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59화 (59/78)

제1장 색출

“행님, 밤이 깁니더. 쌀쌀한데 몸 덥히게 소주라도 한잔하이소.”

바리케이드에 기대어 앉아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던 민동원은 동료가 곁에 앉으며 말을 걸어서야 고개를 들었다. 동료는 소주병과 종이컵을 바닥에 깔아놓은 종이 박스 위에 내려놓고 새우깡 봉지를 뜯기 시작했다.

새우깡을 뜯고 있는 박준수는 민동원의 초밥집과 같은 층에서 덮밥집을 하던 친구다. 음식점 주방에서 땀 흘려 일한 돈을 모아 드디어 자기 가게를 냈다고 의욕에 차 있었다. 그런데 가게를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빈손으로 쫓겨나게 생겼으니 속이 제 속이 아닐 것이다.

민동원은 박준수와 소주잔을 나누며 새우깡을 씹었다.

“행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예.”

조용히 소주만 홀짝이던 박준수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하지만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 같지는 않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혼자 중얼거리는 넋두리일 것이다.

주상복합 그랜드 팰리스 세입자들은 로비에 바리케이드를 쌓은 채 점거 농성 중이었다. 건물은 이미 빅월드 인베스트먼트에 경매로 넘어갔고 세입자들에게는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전세금 한 푼 돌려받지 못한 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건물에 저당권이 풀로 잡혀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 중개업자는 사업상 의례적으로 잡아둔 것일 뿐 건물주의 자금 사정은 넉넉하다 했다. 건물주는 대한건설 대표로 직접 건물을 지어 임대 사업을 하는 것이니 믿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이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다 해도 다른 건물을 팔아서라도 전세금을 돌려줄 것이라며.

대한건설이라면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건설사이므로 세입자들은 부동산 중개인의 달콤한 사탕발림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고 소액보증금 범위를 훌쩍 넘긴 탓에 빈손으로 쫓겨나게 되어서야 세입자들은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가 따졌다. 하지만 중개인은 임대인에게 위임받은 대로 설명한 것뿐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대한건설은 부도가 났고 대표는 잠적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세입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대한건설 정진용 대표를 사기로 고소하고 얼마라도 돈을 돌려받을 때까지 건물에서 버티는 것밖에 없었다.

경찰들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몇 번 밀고 들어왔지만 밀고 당기며 실랑이만 하다 물러났다. 시위대도 경찰도 폭력시위나 과잉 진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민동원이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경찰이 강제로 끌어낼 빌미를 주게 된다며 과열되는 순간마다 세입자들을 진정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점거 농성이 길어지자 생계를 위해 하나둘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당장 출근을 해야 하는 오피스텔 입주자들은 대부분 떠났고 민동원이나 박준수처럼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가게를 낸 상가 입주자들만 남았다.

남은 자들은 이곳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절박한 사람들뿐이다. 이들의 눈에서 서서히 독기가 비치기 시작했다.

“다들 악에 받쳐가 서슬이 시퍼런데예. 지금 부딪치면 큰일 나는 거 아입니꺼? 어차피 안 될 일이라믄 큰 문제 생겨서 잡혀가기 전에 이만하고 해산하는 기…….”

박준수는 말을 꺼내놓고도 차마 맺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농성이 이어지니 고통스러워 포기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차마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어 누군가 해산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고 있다.

민동원은 지금까지 세입자들의 리더 역할을 해왔으므로 결정을 내리기에 적당한 인물이었다. 민동원이 설득한다면 반발을 사기야 하겠지만 결국 모두가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박준수처럼 민동원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이제까지 버텨왔던 사람들을 포기시키는 역할은 차마 내키지 않았다.

“조금 더 고민해 보자. 칼을 뺐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이대로 흐지부지 그만두는 건 모양 빠지기도 하고.”

민동원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박준수도 더는 채근하지 않았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마라. 불침번 서야 하니.”

“이 밤에 경찰이 쳐들어오겠습니꺼.”

“경찰이 오면 차라리 다행이지.”

민동원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경찰은 공권력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경락받은 건물주가 독하게 마음먹고 버티는 세입자들을 끌어내기 위해 용역이라도 보낸다면 그쪽은 경찰처럼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민동원은 만약을 위해 밤에도 세입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서도록 했다.

부아아앙~

갑자기 자동차 엔진음이 건물 앞까지 쇄도해 오더니 승합차 3대에서 급정차했다. 차 안에서 시커먼 덩치들이 연장을 들고 쏟아져 내려온다.

“뭐, 뭐꼬?”

당황하여 벌떡 일어나는 박준수에게 민동원이 지시했다.

“빨리 경찰에 신고해라.”

자신들을 건물에서 끌어내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경찰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해야 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과연 그들이 제때 달려와 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별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나마도 경찰밖에 없다.

민동원은 주위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 용역들이 왔어요!”

“미친! 건물주가 용역까지 보낸나?”

“우짜노? 저놈들캉 싸워서 우째 버티노.”

파르라니 질린 얼굴로 우왕좌왕하는 세입자들에게 민동원이 소리쳤다.

“문 막을 거 더 가져오세요!”

용역들은 잠겨 있는 정문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밀어보기도 하다가 급기야 쇠 파이프와 야구방망이로 유리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강화유리가 워낙 단단해 한동안은 버텨주었지만 그마저도 여럿이 달려들어 두들기니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세입자들은 온갖 집기들을 차곡차곡 문 앞에 쌓아놓고 막았지만 문이 부서지기 시작하자 두려움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버텨야 됩니다. 미세요!”

민동원의 지시에 젊은 세입자들이 달려들어 집기를 문 쪽으로 더 단단히 밀어붙였다. 유리문을 깨부순 용역들이 반대쪽에서 마주 밀어붙인다. 뒤늦게 세입자들이 다 함께 허둥지둥 달려들어 버텨보지만 밖에서 밀어대는 힘이 워낙 강한 탓에 바리케이드가 점차 무너진다.

무너진 바리케이드 틈으로 용역들이 하나둘 밀고 들어오자 세입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막으려 달려들던 박준수도 야구방망이에 맞고 쓰러졌다.

“준수야! 괜찮냐?”

준수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피는 민동원을 용역 하나가 목덜미를 움켜잡고 끌어냈다. 민동원은 바닥에 질질 끌려가며 용역들에게 무차별로 발길질을 당했다.

그 와중에도 세입자들이 가져다 놓은 가재도구들이 아수라장이 된 로비 바닥에서 차이고 밟히며 굴러다니는 것이 눈에 밟혔다.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그때 건물 밖에서 또 다른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멈추고 무수한 발소리가 건물로 달려온다. 민동원을 걷어차던 발들이 멈칫하더니 건물 입구 쪽으로 급히 달려간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 있던 민동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건물 밖에서 한 무리의 덩치들이 용역들을 때려눕히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체구가 작고 마른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와 험악한 얼굴에 볼에 상처가 난 거구의 사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왔다.

입구를 막고 있던 용역이 작은 사내에게 달려들려는데 거구의 사내가 앞을 막아서더니 먼저 주먹을 날렸다. 상대가 우당탕 나가떨어지는 사이 작은 사내는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바리케이드를 가볍게 밟고 올라 건물 안으로 뛰어내렸다. 바리케이드 아래로 달려오던 용역 하나가 뛰어내리는 사내의 무릎에 가슴팍을 찍히고는 나동그라졌다.

작은 사내가 홀로 건물 안으로 뛰어든 사이 거구의 사내는 바리케이드 틈으로 진입하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용역들이 일제히 와아~ 하고 작은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웅크려 착지한 자세 그대로 옆으로 굴러 피하더니 일어날 때에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날이 번뜩이는 단도다.

덤벼드는 용역들에게 작은 사내는 가볍게 칼을 휘둘러 베고 찔렀다. 시선이 미처 좇아가기도 힘들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맞은 놈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 이리저리 튀는 피로 사내가 용역들을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뒤늦게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며 들어온 거구의 사내가 투덜거리며 타박했다.

“살살하십쇼, 성님. 아우들 몫도 남겨주셔야지라.”

사내는 칼에 맞고 쓰러져 발치를 굴러다니는 놈을 덜미를 잡아 멀리 던져 버렸다. 사내의 뒤로 바깥에 있던 용역들을 제압한 일행들이 바리케이드를 해체하며 들이닥쳤다.

아우라는 사람들이 용역들을 떠맡자 작은 사내는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바닥에 모로 누운 채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민동원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칼을 든 채 무릎을 굽혀 곁에 앉는 사내를 보고 민동원은 움찔했다. 민동원의 반응에 사내가 손에 든 칼을 의식하고는 칼날에서 피를 털어낸 뒤 허리 뒤에 찬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르는 것이다.

“여기 세입자시죠? 겁내지 마십시오. 저희도 정진용에게 받을 게 있어 온 사람들입니다.”

의외로 젠틀한 태도라 민동원은 조금 안도했다. 사내는 민동원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말했다.

“세입자분들 보이는 대로 데리고 피신하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하,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이곳을 대신 맡긴단 말인가. 민동원은 망설였지만 사내의 강한 눈빛에 밀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당한 사람들만이라도 빨리 병원에 보내야 한다.

민동원은 지척에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박동수부터 일으켜 세웠다.

“준수야, 괜찮냐?”

박준수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볼을 타고 흘러내려 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박준수는 끄응 신음을 하며 일어나 앉았다.

“괘안심더.”

“피가 많이 나는데. 머리를 맞은 거 아니야?”

“절마들 구둣발에 스쳤심더. 방맹이는 어깨에 맞았고예.”

그나마 다행인가 싶어 민동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박준수는 셔츠를 벗어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는 상처가 난 이마에 질끈 동여맸다.

“사람들 대피시키자.”

민동원은 박준수와 함께 아수라장이 된 로비 안을 뛰어다니며 세입자들을 한데 모아 후문 앞으로 데려갔다. 잠긴 후문을 열며 민동원이 말했다.

“다치신 분은 어서 병원으로 가시고 이대로 댁으로 돌아가실 분들은 돌아가세요.”

자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경찰은 왜 여태 안 옵니꺼. 아무리 우리가 불법점거 하고 있다 케도 깡패들이 사람을 패가꼬 몰아낼라는카는데.”

“경찰 그노마들을 어케 믿겠노. 그놈들도 힘 있는 놈들 편이제.”

세입자들은 침통해하면서도 차마 건물을 나서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살핀다.

“진짜 이대로 물러나자꼬예?”

“나중에 온 사람들은 뭡니꺼? 그 사람들은 우리 도와주는 것 같던데예.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더 안 버티겠습니꺼?”

“그놈들 뭐를 믿고? 뭔 속셈으로 도와주는지 알 게 뭐꼬?”

“아이고~ 여서 더 버티서 뭐 하겄노. 버틸 만큼 버팄다 아이가. 고마하자.”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박준수가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쌍노무 시키들! 지는 안 갈랍니더.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물러나겠심더. 누구든 한 놈이라도 책임질 때까지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버텨볼랍니더.”

민동원이 그런 박준수에게 퉁을 주며 말했다.

“야, 너는 대가리 터져서 피 칠갑을 해가지고 그런 말이 나오냐? 일단 병원부터 가. 여기는 내가 남아 있을 테니.”

민동원의 타박에 박준수가 머쓱해하면서도 슬쩍 토를 단다.

“행님도 많이 맞은 거 같던데예.”

“별거 아니야. 병원 갔다 오면서 파스나 몇 장 사 와라.”

“예.”

그제야 박준수도 순순히 답했다. 민동원은 망설이는 세입자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다치신 분들은 치료부터 받으시고 댁에 돌아가 푹 쉬세요. 그러고 나서도 다시 나올 마음이 드시면 돌아오시면 됩니다.”

민동원이 마음을 덜어주니 그제야 세입자들은 순순히 문을 나섰다. 박준수가 선두에 서서 세입자들을 인솔해 빠져나간다.

* * *

세입자들이 모두 나간 후에도 몇 사람은 자리를 뜨지 않고 남아 있었다. 민동원이 돌아보니 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씩 한다.

“민 사장님만 남기고 어떻게 갑니꺼? 지는 뭐 별로 다친 데도 없고예.”

“내는 어차피 나가도 갈 데도 읎다. 죽어도 여서 죽어야제.”

민동원은 그들의 마음이 짐작되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다시 로비로 돌아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몰라 조심조심 들어섰지만 의외로 로비는 조용했다.

용역들은 이미 대부분 도망치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몇 놈이 로비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뒤에 온 어깨들은 덩치 큰 사내의 지시에 따라 로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뒤에서 작은 사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사내는 인기척을 느끼고 힐끗 뒤를 돌아보았지만 개의치 않고 통화를 계속했다.

“예, 여기는 정리 끝났습니다. 들어보니 이 지역 신흥 조직인 신풍 패거리라고 합니다. 예, 그때 그놈들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낯이 익은 놈들도 몇 있었습니다.”

사내가 멀뚱멀뚱 서 있는 민동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피하실 분들은 다 피하신 겁니까? 크게 다치신 분은 없고요?”

“예. 다들 제 발로 나갔습니다. 진찰받아 봐야 알겠지만 심한 부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내가 곧바로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큰 부상자는 없다고 합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대체 누구한테 하는 보고일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사내가 전화를 끊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태산건설 김범진 대표입니다.”

사내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민동원이 명함을 받아 들여다보며 어리둥절해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다른 세입자들도 모두 궁금한 듯 범진의 입만 쳐다보았다.

“대한건설이 그랜드 팰리스 시공할 때 하도급을 주었는데 공사비를 다 정산해 주지 못했더군요. 우리 회사가 하도급사로부터 공사비 채권을 양수했습니다. 그 채권에 기해 유치권을 행사하려는 겁니다.”

칼을 쓰는 대표에 직원들끼리 형님, 아우 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조폭 같았지만 어쨌거나 정진용과 해결할 부채가 있고 점거에 법적 근거도 있는 것 같다. 세입자들은 우군을 얻은 심정으로 얼굴에 화색을 띠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지금 검찰이 정진용 신변을 확보해서 관련자들을 은밀히 수사하고 있습니다. 곧 결과가 나올 테니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이어진 범진의 말에 세입자들은 환호성을 올리고 박수를 쳤다. 기약 없는 기다림인 줄로만 알았건만 해결이 눈앞이라 하니 희망을 얻은 것이다. 세입자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글마들 또 올지 모르니까 우리도 뭘 좀 들고 있어야 되지 않켔나? 책상 다리라도 뿌사가꼬 각목이라도 만드까?”

“좋네예. 창고에 찾아보믄 연장 같은 것도 좀 있을 낀데.”

민동원이 곤란한 얼굴로 말리려 하자 범진이 먼저 나섰다.

“용역이 다시 오면 저희가 맡겠습니다. 경찰과는 최대한 부딪치지 않는 편이 좋고요. 괜히 진압할 빌미를 줘서는 안 되니까요. 그동안 수고하셨으니 여러분은 좀 쉬십시오.”

범진이 그렇게 말하고는 병천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박 이사, 여기 준비한 물건들 좀 가져와.”

“예, 대표님”

병천은 뭔가 좀 간지러운 듯한 표정으로 듣더니 덥석 대답하고는 직원 몇을 이끌고 사라졌다. 잠시 후에 돌아온 직원들의 손에는 모포와 간편식, 생수 등이 들려 있었다.

직원들이 세입자들에게 원하는 대로 물품을 나눠주었다. 세입자들은 야식을 배부르게 먹은 후 로비 구석에서 모포를 넉넉히 깔고 덮고 누웠다. 지켜주는 이들도 있으니 간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곤히 잤다.

다음 날, 건물 밖으로 나갔던 이들이 하나하나 돌아오기 시작했다. 박준우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파스를 한 봉지 가득 사 들고 돌아왔다.

“행님, 파스 사 왔심더!”

민동원은 반갑게 박준우와 포옹을 나누었다.

“일마야! 니는 웬일이고?”

민동원은 동료들이 누군가를 반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농성을 포기하고 떠났던 이들이었다.

“용역까지 왔다 갔다는데 두고 볼 수 있습니꺼. 같이 싸워야지예.”

“몬다고 왔노. 니 먹고 살기도 바쁠낀데.”

“잘 왔다. 잘 왔어.”

세입자들은 타박하는 한편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민동원은 박준수에게 은근히 눈총을 준다.

“니가 알렸냐?”

박준수가 머쓱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벌써 소문 다 퍼졌데예. 잔뜩 열받아가꼬 사람들 더 불러 모으겠다는데 우째 말립니꺼.”

뜻밖의 원군까지 더해지자 세입자들은 사기 백배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오후가 되니 여느 때보다 훨씬 많은 수의 경찰들이 보호 장구와 진압장비까지 갖추고 정문 앞으로 몰려왔다. 세입자들은 배신감과 분노로 술렁였다.

“뭐꼬? 절마들. 우리가 당하고 있을 때는 불러도 꼼짝도 안트만.”

“그러게 말입니더. 우리 끌어낼라고 많이도 몰려왔네예.”

“고분고분 물러나 줄 순 없지예. 제대로 한번 붙어보입시더!”

세입자들도 경찰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결전의 각오로 팽팽히 대치했다.

“지금 즉시 해산하고 퇴거하십시오! 협조하지 않으면 강제집행 하겠습니다!”

경찰이 메가폰으로 쩌렁쩌렁 경고를 보냈다. 그때 세입자들 사이에서 범진이 불쑥 나와 경찰 대열로 다가갔다. 경찰들은 순간 긴장했으나 홀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경계를 늦춘다. 경찰 쪽 책임자가 다가오는 범진 쪽으로 한 발짝 나선다.

“뭡니까?”

경찰은 의심 섞어 물었다. 시위대에서 못 보던 얼굴일뿐더러 입성이 너무 멀끔하다.

“태산건설 김범진 대표입니다. 전 건물주인 정진용 씨에게 채권이 있어서 유치권 행사 중입니다.”

범진이 품에서 서류를 내밀어 경찰에게 건넸다. 경찰이 서류를 받아 들고 유심히 들여다본다. 공증을 받은 채권양도 계약서였다. 하도급사인 한성이 도급사인 대한건설에게 정산받지 못한 공사비 채권을 태산건설에 양도한다는 내용이다.

경찰은 곤란한 듯 끙 하고 앓고는 서류를 범진에게 돌려주었다.

“유치권 행사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현장 점유를 계속하셔야 하는데 뒤늦게 채권 양도받고 지금 막 점유 시작하신 거 아닙니까?”

“저분들이 지금까지 점유하고 계셨잖습니까?”

범진이 세입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범진이 자신들을 가리키며 흘낏 돌아보자 세입자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궁금해 고개를 뽑고 쫑긋 귀를 세웠다.

“저 사람들은 다른 건으로 불법점거 하고 있는 것이고요. 아무튼 유치권 인정 못 하니 당장 퇴거하세요.”

“그럴 수는 없죠. 공짜로 인수한 채권도 아닌데 본전은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강제집행 할 수밖에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서로 할 일을 하도록 하죠.”

범진이 돌아서 세입자의 대열로 돌아오자 민동원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뭐랍니까?”

“협상 결렬입니다. 밀고 들어올 모양인데요. 저희가 앞에서 막을 테니 세입자분들은 뒤로 물러나 계세요.”

“그럴 순 없죠. 우리 일이기도 한데요.”

“맞습니더! 같이 싸웁시더!”

지난밤 이후로 부쩍 친해진 세입자들과 태산건설 직원들이 서로 어깨를 걸고 대열을 다시 정비했다. 민동원이 일동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여러분, 어디까지나 비폭력시위가 되어야 합니다. 대오가 무너지지 않게만 버티세요.”

“야!”

“걱정 마이소!”

경찰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진압봉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방패를 이용해 사정없이 밀어붙인다. 세입자들과 조직원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양쪽이 기합을 올리며 이리저리 밀고 밀리느라 정신없는 사이 볼캡을 눌러쓴 청년 하나가 슬그머니 대열을 이탈했다. 대열의 뒤쪽으로 빠진 청년은 두려움에 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품에서 슬그머니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소주병이었으나 보통의 것과는 달랐다. 기름에 젖은 심지가 주둥이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화염병이었다.

청년은 급히 라이터를 찾아 심지에 불을 붙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떨려 좀처럼 불을 켜지 못한다. 라이터를 찰칵이며 청년은 곁눈질로 세입자들을 살폈다. 세입자들은 몸싸움을 하느라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마침내 라이터가 켜지고 청년이 심지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누군가 라이터를 든 청년의 손목을 재빨리 낚아챘다.

“이 썩을 자슥이 뭔 사달을 내려고 이런 흉악한 것을 가져왔다야? 니 뭐냐?”

병천이 청년의 손목을 높이 들어 거의 대롱대롱 매달다시피 하고 일갈했다. 청년은 어찌할 줄 모르고 시선을 떨어뜨린 채 눈을 꾸욱 감았다.

* * *

“경위님, 경비과 김 경사에게서 연락 왔습니다. 어젯밤 신풍 애들 작살냈던 놈들 역시 태산건설 애들이랍니다. 지금 그랜드 팰리스에서 세입자들과 함께 농성 중이라고 합니다.”

이종민 경사의 전언에 윤찬열 경위는 낮게 신음했다.

하루빨리 그랜드 팰리스에서 세입자들을 몰아내라는 이종길의 채근을 받고 어젯밤 신풍까지 동원해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들려온 소식은 갑자기 나타난 다른 조직 놈들에게 밀려 소득 없이 물러났으며 해가 밝자마자 검찰이 신풍 사무실에 들이닥쳐 주동자들을 싸그리 연행해 갔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윤찬열이 사주했던 두목은 어젯밤의 작전이 실패한 직후 만일을 위해 피신해 있으라 지시해 두어서 체포 직전에 도피할 수 있었다.

윤찬열은 검찰과 태산건설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느낌이 싸했다.

강바른 검사가 배진만 부장의 후임으로 발령받은 것만 해도 영 재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필 정진용을 채어 간 놈이 태산건설 대표라고 들은 후부터는 줄곧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태산건설 대표 김범진은 이웅배 WB홀딩스 회장이 행방불명된 직후 조직을 장악했다. 윤찬열은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분명 김범진이 이웅배를 처리하고 조직의 차기 패권을 차지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직후 이웅배와 커넥션이 있었던 구준태 인천시장이 독직 혐의로 낙마했다. 구준태가 이웅배를 사주해 현직 검사를 살해하려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모든 혐의를 밝혀낸 사람이 바로 구준태가 죽이려 했던 그 검사, 강바른이었다.

윤찬열은 강바른과 김범진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둘은 긴밀한 협력관계가 아닐까. 김범진이 차기 수괴 자리를 노리고 강바른과 모종의 딜을 했을지도 모른다.

김범진도 모습을 드러냈다. 심지어 조직의 영역도 아니고 연고도 없는 타 지역임에도.

두 사람이 누군가의 목을 조이기 위해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김범진이 이미 조직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강바른과 같이 움직이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구준태 때는 운 좋게 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 그들의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윤찬열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입자들도 조폭을 용역으로 고용한 건가? 그렇다면 잘됐군. 불법점거에 폭력단까지 끌어들였으니 더 봐줄 이유가 없지. 당장 다 끌어내라고 해.”

“그게… 세입자들이 부른 게 아닌 모양입니다.”

이종민 경사가 난감한 듯이 말했다.

“태산건설에서 하도급사 채권을 양수받았다네요. 유치권 행사한다면서 버티고 있는 모양인데요. 요건을 충족하느냐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태산건설 측에 권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세입자들과 같이 버티면 강경 진압 하기가 곤란해지긴 합니다.”

윤찬열은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휴지 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채권을 인수하면서까지 방해하겠다는 건가?”

태산건설이 그런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그 뒤에 강바른이 있다면? 이 분쟁의 뒤에 숨어 있는 거물을 잡기 위해 세입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라면?

윤찬열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강바른이 무언가 단서를 잡아내기 전에 빨리 이 대치상황을 마무리해야 한다.

“내부에 들여보낸 놈한테는 잘 얘기해 뒀겠지.”

“예, 오늘 안에 반드시 사건을 만들라고 신신당부해 뒀습니다. 큰 거 하나 터지면 싹 잡아넣을 수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 * *

“지도 모릅니더. 사장님이 하라고 하니까 일 들어왔나 보다 하는 기지 누가 시킸는지 그런 것까지 우예 압니꺼. 신경도 안 썼습니더.”

신풍이 운영하는 용역업체인 대광인력 사무실에서 잡아 온 직원이 태연히 지껄였다. 태산은 반복되는 진술에 짜증이 밀려와 미간을 모았다.

신풍이 그랜드 팰리스를 급습했다는 범진의 보고를 받은 뒤 태산은 곧바로 검찰수사관과 광역수사대를 동원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대광인력 사무실과 신풍 조직원들의 숙소를 급습해 신풍 패거리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신풍회는 전날 밤 태산건설 조직원들에게 얻어터져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터라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맥없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패잔병 몰골로 굴비 엮듯 줄줄이 구치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잡아 온 놈들을 신문하는 과정에서는 그다지 소득이 없었다. 대가리는 이미 튀었고 남은 놈들은 피라미들뿐이었다. 하나같이 사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자신들은 배후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진술했다.

딱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제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대가리가 시키는 일만 하는 머저리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잡혀 들어와서도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추호도 모르는 듯 구치감 안에서 잘도 먹고 자고 싸고 팔자가 좋았다.

그나마 대가리가 합법적인 사업을 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단속은 열심히 했는지 두목을 꼬박꼬박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 하나는 잘했다.

“일을 누가 의뢰했는지는 사장밖에 모른다? 그 사장은 지금 어디 있지?”

“모르지예. 지난밤에 전화받고 나가신 뒤로 쭉 안 보이시는데.”

“누구 전화를 받고 나갔는데?”

“그거야 모르지예.”

“사장이 갈 만한 데는? 가족이라든가 여자라든가.”

“만나는 여자가 있기는 한데… 거기에 갔을라꼬예. 너무 뻔한데. 숨을라카믄 금방 잡힐 데로는 안 가겠지예.”

“그건 우리가 판단하는 거니까 쓸데없이 대가리 굴리지 말고 아는 대로 진술해.”

여자 집에 숨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여자가 숨은 곳을 알거나 계속 연락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었다.

때마침 주머니 안에서 대포 폰 진동이 울려 태산은 전윤지 검사에게 신문을 맡기고 일어났다.

“사장 애인에 대해서 더 캐보세요. 다른 놈들한테도 물어보고.”

“예, 알겠습니다.”

집무실로 들어간 태산이 범진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사람들이 몸싸움을 하는 소음이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

-경찰이 작정하고 왔습니다. 오늘 안에 끝내려는 모양입니다.

“버틸 만하냐?”

-예, 그건 괜찮습니다만… 어쨌든 직접 한번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주위의 소음이 낮아진다. 범진이 어딘가 외진 곳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범진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병천이가 쥐새끼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범진의 말에 태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알았다. 지금 바로 가마.”

태산은 그대로 검찰청을 나와 차를 몰고 현장으로 달렸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양쪽은 잠시 소강상태로 휴식을 취하며 대치 중이었다.

경찰 병력과 장비를 보니 범진 말대로 오늘 당장 끝내려는 경찰의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래도 아우들이 잘 버텨준 모양이다 생각하며 태산은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태산은 그랜드 팰리스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인상을 구기고 세입자들의 대오를 노려보고 있던 형사 하나가 태산을 발견하고 급히 다가와 저지했다.

“무슨 용건입니까? 건물엔 들어가실 수 없는데요.”

태산이 기다렸다는 듯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물었다.

“소속이 어떻게 되죠?”

태산이 내민 신분증에는 사진 아래에 ‘부장검사 강바른’이라고 직급과 이름이 찍혀 있었고 대구지방검찰청의 직인이 선명했다. 검사 신분증을 보고야 형사의 기세가 조금 움츠러든다.

“대구수성경찰서 경비과 김홍식 경사입니다.”

형사가 머뭇거리는 것을 한 귀로 들으며 태산은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래요, 김 경사.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이 사람들 끌어내는 겁니까?”

“불법점거자들이고 서장님 지시도 있었습니다만…….”

태산이 위압적으로 나오니 김 경사는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저 중에는 정당한 권리자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게다가 불법점거자라 해도 억울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고. 지금 관련사건 수사 중이니 진상을 제대로 밝힐 때까지 일단 철수하세요.”

“예?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상부 지시가 있는데 임의로 철수할 수는 없습니다. 제 권한도 아니고…….”

“그래요? 그럼 권한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서장하고 얘기하면 됩니까? 지금 바로 수성서 연결하세요.”

김 경사는 머뭇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본서로 연락했다.

“서장님, 경비과 김홍식입니다. 지금 그랜드 팰리스 퇴거명령 집행 중인데 검찰이 와서 철수하랍니다. 어떻게 할까요?”

김 경사가 채 답을 듣기도 전에 태산이 대뜸 핸드폰을 낚아챘다.

“수성서 서장님이십니까?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장 강바른입니다. 방금 김 경사가 보고드린 대로 검찰이 관련사건 수사 중이니 퇴거명령 집행은 당분간 보류해 주십시오.”

서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차고는 말했다.

-이보세요. 강바른 부장이라고 했습니까? 아무리 검사라 해도 이런 식으로 경찰력 행사를 방해하는 건 월권 아닙니까? 경찰의 수사권 침해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태산이 문득 중얼거렸다.

“경찰력 행사라… 정작 행사해야 할 데에는 안 하고 쓸데없는 데 경찰력을 낭비하시는 것 같은데요.”

-뭐, 뭐라고요?!

서장이 펄펄 뛰며 뭐라고 하려는 것을 태산은 재빨리 끊어냈다.

“제가 오전 중에 신풍회 애들 잡아넣고 오는 길입니다만. 관할구역 내에 조폭이 버젓이 사무실 열고 용역 일을 하고 있는데 단속도 안 하고 있으니 수성서가 제대로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신풍회 이야기가 나오자 서장은 적잖이 당황하며 변명을 주절거린다.

-뭔가 오해하신 것 아닙니까?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회사로 알고 있는데요. 일부 직원이 신풍회 출신이긴 합니다만 예전에 손 씻고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회사라고는 말 안 했는데도 아시는 걸 보니 대광인력과 신풍회 사정에 대해서 빠삭하신가 봅니다?”

태산의 추궁에 서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경찰 중 누군가가 신풍회를 비호하면서 사조직으로 동원한 혐의가 있어 조사 중입니다. 관할을 고려하면 귀서 소속일 가능성이 매우 높겠군요. 계속 철수를 거부하신다면 그랜드 팰리스는 경찰에 맡기는 대신 지금 당장 신풍회 건으로 수성서를 털겠습니다.”

-아니, 이것 보세요. 그렇게 다짜고짜…….

서장은 당황하여 뭐라 말하려 했지만 태산은 가차 없이 잘라 버리고 최후의 딜을 건넸다.

“지금 경찰력을 철수한다면 수성서에서 직접 내사해 책임질 사람을 밝힐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서장은 침통하게 신음하며 침묵을 지켰다. 태산은 더 기다리지 않고 전화기를 김 경사에게 넘겼다. 김 경사가 전화를 받더니 서장에게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서장의 답을 들은 김 경사가 씁쓸한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돌아서 경찰들에게 지시했다.

“철수한다!”

경찰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장비를 챙겨 경찰 버스에 올랐다. 물러가는 경찰을 보고 세입자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태산은 세입자와 태산건설 직원들이 대오를 짜고 서 있는 건물 로비로 들어섰다. 세입자들이 말 몇 마디로 경찰을 물러나게 한 사람이 대체 누군가 호기심을 보이며 몰려들었다.

“대한건설 정진용 대표 조사 중인 대구지검 검사 강바른입니다.”

태산의 소개에 임차인들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반짝였다.

“경찰이 물러났으니 여러분도 이만 해산하십시오. 여기는 태산건설분들이 지켜줄 겁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태산의 말에는 세입자들도 선뜻 따르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무리 그래도 남들에게만 맡기놓코 떠나기는 영 찝찝한데…….”

“이분들이야 자기들 챙길 게 있어가 여기 온 기지 챙길 거 챙기고 나면 우리 처지까지 살펴주겠능교.”

태산건설이 태산의 지시로 휴지 조각이 된 채권을 인수하면서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세입자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빅월드 인베스트먼트가 그랜드 팰리스 입찰받는 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포착했습니다. 혐의를 밝히면 경락은 취소될 테고 여러분은 퇴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한건설이 결국 재기하지 못해 다시 경락된다고 해도 그동안 시가가 폭등했으니 전세금은 충분히 정산받고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책임지고 수사하겠습니다. 안심하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태산의 자신만만한 말에 세입자들이 흔들리고 있을 때 민동원이 쐐기를 박았다.

“검사님이 도와주신다는데 한번 믿어봅시다. 대한건설분들도 어제오늘 같이 싸운 동지 아닙니까?”

그제야 세입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경찰도 갔는데 해산하자. 잘 안 풀리믄 또 모이믄 되제. 다시 모이는 한이 있어도 당분간은 푹 쉬는 기 좋겠다.”

“맞다. 할 만큼 했다. 고생했으이 이젠 쫌 쉬도 된다.”

해산으로 의견이 모이자 세입자들은 떠나기 전 한 사람 한 사람 태산의 손을 잡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 당부를 남겼다.

“검사님, 아무도 우리 편을 안 들어주서 을매나 서러웠는지 모릅니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더.”

“검사님, 잘 부탁드립니더. 그기 지 평생 모은 생명 같은 돈이라예.”

“돈은 다 못 찾드라도 우리 억울함을 좀 풀어주이소.”

태산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세입자들이 하나둘 떠나고 건물 안에는 태산건설 직원들만 남았다. 그제야 태산이 로비 뒤쪽으로 가서 범진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경찰도 철수했고 신풍회도 잡아넣었으니 앞으로는 별일 없을 거다. 경비를 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철수해도 좋다.”

“예, 형님.”

태산이 문득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쥐새끼는 어디 있냐?”

방금 전까지 세입자들의 말에 자세를 낮춰 겸허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태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기등등한 야수의 눈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범진은 내심 전율을 느끼며 조용히 앞장서서 태산을 안내했다. 계단을 통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범진은 주차장 구석의 창고로 들어갔다. 눅눅한 시멘트 냄새가 풍겨오는 창고 안에는 한 청년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꿇어앉아 있었고 그 옆을 병천이 지키고 있었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화염병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그대로 놔뒀다면 누군가 크게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범진이 설명에 태산은 이마를 모았다.

사상자가 생겼다면, 그것도 경찰에 희생자가 생겼다면 시위자들은 변명의 여지 없이 모조리 잡혀 들어갔을 것이다. 이 작전을 기획한 자의 음험한 머릿속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현장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세입자들에게 물어보니 중식당 막내아들이라고 합니다. 부친이 점거 중일 때 한 번씩 찾아왔었는데 부친이 농성 포기하고 나간 후에는 안 보이다가 오늘 아침에 다시 합류했다고 하네요.”

“확실히 수상쩍군.”

태산은 청년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앉아 눈을 마주 보며 인상을 살폈다. 부친조차 포기한 농성 현장에 의리 때문에 다시 찾아올 정도로 성실하거나 정의감 넘치는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 놈팡이 아들놈에 가까워 보이는데.

“누가 시켰냐? 순순히 불면 쪼까 봐주고.”

태산은 악의를 담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 * *

“누가 시켰냐? 순순히 불면 쪼까 봐주고.”

병천은 깜짝 놀라 강바른 검사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까지는 듣지 못했던 남도 사투리 억양이 슬쩍 비치는데 그 말투가 꼭 생전의 임태산 같았기 때문이다.

청년의 앞에 몸을 숙인 채 비소를 머금고 있는 강 검사의 눈은 섬뜩하리만치 잔혹한 빛을 띠고 있었다. 책상물림 공무원의 눈빛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야성이 느껴졌다.

병천은 강 검사를 자신도 모르게 ‘형님’이라고 부르고 말았던 때를 떠올린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병천이라고 부르며 구하려 뛰어들었던 그때도 병천은 강 검사에게서 태산의 모습을 떠올렸었다.

닮았나? 아니,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닮아 보인다.

‘대체 정체가 뭐여?’

병천은 의혹을 담아 가만히 강 검사를 지켜보았다.

“시, 시키다니요. 저는 그냥 아버지 가게가 걸린 일이니까 아버지 대신해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왜 진즉 나오지 않고 이제야 합류했지? 그것도 화염병까지 만들어 들고. 사고를 일으켜 농성을 방해하려는 의도 아닌가?”

이어지는 강 검사의 추궁은 어느새 매끈한 표준어로 돌아가 있었다.

병천은 자신이 잘못 들었던 것이려니 한다. 태산 형님이라면 저렇게 점잖게 물어보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단 개 패듯이 패서 기선을 잡고 난 후에 시작했겠지.

태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안타까웠던 나머지 말도 안 되는 망상까지 하는 모양이다 생각하며 병천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작 태산 본인은 병천이 자신을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가만히 청년의 답을 기다린다.

“용역들까지 왔다 간 마당에 그냥 있을 수는 없다 싶어서… 무기라도 하나 들고 나와야 할 것 같아서요.”

“즉흥적으로 들고 나왔다고 하기에는 준비가 필요한 걸 골랐군. 요즘 같은 때에 화염병 만들 줄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을 텐데.”

태산의 지적에 청년은 움찔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세입자들은 비폭력 대응으로 협의하고 계속 서로 주의를 주고 있었습니다. 즉흥적인 생각으로 가지고 나온 무기라 해도 방침에 따랐다면 미리 치웠겠죠. 계속 숨겨놓고 있다가 몰래 던지는 것이 아니라.”

범진이 청년을 노려보며 말을 보탰다. 청년은 입만 뻐금거릴 뿐 뭐라고 변명하지 못하고 눈을 굴린다.

“들었지? 너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야.”

태산이 살벌한 표정으로 청년 쪽으로 더욱 몸을 기울이니 청년이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빼며 사정한다.

“자, 잠깐만요.”

태산이 손을 뻗어 청년의 몸을 더듬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청년은 우는소리를 했지만 태산은 아랑곳 않고 청년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더니 점퍼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청년이 화들짝 놀라 허둥거리자 초기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태산이 선뜻 청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잠금 풀어라.”

잠깐 안도하는가 했던 청년이 흠칫 놀라 차마 손을 놀리지 못하고 있을 때 태산이 말을 보탰다.

“지문 인식이네? 니가 정 못 하겠다면 안 해도 상관은 없다. 너 얼러서 설득하는 것보다 손가락 잘라서 잠금 푸는 쪽이 훨씬 간단할 테니까.”

태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곁에 있던 범진이 허리 뒤춤에서 단도를 꺼내 손에 들었다. 칼날에서 예리한 빛이 번뜩인다.

태산의 눈빛을 봐도, 말 떨어지자마자 칼을 빼 드는 범진의 기세로 봐도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청년은 그 속에 치명적인 증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떨리는 손으로 잠금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잠금이 풀리자마자 태산이 핸드폰을 휙 낚아채 간다. 그러고는 최근 통화 내역을 조회하기 시작했다. 1초가 한 시간 같은 숨 막히는 순간이 지나고 드디어 태산이 씨익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찾았다!”

핸드폰 화면에는 ‘짜바리’라고 발신자 이름이 표시된 통화 내역이 찍혀 있었다. 통화 시간은 어제 새벽, 용역들이 밀고 들어왔다가 물러난 직후였다.

“짜바리가 여기 말로 경찰이지? 어젯밤 이후에 통화 내역이 이거 하나뿐인데 용역이 세입자들을 덮쳤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이 짜바리 놈이 알려주던가?”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더듬거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 그게… 짜바리는 친구 별명입니다. 소식은 아버지가 듣고 말해줬어요.”

태산은 콧방귀를 뀌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청년에게 물었다.

“그 친구 이름이 뭐야?”

“…자, 장호… 이장호입니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 짜낸 이름이라는 것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친구 이름 중 아무거나 하나를 댔거나 아니면 지어낸 이름이 틀림없다.

태산은 연결음이 들리는 동안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창고 안에 울려 퍼지는 동안 청년은 심장마비라도 일으킬 듯 눈을 부릅뜨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왜 여태 잠잠해?

청년이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태산이 그런 청년을 보며 씨익 웃고는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이장호 씨?”

순간 상대는 침묵했다. 그러다가 돌연 전화를 끊어버린다. 태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큭 웃었다.

“거짓말하니까 금방 막히지? 다 탄로 났으니 더 이상 잔머리 굴리지 말고 불어. 이 짜바리란 놈 누구야?”

태산이 청년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물었다. 상대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보나 마나 대포 폰일 것이다. 추적은 힘들겠지만 후에 경찰이 폭력시위를 사주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청년은 잔뜩 얼어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득 태산의 시선이 병천이 가져다 놓은 화염병에 꽂힌다.

“요새도 화염병 같은 거 만들어서 시위하는 놈이 있냐?”

태산은 화염병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제대로 만든 거긴 하냐? 불은 잘 붙나?”

태산은 말이 끝나자마자 화염병 심지를 뽑아 던지고 안에 든 내용물을 청년의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독한 신나 냄새가 풍기는 액체가 온몸을 타고 흐르자 청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태산은 청년을 뒤따라가며 소주병이 다 빌 때까지 탈탈 털어냈다. 청년은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자 벽에 등을 기대고 흐느꼈다.

태산은 빈 병을 던져 버리고 범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범진이 바로 알아듣고 라이터를 꺼내 건네준다. 태산은 라이터를 손에 쥐고 흐느끼는 청년에게 몸을 숙였다.

“화염병을 던져서 누구 하나라도 다쳤다면 그 핑계로 깡그리 잡아들일 작정이었겠지. 그따위 속셈으로 사람을 태울 생각을 하다니. 불에 타는 고통을 니가 아냐?”

태산의 눈 속에 분노의 불꽃이 일렁인다. 범진은 태산의 마음을 짐작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청년은 흐느끼면서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면 이 기회에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태산이 찰칵 하고 라이터 불을 켠 순간 청년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뭐든 다 할게요!”

“니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사주한 놈을 부는 거밖엔 없어.”

태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청년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종민이에요! 그 사람이 시켰어요!”

익숙한 이름에 태산의 눈이 커진다.

“이종민? 설마 수성서 이종민 경사?”

“예, 맞아요! 그 사람이에요!”

태산은 혀를 찼다. 맹물인 것처럼 굴던 형사가 사실은 의뭉을 떨고 있었던 것인가. 그놈이 배진만 부장 피습사건의 수사를 맡고 있었다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둔 셈이다.

“그놈이랑은 어떻게 엮인 거냐?”

태산이 라이터를 거두며 캐묻자 청년은 남김없이 불었다.

“대광인력 사무실에서 알바를 했었는데 거기 사장님이랑 친했어요. 형님 아우 하고 지내길래 처음엔 경찰인 줄도 몰랐죠. 아버지가 농성하고 있을 때 동정을 알아봐 달라 그래서 심부름값 받고 왔다 갔다 했어요.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갈아입을 옷 가져다 드린다는 핑계로 한 번씩 얼굴 비치고 가니 아버지도 좋아하시더라고요.”

한번 입이 터지니 막힘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랬는데 아버지가 화병 때문인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지금 반신불수로 병원에 누워 계세요. 사기당한 건 억울하지만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지 되지도 않을 일에 열 올리다가 그렇게 된 아버지도 원망스럽고 병원비는 쌓여가는데 돈 나올 데는 없고… 그때 형사님이 연락했어요. 시키는 대로 하면 한몫 잡을 수 있다고. 나야 어차피 재주도 없고 되는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는 놈인데 나 하나 감옥 갔다 오면 다 해결된다고 하니까… 혹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제 처지를 호소하듯 청년은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태산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사람들이 말을 안 해 그렇지 농성하던 세입자 중에 너만 한 사정 없는 사람이 있겠냐? 다들 죽을 각오로 살아가고 있어. 너 혼자 살겠다고 다른 사람은 죽든 살든 상관없다는 썩어빠진 근성을 가진 주제에 변명 늘어놓지 마라.”

청년이 태산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때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려 확인해 보니 전윤지 검사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전 검사가 물었다.

-나가셨습니까? 집무실에 안 계시네요.

“예, 잠깐. 무슨 일입니까?”

-대광인력 사장 애인 소재 파악했습니다. 수사관 탐문 보내려고 하는데요.

“그래요. 될 수 있으면 여성 수사관을 보내는 방향으로 하세요. 경계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진용이 진술한 형사 몽타주가 나와서 방금 보내 드렸습니다.

태산은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한다. 첨부된 이미지를 열어보니 역시 이종민 경사를 닮은 얼굴이었다.

태산은 몽타주를 청년에게 보여주었다.

“이놈이냐?”

“예, 맞는 것 같아요.”

태산은 범진에게도 몽타주를 보여준다. 범진은 신중하게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정진용이를 가로채려던 바로 그 형사입니다.”

그러고는 뿌득 이를 갈며 덧붙이는 것이다.

“제 머리에 총 들이댄 놈 상판을 잊을 수야 없죠.”

태산이 한동안 답이 없으니 전 검사가 채근했다.

-부장님? 경찰청에 몽타주 보내서 조회해 달라고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누군지 알았으니까. 지금 수성경찰서로 수사관들 보내서 형사과 강력4팀 이종민 경사 긴급체포 하라고 하세요.”

전 검사가 얼떨떨하게 답했다.

-무슨 혐의로요?

“혐의야 많죠. 살인미수, 독직행위, 화염병 처벌법 위반 등등…….”

-…화염병요?

전 검사가 영문을 모르고 되물었다.

“그중 아무거나 엮어서 일단 잡아들이세요. 핸드폰부터 압수해서 통화 내역 분석하고요. 공범이 있을 겁니다. 계급은 경위.”

정진용을 가로채려던 형사는 둘이라 했고 범진은 이종민이 다른 형사를 경위라 불렀다 했다.

태산은 서둘러 말했다가 급히 철회했다.

“됐습니다. 일단 수사관들 보내 체포부터 해 오라 하세요. 내가 바로 가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 * *

“들어가 봐야겠다. 당분간 여기를 맡아다오.”

태산이 전화를 끊으며 범진에게 말했다.

“예, 걱정 마십시오.”

범진이 선뜻 답하고는 문득 청년을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저놈은 어떻게 할까요?”

태산도 무심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갑자기 두 사람의 시선이 따갑게 꽂히니 청년은 어쩔 줄 모르고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혹여나 이젠 쓸모가 없어졌으니 가져다 묻으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며. 겁에 질린 청년의 머리끝에서 기름이 뚝뚝 흘러내린다.

“저대로 데려갈 순 없으니 씻겨야 할 텐데…….”

“1층에 아직 물이 나오는 화장실이 있습니다. 말끔히 씻겨서 검찰청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태산과 범진이 나서니 병천도 청년의 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워 함께 창고를 나섰다. 위층으로 올라가며 병천은 강 검사에게 뭐라고 말을 붙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수년 전 태산을 성가시게 할 때 짧게 본 것과는 외양도 분위기도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눈도 까딱 안 하고 사람을 태워 죽이겠다 위협하는 인간이 되었을까?

병천은 자꾸만 호기심이 일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따~ 검사 양반이 아주 살벌허시네.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죽자고 혔을 것인디 어디서 사람 태워 죽인다는 똘끼가 나온다요? 검사꺼정 피의자 인권이고 나발이고 무시해 불믄 어디 겁나서 조사받겄소?”

마음과는 달리 삐딱한 비아냥이 흘러나온다. 맥없이 끌려가던 청년도 자신을 협박한 사람이 검사라는 얘기에 눈을 휘둥그레 뜬다.

태산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처음부터 불을 붙일 생각은 없었어.”

청년은 허탈한 표정을 했다가 이어지는 태산의 말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사람 살 타는 냄새는 이제 지긋지긋해서. 어차피 그거 아니라도 불게 만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고.”

병천은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사람을 태워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게 아니면 화장터 근처에서라도 살았단 말인가.

어찌 됐든 검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범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 병천은 입을 다물었다.

병천이 청년을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간 후 태산을 배웅하러 함께 건물을 나오며 범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형님. 병천이가 괜히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해드렸습니다. 몰라서 한 말이니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별 대단치 않은 일로 뭘 용서하고 말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놈인데.”

그러고는 피식 웃어버리는 태산이다.

“그래도 저 정도면 병천이답지 않게 꽤 고분고분한 것 아니냐? 형님 동생 했던 사이라고 끌리는 데가 있는 모양이다.”

태산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타려다 말고 범진을 은근히 돌아본다.

“김범진이 많이 컸네. 그래도 아우라고 감쌀 줄도 알고. 전에는 나 빼고 다른 놈들은 어찌 되든 말든 관심도 없던 놈이. 변했구나.”

농담으로 건넨 말을 범진은 타박으로 받아들이고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형님. 저는 다만 형님을 대신해 조직을 관리하고 있으니 아우들도 제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태산은 웃음 지으며 범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좋은 쪽으로 변해서 다행이라는 얘기다. 이젠 니 아우들이니 당연히 니가 책임져야지. 잘하고 있다.”

그러나 범진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듯 굳이 정정했다.

“제 아우가 아니라 형님의 아우이고 형님의 조직입니다. 모두 여전히 형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형님께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형님을 따르는 마음으로 저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서운해하시는 일은…….”

태산이 서둘러 범진의 말을 자른다.

“시간 없으니 낯간지러운 소리는 그만하자.”

태산은 운전석에 앉아 차 문을 닫은 후 출발하기 전 차창 너머로 툭 던져 말했다.

“나는 서운한 것 없다. 그러니 너도 괜히 미안한 마음 가지지 마라.”

서둘러 말을 맺고는 차를 출발시키는 태산이다. 범진은 멀어지는 차를 복잡한 심경으로 오래 바라보았다.

태산은 검찰청으로 향하는 대신 수성서로 차를 돌렸다. 긴급체포를 지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이대로 검찰청으로 돌아간다면 멀뚱멀뚱 이종민을 잡아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 바로 수성서로 가 합류하면 수사관들과 거의 타이밍을 맞출 수 있을 것이었다.

수성서로 가는 도중 멀리서부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촉각을 곤두세우며 태산은 액셀을 밟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맹렬한 속도로 SUV가 달려온다. 그리고 그 뒤를 검찰 수사 차량이 사이렌을 울리며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도주하는 SUV 안에 탄 것은 바로 이종민 경사였다.

태산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핸들을 꺾어 SUV 앞을 가로막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SUV는 갑자기 앞을 가로막은 차 옆구리를 맹렬한 기세로 들이받았다. 태산의 차가 충격으로 전복되었지만 그대로 굉음을 내며 밀고 간다. 결국 SUV가 힘을 다해 멈춰 서고야 태산의 차는 다시 한번 굴러 바닥에 털썩 내려앉았다.

뒤따라오던 검찰 수사관들이 아슬아슬 사고 차량을 피해 차를 세웠다. 수사 차량에서 전윤지 검사와 조규완 주임을 비롯한 수사관들이 우르르 내렸다.

일부 수사관들은 사고가 확대되지 않도록 차량통제를 시작했고 다른 수사관들은 SUV로 달려가 이종민을 끌어내렸다. 전 검사와 조 주임은 태산의 차로 달려와 운전석을 살폈다.

운전석 쪽 문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태산이 마치 통조림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콕 박혀 있었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다투어 물었다.

“부장님! 괜찮으세요?”

“부장님! 정신 납니꺼? 많이 다칬는교?”

“괜찮습니다. 조금만 물러나 주세요.”

두 사람이 얼떨떨한 얼굴로 한발 물러나니 태산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금속이 욱여지는 소리가 들리며 조금씩 틈이 나나 싶더니 태산이 이내 끙 하고 힘을 주어 팔다리로 구겨진 문짝을 힘껏 밀어냈다. 텅 하고 문짝이 떨어져 나가며 태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운전석에서 몸을 빼 멀쩡히 걸어 나왔다.

차는 망가지고 옷도 긁히고 찢어진 곳투성이인데 정작 운전자가 멀쩡히 걸어 나오니 전 검사와 조 주임은 황당해 입을 떡 벌렸다.

태산은 차에서 나오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종민은 잡았습니까?”

넋이 나가 있던 전 검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보고했다.

“예, 체포했습니다. 수성서에 도착했을 때 막 도주 중이었어요. 조금만 늦었어도 놓쳤을 겁니다.”

전 검사가 걱정스럽게 태산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병원에 가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까지 안 하셨어도 저희가 추격해서 체포했을 텐데요. 사고가 더 크게 날 수도 있었고.”

“배 부장님을 그렇게 만든 놈과 공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망가는 걸 보니 당장 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엔 안 들더군요. 거기까진 생각 못 했습니다.”

정진용은 이종민과 함께 있던 경위가 배진만 부장을 습격한 사내와 체격이나 움직임이 비슷하다 했었다. 태산은 범인을 밝혀낼 기회를 행여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태산의 답에 전 검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 주임은 망가진 태산의 아우디를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 그래도 이거는 너무 아깝네. 요 좋은 차가 이 지경으로 망가지다이 우짜노~”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어요. 이 기회에 바꾸는 거죠.”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태산의 뒤에서 조 주임은 입을 떡 벌렸다.

“부장님이 원래 그렇게 돈이 많은교? 외제 차 한 대 박살 내도 암시롱 안 할 정도로?”

태산의 뒤를 따라가며 조 주임이 전 검사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딱 보면 아시잖아요.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게. 모르긴 몰라도 원래부터 금수저였대요.”

“그랬십니꺼? 이야~ 몰랐네예.”

태산은 성큼성큼 걸어 수사 차량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뒷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안에서 수갑을 차고 앉아 있던 이종민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태산은 운전석에 앉은 수사관에게 말했다.

“피의자와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 좀 비켜주세요.”

“예!”

수사관이 얼른 차에서 내리자 태산은 이종민의 맞은편에 올라타 차 문을 닫았다.

“이종민 경사, 아주 깜깜이처럼 굴어서 깜박 속았어요. 몰라서 수사를 제대로 안 했던 게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수사를 안 하고 있었던 거군요.”

“대,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이종민은 당황하면서도 애써 모른 척 둘러댔다.

“또 깜깜이 행세를 하려는 겁니까? 배진만 부장 피습사건 말입니다. 공범이 있죠? 누굽니까?”

“공범이라뇨? 지금 증거도 없이 경찰을 범죄자 취급 하는 겁니까?”

“그래요? 공범이 없다 이거죠?”

태산이 흐음 하고 턱을 문질렀다.

“뭐 상관없습니다. 이 경사가 그 경위라는 자 몫까지 다 책임지면 되니까요.”

태산이 경위를 언급하자 이 경사가 눈에 띄게 당황한다. 태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몰라 불안한 것이다.

“배진만 부장을 살해하려 했던 것도, 신풍 애들 동원해 정진용 납치를 시도하고 그랜드 팰리스 세입자들을 폭행해 퇴거시키려 했던 것도, 그리고 화염병으로 사람을 해치라고 사주했던 것도 전부 이 경사가 벌인 일이라는 거죠? 앞으로 파보면 더 많은 혐의가 나오겠지만 그것 역시 이 경사 짓이겠죠. 잘 알겠습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경찰이니 대충은 알겠지만 죄책이 매우 무거워요. 바깥공기 다시 맡으려면 오래 걸릴 겁니다. 아, 다시 바깥공기 맡을 수는 있을까? 경찰이 감옥에 들어가면 범죄자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는지는 잘 알고 있겠죠? 각오 단단히 하세요.”

이 경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태산은 그대로 차에서 내리려 했다. 이 경사가 다급히 태산을 불러 세운다.

“잠깐만요!”

“뭡니까?”

불러놓고도 망설이던 이종민이 눈을 질끈 감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실행은 대체로 제가 한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전부 경위님이 지시해서 한 일이에요. 게다가 배진만 부장 일은 경위님이 단독으로 한 겁니다. 전 그 자리에 가지도 않았어요.”

태산의 얼굴에 그럼 그렇지 하는 미소가 피어오른다.

“누굽니까? 이 경사에게 그 모든 일을 지시한 경위라는 사람이.”

실토를 하고도 정작 이름을 말하려니 망설여지는지 이종민은 뜸을 들이며 웅얼거렸다.

“…강력 4팀장 윤찬열 경위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태산은 깜짝 놀랐다.

구준태 인천시장의 수족이라고 의심했으나 큰 비위를 밝히지는 못했던 윤찬열 형사가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이종길의 수족이 되어.

태산은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야말로 악연을 마무리하고 결말을 지을 때다.

“윤찬열에게 전화하세요.”

“이미 피했을 겁니다. 전화도 꺼두었을 거고요.”

“은밀히 연락하는 대포 폰이 있을 텐데요.”

태산의 말에 이종민은 움찔했다. 태산이 계속 노려보고 있으니 이종민은 별수 없이 털어놓았다.

“차 다시방에 있습니다.”

태산이 차 문을 열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수사관에게 지시했다.

“피의자 차량 글러브박스에 핸드폰이 있을 겁니다. 찾아보세요.”

바로 차로 달려간 수사관이 얼마 기다리지 않아 핸드폰을 들고 나타났다. 태산은 수사관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이종민에게 건넸다.

통화 버튼을 누르며 이종민이 태산의 눈치를 살핀다.

“전화해서 뭐라고 합니까?”

“이미 모든 것이 발각되었으니 자수해서 광명 찾으라고요.”

연결음이 길게 이어진다. 눈치를 채고 전화기를 버린 것인가, 받지 않으려나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통화가 연결된다. 불안감이 느껴지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윤찬열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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