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53화 (53/78)

제5장 잡았다, 요놈

“이제 그만 마음 푸시고 용서해 주세요.”

원 부장의 호소에 신 검사장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답했다.

“난 부하가 자기 의견 좀 말한 걸로 언제까지 꽁해 있는 그런 사람 아니네. 사내라면 그렇게 대드는 맛도 있어야지. 입안의 혀처럼 비위만 맞추는 놈은 우습게 보이게 마련이지만 강단이 있고 일 잘하는 놈은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무시할 수 없는 법이야.”

신 검사장은 어느새 강바른에게 감정이입 해 말하고 있었다. 검사장이 강 부장을 동류로 느끼게 하는 작전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먹혀 원 부장도 얼떨떨할 정도였다.

“알았으니 나가보게.”

신 검사장은 손을 휘휘 저어 원 부장을 내보낸다. 원 부장이 문을 나가려는 찰나 신 검사장이 불현듯 원 부장을 불렀다.

“삼을 사서 수사를 했으면 수사비를 상당히 썼을 텐데… 얼마나 들었다던가?”

“삼 사는 데만 6백 조금 넘게 들었고 그 외에 잡비까지 하면 7백 가까이 될 겁니다.”

“그래? 알았네.”

그날 오후, 김민하 실무관이 집무실로 뛰어 들어와 태산에게 보고했다.

“부장님, 위에서 수사비 쓴 것 정산해 준다고 돈이 내려왔는데요. 분명 680만 원 써서 올렸는데 천만 원이 내려왔어요. 게다가 검사장님이 특별히 부장님께 수고했다고 전하라 하셨대요.”

태산은 검사장이 웬일인가 의심스럽게 생각한다. 지검 전체 검사들을 모아놓고 강당에서 훈시할 때 대놓고 검사장에게 반기를 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든 바 있다.

그랬으니 공을 좀 세웠다 해서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올 리가 없는데. 오히려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 모를까.

들뜬 기색으로 보고하는 김 실무관에게 태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공돈 생긴 것도 아니고 어차피 수사비로 쓰일 돈인데요.”

“그래도요. 수사비에 여유가 있으면 맘 안 졸이고 팍팍 쓸 수 있잖아요.”

김 실무관의 대꾸에는 피식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수사비 정산받은 기념으로 오늘 저녁은 부서 회식이라도 할까요?”

“좋죠! 그럼 제가 메신저로 전달하겠습니다.”

김 실무관은 신이 나서 집무실을 나갔다.

회식 다음 날부터 태산에게는 업무 지옥이 펼쳐졌다. 원래 담당하고 있는 사건들을 업무 시간 중에 빠르게 처리하고 퇴근 시간 후에는 강바른이 생전에 남긴 구준태 시장 관련 자료들을 재검토하여 수사를 보강해 나갔다.

지이이이이잉~

핸드폰 진동 소리에 서류에 얼굴을 박고 있던 태산이 고개를 들었다. 시간을 보니 밤 10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이런 시간이 되었나. 일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태산은 목을 돌려 스트레칭을 하며 주머니를 더듬었다. 울리는 것은 대포 폰이다. 꺼내서 액정을 확인하니 ‘선화’라는 이름이 깜박인다.

어쩐지 반가운 기분에 태산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받자마자 선화의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울린다.

-자기야, 뭐 해?

나른하게 풀어진 목소리로 미루어 자기 전에 침대에서 전화하는 모양이다. 편안하고 스스럼없으면서도 조금 애교 섞인 것이 오랜 연인 사이의 안부 전화 같아 조금 간지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런 기분을 자각하고 태산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답했다.

“뭐 하긴. 일하지.”

-이 시간까지? 자기 승진하지 않았어? 검사들 승진하면 일 좀 줄어든다던데.

“부장 이상은 되어야 그런 거지. 부부장은 아직 현장직이야. 내가 맡은 사건에다 밑에 평검사들 사건 관리까지 해야 하니 일이 더 늘었어.”

그나마 태산은 뛰어난 지력과 초인적인 체력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 거뜬히 버티고 있지만 다른 검사들은 이런 과중한 업무를 어떻게 감당하는 것일까? 이런 식이라면 모든 사건을 충분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경찰이 올리는 조서대로 대충 처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까?

-구준태 시장 조사할 시간은 있는 거야?

“조사하고 있어. 하지만 진전이 없네. 비자금 계좌를 찾지 못하면 역시 힘들겠어.”

-내연녀는 찾아봤고?

“여성 보좌관들 계좌는 예전에 다 뒤집어봤고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나 미행도 붙여봤지만 오리무중이야. 내연녀가 있는 건 확실해?”

태산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선화도 슬그머니 얼버무린다.

-내가 볼 때는 분명 여자가 있는 것 같았는데…….

선화는 잠깐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잖아, 검사님. 정 어려우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구 시장한테 타격을 줄 수는 있어. 시에서 지원하는 사업에 몰래 투자해 배당금 챙겼지, 뇌물도 받았지. 내가 증언해 줄 수 있어. 증거도 확보해 놨고.

태산은 잘라 말했다.

“그 정도로는 약해. 게다가 당신까지 감옥에 가야 될 수도 있어.”

-그러지 뭐.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난 할 거야.

선화의 결심은 굳었지만 태산은 차마 그러자고 할 수 없었다.

“아직은 아니야. 좀 더 파볼게.”

태산은 얼른 대화를 마무리하고 화제를 돌렸다.

“용건은 그것뿐?”

-아니, 자기 아무 일 없이 전화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래서… 뭔데?”

-곧 구 시장 부친 팔순 잔치인데 나도 초대받았어.

태산은 절로 미간을 모았다.

“팔순에 가족도 아닌 당신을 초대해? 얼마나 크게 하려고?”

-그러니까 말이야. 구 시장 부친도 원래 법무부 장관 출신이잖아. 아나운서 불러서 사회 맡기고 초대 가수도 부르고 각계 인사들 다 초청해서 대규모 문화 행사처럼 열려고 기획하고 있나 봐. 초청 하객이 3백 명은 될 거래. 부조는 안 받는다지만 봉투 찔러줄 인간들은 알아서 찔러주겠고. 거기 오는 인간들의 면면을 보면 구 시장 인맥이 대충 그려지지 않을까? 수사하는 데 참고가 될 것 같아서.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일반인들도 참석할 수 있나?”

-그건 아닌 것 같아. 초청장을 받은 사람만 출입시키려나 봐.

“그렇다면 수사관을 투입하기는 힘들겠군.”

태산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당신이 수고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좋아. 맡겨둬.

선화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마침내 팔순 잔치 당일, 선화는 종일 바쁘게 태산에게 사진과 동영상들을 보냈다. 잔치 자리를 기념한다는 핑계가 있으니 대놓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대는데도 아무도 의심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뒷배경에 하객들이 걸리게 찍은 셀카가 수두룩했고 심지어 안면이 조금이라도 있는 하객과는 함께 인증 샷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태산은 선화의 넉살에 혀를 내둘렀다.

태산은 선화가 보낸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하객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대부분 눈에 익은 각계 각층의 명사들이었고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미지 검색만 돌리면 찾을 수 있는 꽤 명성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려일보 회장, 방송사 PD 등의 언론인, 유명 디자이너, 건축가, 작가, 배우 등 문화계 인사, 전 총리, 경기도지사, 인천시 교육감 등 정치계 인사, 그리고 IT 기업 대표, 한류 뷰티 사업체 대표인 선화까지 모두 쟁쟁했다.

2대에 걸쳐 쌓은 구준태 시장의 인맥에 태산은 내심 경악했다.

팔순 잔치가 열리는 시민홀 로비의 전경을 천천히 돌려 찍던 카메라가 멈칫 어느 한 곳에 멈췄다. 하객을 맞이하고 있던 구 시장이 누군가 다가오자 반색을 하며 악수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서서히 줌을 해 들어간다. 줌이 멈추자 구 시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던 장본인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얼굴을 확인하고 태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름 아닌 국회의원 이종길이었던 것이다.

구준태 시장과 카르텔이 있을 거라 의심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또 얼굴을 마주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태산이 쓴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영상이 뚝 끊어진다. 선화의 활약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 * *

선화는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다가 구준태 시장이 돌아보자 슬그머니 카메라 앱을 끄고 구 시장에게 다가갔다. 구준태는 시민홀 로비에서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방금 전까지 악수를 나누고 있던 사내가 몹시 눈에 익다.

기억을 더듬어보던 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대한당 당대표 이종길이 분명하다.

‘거물급이 등판하셨군.’

선화는 속으로 생각하며 구 시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시장님.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구 시장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하자 선화가 이종길 의원에게 슬쩍 눈길을 건네며 물었다.

“이분은 혹시…….”

“참, 소개를 해드린다는 게… 자유대한당 이종길 의원님이십니다.”

“어머, 맞죠? 세상에~ 유명한 분을 이렇게 뵙네요. 영광입니다.”

선화의 호들갑이 썩 싫지는 않은 듯 이종길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구 시장, 이분은 누구신가?”

“전에 말씀드렸던 뷰티테크의 한선화 대표입니다.”

어째서인지 구 시장이 은밀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수완이 아주 좋은 미녀 사업가라고요.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은밀히 말하는 구 시장의 기색이며 반기는 이종길의 태도로 짐작해 보건대 구 시장은 이미 이종길에게 자신이 제공한 투자 기회에 대해 얘기를 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는 것은 구 시장과 이종길이 상당히 긴밀한 관계고 커넥션도 이종길에게까지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태도로 봐서는 이르든 늦든 이종길 역시 입질을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선화는 조바심이 일었다.

‘살짝 당겨봐도 괜찮겠지.’

선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이종길의 팔짱을 꼈다.

“저야말로 만나 뵙고 싶었어요. 유권자들 반응 의식 안 하시고 언제나 소신 발언 하는 강한 모습 너무 멋있으세요. 요즘 젊은 남자들한테서는 그런 남자다운 면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잖아요?”

이종길은 허허 웃었다. 구 시장이 혀를 차며 퉁을 준다.

“헛참, 한 대표 새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싹 안면 바꾸는군요. 전에 나한테도 그 비슷한 말 했던 것 같은데.”

“제가 워낙 뭐든 새것을 좋아해서요. 새로운 분을 만나니 좋아서 그래요. 너무 샘내지 마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보, 사회자가 얘기 좀 하자는데요?”

돌아보니 구 시장의 아내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그래요?”

구 시장은 건성으로 답하고는 선화에게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그럼…….”

그렇게 말을 맺고는 이종길 의원과 함께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의원님, VIP석에 자리 마련해 뒀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구 시장이 사라지자마자 구 시장 아내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아무리 봐도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진 않은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선화는 구 시장의 아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뷰티테크의 한선화 대표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화가 백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자 구 시장의 아내가 명함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우리 바깥양반한테서 대체 무슨 얘기를 들었을까?”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말에는 가시가 들어 있었다. 사실 구 시장한테서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백을 구입해 달라 했을 때뿐이었지만 선화는 넉살 좋게 답했다.

“내조를 너무 잘해주신다며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사랑받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선화는 당장에라도 자신이 구입해 보낸 백을 받았느냐 묻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아야 했다. 만약 구 시장의 아내가 남편의 외도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 괜히 긁었다가 구 시장이 내연녀를 정리하기라도 한다면 간신히 포착한 단서만 날려 버리게 된다.

* * *

구준태의 아내는 선화의 명함을 무감동하게 내려다보고 있다가 손을 까딱했다. 등 뒤에서 구 시장의 비서관으로 보이는 여성이 다가와 핸드백을 건네주었다.

선화는 눈을 크게 떴다. 구 시장의 아내가 받아 들고 명함을 집어넣은 백은 분명 자신이 구 시장에게 구입해 선물한 백 중 하나다. 세 개의 백 중에 가장 클래식한 스타일이었다.

‘정말로 아내에게 주려는 거였나?’

선화는 헛다리를 짚었나 싶어 착잡했다.

선화가 백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구 시장의 아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본다. 선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둘러댔다.

“어머~ 백 너무 고급스럽네요. 안목 있으신데요.”

구 시장의 아내는 예의상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여전히 태도는 냉랭했다.

그런데 잠시 후 구 시장 아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지어낸 표정이 아니라 정말로 반가워하는 얼굴이라 선화는 누굴 보고 그러는 건가 등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언젠가 강바른 검사가 데려간 회원제 바에서 만난 여자였다. 매우 강렬한 첫인상이었으므로 바로 기억할 수 있었다. 여자도 선화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뜬다. 분명 상대도 선화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곤란한데…….’

여자는 선화가 강바른 검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고 강 검사와도 안면이 있는 듯한 눈치였다. 혹시나 구 시장의 아내가 선화와 강 검사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수사에 좋을 것이 없다.

선화는 구 시장 아내가 보지 못하게 몸을 돌리고 슬쩍 손을 들어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했다. 바에서 만났을 때 그 여자가 보여주었던 제스처를 따라 한 것이었다.

[이 안에서의 일은 알아도 모른 척해주는 게 불문율이니까요.]

여자의 눈이 활처럼 휘더니 보일 듯 말 듯 슬쩍 윙크를 한다. 그러고는 구 시장 아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사모님.”

“아휴, 조 사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할아버지께서도 인사 전하라 하셨어요. 건강 관계로 직접 오지 못하는 거 양해해 달라고요.”

“말씀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네요.”

대단한 할아버지를 둔 사장님이라… 새삼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선화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곁에 서 있다가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구 시장의 아내를 채근했다.

“사모님, 저도 인사 좀 시켜주세요.”

구 시장의 아내는 내키지 않는 듯 떨떠름하게 여자를 소개했다.

“한성 E&M의 조현영 사장님이세요.”

선화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분이요? 이렇게 어린데?”

한성 E&M 조현영 사장.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의 장손녀다.

이름도 알고 있고 매스컴을 통해 사진을 본 적도 있지만 바에서 본 그 여자와 동일인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매스컴에서는 단색 정장에 진중한 모습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훨씬 나이가 많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바에서 만났던 그녀는 고혹적인 분위기에 젊고 화사했다.

“예의상 하시는 말씀이죠? 저랑 비슷한 또래이실 것 같은데…….”

현영은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선화의 본 나이를 모르니 입에 발린 말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선화는 백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며 인사했다.

“저도 회사를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한성 E&M 같은 큰 회사와는 비교할 수 없죠. 그 나이에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과찬이십니다.”

현영이 선화의 명함을 받아 들여다보고는 선화의 얼굴을 유심히 한 번 더 본다.

“행사 시작하겠네요. 어서 들어가요.”

구 시장 아내가 말을 끊으며 현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선화도 뒤따라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행사장 안은 이미 하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잠깐 기다리니 아나운서가 행사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구치곤 님의 팔순 잔치를 시작하겠습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장내가 정리되자 사회자가 무대 뒤를 향해 말했다.

“구치곤 님과 장남인 구준태 시장님 자리하시겠습니다.”

박수와 함께 무대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휠체어를 탄 노인이 등장했다. 노인의 휠체어는 구준태 시장이 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 동안 객석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박수가 그치자 사회자가 구치곤의 약력을 줄줄 읊었다.

“구치곤 님은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법조인으로 슬하에 3남 1녀를 두셨습니다. 법조인인 부친의 영향으로 장남은 검사로 재직 후 정계에 투신하여 인천시장으로 재임 중이며 차남은 판사, 삼남은 변호사, 장녀는 법대 교수로 훌륭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손자 손녀들 역시…….”

약력 낭독이 끝난 후 사회자가 구 시장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다음으로 장남 구준태 시장님의 내빈에 대한 감사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구준태 시장이 마이크를 받고는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구준태입니다. 먼저 여러모로 바쁘신 가운데 저희 아버님의 팔순 잔치에 참석해 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드립니다.”

구 시장이 인사말을 하는 동안 선화는 휠체어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노인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멍하니 앉아 반쯤 졸고 있는 것이 좋게 보아도 정정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이 자리의 주인공임에도 발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인지능력도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자리는 구치곤의 팔순을 축하하는 자리라기보다 구 시장의 세를 과시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구 시장의 인사가 끝난 후 각계 인사들의 축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종길 의원도 연단에 올라 길고 지루한 축사를 한 후 내려갔다.

축사가 모두 끝난 후에는 가수들이 등장해 축하 무대를 가졌다. 요즘 대세라는 유명 트로트 가수가 등장했을 때는 객석이 절로 들썩거렸다.

선화는 구 시장의 섭외력에 감탄했다. 요즘 저 가수의 스케줄을 고려하면 돈이 있다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닐 텐데 말이다.

“이것으로 모든 식순을 마치겠습니다. 자리를 빛내주신 내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연회장으로 옮기셔서 편하게 만찬을 즐겨주십시오.”

선화는 사회자의 말에 따라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정된 자리로 안내되어 가보니 같은 테이블에 이종길 의원과, 조현영 사장, 고려일보 회장, 그리고 자신의 자리가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꽤 VIP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긴 내가 벌어다 준 돈이 얼마인데.’

선화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았다. 연회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선화는 친지들의 자리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바짝 붙어 구치곤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손녀라고 하기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가족들처럼 한복을 갖춰 입고 있는데도 다른 가족들은 그녀를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것이었다. 대화는커녕 시야에 걸려도 본 체 만 체 한다. 구준태만이 가끔 말을 걸 뿐이다.

“대체 누구지?”

선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불쑥 이야기해 선화는 깜짝 놀랐다.

“구준태 시장 모친이에요.”

“네?!”

선화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으며 돌아보았다. 현영이 옆자리에 앉으며 무심히 말했다.

“원래는 부친의 간호사였는데 결혼까지 했대요.”

그제야 가족들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딸보다 훨씬 어린 여자를 아내로 들였으니 노친네가 노망이 났다, 돈 보고 오늘내일하는 노인을 꼬셨다 눈총을 받을 법도 했다. 그러니 잔치 석상에서도 쉬쉬하며 허드렛일만 시키고 있는 것일 테다.

“또 뵙네요.”

선화가 인사를 건네고는 물었다.

“구 시장님 댁 사정을 잘 아시나 봐요.”

“그 집 마나님이 입이 좀 가벼워요. 나한테는 주절주절 다 털어놓거든요.”

구 시장 아내는 현영에게 상당히 호감을 느끼고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현영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성가시다는 어투다.

“오오~ 미인들과 합석을 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이종길 의원이 고려일보 회장과 함께 다가와 자리에 앉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겨 버렸다.

처음 만찬이 시작될 때만 해도 점잖게 서빙을 받으며 음식을 맛보는 분위기였지만 예의상 얼굴을 비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술이 오르자 점점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테이블에는 와인이 아닌 독주가 오르고 클래식을 연주하던 현악 4중주단이 내려가자 오부리 밴드가 등판해 뽕짝 반주를 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마이크가 돌아오자 이종길도 못 이기는 척 마이크를 잡았다. 밴드와 뭐라 뭐라 얘기를 하더니 흘러나오는 곡은 부장님들의 18번인 ‘My Way’다.

아까부터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현영이 대놓고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선화는 슬쩍 훔쳐보았다.

“와아~ 의원님 노래 정말 잘하시네요.”

이종길이 노래를 마치고 마이크를 내려놓자 선화가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상찬했다.

막간을 틈타 현영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저도…….”

선화가 따라서 일어나려다가 이종길 의원에게 손목이 잡혔다.

“어딜 가려고요, 한 대표. 노래 한 곡 뽑고 가야지.”

선화는 별수 없이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고는 연회장에 남아 있는 좌중을 돌아보았다. 이왕 할 거라면 이종길 의원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확실히 어필하는 편이 좋겠지.

선화는 밴드를 향해 말했다.

“北の宿から 부탁해요.”

전주가 흘러나오고 선화는 그윽이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불렀다.

“あなた變りはないですか~ 日每寒さがつのります~”

좌중이 술렁술렁 동요한다. 선화의 노래 솜씨가 뛰어나기도 했거니와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건 대통령 각하가 좋아하시던 엔카 아닌가?”

이종길 의원의 중얼거림에 고려일보 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들으니 심금을 울리는군요.”

좌중은 감회에 젖어 선화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女ごころの未練でしょう~ あなたこいしい 北の宿~”

선화는 노래를 마무리하며 눈을 떴다. 현영이 연회장을 나가려다 말고 묘한 표정으로 돌아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좌중이 감격한 표정으로 박수갈채를 보내니 그제야 현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섰다. 선화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가창력도 선곡도 아주 훌륭합니다.”

“멋진 무대였어요.”

“감사합니다.”

이종길과 고려일보 회장의 상찬에 미소로 답한 선화가 백을 챙겨 들었다.

“오랜만에 마이크 들었더니 너무 긴장되네요. 화장실 좀…….”

선화는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선화는 강바른 검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중요한 사람은 거의 파악한 거 같아. 이만 철수할게.]

칸에서 나와 파우더 룸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데 문자 알림음이 떠서 들여다보니 강 검사의 답장이 와 있었다.

[수고했어. 쉬어.]

선화는 핸드폰을 백에 집어넣고 화장을 마무리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구 시장의 젊은 모친, 구치곤의 아내였다.

선화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가 구치곤의 아내가 들고 있는 백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분명 선화가 구 시장에게 선물한 세 개의 백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구 시장이 선택한 가장 과감한 디자인의 백이었다.

‘설마 이 여자가?!’

선화는 경악하며 구치곤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 * *

‘아니겠지. 계모라고 해도 백 하나 정도는 선물할 수도 있는 거고.’

선화는 추측을 확인해 보려 구치곤의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그 백!! 내가 백화점에서 보고 찍어둔 건데! 들고 다니는 걸 보니 더 예쁘네요. 그때 그냥 바로 사둘 걸 그랬어.”

선화는 호들갑을 떨며 상찬했다. 구치곤의 아내도 썩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기세등등한 구씨 일가 사이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다가 스스럼없이 말을 붙여주는 이가 있으니 내심 반가운 듯했다.

“안목 있으시네요. 백이 참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얼마 주셨어요? 제 기억엔 꽤 나갔던 거 같은데.”

“비싼 거예요? 저도 선물받아서 잘…….”

“못해도 천은 할걸요. 되게 센스 있는 선물이다~ 누가 선물해 줬어요?”

선화의 물음에 구치곤의 아내가 갑자기 당황하더니 말을 얼버무린다.

“아… 저… 남편한테…….”

휠체어에 앉은 채 자기 팔순 잔치 자리에서도 비몽사몽 졸고 있는 그 노인이 이걸 선물했다고? 그럴 리 없지.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더욱 수상했다. 찔리는 것이 없다면 효자 아들한테 받았노라고 선뜻 얘기했을 것이다.

“제가 좀 들어봐도 돼요?”

구치곤의 아내는 선뜻 백을 건네주었다. 연회장에서 노래를 하는 것을 보았으니 초대받아 온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선화는 백을 이 손 저 손에 옮겨 쥐고 파우더 룸 거울에 맵시를 비춰보았다. 연신 감탄사를 뱉으며 중얼거린다.

“하아~ 진짜 너~무 예쁘다.”

칭찬에 흐뭇한 미소를 짓던 구치곤의 아내도 선화가 좀처럼 백을 돌려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어느새 초조한 기색을 띠었다. 선화의 눈치를 살피며 화장실에 들어갈 타이밍을 재고 있다. 선화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화장실 다녀오세요. 백은 제가 들고 있을게요.”

백이 너무 마음에 들어 조금이라도 더 들고 있고 싶은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구치곤의 아내는 선화에게 백을 맡긴 채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선화는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잽싸게 받은 백을 뒤졌다. 구 시장과의 불륜에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싶어서다.

화장품 몇 가지가 든 파우치에 손수건과 지갑 정도. 별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선화는 지갑을 열어보다 구치곤의 아내가 사내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애가 있어?’

구치곤의 자식이라면 이 자리에 있었을 테니 아마도 결혼 전에 낳은 아이이리라. 재혼일 수도 있으니까.

선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려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미간을 모았다. 아이의 오른쪽에 구치곤의 아내가 있고 아이의 왼쪽에 누군가의 옷자락이 보인다. 둘이 찍은 사진이 아니라 셋이서 찍은 사진인 것 같다.

자세히 보려 사진을 꺼내는데 명함판이 아니다. 더 큰 사이즈의 사진을 뒤로 접어 끼워 넣은 것이었다.

선화는 접힌 사진을 무심코 폈다가 경악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이의 옆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잡고 있는 사람은 구준태 시장이었다.

선화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얼른 사진을 원위치시켰다. 때마침 화장실 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선화는 거의 던져 넣듯 지갑을 백 안으로 다시 돌려놓고 거울 앞에 서서 백을 든 채 셀카를 찍는 척했다.

“이거 사진도 너무 쨍하게 잘 나와요. 화장실 조명이라 그런가? 진짜 탐나네요.”

선화는 빙긋 웃으며 백을 돌려주었다.

“고마워요.”

상대가 백을 받아 들자마자 선화는 부랴부랴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주차장으로 달렸다.

운전석에 뛰어든 선화는 흥분해서 강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님! 대박! 내가 찾은 거 같아! 구준태 시장 계모야. 애도 하나 딸린 여자인데 그 애가 누구 애인지도 알아봐야 할 것 같아.”

* * *

“계모인 전영주가 구준태의 불륜 상대였습니다. 구준태 시장이 공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부친의 거처만은 자주 찾아갔던 것도 효자라서가 아니라 전영주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고요.”

“아주 막장이군요.”

태산의 보고에 원신영 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고는 되물었다.

“그래요. 전영주의 계좌를 추적해야 한다는 점은 이제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전영주의 남동생 계좌까지 확인해야 한다는 건 왜죠?”

“부친 밑으로 출생신고를 해놓아서 법적으로는 전영주의 남동생입니다만 실은 전영주의 자식입니다. 구치곤과 결혼 전에 낳은 아들이죠. 아들의 나이를 역산해 보면 이미 구치곤의 개인 간호사로 일하고 있을 무렵에 임신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구준태 시장과 불륜 관계가 있었다고 가정하면 구준태 시장의 친자로 추정됩니다.”

태산이 선화가 보내준 사진의 출력본을 원 부장에게 내밀었다. 원 부장은 사진을 유심히 본다.

‘이래서 씨도둑은 못 한다는 거군.’

구 시장과 아이의 생김새가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사진 속의 세 사람은 누가 보아도 가족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전혀 혈족관계가 없는 친자의 계좌를 비자금 계좌로 사용했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가능성이 있네요.”

원신영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계좌 압수영장 청구하도록 하세요. 검사장님 결재는 내가 받도록 하죠.”

원 부장은 태산에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쳤지만 위에 보고를 올리자마자 벽에 부딪쳤다. 직속 상사인 김진욱 제3차장이 격하게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해서 멀쩡한 정치인 집안을 뒤집었다가 무고로 판명 나면 어쩔 셈입니까? 그 어마어마한 역풍을 어떻게 감당하느냔 말입니다.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신승렬 검사장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김 차장에게 원 부장이 차분히 설명했다.

“강바른 검사가 수년에 걸쳐 추적한 결과입니다. 확실하다고 보장했어요.”

“그 또라이 말을 어떻게 믿냐고! 듣자 하니 전에도 구 시장을 수사하다 아무런 성과 없이 끝냈다던데.”

“지금은 그때와 달라요. 증거가 확실히 보강되었으니 비자금 계좌만 확보하면 구 시장을 구속시킬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언쟁 중에도 신 검사장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김 차장은 그 침묵에 어쩐지 불안함을 느끼며 신 검사장을 채근했다.

“요즘 검찰에 대한 여론이 곱지 않습니다. 이런 시기에 또다시 무리한 수사를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곤란합니다. 반려해 주십시오.”

원 부장도 질세라 신 검사장을 설득했다.

“여당 인사에게만 칼날을 들이댄다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닌가요? 야당 중진도 불편부당하게 수사하는 공정한 검찰임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원 부장은 신 검사장이 강 검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간곡히 호소했다.

“강바른 부부장이 검사직을 건다는 일념으로 추적해 온 건입니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외롭게 싸워오신 검사장님이라면 강 부장의 의지를 짐작하시겠지요. 이렇게 혼신의 힘으로 일하는 후배를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시도도 못 하게 주저앉힐 수는 없습니다.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검사장님.”

검사장이 이마를 모으며 흐음… 하고 신음을 뱉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원 부장을 돌아보며 다시금 묻는 것이었다.

“강바른이 확실하다 보장했다고?”

원 부장이 반색하며 답했다.

“예, 검사장님.”

김 차장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뜬다.

“거, 검사장님…….”

검사장이 쓰읍 혀를 차고는 손을 들어 김 차장의 반론을 막았다.

“영장 청구해. 계좌 깠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경우 강바른이 문책 각오하라고 하고.”

“네, 감사합니다.”

원 부장은 활짝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서둘러 검사장실을 나갔다. 원 부장이 나간 후에도 김 차장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검사장은 성가신 표정으로 나가보라며 휘휘 손을 저었다. 그제야 김 차장은 검사장실을 나섰다. 그러더니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며 혼이 쏙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강바른이라면 도끼눈을 뜨던 사람이…….”

상사의 결재가 떨어지긴 했으나 법원에 청구해 영장을 발부받는 것 또한 까다로운 과정이었다. 태산은 몇 번의 반려를 무릅쓰고 정성 들여 소명해 드디어 전영주와 그 아들의 계좌 압수영장을 받아냈다.

계좌 거래 내역을 열어보기 전 태산은 몹시 긴장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두 번 다시 구준태 시장을 법으로 심판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적인 방법으로 응징하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웅배를 법에 맡기지 않고 직접 처단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 복수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강바른의 것이었다. 그러니 강 검사의 유지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가 해결하기를 원했던 방법대로 사건을 해결해 주는 것만이 진정한 복수다. 구 시장의 카르텔을 남김없이 파헤쳐 주어야 한다.

태산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전영주 계좌의 거래 내역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수상쩍은 자금 거래는 전혀 없었다.

태산은 크게 실망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전영주 아들의 계좌에 희망을 걸었다.

마지막 카드를 쪼는 심정으로 태산은 거래 내역을 열어보았다. 유치원생의 계좌에 천문학적인 숫자가 찍혀 있는 것을 본 순간 태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찾았다!!!!!”

태산의 환성을 듣고 송봉근 계장과 김민하 실무관이 집무실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태산은 답하지 않고 싱글싱글 웃으며 김민하 실무관에게 USB를 건넸다.

“실무관님, 이 안에 있는 문서파일 출력 부탁드립니다.”

“아, 네…….”

김 실무관이 얼떨떨한 얼굴로 USB를 받아 들고 부랴부랴 업무용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다.

태산이 이번에는 송 계장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계장님은 최진우 검사 불러서 이 계좌 내역과 실무관님이 출력한 장부의 대조 작업을 함께해 주셔야겠습니다. 입금명은 장부에 써 있는 업체명과 다를 수 있으니 날짜와 금액을 정확하게 대조해 매치시켜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요?”

태산이 유쾌하게 답했다.

“구준태 인천시장 비자금 장부와 차명계좌입니다.”

송 계장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예? 우리가 수년 전에 그렇게 찾아 헤맸던 그 계좌란 말입니까?”

“예, 드디어 찾았습니다.”

태산의 답에 송 계장이 불현듯 의욕을 불태웠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저는 지금부터 구 시장 구속영장 청구서 작성하겠습니다.”

태산은 후련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사를 해나갈수록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는 장부와 계좌 내역을 보며 태산은 쾌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국회의원 시절 구 시장의 환경 관련 현안 질의 직후 주가가 급상승했던 해동발전, 광진솔라 등 신재생에너지 기업들이 거액의 사례금을 입금한 것이 확인되었다. 과거 구 시장은 클린 이노베이션의 출자금 사기와 관련이 없다고 강하게 항변하였지만 사기죄로 구속된 고병식 대표가 입금한 내역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미 확인된 일부 혐의만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장부에 내역이 남아 있는 날짜 이후로도 비자금 계좌에는 지속적으로 거액이 들어오고 빠져나가고 있었다. 상납받고 상납한 거대한 커넥션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내역을 다 파헤친다면 제아무리 용을 써도 구 시장이 빠져나갈 구석은 없을 것이다.

“검사님, 구준태 시장 구속영장 나왔습니다.”

송 계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집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알렸다. 태산은 바로 정장 상의를 꿰어 입었다.

“갑시다.”

“직접 가시게요?”

송 계장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가야죠. 구 시장과는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 * *

태산이 검찰수사관들과 함께 인천시청 시장 집무실에 들이닥쳤을 때 구준태 시장은 책상 앞에 앉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업무를 보고 있었다. 수사관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는데도 놀라는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곧 검찰이 들이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했다. 하긴 혼외자의 계좌 압수영장이 발부된 시점에 상황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구준태 시장님, 오랜만입니다. 드디어 직접 구치소로 모시게 되었네요.”

태산의 비아냥에도 구 시장은 별다른 반응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순히 갈 테니 불필요한 실랑이는 하지 맙시다. 지지자들 보는 눈도 있는데.”

“내가 왜 댁의 체면을 생각해 줘야 하지?”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송봉근 계장이 들고 있는 수갑을 빼앗아 구 시장의 손목에 직접 채웠다.

“당신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살인 교사 혐의는 조사 후 차차 추가하도록 하죠.”

살인 교사를 언급하자 구 시장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기세를 되찾고 언성을 높였다.

“조사에 자발적으로 협력하려는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어도 되나? 근거도 없는 혐의까지 들먹이면서? 이건 명백히 피의자 인권유린이고 정치적 탄압이야! 대통령 백 믿고 야당 정치인을 핍박하는 건가?”

태산은 어처구니없어 코웃음 쳤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아주 똥 싼 놈이 발끈하고 있네.”

태산은 구 시장의 이마에 얼굴을 들이밀고 한마디 한마디 곱씹듯이 말했다.

“구 시장, 논점 흐려서 어떻게 빠져나가 보려는 얄팍한 희망 같은 거 가지지 마. 모든 희망을 버려. 그래야 좌절도 덜 하지. 그동안 차곡차곡 확보한 증거가 한 트럭이야. 비자금 계좌 털린 순간 다 끝난 거라고. 정치 탄압으로 누명을 쓴 거다? 설령 그걸 어떤 멍청한 지지자들이 믿는다 치자. 그렇다 해도 이 상황에서 발을 뺄 수 있을 것 같아? 당신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은 이미 끝났어. 제아무리 관대한 지지자라 해도 내연녀를 계모로 들인 패륜을 용납할 수는 없겠지. 아니, 계모와 간통을 한 거라고 해야 하나? 어떤 게 더 막장으로 들려?”

태산의 말에 구 시장은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태산은 구 시장의 등을 밀어 집무실에서 끌어냈다. 시청 앞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기자들이 깔려 있었다. 구 시장 계모와 남동생 계좌에 대한 압수영장이 발부된 이후로 이 사태를 예견한 기자들이 시청 앞에 진을 치고 있다가 검찰 수사관들이 돌입하자 몰려든 것이다.

“구준태 시장님,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수뢰와 독직 혐의를 받고 계신데 인정하십니까?”

“전영주 씨와 내연관계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태산은 구 시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할 여유를 주지 않고 검찰수사차량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수갑을 찬 손과 낭패감에 젖어 눈을 굴리는 비열한 얼굴은 취재진이 실컷 찍을 수 있도록 가리지 않았다.

태산은 구 시장을 구속한 후 마약재료 밀수 혐의로 복역 중인 백준용을 가장 먼저 소환했다. 구 시장이 강바른 검사 살해를 교사했다는 사실을 밝히려면 구 시장과 이웅배의 커넥션부터 증명해야 했다. 그 열쇠는 이웅배의 자금을 세탁해 구 시장에게 상납하는 가교 역할을 했던 삼전무역상사의 백준용에게 있었다.

영상녹화실로 끌려온 백준용은 기다리고 있던 강바른 검사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백준용이! 또 보네.”

“가, 강 검사… 님?”

“뭘 그렇게 놀래? 그걸로 그냥 끝날 줄 알았어?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태산은 송 계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계장님,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녹화는 조금 있다가 시작하죠.”

“예, 알겠습니다.”

송 계장은 두말없이 영상녹화실을 나갔다. 하지만 매직미러로 연결된 옆방에서 취조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백준용은 불안한 듯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태산은 백준용의 앞에 구 시장의 비자금 계좌와 대조한 삼전무역상사의 상납 내역을 내밀었다.

“비자금 계좌 찾았고 구 시장은 이미 구속됐어. 빼박이야. 근데 이거 당신 돈도 아니라며? 이웅배가 시켜서 한 짓인데 혼자 뒤집어쓰면 억울하잖아?”

“워, 원하는 게 뭡니까?”

“이웅배와 구 시장의 커넥션을 증명해 주는 것. 더불어 구 시장이 이웅배를 통해 강바른 검사 살해를 사주했다는 것까지 진술해 줘.”

백준용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백준용은 입을 다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구 시장의 살인 교사를 진술하려면 자신이 강 검사를 죽이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백준용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단순 증뢰죄뿐이다. 증뢰죄는 수뢰죄와는 달리 가액이 크다 해도 특가법에 의해 가중되지 않는다. 길어야 5년이니 차라리 증뢰죄로만 처벌받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일 것이다.

“그래? 최근까지 삼전무역상사 명의로 비자금 계좌에 입금된 돈이 수십억 되는데 그게 당신 개인 돈은 아니겠고 삼전무역상사의 자금이라고 봐도 되겠지?”

순간 백준용의 눈이 흡 떠진다.

“그렇다면 업무상 횡령이나 배임이 되네. 총 누적 금액이 50억을 넘어가니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의해 가중되면 최소 5년 이상에 무기까지 때릴 수 있겠군. 내가 구형을 적당히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잘 알 테고.”

백준용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 두꺼비 같은 눈을 굴리며 망설였다.

“뭘 그렇게 고민해? 이제 네놈한테 방패가 되어줄 이웅배도, 구준태도 없어. 점잖게 제안할 때 받아들이든가 건물 옥상에 거꾸로 매달려 오줌 칵테일 한 번 더 마셔보든가.”

그제야 당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백준용은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목을 한 손으로 잡고 장난감처럼 다루던 강 검사의 눈빛은 내킨다면 언제든 주저 없이 손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진술하겠습니다.”

태산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매직미러 저편을 향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녹화를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백준용 씨, 구준태 시장 비자금 계좌에 삼전무역상사에서 입금된 내역이 있는데요. 본인이 입금한 것 맞습니까?”

“예.”

“회사 규모로 미루어 봐도 상당한 금액이네요. 어떻게 마련한 자금이죠?”

“WB홀딩스의 이웅배 회장 돈입니다. 이 회장의 의뢰로 돈세탁해서 구 시장 계좌에 입금했습니다.”

백준용은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취조를 마치고 백준용을 교도소로 돌려보낸 뒤 검사실로 돌아온 송 계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강 검사님이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럴 리가 없다고 의심하긴 했는데 구 시장의 사주로 백준용이 저지른 짓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김민하 실무관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말씀 안 해주셨습니까?”

송 계장이 질문하며 태산을 응시하니 김 실무관도 같은 의문이 담긴 눈으로 채근하듯 태산을 바라보았다.

“저도 충격으로 기억이 분명치 않아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계속 범인을 추적해 왔고. 이제야 결실을 맺는군요.”

“정말 대단한 의지십니다. 이제라도 진상이 밝혀져 다행입니다.”

“아직 안심하긴 이릅니다. 백준용의 진술만으로는 살인 교사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기소한다 해도 재판에서 확실히 유죄를 받으려면 보강증거를 더 확보해야 합니다.”

태산은 송 계장에게 지시했다.

“실족사건 전후 백준용과 이웅배, 구준태 통화 내역 확보해 주세요. 이웅배 주변인들 중에서도 구 시장이 살인을 사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사람이 더 있는지 조사해 봅시다.”

* * *

“아니,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바깥양반이 사업한다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 마약이니 청부 살인이니 그런 끔찍한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안 그래도 범죄이익 환수다 뭐다 해서 두 손 놓고 가진 거 다 뱉어냈는데 잠잠해질 만하니 또 애꿎은 사람을 오라 가라 하고 정말 복장이 터져 죽겠다고요.”

이웅배의 처는 가슴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웅배의 처가 그간 이웅배가 벌어 오는 돈으로 얼마나 호의호식했는지 잘 알고 있는 태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광주 시절 이웅배가 만나던 여자는 태산과 재호를 잘 챙겨주는 따뜻한 사람이었고 태산도 큰누님처럼 따랐다. 하지만 이웅배는 인천으로 올라오면서 여자와 관계를 끊었다. 태산은 내심 조강지처는 버리는 것이 아닌데 하고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남녀 간의 일에 제삼자가 간섭할 수는 없어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인천에 올라와 새로운 형수님이 된 어린 여자는 씀씀이가 헤프고 아우들을 머슴 취급 하기 일쑤였다. 형님의 여자라 해서 딱히 깍듯이 모시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사람 감정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저런 철딱서니라도 큰 형님이 예뻐할 구석이 있긴 한 모양이다 생각하며 신경을 끄려 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앳된 얼굴에는 주름살이 자리를 잡았지만 안하무인의 뻔뻔한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범죄수익인지 알면서도 실컷 누려놓고 그걸 환수당했다고 그렇게 억울해할 일입니까? 애초에 불법으로 번 돈이니 국가가 지켜줘야 할 재산도 아닌데요.”

태산의 말에 이웅배의 처는 발끈했다.

“범죄수익인지 내가 알고 있었다고 누가 그래요?!”

더 추궁해도 순순히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태산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곁에 있던 송 계장에게 눈짓했다.

“들여보내세요.”

“예.”

송 계장이 취조실 밖으로 나가더니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온다. 무심히 고개를 돌리던 이웅배의 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줌마?”

전부터 눈에 거슬려서 이웅배가 행방불명된 후 기다렸다는 듯 해고했던 예전 가정부였다.

가정부는 이웅배의 처는 본 척 만 척 하고 맞은편 의자에 가 앉았다. 태산의 신문이 바로 시작되었다.

“김명은 씨, 이웅배에게 가정부로 고용되어 장기간 일을 하셨다고요?”

“예, 한 7년 일했죠.”

“이웅배의 직업이 뭔지 알고 계셨습니까?”

“사업을 한다고 하긴 하던데… 시커먼 장정들이 형님, 형님 하면서 오가는 것을 보고 아~ 조폭인가 보다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전화 통화나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살 떨리게 무서운 것도 있었고요.”

“아줌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웅배의 처가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이지만 가정부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이미 잘린 마당에 겁날 것이 없었다.

“사모님도 기억하시죠? 두 분이 대화하시는 것 들었는데. 시장이 검사 하나가 눈에 거슬려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회장님이 그러시니까 사모님이 그러셨잖아요. 우리도 거슬리는 놈 하나 있지 않느냐고요.”

“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언제…….”

“시장이 우리 눈엣가시를 없애주면 우리는 시장의 가시를 없애주고. 그렇게 상부상조하면 딱 좋겠다 그러셨잖아요.”

당황하여 말을 잃었던 이웅배의 처는 불현듯 생각이 미처 태산에게 다급하게 호소했다.

“이 아줌마 귀가 먹어서 큰 소리로 얘기해도 잘 못 들었어요. 그러니 우리끼리 한 얘기니 전화 통화니 그런 걸 들었을 리 없다고요. 다 거짓말이에요. 이 아줌마 머릿속에서 지어낸 얘기라고요.”

가정부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도 사사건건 잔소리하면서 지랄을 하니 못 듣는 척했지.”

가정부의 대꾸에 이웅배의 처는 입을 떡 벌렸다.

“마, 말도 안 돼…….”

* * *

“김명은 씨, 그러니까 이웅배와 그 아내가 살인 모의 하는 것을 들으셨다는 거죠? 대화 중에 나온 시장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없애려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들으셨습니까?”

태산이 다시 물으니 가정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기까지는 듣지 못했어요. 하지만 시장이라고 하면 뻔하잖아요. 회장님 사업하시던 곳이 인천이니까 인천시장 구준태겠죠. 그리고 들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인천시장이 거슬려 했다는 그 검사란 사람이 누군지도 알게 됐어요.”

가정부가 태산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앞에 계신 강바른 검사님이시잖아요.”

그러고는 조금 격앙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회장님과 사모님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난 후 한참을 잊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강바른 검사님이 괴한에게 칼을 맞았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그걸 보고 회장님이 무척 기뻐하면서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중얼거리시더라고요.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는데 누군가한테 잘했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어요. 그때 눈치챘죠. 아~ 예전에 두 분이 얘기했던 그 검사가 바로 이 검사구나. 회장님이 결국엔 그 검사를 죽였구나.”

가정부는 그렇게 말하고는 빙긋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계시니 참 다행이지 뭐예요.”

가정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이웅배의 처는 경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숱한 비밀을 알고 있는 가정부를 아무 대책 없이 그렇게 쉽게 잘라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이웅배의 처는 망연자실해 가정부의 진술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진술이 끝나고 가정부를 내보낸 후 태산이 이웅배의 처에게 말했다.

“이것 참 고민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은경 씨를 살인미수의 공범으로 볼 수도 있고… 단순히 범행 의사만 표현했지 실제적인 준비 행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도 있고… 제 의지에 따라 살인미수로 기소할 수도, 불기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유은경 씨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태산의 속셈을 짐작할 수 없어 유은경은 덜덜 떨며 되물었다.

“…무, 뭘 원하시죠?”

“이웅배에게 강바른을 죽이라고 사주한 자, 그리고 이웅배가 임태산을 죽여달라고 사주한 자! 그자가 누구인지를 증언해 준다면 유은경 씨는 선처해 드리겠습니다.”

임태산의 이름이 나오자 유은경은 당황하여 눈을 흡 떴다. 강바른 검사를 죽이려 한 것은 이미 밝혀졌다 해도 임태산을 죽였다는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은경은 모든 것이 드러났구나 생각하며 자포자기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한참 뒤 마침내 눈을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증언하겠습니다. 대신 약속은 꼭 지켜주세요.”

수뢰죄와 각종 독직행위, 살인교사까지 구준태 시장의 혐의는 착착 밝혀져 나갔고 순조롭게 기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좌 추적을 통해 비자금의 일부가 흘러 들어간 다른 인물이 밝혀진 후 수사는 제동이 걸렸다.

“최명수 씨, 그러니까 이 계좌에 입금된 돈에 대해서 이종길 의원은 전혀 몰랐단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종길 의원 비서관 최명수는 완강하게 답했다.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이 계좌에서 수시로 돈이 인출되고 정치자금으로 쓰였는데요.”

“의원님은 정치에만 전념하실 수 있도록 제가 다 알아서 했습니다. 의원님은 계좌의 존재도 전혀 모르셨고 어디서 후원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어떻게 썼는지 같은 회계에 대한 사항은 보좌진에게 일임하고 계셨습니다.”

모른 것이 아니라 후일의 우환을 미리 막기 위해 모른 척했음이 분명하다.

“이종길 의원은 최근에도 구준태 의원 부친 팔순 잔치에 참석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입니다. 게다가 친환경에너지 게이트 당시 구준태 의원을 적극 지지 하며 지원사격을 하기도 했었고. 이것을 단지 우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당대표로서 같은 당 중진 의원을 챙기지 않을 수 없지요. 게다가 의원님은 당시 국회 산자중기위원회 위원장이셨습니다. 현안에 의견을 밝힐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국가가 친환경사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뿐입니다.”

최명수는 끝까지 이종길 의원을 비호했다. 최명수의 차명계좌에서 발견된 자금이 이종길 의원의 계좌로 흘러 들어갔거나 이종길 의원이 그 자금을 개인적 용도로 유용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종길은 깨끗이 꼬리를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보좌관 몇을 구속기소 하는 것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준태 시장을 구속해 기소했으나 이종길까지는 잡아들이지 못한 태산은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설욕하리라 다짐하는 것이었다.

* * *

-삼촌~~~!! 어떻게 지내? 많이 바빠?

구준태 시장의 여죄를 낱낱이 밝혀 기소가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 현영에게서 생각지도 않았던 연락이 왔다.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호칭이었다. 아무리 족보상으론 삼촌이라고 해도 같은 또래에게 듣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바빴었는데 대충 마무리됐어. 왜?”

태산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꼭 용건이 있어야 연락하나.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

딱히 거절할 핑계도 없고 강바른 집안의 사정이 궁금하기도 해 태산은 현영을 만나러 나가기로 했다. 약속한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현영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태산은 다가가 자리에 앉으며 인사 대신 말을 건넸다.

“웬일이야? 이런 데서 보자고 다 하고. 회장님이 우리 만나는 거 탐탁지 않아 한다며?”

“옛날 일이지. 할아버지도 예전처럼 호랑이 같지 않으시고. 나는 나대로 고분고분 할아버지 말 들을 나이도 아니고.”

현영은 그렇게 답하더니 이내 눈을 흘기며 태산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야, 강바른.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한테 회장님이 뭐냐? 싸가지하곤.”

“삼촌한테 야, 야 하는 그쪽에 비하면 준수하지.”

“아무튼 한마디를 안 지네. 그래도 내가 누난데.”

“항렬이 다른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현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현영의 태도에는 여유가 있었다. 크게 맞받아쳐 줄 히든카드를 숨기고 있는 듯한 태도다. 태산은 뭘까 하고 수상스럽게 생각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요리가 나오고 의례적인 안부 인사가 오간 후 현영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나 구준태 부친 팔순 잔치에 갔었거든?”

태산은 내심 의외라고 생각하며 대꾸 없이 무심하게 스테이크를 씹었다. 선화가 보내준 사진이나 동영상에서는 못 보았는데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인가.

“나 거기서 그 여자 만났어. 니가 언젠가 바에 데려왔던 여자 있잖아. 한선화라고.”

태산은 풉 하고 먹던 것을 뱉을 뻔했다가 냅킨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는 태산을 현영은 재미있는 듯 빙글거리며 지켜보았다.

현영이 선화를 만났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바에 선화를 데려간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어떻게 알았어?”

“뭘? 바에 그 여자 데려온 거? 거기 회원권 내가 선물해 준 거잖아. 자주 가는 곳이야. 우연히 두 사람 같이 있는 걸 봤지.”

태산은 아찔했다. 현영이 태산과 선화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사전에 구준태 시장에게 언급하기라도 했다면 수사를 망치는 것은 물론 선화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 태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영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사이는 무슨. 그냥 정보원이야. 구 시장 조사 중이었어.”

“아아~ 그랬어? 난 또 둘이 만나는 사이인가 했지. 하긴 그럴 리가 없나.”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하고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그 여자 제법이던데. 사람 비위 맞추는 데 타고났더라. 나한테도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성공했냐고 아부부터 하더라니까. 비슷한 또래로 보이던데 무슨. 사람을 애 취급 하고 말이야. 뭐 썩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선화의 본래 나이를 생각하면 40대가 30대를 애로 보는 것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있었지만 워낙 동안이라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하는 노회한 늙은이들 구워삶는 솜씨에는 혀를 내둘렀다니까.”

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서 엔카를 선곡하다니 완전히 노림수잖아. 꼬리 백 개는 달고 있을 여우 주제에 청순가련한 얼굴을 하고 말이야.”

사정 모르는 태산은 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했지만 현영은 더 설명해 주지 않고 대뜸 물었다.

“뭐 하던 여자야? 사업한다곤 하던데 하는 짓 보면 평범하게 살았을 것 같진 않고. 유흥업소 마담 출신인가?”

함부로 얘기하는 현영 때문에 태산은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야 여우인 것도 사실이고 남 등쳐먹으며 살아온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평생 누군가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이 살아온 사람이 그렇게 함부로 말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선화는 비밀도 거짓도 많은 여자였으므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태산도 다 알지는 못했다. 다만 언뜻언뜻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여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여자들을 많이 봐왔으므로 포착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남의 비위를 맞추고 뻔뻔하게 거짓을 꾸며내는 재주가 선화의 생존 수단이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선화에게만은 언제나 마음이 약해지는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속아주고 말자 허허 웃게 되는 것이었다.

“그냥 무조건 남의 비위나 맞춰주는 여자 아니야. 얻을 게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결국엔 그만큼 다 뜯어낸다고. 남 비위 맞출 일 없이 고상하게 산 온실 속 아가씨는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힐 수도 있으니 조심해.”

현영은 흥흥 코웃음을 웃었다.

“뭐야? 은근히 감싸는 거 보니까 둘이 친한가 봐? 만나는 사이 아닌 거 맞아? 생전 여자에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목석같이 굴더니. 은근히 질투 나네.”

태산은 쉰소리 말라는 듯 미간을 모으며 말을 끊었다.

“그보다 구 시장 부친 팔순 잔치에는 왜 갔어? 구 시장과 가깝게 지내?”

“갑자기 무서운 얼굴로 왜 그래? 취조라도 하려고?”

“구 시장과 커넥션이 있다면 너라고 예외를 둘 수는 없지.”

현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태산을 흘겨보았다.

“정말 너도 어지간하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분위기 망치게.”

현영은 다시 와인을 홀짝이고는 곧 대수롭지 않게 털어놓았다.

“할아버지가 가보라고 해서 가본 거야. 구 시장 부친이 현역 시절에 할아버지랑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대. 의리상 찾아가라고 한 거지. 이젠 현역도 아니고 오늘내일하는 늙은이니 무리해서 직접 가볼 필요까진 못 느끼셨을 테고.”

“구 시장은 현역이잖아. 관계를 좋게 이어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했을 텐데.”

“할아버지가 구 시장을 썩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어. 욕심이 너무 많아서 오래는 못 갈 거다 하셨는데 설마하니 바른이 니가 구 시장을 끌어내릴 줄이야.”

현영이 문득 코웃음을 웃으며 농담을 섞었다.

“게다가 대통령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현직 검사가 아들인데 야당 출신 시장 나부랭이가 눈에 들어오실까.”

태산은 피로감에 이마를 짚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렇게 대통령 백을 들먹이는 것일까?

태산은 어이없어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억측은 아니었다. 인천지검의 활약상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청와대 오찬에 평검사로는 이례적으로 초청되었고, 그 이후 인사에서도 중앙으로 이동하며 초고속 승진을 했으니 대통령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다는 오해를 살 법했다.

게다가 구준태 시장이 구속된 이후 강바른 검사의 뒤에 대통령이 있다며 정치적 탄압을 주장하고 나서니 그러한 소문이 더욱 무성해졌던 것이다.

검사가 법을 모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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