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제보자
-네, 반부패수사부장실입니다.
“저… 배진만 부장님 계십니까?”
수화기 건너편에서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완전히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는 투다.
-배 부장님은 안 계십니다. 지금은 신임 부장님이 와계신데요. 무슨 용건이시죠?
정진용은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배진만 부장님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임 부장님 좀 바꿔주십시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누구시냐 따져 물을 법도 하건만 실무관은 사안의 중대함을 눈치챘는지 더 묻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며 정진용은 공중전화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혹시 지켜보는 이는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둘러보는 것이었다.
배진만 부장이 습격당하는 것을 목격한 날 이래로 정진용은 도피 생활 중이다. 그렇지 않을까 의심하기는 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혼비백산해서 달아난 정진용은 가지고 있던 핸드폰도, 대포 폰도 모두 꺼버렸다. 그리고 죽마고우를 찾아가 타던 차를 넘겨주고 친구의 세컨드 카를 받아 왔다. 정진용이 타던 차가 훨씬 좋은 것이었으므로 친구는 두말없이 바꿔주면서 도피 자금으로 쓰도록 얼마간의 현금도 쥐여주었다.
정진용은 무작정 차를 몰아 길을 나섰다. 처음에는 국도변 작은 모텔을 전전하며 다녔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주로 향하고 있었다.
진주는 외할머니의 고향이었다. 젊어서 대구로 나와 살았던 외조모는 나이가 들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홀로 진주로 가 그곳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냈다.
외조모가 사망한 후 외가는 폐가가 된 지 오래였다. 아무리 은신처라고 하나 오래 지낼 곳은 못 되었다. 하지만 인근에는 주인이 떠난 빈집이 드문드문 있었고 정진용은 그중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혹여 누군가 불빛을 보고 찾아올까 봐 정진용은 밤이면 불도 켜지 못하고 침낭 속에 웅크리고 누워 떨었다. 가열하지 않아도 되는 간편식들로 끼니를 때우고 식량이 떨어질 때면 새벽에 시내로 나가 편의점을 쓸어 왔다.
언제까지 이대로 숨어 있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치밀었다. 폭로를 결심했던 것을 숱하게 후회했다가도 억울함이 울컥 솟아올라 이를 갈았다. 언젠가는 설욕하겠다 다짐하면서도 배 부장을 등 뒤에서 내려치던 정체불명의 그림자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 좀처럼 나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슬슬 수중에 소지한 현금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추적당할까 싶어 함부로 카드를 쓸 수도 없었다. 하루빨리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수사기관에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배 부장도 그렇게 된 마당에 대체 누구를 믿고 의탁할 수 있단 말인가.
정진용은 고민 끝에 반부패수사부의 검사에게 다시 접촉해 보기로 했다. 배 부장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결심을 굳힌 후 모처럼 낮에 진주 시내로 나와 공중전화 부스에서 대구지검에 전화를 걸었다.
먼저 배 부장을 찾은 것은 혹시나 가벼운 부상으로 그쳐 그사이 회복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도피 생활도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시 배 부장은 자리에 없었다. 역시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가 없는 것이다.
-얘기하시겠답니다.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실무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달깍 하고 전화가 연결된다. 정진용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신임 부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강바른 부장입니다.
상대의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정진용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배진만 부장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회복 중입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구나 싶어 정진용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강바른 부장이 불쑥 묻는다.
-정진용 씨 맞으시죠? 배 부장님께 제보할 건이 있다고 만나자 하셨다면서요?
“…어떻게…….”
정진용은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누군데 그러한 사정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강 부장은 자신이 책임지고 수사하겠다며 당장 만나자고 밀어붙였다. 하지만 정진용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당신을 어떻게 믿습니까?”
-정진용 씨가 배 부장님을 만나려 했던 용건을 제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배 부장님이 정진용 씨를 만나러 가던 날 밤 저에게 전화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배 부장님이 그만큼 저를 신뢰한다는 얘기겠지요. 그래도 못 믿으시겠다면 제 이름으로 검색해 보십시오. 저는 대강 수사하는 사람 아닙니다.
정진용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강바른 검사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신뢰가 가는 목소리다.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면 이 힘겨운 도피 생활도 드디어 끝낼 수 있을 터였다.
그때 정진용의 시야에 길 건너 편의점 앞에서 이쪽을 힐끔거리는 사내 둘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복 바지 위에 점퍼를 입고 조금 불량스러워 보이는 분위기의 사내들이었다.
사내들은 정진용을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리더니 도로를 살피며 길을 건널 태세다.
정진용은 등골에 소름이 좌악 끼쳐 허둥거렸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진용은 서둘러 말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냅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뛰쳐나와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뒤를 쫓아오는 기척은 없었다. 정진용은 달리면서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두 사내는 공중전화 부스 뒤에 서 있는 낡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건물은 입점한 가게들이 모두 짐을 뺀 상태였다. 그제야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는 노후한 상가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두 사내도 전형적인 건설노동자로 보였다.
정진용은 맥이 빠져 걸음을 멈추었다. 평생 건축업으로 먹고살아 왔으면서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니 아무래도 두려움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듯했다. 어처구니없어 혀를 차는데 문득 강바른 부장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래도 못 믿으시겠다면 제 이름으로 검색해 보십시오. 저는 대강 수사하는 사람 아닙니다.]
정진용은 그래도 차로 돌아가려다가 충동적으로 근처 피시방에 들렀다. 자리에 앉아 포털 검색창에 강바른이라고 검색해 보았다.
검색하자마자 포털에 인물 정보가 떡하니 떠오른다. 이 정도로 유명인이라고?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장,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 부부장, 인천지검 강력부 마약전담반 수석검사, 인천지검 형사3부 검사,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로 이어지는 경력을 거꾸로 좇아가다 보니 정진용도 희미하게 이 사람이 기억났다.
악당 잡는 슈퍼검사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 아닌가?
정진용은 빠르게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역시 그 검사였다. 그의 활약상을 다룬 기사들이 줄줄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상당한 규모의 팬덤도 있었다. ‘참 바른 검사님, 강바른’이라는 팬카페는 회원 수가 20만 명에 달했다.
정진용은 가슴이 뛰었다. 이 사람에게라면 맡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라면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에라도 다시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는 것이 좋겠다.
정진용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카운터에 앉은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쳤다. 아르바이트생이 한 남자와 이쪽을 바라보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정진용은 이번에도 혼자만의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그래도 만에 하나 하는 마음에 잔뜩 긴장한 채로 모니터 너머를 힐끔거리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명백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평일 낮 사람이 많지 않은 피시방 구석 자리에는 자신밖에 앉아 있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정진용은 어찌해야 하나 망설였다. 이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계산을 하고 나가야 하나, 그랬다가 덜미를 잡히면 어떡하지 온갖 생각으로 갈등하고 있을 때 남자 둘이 피시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경찰 제복을 입은 순경이었다.
정진용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낮추어 미끄러지듯 의자 아래로 숨었다. 그러고는 바닥을 기다시피 비상구 쪽으로 더듬어 갔다. 비상구를 나오는 순간 정진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피시방에서 정진용을 혼비백산하게 한 이들은 그가 사라진지도 모르고 각자의 용건으로 바빴다.
“이분이 어제 여기에서 가방을 분실했다는데요.”
순경이 대동한 사내를 가리키며 알바생에게 말했다.
“아, 예.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분실물은 나오지 않았는데요.”
“cctv 좀 확인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점장님 오셔야 되는데… 전화 한번 해볼게요.”
처음에 알바생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내가 우선순위가 밀릴 것 같으니 급히 끼어들었다.
“아, 저기요. 저기 저 아저씨 냄새 너무 난다니까요. 내보내면 안 돼요?”
“자리를 옮기시라니까요.”
“그럼 저 아저씨보고 옮기라고 해요. 항상 앉던 자리라 세팅도 다 해놨는데.”
“아무리 노숙자 몰골이라도 냄새나니까 옮기라고 어떻게…….”
그렇게 말하며 정진용이 앉았던 자리를 쳐다보던 알바생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리번거렸다.
“어? 어디 갔지? 헐… 이 아저씨 계산도 안 하고 날랐나?”
“거봐요. 내가 진즉에 내보내라니까.”
실랑이하던 손님이 우쭐해 하며 코웃음을 치더니 슬그머니 정진용이 앉았던 자리의 바로 앞줄에 가 앉았다.
“아, 미친! 이거 신고하면 잡아주나요?”
알바생이 울분을 터뜨리며 말했다.
“cctv 열 때 같이 확인해 보죠.”
순경은 큰 기대는 안 한다는 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알바생은 투덜거리며 핸드폰에서 점장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아, 씨. 점장한테 또 대박 깨지겠네.”
* * *
“어따~ 날씨 허벌나게 좋구마~”
병천이 도로변에 세운 차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켰다.
범진이 또 알 수 없는 주문을 하는 바람에 진주에까지 내려왔다. 사람을 찾아보라는데 은밀히 해야 하니 아우들은 데려가지 말고 혼자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소문 빠른 지방 소도시에 척 봐도 그 동네 사람이 아닌 인상 험악한 어깨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 지나치게 눈에 띄기야 할 것이다.
범진이 알려준 공중전화 부스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정진용이라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곳이라고 한다.
병천은 공중전화 부스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스 앞의 낡은 건물은 외장 철거가 한창이라 먼지를 풀풀 날리며 인부들이 오가고 있었다.
벗겨낸 타일 조각을 치우고 있는 인부에게 병천이 슬쩍 접근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말씀 좀 여쭙겄습니다.”
인부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뭐요?”
인부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은근히 경계심을 보이며 흘끔거린다.
일을 하던 중에 방해받아서인지 아니면 병천의 노골적인 전라도 사투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병천의 험악한 인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말을 씹지는 않았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
병천은 품에서 사진을 꺼내 인부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여그서 이렇게 생긴 사람 못 봤당가요?”
인부는 병천이 내민 정진용의 사진을 건성으로 보고는 답했다.
“글쎄예. 잘 모르겠심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예.”
인부는 그렇게 답하고는 문득 되물었다.
“근데 이 사람은 왜 찾능교?”
* * *
“근데 이 사람은 왜 찾능교?”
인부의 물음에 병천은 머리를 긁적거리다 둘러댔다.
“나도 동종 업계여라. 건설사업 하는 사람잉게. 근데 이 쌍노무 자슥이 하도급을 줘놓고는 회사 부도내고 날라 부렀당게요. 공사비를 몬 받으믄 울 회사도 부도나게 생겼응게 백방으로 찾아다니는 거지라. 을매나 사정이 급허믄 이러겄소. 쪼까 도와주씨오. 사진 다시 한번 잘 좀 들다보고…….”
병천이 동종 업계 종사자라는 것을 어필하며 사정하니 인부도 동질감을 느낀 듯했다. 그제야 사진을 받아 들고 제대로 들여다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유심히 보는 인부 옆으로 조금 더 젊은 다른 인부가 와서 덩달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병천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듣고 호기심이 동했나 보다.
“어라? 낯이 익은데…….”
“아는 얼굴이가?”
이번에는 젊은 인부가 사진을 받아 든다.
“이 사람 그 사람 아닝교? 어제 여 공중전화에서 전화하던 사람.”
“아~ 맞네! 글마네!”
그제야 늙은 인부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라? 확실혀라?”
“확실합니더.”
“완저히 노숙자 같은 몰골이든데 우예 알아봤노. 니 눈썰미가 참 대단하데이?”
늙은 인부의 말에 젊은 인부가 우쭐해서는 답했다.
“요새는 공중전화 쓰는 사람이 거의 엄쓰니까 기억을 하지예. 게다가 사람이 좀 정신이 불안한 거마냥 두리번두리번하다가 우리하고 눈이 마주치니 화들짝 놀라 뛰쳐나가삐든데예. 미치갱인가 했지예.”
병천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어데로 가는지는 봤어라?”
“저마치 있는 피시방으로 올라가던데예.”
병천은 반색하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신세 졌구마이라~”
그대로 돌아가려던 병천이 멈칫하더니 지갑을 꺼내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늙은 인부에게 쥐여준다.
“요것은 감사 인사루다가. 수고 많으신디 두 분 점심 맛난 걸로 든든하게 드씨오.”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병천은 뒤돌아 피시방으로 달려갔다. 멍하니 병천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늙은 인부가 손에 쥔 지폐를 확인한다. 5만 원짜리 두 장이 손에 들려 있다.
만 원짜리 두어 장이나 될까 생각했던 늙은 인부가 얼떨떨한 얼굴로 병천의 뒷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늙은 인부의 손아귀를 들여다본 젊은 인부도 오오~ 하고 탄성을 올린다.
“회사가 부도 직전인 사람치고는 씀씀이가 크네예. 차도 좋은 거 몰고 다이고.”
젊은 인부는 공중전화 부스 옆에 세워둔 병천의 차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뭔 상관이고? 꽁돈 생깄으이 일 끝나고 술이나 한잔하자.”
“좋지예.”
병천은 한달음에 피시방으로 달려 올라갔다.
“아그야, 나가 사람을 좀 찾는디… 혹시 이런 사람 봤냐?”
병천이 카운터에 사진을 내밀며 물었다. 알바생은 대뜸 반말로 묻는 것이 불쾌했으나 워낙 박력 있는 인상이라 티를 내지 못한다.
사진을 들여다본 알바생이 아아~ 하고 탄성을 뱉더니 병천의 눈치를 살핀다.
“형사세요?”
조폭 아니면 형사로 보일 관상이긴 했다. 그래도 형사로 생각해 준다니 병천은 오해한 채 내버려 두기로 한다.
“그려서 봤어, 못 봤어? 싸게 얘기혀 봐라.”
“봤죠. 이 아저씨가 이용료 떼먹고 날라 가지고 신고까지 했는데요.”
알바생이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근데 이 아저씨 지은 죄가 많나. 왜 이렇게 형사들이 찾아와?”
“형사가 또 찾아왔다고?”
“예, 아까 아침에요. 대구에서 왔다던데요. 그 사람 사기꾼이라면서요? 대구에서도 잡으러 오고 전라도에서도 잡으러 오고 아주 전국구로 등을 쳤나 보네.”
흠… 하고 병천은 턱을 문지른다. 범진이 은밀하게 움직이라고 한 이유가 짭새들도 정진용을 노리고 있어서인가?
“그려서? 이 새끼 어디로 갔냐?”
“저도 모르죠. 한눈판 사이에 튀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아요? 제가 제일 궁금하다고요. 안 그래도 그 인간 튀는 바람에 점장한테 된통 깨졌는데.”
알바생은 병천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투덜투덜 불만스럽게 말했다. 여기서는 더 캐낼 것이 없을 듯하다.
병천은 피시방을 나서면서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협조해 줘서 고맙다. 수고혀라.”
잔뜩 볼이 부어 있던 알바생이 지폐를 보고 눈빛이 바뀌었다. 최저 시급을 받고 일하는 알바생에게 5만 원이면 하루 일당에 가까운 액수였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알바생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얼른 지폐를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다.
형사들이 수사에 협조해 줬다고 용돈을 챙겨준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삥 뜯어 가지 않으면 다행이지.
“진짜 형사 맞아?”
아무런 소득 없이 피시방을 나와 차로 돌아온 병천은 일단 범진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
“성님, 지금 찾아보고는 있는디 꼬리가 좀처럼 안 잡혀라. 아주 꽁꽁 숨어 있는 모양이오. 인자부터 한적한 여인숙이니 모텔이니 다 훑어볼라고 하는디 지 혼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소.”
-그래?
범진은 병천의 보고를 듣고 어찌해야 할지 조용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글고 짭새가 벌써 냄새를 맡아분 모양인디요. 정용진이가 진주에 있다는 걸 알고 탐문 중이라는디 잘못하다가는 가로채이게 생겼어라.”
-속도를 내야겠군.
조용히 중얼거린 범진이 지시했다.
-계속 알아봐라. 나도 나대로 손을 써볼 테니.
범진은 병천의 전화를 끊은 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진주라…….”
영 내키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결국 마음을 정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짧은 신호가 간 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범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툭 던져 말했다.
“김범진입니다.”
-…누구라고?
상대는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기억 못 하는 척 의뭉을 떠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태산 형님 모시고 있는…….”
범진이 그렇게 말하자 상대가 킬킬 웃는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똥개 새끼야. 어김없이 속는 거 봐라. 여전하네.
상대의 놀리는 목소리에 범진은 새삼 울컥해 미간을 모았다.
이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범진을 보면 놀리지 못해 안달을 했다. 그때는 범진도 어렸고 게다가 상대는 태산과 동급의 서열이었으므로 조용히 당해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그 목소리를 다시 들으니 그때의 울분이 새삼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범진은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용수 형님. 건강하시지요?”
-오냐~
장용수는 광주에서 태산과 함께 인천으로 올라온 와룡회의 원년 멤버였다. 범진이 조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와룡회를 탈퇴하였으므로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무력은 별 볼 일 없었으나 잔머리가 비상해 장용수는 조직의 잡일을 담당했다. 어쨌든 태산과는 동기였으므로 태산의 위세 덕에 조직에서도 대접을 받는 편이었다.
형님다운 위엄이라고는 전혀 없는 엉덩이 가벼운 위인이었지만 범진 역시 태산을 생각해 짓궂은 놀림을 당하면서도 꾹 눌러 참으며 형님 대접을 해주었다. 태산이 아니었다면 참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진즉에 입을 찢어놓았을 테다.
그러던 인간이 어느 날 한 여자를 만나고는 갑자기 조직을 나가겠다 했다.
조직에 필요한 인물이든 아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가고 싶다고 쉽게 나갈 수 있다면 조직의 권위가 무너진다.
탈퇴는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이웅배를 설득해 준 것이 바로 태산이었다.
새끼손가락 한마디로 빚을 치른 장용수는 여자와 함께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서 흥신소인지 심부름센터인지를 열어서 먹고산다고 했다. 태산이 살림도 넉넉하게 마련해 주었다는 소문이었다.
진주가 고향인 데다 흥신소를 해왔으니 정보에도 밝고 지역민들과의 친분도 있을 것이다. 진주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는 데는 이만한 적역이 없다. 연락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긴 했지만.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니 부탁을 왜 들어줘야 하는데?
“태산 형님께 빚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장용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금 침통한 투로 대꾸했다.
-태산이 죽은 지가 언젠데. 그 빚을 니가 대신 받겠다고?
“와룡회는 와해되고 태산 형님의 유지는 제가 이어받았습니다. 그 빚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저밖에 없겠지요.”
-이 새끼 봐라? 태산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똥개 새끼 주제에 많이 컸다?
장용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래, 뭐냐? 들어는 보자.
“사람을 하나 찾아주십시오.”
장용수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황당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겨우 그깟 일로 태산이한테 진 빚을 들먹였다고? 난 또 누구 하나 묻어달라고라도 하려나 했네.
장용수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범진은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너 설마 그때 일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거냐?
그때의 일이라… 무엇을 말하는 걸까?
툭하면 놀리고 괴롭히며 속을 긁었던 일? 아니면… 장용수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버린 일?
무엇이 되었든 범진은 장용수와 선뜻 연락하기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심지어 부탁을 하며 아쉬운 소리를 하기에는 더욱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장용수 쪽은 전혀 대수롭게 생각지 않는 기색이다.
범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장용수가 화제를 바꾼다.
-사람 찾는 거 정도는 보수만 두둑이 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보수는 부르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고객님. 누굴 찾으시는지.
“대한건설 정진용 대표입니다. 진주 시내에서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습니다.”
장용수가 골똘히 중얼거린다.
-정진용… 정진용이라… 어쩐지 이름이 익은데…….
그러더니 이내 시원스럽게 답했다.
-알았다. 찾아보고 뭐 좀 잡히면 연락하마.
장용수는 뭐라 답하기도 전에 툭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범진은 얼떨떨한 채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 * *
“형제간의 맹약을 여자 하나 때문에 깨겠다니 나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하지만 태산이가 워낙 간곡하게 부탁하니 태산이 체면을 봐서라도 허락하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장용수는 이웅배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조아렸다.
“그렇다 해도 한번 들어온 것 니 멋대로 나가게 할 수는 없지. 적어도 니 결심이 굳다는 것을 보이려면 손가락 하나쯤은 내놓아야 하지 않겠냐?”
이웅배의 추상같은 말에 장용수의 얼굴이 숫제 파르라니 질렸다. 태산의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범진은 내심 한심하게 생각했다.
여자 때문이든 뭐든 조직을 나가겠다고 큰소리를 칠 때는 제법 배짱이 있는 모양이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사태도 예상치 못하고 손가락 하나 정도에 벌써 파르라니 질린 꼴이 한심스러웠다.
태산이 그런 장용수를 안쓰러운 얼굴로 보더니 불쑥 말했다.
“범진아, 칼 가져와라.”
범진은 발목의 칼집에 꽂아둔 단도를 꺼내 태산에게 건넸다.
칼을 받아 든 태산이 이웅배를 향해 말했다.
“용수가 원래 주먹 쓰던 놈도 아니었는디 그럴 배짱이 되겄습니까? 손가락은 제가 대신 자르겄습니다. 제 손가락 받으시고 용수는 보내주십시오.”
태산이 응접탁자에 자신의 왼손을 올리고는 단도를 새끼손가락 위에 가져다 댄다. 범진은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 * *
“아닙니다, 형님! 잘라도 제가 잘라야죠. 그 정도 각오는 했습니다.”
태산이 칼날을 누르기 직전 다행히 장용수가 급히 제지하고 나섰다.
용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웅배가 태산에게 손을 내민다. 웅배로서도 멀쩡한 태산의 손가락을 대신 자르라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용수는 이제 버릴 말이라지만 태산은 앞으로도 조직을 위해 중요하게 쓰일 아우였다.
웅배가 엄한 눈길로 압박하니 태산도 별수 없이 웅배에게 단도를 건네주었다. 웅배는 받은 단도를 용수 앞에 던졌다. 단도는 챙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 용수의 코앞에 떨어졌다.
“깨끗이 잘라내고 가라. 그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용수는 덜덜 손을 떨며 단도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왼손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에 단도 날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좀처럼 칼을 내리누르지를 못하고 진땀만 흘리고 있었다.
범진은 애가 달았다.
용수가 손가락을 자르지 못하면 또다시 태산이 대신 자르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아니, 용수의 탈퇴 건으로 다투다 큰 형님과 척을 지기라도 한다면 손가락 하나 정도가 문제가 아니게 된다. 조직엔 피바람이 불고 태산 역시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범진은 고개를 저었다. 저런 놈 하나 때문에 태산이 피해를 입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범진이 스르륵 용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소리도 없이 빠른 움직임이라 아무도 미처 말리지 못했다. 그사이 범진은 단도의 날을 눌러 단숨에 용수의 새끼손가락을 끊어냈다.
“으아악!!!”
용수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손을 쥐고 혼비백산했다. 웅배와 태산도 예상외의 돌발 상황에 당황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범진은 잘린 새끼손가락을 주워 웅배의 앞 응접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점점이 핏자국이 튄 얼굴로 웅배를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잘라 왔습니다. 이제 보내주십시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던 웅배가 비실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서 있던 어깨들이 달려들어 용수를 끌어냈다. 용수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손가락을 움켜쥐고 힘없이 끌려 나갔다.
탈퇴를 허락해 주지 않겠다 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웅배는 용수 쪽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미 흥미가 범진에게로 옮겨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 이거 발칙한 게 아주 물건이군.”
“이제 막 공부 마치고 조직 일 시작해서 아직 나설 데 안 나설 데를 모릅니다. 제가 잘 가르칠 테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태산이 범진을 대신해 웅배에게 고개를 숙였다. 웅배가 태산의 속을 다 짐작한다는 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걱정 마라. 더는 탐내지 않기로 해놓고 그새 번복하겠냐? 니 아우가 내 아우인 것이고.”
그간 범진을 욕심낸 웅배가 데려가고 싶어 했으나 태산이 완곡히 거절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범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회장실을 나오며 태산은 입을 다물고 있었건만 재호가 더 흥분해 범진을 닦달했다.
“흐미~ 이 쥐불알만 헌 놈이 장차 무슨 사달을 내불라고 어른들 일에 멋대로 껴드냐, 껴들긴!”
“죄송합니다.”
범진은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죄송이고 나발이고 니 오늘 숙소 들어가서 빠따 좀 맞아불자. 나가 오늘 니 정신교육 지대로 시켜불랑게.”
태산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됐다. 그만해라.”
“아따, 이게 다 성님이 매를 안 들고 오냐오냐 헌께 그런 것 아니오. 여즉꺼정은 아직 뼈도 안 여문 어린놈인게 성님이 싸고도셔도 참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겄구마요. 버릇을 지대로 고쳐놔야…….”
“어허!”
태산이 혀를 차서야 재호도 뜨끔해 입을 다물었다. 태산이 범진을 물끄러미 돌아보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준다.
“닦아라. 보기 싫다.”
‘보기 싫다.’ 다른 어떤 말보다 그 말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서 꽂혔다. 범진은 얼굴을 닦는 것도 잊고 더욱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형님 허락 없이는 칼을 안 쓰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새 잊어버리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인 범진을 태산은 웃는 얼굴로 보았다.
“알았으면 됐다. 닦아라.”
태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나는 걸 듣고 범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태산의 표정이 크게 나무라는 투는 아니라 범진은 한숨 돌렸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얼른 손수건을 받아 들고 얼굴의 핏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 * *
-형님, 정용진이 행방을 찾은 것 같습니다.
범진의 보고에 태산은 반색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어디냐?”
-진주 외곽의 작은 부락입니다. 정용진 외조모가 거기 출신인데 대구로 나갔다가 말년에 들어와 살았다는군요. 정용진이 어릴 적에 외가에 종종 드나들었던 걸 그 지역 토박이들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외가는 이미 폐가가 되었지만 근처에 못 보던 외지 차가 오가는 게 가끔 보였답니다. 병천이가 외가 인근 빈집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곧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좀처럼 행방을 찾지 못해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수확이었다.
“수고했다. 빨리 찾았구나.”
-경찰이 벌써 냄새를 맡고 진주에 내려와 있다고 해서 서두르느라…….
[아무도 못 믿어요. 배 부장님과도 대포 폰으로만 연락했는데 귀신같이 알고 따라붙었다고요. 누구도 믿어선 안 돼…….]
불현듯 정진용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설마 경찰이?
태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우물쭈물하던 범진이 불쑥 말했다.
-…용수 형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뭐? 용수?”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태산은 반가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랬군. 용수는 잘 지낸다더냐?”
-전화로만 통화했습니다만 목소리를 들으니 건강하신 것 같았습니다.
태산은 오랜만에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용수 떠난 뒤로는 연락도 잘 못 했는데. 이미 양지로 간 놈 괜히 조직과 다시 엮여봐야 좋을 일 없겠다 싶어서. 그놈이 진짜 세기의 로맨티시스트였지. 사랑 하나를 위해서 가진 것 다 내려놓고 떠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냐?”
즐겁게 말하는 태산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범진이 문득 물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태산은 멈칫했다. 용수도 태산도 어떤 형태로든 조직을 떠났다.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 무슨 할 이야기가 있을까.
“됐다. 이제 와 만나서 무엇하겠냐.”
하지만 범진에게 당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일 마무리되면 너라도 대신 가서 인사나 해다오.”
-예, 형님.
태산은 감상을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물거리다 경찰이 먼저 정진용을 잡아가도록 놔둘 수는 없다.
“지금 진주로 출발하마. 찾는 대로 주소 찍어라.”
-직접 가시게요? 병천이한테 잡아 오라고 해도 되는데…….
“경찰이 좁혀오고 있다는데 안심할 수 없지.”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너는 왜?”
-저도 뉴스 정도는 봅니다. 전임 부장이 테러를 당해 공석을 채우느라 내려가신 것 아닙니까? 형님께도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합니까?
태산은 피식 웃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다만 인천에서 진주까지 내려오는 사이에 상황 종료될 거다. 걱정 마라.”
태산은 그렇게 답하고는 전화를 끊고 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업무를 보다 고개를 드는 직원들을 향해 태산은 한마디를 툭 던져놓았다.
“정진용이 잡아 오겠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조규완 주임만은 별다른 질문도 없이 바로 따라 일어섰다.
“지도 가겠습니더.”
검사실을 나서는 태산에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천성호 계장이 급히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진주로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태산은 자신만만하게 답하고는 조 주임과 함께 검사실을 나갔다.
“그동안 통 못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떻게 찾아냈는지 모르겠네예.”
윤지은 실무관이 중얼거린다.
“그르게 말이다.”
갑자기 천 계장이 부산을 떨며 말했다.
“내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오께.”
“그런 건 일일이 얘기 안 하고 가시도 됩니더.”
윤 실무관이 툴툴거리며 답했지만 천 계장은 들은 척도 않고 쫓기듯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칸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일일이 확인한 후 맨 구석 칸으로 들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천 계장은 한껏 목소리를 죽이고는 속삭였다.
“강바른 부장이 방금 진주로 출발했습니더. 정진용이 잡아 온다꼬 큰소리치는 걸 보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 것 같은데예.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못 들었고예.”
-몇이나 나갔습니까?
“서두른다고 그란지 주임이랑 둘만 나갔습니더. 더 지원을 받을란지는 모르겠고예.
-알겠습니다. 상황 주시하고 계세요.
바로 전화를 끊으려는 상대에게 천 계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도 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예. 아무리 그래도 검사가 둘이나 다치는 건 좀…….”
-저번 일은 불의의 사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 부장 뒤를 쫓아가서 정진용만 가로채려고 했는데 배 부장이 저항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요. 이번에는 그럴 일 없습니다. 정진용만 확실히 빼 와서 검찰이 못 찾도록 도주시킬 겁니다. 돈 좀 쥐여주고 중국으로 내보내면 돼요.
“예…….”
천 계장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어 어물어물 답했다. 저항하는 것을 막으려고 사람 머리를 죽기 직전까지 가격한단 말인가. 배 부장이 요행히 살았을 뿐 처음부터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정진용도 도주를 시키겠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엔가 묻으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어르신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말에 천 계장은 흠칫 몸을 떨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꺼. 납작 엎드려 있겠심더.”
천 계장은 꾸벅꾸벅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배알도 없는 사이비 새끼…….”
천 계장과의 통화를 끝낸 상대가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대구수성경찰서 강력4팀장 윤찬열 경위.
구준태 시장의 은밀한 수족 역할을 했으나 구 시장의 낙마 후 독직 혐의로 옷을 벗을 위기에 처했었다.
하지만 이종길 의원이 힘써준 덕으로 가벼운 징계에 그쳤다. 평소 꼼꼼하게 주변 정리를 해 증거를 크게 남기지 않은 덕도 있었다.
징계 후 대구로 전출된 윤찬열은 그 후 이 의원의 수족으로 움직였다. 대구는 이 의원의 영향력이 강력한 연고지다 보니 오히려 전보다 승진해 벌써 경위 계급장을 단 것이다.
윤찬열은 이 의원이 사이비 교단과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언제나 불만이었다.
하지만 정진용을 찾는 데 한누리성전 교인인 천성호 계장의 공이 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배진만 부장이 야근 중에 정진용과 약속하고 나섰다는 정보를 넘겨준 것도 천 계장이었다.
“그래도 사이비들이 이용하기는 딱 좋잖습니까? 교단에서 시키는 일이라고 하면 목숨 걸고 따르니까요.”
운전석에서 이종민 경사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배진만 피습사건의 담당형사로 태산이 만나고 갔던 바로 그 인물이다. 헛다리를 짚어댔던 것은 멍청해서가 아니라 의뭉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 * *
윤찬열은 이 경사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강바른이 진주로 출발한 모양이야.”
“정진용이 찾은 겁니까?”
“쫓아가 보면 알겠지. 강바른 핸드폰 위치추적 시작해.”
“직접 따라가시게요?”
윤찬열이 곰곰이 생각했다.
정진용과 배진만 중 적어도 한 사람은 확실하게 처리를 하라는 이 의원의 지시에 따라 배진만을 없애고 정진용도 잡아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강바른이 훼방을 놓아 배진만도 확실히 죽이지 못했고 정진용도 놓쳐 버렸다. 그 일로 이 의원에게 질책을 당했지만 그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컸다.
그저 목소리가 들린 것뿐이었다. 악연이 깊은 강바른의 목소리라는 것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섬뜩한 사자후에 절로 몸이 얼어붙었다. 금방이라도 뒤를 쫓아올 것 같아 배진만의 목숨이 끊어졌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철수했던 것이다.
윤찬열은 뿌득 이를 갈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강바른 만만치 않은 놈이야. 잘못하면 우리 정체를 들켜. 신풍 애들 불러들여. 연장도 넉넉히 준비하라고 하고.”
신풍은 대구지역 조직폭력 단체였다. 강력팀장인 윤찬열은 조폭을 잡아들이기는커녕 그들과 끈끈한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진주 인터체인지에 잠복해서 강바른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거리를 두고 지켜보자고.”
윤찬열이 안전벨트를 매며 말하자 이 경사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 * *
바스락.
검불 밟히는 소리에 방 안에 누워 있던 정진용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귀를 쫑긋 세웠다. 마당에 누군가 들어온 것 같다. 발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기색이다.
정진용은 방구석에서 무릎을 안고 숨을 죽인 채 기척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혹시 마당에 사람이 있다는 흔적을 남겨놓지는 않았나 머리를 굴렸다.
차는 한참 떨어진 곳의 수풀 뒤에 숨겨놓았다. 집 밖에는 세간이며 쓰레기며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신발도 들어오자마자 방 안으로 들여놓는다.
언뜻 보기에는 사람 사는 곳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냥 둘러만 보고 사라지기를 정진용은 애타게 기도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한 빈집에 호기심을 느껴 구경을 온 여행객이기를.
하지만 숨어 있는 동안 우연히라도 지나가는 사람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이런 외진 곳에 여행을 온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정진용은 그저 지나가는 여행객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헛된 소망을 버리지 못했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발소리가 우뚝 멈춰 서더니 이내 뒤돌아선다. 정진용은 안도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멀어지던 발소리가 갑자기 후다닥 발을 빨리하더니 이쪽으로 다시 달려왔다. 그리고 그 기세 그대로 신발도 벗지 않고 툇마루로 뛰어올라 장지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 쉐끼! 여기 숨어 있었구마잉~”
거구의 사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박박 짧게 깎은 민머리에 볼을 주욱 가로지른 흉터, 유독 흰자위가 많이 보이는 사백안이 얼핏 보기에도 섬뜩했다.
‘이제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차피 죽을 목숨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필사적인 감정이 끓어올랐다. 정진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사내의 가슴팍을 향해 돌진했다.
“으아아~”
몸으로 부딪쳐 밀어내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잠깐 휘청하는 듯했던 사내는 자세를 바로 해 버티고 섰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몸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사내가 끙 하고 힘을 주어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배치기를 당한 정진용의 몸은 맥없이 뒤로 주저앉았다.
평생 골프 외의 운동은 해본 적이 없고 술과 접대 자리를 그 누구보다 좋아했던 정진용이다. 더욱이 도피 생활로 기력이 쇠한 상태에서 절대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정진용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사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누, 누가 보내서 왔냐? 이 의원이냐?”
“뭔 개소리여?”
사내는 심드렁하게 답하고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성님, 정진용이 잡았어라. 이제 어떡혀라?”
까까머리에 험악한 인상의 사내, 병천이 의기양양해 범진에게 보고했다.
-잘했다. 거기 위치 보내고 일단 잡아두고 있어라. 곧 사람이 갈 거다. 그 사람한테 넘기면 된다.
“그게 누군디라?”
범진은 병천의 질문에 잠시 답을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강바른 검사다.
“뭐라고라? 강바른 검사한테 넘기라고라?!”
병천이 당황해 목소리를 높이자 덜덜 떨며 쓰러져 있던 정진용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강바른 검사가 보냈습니까?”
숫제 바지 자락에 매달릴 듯 달려드는 정진용을 보고 병천은 심기가 불편해 명치를 발로 걷어차 주저앉혔다.
“조용히 안 있냐?!”
“어이쿠!”
정진용이 벌렁 자빠지고난 후 병천은 다시금 전화기에 대고 열을 올렸다.
“성님! 강바른 검사가 데릴러 온다니 그게 뭔 소리다요? 설마 처음부터 강 검사한테 갖다 바칠라고 지가 피똥 싸게 애쓰믄서 돌아다녔다 이 말이오?”
범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병천은 속이 터질 듯 답답해 잡힐 것도 없는 짧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성님! 나가 그동안도 이상허다 이상허다 생각하믄서도 암말 안 허고 있었는디 이번만은 확실히 들어야겄소. 대체 강 검사라는 그놈이랑 무슨 관계요? 어쩌다가 그 시부럴 검사 새끼의 충견이 되어버렸냐 이 말이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범진이 문득 노성을 울렸다.
-닥쳐라! 그분이 어떤 분인줄 알고!
병천은 흠칫 놀랐다. 평소 격한 감정을 내보이는 일이 드문 범진이다. 이렇게 흥분해 목소리를 높인 것은 처음이었다. 눈앞에 있었다면 처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말이다. 그분은…….
범진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차마 꺼내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병천은 움찔해 숨을 죽인 채로 범진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범진은 씩씩 격한 숨을 고르다가 마침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담담히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평생 그분을 은인으로 모실 거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태산 형님은 원한을 풀지도 못하고 이승을 헤매는 불귀의 객이 되었겠지. 그리고 우리는 진상도 모른 채 원수인 이웅배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을 것이고.
범진의 목소리에서는 이제 분노가 아닌 슬픔이 묻어났다.
-태산 형님의 원수를 갚아준 사람이다. 그것 하나로는 설명이 안 되겠냐?
태산을 향한 범진의 충심이 절절히 느껴졌다. 범진의 간곡한 호소에 병천도 마음이 흔들렸다.
“아녀라. 설명이 되었어라. 성님 뜻이 그러시다면 저도 성심껏 따르겄어라.”
병천은 쑥스럽게 코를 문지르며 사과의 말을 툭 던졌다.
“죄송헙니다, 성님.”
-됐다. 그럼 부탁한다.
“예.”
병천은 자리에 통화를 마치고 자리에 털석 주저앉았다. 명치를 차여 자빠진 정진용은 눈을 굴리며 다시 질문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병천이 그런 정진용을 흘낏 보더니 말했다.
“강바른이 보낸 건 아니지만 강바른한테 넘겨줄 테니 안심허쇼.”
정진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병천은 그런 정진용을 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병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계를 세웠다. 자동차가 마당 앞에 멈추고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의 발소리가 급하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벌컥 장지문이 열린다.
문을 연 사람은 강바른 검사였다. 병천의 등 뒤에 앉아 있던 정진용이 강 검사를 알아보고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태산은 눈앞에 서 있는 병천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벌쭉 웃었다. 그리고 한 손을 번쩍 든다.
“병천…….”
순간 병천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을 보고 태산은 아차 했다. 들어 올렸던 손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밀며 태산은 얼른 말을 바꾼다.
“박병천 씨, 김 대표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천이 입을 삐죽거리며 삐딱하게 답한다.
“성님이 지에 대해 뭐 할 말이 있어서 그짝한테까지 얘길 했다요?”
“무슨 일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아우라고 하던데요.”
태산의 답에 병천의 얼굴이 슬그머니 풀어진다.
“뭘 또 그런 소리를 다 하셔 가지고…….”
병천의 단순한 반응에 태산이 그럼 그렇지 하고 속으로 웃었다.
“정진용 씨?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장 강바른입니다.”
태산이 신분증을 꺼내 정진용에게 보였다. 하지만 뉴스를 통해 이미 강 검사의 얼굴을 알고 있던 정진용은 전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찰청으로 가시죠?”
정진용은 기다렸다는 듯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태산을 따라나섰다.
정진용을 수사차량에 태우면서도 수상쩍다는 듯 병천을 힐끔거리던 조규완 주임이 태산에게 슬쩍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꺼?”
태산도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답했다.
“정보원입니다. 비밀리에 협조해 주고 있는 사람이니 모른 척해주세요.”
조 주임은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운전석에 앉았다.
태산은 조수석에 올라타기 전 병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김 대표에게도 인사 전해주십시오.”
“예, 뭐…….”
병천이 건성으로 고개를 숙이며 애매하게 답했다. 태산은 빙긋 웃고는 차에 올라탔다.
수사차량이 출발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병천이 입맛을 쩝 다시고는 중얼거렸다.
“나도 인자 슬슬 돌아가 볼끄나.”
인적 드문 시골길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도로 폭이 좁아 조 주임은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조심조심 길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맞은편에서 자동차 전조등 둘이 이쪽으로 마주 달려왔다.
이런 한적한 시골길에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차를 마주치는 것이 과연 흔한 일일까?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이상 지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태산은 수상한 기미를 눈치채고 조 주임에게 주의를 주려 했다.
“조 주임, 조심해요.”
“예?”
마주 오는 차에 길을 비켜주기 위해 어둑한 길가 쪽으로 차를 붙이느라 신경이 곤두선 조 주임이 무심히 되물은 순간, 갑자기 선두에서 마주 오던 승합차가 되레 왱 하고 속력을 높이더니 운전석 쪽 헤드라이트를 힘껏 들이받았다.
조 주임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수사차량은 길가로 굴러떨어졌다. 차량은 옆으로 뒤집혀 조수석 쪽 문을 바닥으로 하고 모로 드러누웠다.
차가 굴러떨어지며 옆 유리창에 머리를 호되게 부딪친 태산은 얼른 고개를 저어 정신을 추슬렀다. 자신의 위쪽에 조 주임이 대롱대롱 매달려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마에는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 주임! 조 주임! 괜찮아요?”
조 주임이 깜박 정신을 놓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괘, 괜찮습니더. 부장님은예?”
“난 괜찮습니다.”
태산은 그렇게 대답하며 뒷자리를 돌아보았다. 정진용은 잔뜩 겁에 질려 구석에 구겨져 있었지만 딱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저, 저 사람들 대체 뭡니까?”
정진용이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태산도 고개를 돌려 앞을 본다.
승합차 두 대에서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덩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놈들은 손마다 야구방망이, 쇠 파이프, 각목 등을 하나씩 챙겨 들고 기세등등하게 이쪽으로 몰려왔다.
* * *
“조 주임, 빨리 내려요.”
태산이 안전벨트를 풀며 다급하게 말했다.
조 주임은 안전벨트를 풀려고 애썼으나 달깍이기만 할 뿐 풀리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탓에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태산은 거의 집어 뽑듯이 조 주임의 안전벨트를 잡아당겨 풀었다. 그 바람에 위쪽에 매달려 있던 조 주임이 태산 위로 짓누르듯 떨어졌다.
그사이 덩치들은 이미 코앞에 육박해 있었다. 사내들은 라이트로 차 안을 훑어보더니 정진용이 뒷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뒷문으로 몰려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태산이 재빨리 손을 뻗어 잠금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자 덩치들은 이내 손에 든 쇠 파이프로 유리를 깨기 시작했다.
“으아아~”
정진용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일마들 대체 뭐꼬?”
조 주임이 황망히 중얼거렸다.
“광수대에 지원 요청 하세요. 내가 나가서 막겠습니다.”
“예? 검사님 혼자 우얄라꼬요.”
조 주임이 만류했으나 태산은 이미 조 주임을 밀어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가 옆으로 누운 상태라 조수석 문이 바닥을 향하고 운전석 문이 머리 위에 있었다. 손잡이를 당겨보았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충돌하면서 문이 구겨진 탓인 듯했다.
‘이럴 때는 키가 큰 게 영 불편하군.’
태산은 엉거주춤 서서 하늘을 들어 올리는 아틀라스처럼 한쪽 어깨에 운전석 문을 얹었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들어 올리는 것이다. 금속이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조 주임은 입을 떡 벌렸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꺼내 들었다.
“광수대지예. 지원 좀 해주이소. 여기가…….”
그러나 전화를 채 마치기도 전에 덩치들이 뒷좌석 유리를 깨고 정진용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조 주임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가는 정진용의 다리를 붙들고 매달렸지만 조 주임까지 줄줄이 뽑혀 나갔다.
태산이 끙 하고 힘을 주자 운전석 문이 마침내 텅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태산이 열린 문밖으로 훌쩍 뛰어올라 바닥에 착지했다.
덩치들은 정진용의 다리에 매달린 조 주임을 떼어내려 몽둥이찜질을 하는 중이었다. 태산은 조 주임을 둘러싼 덩치들의 덜미를 잡아 하나하나 집어 던졌다.
하지만 조 주임을 보호하는 사이 정진용은 이미 승합차로 끌려가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정진용이 애원하며 바닥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 순간 자동차 한 대가 쌩하니 달려와 승합차 옆에 섰다.
“이 쌍놈의 새퀴들이 여서 뭐 하는 거여?”
병천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운전석에서 튀어나왔다. 태산을 뒤따라 시내로 내려오다가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이건 뭐꼬?”
가까이 있던 한 놈이 병천에게 달려들었다. 병천은 다짜고짜 이마로 상대의 코를 들이받았다. 상대는 맥없이 고꾸라졌다.
병천은 그 기세 그대로 비탈에서 달려 내려와 선두에서 정진용을 끌고 가고 있는 덩치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덩치는 억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조 주임, 일어날 수 있겠어요?”
조 주임에게 달려드는 놈들을 모두 떼어낸 후 태산이 다급히 물었다. 조 주임은 옆구리를 쥔 채 간신히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괘안심더. 그보다 정진용이를…….”
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진용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갔다. 조 주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차로 돌아갔다. 떨어뜨린 핸드폰을 찾아 다시 지원 요청을 하기 위해서다.
처음부터 정진용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라는 지령을 받아서인지 덩치들은 쓰러졌다 일어나서도 정진용에게로 달려들었다. 정진용 앞을 가로막고 선 병천에게 덩치들이 사방에서 좀비처럼 몰려든다.
병천이 등 뒤에서 달려드는 놈을 메다꽂고 돌아선 사이 병천의 뒤통수를 노리고 쇠 파이프가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병천아!”
태산이 병천을 부르며 순식간에 사이로 육박했다. 병천을 노리고 날아들던 쇠 파이프들이 태산의 등 뒤에 쏟아졌다. 병천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하지만 태산은 흔들림 없이 버티고 서서 오히려 병천에게 물었다.
“병천아, 괜찮냐?”
“예, 형님.”
병천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답하고 말았다. 그 목소리, 말투, 아우라가 생전의 태산을 떠올리게 한 탓이다.
태산은 빙긋 웃고는 돌아서 병천과 등을 맞대고 섰다. 병천도 어쩐지 든든한 마음으로 태산에게 등을 맡겼다.
태산을 가격했던 덩치들이 둥글게 휘어진 쇠 파이프를 보며 기가 질려 중얼거렸다.
“씨바, 와 멀쩡하노?”
“괴, 괴물 아이가?”
현저히 차이 나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밀리자 덩치들은 정진용을 버려두고 태산과 병천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태산은 병천과 등을 맞대고 싸우면서 어쩐지 즐거운 고양감을 느꼈다. 예전에 함께 싸우던 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까닭 모를 흥분감을 느끼는 것은 병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잘 싸운다 해도 연장을 들고 한꺼번에 덤비는 떼거리들에게는 당할 재간이 없었지만 강 검사가 병천의 빈틈을 절묘하게 메워주고 있었다. 마치 전에도 호흡을 맞춰 함께 싸워본 사람처럼.
아비규환이 된 현장을 지켜보며 정진용은 슬금슬금 엉덩이를 밀고 뒤로 물러섰다. 모두 싸움에 주의를 빼앗겨 신경 쓰지 않는다 싶은 순간 정진용은 몸을 말고 어둠 속을 더듬어 미친 듯이 달렸다.
몇 번이나 구르고 넘어지며 달리던 정진용은 드디어 국도변에 다다랐다. 국도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정진용은 길가에 서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차가 도로변에 정차했다. 정진용은 차창으로 다가가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멀끔한 차림새에 비즈니스 슈트를 입은 사내였다. 마른 체격에 조금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가는 금속 테 안경을 쓴 것이 영리해 보여 IT 기업의 젊은 CEO 같은 느낌이다.
정진용은 사내의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죄송한데 가시는 곳까지 좀 태워주시겠습니까? 버스를 잘못 내렸는데 차도 끊기고 택시도 잡을 수가 없어서…….”
물끄러미 정진용을 바라보던 사내는 별달리 묻지도 않고 빙긋 웃으며 답했다.
“타시죠.”
정진용은 덥석 조수석에 올라탔다. 사내는 정진용을 차에 태운 후 잠깐 진행하다가 방향을 틀어 방금 전 정진용이 나왔던 길로 진입했다.
“자, 잠깐만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사내는 태연하게 답했다.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요. 볼일 끝나면 원하시는 곳까지 태워다 드리죠.”
미심쩍은 말이었으나 정진용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인지 안경 옆으로 엿보이는 사내의 눈매가 섬뜩하도록 날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어두운 길목에 숨어 있던 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막아섰다. 피해 가지 못하도록 비스듬하게 막아선 자동차에서 사내가 둘 내린다.
두 사람은 이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와 운전석의 사내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경찰입니다. 수배범을 찾고 있는데요. 옆에 타신 분과는 어떤 관계십니까?”
정진용은 태연하려 애썼으나 경찰이라는 말에 오금이 저려 움찔 떨었다. 이대로 들키는 건가 생각했지만 의외로 사내는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저희 회사 직원입니다만.”
“어떤 회사지요?”
“건설 일 합니다.”
사내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형사에게 보여주었다.
[태산건설 대표 김범진]
명함을 들여다보는 형사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정말로 직원입니까? 수배범을 비호하면 범인도피죄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범진은 태연하게 말했다. 오히려 상대가 먼저 평정이 무너져 갑자기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범진의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 댄다.
“개수작하지 말고 정진용이 넘겨!”
기세 좋게 외쳤으나 다음 순간 허를 찔려 움찔한다. 어느새 범진이 단도를 빼 들고 형사의 갈비뼈 사이를 꾸욱 누르고 있었다.
“어디 한번 쏴볼 테면 쏴봐. 내 이마에 구멍 뚫리기 전에 니 허파에 바람구멍이 먼저 뚫릴 테니.”
밀착 상태에선 칼이 총보다 빠르다. 게다가 경찰 권총의 첫 발은 공포탄이다.
이 상황에서는 당연히 형사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마 물러나지 못하고 형사는 범진을 노려보며 대치했다.
그때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멀찍이 서 있던 다른 형사가 이쪽을 향해 말했다.
“광수대다. 철수하자.”
범진은 어쩐지 그 목소리가 귀에 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위님, 다 잡았는데…….”
“빨리 타.”
다른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자동차에 올라탔다.
이종민 경사는 입술을 꾸욱 깨물고는 권총을 거두었다. 그리고 부랴부랴 차로 돌아가 무전을 쳤다.
“철수! 철수!”
두 형사는 차를 몰아 국도 쪽으로 사라졌다. 범진도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맞은편에서 승합차 두 대가 달려와 아슬아슬하게 범진의 차를 스쳐 지나간다.
조금 더 가다 보니 길 한가운데에 병천이 버티고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범진이 차에서 내리자 병천은 깜짝 놀라 다가왔다.
“성님, 여기는 웬일이십니까?”
“걱정이 돼서 와봤다.”
태산이 조 주임을 부축해 도로로 올라오다 범진을 보고 반가운 기색을 한다.
“괜찮다 했는데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제가 안 왔으면 정진용이 놓칠 뻔했잖습니까? 도망가고 있는 걸 잡아 왔습니다.”
범진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정진용을 힐끗 눈짓하며 말하고는 태산의 상태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섰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난 괜찮은데 조 주임과 병천이가 좀 다쳤다.”
범진이 병천을 돌아보자 병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거 아니요. 쪼까 긁힌 것뿐이여라.”
병천은 그렇게 답하면서도 강 검사와 범진이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게 못내 수상했다.
강 검사는 자신을 언제부터 알았다고 저렇게 이물없이 병천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게다가 범진은 강 검사에게 뭘 저렇게 깍듯하게 군단 말인가. 아무리 검사라지만 나이는 또래일 듯한데.
범진은 태산과 함께 조 주임을 부축해 차 뒷자리에 눕혔다. 멀리서 다가오던 경찰차 사이렌이 가까워졌다. 곧 경찰승합차가 다가와 범진의 차 뒤에 섰다.
“광수대입니다. 지원 요청 하셨습니까?”
태산이 앞으로 나섰다.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장 강바른입니다. 긴급 상황은 이미 끝났습니다만 부상자와 중요 증인이 있습니다. 부상자는 병원으로 호송해 주시고 증인은 대구지검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경찰이 조 주임과 정진용을 옮겨 싣는 사이 범진이 태산에게 은밀히 전했다.
“오는 길에 형사 둘이 길을 막고 정진용이를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경찰이?”
“예. 신분증도 있었고 권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적인 용무 중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광수대가 오자마자 내뺀 것을 봐서는요. 가는 길에 어디론가 철수하라고 무전을 넣었습니다.”
“그래, 아까 우릴 공격한 놈들도 무전을 받고 내뺐어. 그 형사 놈들이 시킨 게 분명하군. 보기에는 건달들 같던데.”
태산이 다시금 범진에게 물었다.
“신분증은 자세히 봤나?”
“주위가 어두운 데다 휙 꺼냈다 바로 넣어버려서 소속이나 이름은 확인 못 했습니다.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 제대로 안 보여준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같이 있던 형사를 경위라고 부르는 것은 들었습니다.”
“경위라고?”
* * *
“부장님, 준비됐습니다. 출발하시겠습니까?”
광수대 형사가 범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태산을 재촉했다.
“그래요. 출발하죠.”
태산이 광수대 차량에 올라타며 범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다. 조심히 올라가라.”
“예, 들어가십시오.”
“병천…….”
태산은 무심코 병천이라고 부르려다가 얼른 정정했다.
“병천 씨도 수고했어요. 병원 꼭 들렀다 올라가요.”
병천은 어쩐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더니 은근슬쩍 꾸벅 머리를 숙인다.
“아녀라~ 들어가십쇼~”
광수대 차량이 멀어지자 범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은 채 병천을 돌아본다. 병천은 괜히 뜨끔해서 움찔했다.
“왜 그렇게 본다요?”
“그렇게 질색하던 강 검사 아니냐? 오늘은 왜 이렇게 고분고분한가 해서. 들어가십쇼?”
“아니 뭐, 가까이서 본게 사람이 괜찮드마요. 사내답고, 배짱이 두둑헌 게 카리스마 있고, 자기 사람 애낄 줄도 알고.”
병천은 조 주임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 사리지 않고 뛰어들던 강 검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차마 그 강 검사에게서 생전의 태산의 아우라를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말했지 않냐.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아, 뭐 그라고 존경할 만헌가꺼정은 잘 모르겄고 암튼 지는 성님 마음이 그렇다고 한 게, 은인으로 모시고 싶다 헌게 따르는 것뿐이오.”
“그래, 어쨌든 고맙구나.”
범진이 놀리듯 말해 병천은 조금 울컥해서 툴툴거렸다.
“지가 어련히 알아서 안 할까 봐 여꺼정 뭐 하러 내려오셨다요. 싸게 올라갑시다.”
범진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나는 들를 데가 있다. 먼저 올라가라.”
“뭔 일을 보실라고요. 같이 갈까라?”
“아니다. 진주 내려온 김에 누굴 좀 만나고 갈까 해서. 옛 인연이라 넌 모르는 사람이다.”
범진이 그렇게 얘기하니 병천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금방 물러났다.
“그럼 지는 먼저 올라갑니다, 성님. 조심히 올라오씨오.”
병천은 미련 없이 차를 몰아 어둠이 내린 밤길로 사라졌다. 범진도 차를 몰아 진주 시내로 들어갔다. 오래된 상가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려 범진은 2층을 올려다보았다.
2층 유리창에 어지럽게 붙은 시트지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퇴근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범진은 시트지 위에 쓰인 문구를 가만히 읽어본다.
소연 흥신소 심부름센터… 사람 찾기, 불륜증거수집 해드립니다…….
소연이라… 장용수의 마음을 사로잡아 조직까지 버리게 한 그 여자의 이름이 분명 저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 이름을 흥신소 상호로 붙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놈이 진짜 세기의 로맨티시스트였지.]
태산이 했던 말이 생각나 범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튼 범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범진은 계단을 올라가 흥신소 문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예!” 하고 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장용수의 목소리였다.
범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벌컥 문을 열었다. 책상 앞에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용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본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살이 좀 붙은 것 같았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용수는 범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엉거주춤 일어난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범진은 어색함을 누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용수 형님.”
용수의 눈이 번쩍 크게 뜨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온다.
“범진이? 김범진이냐?”
“예, 형님.”
용수는 범진을 앞에 두고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와! 이 새끼 이거? 와, 그 존만 한 똥개 새끼가?! 와아~”
몇 번이나 탄성을 뱉던 용수가 불현듯 웃음을 터뜨리며 범진을 덥석 끌어안았다.
“와하하~ 이 새끼 이거 완전 용 됐구나! 때가 꼬질꼬질하던 시골 똥개는 어디 가고 이젠 제법 의젓한 진돗개 같은데? 덩치는 여전히 존만 하다만. 어디 다시 좀 보자.”
용수는 품에서 범진을 떼어놓고 신기한 듯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다.
용수가 여전히 자신을 애완견 취급 하는 통에 범진은 잠깐 반가우려고 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금세 기분이 불쾌해졌다.
“형님은 많이 늙으셨습니다.”
범진은 일부러 날을 세우며 삐딱하게 답했다. 하지만 용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킬킬 웃었다.
“이 새끼가 겉모습은 바뀌었어도 속은 여전하구먼.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운 눈을 해가지고 태산이 뒤만 졸졸 따라다녔잖냐. 태산이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굴더니 그놈 죽고 어떻게 살았…….”
거기까지 얘기하던 용수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울컥 눈물을 쏟았다.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으로 눈을 덮어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나오고 꾹 다문 잇새로는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범진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한참을 오열하던 용수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머쓱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그동안 태산이 죽음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너 보니 태산이 생각도 나고… 그리고 인마, 니가 생각보다 너무 멀쩡해서, 아니, 태산이 살아생전보다 입성이 더 좋아진 것 같아서 배신감도 느껴지고…….”
“태산 형님은 살아계십니다.”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용수는 범진이 불쑥 뱉은 말에 얼떨떨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냐,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멍한 얼굴로 묻는 용수를 보며 범진은 아차 하고 후회했다. 슬퍼하는 용수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남을 위로하는 게 서툰 범진으로서는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나 가시방석이었던 탓이다.
“어, 그러니까…….”
범진은 눈을 굴리며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명치를 꾸욱 눌렀다.
“제 마음속에…….”
“푸하하하하핫!!!!!”
용수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려 범진은 다시 한번 흠칫 놀랐다.
“이 새끼 이거! 존만 하던 애새끼가 이젠 아재가 다 됐네. 뭐냐, 그 뜬금없는 아재 개그는?!”
용수는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못하며 범진의 팔을 끌어 소파에 앉혔다.
“앉아라, 앉아. 찬찬히 얘기 좀 하자.”
범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놓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라시면 더 보내 드리겠습니다.”
용수는 봉투는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 범진에게 밀어놓았다.
“그냥 해본 말이다. 내가 진짜로 돈을 받겠냐? 오랜만에 추억을 되새긴 거로 충분히 보상이 됐다. 내가 태산이한테 빚진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너한테라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다행이다.”
범진은 봉투를 밀어놓는 용수의 왼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끼손가락이 뭉툭하게 짧고 손톱이 없다.
용수가 범진의 시선을 의식하고 머쓱하니 손을 거두며 투덜거렸다.
“자를 때는 거침없더니 이제 와 마음에 걸리냐?”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말로만 사과하고 있네, 똥개 새끼가. 니 속이야 빤하지. 태산이가 걱정돼서 나섰던 거 아니냐? 아무튼 참 한결같은 놈이야.”
용수가 문득 즐겁다는 듯 옛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태산이가 어디서 땟국 질질 흐르는 똥개 새끼를 한 마리 주워 왔는데 말이야. 딴에는 지가 승냥인 줄 아는 것 같지만 태산이 뒤만 뽈뽈 쫓아다니는 게 딱 시골 똥개라. 그게 말도 못 하게 귀여워서 놀리기라도 하면 질리지도 않고 번번이 욱하는 거야. 꾹 눌러 참으면서 눈빛으로는 ‘저 새끼를 언제 죽이나’ 이러면서 쌍욕을 하는 게 뻔히 들여다보였지. 아주 놀리는 맛이 그만이었는데.”
용수는 그렇게 말하며 낄낄 웃었다.
범진은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 비뚤어진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범진은 민망해하며 봉투를 다시 용수 쪽으로 밀어놓았다.
“받아주십시오. 빈손으로 인사 갔다 온 걸 태산 형님이 아시면 제가 혼납니다.”
“너는 아직도 태산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말한다?”
용수의 말에 범진은 그저 빙긋 웃었다. 정말로 태산이 곁에 있기라도 한 듯 든든한 표정이라 용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래, 그래. 니 마음속에 살아 있겠지. 알았다. 알았어.”
용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지못해 봉투를 받아 넣었다.
“보수도 받았으니 손님 대접을 해야지. 같이 술 한잔하자.”
용수는 범진의 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신소 문을 닫고 주점으로 가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술잔을 나누었다.
예전엔 그렇게 질색을 했었건만 오랜 세월이 지나 마주 앉아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니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싶은 범진이었다.
주점을 나왔을 때쯤엔 거나하게 취한 용수가 굳이 자신의 집으로 2차를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범진은 어쩔 수 없이 용수를 부축해 용수의 집으로 향했다.
“소연아~ 내다! 서방님 왔다!”
용수는 현관 앞에서부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자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뭐야? 애 자는데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여자는 용수에게 퉁을 주더니 등 뒤에 서 있는 범진을 발견하고는 민망한 얼굴을 했다.
“아… 손님이 계셨네.”
소연은 머리와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용수에게 은근히 눈총을 주는 것이었다.
“미리 말을 해줬으면 준비를 했을 텐데…….”
하지만 용수는 대꾸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 신발부터 벗어 던졌다. 용수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선 범진이 소연에게 머리를 숙였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형수님.”
“아니에요.”
공손히 인사를 받은 소연이 아이방으로 직행하는 용수를 보고 대번에 목소리를 높인다.
“애 깨우지 말라니까!”
소연이 득달같이 달려 들어가 용수의 덜미를 잡아 끌어낸다. 용수가 휙 방향을 돌리더니 소연을 끌어안고 빙글거린다.
“내가 오늘 옛 친구를 만나가 기분이 끝내줘서 안 그카나. 술상 좀 봐온나.”
“내올 것도 없는데…….”
소연은 곤란한 얼굴로 용수를 밀어냈다. 하지만 범진을 향해서는 웃는 낯으로 친절히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범진은 소연이 내어온 간소한 술상을 앞에 두고 용수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용수의 강권으로 손님방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바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번에는 소연이 아침을 먹고 가라며 잡았다. 해장하라고 끓여준 콩나물국까지 훌훌 마신 후에야 범진은 용수의 집을 나올 수 있었다.
범진이 그만 가보겠다고 하니 용수는 아직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는 딸까지 안고 나와 대문 앞에서 배웅을 했다.
돌아서 가려던 범진은 용수 가족의 모습을 무심히 뒤돌아보았다가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어 용수에게 물었다.
“형님,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습니까?”
“사진은 왜?”
“보기 좋아서요. 기념으로.”
“실없기는.”
용수는 타박했지만 싫지는 않은지 슬쩍 허락해 준다.
“한번 자알~ 찍어봐라.”
범진은 핸드폰을 꺼내 용수의 가족사진을 찍었다. 범진이 찍힌 사진을 보여주니 용수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오~ 괜찮네. 사진 보내줘.”
“예, 형님.”
범진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용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범진은 용수와 헤어진 후 흥신소 앞에 세워둔 차로 돌아왔다. 운전석에 앉아 먼저 용수에게 사진을 보내고 그다음 태산에게도 용수의 가족사진을 전송했다.
태산도 용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다.
띠롱~
그 시간 이미 출근해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던 태산은 메시지 수신 알림 소리를 듣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대포 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화면을 바라보는 태산의 눈이 커졌다가 이어서 은은한 미소가 퍼진다.
“용수… 잘 살고 있구나.”
전윤지 검사가 집무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어 태산은 얼른 대포 폰을 챙겨 넣었다.
“부장님, 정진용 씨 참고인 신문 준비됐습니다.”
“나갑니다.”
태산은 얼른 표정을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태산은 영상녹화실에서 정진용과 마주 앉아 취조를 시작했다. 전윤지 검사가 입회해 과정을 지켜보았다.
“정진용 씨, 먼저 배진만 부장님을 만나 제보하려던 사안이 뭔지부터 들어보죠.”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정진용이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동안 태산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검사장에게 제출한 진정서 내용으로 미루어 노회한 사업가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젊은 것이 의외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항상 말씀하셨죠. 사업은 자기 돈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고.”
불쑥 말을 꺼내놓았던 정진용이 설명이 부족하다 느꼈는지 부연 설명을 했다.
“대한건설은 아버지가 일구신 회사입니다. 심장마비로 급사하시는 바람에 제가 서른도 안 되어서 물려받았습니다. 나이도 어린 제가 아버지께 물려받은 회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지역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들과 두루두루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했죠. 검사, 공무원, 은행원, 정치인 등등 만나는 사람마다 돈줄을 자처했습니다. 필요할 때 큰돈 쓰는 것보다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챙겨두는 편이 더 잘 먹히거든요.”
아버지의 사업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했다는 것이 결국 로비였나? 태산은 내심 코웃음을 치고는 물었다.
“정진용 씨 주장대로라면 쓴 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렇게 큰돈을 계속 쓸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정진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제가 사업하며 로비하는 데 쓴 돈만도 100억은 될 겁니다. 나중에는 쓰다 보니 의리 때문에라도 안 쓸 수 없는 경우도 생겼고요. 회사 어려워지니까 그마저도 아쉬운 돈이 되었지만 한창 잘나갈 때는 그 덕에 연 매출 5천억도 찍었는데 그 정도 쓰는 게 아까웠겠습니까?”
사업가 특유의 과장이 있겠지만 매출이 그 정도 나온다면 확실히 로비 금액도 투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법하다.
“건설경기가 하락세가 되면서 사업도 옛날 같지 않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자기자본비율도 더 낮아졌죠. 은행 대출 받아 건물 올리고 분양해 수익이 나면 갚고 하는 식이 반복되었어요.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옛날만 못하긴 해도 원래 사업이라는 게 그렇게 굴러가는 거고요. 내 돈만 가지고 사업하려면 동네 구멍가게나 해야죠.”
불현듯 정진용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상황이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진용이 고개를 들고 호소하듯 태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은행에서는 원래 기업한테 장기대출 잘 안 해주는 거 아시죠?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크니까요.”
태산도 건설업을 했었으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고리로 단기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잘 갚으면 재대출을 해주는 식으로 돈을 빌려줍니다. 어지간하면 재대출을 해주니 계속 단기대출을 받아 막으면 돼요. 그걸 믿고 사업하는 거죠. 그 때문에 은행장과 대출담당자한테 와이로도 계속 먹였고요.”
이제 와 본전 생각이 나는지 정진용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핥았다.
“그런데 갑자기 은행에서 재대출을 승인 안 해주면서 기존 대출도 다 갚으라고 나오더라고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습니다. 자금이 안 돌면 멀쩡한 회사 앉아서 망해요. 이건 그냥 우리 회사 망하라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정진용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당장 벌여놓은 공사 하도급업체에 돈을 못 줘서 사기죄로 기소됐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 한 것도 아니고 자금 사정이 어려워져서 그렇게 된 건데 그걸 바로 기소까지 하는 검사님들한테도 서운한 마음이 들더군요. 제가 이제까지 접대에 쓴 돈이 얼만데 어려워지자마자 외면하는 것이요.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진정서도 넣고 그랬습니다. 오죽 다급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제가 감옥에라도 가는 날에는 회사는 누가 수습하냐고요.”
“그래서요? 배 부장에게 검사들 비위를 고발하려고 불러낸 겁니까?”
“아니요. 그깟 일로 그렇게 은밀히 움직였겠습니까?”
검사장 역시 푼돈 좀 받은 일을 덮으려고 검사를 해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 말했었다. 그렇다면 뒤에는 더 큰 건이, 더 큰 인물이 있다는 말인가?
“수습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이 주상복합건물 하나가 경락으로 넘어갔어요. 그 건물 지을 때 투자금 받으면서 저당권 이빠이 당겨서 설정해 놓았거든요. 그걸 저당권 걸어놨던 투자회사가 헐값에 덜컥 경락을 받았단 말입니다. 세입자들은 전세금도 다 정산받지 못하고 쫓겨날 위기고요.”
경찰 쪽에서 쫓고 있었다는 정진용의 전세금 사기 사건이 이와 관련된 것인가 보다고 짐작하는 태산이다.
“그런데 경락 직후에 인근 도로개발계획이 발표되면서 건물 가치가 폭등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경락받은 투자회사가 땅값이 오를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깁니까?”
정진용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요?”
“거기 대표가 수완이 아주 좋아요. 이권사업이 걸려 있는 곳이면 항상 먼저 정보를 알고 뛰어들었어요. 젊은 사람들끼리라 마음이 잘 맞아서 사람도 많이 소개받고 접대 자리도 같이하고 그랬습니다. 우리 회사가 리조트 개발 허가 땄을 때도 투자해 주고 이익금을 톡톡히 받아 갔죠.”
어쩐지 귀에 익은 레퍼토리인데 하며 태산은 이마를 모았다.
“아무튼 그 회사가 투자했다 하면 개발허가며 관급공사며 척척 따내는 비결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실권을 가진 공무원들과 다 짝짜꿍이 있는 거예요. 대표 아버지가 국회의원이기도 하고…….”
불쑥 나온 말에 태산은 급히 물었다.
“그 회사 이름이 뭡니까?”
태산이 갑작스럽게 열을 올리니 정진용이 움찔해서는 답했다.
“빅월드 인베스트먼트인데요.”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하! 하고 탄식했다. 배후에 있던 흑막이 이종길이었단 말인가! 벼르고 벼르던 적을 눈앞에서 마주친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전의를 불태웠다.
잠깐 움츠러들었던 정진용은 이내 흥분해 분통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은행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하나뿐이에요. 빅월드에서 뇌물을 받고 대출을 끊은 게 분명합니다. 우리 회사 정리하고 노른자 건물 꿀꺽하려고 한 거죠.”
“빅월드 인베스트먼트에서 은행담당자에게 뇌물을 줬다는 증거가 있나요?”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뻔하잖아요. 처음에 은행장 만난 것도 이현수 대표가 소개해서였다고요. 은행장이 부친인 이종길 의원과 절친이랍디다.”
분명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였다. 태산은 가만히 정진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고 보니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대표는 아직 마약 사건 때문에 빵에 있으니 이 일을 꾸민 건 분명 애비 쪽이다 싶어 이종길 의원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내 건물만이라도 다시 내놔라, 아니면 그동안 빅월드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부정 축재 한 것 다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어요.”
정진용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씨도 안 먹히더군요. 되레 자기 부정을 밝히려면 당신 부정부터 밝혀야 할 텐데 괜찮겠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말했죠. 사업도 망하고 감옥에도 가게 생겼으니 어차피 나에겐 잃을 게 없다고요.”
문득 정진용이 섬뜩한 상상을 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종길 의원이 그러더라고요. 왜 잃을 게 없냐? 목숨은 아깝지 않냐?”
양아치도 아니고 국회의원이 사람 목숨을 놓고 노골적으로 협박까지 했다는 사실에 태산은 아연실색했다.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요. 너무 무서워서 더는 따지지 못하고 도망 나왔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대로 손 놓고 앉아 모든 걸 빼앗기기에는 너무나 억울해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검찰에 제보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경찰이 정진용 씨를 계속 찾고 있었다던데 왜 피해 다녔습니까? 경찰에 제보해도 되었을 일 아닌가요? 신변 보호도 받을 수 있을 테고.”
태산은 정진용이 경찰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떠보듯 물었다.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닌 것 아닙니다. 이종길이 무서워 그런 거죠. 이종길의 심복이 경찰에도 몇 있다고 들었어요. 이현수가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정진용은 불안한 듯 다리를 떨며 말했다.
“대포 폰으로만 연락했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약속 장소까지 추적해 와서 덮쳤어요. 배진만 부장이 당했다지만 까딱 잘못했으면 병원에 누워 있는 건 내가 될 수도 있었어요. 너무 놀라서 신고도 못 하고 도망쳤습니다. 애초에 제가 제정신이 붙어 있었다 해도 신고는 못 했을 겁니다. 누가 이종길과 어떻게 엮여 있을 줄 알고요. 아무도 못 믿어요.”
시선은 흔들리고 숫제 손톱까지 씹는다.
멋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신경증 환자의 피해망상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검사장도 정진용에 대해 정신병자에 사기꾼이라고 잘라 평하지 않았던가.
“배진만 부장을 폭행한 사람의 얼굴은 봤습니까? 목격한 것 다 얘기해 보세요.”
“가로등이 비치고 있긴 했지만 시커먼 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서 제대로 못 봤습니다. 거리도 좀 있었고요. 남자고 체격이 평균보다 약간 큰 정도요. 180은 조금 안 될 것 같고. 하도 경황이 없어서 자세한 건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점은 전혀 없었다. 그 정도 체구의 남자라면 흔하디흔하다.
정진용이 말하다 말고 뭔가 떠오른 듯 아! 하고 탄성을 흘린다.
“뭡니까?”
“아, 아닙니다. 그냥 느낌일 뿐이라…….”
“말씀해 보세요. 단순한 감이라도 수사에 도움이 됩니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그게…….”
정진용은 자신 없는 투로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진주에서 마주친 형사 중 하나가 그 사람이랑 체구가 비슷했어요. 걷는 느낌이랑 움직임도 비슷하고…….”
말하던 정진용의 눈이 갑자기 흡 떠진다.
“그러고 보니 배 부장님 내려칠 때 흉기! 길고 가는 봉 같은 거로 보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경찰 삼단 봉인 거 같아요.”
결국 그 경위란 자가 이종길의 명령으로 배 부장을 해쳤단 말인가.
“진주에서는 그 사람 얼굴 제대로 봤습니까?”
“아니오, 멀리 서 있고 어두워서 잘 못 봤습니다. 대신 가까이 와서 말을 걸었던 형사 얼굴은 기억납니다.”
“알겠습니다. 몽타주 작성해 보죠.”
몽타주를 작성한 후 범진에게도 확인을 시켜야겠다 생각하는 태산이었다.
신문을 마치고 일어나며 태산이 말했다.
“좀 불편하더라도 한동안은 구치감에서 지내세요. 경찰 구치소보다는 안전할 겁니다.”
“예? 구치감에요?”
정진용은 내키지 않는 듯 되물었다.
“그럼 호텔에라도 모실 줄 알았습니까? 제보가 정확하다면 정진용 씨도 증뢰죄 피의자입니다. 목숨은 부지한 대신 처벌받을 각오는 하셔야죠. 물론 수사에 잘 협조해 준다면 최대한 선처해 드릴 생각은 있습니다.”
태산의 답에 정진용은 기가 죽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