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64화 (64/78)

제6장 압박

서동욱 검사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버텼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라도 할까 봐 아니다,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 단답으로 일관했다.

강바른 검사의 추궁은 날카로워서 순간 정신을 놓으면 허점을 잡힐 것 같았다. 서 검사는 정신 줄을 바짝 잡고 있으려 용을 썼다. 그러다 보니 엄청나게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반나절 만에 서 검사는 완전히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물 한 모금만 마시고 합시다.”

계장이 슬쩍 강 검사의 눈치를 보니 강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쉬었다 하죠.”

강 검사가 매직미러 너머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인다. 잠시 녹화를 중단한다는 신호다.

서 검사의 앞에는 물 한 잔이 강 검사의 앞에는 커피 한 잔이 놓였다. 서 검사는 다급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강 검사는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며 그런 서 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거 같아요?”

강 검사가 무심히 물어 서 검사는 물을 마시다 말고 멈칫했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빨리 불고 끝냅시다. 내가 쉽게 포기할 사람 아니라는 거 서 검사도 잘 알지 않아요? 자꾸 시간 끌고 피곤하게 하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서 검사는 눈을 흡 뜨고 고개를 들어 강 검사를 마주 보았다. 강 검사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섬뜩한 악의가 번뜩였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등골이 오싹했다. 이러려고 녹화를 중단시킨 것일까?

서 검사는 턱이 덜덜 떨리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버티며 말을 쥐어짜 냈다.

“지금 협박하는 거요?”

“의미는 알아서 받아들이시고 어쨌든 버텨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친절하게 알려 드리는 겁니다.”

서 검사는 절로 오금이 저렸지만 쫄지 말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여기서 지레 겁을 먹고 밀리면 내 인생은 좆망하는 거다. 버텨야 한다.

서 검사는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꾹 쥐었다.

“이봐, 강바른. 내가 정진용이 주장하는 대로 접대를 받았다 쳐.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내 입으로 시인할 것 같아? 내가 접대를 받았다는 걸 인정하면 나 하나 처벌받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같이 있던 상사들의 비리까지 함께 인정하는 꼴인데 그러고도 내가 법조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길로 출세와는 영영 멀어지게 된다고.”

서 검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강바른이 문득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출세에 연연하고 있는 건가?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모양인데?”

강 검사는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서 검사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지금 출세가 문제가 아니야. 당신 인생은 이미 망했다고. 그러니 애쓰지 말고 빨리 포기하라고 충고하는 거야.”

서 검사는 강 검사의 말을 부인하려 애썼다. 어떻게든 여기서 버티기만 하면 살아날 구멍이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서 검사는 고개를 저으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손아귀를 꽈악 움켜쥐었다.

이것은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강 검사의 계략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강 검사는 서 검사의 중얼거림에 가벼운 코웃음으로 대꾸했다.

“못 믿겠으면 한번 두고 보자고.”

바로 그때 어디선가 지이잉~ 하는 진동 소리가 들렸다. 강 검사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전화를 받는다.

“예.”

강 검사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문득 서 검사 쪽을 힐끔 보았다. 서 검사는 뜨끔해서 흠칫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강 검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계속 수고해 줘요.”

강 검사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서동욱 씨, 오늘은 이만하죠. 앞으로 갈 길이 먼데 첫날부터 너무 몰아세우는 것도 그러니.”

방금전까지도 살벌하게 협박하더니 금방 돌변해 짐짓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가면을 바꿔 쓰듯 낯빛을 바꾼 강 검사의 태도가 오히려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곧 다시 소환하겠습니다. 허튼짓할 생각은 마시고 돌아가 조용히 기다리세요.”

서 검사는 얼떨떨했으나 오늘은 이대로 풀어주겠다는 말에는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허둥지둥 일어서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문 안으로 들어선 직후 간신히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은 서 검사는 현관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간신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강 검사는 허튼짓 말라고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섣불리 연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진 부장님, 저 서동욱입니다. 정진용이 접대 메모를 깠습니다. 대검 감찰부에서 소환해서 다녀오는 길입니다. 메모 내용이 심상치 않던데… 괜찮을까요?”

서 검사는 진용득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놓고도 경거망동한다고 불호령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마침 잘 연락했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었네만.

진 부장은 의외로 전에 없이 살갑게 전화를 받았다. 서 검사는 어쩐지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래서 자네는 뭐라고 했나?

“무조건 부인했지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서로 말이 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자신이 끝까지 부인한다 해도 함께 접대를 받았던 사람들 중 누구 하나가 자백해 버리면 큰일이다. 접대받았던 검사가 한두 명이 아닌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이 접대받았음을 시인해 메모의 신빙성을 증명해 준다면 다른 검사들도 위험해질 것이다.

-잘했네. 하지만…….

진 부장이 묘한 여운을 남기며 말을 끊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불길한 침묵이 흐른다. 진 부장이 다시 입을 열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서 검사의 심장박동은 점점 높아졌다.

-대검 감찰부가 대구 시내를 샅샅이 뒤지며 증거 수집 중이네. 정진용이는 물론이고 벌써 천 마담도 그쪽으로 넘어갔어.

진 부장의 말에 서 검사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 마담이라면 자신도 장난 섞어 장모님, 장모님 했던 룸살롱 캐슬의 마담이었다.

-아무래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군. 증거가 명백한 것은 일부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단순히 친분이 있어 자리를 함께했을 뿐 대가관계는 전혀 없었다고 잡아떼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기묘하게 다감한 어투로 진 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군가 2차를 나갔다는 증거가 확실하다는데 성매매는 자네 혼자 했다고 해주면 안 되겠나?

서 검사는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운명 공동체인 줄 알았는데 저쪽은 벌써 서 검사에게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서 검사가 바로 답하지 않자 진 부장은 슬그머니 변명을 보탠다.

-자네는 총각이지만 나는 가정도 있고 사회적 위신도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성매매로 처벌받는 건 곤란하지 않겠나.

자신에게만 사회적 위신이 있다는 말인가. 총각 평검사에게는 체면도 없단 말인가.

서 검사가 좀처럼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않자 진 부장은 슬쩍 구슬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자네가 짊어지고 가면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나? 최소한으로 처벌받을 수 있도록 힘써주겠네. 시간 지나면 금방 잊힐 테고 선배들 사이에서 의리 있는 후배로 눈에 들면 자네 앞으로 더 잘나갈 수 있어. 변호사 개업 안 할 텐가? 검사복 벗고 나면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판이 먹여 살리는 거야.

일견 달래는 것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은근한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배신자로 낙인찍히면 법조계에서 영영 발붙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 검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예,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제 선에서 막아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진 부장은 반색하여 답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하니 서로 연락하는 것도 삼가도록 하지. 일 좀 정리되면 내가 먼저 연락하겠네.

진 부장은 용건을 마치고 나니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급히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과연 진 부장이 자기 말처럼 다시 연락을 할 것인가 서 검사는 심히 의심스러웠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나 비척비척 침실로 들어갔다. 씻을 정신도 없이 바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입에서 단내가 날 만큼 피곤했지만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어 잠도 오지 않았다.

괴로워하며 뒤척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서 검사는 힘겹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받지 않을 수 없는 전화였다.

“…어, 유진아.”

-자기야. 목소리가 왜 그래? 자고 있었어?

“아니, 지금 막 퇴근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몸살인가 봐.”

혹시 나오라고 할까 봐 서 검사는 꾀병을 지어냈다.

-병원 가봤어? 내가 약 사서 갈까?

“괜찮아. 한숨 푹 자고 나면 나을 거야.”

서 검사는 서둘러 사양했다. 찾아오면 괜히 더 골치만 아파진다.

-나 오늘 신혼집에 들일 가전 알아봤는데 같이 의논 좀 하려고 했더니…….

“내가 뭘 아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알아서 결정해.”

-그래도 같이 살 집인데…….

“괜찮다니까.”

-알았어. 아무리 바빠도 드레스 고르러 갈 때는 같이 갈 거지?

“당연하지. 얼마나 예쁠지 기대된다.”

서 검사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지어내어 말했다. 흐흥 하고 즐겁게 웃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린다.

-그럼 쉬어. 내일 전화할게.

통화가 완전히 끊기고 나서야 서 검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약혼녀 송유진은 인천지검에 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만난 여자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낌없이 돈을 처바른 듯한 차림새부터가 심상치 않다 생각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부친이 인천 지역사회에 알려진 알부자라고 했다.

인천 토박이인 유진의 부친은 조부에게서 노른자위 땅을 다수 물려받은 땅 부자이자 대부업으로 굴리는 돈도 적지 않은 현금 부자였다.

돈은 많았으나 내세울 만한 명함이 없었던 유진의 부친은 유진과 서 검사의 교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검사 사위를 들이면 더 이상 돈이 있어도 천박한 졸부라고 무시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서 검사로서도 유진과의 결혼은 꽤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자신이 권력의 정점을 향해 열심히 달려갈 동안 재력으로 뒤를 팍팍 밀어줄 처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기업 총수의 영애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지역 알부자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계급 차가 너무 심하게 나서 자신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집안보다 서로 원하는 것을 대등하게 거래할 수 있는 집안 쪽이 마음이 편했다. 결혼도 어차피 일종의 계약 아닌가.

대구지검으로 부임하기 전 혹시 거리가 멀어지면 관계가 흔들려 결혼이 물 건너가게 될까 봐 유진의 집안에서 먼저 약혼을 제안했고 서 검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구지검으로 부임한 후 서 검사는 약혼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일탈을 맛보았다. 결혼 전 자유를 만끽한다는 핑계를 대며.

수원지검으로 승진해 올라오자마자 바로 결혼식 준비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이런 시기에 성매매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결혼은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된다. 검사 생활의 반석이 되어 줄 든든한 처가도 함께 사라진다. 언젠가는 자신의 것이 될 어마어마한 재산도 신기루가 되어 흩어지게 된다.

착착 이뤄가고 있던 청운의 꿈이 한낱 백일몽이 되어버릴 위기였다.

“그럴 수는 없어.”

서 검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부인해야 돼. 마음 단단히 먹어.”

서 검사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이를 악물었다.

* * *

끝까지 부인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서동욱 검사였으나 다음 소환기일에 대검찰청으로 출두하자마자 난관에 부딪쳤다.

취조실에 들어선 순간 서 검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얼어붙고 말았다.

취조실 안에는 먼저 와 앉아 있던 한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룸살롱 캐슬에서 서 검사와 몇 번 파트너가 되어 2차까지 갔었던 종업원이었다.

이름이…….

“서동욱 씨, 지금부터 민유리 씨와 대질신문을 하겠습니다.”

강 검사의 말에 머릿속을 맴돌던 여자의 이름이 퍼뜩 기억났다. 맞다, 유리! 성까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유리였다. 대구를 떠나온 후 완전히 잊고 있었던 이름이다.

룸살롱에서도 상사들이 먼저 아가씨 지명권을 가졌으므로 눈에 띄는 미인들은 상사들이 선점했다. 민유리는 썩 미인이라고 봐주기는 힘들었고 서 검사도 퉁명스럽게 대했지만 실은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이름처럼 속살이 투명한 데다 조금 무리한 요구를 해도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고삐가 풀려 플레이가 좀 과격해졌는데 그 후로 은근히 피하는 기색이라 내심 괘씸하게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캐슬에는 발길이 뜸해졌고 그와 함께 민유리의 존재는 서 검사의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서 검사의 인생에서 민유리는 하룻밤 놀잇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민유리가 지금 서 검사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일생일대의 폭탄이 되어 눈앞에 앉아 있었다. 서 검사는 아찔해서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불안한 얼굴이던 민유리는 오히려 서 검사가 사색이 되자 상대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지금 불리한 쪽은 조사를 받고 있는 서 검사이며 서 검사의 인생을 손아귀에 쥔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자리에 앉으세요.”

계장의 재촉에 그제야 서 검사가 비척비척 민유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강 검사는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신문에 들어갔다.

“민유리 씨,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 기억납니까?”

민유리가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서 검사를 살핀다. 서 검사는 짐짓 눈을 부릅떴다. 쓸데없는 소리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였다.

민유리는 목을 움츠리며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더니 호소하듯 강 검사 쪽을 쳐다보았다. 강 검사는 서 검사를 향해 대수롭지 않게 툭 던져 주의를 주었다.

“서동욱 씨, 참고인 위협하지 마세요.”

그러고는 민유리를 향해 온화한 태도로 친절히 말하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서동욱 씨는 민유리 씨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못해요. 민유리 씨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허세를 부리는 것뿐입니다. 설령 위해를 가하려고 하더라도 감찰부의 이름을 걸고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시고 사실대로만 진술해 주시면 됩니다.”

초조해 보이는 서 검사와는 달리 강 검사의 태도는 위엄 있고 여유로웠다. 서 검사를 전혀 위협거리로 생각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분위기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강 검사에게서는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맹수의 천진하고도 잔혹한 아우라가 풍기고 있었다.

민유리는 취조실 안의 힘의 균형이 강 검사에게 크게 치우쳐 있음을 은연중에 깨달았다. 그리고 강 검사 편에 서 있는 한 적어도 이 취조실 안에서만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민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기억나요. 대구지검 서 검사예요. 제가 일하던 룸살롱에 종종 왔었어요.”

서 검사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누구랑 같이 왔었나요?”

“올 때마다 달랐는데 대한건설 정진용 대표님은 꼭 계셨어요. 그분이 항상 계산을 하셨으니까요. 이름은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공공수사부던가… 거기 진 부장님도 안 빠지셨고요. 그 외에 다른 부장님이랑 차장님이나 검사장님이 번갈아 오셨어요.”

“2차도 나갔나요?”

“나가는 날도 있고 안 나가는 날도 있었지만…….”

민유리가 서 검사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서 검사님 오는 날은 항상 나갔어요.”

강 검사가 서 검사를 돌아보며 짓궂은 투로 물었다.

“서동욱 씨, 그렇다고 하는데요. 이래도 부인하시겠습니까?”

“기,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면 디테일하게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먼저 2년 전 4월 13일 기록부터 볼까요?”

강 검사는 정진용의 메모를 바탕으로 민유리의 확인을 받은 후 서 검사를 매섭게 추궁해 갔다.

민유리는 서 검사가 까맣게 잊고 있던 디테일까지 줄줄 꿰었다. 그날 누가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고 누구를 파트너로 지목했으며 술은 무얼 시켰는지까지.

진술을 듣자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서 검사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강 검사의 추궁에 그저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고 중얼거릴 뿐 제대로 답을 하지도 못했다.

“그날 차장님께서 컨디션이 별로 안 좋다고 2차는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다들 눈치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진 부장님이 워낙 그거 좋아하는 걸 차장님도 아니까 자긴 술 먹고 있을 테니 갔다 오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부장님은 눈치껏 술이나 마시자고 했는데 진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정아랑 나갔어요. 그러니까 서 검사님도 얼른 제 손목 끌고 나갔고요. 다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바로 위층에 있는 호텔로 올라갔어요.”

“진 부장은 엘리베이터 타고 호텔로 올라가긴 했지만 섹스는 안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강 검사의 말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서 검사가 움찔했다. 진 부장까지 이미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단 말인가.

민유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안 했나 보죠. 그것까진 제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꼭 관계를 해야 성매매가 되는 건가요? 성행위하는 조건으로 돈을 내면 성매매 아니에요?”

강 검사가 쓰게 웃으며 받았다.

“섹스를 해야 기수가 되거든요. 미수는 성매매특별법상 처벌이 안 됩니다.”

진 부장에게는 아직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그렇기에 서 검사에게 성매매는 혼자 덮어쓰고 가달라고 협박 섞인 부탁을 한 것이리라.

그에 비해 서 검사 자신은 증거도, 증인도 너무나 명백하다. 이제 혐의를 시인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진 검사가 성매매 혐의를 벗는 것을 도와준다면 훗날 변호사로서 제2의 인생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저는 화대까지 다 냈으면서 안 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서요. 여기 메모에도 2차에 2백이라고 써 있잖아요.”

더 이상 침묵하고 있으면 진 부장한테 불리한 이야기만 계속 나올 것 같아 서 검사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성매매는 저 혼자만 했습니다. 진 부장님은 안 하셨어요.”

강 검사가 빙긋 웃으며 돌아보았다.

“정진용 씨에게 성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까?”

서 검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정합니다.”

“진 부장은요. 성매매를 안 한 것 확실합니까?”

“엘리베이터로 호텔까지 같이 올라가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한 번 하고 내려왔을 때는 이미 파트너와 룸에 있었습니다. 너무 빨리 내려왔다 싶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안 했다고 하시더군요.”

“섹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죠. 그럼 정진용이 지불한 화대는 어떻게 된 겁니까?”

“계산은 정 대표가 알아서 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화대만 계산한 것 아닐까요?”

듣고 있던 민유리가 반론을 제기했다.

“한 번에 2백이요? 저 이 일 하면서 그렇게 큰돈은 못 받아봤는데요. 룸살롱이랑 마담 언니 몫 떼고 나면 오십도 못 받을 때가 수두룩한데.”

“포주가 중간에서 많이 가로챘나 보지. 아니면 금액을 잘못 썼든가.”

서 검사가 민유리에게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서동욱 씨, 묻는 말에만 답하세요. 지금 목소리를 높일 입장이 아닐 텐데요. 당신이 여기서도 검사인 줄 압니까? 어디까지나 피의자로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강 검사의 호통에 서 검사는 움찔해 고개를 숙였다.

“화대에 대해서는 천시연 씨에게도 다시 확인해 보죠. 아무튼 서동욱 씨는 정진용 씨에게 성 접대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지요?”

“예.”

강 검사는 재차 확인을 하고는 메모상 서동욱의 이름이 기록된 다른 날들도 모두 꼼꼼히 확인했다. 서 검사는 자신이 성 접대를 받은 사실을 모두 인정했으며 성 접대는 오직 혼자만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다 보니 혼자 접대받고도 화대를 4백이나 지불한 상황까지 생겼다. 아무튼 자신은 금액에 대한 부분은 전혀 모르고 정 대표가 다 알아서 계산했다며 계속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강 검사는 크게 추궁하지는 않고 신문을 마쳤다. 서 검사를 돌려보낸 후 송봉근 계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빨리 시인을 해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혼자만 성 접대를 받았다는 건 아무래도 의심스럽네요. 그런 자리에서 혼자 2차를 가는 것도 이상하잖습니까? 아무래도 성행위 자체는 파트너가 증언하지 않는 한 입증하기 힘드니 다 뒤집어쓰고 가려는 것 같은데요.”

“그렇겠죠.”

강 검사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좀 더 추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밤샘 조사를 해서라도.”

“급할 것 없어요. 이제 겨우 두 번째 소환인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강 검사다.

“잠 안 재우고 조사하는 것보다 찔끔찔끔 여러 번 불러서 피를 말리는 게 서동욱에게는 더 효과가 좋을 겁니다. 조사받는 동안 주위에서도 이런저런 압력들이 가해질 테죠. 혼자 뒤집어쓰려는 것도 이미 공범들한테서 압력이 들어온 것 같은데. 임계점을 넘는 순간 제풀에 무너질 거예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한편 대검찰청을 나와 귀가한 서동욱은 허탈함에 휩싸였다. 어떻게든 혐의를 부인하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맥없이 인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혐의를 시인했다 해서 마음이 홀가분해지지는 않았다. 강 검사는 다음 소환일을 기다리라 했고 이제부터는 자신이 아니라 상사들의 혐의를 막기 위해 계속 거짓말을 해야 했다. 피를 말리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동욱은 초조하게 다음 소환일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검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동욱 씨, 우리 얘기 좀 해.

평소의 약혼녀답지 않은 어두운 목소리였다.

“왜 그래, 유진아?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는지는 동욱 씨가 더 잘 알잖아?

송유진의 냉랭한 대꾸에 서 검사는 심장이 뱃속까지 툭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서 검사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니 송유진이 말을 이었다.

-나와서 한번 설명해 봐. 뭐라고 하는지 들어는 봐야겠으니까. 지금 수원지검 앞이야. 길 건너 카페에 있으니까 당장 나와.

아직 퇴근 시간 전이었지만 그런 것을 가릴 정신이 없었다. 서 검사는 집무실을 달려 나가며 어떻게 하면 약혼녀를 달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약혼녀까지 놓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녀와 함께 따라올 재산을 놓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잘 다독이면 분명 풀어질 것이다.

유진은 자신의 얼굴을 좋아했다. 항상 잘생겼다, 멋지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관리 잘하는 서 검사가 다른 남자들과는 달라서 좋다고도 했다. 얼굴 들이밀고 싹싹 빌면 못 이기는 척 용서해 주지 않을까?

서 검사는 희망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발걸음을 놀렸다.

* * *

송유진은 카페 가장 구석 자리에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서 검사가 다가가자 매섭게 노려보며 팔짱을 꼈다.

“앉아.”

서 검사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쩔쩔맸다.

“유진아,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다 설명할게.”

“거짓말할 생각은 마. 우리 집에도 검찰에 빨대 하나쯤은 있으니까.”

서 검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더듬더듬 변명했다.

“상사들이 한 일을 내가 다 뒤집어쓴 거야. 그렇게 하면 뒤를 밀어준다고 약속하셨어. 나도 내키지 않았지만 장래를 생각해서 결정한 거야. 나중에 변호사 개업할 때를 생각해야지. 선배들과 의리를 지켜야 후에 사건 수임도 더 잘될 거고…….”

송유진이 목소리를 높이며 서 검사의 말을 잘랐다.

“겨우 돈 잘 버는 변호사 만들려고 너랑 결혼하려는 줄 알아? 진짜 쪽팔려서 정말. 아버지가 니 예비 사위 성매매로 대검 감찰부에 불려 다닌다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는 소리까지 들어야겠냐고. 아버지가 펄펄 뛰면서 너 잡아 오라는 걸 내가 쪽팔려서 뜯어말렸어.”

검사 사위 들인다고 자랑하며 콧대를 높였을 예비 장인에게 옳다구나 하고 소문을 물어 나르며 내심 고소하게 생각했을 지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검사 사위 때문에 덩달아 자신의 사회적지위가 올라가리라 기대했을 예비 장인은 얼마나 체면이 깎였을 것인가. 서 검사에게는 우리 사위, 우리 사위 하면서 다정다감하게 굴었지만 아랫사람들 대하는 성질머리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 성격이라면 홧김에 청부 살인을 의뢰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려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 검사는 일순 소름이 돋았다.

유진은 한숨을 몰아쉬며 분을 삭이더니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래서? 했다고, 안 했다고? 성매매 했어, 안 했어?”

아니라고 잡아떼야 했지만 단도직입으로 물으며 정면으로 마주 보는 유진의 위세에 서 검사는 미처 즉답하지 못했다.

“그, 그게…….”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리는 서 검사의 반응을 송유진은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차 사주고 집 얻어줬더니 룸빵이나 처다니고 있었어? 나한테는 그렇게 바쁜 척을 하더니?”

어차피 이제는 부인해 봐야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단계였다. 서 검사는 자신을 사랑했던 유진의 마음에 매달려 보기로 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던져놓고 서 검사는 유진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유진아,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앞으로 진짜 잘할게. 너 나 사랑했잖아.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두 손으로 유진의 손을 꼭 붙들고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서 검사의 얼굴에 유진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서 검사는 역시 이게 통하나 보다 생각하며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인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라고 그러고 싶어 그랬겠어? 상사들 접대받는데 나만 빠질 수는 없잖아.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도…….”

서 검사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머리 위로 차가운 커피가 쏟아져 내렸다. 유진은 먹다 남은 아이스커피를 서 검사의 머리 위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쏟아붓고 내려놓았다.

“내세울 거라곤 검사 타이틀밖에 없는 거지새끼가 정말… 재수가 없으려니까…….”

진절머리를 치며 서 검사의 손을 털어낸 송유진이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넋을 놓은 서 검사를 향해 말했다.

“더 들을 것도 없어. 파혼해.”

“유진아!”

“닥쳐! 마음 같아서는 소송 걸어서 위자료까지 탈탈 털어내고 싶지만 너한테 대단한 돈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더 이상 너 같은 놈이랑 엮이기도 싫어서 이쯤 하는 거니까. 그간의 정을 생각해 봐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고맙게 여겨.”

송유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양 서 검사를 피해 카페를 나갔다. 서 검사는 맥이 빠져 더는 유진을 잡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카페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님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거렸지만 미처 시선도 느끼지 못할 만큼 얼이 빠진 상태였다.

세 번째로 대검에 소환되어 갔을 때도 서 검사는 얼이 빠진 그대로였다. 업무에 집중할 상태가 아니라 일은 잔뜩 밀린 채였고 항상 공들여 가꾸던 외모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못해 초췌한 몰골이었다. 며칠 사이 얼굴도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강바른 검사가 서 검사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런 서 검사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훗 하고 웃음기를 띠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서 검사가 어리둥절해 고개를 들고 마주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당신 진즉에 망했다고.”

강 검사는 마치 그간의 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제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검사로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출셋길은 막혔다. 처가 재산으로 떵떵거리며 살아보려던 꿈도 박살 났다. 진용득 부장은 장래를 보장해 주겠다 했지만 그 약속을 어떻게 믿겠는가?

[내세울 거라곤 검사 타이틀밖에 없는 거지새끼가 정말… 재수가 없으려니까…….]

송유진에게 받았던 모욕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벌레 보듯 보던 경멸의 눈빛도.

자신이 가진 것은 검사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일로 검사직을 잃게 되면 자신의 손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는 선배라는 놈들도 정작 그때가 되면 자신을 과거 일을 빌미로 한몫 뜯어먹으려 하는 거지 취급을 할 테다. 정진용 대표가 돈을 뿌릴 때는 십년지기처럼 살갑게 굴다가 돈 떨어지자마자 목이 뻣뻣해져 못 본 척 외면하던 놈들 아닌가.

갑자기 속에서 참았던 울분이 욱하고 올라왔다. 빌붙어먹는 거지새끼 취급을 당하면서 말 잘 듣는 개로 살고 싶지 않았다.

‘업계 평판? 씨발! 이미 이 지경이 됐는데 무슨 놈의 평판?’

그런 생각을 하며 속을 끓이고 있을 때 때마침 강 검사가 물었다.

“그래서… 성 접대는 혼자만 받았다는 진술에는 변함이 없나요?”

‘나 혼자만 죽을 수는 없어! 다 죽어봐라!’

서 검사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진술 바꾸고 싶습니다.”

강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훨씬 누그러진 태도로 받았다.

“그래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요. 어디 자세히 한번 들어봅시다.”

서 검사는 함께 접대를 받았던 상사들의 모든 비위를 증언했다. 함께 성매매를 했던 사실도, 그리고 자신에게 성매매 혐의를 전적으로 뒤집어쓸 것을 사주했던 사실까지 낱낱이 밝혔다. 메모상에 자신이 언급된 모든 건을 기억나는 대로 다 확인해 준 후 서 검사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진술을 끝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백했으니 피의자신문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만 다른 검사들의 비위조사와 관련해 참고인으로 추가 소환 할 수 있으니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강 검사는 이례적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 검사가 너무 쉽게 놓아주어 서 검사는 허탈할 지경이었다.

맥없이 터덜터덜 수원지검으로 돌아온 서 검사는 공공수사부 부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어차피 기소가 되면 실형을 받아 파면되지 않는다 해도 검찰의 위신을 손상하였다는 이유로 징계면직 될 것이 뻔하다. 잘리느니 미리 그만둔다는 심정이었다.

부장은 들은 말이 있는지 두말없이 사표를 수리했다. 하기야 업무 중에도 뻔질나게 감찰부에 불려 다녔으니 소문이 날 대로 났을 것이다. 진즉에 먼저 사표를 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용하다.

“이 새끼야!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진 부장은 서 검사와의 대질 때 격분해서 서 검사의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점잖은 분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강 검사가 만류하고 나섰다. 서 검사의 멱살을 잡은 손목을 지그시 쥐고 떼어내는 데 별로 힘을 주지도 않은 것 같건만 진 부장은 앓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너 이 새끼! 니가 그러고도 잘 사는지 어디 두고 보자!”

“진용득 씨, 남 걱정 하지 말고 본인 앞길이나 걱정하세요. 이렇게 증거가 명백한데 계속 부인할 겁니까?! 일찌감치 시인하고 반성하는 편이 형을 적게 받을 텐데요.”

강 검사가 진 부장을 눌러 앉히며 매섭게 추궁했다. 강 검사가 진 부장을 그로기 상태가 될 때까지 몰아붙이는 것을 서 검사는 맞은편에 앉아 대질에 답하며 담담히 지켜보았다. 강 검사는 언제나 무서운 적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같은 편 아닌 같은 편이 되다 보니 그렇게 든든하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예… 모든 혐의를 인정합니다…….”

진 부장이 맥없이 항복하자마자 강 검사는 미련 없이 서 검사를 내보냈다.

“수고했습니다.”

강 검사는 서 검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계장에게 지시했다.

“감찰1과로 인계하세요.”

“알겠습니다.”

계장이 서 검사를 데리고 취조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5층에 내려 연구관실로 들어가니 한쪽 책상에서 전윤지 검사가 앉아 있다가 돌아보았다. 계장은 전윤지 검사에게 서 검사를 넘기고 나갔다.

감찰3과는 부장급 이상의 비리를 수사하는 곳이다. 지금까지는 부장급 이상 고위급 검사들의 비리와 관련이 있으므로 강 검사가 직접 수사한 듯하지만 용건이 끝나자마자 평검사인 서 검사는 감찰1과로 내려보낸 것이다.

그제야 서 검사는 처음부터 강 검사가 자신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고 상사들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 검사는 전 검사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다 끝났구나 생각하니 허탈함과 동시에 회한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모래성처럼 쉽게 무너져 버릴 것을 왜 그렇게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며 살았을까. 절로 눈물이 맺혀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전 검사가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서 검사는 오랜만에 듣는 다정한 호칭과 말투에 서러워 흐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검사가 살갑게 위로한다.

“검사직에서 좀 잘리면 어때요. 수사에 협조하셨으니까 실형까지는 안 받으실 거예요. 몇 년 쉬었다가 나중에 변호사 개업하면 되죠. 하필 성매매한 건 두고두고 쪽팔리겠지만 인물이 괜찮으니 얼굴만 팔아도 먹고사시겠는데요 뭐. 미남 변호사로 어필해서 유튜브 방송도 하고 그러면 꽤 잘나갈지도 몰라요.”

처음에는 위로가 고마웠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아무래도 위로가 아닌 것 같다. 서 검사는 눈물이 쏙 들어가 미간을 모았다. 하지만 전 검사는 거기서 그치기는커녕 한술 더 뜬다.

“그동안 살도 좀 빠지셨죠? 머리에 왁스 떡칠하고 향수 범벅하지 않으니 오히려 느낌이 더 좋네요. 청순가련해 보이고. 과연 그동안 그루밍 열심히 하신 보람이 있는데요. 역시 사람은 장래를 대비해서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해야 한다니까요.”

위로는커녕 평소 외모 관리 하라고 잔소리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준 비아냥이었다. 서 검사는 울컥해 소리를 질렀다.

“야, 너!!!”

갑자기 고성이 터지자 연구관실에 있던 검사와 직원들이 일제히 돌아보아 서 검사는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피의자신문조서 확인하겠습니다.”

전 검사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피의자신문조서를 확인하고 서명한 뒤 서 검사가 문을 나가자 근처에 앉아 지켜보던 최진우 검사가 슬그머니 일어나 전 검사에게 다가왔다.

“우와~ 전 검사님도 어지간하시네요. 아무리 평소 재수가 없었다 해도 완전히 무너져서 울고 있는 사람을 가차 없이 놀리시다니. 진짜 잔인하세요.”

전 검사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마녀는 결코 복수를 잊지 않거든요.”

전 검사는 그렇게 대꾸하며 스칼렛 위치의 손동작을 해 보인다. 최 검사는 그 모습을 보고 쿡쿡 웃었다가 홍 검사의 눈총을 받고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