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61화 (61/78)

제3장 유종의 미

“아버지 병원비는 내가 계산해 뒀다.”

태산은 영상녹화실의 카메라가 돌아가기 전 박진성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툭 던져놓고 기록만 들여다보고 있어 박진성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예? 왜요?”

“니가 이뻐서 그런 게 아니라 니 아버지 처지가 딱해서 그런 거니까 사양할 것 없어. 나중에 아버지 가게 다시 찾고 여력이 되면 갚든가.”

그렇게 설명했음에도 박진성은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 협박했던 거 입막음하려는 건가요?”

박진성은 강 검사가 자신의 머리에 화염병 칵테일을 쏟아붓고 불을 붙이려 했던 것을 새삼 떠올렸다가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뭐? 내가 언제 널 협박했어?”

태산은 빙글빙글 웃으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태도라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무리 막장 검사라도 조폭도 아닌데 피의자한테 불 싸지른다고 협박하겠냐? 그 말을 누가 믿어? 심지어 화염병 만들어서 경찰한테 테러하려던 놈 말인데.”

강 검사가 자신에게 협박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현장에는 강 검사의 심복으로 보이던 건달 둘뿐이었고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게 한 후 구치감으로 보내졌다. 기름에 전 옷은 험악하게 생긴 덩치 큰 건달이 진즉에 처분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협박을 받았다 주장해도 먹히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한 짓일까.

“그, 그럼 뭔가요? 검찰에 유리하게 진술을 해달라는 건가요? 돈 받은 거 나중에 문제 되면요? 그러지 않아도 저는 다 털어놓을 셈으로…….”

박진성의 말에 태산이 미간을 모은다.

“까불지 마라. 니가 뭐 대단한 증인이라도 되는 줄 아냐? 당연히 다 털어놔야지. 진술 잘해달라고 돈 줄 생각도 없고 형 깎아줄 생각도 없어. 화염병 제조한 건 제대로 기소하고 구형도 세게 할 거다.”

태산의 말에 박진성은 기가 죽어 어깨를 움츠렸다.

“어차피 이종민과 윤찬열은 다 자백했어. 신풍회 두목도 잡혀 왔으니 자백받는 건 시간문제고. 보강증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긴 하지만 니 진술이 그놈들 처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을 거다. 형량을 조금 더 올려줄 수는 있겠지.”

태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런데 내가 뭐 하려고 돈 써서 니깟 놈 진술을 사겠냐? 진술은 니 쪼대로 하고. 아버지 병원비 대준 게 그렇게 불만이면 당장 무르든가.”

“아, 아닙니다!”

박진성은 얼른 대답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검사님.”

박진성은 숫제 코를 훌쩍인다.

태산은 대답 대신 매직미러 너머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거울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전윤지 검사에게 녹화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태산의 어투가 바로 달라진다.

“박진성 씨, 9월 12일 그랜드 팰리스 로비에서 점거 농성 가담 중 미리 제조한 화염병을 경찰에게 던지려 한 것이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왜 던지지 못했나요?”

“불을 붙이기 전에 시위대에게 저지당했습니다.”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던 농성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왜 화염병을 던지려고 했습니까?”

“경찰에게 피해를 입혀서 불법시위로 만들라고 시키는 바람에…….”

“그렇게 사주한 사람이 누구인가요?”

“경찰입니다. 수성경찰서 이종민 경사요.”

“이종민 경사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입니까?”

“인력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 사장과 친해서 종종 놀러 왔습니다.”

“회사 이름이 뭐죠?”

“대광인력입니다. 신풍회가 운영하는.”

“신풍회라면 폭력단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신풍회 두목과 이 경사가 친해 보였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류를 하던가요?”

“올 때마다 같이 식사나 술 마시러 나가서 사장님이 계산하고 이 경사한테 돈도 슬쩍 찔러주고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신풍회에서 운영하는 업소에 단속이 나오기 전에는 꼭 이 경사에게서 전화가 왔고요.”

“접대에 상납금까지 바치고 단속 정보를 제공받았다는 거군요. 구체적인 접대 장소 기억합니까?”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박진성은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묻는 대로 고분고분 진술했다. 게다가 의외로 구체적인 내용을 많이 알고 있었다.

진술이 끝나자 태산은 거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 검사, 지금 들은 접대 장소에 수사관들 보내서 사실 확인하고 증거 확보해 오라고 하세요.”

전 검사가 마이크를 켜고 대답했다.

“예, 부장님.”

증거는 차곡차곡 쌓여갔고 빠르게 기소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종길이 벌여놓은 부패가 워낙 광범위한 탓에 태산과 반부패수사부는 최대한 신속히 움직이고 있음에도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연일 야근에 시달리다가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차 안에서 전화벨이 울려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던 태산은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렇잖아도 신경 쓸 일이 많은데 몹시 성가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일단 전화는 받는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전화기에서 현영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삼촌, 뉴스 봤어. 언제 봐도 참 대~~단하시네, 우리 삼촌.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어투는 완전히 놀리는 톤이라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이번에는 이종길 의원이야? 용케 그 교활한 늙은 뱀을 엮어 넣었네. 시골 촌구석에 내려갔다기에 좀 조용해질까 했더니 거기서도 전국구로 활약하고 있잖아. 여기까지 시끌시끌하다고.

“대구가 촌구석이라니. 여기 광역시야.”

-슈퍼 카 매장 하나도 없는 데가 촌구석이지 그럼. 그래도 내려간 지 좀 됐다고 정이 붙었나 봐? 두둔하는 걸 보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용건 없으면 끊어. 나 피곤해.”

야근보다 사람 은근히 긁어대는 다 큰 조카의 얘기를 듣고 있는 편이 훨씬 피곤해서 태산은 얼른 통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어딘데?

“야근하다 택시 타고 들어가는 길이야.”

-택시를 왜 타? 니 차는 어디 두고?

“없어. 용의자 추적하다가 박살 냈거든.”

현영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액션영화 찍니? 바른이 너도 참. 한동안 줄곧 타고 다니더니 아쉽겠네. 꽤 아끼던 차인 것 같은데.

태산은 쩝 입맛을 다셨다. 바른이 몰고 다니던 아우디 슈퍼 카는 딱히 태산의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날렵해서 애들 차 같다고 생각했다. 젊고 잘생긴 데다 패션을 보면 유행에도 민감했던 듯한 강바른은 그쪽을 선호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젠 나이도 있고 취향이 바뀌었어. 이 기회에 바꾸려고.”

-생각해 둔 건 있어?

“아니.”

일에 치여서 차를 살 여유가 없었다. 그제야 태산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강바른이 되기 전에는 벤츠만 탔던 태산이다. 조직 보스의 권위를 세우기에는 그만한 차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좀 더 자유롭게 자신에게 맞는 차를 골라봐도 좋을 것 같다.

“중후하면서 힘도 좋은 SUV가 좋겠어.”

태산은 용의자의 SUV에 옆구리를 들이받혀 차가 옆으로 굴렀던 굴욕적인 경험을 떠올리며 말했다. 또다시 용의자를 추격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에도 힘에서 밀리지 않을 듬직한 덩치라면 좋겠다.

태산이 중얼거린 말을 듣고 현영이 묻는다.

-내가 한 대 사줄까?

“됐어. 현직 검사가 아무한테서나 차 못 받아. 그리고 지금은 수사가 너무 바빠서 차 사러 다닐 여유가 없어.”

-하긴 거긴 괜찮은 브랜드 매장도 별로 없고. 일 마무리되면 서울에 한번 올라와. 밥 먹고 강남 매장 돌아보자. 내가 골라줄게. 사는 건 니가 사.

현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뭐가 재미있는지 깔깔 웃었다.

* * *

태산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전윤지 검사가 그런 태산에게 난감한 얼굴로 설명했다.

“대구은행 김여선 차장 체포될 때 증거물로 압수한 백인데요. 배임수재죄의 재물은 이 경우 체크카드와 계좌 속 현금으로 봐야 할 테니 백에까지 압수 판결이 내려질 것 같지는 않아서요. 수사 끝나고 기소도 되었으니까 증거물은 소유자에게 돌려주어야 할 텐데 권리관계가 애매합니다. 백화점에서는 이미 결제가 되었으니 김여선 소유라고 봐야 할 텐데 그렇다 해도 범인에게 범죄수익으로 구입한 물건을 돌려줄 수는 없고요. 그렇다고 계좌주인 염민중에게 줄 수도 없고요. 관보에 공고를 누구 이름으로 내야 하나요?”

태산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놔두면 먼지만 쌓이다 폐기되겠죠?”

“예, 아깝지만… 상당히 고가인 것 같던데…….”

“그렇다면 뷰티테크 한선화 대표 이름으로 공고하세요.”

“아, 수사 도와주신 분 말씀입니까?”

“예, 버리느니 수사 협조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넘기는 것으로 하죠.”

“예, 알겠습니다.”

일종의 편법이라 반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 검사는 크게 개의치 않고 선선히 답했다. 아무래도 안소영 검사보다는 훨씬 융통성이 있는 타입인 듯했다.

전 검사가 나가고 난 후 태산은 선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님, 어쩐 일이야? 일 시켜먹을 때만 찾고 내내 연락도 없더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태산은 부러 퉁명스럽게 답했다.

“바빴어. 어디야?”

-나? 아직 대구지.

“왜 아직 안 올라가고 있어?”

-아~ 자기가 제안한 낚시 건으로 대구지사 설립 알아보고 있었잖아. 근데 사업성이 괜찮을 것 같아. 우리 회사가 지금 워낙 잘되고 있으니 정말로 지사를 하나 내도 되겠다 싶어서. 게다가 여기 여자들이 예쁘기로 유명하잖아. 원래 보수적인 동네일수록 여자들이 코르셋 꽉 조이거든. 외모 꾸미는 데 돈을 쏟아붓는단 말이야.

“뷰티 사업으로 여자 돈 쓸어 담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군.”

태산의 말에 선화는 깔깔 웃었다.

“아무튼 사업하는 건 좋은데 사기 치고 다닐 생각은 마. 당신이라고 봐주지 않을 거니까.”

-어휴, 봐줄 거라고 기대도 안 하네요. 니가 그럴 줄 알았다 하면서 옳다구나 처넣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내가 누누이 얘기했잖아. 수익성 높은 사업은 리스크도 큰 법이야. 결국 사기랑 한 끗 차이인 거지.

“개똥 경영 철학은 됐고.”

태산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린다.

“관보 잘 보고 있어. 당신 이름으로 압수물 환부 공고 나갈 거야.”

-그게 뭔데?

“증거물로 압수한 백이 하나 있는데 처리가 곤란해서 당신이 가져가라고.”

-아~ 그거 김여선이 샀다가 걸린 백이지?

“맞아.”

선화가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내가 가지라고? 에르메스 사주겠다더니 그걸로 입 닦게?

“싫으면 말든가.”

-하하하, 아니야. 어디 김 차장 백 취향이 어떤지 한번 볼까? 마음에 안 들면 팔고 다른 걸 사도 되니까. 고마워, 검사님.

선화와 통화를 끊은 후 다시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액정에 뜬 이름을 들여다보았다가 태산은 가슴이 툭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배진만 부장 사모님]

지금까지도 계속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배진만 부장이었다.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가 좋은 소식이라면 좋겠지만 혹여 나쁜 소식이라면. 끝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면.

태산은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사모님.”

전화기 너머로 중년 여성의 울음소리가 서럽게 넘어와 태산은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했다.

-강 검사님, 그이가…….

배 부장의 아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해 태산은 조바심이 이는 것을 애써 눌렀다.

-…그이가 깨어났어요.

태산의 눈이 번쩍 커진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태산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리나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어디 나가세요, 부장님?”

집무실에서 뛰어나오는 태산을 보며 윤지은 실무관이 물었다. 업무를 보고 있던 조규완 주임도 돌아본다.

“병원에요. 배 부장님이 깨어나셨답니다.”

“어머, 정말요?”

“진짠교?”

윤 실무관과 조 주임이 반색해 일어서며 물었지만 태산은 마음이 급해 일단 부장실 문을 열며 대충 답했다.

“다녀와서 말씀드릴게요.”

태산은 그 말을 남기고 바로 문을 뛰쳐나갔다. 검사실에 남은 윤 실무관과 조 주임이 서로 마주 보더니 두 손을 덥석 잡고 펄펄 뛰었다.

“잘됐네예. 잘됐어!”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이제 영 못 깨어나시나 하고…….”

감격해서 중얼거리던 윤 실무관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음마야, 와 이라노…….”

윤 실무관이 당황해 눈물을 훔치려다 말고 새초롬하게 말했다.

“저기… 손 좀 놔주이소.”

조 주임이 머쓱해 얼른 손을 놓고는 뒷머리를 긁었다.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미안합니더.”

“아니에요. 그보다 배 부장님 깨어나신 건 정말 기쁜 일인데… 괜찮으시겠죠? 정신은 온전하실지…….”

윤 실무관의 걱정 어린 말에 조 주임이 정색한다.

“좋은 날에 불길한 소리 마소. 강 부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소식 안 전해주시겠능교. 우리는 일이나 열심히 하입시더.”

이번에는 윤 실무관이 머쓱해 입을 다물었다. 조 주임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 앞에 앉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 주임 역시 영 일에 집중이 되지 않는 눈치였다.

태산은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배진만 부장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렸다. 병실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며 태산은 잠시 망설였다. 윤 실무관이 걱정했던 것과 같은 불안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의식만 깨어났을 뿐 그 의식이 예전과 같지 않다면, 행여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태산은 애써 불안을 억누르며 병실 문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옆으로 밀어 열었다.

문 여는 소리에 침대에서 배 부장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배 부장은 위쪽을 세워놓은 침대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빨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배 부장의 아내가 곁에서 물컵을 받쳐 들고 물을 먹이고 있는 중이었다.

의식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데 비해서는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내심 나쁜 상황까지도 대비하고 있었던 태산은 깜짝 놀라 멈칫했다.

배 부장은 파리한 안색으로 이쪽을 바라보더니 태산을 알아보고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빨대를 뱉어낸 후 입을 열었다.

“…강 부장…….”

간신히 쥐어짠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결기는 여전했다. 태산은 그제야 비로소 안도하여 표정을 풀고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배 부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자네가 애썼다면서? 수고 많았네.”

“만족하실 만큼 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일어나셔서 미흡한 점은 없는지 살펴주셔야죠.”

“자네도 참. 속에도 없는 겸손은. 얼마나 잘 처리했는지 봐달라 이건가?”

아직 소리를 크게 낼 수는 없었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배 부장의 목소리는 또렷해져 갔다. 정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고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회포를 나누는 사이 간호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배진만님, 혈압이랑 체온 좀 재실게요.”

그러고는 함께 있는 태산을 곁눈질하더니 바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담당 선생님이 안정하시라고 얘기하고 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일어나서 말씀하고 계세요? 자리에 누우시고요. 아직 면회 안 되는 거 알고 계시죠?”

배 부장의 아내가 민망해하며 답했다.

“의식 찾았다는 소식 제일 먼저 알려야 할 사람이라서… 바로 오겠다는 걸 차마 못 말렸어요.”

“잠시만 있다 가겠습니다.”

태산도 말을 보탰다. 간호사는 묵묵히 체온과 혈압을 재고 기록한 후 병실을 나갔다.

태산이 찾아오니 애써 힘을 끌어냈지만 아직까지는 체력에 무리가 되는지 배 부장은 침대에 누워 숨을 깊이 몰아쉬며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이 오래 있으면 더 무리하게 될 것 같아 태산은 얼른 얘기를 마무리하고 돌아가려 했다.

“회복하신 걸 뵀으니 됐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좋아 보이셔서 마음이 놓이네요. 부서 동료들도 기뻐할 겁니다. 나중에 면회 허락되면 다 함께 오겠습니다.”

배 부장은 태산을 그냥 보내기 아쉬운 듯 물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나랑 좀 일할 만하니 나보다 더한 강 부장이 부임해 와서 적응하기 힘들었을 텐데. 우리 검사실 식구들이 고생이 많았겠구먼. 천 계장이랑 윤 실무관에게도 안부 전해주게.”

태산은 흘낏 배 부장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배 부장 아내가 배 부장 모르게 슬쩍 고개를 젓는다. 태산의 활약은 얘기했어도 천 계장의 배신만은 차마 얘기하지 못했나 보다.

태산은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아직 회복도 덜 된 양반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닐까?

태산이 망설이는 눈치를 알아채고 배 부장이 물었다.

“왜 그러나? 무슨 일 있나?”

태산은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조금 늦으나 이르나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천 계장은 지금 검찰에 없습니다. 기소되어 재판받고 있습니다.”

“왜? 무슨 일로?”

배 부장이 당황해 되물었다.

“검찰의 수사 정보를 지속적으로 유출한 혐의입니다. 천 계장이 오랫동안 이종길 끄나풀 노릇을 해온 모양입니다.”

태산은 망설이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장님이 정진용의 전화를 받고 나간 것을 이종길 측에 알린 것도 바로 천 계장이었습니다.”

배 부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부에 적이 있을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배 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사람이 속물스러운 데가 있긴 했어도 성실한 편이었는데… 대체 왜? 역시 돈인가? 아니면 이종길과 무슨 의리라도 있었던 건가?”

“신념입니다.”

“이종길 지지자였나?”

“한누리성전 신도였습니다.”

배 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말에 교회 다닌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그냥 기독교도인 줄 알았지 사이비였을 줄은…….”

침통해하는 배 부장을 태산은 다독였다.

“어쩌면 이렇게 잡힌 것이 천 계장한테는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개과천선할 수 있는 기회일 테니까요. 아니었다면 계속 사이비종교에 인생을 저당 잡혀 있었겠지요.”

그제야 배 부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심란해하지 마시고 쉬세요. 그래야 얼른 동료들 다시 만나시죠. 전 검사도, 윤 실무관도, 조 주임도 모두 부장님 회복하시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산은 침대에 누운 배 부장의 손등을 도닥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세요. 곧 다시 오겠습니다.”

* * *

-부장님, 법무부장관실 호출입니다.

무심히 받아 든 수화기 너머로 윤지은 실무관이 전했다. 뜬금없는 법무부장관의 호출에 잠깐 당황해 멈칫했던 태산은 이윽고 대답했다.

“연결하세요.”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강바른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예, 안녕하십니까?”

법무부장관은 오랜만이라고 인사했지만 태산으로서는 과연 그런가 싶었다. 정부에서 일하지 않는 한 장관과 통화하는 일이 평생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독대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하는 통화였다. 이 정도면 일반인으로서는 장관과 꽤 자주 통화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활약상은 잘 보고 있습니다. 기대한 것 이상이네요. 덕분에 공고했던 지역의 부패 카르텔을 일소하게 되어 대통령님께서도 몹시 기뻐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치하하라고 하시더군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태산은 그렇게만 답했지만 내심으로는 대통령이 기뻐할 만도 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 대선후보로 강력히 거론되고 있던 정적 이종길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게다가 이종길은 저 하나만 낙마한 것이 아니었다. 대구 지역 기반의 부패정치인, 지역 유지, 관료들을 한 큐에 쓸어 보냈고 자유대한당의 이미지에도 먹칠을 하고 갔다.

부패정당 프레임이 굳어진 자유대한당은 이미지 쇄신을 위해 신당 창당이니 당명 개정이니 갑론을박 중이었다. 하지만 야권이 치명적인 타격을 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일은 좀 정리가 되어 갑니까?

“딱히 바쁘지 않은 시기가 없는 일입니다만 이종길 의원 건과 관련해서 물으신 거라면 거의 정리됐습니다. 관련 사건 대부분 기소가 끝났으니 앞으로는 기소유지에만 신경 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한번 내려갈까요? 만나서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무슨 용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법무부장관을 대구까지 행차하라고 하기에는 마음의 부담이 컸다.

“아닙니다. 제가 과천청사로 가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 갈 일도 있고요.”

태산은 현영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러면 장관실과 스케줄 잡도록 하세요.

태산은 다음 주말 서울로 출발했다. 주말을 서울에서 보내고 월요일에 청사를 들른 후 대구로 다시 내려갈 계획으로 월요일은 연차를 썼다. 주말도 없이 일한 지 실로 오랜만에 갖는 휴가였다.

대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김포공항에 내리니 게이트 밖에서 현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촌~~~!!!”

현영은 반갑게 팔을 벌리고 포옹이라도 할 듯 달려들었지만 태산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러 피한다.

눈에 띄는 외모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자각이 없는 건가? 전에는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타인의 눈에 띄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는데.

“뭐야? 왜 나왔어? 약속은 내일이잖아.”

“어차피 차도 없잖아. 오피스텔에는 어떻게 갈 생각이었어?”

“리무진 버스 타려고 했는데.”

“그걸 타느니 진짜 리무진을 타라고.”

현영은 태산을 국내선 청사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가 딸린 진짜 리무진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뭐야, 이 쓸데없이 눈에 띄는 차는?”

태산은 팔짱을 끼고 얼굴을 찌푸린 채 불만스럽게 차를 바라보았다. 현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할아버지가 보내신 거야. 금의환향하는 막내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우신지 환영식이라도 열어줄 작정이시더라고. 내가 이 정도로 타협시켰으니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두말 말고 타.”

현영은 숫제 태산의 등을 밀어 리무진에 태웠다. 두 사람이 차에 올라타자 자동차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현영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원래는 바로 오피스텔로 가려 했지만 이미 현영을 만났으니 내일 하루를 더 들여 다시 현영을 만나러 나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느긋하게 쉬고 싶었던 것이다.

“밥 먹고 차 보러 가자며?”

“오늘?”

“안 돼?”

현영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흔쾌히 답했다.

“아니, 괜찮아. 비서한테 스케줄 조정하라고 하지 뭐. 대신 시간 많이는 못 써.”

현영은 선심 쓰듯 말하고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후 스케줄 오늘로 당겨줘. 점심 예약도 바꾸고.”

* * *

태산은 현영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강남 일대의 외제 차 매장들을 돌아보았다. 어느 브랜드를 가도 쇼윈도만 훑어보고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현영은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대체 무슨 차를 고르려고 저러나 흥미진진하게 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담 사거리를 막 지났을 때 태산이 문득 한 매장 앞에서 눈을 빛낸다.

“저기 세워줘.”

차가 멈추자 태산은 그대로 내려 매장으로 다가갔다. 현영도 부랴부랴 따라 내리며 매장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벤틀리?”

슈퍼 카 마니아인 현영의 남동생이 격식 있는 자리에서 타기 위해 이 브랜드의 세단을 몇 대 가지고 있었다. 동생이 타기에는 영 노숙해 보였지만 클래식한 매력이 있는 차라고 생각했다.

“뭐 나쁘지 않네.”

태산은 쇼윈도 앞에 서서 차 한 대에 완전히 주의를 빼앗긴 채 서 있었다. 태산 곁으로 다가간 현영은 대놓고 이마를 찌푸리며 질색했다.

“윽, 뭐야? 이 촌스러운 차는? 니 취향엔 너무 투박한 거 아니니?”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세단도 아니고 거대한 덩치가 육중한 느낌을 주는 SUV였다.

“중후하잖아. 힘도 좋아 보이고.”

태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답했지만 현영은 고개를 갸웃한다.

“너 취향이 많이 변했나 보다. 하긴 SUV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취향이 변했다는 증거겠지만. 전에는 애 셋 있는 아재나 탈 차라고 쳐다보지도 않더니.”

태산은 생전에 만났던 건방진 애송이 강바른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제 내가 아재가 됐나 보지.”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 매장으로 들어가는 태산이다. 그러고는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차로 다가갔다. 변경수 대리라는 명찰을 단 직원이 다가와 응대한다.

“안목이 있으시네요. 세단의 중후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SUV의 편의성도 겸비하고 있고 특히 이 벤테이가 8기통 모델은 스포티한 매력까지 있죠. 8기통이지만 12기통에 비해 주행 성능은 전혀 떨어지지 않습니다. 시승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태산은 직원의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차 주위를 돌며 이곳저곳 꼼꼼히 살폈다.

“한번 앉아보시죠.”

직원이 차 문을 열어주어 태산은 운전석에 앉아보았다.

“실내는 더 좋죠. 천장까지 부드러운 가죽이 쫘악 깔린 것이 너무나 안락하지 않습니까? 주행할 때 승차감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쥔 태산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비쳤다.

“지금 시승해 볼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시승확인서부터 작성해 주시고요.”

태산은 직원이 가져온 시승확인서를 작성한 후 조수석에 직원을, 뒷자리에는 현영을 태우고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조수석에서 직원이 계속 차량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태산은 듣는 둥 마는 둥 미소를 띤 채 운전에 몰입해 있었다.

현영은 룸미러로 태산의 표정을 훔쳐보며 틀림없이 사겠구나 짐작한다.

시승을 끝내고 매장으로 들어와 차에서 내린 태산은 살 마음을 먹고 가격부터 확인했다.

“흠… 생긴 건 제네시스 비슷한데 가격은…….”

태산이 중얼거린 말에 직원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제네시스 GV80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비교를 합니까? 디자인은 조금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주행 성능과 정숙성은 넘사벽이죠.”

가격 때문에 망설이는 것으로 생각한 직원이 슬쩍 말을 보탠다.

“프로모션 들어가면 거기서 5백 정도는 더 빠집니다.”

태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가격은 상관없어요.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걸로 하겠습니다.”

직원이 반색하며 답했다.

“계약하시겠습니까? 그럼 계약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구입은 현금, 할부, 리스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현금으로 하겠습니다.”

직원이 후다닥 계약서를 들고 온다.

“출고까지는 짧게는 일주일에서 이 주일 정도 걸릴 거고요. 계약금 바로 결제하시고 차 인도받으실 때 잔금 결제하시면 됩니다.”

태산이 계약서를 휘갈겨 쓰며 말했다.

“서울에 길게 있지 않을 거라서 왔다 갔다 하기 불편한데 지금 전액 결제하고 바로 몰고 갈 수 없습니까? 전시 차라도 상관없는데요.”

“예?”

직원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평소 거의 없는 일이라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현영이 뒤에서 한마디 보탠다.

“이왕이면 세워놓은 차보다 깨끗한 새 차 타는 게 좋지 않아?”

“어차피 타고 다니면 더러워질 텐데. 그리고 월요일에 누굴 좀 만나러 가야 하는데 택시 타고 가긴 싫어서.”

“별일이다. 예전의 너 같으면 남들 손 탄 전시 차는 쳐다도 안 봤을 텐데.”

현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직원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명찰을 쓱 한번 보고는 말했다.

“변 대리님, 제가 서울에 거주하니 필요한 서류랑 절차는 저랑 처리하시죠. 일단 전시 차 내주세요.”

“그게…….”

망설이는 직원에게 현영이 명함을 꺼내 건넸다.

“여기 제 연락처요.”

반사적으로 명함을 받아 들여다본 직원의 눈이 커진다. 명함에는 ‘HS E&M 대표 조현영’이라고 찍혀 있었다. 재계에서 조현영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깜짝 놀란 직원이 깜짝 놀라 새삼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조현성 님이 저희 매장에 자주 들르시는데 누님은 처음 뵙네요.”

“아, 네. 현성이가 벌써 3대째 샀죠? 둘러보니 확실히 예쁘네요. 저도 언제 한 대 구입할까 봐요.”

실적을 올려주겠다는 말에 직원의 입이 벌쭉 벌어진다. 직원은 현영의 명함을 급히 챙겨 넣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현영이 명함을 받아 넣자 직원은 차를 살펴보고 있는 태산을 눈짓하며 현영에게 슬쩍 묻는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신지…….”

현영과 가까운 사이로 보이고 현금을 턱턱 쓰는 것으로 보아 이쪽도 거물급인 듯했다. 단골을 확보하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현영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게 왜 궁금하신 거죠?”

순간 직원이 당황해 얼른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무심코…….”

부자들이 돈 쓰는 사정에 대해서는 신경을 끊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패트런이 스폰 해주는 연예인을 데려와서 차를 사준다거나 불륜 상대나 혼외자를 위해 차를 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돌발 상황에 잠깐 방심했던 것을 직원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부자들이 마음먹고 갑질을 시작하면 사람 잡는 수준이 상상을 초월했다. 역시 갑질도 해본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 현영이 금방이라도 정색하고 자신을 달달 볶아대진 않을까 직원은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하지만 현영도 내심 낭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하고 교양 있게 대응하는 것이 현영의 모토였는데 순간 주제넘게 참견한다는 생각에 욱한 것이다.

조부인 조재용 회장이 현영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없는 것들을 너무 몰아붙이면 죽창 들고 달려든다고. 어디까지나 먹고살 수는 있을 정도로, 자존심 크게 상하지 않을 정도로 잘 달래서 부려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현영에게는 누구나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권력이 있었으므로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었다. 조용히 지적해도 상대는 황송해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가끔 서민들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 착각하고 선을 넘을 때면 불쾌감을 감추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현영은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아뇨. 설명하기가 어려워서요. 친척이긴 한데 촌수가 좀 복잡하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현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직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부산을 떨며 말하는 것이다.

“전시 차 가져가신다고요? 그럼 과장님께 말씀드리고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과장까지 달려 나와 현영에게 인사를 했다. 태산은 그 후에야 3억 가까운 대금을 한 번에 결제하고 전시 차를 몰아 매장을 나올 수 있었다.

태산은 운전석에 앉은 채로 현영을 향해 말했다.

“어쨌든 도와줘서 고맙다. 리무진은 니가 타고 들어가라. 난 드라이브 좀 하고 갈게.”

“말은 고맙다면서 가차 없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점심만 먹고 가라니.”

현영이 곱게 눈을 흘겼지만 태산은 허허 웃을 뿐 함께 가자고 권하지는 않았다.

“알았어. 담에 봐, 삼촌.”

현영은 그 이상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전화를 하니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리무진이 달려와 현영 앞에 섰다. 차에 올라탄 현영은 샴페인을 마저 홀짝였다.

이제까지 조부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아이는 누가 뭐라 해도 현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바른이 어영부영 역전하려 하고 있다. 심지어 서민의 피가 흐르는 반쪽짜리 혼외자가 말이다.

이제까지는 바른을 내심 무시하면서도 장래에 필요할 수 있으니 잘 구슬려 이용하겠다는 마인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에 느낀 바 없던 불안과 시기를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신에게 바른 따위가 위협이 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바른을 은연중에 질투하게 된 것은 조부의 총애가 바른에게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영이 가진 모든 것은 조부의 애정에 기인했으므로.

현영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늙으면 판단력이 흐려지게 마련이지. 할아버지도 이제 다 되셨어.”

태산은 오후를 새 차로 드라이브하며 보내고 저녁 늦게 서초동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1년 가까이 비운 방에는 먼지가 부옇게 쌓여 있어 환기를 하고 청소를 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분주했다. 다음 날은 오랜만에 집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주말을 보냈다.

그리고 돌아온 월요일, 태산은 늦은 아침을 먹고 과천으로 출발했다. 정부과천청사 1동 7층의 법무부장관실을 찾았을 때 부속실 비서관은 스케줄을 확인하고는 두말없이 태산을 장관실로 들여보냈다.

장관이 탁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다가 태산이 들어서자 반가운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서 와요, 강바른 부장.”

“안녕하셨습니까?”

장관이 이쪽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은 한동안 악수를 나누었다. 태산은 법무부장관과 악수를 하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지난번 독대할 때는 은밀히 만나는 시늉이라도 했건만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법무부장관실로 불러올려 공식 스케줄로 할당한 것이다.

태산이 어색해하는 것을 눈치채고 법무부장관이 물었다.

“반가운 기색이 아닙니다?”

“아니오, 그게 아니라… 지난번과는 달리 공개적인 자리로 부르셔서…….”

태산의 말에 법무부장관이 껄껄 웃었다.

“강바른 부장의 활약에 정권의 복심이 작용했다고 모두가 확신하는 이 시점에서 아니라고 해봐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은밀히 만나면 오히려 정적들에게 확신만 더 주겠지요. 차라리 대놓고 불러들여 공을 치하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아 굳이 밖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은 겁니다. 오랜 적폐를 소탕했으니 국가 차원에서 치하받을 자격은 충분하지요.”

태산은 어디까지나 사무적으로 답했다.

“저는 공무원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용이란 말은 좀 그렇군요. 국가로서는 좋은 재목을 충분히 활용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치도구가 아니라 일꾼으로 활용해 주십시오.”

“어차피 호락호락 도구가 되어줄 사람도 아니잖아요?”

어쩐지 대화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이라 법무부장관이 한발 물러섰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앉아서 천천히 얘기합시다. 차 들겠어요?”

* * *

“배진만 부장은 경과가 어떻습니까? 듣기에는 빠르게 회복 중이라던데요.”

부속실에서 들여온 커피를 한 잔씩 나누며 법무부장관은 무심한 듯 물었다.

“예, 벌써 퇴원하셨고 지금은 자택에서 통원하며 요양 중입니다. 곧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법무부장관은 커피를 몇 모금 더 홀짝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 부장 의견은 어떻습니까? 배진만 부장 피습 전에 비하면 사고력이나 판단력은 건재합니까? 신체적 후유증이나 트라우마 같은 것은 없나요?”

배 부장이 사고 후 업무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투라 태산은 울컥 기분이 상했다.

“문제없습니다. 그런 것은 대체 왜 물으십니까?”

업무 능력이 손상된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이대로 퇴직이라도 시킬 셈인가?

“조만간 복직이 가능하겠느냐 그 말입니다.”

웃으며 묻는 법무부장관의 말에 태산은 즉답했다.

“병원에 오래 누워계셔서 체력이 부족할 뿐이지 판단력으로 따지면 지금 당장 업무를 시작하셔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고.”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고 태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곧 인사 시즌 아닙니까? 강 부장은 다음 부임지 희망하는 곳이 있나요?”

“예? 저 부임한 지 아직 1년이 안 되었는데요.”

다음 인사 시즌에 이동하게 되면 서울중앙지검에서 대구지검으로 이동할 때처럼 딱 1년 만의 인사이동이 된다.

“2년 꽉 채운 것보다 더 많은 실적을 올렸으니 그만하면 됐습니다. 배진만 부장이 복귀할 자리도 필요하고요.”

아~ 그래서 배 부장이 조만간 복직할 수 있겠느냐 물었던 것이구나. 태산은 그제야 납득했다. 하지만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한 사람을 당장 부려먹을 생각부터 하다니. 그 또한 비정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태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벌써 부려먹을 생각부터 하십니까?”

“원래 유능한 국가일수록 공무원을 빡세게 굴리는 법입니다.”

장관의 능청스러운 대꾸에는 태산도 피식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산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보던 장관이 조금 진지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다음 대선까지 이제 만 2년이 남지 않았습니다. 강 부장이 보수의 근거지를 쓸어주는 바람에 야권이 크게 흔들린 동시에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사라졌다지만 안심할 수 없는 일이죠. 보수세력이 위기를 느끼고 더욱 결집할 수도 있고요. 진보 진영에서 연속 두 번 대통령이 나왔으니 슬슬 흐름이 바뀔 때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다음에는 여당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태산은 냉담하게 답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정권과 관계없이 일하는 공무원인데요.”

“강 부장과는 관계없겠죠. 하지만 저는 관계있습니다. 제가 법무부장관으로서 강 부장의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강 부장 다음 임지에서 2년 보내고 나면 다음 인사는 대선 직전이 됩니다. 정권 막바지이기도 하고 내가 그때까지 법무부장관 자리를 지키고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강 부장을 최적의 자리로 보내 최대한 활용하려는 겁니다.”

태산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지막까지 실컷 부려먹고 가시겠다는 거군요.”

“말이 그렇게 되나요?”

장관이 웃음기를 띠며 되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강 부장이 지금 가고 싶은 곳, 간다면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곳 없습니까?”

태산은 곰곰이 고민해 보았다. 그동안 수사를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 중에는 외부적인 것도 있었지만 검찰 내부의 X맨들도 많았다. 그들은 전관출신 로펌 변호사나 기업인들에게 스폰을 받고 동료 검사들의 수사를 방해하거나 압력을 넣곤 했다.

태산이 스스로 겪었던 것도 있거니와 안소영 검사가 은연중에 내비쳤던 성희롱, 그리고 조규완 주임이 항의했던 사건 등을 종합해 보면 검찰 조직 내부에 부패와 부정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부패수사부에서 일하면서 비리 정치인, 기업인들을 수사하기에는 검사 조직 자체가 너무 썩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손이 더러운데 어떻게 남의 허물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조직 청소부터 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어쩌면 장관 또한 원하던 바였는지도 모른다.

“감찰부서로 가고 싶은 건가요?”

태산은 선선히 시인했다.

“보내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관이 고개를 끄덕인다.

“검사 잡는 검사라. 강 부장에게 어울리겠군요. 참고하겠습니다.”

태산은 이제 용건은 다 끝났나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커피 잔을 내려놓은 장관이 곧이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까? 가능한 한 편하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팀을 구성해 주고 싶은데요.”

함께 일했던 여러 검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태산은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다.

“훌륭한 동료들은 많았습니다만 구체적인 이름을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인사 청탁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이것은 단순히 건의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태산이 말을 고르는 것을 장관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감찰 관련 부서들에는 여성 검사들을 대거 진출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성이 더 도덕적이라는 말인가요? 그런 말도 일종의 성차별 아닙니까?”

“여성이 태생적으로 더 도덕적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태산은 그렇게 말해놓고도 피식 웃었다. 문득 거물 사기꾼 선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화는 그 어떤 사기꾼보다도 교활하고 탐욕스러웠다. 물리력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수법은 더 치밀하고 정교하게 구성해야 한다. 그런 선화를 오래 가까이 두었던 태산이니만큼 여성이 더 도덕적이라는 말에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여 검사를 데리고는 룸살롱을 갈 수가 없거든요.”

“뭐라고요?”

장관이 잘못 들었나 하고 눈을 크게 떴다. 태산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검찰 조직의 부패 카르텔은 여성 검사를 끼워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성 검사들은 기존 카르텔에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덜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카르텔 밖에 있는 여성을 중용해야 카르텔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장관은 태산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다 말했다.

“여성 검사 중에는 출세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카르텔에 협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성 검사들과 룸살롱에도 같이 가고 폭탄주 돌리며 상사에게 적극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는 여성 검사들도 예전에는 꽤 있었어요.”

“그런 여 검사들이 지금 요직에 얼마나 남아 있죠?”

“스폰서에게 벤츠와 명품 가방 받았던 여 검사 사건은 기억 안 납니까? 여 검사들 중에서도 부패한 인물은 적지 않습니다.”

“스폰서 남자 검사는 훨씬 더 많죠. 대표적인 한 사건을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말입니다.”

장관은 태산의 반론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렇게 구성한 감찰부가 현 정권에 친화적이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보수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적어도 검찰 조직을 개혁하는 데는 가장 효율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태산은 슬쩍 법무부장관의 심중을 찔러보았다.

“더 늦기 전에 검찰을 개혁하고 가실 의향이시라면 고려해 봐주십시오.”

장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의견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대통령님과도 상의해 보겠습니다.”

태산은 그렇게 법무부장관과의 독대를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차를 몰고 대구로 내려갔다. 그날 하루를 쉬고 다음 날 바로 출근한 태산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업무에 몰두했다.

법무부장관을 만나고 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다. 장관에게서도 딱히 어느 부서로 보내기로 결정되었다는 등의 연락은 전혀 없었다. 태산은 과연 정말로 1년 만에 인사이동이 결정될 것인가, 정말로 감찰부서로 가게 될 것인가 긴가민가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해가 넘어가고 드디어 인사이동 시즌이 돌아왔다. 태산은 인사 명단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부장 배진만 →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장]

배진만 부장은 역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조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태산은 명단을 따라 시선을 훑어 내려간다.

[부장 강바른 → 대검찰청 감찰제3과장]

역시 장관이 자신의 뜻을 들어주었구나 하며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검찰청 과장은 다른 지검의 부장급들을 임명하는 자리였다. 태산은 이제 막 부장을 단 신출내기인 데다 그마저도 배진만 부장 대리로 임명된 것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아직 삼십 대에 불과하니 이번에도 여러 뒷말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어쨌든 태산 역시 부장급이었으므로 직급의 균형을 따지면 아주 무리한 인사도 아니었다.

태산은 무심히 시선을 내리다가 전윤지 검사의 부임지를 확인하고 멈칫했다.

[검사 전윤지 →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전윤지 검사는 배 부장과 같은 시기에 대구지검으로 부임했다고 했다고 했으니 딱 지금이 인사이동을 할 시기이긴 했다. 하지만 하필 자신과 동일하게 대검찰청이라니 어쩐지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감찰부를 여성 검사 중심으로 구성할 것을 건의했던 것이 생각났다. 태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른 신문 기사를 찾아보았다. 지금 태산이 보고 있는 것은 대구지검에서 공지한 것으로 대구지검 전출자들만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문에는 전국의 발령 검사들을 전입청 중심으로 정리한 명단이 있을 것이다.

신문 기사에서 문제의 인사 명단을 발견한 태산은 대검찰청 인사 명단을 찾아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낯익은 이름을 여러 개 발견하고 입을 떡 벌렸다.

[대검찰청]

[감찰부장 원신영]

[검찰연구관 안소영 전윤지 최진우]

검찰연구관들의 소속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감찰부로 보직이 임명될 것임은 눈에 보듯 뻔했다. 법무부장관이 자신을 위해 보내준 사람들이니 감찰부장을 설득해서라도 꼭 감찰부로 데려와야 할 인재들이었다.

“참고해 보겠다고만 하더니 아주 노골적으로 옛 동료들을 옆으로 밀어줬네.”

법무부장관의 파격 인사에 태산은 혀를 차다가 결국은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여성 중심으로 팀을 꾸리라 했더니 심지어 원신영 부장을 상사로 데려온 것이다.

대검 부장은 직급상 검사장급이 맡는다. 원 부장은 서울중앙지검 부장으로 타 지검의 차장급이니 다음은 검사장으로 승진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차장도 검사장도 거치지 않고 바로 대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례적인 임명이라 할 만했다.

법무부장관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총력을 펼쳤다. 다음에 활용한다고 생각하고 인재를 아껴두거나 천천히 키울 생각 따위는 없는 것이다. 검찰 개혁에 명운을 걸었다고 봐도 좋았다. 물러나기 전에 마지막 실적으로 삼을 셈일까?

법무부 장관의 각오가 그렇다면 태산 역시 몸을 사릴 생각은 없었다. 모조리 까발려 깡그리 잡아들이는 것이다. 태산은 의욕 충만하여 빙그레 웃었다.

* * *

태산은 짐을 정리해 부장실을 나서기 전 직원들을 돌아보다가 어처구니없어 혀를 찬다.

태산의 앞에는 조규완 주임과 윤지은 실무관, 그리고 태산을 전별하러 온 배진만 부장이 서 있었다. 모두 싱글벙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참나, 좀 서운한 척이라도 해주세요. 배 부장님 돌아오시니 제가 가더라도 아쉬울 거 전혀 없다 이겁니까?”

태산의 타박에도 일동은 웃음기를 거두기는커녕 더욱 활짝 웃었다.

“좋은 일 아입니꺼? 대검으로 영전해가 가시는데예.”

“맞아요. 배 부장님은 건강히 돌아오시고 강 부장님은 좋은 임지로 가시고.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이 친구 욕심이 참 많군. 더 좋은 곳으로 가면서 뭘 그런 일로 샘을 내고 그러나?”

태평하게 답하는 말에 태산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건강하십시오.”

태산이 꾸벅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저야말로 신세 많이 졌습니더. 강 부장님 실력이면 대검 가셔도 활약하실 겁니더. 계속 지켜보겠심니더.”

“맞아요. 저도 응원할게요. 강 부장님도 항상 건강하시고요.”

“언젠가 또 함께 일할 수 있는 날이 있겠지. 연락함세.”

인사를 끝낸 태산이 개인 사물을 정리한 종이 박스를 집어 들었다. 조 주임이 재빨리 태산의 손에서 박스를 받아 든다.

“제가 차까지 옮겨 드리겠습니더.”

평소라면 괜찮다고 거절했겠지만 태산은 마침 조 주임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묵묵히 받아들였다.

“부장님은 안 나가십니까?”

태산이 배 부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먼저 가게. 난 좀 살펴볼 것이 있어서…….”

배 부장의 답에 윤지은 실무관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일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신 거죠?”

“아니, 인계받을 사건들 대강이라도 알아두려고 그래요. 너무 오래 쉬어서 조바심이 나긴 하네요.”

“회복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태산의 충고에 배 부장이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알겠네. 멀리 안 나가지. 조심히 올라가게.”

태산은 조 주임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조 주임에게 상자를 받아 자동차 조수석에 넣어놓은 태산이 조 주임을 돌아보며 물었다.

“주임님, 잠시 얘기 좀 할까요?”

“예, 그랍시더.”

조 주임은 무슨 얘긴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바로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민원실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씩 뽑아 들고 벤치에 앉았다.

“조 주임님, 지금 하시는 일에는 만족하고 계십니까?”

“만족하고 말고 할 끼 뭐 있습니꺼. 제 일인데예.”

조 주임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커피를 후후 불어 홀짝였다.

태산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킨 후 본격적인 용건을 꺼내놓으려 운을 뗐다.

“용재실업 건으로 부장실로 쳐들어왔을 때 말입니다.”

조 주임의 얼굴이 단박에 붉어진다.

“아이고~ 지난 얘기는 또 머 할라꼬 꺼내십니꺼. 부끄러븐 얘기를…….”

태산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을 이었다.

“그때 말씀하셨죠. 집안 사정 때문에 로스쿨 진학은 못 했지만 지역 명문법대 출신이라고요. 그때 계속 공부를 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없습니까?”

조 주임은 한숨 섞어 웃었다.

“아쉬워해서 뭐 하겠습니꺼. 현실이 팍팍해서 어쩔 수 없었는데예. 기왕 검찰수사관이 된 거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기지예. 지는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합니더.”

“하지만 용재실업 같은 사례를 옆에서 보다 보면 불만스러운 마음도 생길 텐데요. 저 검사들보다 내가 훨씬 잘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조 주임은 허를 찔린 듯 한동안 침묵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봤다믄 거짓말이겠지예. 딴생각 안 할라꼬 더 열심히 했습니더.”

한참 만에 입을 연 조 주임은 하소연하듯 주절주절 자신의 개인 사정을 늘어놓았다.

“그치만도 이제사 다시 공부하기는 나이도 있어가 머리도 마이 굳었고… 로스쿨 학비는 대출로 어떻게 마련한다케도 공부할 동안 생활비도 필요할 끼고… 집안 사정 막 필까 말까 하는데 공부하겠다꼬 안정된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엄꼬… 그렇다고 일하믄서 공부해가 어느 세월에 되겠습니꺼. 안 그래도 업무도 많은데 욕심부리지 말고 제 일이나 제대로 해야지예.”

안 된다면서 안 되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품이 스스로도 도전해 보고 싶은 유혹을 많이 느꼈던 듯하다. 자신을 포기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곱씹어본 논리일 것이다.

“제가 좀 도와드린다면 어떻겠습니까?”

“예?”

갑작스러운 태산의 말에 조 주임은 커피를 입에 가져가다 말고 멈칫하더니 되물었다. 대체 어떻게 도와준다는 얘긴가 의구스러운 표정이다.

“로스쿨 준비 1년, 로스쿨 수료 3년, 변호사 시험 합격까지 1년. 도합 5년간 전적으로 경제적지원을 해드린다면요.”

태산의 제안에 조 주임이 눈을 크게 뜬다.

“예에? 그기 얼마라꼬예.”

“등록금이랑 생활비까지 해서 2억이면 그럭저럭 될 것 같은데요.”

태산이 큰 금액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려 조 주임은 입을 떡 벌렸다.

“2억이 뉘 집 아 이름도 아이고 부장님 돈을 우째 받씹니꺼. 안 됩니더.”

조 주임은 손을 절레절레 내젓더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와 지한테 글케까지 해주실라는 겁니꺼.”

“같이 일하면서 지켜보니 검사로 일하면 더 잘하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적어도 문제의식 없이 청탁받는 검사들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검찰에 좋은 동료가 많아지면 저도 좋죠.”

태산의 설명에도 조 주임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글치만도 그것만 가지고 그리 큰돈을 척 내놓으시겠다니 지는 잘 이해가…….”

“남들한테는 큰돈일지 몰라도 저한텐 그렇지도 않습니다. 1년 365일 업무에 시달리느라 딱히 돈 쓸 구석도 없고 계좌는 자꾸 쑥쑥 불어나니 장학금으로라도 쓰려는 거예요.”

조 주임이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부장님, 방금 쪼끔 재수 없었습니더.”

태산은 쿡쿡 웃었다. 예전에는 자신도 강바른을 재수 없는 놈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어쩐지 강바른의 그런 재수 없는 태도와 화법이 이제는 자신에게서도 은연중에 표출될 때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도전해 볼 생각이 있다면 부담 가지지 말고 얘기해요.”

태산의 말에 조 주임은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민에 잠겼다.

“지를 우째 믿으시고예. 검사 되는 시험이 보통 어려운 기 아인데 떨어지믄 우얍니꺼.”

“투자라고 생각하고 하는 겁니다. 모든 투자에는 투자위험이 따르게 마련이잖아요. 좋은 동료를 얻으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죠.”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고 있는 조 주임에게 태산이 슬쩍 말을 보탰다.

“저는 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지역명문법대라면 경북대 법대 출신이실 거고…….”

조 주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다니 서울 사립대에도 갈 수 있는 성적으로 등록금 액수와 장학금 고려해 지방 국립대로 가셨겠죠. 그 정도면 지적 능력은 빠지지 않으실 테고 지금까지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있으니 실무 평가에서는 더 유리하실 거고요. 한번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조 주임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

“그 돈을 받으믄 나중에 문제 되지는 않겠습니꺼.”

“우리 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조 주임님께 청탁이라도 넣겠습니까?”

대가성이 없으므로 행여라도 문제 될 일은 없을 거라는 답이었다. 조 주임도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지가 검사가 된다케도 부장님 같은 분이 일개 평검사한테 청탁 넣을 일은 없겠지예. 그때 되믄 더 높은 자리에 있으실 긴데.”

조 주임이 드디어 결심을 한 듯 후련한 얼굴로 태산을 마주 보았다.

“고맙씹니더. 한번 해보겠심더. 돈은 장래에 무신 일이 있어도 꼭 갚겠심더.”

“갚지 마세요. 갚으려고 무리하다 보면 조 주임님이 혐오했던 그런 검사처럼 될 수 있어요.”

“지가 언제 무리해서 갚겠다 켔는교. 쫌 오래 걸릴 깁니더. 그래도 천천히 다 갚겠심더. 로스쿨 등록금은 대출이 된다 카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쪼께 있으이 씀씀이 아끼믄 2억까지는 필요 없을 깁니더. 융통해 보고 딱 필요한 만큼만 받겠심더.”

조 주임의 고집에는 태산도 더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언제든 더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태산은 조 주임의 계좌번호를 받아 들고 일어났다. 자동차를 몰고 떠나며 태산은 룸미러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조 주임이 자동차 뒤꽁무니에 대고 오래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 * *

첫 출근 날 태산은 서초동 대검찰청 본관 11층으로 올라가 감찰3과장실 문을 열었다. 태산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반색하며 일어서는 직원들을 보고 태산은 깜짝 놀랐다.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과장님!”

“말씀하신 대로 다시 만났네요.”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에서 함께 일했던 송봉근 계장과 김민하 실무관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태산은 반가워 두 사람에게 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중앙지검이랑은 지척 아닙니까? 파견 나오라 해서 왔더니 새 과장님이 강바른 검사님이라고 해서 저희도 놀랐습니다.”

“떠나신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때도 혹시 금방 다시 올라올 거라는 언질 받고 가신 거 아니에요?”

“아뇨, 그런 건. 어쨌든 반갑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설마 함께 일하던 직원들까지 데려와 배치할 줄은 몰랐기에 태산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과장실 정리를 마치고 태산은 감찰부장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7층으로 내려갔다.

“새로 부임한 감찰3과장입니다. 부장님 계십니까?”

“네,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들어가세요.”

부속실 직원이 바로 일어나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부장실 안에서는 향긋한 홍차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신영 부장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가 태산을 보고는 반색하여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홍차 향 같은 따뜻하고 은은한 미소가 원 부장의 얼굴에 번졌다.

“강 과장, 어서 와요. 내가 강 과장 덕을 톡톡히 봤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산은 원 부장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전에는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정말로 강 과장 덕에 나까지 승진해 버렸으니 말이에요.”

태산은 그제야 원 부장이 반부패수사1부에서 2부로 자신을 데려올 당시에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상사의 실적을 확실히 올려줄 유능한 부하가 필요하다고.

확실히 원 부장의 영전에는 태산이 기여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법무부장관을 만나 여성 검사들로 감찰부서를 구성해 달라 건의한 바도 있었고.

하지만 태산은 모른 척 둘러댔다.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부장님의 능력으로 오르신 자리지요. 축하드립니다.”

태산의 치하에 원 부장은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인사치레는 그만두죠. 감찰부 새 구성원을 보니 강 과장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한 것 같던데.”

새로 부임한 감찰부 검찰연구관들의 이력을 이미 파악해 둔 모양이었다.

“앞으로가 쉽지는 않겠지만 힘을 모아서 함께 잘해봅시다.”

“예, 부장님.”

태산은 즉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 부장이 앞으로가 쉽지 않겠다는 단서를 다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머지않아 태산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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