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전면전 선포
와인 바에서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일행은 대로를 향해 걸었다.
원 부장과 안 검사는 얘기를 나누며 앞장서 걷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격앙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태산은 최 검사와 함께 축 처진 전 검사의 팔을 둘러메고 뒤를 따라갔다. 나름대로는 돕는다고 전 검사의 한쪽 팔을 떠멨지만 최 검사의 발걸음도 술에 취해 비척비척 갈지자라 혼자 떠메는 것만 못했다.
두 사람을 줄줄이 매달고 걷는 것만 같아 성가시기 짝이 없는 데다 영 속도도 나지 않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가는 원 부장과 안 검사를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내가 업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태산의 말에도 최 검사는 눈치 없이 고집했다.
“아니에요. 저도 도울게요. 저 완전 멀쩡합니다?”
점점 더 취기가 오르는 듯 반쯤 꼬인 혀로 고집하는 최 검사를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걷자니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던 전 검사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더니 우엑 하고 거하게 태산의 오른쪽 구두에 토사물을 게워냈다.
“으악! 괜찮으세요, 과장님?”
최 검사가 호들갑을 떨면서 비틀거리는 바람에 전 검사가 태산의 왼쪽 구두에까지 토사물을 마저 게워냈다. 그러고는 후련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광경을 본 최 검사가 속이 울렁거리는 듯 거북한 얼굴을 했다
“야, 최진우! 이 악물어라! 너까지 여기서 토하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웁! …예, 옙!”
태산의 다급한 외침에 최 검사가 거의 올라온 구토를 어금니를 꽉 물고 참아낸다.
태산은 푹 하니 한숨을 내쉬었다. 강 검사의 패션아이템 중 가장 마음에 든 수제 구두라 아끼고 아끼다가 대검 첫 출근에 신고 나온 것인데 하필 첫날부터 험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와인 동호회에서 오프 모임을 하면 우아하게 나가서 다들 개가 되어 돌아온다더니 과연 과실주의 위력이었다. 예전의 태산이었다면 뒤끝이 안 좋아 쳐다보지도 않았을 술이건만.
태산은 목소리를 높여 앞서가는 원 부장에게 말했다.
“부장님, 다음부터 와인 바에서 회식은 사양입니다!”
원 부장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안 검사와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안 검사는 공연보다는 영화파라 이거죠?”
“예. 장르 자체도 더 좋아하지만 공연은 아무래도 비용 부담이 크잖아요. 게다가 영화는 언제든 볼 수 있지만 공연은 시간도 마음먹고 빼야 하고요.”
“그렇긴 하지만 좋은 공연은 그만큼 시간과 돈 투자하는 보람이 있어요. 한번 맛 들이면 안 검사도 푹 빠질걸요. 그러고 보니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지젤 하고 있는데 그거 언제 나랑 보러 갈래요?”
“아, 그거 저도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공연이에요.”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웠던 두 사람이건만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았다고 어깨를 맞대고 대화에 푹 빠져 돌아보지도 않았다. 사이가 나쁜 듯 좋고, 죽이 안 맞는 듯 잘 맞는 동료들을 보며 태산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출근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태산은 최 검사를 마주쳤다. 아직도 숙취에 시달리는 듯 머리는 부스스하고 다크서클이 눈 아래 짙게 내려와 있었다. 어지간한 여검사들보다도 뽀얀 피부를 자랑하는 최 검사였건만 오늘만은 영 푸석한 얼굴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최 검사.”
태산은 그 꼴을 보고 쿡쿡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와인 숙취가 장난 아닌데요. 과장님은 왜 그렇게 멀쩡하세요?”
“나야 뭐 술이나 물이나 별 차이가 없으니까.”
“오오~~~”
태산은 사실을 말한 것이었지만 최 검사는 과장된 농담이라 생각한 듯 야유 같은 탄성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그때 불쑥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태산과 최 검사는 뒤를 돌아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전 검사가 유령 같은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뜨린 채 등 뒤에 서 있었다. 평소에도 부스스하던 머리는 봉두난발이었고 다크서클은 발끝까지 내려올 듯했다. 평소에는 조금 귀엽게 보였던 콧등의 주근깨가 창백한 얼굴에 어둡게 깔려 있으니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어쩐지 주근깨 수조차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태산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전 검사, 괜찮은 거예요?”
“괜찮습니다. 그냥 좀 숙취에 시달리는 것뿐이에요.”
전 검사는 큰 소리를 내면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조심조심 답했다.
최 검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전 검사님 오늘 분위기가 정말 말 그대로 감찰부 마녀 같네요.”
“마녀? 무슨 마녀요?”
“예? 기억 안 나세요?”
“죄송해요. 사실 저 어제 와인 바에 간 이후로 기억이 전혀 안 나서요.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과하게 마신 모양이에요. 제가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니죠?”
태산은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고급 슈트와 가장 아끼는 고가의 수제 구두를 걸레짝으로 만든 장본인이 그 사실을 전혀 기억도 못 하고 있다니 말이다.
최 검사가 태산에게 슬쩍 눈짓을 한다.
‘말할까요?’
태산은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전 검사를 향해 짐짓 엄하게 말했다.
“별일은 없었지만 앞으로 조심하세요. 험한 세상 아닙니까? 주량 넘게 마시다가 인사불성 되어서 돌아다니면 범죄 표적이 되기 딱 좋아요.”
태산의 충고에 전 검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조심할게요.”
고개를 숙인 전 검사가 물끄러미 무언가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무심히 묻는다.
“과장님, 오늘은 다른 구두 신고 오셨네요. 어제 신으셨던 구두 아주 근사하던…….”
전 검사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최 검사가 호들갑을 떨며 전 검사의 등을 떠밀었다.
“전 검사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저도 숙취 때문에 죽겠거든요. 별관 앞 자판기에 꿀물 팔던데 가서 한 병씩 사 마시고 와요.”
“예? 하지만 출근 늦으면 홍 검사님이 또 잔소리하실 텐데요.”
“지금 이 꼴로 들어가도 백 퍼 잔소리하실 거예요. 좀 사람 몰골이 되어서 들어가자고요.”
“어, 어… 그럴까요?”
최 검사는 전 검사를 재촉해 본관을 나가다가 태산을 돌아보고는 민망한 듯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름대로는 전 검사가 아무것도 모른 채 태산의 속을 긁는 것을 막아주려는 것일 테다. 아깝기는 해도 크게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건만.
태산은 피식 웃고는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1층에 내려 감찰3과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인사도 건네기 전에 김민하 실무관이 말했다.
“과장님, 출근하시는 대로 부장실로 오시랍니다.”
“예, 갑니다.”
태산은 집무실에 서류 가방을 던져놓은 후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며 중얼거렸다.
“그 양반 참 성미 급하기는.”
부장실로 들어서자 원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숙취에 시달리는 젊은 검사들과는 다르게 원 부장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바로는 젊은 검사들이 맛있다고 쏟아부을 때 노련하게 주량을 조절하는 것으로 보였다. 원래부터 주량이 센 편이기도 하겠지만 평소 와인을 즐기는 사람의 경험에서 발휘된 페이스 조절 솜씨 덕일 것이다.
“강 과장, 거기 앉아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업무 얘기 좀 하죠.”
아니나 다를까 원 부장은 태산에게 자리를 권하자마자 일 얘기부터 꺼냈다.
“어제 대충 업무 살펴본 결론이 좀 나왔나요? 어디부터 시작할 생각인가요?”
태산은 피식 웃고 말았다.
“번갯불에 콩 구워 드시겠습니다.”
원 부장이 멋쩍게 되물었다.
“내가 너무 서둘렀나요? 조금 더 업무 파악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부임 전부터 염두에 두던 건이 있었습니다.”
태산의 답에 원 부장은 즐거운 기색으로 빙긋 웃었다.
“역시 그럴 것 같더라고요. 어떤 건이죠?”
“대구지검에 있을 때 이종길 의원 비리 건을 제보했던 주요 증인이 있습니다. 대한건설 정진용 대표라고요.”
원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 수사의 발단이 되었던 인물이죠?”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진용은 이종길 사건 이전에 다른 건으로 수사를 받으며 대구지검장에게 진정서를 낸 바 있습니다. 대구지검 검사들이 정진용에게 장기간 스폰을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내용이었고요.”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까?”
“대구지검장은 정진용을 사기꾼 취급 했습니다만 이종길 사건에서도 밝혀졌듯이 저는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종길 비리사건이 워낙 컸고 관련자들도 많아 당시에는 그쪽 수사에 집중하는 데만도 인력이 모자랐습니다. 더구나 검사들이 관련된 사건이라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흠…….”
태산의 포부를 듣고도 원 부장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시원스럽게 태산의 의견을 묻던 것과 너무나 달라진 기세에 이번에는 태산이 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정진용의 증언이 진실하다고 했을 때 일어날 파장이 강 과장은 두렵지 않나요? 신빙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파장은 일파만파 더욱 커질 겁니다. 어디까지 일이 커질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대구지검 스폰 문제는 대구지검에서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검사는 2년마다 부임지가 바뀌며 전국의 지검을 돌고 돌아 같은 임지에 다시 돌아오곤 한다. 정진용은 장래에 더 승진해 돌아올 가능성을 생각해서라도 대구지검에 부임하는 검사들을 단 한 명도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구지검을 거쳐 간 검사들의 수는 하나둘이 아니며 지금은 전국의 검찰청에 퍼져 있다. 이들 중 고위직이 된 검사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대구지검 스폰 문제를 파헤치겠다는 것이 결국 전국의 검찰청을 바닥부터 뒤집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검찰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원 부장은 사태가 그렇게 확산될 것을 각오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싸울 각오를 하고 감찰부로 보내달라 한 겁니다. 기왕 싸울 거라면 검찰 조직 전체와 붙어보는 것도 재미있겠지요.”
원 부장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원하게 승인해 주었다.
“강 과장의 각오가 그렇다면 잘 알겠습니다. 한번 착수해 보세요.”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태산을 보고 원 부장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슬쩍 한마디를 던진다.
“그러니까 강 과장이 장관님께 감찰부로 보내달라 청했다는 거죠?”
태산은 아차 했다. 자신도 모르게 흘린 말을 원 부장은 못 들은 척 넘어가 주지 않았다.
“장관님께서 일 잘할 부하들 딸려 감찰부로 보낼 테니 열심히 해달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을 때는 영문을 몰랐는데 역시 강 과장의 포석이었나 보군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어디로든 감찰계통으로 보내준다면 검찰개혁에 힘써보겠다고 했을 뿐인데 옛 동료들까지 함께 대검 감찰부로 가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래요. 사실인지 겸손인지는 모르겠지만 믿어보겠습니다. 어쨌든 장관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한번 해보세요.”
원 부장이 장난스러운 어투로 놀리듯이 말해 태산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농담으로 받아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답해야 하는 건가.
태산은 곤란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그냥 단순하게 답하기로 했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 * *
“정진용 씨, 또 뵙는군요.”
취조실로 들어서던 정진용이 태산의 얼굴을 보고 멈칫한다. 잠시 당황하는 듯했던 정진용은 이내 별수 없다는 듯 표정을 풀더니 순순히 태산의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아직도 제 증언이 필요한 일이 남았습니까?”
정진용은 피로한 얼굴로 지긋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기 혐의는 벗었고 재산도 일부 되찾았으나 증뢰 및 배임증재 재판이 대구지법에 계류 중이었고, 틈틈이 이종길 의원의 재판에도 증인으로 불려 다녀야 했다. 그 와중에 서울까지 끌려와서 또다시 태산 앞에 앉았으니 피곤한 마음이 절로 들 법했다.
“바쁘신 와중에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발로 온 게 아니라 끌려왔다고요.”
정진용의 말에 태산이 송봉근 계장을 돌아보았다.
“임의동행 맞습니다. 절차대로 용건 밝히고 동의 얻어서 연행했습니다.”
송 계장의 답에 정진용이 당장 반발했다.
“아니, 그럼 재판까지 걸려 있는 피고인 신분에 수사관이 대검까지 동행하자는데 안 가고 버틸 강심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에는 또 뭔가 하고 심장이 덜컹했네요.”
데려온 절차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한 태산은 더 이상 정진용의 투덜거림에는 신경 쓰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습니다. 이 문서 기억합니까?”
태산이 정진용 앞에 자필로 쓰인 복사 문서 한 부를 밀어놓았다. 정진용은 문서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정진용 씨가 대구지검에 제출한 진정서 사본인데요.”
“이, 이건 왜…….”
“이종길 의원 사건 조사받을 때에도 장기간 대구지검의 스폰서 역할을 했었다고 진술했지요? 이 진정서상에는 그 내역을 기록한 문건이 있다고 썼는데요. 뇌물 장부를 소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까?”
정진용은 초조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더듬더듬 답했다.
“그, 그건 그냥 홧김에 쓴 것이고. 장부 같은 거 없습니다.”
태산은 정진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진용은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피한다.
하기야 정진용으로서는 지금 와서 괜히 입을 열어 자신의 죄책을 더 늘릴 이유가 없긴 할 것이다. 받아먹고 입 닦은 검사들이 괘씸하긴 해도 잘못 건드렸다가 자칫 자신만 더 무겁게 처벌받고 검사들은 쏙 빠져나가 버릴 수도 있었다.
정진용의 입을 열게 하려면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동시에 구미를 당길 달콤한 미끼를 던져주어야 한다.
“정진용 씨, 여기가 어딘지는 잘 알고 계시죠?”
“대, 대검 감찰부 아닙니까?”
정진용은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가 알 수 없어 눈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감찰부는 검사의 비리를 조사하는 곳이죠. 제 목표는 증거를 확보해 스폰받은 검사들을 기소하거나 징계하는 것이지 정진용 씨를 추가로 더 처벌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제야 정진용이 슬그머니 눈을 맞춘다.
“이종길 의원 건과 관련해서도 정진용 씨가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점을 고려해 구속하지 않고 댁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렸지 않습니까?”
정진용은 침통하게 입을 꾸욱 다물었다. 불구속기소 해준 것은 확실히 배려를 받은 부분이긴 하지만 내심 구형에 있어서도 좀 더 배려를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재판 중인 사건들 실형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예상하고 계시죠?”
정진용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검사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새삼 절망적으로 들렸다.
“기왕 수감될 것이라면 좀 더 편한 곳에서 수형 생활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판결 확정되는 대로 여주 교도소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조사받는 기간 동안에는 여주 교도소에서 왔다 갔다 하기 힘드실 테니 서울구치소에 머무르셔도 되고요.”
여주 교도소는 수도권 교정 기관들 중에서도 가장 시설이 좋기로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서울구치소는 대검찰청에서 구속수사를 받는 거물급들이 수감되는 곳이다.
태산은 증언을 해주는 대신 정진용에게 수감 기간 동안 편의를 봐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조사받는 게 그렇게 힘든 일만은 아닐 겁니다. 아무래도 수감실에 계속 갇혀 있는 것보다야 조사실에서 조사받는다는 핑계로 사식도 시켜 먹고 편하게 쉬다가 들어가시는 편이 좋지요. 고생스럽게 노역을 안 해도 되고요.”
이어지는 말은 더욱 노골적인 편의 제공을 약속하고 있었다. 정진용은 솔깃한 기색이었으나 선뜻 답하지는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태산은 정진용의 등을 조금 더 밀어주려 한다. 때로는 이성적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것보다 분노가 더욱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진정서를 낼 당시의 기분을 떠올려 보세요. 당연하다는 듯 넙죽넙죽 잘 받아먹던 놈들이 정진용 씨가 어려운 사정에 빠지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목이 뻣뻣해지지 않던가요? 정진용 씨는 홀로 이렇게 고초를 치르고 있는데 받아먹은 놈들은 입 딱 씻고 호의호식하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 협조만 해주신다면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겠습니다. 받은 놈들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정진용의 눈빛에서 불길이 확 지펴지는 것을 확인하고 태산은 슬그머니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제 뇌물 장부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납니까?”
정진용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장부는… 없습니다.”
태산의 미간이 움찔했다. 구슬리는 방법은 안 통하려나 생각하는데 정진용이 말을 잇는다.
“장부를 따로 쓴 것은 아니었고 검사님들 접대하고 돌아올 때마다 생각나는 대로 접대 내역을 기록해 둔 자필 메모가 있습니다. 혹시나 몰라서 버리지 않고 모아뒀습니다.”
‘역시!’
태산은 내심 쾌재를 불렀지만 태연하게 물었다.
“지금 그 메모들 어디에 있습니까?”
“제 집 비밀 금고에 있습니다.”
태산이 송 계장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계장님, 힘드시겠지만 지금 바로 정진용 씨와 대구로 내려가서 증거 확보해 주세요. 필요한 인원은 안소영 연구관실에서 지원받으시고요.”
“예, 다녀오겠습니다.”
방금 대구까지 내려가 정진용을 연행해 온 송 계장이었지만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송 계장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메모를 확보해 대검으로 돌아왔다. 박스에 가득 든 메모지의 종류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했다. 노트 찢은 것, 포스트잇, 다이어리 내지, 냅킨, 영수증, 공과금 봉투, 약봉지, 명함, 광고지 등등.
처음부터 보험의 용도로 치밀하게 기록한 것 같지는 않았다. 메모가 너무 중구난방이었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메모가 습관화된 사람이 본능적으로 기록을 남긴 느낌이다.
게다가 정리해 보관한 것도 아니고 연도별로만 대강 뭉쳐두었다. 후에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가지고 있었다기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것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태산은 오히려 정리된 장부보다 이 쓰레기 더미 같은 메모에 더 신뢰가 갔다. 메모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결코 꾸며내어 쓸 수 없는 생활감과 디테일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감찰3과는 곧바로 정진용의 메모를 문서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중구난방으로 흘려쓴 자필 메모를 텍스트로 옮겨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메모 중에는 날짜가 누락된 것도 있었고 표기가 불분명한 부분도 많았다.
송봉근 계장이 날짜순으로 분류한 메모를 김민하 계장이 텍스트로 옮기고 그것을 안소영 검사가 원본과 일일이 대조해 내용을 확인해 가며 문서로 최종 정리 했다.
“흠결된 부분이 많습니다만 일단 전달받은 메모는 전부 정리했습니다.”
태산은 안 검사가 건넨 문서를 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는 날짜순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날짜가 누락된 메모는 각 연도 마지막 장에 한꺼번에 모아두었다. 흠결이 있거나 오류가 있는 부분, 불분명한 부분에는 따로 주석을 달았다.
짧은 시간 동안 방대한 메모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도록 깔끔하게 정리해 준 안 검사의 실력과 성실함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훌륭하군요.”
태산은 만족스럽게 문서를 덮으며 말했다. 하지만 안 검사는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과장님, 정리하면서 보니 메모의 많은 부분이 상당히 오래전 것이라서요. 시효 문제도 있고 시효가 끝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재는 증명하기 힘든 건이 많을 텐데요.”
“그렇겠죠.”
태산이 턱을 문지르며 답했다.
“시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건부터 타고 올라갑시다. 옛날 건은 좀 묻히더라도 확실한 것부터 잡으려면 그 수밖에 없죠.”
태산은 가장 최근에 정진용이 대구지검 검사들을 접대한 내역을 들춰보다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안 검사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둘러대는 태산의 입가에는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어 안 검사는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안 검사는 태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문서 내용을 슬쩍 훔쳐보았다.
[4/13 제2차장 송준원, 공공수사부장 진용득, 강력부장 이영현, 평검사 서동욱
식사 율희횟집 100
술 달리 120
룸살롱 캐슬 300 + 2차(200)]
내용을 정리하면서도 생각한 것이지만 가장 최근 일자 메모에 몇 번 이름이 오르내린 서동욱이라는 검사와 이름이 같은 사람을 알고 있는데 설마 동일인일까? 인천지검에 있을 때의 재수 없던 행동거지로 미루어 보면 그럴 만하다 싶기도 한데…….
태산이 바로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안 검사의 상념은 깨어졌다.
“안 검사는 내일 바로 수사관 대동하고 대구로 내려가세요. 그리고 여기 메모에 언급된 가게 사장이랑 룸살롱 마담 만나보고 진술받아 오세요. 룸살롱에서 2차 나갔다는 종업원이 누군지 확인하고 그쪽 진술도 받아 오면 더 좋고요.”
“네.”
“참, 그리고 내려간 김에 당시 대한건설 경리과 직원이었던 김영선 씨도 만나보고 와요. 정진용 말로는 로비용 계좌가 따로 있어서 검사들 만날 때마다 김 씨한테 현금 인출해서 봉투에 넣어 오라고 지시했다는데 사실 확인하고 입출금 내역 확보하면 메모 내용을 상당 부분 입증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평소의 행동력을 생각하면 과장이 직접 대구까지 달려 내려갔을 테지만 이번은 자신에게 지시하는 이유를 안 검사는 짐작할 수 있었다. 대구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 중 대다수가 여성이었고 성매매를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야 할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여성 검사가 접촉하는 편이 가드를 낮출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며칠 걸릴 수도 있겠네요. 수고해 줘요.”
“네, 계속 보고드리겠습니다.”
안 검사가 연구관실로 물러간 후 태산은 안 검사에게 받은 문서를 가지고 나와 송봉근 계장과 김민하 실무관에게 지시했다.
“두 분은 지금부터 법조인명부 뒤져서 여기 언급된 검사들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보세요. 실존 인물이 맞는지, 실존 인물이라면 현재 어디 소속인지 조사해서 최대한 빨리 보고해 주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태산은 지시를 내린 후 뒤돌아 집무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문득 생각난 듯 돌아서서 덧붙였다.
“아, 작년까지 대구지검 공공수사부에 있었던 서동욱 검사를 제일 먼저 찾아주세요. 그리고 바로 소환 날짜 잡아주시고요.”
태산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빙긋 웃었다.
누구보다 출세욕 높으면서도 누구보다 열등감에 절어 있었으며 누구보다 겁이 많던 서동욱이었다. 서동욱은 대구지검 부패 카르텔에 가장 최근 가담한 가장 약한 고리일 것이다. 거기서부터 부수고 들어가야겠다고 태산은 다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서동욱은 자신의 실루엣만 봐도 오금 저려 하던 놈 아닌가.
* * *
“여기가 검찰청이랑 가깝다 보니까 검사님들이 자주 오시긴 합니다. 정진용 대표님도 우리 단골이고요. 검사님들과 같이 자리하는 것도 몇 번 본 것 같긴 한데… 그렇긴 해도 언제 누가 계산했는지까지 어떻게 다 기억합니까?”
“정진용 씨 말로는 검사들 접대하는 자리마다 정진용 씨가 직접 전화해서 자리를 예약했다던데요.”
“그건 모르겠네요. 직원이 받았겠죠.”
“그럼 예약 전화 받은 직원분 좀 불러주세요.”
“지금은 없죠. 카운터 보는 애들이야 자주 바뀌니까.”
율희횟집의 사장이 카운터에 선 채 삐딱하게 답했다.
안 검사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메모에 표시된 음식점과 술집 사장들의 태도는 모두 한결같았다. 안 검사가 신분을 밝히자마자 경계의 빛을 띠며 모든 질문에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는 등 비협조적으로 답하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 장사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현직 검사들의 비리를 증언했다가 사업에 타격을 입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진술이 쉽게는 나올 것 같지 않아 안 검사는 일단 물러나기로 한다.
“혹시 생각나는 게 있으시면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안 검사는 사장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고 가게를 나왔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대구에 머무는 시간이 꽤 길어질 것 같다.
“검사님!”
그때 대구까지 동행한 김승택 주임이 안 검사에게로 달려왔다. 얼마 전 폐업했다는 룸살롱 캐슬의 마담을 찾아보라고 탐문을 시킨 참이었다. 달려오는 표정이 밝은 것을 봐서는 뭔가 소득이 있는 모양이다.
“찾았습니다! 근처 룸살롱 업주들에게 수소문해 봤더니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있더군요. 지금은 그만뒀다는데 캐슬뿐만 아니라 다른 룸살롱에도 아가씨들을 댔던 모양입니다.”
안 검사가 반색하며 물었다.
“연락은 되던가요?”
“예. 용건을 얘기했더니 집으로 찾아오라고 하더군요. 주소 받아뒀습니다.”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협조적인 반응이었다. 어쩐 일인가 싶어 안 검사는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나 변덕을 부리기 전에 빨리 찾아가서 진술을 받아야 한다.
“바로 갑시다.”
수사관이 받아둔 주소는 주택가 도로변의 4층짜리 신축 빌라였다. 맨 아래층에는 카페가 있고 2층은 병원, 그 위는 살림집이다. 안 검사는 수사관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벨을 누르니 잠시 뒤 문이 빼꼼히 열린다. 안전 고리가 걸려 있는 문 안에서 중년 여자가 내다보았다. 등 뒤로는 소형견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여자가 이마를 찌푸리더니 등 뒤를 돌아보며 주의를 준다.
“초코! 조용히 해!”
그러고는 다시 문틈으로 물끄러미 내다보며 무슨 용건인지 눈으로 물었다.
“대검 감찰부 안소영 연구관입니다. 아까 여기 수사관님이 연락드렸는데요.”
안 검사가 신분증을 내보인 후 곁에 있는 수사관을 가리키자 여자가 그제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만요.”
여자는 문을 다시 닫고 안전 고리를 푼 뒤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여자는 낑낑거리면서 달려 나온 갈색 요크셔테리어를 품에 안고 앞장서 거실로 향했다.
“앉으세요. 커피라도 하실래요?”
“괜찮습니다.”
안 검사는 마음이 급해 소파에 앉으며 단답 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룸살롱 캐슬에서 마담으로 계셨던 천시연 씨 맞으시죠? 대한건설 정진용 대표의 검사 접대 건 조사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네, 수사관님께 대강은 들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성심껏 말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안 검사는 서류 가방에서 접대 내역을 정리한 문서를 꺼내 천시연에게 건넸다.
“최근 접대 내역 중에서 기억나시는 게 있으십니까?”
천시연은 강아지를 내려놓고 서류를 넘겨보았다.
“글쎄요. 분명하게는 기억이 안 나네요.”
흔쾌히 협조할 것처럼 말해놓고 결국 이 사람도 발을 뺄 셈인가 생각하며 안 검사는 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천시연의 입에서는 안 검사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 이어졌다.
“정 대표님이 한창 잘나갈 때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꼭 접대를 했으니까요.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죠. 최근에는 건설 쪽 경기도, 룸살롱 경기도 영 시원치 않아서 빈도가 확 줄긴 했었지만…….”
접대 건이 너무 많아 다 기억하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천시연은 꽤 의욕적으로 문서를 들여다보며 기억을 복기했다.
“아, 이 사람 왔었던 건 확실히 기억나네요!”
천시연의 손가락 끝에는 ‘평검사 서동욱’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다.
“높으신 분들 올 때 꼭 따라붙는 평검사인데 처음에는 인물이 좋아서 우리 아가씨들이 꽤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말도 마요. 어찌나 드럽게 노는지 아가씨들이 나중에는 질색을 해서 그 방에 들여보내려면 돈을 좀 더 쥐여줘야 했다고.”
천시연이 쯧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가. 검사니 의사니 이런 점잖은 양반들이 룸에서는 어쩜 그렇게 개같이 노는지.”
“메모에 보면 이날 2차도 나간 걸로 되어 있는데요.”
2차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천시연이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문다. 협조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종업원에게 성매매를 시켰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안 검사는 차마 내키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걱정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저희는 검사의 비위 사실을 조사하려는 것이지 성매매 단속을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후에 문제 삼지 않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그제야 천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2차 나갔을 거예요. 서 검사가 2차 거르는 일은 없으니까.”
“전원이 다 갔나요?”
“여기 적힌 금액을 보면 다섯이 다 가지는 않았을 텐데…….”
천시연이 문서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문서에 접대받았다고 기록된 인원은 넷, 접대한 정진용까지 모두 다섯이다. 2차 금액은 200이라고 적혀 있었다.
“누가 2차를 나갔는지는 기억나십니까?”
안 검사가 다시 묻자 천시연은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정 대표님이 마지막으로 접대했던 날이죠? 서 검사는 확실히 나갔던 것 같고… 공안부장이던가… 아, 여기 써 있는 공공수사부장! 이 사람도 되게 밝히는 사람이라 아마 나갔을 거예요. 형사부장은 갔던가 안 갔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날 차장 검사님이 컨디션이 별로라고 안 내킨다 해서 2차 간 사람들 올 때까지 정 대표랑 룸에서 같이 술을 마셨거든요. 거기 있었던 것도 같아요.”
“2차를 갔다가 돌아온다고요?”
“네, 룸살롱이 있는 건물 위층에 사장이 운영하는 호텔도 있었거든요. 엘리베이터 타고 바로 2차 직행하는 거죠. 편하고 얼굴도 안 팔린다고 검사들이 되게 좋아했어요.”
안 검사는 내심 경악했다. 성매매를 하고 다시 모여 또 술을 마시고 논다는 말인가. 카르텔을 형성해 함께 뒹굴고 노는 놈들은 서로 치부를 보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 모양이다.
천시연은 문서를 보며 떠오르는 대로 성의껏 진술했다. 조사를 위해 만나본 그 어떤 사람보다도 협조적이었다.
“검사들 접대했던 종업원들도 만나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 방에 누가 들어갔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고… 연락이 되더라도 얘기를 잘 안 하려고 할 텐데…….”
“한번 알아봐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연락은 한번 해볼게요.”
천시연이 선선히 답해 안 검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긴 시간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식으로 진술서 받기 위해서 대검에서 조만간 출석 요청이 갈 겁니다. 재판 들어가면 증언을 요청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기왕 돕겠다고 결심한 건데.”
안 검사는 그렇게 답하며 함께 일어나는 천시연을 찬찬히 바라본다. 천시연이 어리둥절해 묻는다.
“왜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니요. 이렇게 선뜻 협조해 주시는 분은 드물어서요.”
천시연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겠죠. 지금 장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망할까 봐 무서워서 현직 검사들 고발 못 할 거예요. 하지만 어차피 룸살롱 사업은 이제 사양길이니까요.”
그렇게 답한 천시연이 뜬금없이 자신의 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잘나가던 캐슬도 성매매 단속이며 세무조사 때문에 예전 같지가 않아서 사장님이 바로 사업 정리했잖아요. 나도 그동안 사짜 직업 가진 양반들한테 장모님이라고 불리면서 벌 만큼 벌었고. 이제는 건물 하나 사서 임대수익으로 그냥저냥 먹고살 정도 되니까 이쯤에서 은퇴한 거예요. 대딸이니 오피니 그런 데는 아직 돈이 좀 된다고는 하던데… 이젠 양지로 가야지 차마 더 음지로 들어갈 수는 없더라고요.”
천시연은 발끝에 달라붙는 강아지를 안아 올려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더럽게 벌어먹고 살았던 거 조금이라도 만회한다는 마음에서 나선 거예요. 진용이 오빠 지금 사정이 영 딱한 것 같던데… 내가 한때 그 오빠 덕으로 많이 벌었으니까 의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고…….”
천시연은 정진용을 오빠라는 호칭으로 살갑게 불렀다. 한때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이긴 한 모양이었다.
“잘 결심하셨습니다. 종업원과 연락 닿으면 다시 연락 주세요.”
안 검사는 명함을 건네고 천시연의 집에서 나왔다. 건물을 나오니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안 검사가 수사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김 주임님, 아무래도 대구에서 며칠 머물러야겠는데요. 숙소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 그러시죠.”
수사관이 방금 나왔던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그 더럽게 번 돈으로 산 건물이겠죠?”
안 검사는 대답 대신 건물을 힐끗 바라보았다.
“제 월급 평생 모아도 이런 건물 한 채 살 수 있을까요?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지네요.”
김 주임의 말은 딱히 심각한 뉘앙스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쯤 농담 섞어 하는 넋두리 같았다.
그렇다 해도 자신은 타지까지 외근을 나와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일하고 있는데 불법적인 수단으로 쉽게 큰돈을 번 사람을 보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안 검사는 농담처럼 흘린 김 주임의 말에 진지하게 답했다.
“대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계시잖아요. 조금 더 자긍심을 가지셔도 괜찮아요.”
안 검사의 말에 김 주임이 얼굴을 붉혔다.
“아,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안 검사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수사차량에 올라탔다.
안 검사는 인근 모텔에 숙소를 잡고 정진용이 접대에 이용했던 업소들을 샅샅이 찾았다. 최근에 이용된 업소의 사장들은 영업에 방해될까 말하기를 꺼렸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폐업한 업소들이 많아 업주와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하지만 조사할수록 정진용 메모의 신빙성은 높아졌다.
정진용 메모에 등장한 업소들은 모두 실존했던 가게였고 폐업한 업소들도 영업 기간은 들어맞았다. 상세한 진술을 꺼리는 사장들조차도 검사들과 정진용이 자주 찾아왔으며 종종 자리를 함께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시인했던 것이다.
며칠간 고군분투하며 메모 내용의 디테일을 확인해 나가고 있을 때 천시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검사님, 그때 그 방 들어갔던 애를 찾았어요. 서 검사랑 2차도 나갔다고 하네요.
* * *
“천시연 씨에게 말씀 들으셨겠지만 저희는 검사들의 비리를 조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매매에 대해 사후에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아는 그대로 진술해 주시면 됩니다.”
천시연의 자택을 다시 방문한 안소영 검사는 천시연의 옆에서 불안하게 눈치를 살피고 있는 여성을 안심시킨 후 질문을 시작했다.
“민유리 씨라고 하셨죠? 검사들을 자주 접대하셨나요?”
“네, 예전에는 거의 매달 한 번씩은 왔고요. 조금씩 뜸해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발이 끊겼어요.”
“혹시 자주 오던 검사 중에 기억나는 사람 있습니까?”
“1, 2년마다 계속 바뀌니까 다 기억은 못 하죠. 높으신 분들이나 좀 별나게 노는 검사들은 기억나요.”
“사진 보면 알 수 있겠어요?”
“시간이 지나서 자신은 없는데… 요 몇 년 새 자주 왔던 분들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안 검사는 준비해 온 사진을 민유리 앞에 펼쳐놓았다.
“여기서 기억나는 얼굴 있습니까?”
가장 최근의 메모에 기록된 검사들의 사진이었다. 민유리가 대번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분들 최근까지 대구지검에 있었던 검사들이죠? 여기 서 검사가 절 자주 지명했던 사람이고요. 이 사람, 이 사람은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부장이라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여기 이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었어요. 차장. 보통 직장에서는 부장이 차장보다 높잖아요. 그래서 항상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민유리는 서동욱 검사와 진용득 부장, 이영현 부장, 송준원 차장을 정확히 가리키며 말했다.
“가장 최근에 접대하던 날 상황이 기억나시나요? 메모상으로는 2년 전 4월 13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날짜는 정확하게 몰라도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나죠.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더 추잡하게 노는 편이라 솔직히 검사 접대 자리는 별로 안 내켰거든요. 근데 대신 들어가면 조금 더 챙겨주니까 돈이 궁할 때는 별수 없이 들어가곤 했어요. 그날도 밀린 빚 갚고 이것저것 사고 하다 보니 잔고가 달랑달랑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갔어요. 게다가 하필 서 검사한테 지명당해서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민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다.
“서 검사가 무리한 요구를 많이 하는 편이라서요.”
안 검사도 덩달아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떤 요구를 하기에 저러는지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날 2차를 나갔던 사람이 누구누구인가요?”
“제가 서 검사랑 나갔고요. 그리고 부장 중에 한 사람 있는데, 전 부장인가 하는 밝히는 아저씨.”
“진 부장이야.”
천시연이 곁에서 정정해 준다.
“아, 맞아요. 진 부장이 정아랑 같이 나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룸에 남아 있었고요. 차장이 두통이 있다던가 뭐 그래서 안 한다고 하니까. 둘 빼고는 다 남았죠.”
천시연이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때 위층으로 2차 갔다가 내려와서 다시 룸으로 들어가지 않았어? 한 번만 하고…….”
“아, 뭐…….”
민유리가 곤란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안 검사가 민유리의 기색을 살핀 후 김승택 수사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임님, 잠시만…….”
안 검사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김 주임이 눈치를 채고 얼른 자리를 비켜준다.
“아, 예. 저는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김 주임이 현관을 나가자 안 검사가 민유리를 향해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안 검사의 배려에 민유리도 한결 마음을 놓고 선선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섹스는 한 번만 하고 얼른 내려왔어요. 서 검사가 같이 씻자면서 치근거렸는데 계속 같이 있으면 또 무리한 요구를 할 것 같아서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어요. 전에 참고 받아주다가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어서요. 룸에 다시 가봐야 한다고 둘러댔죠. 제가 내려온 다음에 진 부장이랑 정아가 같이 내려왔고 서 검사가 제일 나중에 내려왔어요. 그리고 술 마시면서 더 놀다가 그날은 조금 일찍 자리를 끝냈던 것 같아요.”
민유리는 문건을 살펴보며 자신이 접대를 들어갔던 날들은 기억나는 대로 진술해 주었다. 민유리의 진술로 정진용의 메모는 더욱 구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민유리와 천시연 두 사람이 함께 머리를 모으니 처음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디테일도 서로의 기억을 보완하며 점점 상세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기억에 차장보다 오히려 검사장이 더 자주 오지 않았어?”
“맞아요. 룸에서 얘기하는 것 들어봐도 검사장이 정 대표님이랑 더 친한 것 같더라고요. 부장 시절이 좋았다, 그때는 오입질하러 원정까지 갔다 뭐 그런 얘기도 하던데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여관식 지검장이 예전에 여기서 부장 생활 했었지? 그때도 캐슬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기대치 않았던 검사장의 과거 비리 증거까지 잡고 안 검사는 후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진술 감사드립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꽤 긴 시간 머리를 맞대고 얘기를 나누었는데도 막상 질러놓고 보니 민유리는 불안한 듯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이렇게 큰일을 벌여도?”
그제야 자신의 증언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검찰이 두 분 신변은 절대 보호 해드리겠습니다. 혹시 증언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영상이나 음성 녹화를 통하는 방법도 있고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하지만… 검사님도 같은 검찰인데…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이렇게 고발해 봐야 슬그머니 덮고 끝나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 사람들과 같은 동료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저는 검사고 그 사람들은 범죄자죠.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안 검사는 분노를 담아 냉랭하게 답했다. 부정부패를 거부하는 진심 어린 정의감이 느껴져 민유리는 조금 안도했다. 척 보기에도 깐깐해 보이는 이 여검사라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진술을 듣고 천시연의 집을 나오는데 김 주임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을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밥이라도 먹으러 간 걸까 생각하며 전화를 걸려는데 1층 카페에서 김 주임이 뛰어나오며 안 검사를 불렀다.
“검사님! 끝나셨습니까?”
“네. 카페에 계셨어요?”
김 주임이 빙그레 웃는다.
“예. 검사님이 만나보셔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김 주임이 카페 안으로 앞장섰다. 카페 구석 자리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성이 김 주임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다. 김 주임이 안 검사를 향해 속삭였다.
“대한건설 경리과 근무하던 김영선 씨입니다. 검사님 진술받고 계실 때 연락이 닿아서 여기로 불렀습니다.”
안 검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영선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대검 감찰부 안소영 검사입니다. 앉아서 말씀 나누시죠.”
김영선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대한건설 전 대표 정진용 씨의 검찰 스폰서 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정진용 씨 말로는 검사들에게 전달할 돈 봉투를 김영선 씨께서 직접 만들었다고 하시던데요.”
“네, 정기적으로 돈 인출해서 가지고 나가셨어요.”
“검사들에게 전달한다고 하면서요?”
“네. 접대 후 집에 갈 때 택시비로 하나씩 넣어준다고 하더라고요.”
“금액이 얼마 정도였나요?”
“봉투 개수는 그날그날 달랐지만 봉투 하나에 들어가는 금액은 비슷했죠. 5만 원권 나오기 전에는 30만 원이 한계였지만 5만 원권 나온 후로는 봉투 하나에 10장, 기본 50만 원씩 넣었어요.”
택시비라기엔 많지만 떡값이라고 하기엔 그리 많지도 않은 돈이었다. 금액의 다소가 문제가 아니라 평소 꾸준히 챙겨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정진용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접대와 용돈 정도에 그렇게 쉽게 영혼을 판 검사들을 안 검사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 * *
그 시각, 서동욱 검사는 대검찰청 취조실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대검 감찰부에서 조사할 것이 있으니 소환에 응해달라고 연락이 왔을 때 서 검사는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찔리는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강바른 검사가 대구지검에 부임해 왔을 때 서 검사는 불길한 예감에 잔뜩 몸을 사렸다. 하지만 다행히 이종길 의원 사건이 반부패수사부를 몽땅 가동해도 버거울 만큼 컸기 때문에 자신에게까지는 수사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그사이 서 검사는 수원지검 공공수사부에 부부장으로 승진해서 옮겨 갔다. 서 검사는 그것으로 강바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다. 강바른이 감찰부로 간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대검 감찰부에서 호출이라니. 설마 강바른이 결국 자신의 비리를 포착한 것일까?
서 검사는 애써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아직까지 무슨 일로 부른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른 사건에 참고인으로 부른 것일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자신의 혐의 때문이라 해도 취조는 강바른이 하지 않을 것이다. 강바른이 간 감찰3과는 부장급 이상의 비리를 수사하는 곳이고 자신은 아직 부부장급이니까.
“오랜만입니다, 서 검사님!”
취조실이 벌컥 열리며 들어오는 강바른의 얼굴을 보고 서 검사는 울상을 지으며 하늘도 무심하시지 생각했다.
강바른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괴롭혀 줄지 기대하는 것처럼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그 천진하도록 잔인한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두 쪽이 다리 사이로 바짝 오그라붙었다.
“오늘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구지검에 있을 때 대한건설 정진용 대표에게 접대받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누, 누가 그래? 내가 접대를 받았다고.”
강 검사의 표정이 금세 싸늘해진다.
“지금 서동욱 씨와 저는 피의자 대 검사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공적인 자리니 존대를 하세요.”
서 검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발뺌하면서도 순순히 존대를 하는 서 검사를 보며 강 검사는 빙긋 웃었다.
“접대를 한 정진용 씨 본인이 접대 내역을 기록한 메모를 증거로 제출했습니다. 그래도 부인하시겠습니까?”
“정진용이라면 대구지검에서 사기 사건 기소되었다고 진정서 내면서 검사들 협박한 사람 아닙니까? 사업하고 돈 좀 쓴다는 사람들 중에 그런 자의식과잉인 사람들 많아요. 자기가 무슨 거물쯤 된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자들인데 그런 인간들이 사업 망하면 살짝 미치더라고요. 그런 사람 말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나요?”
서 검사는 숫제 정진용을 정신병자 취급해 가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 미치광이가 고발한 덕분에 이종길 의원과 무수한 정치인, 공무원들이 골로 갔죠. 그러니 완전히 허황된 소리라고만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메모의 디테일로 보아 아주 신빙성이 있어 보이고요.”
강 검사가 문서를 넘겨보며 말했다.
“메모에 서 검사가 수차례 언급되었어요. 지금부터 찬찬히 한번 살펴봅시다. 제일 가까운 것이 2년 전 4월 13일이네요. 메모상으로는 진용득 공공수사부장, 이영현 강력부장, 송준원 제2차장과 함께 접대를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요. 사실입니까?”
“접대받은 적 없다니까요.”
“그럼 그날 무얼 했는지는 기억납니까?”
사실 서 검사는 그날의 일이 똑똑히 기억났다. 이후 정 대표의 사업이 기울고 배진만 반부패수사부장이 촉각을 세우고 있어 몸을 사리느라 그것이 정 대표에게 받은 마지막 접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날 룸살롱에서 진 부장과 2차를 나갔는데 지명했던 아가씨가 금방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화가 났던 것도 기억났다. 룸으로 돌아왔을 때 먼저 와 있던 진 부장이 어떻게 아가씨보다 늦게 내려오냐, 둘이 제대로 한 것은 맞냐며 낄낄거리고 놀려댔던 것까지. 모두 생생히 기억났다.
서 검사는 일순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부인했다.
“2년 전에 뭘 했는지 어떻게 다 기억합니까? 아무튼 저는 접대 안 받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날 뭘 했는지 생각날 때까지 천천히 얘기 나눠보죠.”
강 검사의 태연한 답에 서 검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어떻게든 이 압박감을 끝까지 버텨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