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추격
“대구지검은 오늘 대구은행장 박 모 씨와 대출담당자 김 모 씨를 대한건설 정진용 대표에게 금품을 받고 대출을 해준 혐의로 구속기소 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외근 중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윤찬열은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수저를 들다 말고 멈칫했다.
“박 모 씨와 김 모 씨는 투자사 빅월드 인베스트먼트에서도 금품을 받고 편의를 봐준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빅월드 인베스트먼트의 이현수 대표는 이종길 의원의 장남으로 이 대표와 이 의원을 비롯한 일가가 빅월드 인베스트먼트 주식의 약 50%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검찰은 빅월드 인베스트먼트가 해당 사건 이외에도 지속적인 정관계 로비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을 것으로 보고 광범위한 추가 수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공범인 2대 주주 염 모 씨는 한누리성전 교주 염승신의 양녀로 밝혀져 교단과의 유착 관계 역시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정진용을 검찰에 빼앗겼으니 수사가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정리하는 등 나름대로 대비도 했다.
하지만 벌써 이 정도로 진행되었다는 말인가.
구체적인 수사 상황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대언론 공식브리핑에서 이종길과 한누리성전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검찰이 이미 수사를 상당히 진행시켰고 유력한 증거를 확보해 두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검찰이 코앞까지 와 있다. 자신에게까지 조여오는 데는 얼마나 걸릴 것인가. 일주일? 이틀? 하루?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윤찬열은 핸드폰 진동이 울려 깜짝 놀랐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이종민 경사에게서 온 전화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윤찬열은 전화를 받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경위님, 아무래도 박진성이가 잡힌 거 같습니다. 박진성이 폰으로 전화가 와서 엉뚱한 사람이 이상한 이름을 찾더라고요. 혹시 모르니 피해 계십시오. 저도 상황 봐서 정리되는 대로 뜨겠습니다. 안전해졌다 싶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 경사는 자기 용건만 급히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벌써 그랜드 팰리스 쪽도 발각된 건가. 강바른 검사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조여오고 있었다.
윤찬열은 바로 식사를 끝내고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등 뒤에서 아나운서와 피디가 의견을 나누는 소리가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회사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교단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 상당히 근거가 있어 보이는데요.”
“그렇습니다. 한누리가 순우리말로 큰 세상이라는 뜻이니 영어로 바꾸면 빅월드가 됩니다. 게다가 빅월드 인베스트먼트의 로고도 한누리성전의 교리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이 나무 모양이…….”
윤찬열은 근처 ATM기에서 한도를 꽉 채워 현금을 뽑았다. 어쩌면 도피 생활이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조여오는 속도를 보면 얼마 못 가 잡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차피 변호사 비용 외에 돈 쓸 일은 없어질 것이므로 잔고를 아낄 이유가 없었다.
윤찬열은 일단 차를 몰아 도심을 빠져나갔다. 핸드폰은 꺼두고 은밀한 연락을 위해 마련한 대포 폰만 켜둔 채였다. 대구 외곽을 돌며 이 경사의 연락을 기다렸다가 이후 도피처를 모색할 생각이었다.
중국이나 필리핀 쪽이라면 안면이 있는 밀수업자를 통해 밀항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밀항한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불현듯 나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만약 도주하는 데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명색이 경찰관이 검찰에 체포되어 비참한 꼴로 포토 라인에 서게 될 것이다. 만인의 지탄을 받고 재판정에서 중형을 받은 뒤 감옥에 가게 되겠지. 그리고 그곳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끔찍한 나날들을 견뎌야 한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배 속으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절망적이라 윤찬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어도 잡히고 싶지 않다. 잡히느니 차라리 사살되는 쪽이 낫다. 살아서 잡힐 바에야 차라리…….
문득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한 선배 박대용이 떠올랐다. 박대용이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잡히게 되면 그동안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질 테고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할 것인가를 박대용은 잘 알았으리라. 그러나 그 대가까지 감수할 용기는 없었겠지.
‘나에게는 그동안의 악행과 비리의 대가를 감당할 용기가 있는가?’
윤찬열은 그 물음에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파멸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마땅히 감수하고 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러한 때가 다가오니 두려워지는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윤찬열은 얼마 전부터 대포 폰 진동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 눈치채지 못했다. 폰을 꺼내 액정을 들여다보니 이종민 경사였다.
안전해지면 연락하겠다고 한 이 경사에게서 전화가 오기에는 시간상 너무 빨랐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다고 전화를 아예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긴급한 연락일지도 모른다.
인적이 드문 지방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던 윤찬열은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수화기 너머에서 이종민은 한참을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물쭈물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경위님. 잡혔습니다.
심장이 철렁 떨어져 윤찬열은 한동안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자수해서 선처를 받는 편이…….
“닥쳐!”
윤찬열은 으르렁거리듯 뱉어내고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를 낚아챘다.
-윤찬열 씨? 강바른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윤찬열은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강 검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의자와 주임검사로 다시 보게 되겠군요. 더 시간 끌어봐야 상황 바뀌지 않습니다. 자수하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볼 일 없을 겁니다. 난 절대로 안 잡혀요.”
윤찬열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를 악물고 답했다.
-지금 바로 수배하고 출국금지 조치 내릴 겁니다. 맹세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추적할 거예요. 우리나라 검경의 수사력은 경찰인 댁도 잘 알 테죠.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결국엔 찾아냅니다. 얼마나 오래 숨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윤찬열은 답하지 못했다. 쓰라린 침묵을 강 검사가 먼저 깬다.
-박대용 경위 사례를 보고도 느낀 게 없었나요?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만한 각오는 했을 것 아닙니까? 행여라도 박 경위처럼 비겁하게 끝낼 생각은 말아요. 자신이 지은 죄를 직시하고 죗값을 제대로 치르란 말입니다.
강 검사의 추궁에야 윤찬열은 자신이 처음부터 죗값을 치를 각오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대용이 그렇게 된 것은 멍청해서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박대용보다 영리하므로 모든 일을 감쪽같이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정치인의 수족으로 이용만 당하지 않고 상부상조하며 챙길 만큼 챙기리라 마음먹었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일어나더라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인천에 있던 시절 운 좋게 성공한 적이 있었으므로.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한번 운이 좋았다고 언제까지나 운이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윤찬열은 뭐라 변명하려다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뭐라 변명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자수 안 합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잡아가 보세요.”
윤찬열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대포 폰의 전원마저 꺼버렸다.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교각 위에 잠시 차를 세워놓고 아래를 흐르는 강물에 핸드폰과 대포 폰을 던져 버렸다. 어디론가 쓸려가 버리면 그 속에 있는 것들이 수많은 악행의 증거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윤찬열은 핸드폰을 없앤 후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처음에는 인천으로 돌아가서 중부서에 근무했을 때 안면을 터 둔 인천항 밀수업자에게서 밀항선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천으로 가는 동안 무수한 난관을 만나면서 점점 생각은 비관적으로 흘렀다.
도로 도처에 있는 CCTV가 마치 자신의 모습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국도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 동안 음주단속이며 검문을 숱하게 만나 몇 번이나 차를 돌려야만 했다. 음주단속이 많은 불금이라서인지 아니면 강 검사의 말대로 수배령이 내려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 검사가 물샐틈없이 조여온다는 생각에 윤찬열은 숨이 막힐 듯했다. 인천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회의감은 더욱 짙어졌다. 인천까지 간다 해도 과연 밀수선을 구해 이 나라를 뜰 수 있을까. 뜬다 해도 그 후에는 어쩔 것인가. 평생 뒷골목을 숨어 다니며 쥐새끼처럼 목숨을 부지해야 할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성 인근의 갈대숲을 달리고 있었다. 박대용이 목숨을 버린 바로 그곳이다.
‘결국 나도 선배처럼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인가.’
윤찬열은 자신도 모르게 박대용이 자살한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박대용의 차가 주인 없이 서 있었던 바로 그 장소에 윤찬열은 자동차를 댔다. 그리고 시동을 끈 채 시트에 등을 기대고 어둠 속에서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지금 당장 결정을 해야 함에도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파국에 이르렀음을 무의식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 * *
윤찬열과의 통화가 뚝 끊어지자 태산은 미련 없이 전화를 집어넣고 이종민에게 물었다.
“윤찬열 차종과 차량번호는?”
“…싼타페 블랙, 76더XXXX입니다.”
이종민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태산은 답을 듣자마자 바로 차 문을 열고 나와 소리쳤다.
“지금부터 수성서 형사과 강력4팀장 윤찬열 경위 체포에 총력을 다하겠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윤지 검사와 수사관들이 달려왔다.
“전 검사는 지금 바로 대구시 CCTV 통합관제센터로 가서 협조 요청하세요. 대구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모니터해 검은색 싼타페 76더XXXX 차량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는 대로 저에게 연락하면 됩니다.”
대구에서 은신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금, 윤찬열 경위가 지역 사정을 빠삭하게 꿰고 있는 인천이 숨어서 도피 기회를 노리기에는 가장 좋은 환경일 거라고 추측한 태산이다.
“두 분은 이종민 경사 구치감으로 연행하고 검찰청 도착하는 대로 이 번호 통화 내역 추적해서 마지막으로 통화한 위치 알려주세요.”
태산은 이종민의 핸드폰에 남겨진 윤찬열의 대포 폰 번호를 두 수사관에게 알려주며 지시했다. 하지만 핸드폰을 수사관들에게 넘기지는 않았다. 중요 증거이므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자신이 쥐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윤찬열 경위 수배와 출국금지, 계좌 동결도 함께 해주시고요. 나머지 분들은 저랑 함께 가시죠.”
“예!”
전 검사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자리를 떴다. 이종민 경사 연행 임무를 맡은 두 수사관은 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에 이 경사를 태우고 검찰청으로 출발했다.
태산이 수사차량 조수석에 올라타자 조규완 주임이 운전석에서 물었다.
“어디로 갑니꺼?”
“일단 인천 방향으로 출발합시다.”
* * *
-부장님, 말씀하신 번호 마지막으로 통화한 기지국이 공산저수지 인근입니다.
“수고했습니다.”
인천 방향으로 달리고 있던 중 검찰청으로 복귀한 수사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태산은 전화를 끊자마자 이번에는 대구시 CCTV 통합관제센터에서 대기하고 있는 전윤지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 검사, 윤찬열 경위가 공산저수지 인근에서 출발한 것 같습니다. 북구에서 인천으로 나가는 모든 길목 CCTV를 집중적으로 확인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 검사에게 지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하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부장님, 윤찬열 차량 현재 호국로 따라 진행하다가 팔거교에서 칠곡중앙대로로 빠졌습니다. 경북대로 따라서 인천 방향으로 진행할 것 같습니다.
전 검사의 보고를 듣자마자 태산이 조 주임에게 알렸다.
“주임님, 팔거교랍니다.”
“옙!”
조 주임이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며 차를 돌렸다. 태산이 다시 전 검사에게 지시했다.
“전 검사, 거기에서 각 지자체 관제센터에 연락해 CCTV 동영상 전송받아서 윤찬열 차량 계속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예, 해보겠습니다.
관할 지자체에 연속적으로 협조를 구해 CCTV 영상만으로 용의 차량의 진행 방향을 추적하는 작업이 결코 녹록지만은 않을 것이었지만 전 검사는 시원스럽게 답했다.
이후 전 검사에게서 주기적으로 용의 차량의 진행 방향을 알리는 메시지가 태산의 핸드폰으로 바쁘게 들어왔다.
[성남이천로 타고 가던 중 333번 지방도로 빠졌습니다.]
[318번 지방도 타고 용인 방면으로 빠졌습니다.]
[321번 타고 처인성 방향으로 진행 중]
[306번 타고 화성 진입]
갈수록 전 검사의 메시지는 짧아졌다. 현장 지휘를 하며 연락하느라 얼마나 다급한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태산은 메시지를 확인해 조 주임에게 방향을 지시하는 한편으로 일말의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인천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은 들어맞았지만 수도권으로 들어선 직후부터 빙빙 돌며 오히려 인천에서부터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우회하는 것이라 해도 태산은 왠지 모르게 윤찬열이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천으로 가는 걸 포기한 건가?’
[다시 볼 일 없을 겁니다. 난 절대로 안 잡혀요.]
불현듯 윤찬열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비장한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설마…….
지도를 확인해 보니 박대용 경위가 자살한 곳이 바로 인근이었다.
태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윤찬열같이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자신의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지 못한다. 체포되어 부패경찰 타이틀을 달고 감옥에 가는 것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결코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조 주임님, 목적지 변경합니다.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로 가주세요.”
조 주임이 의외의 지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윤찬열이 추적 중단하는 겁니꺼?”
“아니오. 먼저 앞질러 가 잡으려는 겁니다. 윤찬열이 계속 우회하고 있으니 최단 경로로 빠르게 가면 거의 동시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글치만도 거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믄 까딱 잘못했다가 놓치 버릴 수도 있을 긴데예.”
“한시가 급한 상황인 것 같아서요. 다소 모험을 해서라도 속히 신병을 확보해야 합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믄…….”
조 주임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산의 말에 조 주임은 물론이고 뒷자리에 탄 수사관들이 모두 흠칫해서 침묵한다.
윤찬열 하나가 자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윤찬열이 저지른 비리, 그리고 뒤에서 모든 것을 지시한 배후에 대해 증언해 줄 중요 증인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미 충분히 관련자들을 기소할 만큼 증거를 확보한 건들은 차치하더라도 윤찬열이 사라짐으로써 묻혀 버릴 혐의도 많았다. 무엇보다 배진만 부장 살해를 지시한 인물이 누구인가를 명명백백히 밝혀줄 사람은 윤찬열이 유일했다.
“그렇다믄 가야지예. 꼭 잡으이소!”
조 주임이 두말없이 차를 돌리며 속도를 높였다.
고정리로 들어서 문제의 개활지에 도착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갈대숲 한구석에 윤찬열의 검은색 싼타페가 도사리고 있었다. 조 주임이 개활지 앞에 차를 세우고 정면으로 전조등을 비췄다.
운전석에 앉은 윤찬열이 권총을 빼 들고 있다가 당혹한 표정을 한다. 이렇게 빨리 추적해 올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태산은 수사차량이 채 멈추기도 전에 조수석에서 뛰어내려 윤찬열에게로 달려가며 쩌렁쩌렁 소리쳤다.
“그만둬, 윤찬열!!!”
“가까이 오지 마!”
윤찬열이 총구를 거두어 태산 쪽으로 겨누었다. 하지만 태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윤찬열에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경찰 권총의 첫 발은 공포탄이다.
탕!
격발음과 함께 태산은 마치 트럭에 치인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초인적인 피지컬을 갖춘 태산이었건만 자신도 모르게 비틀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윤찬열 이 새끼, 아무리 막장 부패경찰이라고 해도 첫 발부터 실탄을 장착해 놓은 거냐?’
태산은 예상치 못했던 큰 충격을 받고 가물거리려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윤찬열을 바라보았다. 달려들던 태산이 멈칫하는 것을 확인한 후 윤찬열은 곧바로 총구를 자신의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안 돼!!!!”
* * *
천성호 계장은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전혀 업무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검찰의 수사망이 이종길 의원과 윤찬열 경위를 조여가고 있었으나 중요한 순간 매번 자신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강바른 부장은 보안을 이유로 비밀 수사의 진행 과정을 천 계장과는 공유하지 않았다. 현장 출동도 젊은 수사관들 중심으로 꾸리고 자신에게는 이미 증거가 확보된 건의 서류작업만을 맡겼다.
그러니 이 의원과 윤 경위에게 미리 경고하기는커녕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혹시 강 부장이 자신이 프락치 노릇을 한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강 부장은 오늘도 전 검사에게 취조를 맡겨두고 나가서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에는 전 검사도 부랴부랴 수사관들을 싹 몰고 나가더니 수사관 둘만 이종민 경사를 체포해 돌아왔다. 그리고 윤찬열 경위를 수배하고 출국금지 조치를 하는 등 부산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강 부장과 전 검사, 그리고 다른 수사관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돌아온 이들의 말로는 윤 경위를 추적 중이라는 것 같았다.
천 계장은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몰라 조바심이 났다. 윤 경위가 잡히면 자신의 정체도 드러나게 될 확률이 높다. 윤 경위가 잡히기 전에 도주하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자신의 죄라고 해봤자 윤 경위를 통해 이종길 의원에게 검찰청 내부 정보를 제공한 것뿐이고 그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될까 싶었다. 왠지 이렇게 가슴을 조여야 하는 것이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순간 배진만 부장이 정보원과 만나러 나갔다는 정보를 윤 경위에게 흘린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윤 경위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추호도 몰랐지만 잘못하면 살인미수의 공범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뚜르르르르~
때마침 검사실 전화기가 울려 천 계장은 흠칫 놀랐다. 윤지은 실무관이 재빨리 전화를 받는다.
“네, 반부패수사부장실입니다. 아, 주임님! 어디세요? 종일 안 들어오시고…….”
윤 실무관이 말을 하다 말고 멈칫한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듣기만 한다.
“네… 알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주세요.”
천 계장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윤 실무관에게 다가갔다. 윤 실무관이 전화를 끊자마자 채근해 물었다.
“무슨 일이고?”
윤 실무관이 울상이 되어 돌아본다.
“조 주임님인데예. 부장님이 총에 맞으셨답니더. 중상이라는데예.”
천 계장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하지만 정작 그보다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우짜다가? 용의자는 우째 됐다노?”
“부장님 쏘고 바로 자살했다네예.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봐야 된다 케가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습니더. 밤이 늦었으니까 일단 퇴근하라꼬 하던데예.”
윤 실무관은 그렇게 답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예 이런 일이 자꾸 생길까예. 배 부장님 글케 되신 지 을매나 지났다꼬.”
천 계장은 전해 들은 소식에 일단 안도했다.
윤찬열이 모든 걸 안고 갔다. 이종길이 받고 있는 혐의 중 많은 부분이 증거가 없어 묻힐 것이다. 자신의 배신도 이대로 묻힐 수 있다.
천 계장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윤 실무관의 의아한 시선에 마치 탄식이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덧붙였다.
“거봐라. 권력과 싸운다는 기 이리 힘든 일이다.”
윤 실무관이 짜증 섞어 대꾸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기 할 얘깁니꺼?”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그렇게 죽상하고 있어봤자 암것도 안 바뀐다. 그만 퇴근하자. 내일 또 부지런히 일해야 안 하겄나. 부장님 생각해서도.”
강바른 부장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중상을 입었다는 강 부장이 다시는 복귀하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강바른은 뒤가 구린 천 계장의 입장에서는 가까이 두기 부담스러운 상사였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야성이 ㄹ언뜻언뜻 번뜩이는 사람이다. 폐부를 꿰뚫어 보고 배신을 눈치챈 순간 인정사정없는 철퇴를 내릴 것 같아 부임해 온 직후부터 항상 뒤통수가 당겼다.
강 부장이 무사히 부상에서 회복한다 해도 중상이라면 당분간은 업무에 복귀하기 어려울 것이다. 급물살을 타던 수사에도 제동이 걸리리라. 이대로 흐지부지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종일 마음을 졸이고 있던 천 계장은 비로소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내 먼저 퇴근한다. 내일 보자.”
“예, 드가소.”
천 계장은 검찰청에서 나와 차를 몰고 집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검찰청과 자택의 중간쯤에서 차를 멈추고 가까운 공중전화 부스로 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 의원님, 천성호입니다. 방금 출동했던 수사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윤찬열 경위는 자살했고 강바른 부장은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중상이라는데요.”
수화기 너머에서 훗 하는 바람 소리가 느껴진다. 웃고 있는 것이다.
-그거 잘됐군.
이종길 의원의 반응에 천 계장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신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종길 의원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기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수하였던 사람이 죽었다는데도.
자신도 이 사람에게는 그 정도의 이용 가치로만 여겨질 거라고, 아니, 그 이하의 이용 가치일 거라고 생각하니 허탈함에 앞서 두려워졌다.
천 계장이 침묵하자 이종길 의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지우고 진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천녀님께서 자네의 충심을 높이 사셨네. 천국의 첫 자리가 자네를 위해 준비될 것이라 하셨네. 계속 잘 살펴주게.
비밀스럽게 한누리성전의 새 교주가 된 천녀가 언급되자마자 흔들리던 천 계장은 금세 감격하고 만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멘~”
* * *
-윤찬열 경위는 자살했고 강바른 부장은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중상이라는데요.
천성호 계장의 보고에 이종길 의원은 자신도 모르게 비실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거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대구은행 관계자들에게 로비한 수법이 발각되고 검찰의 수사가 좁혀오고 있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중이었다. 윤찬열이 체포된다면 배진만 부장 살해를 지시한 혐의까지 추가될 수 있었다. 상황 추이를 지켜보다 윤찬열이 체포되면 출국금지가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해외로 도피할 생각이었다.
당장에라도 비행기를 타야 하나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차에 윤찬열이 자살을 해주었다니, 게다가 강바른에게 중상까지 입혀주고 가다니 이보다 반가운 일이 없었다. 조상님이 돕는구나 싶었다.
살인죄만 아니라면 증뢰죄나 배임수증죄 같은 것은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 준 사람과 받은 사람. 세상에 범행 사실을 아는 것은 이 넷밖에 없는 것이 뇌물죄다. 준 사람이 발설하지 않는 한 쉽게 혐의를 밝힐 수 없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대체로 현금으로만 주고받았고 흔적이 남는 경우에도 아들이나 염민중 명의의 계좌만 이용했다. 변호사만 잘 써서 자신은 회사 경영에 관여한 바 없고 아무것도 몰랐다고 항변한다면 처벌은 최소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기왕 감옥에 간 것 아비를 위해서 조금 더 살다 나와도 괜찮을 것이며 염민중은 어찌 되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그 정도로 막을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도 재기를 노려볼 수 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침 강바른 검사는 현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소문과 잘 엮어 부당한 정치 탄압으로 프레이밍을 한다면 지지자들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믿어줄 것이다.
아니, 지지자들에게는 사실관계가 어떻든 전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을 지지할 인간들 아닌가.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해도 자신을 찍어줄 판에 회사 키우려고 돈 좀 주고받은 게 무슨 대수일까. 그런 일상적인 부패쯤이야 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도 기꺼이 하려고 할 텐데. 오히려 유능함의 증거로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너무 반가운 티를 낸 것일까? 이종길 의원은 그제야 천 계장의 반응을 의식하고 얼른 목소리를 바꾼다.
“천녀님께서 자네의 충심을 높이 사셨네. 천국의 첫 자리가 자네를 위해 준비될 것이라 하셨네. 계속 잘 살펴주게.”
염민중을 언급하니 천 계장이 아니나 다를까 들뜬 목소리로 반색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멘~
이 의원은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천 계장을 내심 한심스럽게 생각하며 전화를 끊는다. 염민중도 이용하고 버릴 속셈인 마당에 천 계장 같은 조무래기야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선택받은 이가 되고 싶다는 알량한 욕심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한숨 돌린 이종길 의원은 그동안 커넥션이 있었던 공무원들에게 바로 연락을 돌리려 마음먹었다. 한동안은 거리를 둘 셈이었지만 강바른이 중상을 입고 수사에 제동이 걸릴 바로 지금이 입단속을 해둘 최적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예, 의원님.
늦은 시간임에도 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상대는 긴장된 목소리로 이 의원의 전화를 받았다. 상대도 역시 사태의 추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강바른 검사 소식 들었습니까?”
-아니요. 무슨 일입니까?
“소식이 늦으십니다? 강바른이 수사 중에 총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군요. 중상이랍니다.”
방금 검찰수사관에게 보고를 받은 자신보다 소식이 빠를 리는 없었지만 이 의원은 자신의 정보력을 과시하듯 젠체하며 말했다.
-아…….
상대가 안도의 탄성을 뱉는 것을 듣고 이 의원은 피식 웃었다.
“아시겠지요? 나 이종길과 빅월드 인베스트먼트는 아직 건재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자리 지키세요. 입조심하시고.”
-예, 의원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한 바퀴 돌린 후 이종길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밀린 잠을 몰아서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종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가정부를 내보냈다. 누가 찾아올 시간은 아니었고 딸들이 보낸 식료품 택배거나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문으로 나간 가정부는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비로소 궁금해지려는 찰나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이에요, 아줌마?”
식탁에서 일어서 현관을 내다보던 이종길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쩔쩔매는 가정부를 떠밀고 양복 입은 사내들이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서 있는 것은 바로 강바른 검사였다.
이종길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어젯밤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다는 강 검사가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
“이종길 씨, 살인 교사, 배임증재, 증뢰, 수뢰, 알선수재… 아, 존나게 많네. 또 뭐였더라. 아무튼 등등의 혐의로 긴급체포 합니다. 묵비권 행사할 수 있고요. 묵비권 행사해도 불이익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말하던 강 검사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아, 귀찮아. 미란다원칙은 여기 수사관에게 마저 들으시고요.”
강 검사는 곁에 서 있는 수사관을 가리키며 말한 다음 다른 수사관들에게 지시했다.
“증거 될 만한 것 모조리 들고 나오세요.”
수사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각 방으로 흩어졌다. 강 검사는 수사관이 미란다원칙을 마저 고지하기를 기다려 이종길에게 말했다.
“제 발로 곱게 가시면 국회의원의 품위를 생각해서 수갑은 안 채우겠습니다.”
이종길은 순순히 강 검사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뒤를 따라가면서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결국 검찰청으로 가는 수사차량 안에서 누르고 눌렀던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총 맞고 병원에 누워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살짝 스쳤습니다. 대충 꿰매고 나왔어요.”
대수롭지 않게 답한 강 검사가 이내 되물었다.
“그런데 제가 총 맞은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뉴스가 난 것도 아닌데. 설마 검찰에 듣는 귀라도 심어놓은 건 아니겠지요?”
강 검사는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눈빛을 보고 이종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찰에 프락치를 심었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것 같은 눈치였기 때문이다. 설마 알고도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인가.
“어젯밤 사이에 여러 군데 연락하셨나 봅니다. 오늘 새벽같이 검찰에 체포되어 온 피의자들이 제 얼굴만 보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혼비백산하더라고요. 의원님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요. 총 맞고 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냐면서.”
강 검사가 혀를 끌끌 찬다.
“잘못된 정보를 경솔하게 흘리셨으니 공범자들이 의리를 지키겠습니까? 이미 끈 떨어진 갓 되었구나 생각하고 각자도생하려고 할 텐데 말입니다.”
이종길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군인 시절부터 나라를 생각하는 충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오. 단지 의심이 있다고 해서 제대로 수사해 보지도 않고 충신을 쳐내려 하다니. 이게 대통령의 의중이라면 큰 실수 하는 거요.”
“여기서 대통령이 왜 언급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치 진영 논리로 몰아갈 생각은 버리시는 게 좋습니다. 저는 그런 거 잘 모르거니와 증거가 명백해 체포하는 것뿐입니다. 참 꼼꼼하게 해 드셨던데 충심은 몰라도 성실함은 인정해 드리죠. 정 억울하시면 검찰청으로 가서 대질 한번 해보시죠. 증인이라면 넘쳐나니까요.”
강 검사는 여유롭게 답했다. 이종길은 검찰청으로 가는 동안 불안에 시달렸다.
강 검사가 대질시키겠다는 증인이 과연 누구일까? 어젯밤 통화했던 이들이 머릿속을 줄줄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누가 배신하고 돌아섰을 것인가. 혹은 그들 모두가 돌아선 것은 아닐까.
강 검사는 이종길을 바로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강 검사가 문을 열자 취조실 안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이쪽을 돌아본다. 이종길은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 것은 자살했다던 윤찬열이었다. 손목에 붕대를 감고 생기 없는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명 살아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들어오시죠.”
강 검사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종길을 재촉한다. 그제야 이종길은 깨달았다. 강 검사에게 완전히 속았다는 사실을.
* * *
탕!
윤찬열은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강 검사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육박해 오고 있어 반사적으로 쏜 것이었다.
강 검사가 총을 맞고 무릎을 꿇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윤찬열은 총구를 입안으로 들이밀었다.
“안 돼!!!!”
누군가 엄청난 완력과 속도로 윤찬열의 손목을 낚아챘다.
탕!
다시 한번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총알은 윤찬열의 머리를 꿰뚫지 못하고 불꽃을 튀기며 자동차 지붕을 뚫고 나갔다.
윤찬열은 손목이 부러진 듯 강렬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권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고통에 신음하며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방금 눈앞에서 총을 맞고 무릎을 꿇었던 강 검사였다. 윤찬열은 당혹하여 눈을 크게 뜬다.
강 검사의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려 윤찬열의 손목까지 적시고 있었다. 분명 맞긴 맞은 듯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바로 코앞에서 노리고 쏘았는데도 그 순간에 총알을 피했단 말인가. 게다가 스쳤다고는 해도 총에 맞아 쓰러진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일어나 자신의 팔을 낚아챌 수가 있단 말인가.
순간 이동을 한 게 아닌가 싶을 만치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강력한 손목의 고통만이 이 상황이 실제라는 실감을 던져주고 있었다.
강 검사는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은 강렬한 눈빛으로 씹어 먹을 듯 일갈했다.
“이 미친 새끼야! 처음부터 실탄을 쏴?!”
예상치 않게 총을 맞아 태산은 몹시 불쾌한 심경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해 데미지를 줄이지 않았다면 아무리 회복력 좋은 자신이라 해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정신 차려, 윤찬열! 그렇게 권력의 개로 살다가 이대로 개죽음할 셈이냐? 니 선배처럼?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니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란 말이야.”
윤찬열은 대꾸하지 못했다. 죽을 용기로 살아낼 수가 없었다. 살아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윤찬열은 태산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자신이 얼마나 겁쟁이인지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뭐가 그렇게 두렵냐? 이종길의 권력이 그렇게 무서워? 정 죽고 싶으면 이종길 골로 보내고 나서 죽어도 늦지 않아. 넌 그 정도 자존심도 없냐?!”
“아, 아니야! 난…….”
뭐라 항변하려던 윤찬열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거 좀 놓고 얘기합시다. 너무 아파요.”
그제야 태산은 자신이 윤찬열의 손목을 세게 그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머쓱해 손을 놓았다.
“죽을 작정이던 놈이 그 정도 가지고 엄살은.”
* * *
“죽을 작정이던 놈이 그 정도 가지고 엄살은.”
태산은 머쓱해 한 말이라지만 상당히 고통스러울 법도 했다. 놓아준 윤찬열의 손목이 부러진 듯 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윤찬열은 신음을 흘리며 다른 팔로 맥없이 떨어지는 손목을 붙잡았다.
“부장님! 괜찮으신교?! 총 맞으신 거 아닌교?”
조규완 주임이 수사관들과 달려오며 물었다.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총성이 연거푸 두 번이나 울려 수사관들은 혼이 쏙 빠진 얼굴이었다.
“상황 끝났습니다. 연행하기 전에 병원부터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많이 다칬습니꺼?”
조 주임이 다급히 태산의 몸을 살펴보다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이구야~ 우짜노. 어딜 맞은 겁니꺼. 마이 좀 벗어보이소.”
“살짝 스쳤습니다. 그보다 윤찬열 손목이 나간 것 같아서요.”
윤찬열을 끌어내던 수사관이 말했다.
“손목 외에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총알이 빗나간 것 같네요. 천만다행입니다.”
워낙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이라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보지 못한 수사관들은 태산이 달려들어 총구를 치웠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살을 시도하다가 오발이 있거나 해서 실패하고 손목 부상을 입었거니 짐작하는 것이었다.
수사차량에 윤찬열을 태운 후 일동은 인근 병원으로 출발했다.
“쫌만 참으이소. 퍼뜩 병원으로 가겠습니더.”
조 주임이 속도를 높이며 말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윤찬열은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수사관과 함께 방사선실로 향했다. 태산은 조 주임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직 의사의 처치를 받았다.
태산이 상의를 벗자 의사가 피범벅이 된 셔츠를 잘라내어 조심스럽게 피부에서 떼어냈다. 소독약을 부은 거즈로 상처를 닦아내던 의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생각보다 상처가 얕은데요? 몇 바늘 꿰매면 될 것 같습니다.”
“예? 그럴 리가예. 총 맞고 피를 음청 흘맀는데예.”
조 주임이 황당하다는 듯 덩달아 상처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길게 가로지른 상처는 빼꼼히 벌어져 있긴 했지만 그리 깊지 않았다. 이 정도 상처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나왔다니 믿을 수 없었다.
“살짝 스쳤다니까요.”
태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 주임에게 퉁을 주었다.
당직 의사는 소독을 마친 후 의료용 스테이플러로 태산의 상처를 몇 번 꾹꾹 눌러 찍어 봉합했다. 그리고 봉합한 상처 위에 거즈를 덮고 드레싱을 해준 후 치료를 끝냈다.
큰 부상인 줄 알고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치료가 너무 빨리 끝나 조 주임은 얼떨떨했다.
“크게 안 다치서 다행입니더.”
조 주임은 소란을 피웠던 것이 민망해 조금 머쓱해하며 태산에게 말했다.
“검사실에도 윤찬열이 잡았다고 알리야 되겠네예. 전화 좀 하고 오겠심더.”
조 주임이 응급실을 나가려는 것을 태산이 잡았다.
“알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예? 와예?”
태산이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검사실에 프락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윤찬열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면 관련자들이 대비할지도 모릅니다.”
입을 떡 벌리고 듣던 조 주임이 이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랄 수 있겠네예. 그라고 보믄 정진용이 체포할 때도 묘하게 빨리 알아채고 따라붙지 않았습니꺼.”
조 주임이 이윽고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를 의심하고 계십니꺼?”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천 계장이 유력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 기회에 확실히 알아보죠. 미끼를 좀 던져봅시다.”
“어떻게예?”
“윤찬열이 자살했다고 하세요. 저는 총 맞아서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고요. 프락치가 있다면 옳다구나 하고 조르르 달려가 이르겠죠.”
조 주임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려친다.
“그라믄 이제 수사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마음 놓고 있겠네예.”
“예, 중요 공범을 확보했으니 방심하고 있을 때 재빨리 치고 들어가야죠. 문제는 윤찬열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줄 것이냐인데…….”
태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덧붙였다.
“검사실에 연락하는 김에 윤찬열 가족관계 좀 조회해 달라고 하세요. 시신 인수 목적이라고 둘러대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더. 금방 다녀오겠습니더.”
당장 일어서는 조 주임에게 태산이 슬쩍 지적한다.
“주임님… 그… 텐션을 조금 낮추시고…….”
그제야 조 주임이 아차 해서 얼른 표정을 심각하게 바꾼다. 동료가 총에 맞아 병원에 누워 있는 와중에 너무 흥분한 톤으로 전화를 하면 의심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조 주임은 비밀스럽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뒤돌아서 응급실을 나갔다.
조 주임은 응급실을 나가 검사실로 전화를 걸었다. 연일 업무가 폭증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해도 새벽은 아니니 아직 야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네, 반부패수사부장실입니다.
역시 예상대로 윤지은 실무관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실무관님, 조 주임입니더.”
-아, 주임님! 어디세요? 종일 안 들어오시고…….
조 주임은 침통한 투로 급히 윤 실무관의 말을 잘랐다.
“부장님이 총을 맞았심니더. 용의자가 부장님 쏘고 바로 자살해가… 지금 응급실인데 중상이랍니더. 잠시 나온 거라 병원에 또 드가봐야 해서예. 길게는 얘기 못 하겠네예. 나중에 얘기합시더. 일단 시신 확인시키야 되니 윤찬열 경위 가족관계만 조회해서 보내고 바로 퇴근하이소.”
거짓말이 길어지면 꼬리를 밟힌다는 것을 조 주임은 그동안의 수사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마치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경황이 없는 것처럼 얼른 얘기를 마무리한다.
-네… 알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주세요.
전화를 끊은 후 조 주임은 긴장했던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빙긋 웃었다.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하게 연기해 낸 것 같다.
윤찬열이 치료를 받는 동안 태산은 진통제와 함께 수액을 맞았다. 수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안정하라는 의사의 지시였다. 그사이 조 주임은 윤 실무관에게서 받은 윤찬열 경위의 가족 사항을 태산에게 전해주었다.
윤찬열에게는 홀어머니와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사망한 윤찬열의 부친에게서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다.
부친은 윤찬열이 중학생일 무렵에 사망했는데 윤찬열과 마찬가지로 경찰이었다. 살인범과 대치 중에 산탄총을 맞고 순직하였으며 이후 일 계급 특진하여 경정으로 추서되고 훈장도 받았다.
태산은 윤찬열이 경찰이 된 이유가 아버지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버지의 존재가 그의 인생에 큰 그늘을 드리웠을 것이다. 그런 경찰이 되고 싶지는 않았든가, 아니면 그런 경찰이 되고 싶었으나 좌절했든가.
“조 주임님, 윤찬열 모친이 남양읍에 거주 중이네요.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가서 대기하세요. 저는 치료 끝나면 윤찬열 데리고 복귀할 테니 날 밝는 대로 모친 모시고 검찰청으로 오시면 됩니다.”
“예, 알겠습니더.”
조 주임은 지시를 받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멍하니 있기도 무료하고 진통제를 맞은 몸도 나른해 태산은 침대에 누워 잠깐 잠을 청했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탓에 강철 같은 체력의 태산임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부장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태산은 눈을 번쩍 떴다. 수사관 하나가 응급실 침대 머리맡에서 태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찬열 처치 끝났습니다.”
태산은 수사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갑시다.”
피에 푹 절은 셔츠는 이미 버렸으므로 태산은 맨몸에 정장 상의만 걸쳤다. 상의에도 피가 묻긴 했지만 그나마 셔츠보다는 덜 묻었고 색깔이 진해 크게 티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산은 치료를 마친 윤찬열을 수사차량에 싣고 수사관들과 함께 대구로 출발했다. 윤찬열은 조 주임이 없어진 것을 딱히 이상하게 생각지는 않는 듯했다. 하기야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서 수사관이 한 명 없어졌는지 어떤지에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으리라.
대구지방검찰청에 도착해 태산은 구치감에 윤찬열을 인계하며 말했다.
“해 뜰 때까지 잠 좀 자둬요. 아침 일찍부터 취조 시작할 테니까.”
윤찬열은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구치감 안으로 들어갔다.
태산은 집무실로 올라와 야근을 위해 가져다 두었던 여벌 옷으로 갈아입었다. 응급실 침대에서 꽤나 푹 잤는지 피로가 풀려 있었기 때문에 내친김에 아침까지 업무를 보았다.
출근 시간이 되자 먼저 윤지은 실무관이 나타났다.
“어? 왜 불이 켜 있지?”
윤 실무관은 중얼거리며 검사실로 들어서다가 집무실에서 나오는 태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음마야! 놀래라!!!”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금방 반색하며 반가워했다.
“부장님이셨어요? 괜찮으신 거예요? 어제 조 주임님이 전화하셔서 중상을 입으셨다기에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심하진 않았나 봐요. 다행이네요.”
“예, 별것 아니었는데 조 주임님이 좀 놀라서 상황을 과장한 모양입니다.”
태산은 그렇게 둘러대고는 물었다.
“어제 조 주임 연락 받은 후에 천 계장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윤 실무관은 천 계장이 권력과 싸우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며 이제까지 다 함께 열심히 해온 수사에 초 치는 소리를 하던 것을 떠올리며 불퉁하게 답했다.
“부장님 없으시니 이제 수사 다 끝난 것처럼 말씀하시고 바로 퇴근하셨어요. 용의자는 죽고 부장님도 중상이라니까 아무래도 맥이 빠졌겠지요. 이제까지 애썼던 게 다 허사가 될까 봐.”
윤 실무관은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래 같이 일해온 천 계장을 은근히 변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산으로서는 전해진 소식에 옳다구나 하고 바로 기뻐하며 이종길 의원에게 알리려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태산은 윤 실무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 시작합시다. 전윤지 검사에게 수사관들 대동하고 부장실로 와서 대기하라고 하세요.”
“네, 부장님.”
전 검사가 곧 수사관들과 함께 부장실로 왔다. 전 검사는 부장실로 들어서자마자 태산에게 바짝 다가와 물었다.
“부장님, 다치셨다면서요?”
“대수롭지 않습니다.”
전 검사는 태산을 면밀하게 살펴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괜찮아 보이시네요. 다행입니다. 총 들고 설치는 놈하고 실랑이하다 다치셨다기에 저는 크게 다치신 줄 알고 깜짝 놀랐네요.”
그러더니 갑자기 울컥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다.
“윤찬열 이 자식 완전 미친 거 아닌가요? 경찰이 되어가지고 범행이 발각되었으면 곱게 잡혀 올 것이지 총질이나 해대다니. 지금 구치감에 있죠? 제가 취조하면서 아주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전 검사의 말에 윤 실무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윤찬열이 살아 있다고요?”
그 말에 전 검사도 깜짝 놀라 윤 실무관에게 되묻는다.
“네? 윤찬열이 죽기라도 했어요?”
바로 그때 검사실 문이 벌컥 열리며 천성호 계장이 들어왔다.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모여 계십니까? 지휘할 사람도 없…….”
거기까지 말하다가 천 계장은 비로소 태산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어억~~~!!!”
태산은 씨익 웃으며 천 계장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놀라시죠?”
천 계장은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벌렁 나동그라졌다.
“어, 어떻게…….”
자리한 모든 이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무리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다 해도 동료가 멀쩡히 돌아왔다면 반가워할 일이지 저 정도로 아연실색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천 계장님에게는 제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될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이미 이종길에게 수사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알렸기 때문에?”
천 계장은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오히려 전 검사와 윤 실무관, 다른 수사관들이 놀라서 되묻는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천 계장님이?”
“그럴 리가요. 무슨 근거로…….”
태산은 아랑곳 않고 수사관들에게 지시했다.
“일단 체포하세요. 피의자들에게 수사 정보 흘린 혐의로. 윤찬열과 대질할 테니 곧 밝혀질 겁니다.”
“윤찬열도 살아 있다고?”
천 계장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어젯밤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 * *
이른 아침부터 취조실로 불려 온 윤찬열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선두에 들어오는 것은 강바른 검사였고 그 뒤를 따라 눈에 익은 수사관이 들어온다. 어젯밤 잠깐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체포될 당시엔 경황이 없어 깊게 생각지 않았지만 병원까지는 함께 있다가 갑자기 없어졌었다. 그때는 따로 출발했겠거니 생각했었지만.
수사관은 들어오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괘안심더. 들어오이소.”
그 말에 머뭇거리며 조그마한 인영이 뒤따라 취조실로 들어온다. 윤찬열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반쯤 엉덩이를 일으켰다.
“…찬열아…….”
윤찬열의 어머니가 무너질 듯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윤찬열은 대답 대신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시선을 돌려 강 검사를 노려보았다.
수사관 하나가 갑자기 없어진 이유가 이 때문인가? 가족까지 동원해 설득할 셈이었나?
“노모까지 불러들여야 했습니까?”
“모친께서 꼭 만나보셔야겠다고 해서 모셨습니다.”
“어떡할 셈으로요? 홀로 남을 어머니를 생각해라 뭐 이런 신파 드라마라도 찍게요? 아니면 가족을 빌미로 협박이라도…….”
불현듯 짝! 하는 매서운 소리가 취조실 안을 울렸다. 윤찬열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머리가 모로 홱 돌아간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검사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반성하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망정. 자식 놈 감옥 들어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고 싶은 어미 소원 들어주신 고마운 분이다.”
아들의 뺨을 힘껏 때린 윤찬열의 모친이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다가 갑자기 울컥 눈물을 쏟았다.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훔치며 모친은 가슴을 쳤다.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윤찬열은 뼈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본 강 검사가 자리를 비켜준다.
“앉아서 천천히 말씀하시죠. 긴 시간은 못 드리고 딱 30분만 드리겠습니다.”
강 검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수사관과 함께 취조실을 나갔다. 윤찬열의 모친은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 보고 있던 윤찬열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툭 던져 말했다.
“언제부터 아버지 명예를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그러세요?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잠복근무하느라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자식들 얼굴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아버지라고. 그렇게 간신히 시골 파출소 소장 자리 달아서 이제는 좀 편하게 살아볼까 했더니 부임하자마자 총을 맞고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고. 좋은 경찰이라고 아무리 칭송받아야 뭐 하느냐, 명예니 훈장이니 다 소용없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재산 한 푼 모아둔 것 없어 당신이 고생해서 아들들 다 교육시켰다고요. 제가 경찰이 되겠다고 했을 때도 얼마나 반대하셨어요?”
윤찬열은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감정을 쏟아놓았다. 이제까지는 어머니 앞에서 한 번도 꺼내놓은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차마 꺼내놓을 수 없었던 얘기였다.
윤찬열의 모친도 그에 질세라 목소리를 높였다.
“남편 없이 과부 혼자 사내애 둘 키우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니?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그래도 니가 장남이라고 이 어미가 신세 한탄 좀 한 거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는 니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경찰이 된다고 했을 때 걱정이야 왜 안 되었겠니? 하지만 속으로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뿌듯해했어. 그런데 지금… 지금 이 꼴이…….”
윤찬열 모친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떤다. 자식이 살인자가 되어 취조실에 앉아 있다는 말은 차마 끔찍해서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윤찬열의 모친은 차오르는 눈물을 다시 한번 훔쳤다.
“…네 아버지가 이 꼴을 보셨다면 속이 얼마나 썩어 들어갔을까? 무덤에 누워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시겠구나.”
윤찬열은 고개를 돌려 모친의 눈물을 외면하면서 고집스럽게 말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을지 몰라도 나는 그런 경찰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직장 동료들이고 마을 사람들이고 장례식 때에만 몰려와서 칭송하다가 금방 잊어버렸잖아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일에 헌신하다가 개죽음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몫은 내가 챙기며 살고 싶었다고요.”
“이게 니 몫을 제대로 챙긴 결과니? 고작해야 들통나서 제 손으로 목숨 끊으려고 한 주제에! 그건 개죽음이 아니야?”
어머니의 추궁에 윤찬열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바른 검사가 자신이 자살을 시도한 일까지 언급한 모양이다. 자존심이 상해 절로 고개가 떨어졌다.
“그래요. 아버지 얼굴에 먹칠한 자식,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걸.”
윤찬열이 중얼거리자 모친이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윤찬열의 어깨를 내려쳤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매운 손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나라를 팔아먹은 자식이라도 어미한테는 살아 있는 게 더 낫다!”
열을 올리며 감정을 쏟아내 놓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윤찬열의 모친이 문득 아련한 눈으로 말했다.
“찬열아, 네 아버지 아직 살아계실 때 네가 아버지 제복 입은 모습을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기억나니? 바빠서 놀아줄 틈도 없는 아버지였는데도 얼마나 존경하고 따랐었는지. 아버지 경모를 써보면서 크면 경찰이 되겠다고 항상 얘기했었잖니.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려나? 너무 오래된 일이라…….”
윤찬열은 당시의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니가 예전에 꿈꿨던 경찰이 지금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존경했던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네 어릴 적 꿈을 위해서라도 꼭 바로잡아라. 그리고 합당한 죗값을 치른 후에 돌아오렴. 어미는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리든 기다리마. 부탁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윤찬열의 눈에 회한의 눈물이 차오른다. 윤찬열은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윤찬열의 모친은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가만히 윤찬열의 손등을 도닥여 주었다.
정확히 30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강 검사가 수사관과 함께 취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말씀 끝나셨습니까?”
“네. 고맙습니다, 검사님.”
윤찬열의 모친은 미련 없이 일어서 강 검사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취조실을 나갔다.
강 검사가 윤찬열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이제 진술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까?”
“결국 제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까지 불러들인 걸 인정하시는 거군요.”
“알면서도 넘어가 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 법 아닙니까?”
강 검사는 윤찬열의 뾰족한 말을 웃어넘겼다. 윤찬열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전부 털어놓겠습니다.”
“좋습니다. 상세한 디테일은 천천히 진술하시고 먼저 하나만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심증은 가지고 있습니다만 윤찬열 씨의 분명한 증언이 필요합니다.”
강 검사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배진만 부장 살해를 사주한 사람이 누굽니까?”
윤찬열은 침을 꿀꺽 삼키고 힘겹게 말을 쥐어짜 냈다.
“…자유대한당 이종길 의원입니다.”
강 검사는 윤찬열의 입에서 이종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곁에 있는 수사관에게 지시하고는 취조실을 나갔다.
“조 주임님, 자리 좀 지켜주세요. 지금 바로 이종길 의원 잡아 오겠습니다.”
* * *
이종길은 자신의 범행을 쉽게 시인하지 않았지만 태산은 증인들과 대질하고 수집한 증거들을 들이밀면서 빈틈없이 압박해 들어갔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부인하던 이종길도 공범들이 하나같이 등을 돌려 각자의 살길을 도모하자 페이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서 하나둘 진술에 모순점이 나타났고 급기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종길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로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검사 양반, 좀 쉬었다 합시다.”
태산은 여유를 보이며 일어섰다.
“연세도 있으신데 너무 늦은 시간까지 취조하는 건 피의자 인권 보호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겠네요. 구치감 들어가서 푹 쉬시고 내일 일찍 다시 시작합시다. 데려가세요.”
“예!”
조 주임이 이종길을 데리고 취조실을 나간 뒤 태산은 진술을 기록하고 있던 윤 실무관과 함께 부장실로 돌아왔다.
“실무관님, 미안하지만 이종길이 쉰다고 해도 우린 쉴 수 없는 거 아시죠? 이종길 영장부터 신청해야 하고요. 오늘도 야근입니다.”
“알고 있어요. 사건 대충 마무리될 때까지는 야근할 거 각오하고 있었는데요, 뭐.”
윤 실무관이 시원스럽게 답했다.
“그래요. 일단 밥부터 먹죠. 저녁이 너무 늦어 시장할 텐데.”
“예, 부장님. 국밥집에 시킬까요, 중국집에 시킬까요?”
“중국집으로 하죠. 이종길 체포한 기념으로 요리 좀 쏠까 싶은데. 맘껏 시키세요.”
“와! 그래도 돼요?”
곧 조 주임이 이종길을 구치감에 수감하고 돌아왔다. 세 사람은 부장실 테이블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요리를 쫙 벌여놓은 채 거하게 만찬을 즐겼다.
윤 실무관이 볶음밥을 먹다 말고 문득 투덜거린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셨어요. 저까지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시다니.”
짜장면을 후루룩거리던 조규완 주임이 면발을 꿀꺽 삼키고는 머쓱해하며 고개를 꾸벅했다.
“미안합니더.”
젓가락으로 탕수육을 집다 말고 태산이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어쩔 수 없었어요. 실무관님도 천 계장과 공모하고 있을 가능성을 대비해야 했으니까요. 두 분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사이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죠. 저도 천 계장님이 프락치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면서 보기로는 아주 성실하신 분이었는데요.”
윤 실무관이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눈치채신 거예요?”
“비밀리에 출동한 건에서도 자꾸 저쪽 놈들이 들러붙어서 내부에서 정보가 새는 게 아닌가 의심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배 부장님이 습격당한 날도 누구를 만나러 갔을지 알 수 있었을 사람은 천 계장님뿐이더군요.”
“아~~ 그래서 그때 배 부장님 나가는 거 본 사람 있는지 물어보신 거였군요.”
그제야 윤 실무관은 태산이 언젠가 했던 질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확신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붙였습니다. 바쁜 업무 중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퇴근 후에 어딘가 들렀다가 새벽에 귀가했다더군요. 변두리에 있는 한적한 상가건물 2층인데 전등 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커튼으로 꽁꽁 막고 남의 이목을 피해 은밀히 드나들었답니다.”
윤 실무관이 깜짝 놀라 물었다.
“뭐예요, 그게? 무슨 비밀결사 같은 건가요? 프리메이슨 같은 거?”
태산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한누리성전 비밀 예배였습니다.”
윤 실무관은 예상치 못했던 정체에 입을 떡 벌렸다.
“영생기도원 사건 이후 한누리성전 교단이 해체되고 신도들은 모두 해산했지요. 하지만 잔당이 비밀리에 다시 모여 예배를 보며 교단 재건을 계획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빅월드 인베스트먼트가 한누리성전 새 교주 염민중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추궁해 봐야겠지만 천 계장도 교단을 통해 이종길 의원의 끄나풀이 된 것이겠지요.”
태산의 설명에 윤 실무관이 한숨을 내쉬며 개탄했다.
“사이비가 무섭긴 무섭네요. 숨어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