙니다만… 저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공개하고 싶은데요.”
원 부장은 잠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지금 대중은 뉴스를 접하고 영웅적인 스타 검사 역시 한낱 부패 공무원일 뿐이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실망하고 있을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오명을 벗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
태산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만 당하고 끝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중앙지검과 배후에 있을 총장에게도 타격을 좀 돌려 드려야지요.”
지금 내부적으로 사정을 통보하면 중앙지검은 수사 결과 무혐의였다고 발표하고 부랴부랴 사건을 종결지을 것이다. 그렇게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면 중앙지검의 실책은 묻히고 강바른의 부패한 이미지만 근거 없이 남아 유령처럼 떠돌게 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오류를 정정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헛발질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어떨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중앙지검의 언플과 공작 의도가 더욱 부각될 것이며 검찰은 여론의 강력한 역풍을 맞을 것이다. 국민들은 더욱 강력하게 검찰개혁을 요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감찰부의 수사를 방해할 명분이 없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한동안 국민들의 욕을 배부르게 먹고 최후에는 출생의 비밀까지 공개할 각오를 해야 한다. 강 검사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는 한이 있어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기획한 수사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으려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꿰뚫어 본 원 부장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강 과장,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게 있지요?”
“예, 가장 극적인 순간 공개하려고 밑밥을 좀 깔고 있습니다.”
“그래요. 나도 이대로 그냥 넘어가고 싶지는 않네요.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 속이 좀 풀리겠어요.”
원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강 과장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추이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죠.”
“예, 감사합니다.”
태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11층으로 올라왔을 때에도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아 과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태산이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태산의 지인들에게서 걸려온 연락이었다.
[뉴스 봤네. 뭔가 오해가 있는 거겠지. 잘 해결되길 바라네.]
[검사님, 힘내세요. 전 검사님을 믿어요.]
[괜찮으시죠? 일 잘 마무리하신 뒤에 같이 술 한잔하시죠.]
[큰일을 하려면 장애가 많게 마련이죠. 힘내십시오. 응원하겠습니다.]
과거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변함없이 태산을 신뢰하면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곧이어 대포 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대포 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니 선화가 보낸 메시지다.
[검사 오빠, 괜찮아?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나 높은 양반들한테 끈 좀 있으니까.]
태산은 피식 웃었다. 다른 지인들은 강바른이 뇌물을 받았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 듯했지만 선화는 받았어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대포 폰이 다시 울린다. 이번에는 범진이다.
[형님, 뉴스 보셨습니까?]
범진은 짐짓 심각한 어투로 물었다.
“그래.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예,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태산이 처음 이 몸으로 들어왔을 때 강바른의 뒷조사를 해준 것이 범진이었다. 범진은 이미 강바른이 한성그룹 일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대로 수사도 해보지 않고 언론에 먼저 터뜨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서요. 검찰 내부에 적이 있는 겁니까?]
범진이 고른 말에 태산은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건달들 나와바리 싸움 같은 게 아니야. 뭐 날 견제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손을 좀 볼까요?]
태산은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서라. 이미 대비해서 세팅 다 해놨으니 섣불리 나설 생각 하지 마라.”
[아, 역시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범진은 한결 안도한 목소리로 다행이라는 듯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후 태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선화의 메시지와 범진의 마지막 말이 닮아 있었던 것이다. 선화의 로비나 범진의 무력에 의지할 일은 없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편에 서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 *
예상대로 강바른 검사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언론은 신이 나서 연일 강바른을 때려댔고 기사에는 무수한 악플이 달렸다.
[바른은 무슨. 이름이 아깝다. 당장 개명해라.]
[↳ 동감. 강부패로 개명하는 거 어때요?]
[???? 동감222222 강그른 추천합니다.]
[↳ ㅋㅋㅋㅋㅋㅋㅋ 동감333333333]
[이 사람은 좀 다른가 보다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검사들 썩은 건 매한가지네요. 실망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관상 딱 보면 모르냐?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음흉한 상임.]
[정의감 넘치는 검사인 줄 알았더니 그냥 스타가 되고 싶은 관종이었음? 이야~ 그동안 이미지메이킹 교묘하게 잘했네.]
검찰청 안에서도 태산을 보는 사람들마다 뒷말을 수군거렸지만 태산은 아무런 변명 없이 묵묵히 감내했다. 자신에 대한 비난이 클수록 후에 결백이 밝혀지는 순간 더욱 거센 역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오히려 그 순간이 기대되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곧 밝혀질 거라던 태산이 아무런 언질도 없자 오히려 동료 검사들이 안절부절못했다. 태산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태산이 뒷말을 듣고 있는 상황에 본인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압박감을 참지 못하고 안소영 검사가 태산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검사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왜 속 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하십니까? 아무 말 안 하고 계시니 언론에서 이런 소설 따위를 쓰는 것 아닌가요.”
안 검사가 태산의 책상 위에 신문을 올려놓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태산은 신문에 찍힌 활자를 흘낏 바라보았다.
[<기획> 슈퍼 검사에서 부패 검사로, 한 스타 검사의 예정된 몰락]
태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 참! 제목 뽑은 거 하곤.”
“지금 웃으실 때가 아니에요. 결백하시다면 더 늦기 전에 빨리 대응하셔야죠. 이러다가 완전히 이미지가 굳어져 버리면…….”
태산이 문서 같은 것을 손에 들고 흔들어 보이며 안 검사의 말을 끊었다.
“이제 곧 해명할 겁니다.”
태산의 손에 들린 것은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로부터 온 소환장이었다.
“내일이 소환 날짜입니다. 내일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예요.”
태산의 태도는 거리낌이 없었다. 소환을 두려워하거나 초조해하는 눈치는 조금도 없다. 그 태도에 안 검사는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함을 느꼈다. 그렇게 당당하다면 왜 동료들에게는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적어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만이라도 시원하게 설명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그렇다 치고 감찰1과에서 일하는 전 검사와 최 검사는 영문도 모르고 동료들 눈총을 받고 있는데요.”
“집안 사정이 좀 얽혀 있어서요.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태산은 딱 잘라 거절했다. 안 검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안 검사는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다가 씩씩거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말로 별것 아닌 일로 이러신 거면!”
태산이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그런 거면요? 어떻게 하려고요?”
안 검사는 얄미워 죽겠다는 얼굴로 어떻게 하면 분이 풀릴까 눈을 굴리며 고민하다가 불쑥 던져 말했다.
“제가 한 대 쳐도 되겠습니까?”
무력이 강한 남성이 전력으로 쳐도 타격이 없을 판에 안 검사처럼 체구가 작은 두뇌파 여성이야 아무리 때려도 간지러울 뿐이다.
“그렇게 해서 안 검사 기분이 풀린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태산은 시원스럽게 답했지만 그 여유 있는 태도가 더 얄미워 안 검사는 미간을 모은다.
“그럼 조사 잘 받고 오세요.”
안 검사는 뾰족하게 답하고는 휙 하니 집무실을 나갔다. 안 검사가 집무실을 나간 후 태산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민 기자, 강바른입니다. 드디어 내일이네요. 준비한 대로 잘 진행되고 있겠죠? 예, 알겠습니다. 수고해 줘요.”
다음 날 오전, 태산은 그 어느 때보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서울중앙지검에서 마련한 포토 라인 앞에 섰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 속에서도 태산은 여유 있는 미소를 띠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비주얼이나 태도를 보면 피의자가 아니라 취재진들 앞에 선 스타 배우 같았다.
“어딜 범죄자가 고개 꼿꼿이 들고 말이야!!”
“반성의 기미가 없구먼!”
취재진 속에 섞여 있던 군중 속에서 야유가 터진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달걀이 날아와 태산의 가슴팍 위에서 터졌다.
태산은 날아오는 달걀의 궤적을 똑똑히 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손으로 낚아챌 수도 있었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내버려 두었다.
고급 슈트가 계란 범벅이 되었지만 태산은 여유 있게 손으로 털어내고 마이크 앞에 서서 말했다.
“한 점 의혹도 없도록 철저히 조사받겠습니다.”
태산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수사관들에 둘러싸여 군중들의 야유 속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갔다.
취조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 잠시 후 반부패수사부 소속 검사가 들어와 태산의 앞에 앉았다. 나이는 태산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아 보였다. 작정하고 기획한 수사니 햇병아리를 주임으로 붙였을 리는 없고 반부패수사부 수석쯤 될 것이다. 나름대로는 엘리트일 것이 분명하다.
“강바른 과장님, 평소 존경했던 분인데 이런 일로 뵙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검사는 입 발린 말로 입을 열었다. 진심이라고는 손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산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피의자로 온 자리니 괜한 예우는 안 하셔도 됩니다. 사실대로만 진술하고 가겠습니다.”
“글쎄요. 그렇게 쉽게 나가실 수 있을지는 취조를 해봐야 알겠지요.”
검사는 조롱하듯 말하고 바로 취조로 들어갔다.
“강바른 씨, 현재 본인 명의의 한성사 한도 무제한 블랙카드를 소유하고 계시는 게 맞나요?”
“예, 지금도 제 지갑에 들어 있습니다.”
“언제 카드를 발급받았습니까?”
“5년 전 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직접 발급받았습니까?”
“아니요. 한성그룹 주인호 전략기획실장이 발급해 선물했습니다.”
거침없이 취조를 하던 검사가 순간 멈칫해서는 입을 떡 벌렸다. 이쯤에서 한 번쯤은 오리발이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거침없이 인정을 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검찰에서 모르고 있던 전달자의 디테일까지 정확하게 진술했다.
“어… 그, 그러니까 한성그룹 측으로부터 카드를 받았고… 카드 대금은 본인이 결제했나요?”
“대금 결제에 대해서는 따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카드도 아니었고 어차피 제 계좌에 연결되어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필요할 때 한 번씩 사용하곤 잊고 있었네요. 한성 측에서 알아서 했겠지요.”
태산은 태연하게 진술하고 있었으나 검사 쪽이 오히려 더 당황해 버벅댔다. 오래 실랑이를 하리라 생각하고 대비했는데 척척 시인을 해버리는 탓이다.
“어… 흠흠… 그렇다면 한성그룹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까?”
“예.”
“그, 그러니까 수뢰 혐의를 시인한다는 거죠?”
“아니요.”
척척 진행되던 진술이 갑자기 벽에 가로막힌다. 검사는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는다.
“예?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으로부터 금품은 받았으나 뇌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검사가 미간을 모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뇌물은 받았는데 뇌물죄가 아니라니 술 마시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라는 말장난과 뭐가 다른가.
“아버지한테 용돈 좀 받은 것도 죄가 되나요?”
“…예?”
검사는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한참 만에 멍하니 되물었다.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이 제 부친이라는 얘깁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태산의 태연한 표정을 보는 순간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며 재빨리 강바른의 인적 사항을 살펴보았다.
“가족관계등록부상으로는 분명 강호연 씨가 부친이라고…….”
“외조부이십니다. 모친이 미혼에 임신해서 동생으로 입적시켰습니다.”
검사는 태산을 노려보며 추궁했다.
“확인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블러핑 하는 겁니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수사하는 동안 한성에서 어떻게든 언질을 주고 수사를 막았겠지요. 한성의 정보력에 검찰에서 수사 들어갔다는 것을 모를 리도 없고.”
“딸뻘 되는 새파란 여배우를 농락해 혼외자까지 만들었다는 게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여기저기 알리겠습니까?”
“여, 여배우라고요?”
“아, 모친이 젊었을 때 하이틴스타였습니다.”
말하는 걸 깜박했다는 듯 덧붙이는 태산의 말에 검사가 급히 강바른의 가족관계를 다시 살펴본다.
“강연정 씨 말입니까?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잘 모르시겠죠. 젊으시니까. 예명이 한윤주였는데 한때 유명했다더군요.”
검사는 입을 떡 벌렸다. 옛날 배우이긴 했지만 자신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스타였다. 분명 어느 순간 연예계에서 완전히 사라져서 권력가의 애첩으로 들어갔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고도 했다.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과 왕년의 하이틴스타 한윤주 사이의 소생이라니.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검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한동안 눈만 껌벅껌벅했다.
“의심스러우면 유전자 검사를 해도 좋습니다. 지금까지는 부친이 비밀을 유지하셨지만 혐의를 벗으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태산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그제야 검사는 현실을 인식하고 등골에 소름이 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도 한성그룹의 관리를 받고 있는 검사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게 한성은 절대 무너질 리 없는 아성이었다.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별다른 죄책감 없이 한성그룹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강바른도 그런 흔한 검사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대담하게 좀 많이 받았구나 생각했을 뿐. 뭔데 그렇게 특별 취급을 받았나 하는 질투심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흔한 검사들 중 하나를 찍어내는 것 정도로는 한성그룹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한성이 관리하는 검사들 중에는 강바른보다 끗발 좋은 고위직 검사들도 많았다. 게다가 정 거슬리면 수사 중에 미리 언질을 주어 중단시켰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던 것을 보면 한성 측도 묵인하겠다는 신호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검찰은 지금 눈치 없이 한성그룹 일가와 적이 될 수도 있는 일을 벌인 것이다.
검사는 수사상의 과오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을 일보다 한성과 척을 질 일이 더 두려웠다. 한성 측에서 돈을 전달한 머슴 몇 명 정도 희생시킬 각오를 한다면 검찰들은 추풍낙엽처럼 줄줄이 쓰러져 나갈 것이다.
검사는 강바른의 말을 믿고 여기서 취조를 끝낸 후 상부에 얼른 보고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무시하고 취조를 강행해야 할 것인가 한참을 고민했다.
바로 그때 수사관 하나가 취조실 밖에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수석님!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수사관이 핸드폰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상에는 모 방송국의 유튜브 채널이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접속자가 무섭게 불어나며 미친 듯이 채팅창이 올라간다.
[그러니까 민 기자님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강바른 검사가 조재용 한성그룹 회장과 배우 한윤주 씨의 혼외자란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KH저널의 민철승 기자가 스튜디오에 나와 진행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화면 상단에는 붉은 글씨로 [[단독]강바른 검사 수뢰 혐의의 진실 – 검찰은 개혁을 원치 않는다]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제목이 눈을 찌르는 순간 주임검사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