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인지사건 착수
등 뒤에서 터지는 노성은 아랑곳 않고 태산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자동차 조수석에 현금 가방을 던져 넣은 태산은 운전석에 앉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지 않았던 현금이 2억이나 생겼는데 이걸로 뭘 한다?
구린 돈은 그 자리에서 다 써버리는 것이 좋다. 가지고 있어봐야 뒤탈이 될 뿐이다.
하지만 딱히 쓰임새가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돈 쓰는 데 그다지 제한을 받지도 않았으니 새삼 쓸 데가 있을 리 없다.
범진에게 건네주고 태산건설 애들 회식이나 시키라고 할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범진이 아우들 먹이는 데 소홀할 리가 없다. 그놈은 제 몫은 안 챙겨도 아우들 몫은 먼저 챙길 놈이다. 게다가 사업도 잘되고 있으니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쩐다…….’
불현듯 처음 만났던 꼬마 칼잡이 시절 범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봉두난발에 땟국물이 꾀죄죄해서는 눈빛만 짐승처럼 날카롭게 살아 있던 녀석. 나이는 열여덟이라는데 체구는 열대여섯 정도로 보였고 상시 굶어서인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이후에도 깡마른 것이 영 자라지를 않아 성장기에 못 먹은 탓인가 내내 마음이 쓰였다.
[너, 갈 데가 없냐?]
[예.]
[부모님은?]
[고압니다. 앵벌이 하던 것을 용식이 형님이 거둬주셨습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그렇게 답하던 범진의 매달리는 듯한 눈빛이 떠오른다.
태산은 비로소 돈을 어떻게 쓸지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후련한 마음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주말이 지나고 출근해 일을 하고 있는데 원신영 부장에게서 호출이 내려왔다. 부장실로 올라가니 원 부장이 대뜸 태산의 팔을 끌어 소파에 앉히고는 신문 기사를 들이민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봐요.”
원 부장이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기사 제목을 태산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서울중앙지검 검사 일동, 서울 시내 보육원에 2억 원 쾌척 미담]
거액의 현금을 가방째로 내놓았을 때 보육원 직원들은 당황하여 기부자의 신상을 거듭 물었다. 성가셔서 검사들이 십시일반 모금해 기부하는 것으로 둘러댔는데 이걸 기사까지 냈을 줄이야.
태산은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차근차근 주말 골프 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원 부장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내 웃음을 참는 얼굴이던 원 부장은 정 회장에게서 골프 내기로 2억 가까이를 뜯어냈다는 결말에 오자 결국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하하~ 호호호호~ 아이구, 배야! 큭큭큭…….”
원 부장은 체면도 집어던지고 배를 잡았다. 전에 보지 못한 모습에 놀라 태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원 부장이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는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찍어 눌렀다. 그러고는 기사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돈을 받아서 여기에 줬다는 거예요?”
태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2억이 조금 안 되는 돈이었는데 제 돈 보태서 2억 원 채웠습니다.”
“좋은 일 할 거면 나한테도 언질을 좀 주지 그랬어요. 얼마라도 보탰을 텐데.”
원 부장이 갑자기 박수를 치더니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강 부장도 그 얼굴들을 봤어야 했는데…….”
원 부장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오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오늘 간부회의에서 검사장님이 기사를 내보이면서 언제 그렇게 많이 모았느냐, 왜 자기한테는 얘기 안 했느냐, 덕분에 우리 지검 위신이 섰다면서 감동하시더라고요. 다들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서로 얼굴만 살피고 있었죠. 검사장님은 몇 번이나 누가 기획했느냐, 괜찮으니 밝혀라 하고 캐물으시니 김진욱 차장이 결국 자기가 했다고 나섰어요. 그런데 칭찬받을 일을 한 사람치곤 얼굴이 완전히 똥 씹은 표정이더라고요. 게다가 간부회의 끝나자마자 날 불러 세우고 왜 강 부장을 골프 모임에 보냈냐고 길길이 날뛰는데… 아, 이건 강 부장과 관계가 있는 사건이겠구나 하고 본능적으로 직감했죠.”
태산은 머쓱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또 부장님을 곤란하게 만들었네요.”
“아니에요. 난 어차피 눈치 없는 사람으로 찍힌 지 오래고. 강 부장이 거기 가서 분위기 좀 불편하게 만들면 좋겠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보낸 것인데 예상 밖으로 너무 잘해줘서 고마워요. 기분 최고네요.”
원 부장은 통쾌하고 고소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까지 즐거워할 줄은 몰랐기에 태산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강 부장도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기대 이상이에요.”
원 부장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흠흠 헛기침을 했다. 너무 솔직한 모습을 보여줬다 싶은지 조금 쑥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불편한 자리에 대신 나가서 수고가 많았어요. 아마 앞으로는 그런 자리에 부를 일 없을 거예요.”
“엉뚱한 사람한테 돈을 2억이나 썼는데 다시 부르면 제정신이 아닌 거죠.”
가까스로 진정했던 원 부장은 태산의 대꾸에 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빠르게 진정했다. 그러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요즘 일은 좀 어때요? 전임자에게 인계받은 사건들은 대충 정리가 됐나요?”
“예, 거의 다 처리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새로운 인지사건을 추가해 봐도 괜찮겠네요.”
태산은 내심 구준태 시장의 환경 게이트를 다시 파헤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달리 생각하고 계신 게 없으시다면…….”
태산이 말을 꺼내려는 찰나 원 부장이 아까 보여주었던 신문 광고란을 톡톡 치며 말했다.
“이거 봐요. 어버이날을 앞두고 효도 선물이라고 신문에 산삼 광고가 연일 대대적으로 실렸어요. 산삼이란 것이 귀하니까 비싼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대규모로 광고를 해서 팔 만큼 물량이 나온다는 게 참 이상하네요.”
원 부장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냄새가 나지 않아요? 아무래도 가짜일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가짜 산삼을 비싸게 파는 사기가 아닌지 조사해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한번 파보세요.”
뜬금없고도 맥 빠지는 지시가 아닐 수 없었다. 태산이 마음에 품고 있는 사건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해 보이는 것이었다. 조직과 싸우며 마약범들을 잡아들이던 태산인데 반부패수사부까지 와서 이런 사건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태산은 이내 마음을 달리 먹었다.
반부패수사부는 공직자와 기업인의 범죄를 수사하는 곳이니 무관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사소한 사건이란 없는 것이다. 보란 듯이 확실하게 파헤쳐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알겠습니다. 조사해 보겠습니다.”
태산은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집어 들고 말했다.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신문을 들고 검사실로 돌아온 태산은 송봉근 계장과 김민하 실무관 앞에 신문광고를 펼쳐놓았다.
“원 부장님이 수사 지시하셨습니다. 이게 가짜인지 진짜인지 한번 알아봅시다.”
“예? 산삼이랑 장뇌삼 구분하는 건 전문가도 쉽지 않을 텐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송 계장이 난색을 표명하며 물었다.
“일단 여기 광고에 나오는 매장으로 가서 산삼을 사 와 감정을 맡기도록 하죠.”
“얼마나요?”
“감정 맡기려면 열 뿌리 정도는 되어야죠. 한 세트당 세 뿌리씩 들어 있다니까 일단 세 세트 사보도록 합시다.”
태산은 가장 비싼 20년근 세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만요, 부장님. 이거 세 세트면 2천만 원 가까이 하는데 수사비가 그렇게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김민하 실무관이 이의를 제기한 순간 태산이 한성사의 블랙카드를 꺼내 들었다.
“수사비는 나중에 정산해도 되니까 일단 내 카드 쓰세요.”
태산이 꺼내 든 카드를 본 김 실무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부장님! 산삼은 제가 사 와도 될까요?!”
너무 의욕을 불태워 혹시 카드를 사사롭게 쓰려는 게 아닌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태산이 머뭇거리자 김 실무관이 재차 부탁한다.
“이거, 이거, 이거 주세요! 캬~ 백화점에서 블랙카드로 플렉스하는 기분을 단 한 번만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서요.”
“플렉…….”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있었다. 기분이라도 내고 싶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겠지.
“그렇게 해요.”
“아싸~~!!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아~~!!!”
김 실무관은 카드를 받아 들고 뛸 듯이 기뻐했지만 어쩐 일인지 바로 나가지 않고 공들여 화장부터 고친다. 메이크업에 힘을 빡 주고 선글라스까지 꺼내 쓴 후 옷차림을 추스르더니 백을 챙겨 들고 기운차게 검사실을 나가는 것이다. 재벌집 막내딸 기분이라도 내보려는 건지 모른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백화점 건강식품 매장에 나갔던 김 실무관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금색 비단 보자기에 싸인 상자 세 개를 내려놓았다.
태산은 직원들과 함께 그중 한 상자를 먼저 풀어보았다. 보자기를 풀고 나무로 만든 뚜껑을 여니 이끼 위에 올려진 세 뿌리 산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봐서는 도통 모르겠는데요.”
송 계장이 중얼거렸다.
태산은 상자 속에 첨부되어 있는 감정서를 살펴보았다. 20년근 이상으로 추정되며 총 세 뿌리의 감정가는 약 6백만 원이라고 쓰인 문서 아래에 ‘산림기술연구원 연구관 진태만’이라는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산림기술연구원? 뭐 하는 데입니까?”
김 실무관이 재빨리 검색해 보고 답했다.
“산림청 산하 연구 기관입니다.”
“공인된 산삼 감정기관인가요?”
“아니요. 산양삼 같은 경우는 산림청에서 관리를 하고 있지만 산삼은 수가 적어 협회가 몇 군데 있을 뿐 공인된 기관은 없습니다.”
“그렇다는 건 속이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얘기로군요.”
태산은 턱을 문질렀다. 생각보다 어려운 수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공인된 기관이 없다는 것은 어디에 감정을 맡겨도 그 결과의 신빙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혹여 기소를 한다 해도 재판에서 가품임을 증명할 길이 없다.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죠. 사설 협회는 믿을 수 없으니 실무관님은 산삼 감정을 맡길 수 있는 공신력 있는 기관을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계장님은 산림기술연구원과 진태만이라는 연구관 조사 좀 해주시고요.”
김 실무관은 서울대 약학대학 약초원, 금산국제인삼약초연구소, 한국인삼공사 인삼연구소,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 교수를 목록으로 뽑아 왔다. 태산은 목록의 기관에 연락해 협조 요청을 하고 각각 산삼 한 뿌리씩을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대부분 산삼이 아닌 인삼만을 연구하는 곳이라 정작 자신들도 장뇌삼인지 산삼인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는 답이었다.
하지만 송 계장이 조사한 내용에서 일말의 단서가 발견되었다.
“산림기술연구원 측에 문의를 해보았는데 자기들이 공식적으로 낸 감정서는 아니라고 합니다. 진태만 연구관이 개인적으로 감정을 해준 것 같다고 하네요. 진 연구관 인적 사항도 요청해서 받았는데 한번 보시죠.”
송 계장이 내민 것은 진 연구관의 인사파일이었다. 태산은 파일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인사파일 안에는 진 연구관이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에서 산림학 박사 학위를 땄다는 영문 졸업증명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전에는 알파벳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었는데 지금은 영어가 술술 읽히니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태산이었다.
태산은 어쩐지 위화감을 느껴 졸업증명서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뭔가 이상한데?’
* * *
졸업증명서에 따르면 진태만 연구관은 국내에서 산림학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 산림학 단과대에서 Sustainable Forest Management를 세부전공으로 하여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잘 모르긴 해도 산삼과 관련이 있는 공부를 한 것 같진 않은데요. 과연 감정할 실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사파일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긴 태산에게 송봉근 계장이 말을 보탰다.
“그보다 이 졸업증명서 자체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태산이 불쑥 말을 꺼내니 송 계장이 다시 한번 서류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요… 외국 대학 졸업증명서를 본 적이 없어서 뭐가 이상한지 잘…….”
“여기 대학 로고 뒤에 문자 같은 게 숨겨져 있는 것 같아서요.”
태산이 졸업증명서 상단에 찍힌 대학 로고를 가리켰다. 송 계장은 눈을 가늘게 떠보지만 아무래도 모르겠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디에 말입니까?”
태산이 문서를 들어 올려 햇빛을 비쳐 보인다.
“여기 독수리 머리 위에 시옷, 떠오르는 태양 뒤로 이응, 우마차 차양 위로 기역.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보이기도 하네요. 그런데 그게 왜…….”
거기까지 중얼거리던 송 계장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위조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예, 국과수에 문서 감정 의뢰해 주세요.”
진짜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가짜를 만들어내는 수준급 문서위조범들은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이 높았다. 하지만 정교하면 정교할수록 그것이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없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그래서 간혹 제정신 아닌 놈들은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고유의 서명 같은 것을 몰래 넣어두기도 한다.
외국 대학 졸업증명서 로고에 숨겨진 한글 자음이라니. 명백히 위조범의 서명이었다. 진태만은 학력 위조를 통해 산림기술연구원에 취업한 것이다.
“위조가 맞았습니다. 대단히 정교하게 위조한 문서인데 어떻게 알아챘느냐고 연구원도 놀라던데요. 부장님 진짜 매의 눈이시네요.”
감정 결과를 받아 온 송 계장은 뛸 듯이 기뻐하며 보고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대학 로고에 숨겨진 문자가 문서위조범의 서명인 것 같습니다. 같은 서명을 교묘하게 숨겨둔 위조문서가 최근 들어 종종 발견되고 있는데 동일범 소행인 것 같다네요. 위조 솜씨가 정교한 것을 봐서는 그놈이 손댄 문서가 적발된 사례보다 훨씬 많을 거랍니다.”
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시옷, 이응, 기역이라… 무엇의 약자일까? 그러고 보니 제 이름 초성과도 가운데 한 자밖에 다르지 않네요.”
송봉근 계장의 이름 초성은 시옷, 비읍, 기역이다. 확실히 한국인이라면 세 개의 자음을 보고 이름 초성을 연상할 것이다. 송…….
갑자기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진태만의 학력 위조 혐의는 확실한 듯하니 바로 소환하도록 하죠.”
“예.”
송 계장이 집무실을 나간 후 태산은 대포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꽤 오래 울린 후에야 상대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예, 검사님.
과장되게 높은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반가운 기색으로 전화를 받았지만 그 이면에 두려움이 숨겨져 있는 음성이었다.
“잘 지내냐, 노랑머리?”
-저 이제 노랑머리 아닙니다. 이름 놔두고 왜 자꾸 그렇게 부르세요?
“그래, 송.일.권. 너 요즘 혹시 위조 일 하냐?”
태산이 물은 순간 일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하지만 태산은 일권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일권은 일단 발뺌을 할 셈인지 더듬더듬 되물었다.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문서에다 니 이름 초성을 꼼꼼히도 숨겨놨던데 오리발을 내밀 셈이냐?!”
-죄송합니다, 검사님. 살려주십시오.
태산이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일권은 재빨리 시인했다. 뻔히 들통난 것 더 시치미를 떼다가는 혼쭐이 나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너 박중성이 인터넷 도박 사이트 관리할 때 돈 좀 꿍쳐둔 것 없냐? 나한테서도 억이나 받아 갔으면 당분간은 그거 쓰면서 조용히 살 것이지 벌써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다녀?”
-돈 때문이 아니라요. 지인이 좀 도와달라고 해서 살짝 손을 대줬는데 어쩐지 재미도 있고 성취감도 있고 해서 하나둘 일을 맡다 보니 저도 모르게… 서류만 살짝살짝 만지는 거라 크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태산의 추궁에 일권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태산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 심상치 않은 침묵에 일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검사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맹세코 싹 손 씻겠습니다.
“한 번만 더 니 초성 박힌 문서가 눈에 띄면 그날로 바로 태산건설 들어가서 정신교육 다시 받는다. 알겠냐?”
-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권은 쩔쩔매며 넙죽 답했다. 연신 허리를 숙이는 기척이 전화기 너머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가 전화하면 고민하지 말고 재깍 받아라. 전화 안 받으면 뭔가 뒤가 구린 일을 하고 있다고 알고 당장 잡으러 갈 테니까.”
태산은 경고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마약 판매만은 못 돕겠다고 박중성이에게서 도망 다녔다기에 기특하게 봤었는데 아무튼 한번 범죄에 맛을 들인 놈들은 방심할 수가 없다.
얼마 후 진태만이 검찰청으로 소환되어 왔다. 태산은 진태만에게 산삼감정서를 내밀며 물었다.
“진태만 씨가 감정해 준 것이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진태만은 불안하게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답했다.
“학력을 살펴보니 관련 학문을 전공하지는 않으셨던데요.”
“전공은 아니지만 다년간의 연구 경험으로 감정할 만한 실력은 됩니다.”
“그래요? 제가 알기로는 산삼과 산양삼을 구분하는 건 어지간한 전문가도 쉽지 않은 일이라던데…….”
태산은 그렇게 말하며 송 계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송 계장이 비단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가져와 진태만의 앞에 펼쳐 놓았다. 보자기 위에는 삼 세 뿌리가 나란히 올려져 있었다.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이 중 진짜 산삼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으시겠네요.”
진태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삼을 한 뿌리 한 뿌리 들어 면밀히 살펴보는 척한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긴장해 삼을 살피던 진태만은 마지막 한 뿌리를 내려놓은 후 잠시 망설였다. 그러고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기어들어 가듯 말했다.
“…마지막 삼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거 다 진태만 씨가 진삼으로 감정한 세트 한 상자에서 나온 건데요?”
태산이 의뭉스럽게 답하자 진태만은 낭패라는 얼굴을 하더니 더듬더듬 변명했다.
“어… 그게… 제가 오늘 안경을 두고 온 데다 너무 긴장해서…….”
“이보세요, 진태만 씨.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솔직히 털어놓읍시다. 이미 견적 다 나왔어요. 졸업증명서 위조해서 취업한 것도 이미 다 판명되었단 말입니다.”
태산의 말에 진태만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태산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진태만을 구슬렸다.
“지금 취조는 단순한 확인 절차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계속 발뺌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구형량만 올라가지. 어서 자백하세요.”
진태만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다.
“저기…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와도 되겠습니까?”
태산은 송 계장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송 계장이 진태만을 데리고 나가 민원실 앞 흡연 부스까지 다녀왔다. 담배를 피우고 온 진태만은 훨씬 안정된 표정으로 태산 앞에 앉았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산삼 사기 판매에 가담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말씀해 보세요.”
“졸업증명서는 위조한 것이 맞습니다. 입학은 했었는데 사정상 논문을 쓰지 못해서 졸업을 못 했습니다. 연구원에 취직을 하려면 아무래도 명문대 학위가 있는 편이 유리할 것 같아 브로커에게 의뢰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태만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 연구원에서는 그동안 산양삼의 효능과 재배 환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건강식품 사업을 하는 오종석 대표와 만났습니다. 원래는 산양삼 농축액을 제조해 파는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만 심마니들과 진삼 거래도 종종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가격을 받으려면 감정서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저한테 감정서를 써달라 부탁하더군요. 저한테는 산삼을 감정할 능력이 없다고 거절했는데 물건은 확실하고 요식행위일 뿐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면서 거듭 부탁했습니다. 감정서도 다 오 대표가 써 와서 저는 직인만 찍었습니다.”
“그냥 공짜로 찍어주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게… 답례금을 좀 받고…….”
파렴치한 기업가의 꼬드김으로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어준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엔 돈에 넘어간 것이다. 태산은 내심 혀를 찼다.
조사를 마치고 진태만을 돌려보낸 후 송 계장이 물었다.
“오종석 대표 소환합니까?”
“아니요. 그 전에 오종석이 운영하는 건강식품 제조 공장을 단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장을 말입니까?”
송 계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진태만의 진술에 따르면 오종석이 주력하는 사업은 산양삼 농축액 사업 아닙니까? 산삼 가지고 사기 치는 인간이 산양삼 사업이라고 제대로 할 것 같진 않군요. 그쪽도 분명 장난치고 있을 겁니다. 비록 다른 건 때문이라곤 해도 검찰에 소환되면 산양삼 공장도 문제가 있는 부분은 미리 정리하지 않겠습니까? 그 전에 급습하려는 겁니다.”
태산의 설명에 송 계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2부에 지원 요청 하겠습니다.”
형사2부는 식품과 의료범죄를 전담하고 있는 부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태산은 반부패수사2부 수사관들, 형사2부에서 지원받은 인원과 함께 단속 현장으로 출동했다. 공장은 충남 금산의 한 마을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다. 수사관들이 승합차에서 내려 공장 안으로 밀고 들어오니 공장장이 사색이 되어 뛰어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서울중앙지검에서 나왔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태산이 신분증을 보이자 공장장은 울상이 되었지만 더는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부대에 든 옥수수전분이 공장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옆에는 드럼통에 든 물엿이 줄줄이 서 있었다. 공장 안에는 산양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단속이 들이닥쳤으니 공장 안에 쌓여 있는 가짜 농축액 재료를 수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대한 추출기 다섯 대 앞에서 농축액을 뽑아내고 있던 직원들과 공장 한구석에서 농축액을 병에 담아 포장하는 데 여념이 없던 노인들이 당황하여 일제히 돌아보았다.
태산은 아랑곳없이 추출기 앞으로 가 흘러나오고 있는 농축액을 찍어서 맛보았다. 송 계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렸다.
“뭐로 어떻게 만든 건 줄 알고 그걸 드세요?”
태산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재료가 저기 다 있잖아요. 옥수수전분에 물엿 섞여서 대충 인삼맛 향료 넣고 만든 것 같은데요. 달기만 한 게 건강식품은커녕 당뇨병 환자가 먹으면 바로 골로 가겠어요.”
그제야 태산이 송 계장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공장장 체포하세요.”
그리고 돌아서 본청에서 대기하고 있는 최진우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검사, 현장 확보했어. 오종석 대표 구속영장 바로 집행해.”
* * *
“오종석 씨, 이번이 처음이 아니네요? 작년에도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수감된 전과가 있는데 나오자마자 참 대단하십니다.”
구속되어 취조실에 끌려온 오종석은 태산의 비아냥에도 묵묵부답 입을 닫고 있었다.
“식품위생법에 의해 신고한 내용도 그렇고, 광고 내용도 그렇고 산양삼 추출액 25%라고 명시했군요. 그런데 실제로는 산양삼이 한 뿌리도 들어가지 않았으니 보건범죄단속법 위반은 물론이고 허위광고로 사기 혐의까지 추가되겠습니다. 초범이 아니니 이번에는 전보다 오래 살고 나올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오종석이 갑자기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공장 안에 재료가 안 보인다고 해서 안 넣었다고 단정하시면 안 되지요. 산양삼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좀 덜 넣을 때도 있긴 했지만 아예 안 쓴 건 아닙니다.”
태산이 그런 오종석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이보세요. 공장에서 만들어서 출고 준비 중인 것만 해도 3톤은 되던데 그거 이미 국과수에서 성분 분석 끝냈습니다. 산양삼 주성분인 진세노사이드는 전혀 검출되지 않았고 물엿과 옥수수전분, 한약재 약간으로만 제조된 것이라고 하던데요. 게다가 재료는 모두 중국산 싸구려였고요. 원가 5백 원도 안 하는 120그램짜리 한 병을 무려 6만 원에 팔아치웠네요. 이래도 발뺌할 겁니까?”
오종석은 태산의 추궁에 다시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태산은 취조를 계속했다.
“산양삼을 전혀 넣지 않은 가짜 산양삼 농축액을 제조해 유통한 것, 인정합니까?”
“…예.”
오종석은 별수 없다 생각했는지 순순히 혐의를 시인했다.
가짜 산양삼 추출액 사건 조서가 마무리되자 태산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이번엔 산삼 사기 건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 보죠.”
“예? 그게 무슨…….”
갑작스럽게 나온 이야기에 오종석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귀사에서 유통하고 있는 산삼 선물 세트 말입니다. 진짜 산삼이 맞습니까?”
태산의 질문에 오종석이 발끈하고 나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산양삼 추출액 때문에 구속된 거 아니었나요? 구속시킨 김에 상관도 없는 다른 건까지 엮겠다는 겁니까? 검찰이 이래도 돼요?”
꼬투리 잡은 김에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고 일부러 더 길길이 뛰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산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감정해 준 진태만 연구관이 벌써 실토했습니다. 어차피 그 건으로도 소환하려 했는데 이번 사건으로 먼저 구속이 되었으니 함께 묶어서 기소하려는 겁니다.”
진태만의 이름이 나오자 오종석은 잠시 주춤했다.
“산삼으로 둔갑한 물건 어디서 입수한 겁니까? 실토하세요.”
오종석은 대답을 망설였다. 통빡을 굴리고 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듯하다.
“그게 말입니다…….”
오종석은 잠깐 추임새를 넣더니 이내 의뭉스럽게 답했다.
“유명한 심마니 통해서 입수한 진품 맞습니다. 수십 년 경력의 심마니가 보증했어요. 단지 제값 받고 팔려면 권위 있는 기관에서 감정을 받는 게 좋으니까 진 연구관에게 감정을 부탁한 겁니다. 진 연구관도 진삼이라고 확인해 줬습니다.”
“진 연구관은 진삼을 감정할 능력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는데요. 감정서에 도장만 찍어주면 된다 해서 돈을 받고 찍어줬다고요.”
“아니, 그럼 감정을 공짜로 해줍니까? 사례금은 당연히 줬죠. 산양삼 연구하는 사람이 산삼 감정을 못한다니 전 금시초문입니다.”
오종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딱 잡아뗐다. 산삼과 산양삼을 구분해 분명히 공인해 줄 기관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 셈이다.
“그래요? 그렇다면 산삼을 넘겼다는 그 심마니 인적 사항하고 연락처 대보세요.”
“어… 그게…….”
눈을 굴리며 시간을 끄는 오종석에게 태산이 호통을 쳤다.
“둘러댈 생각 말고 빨리 말해!”
오종석이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자, 장문덕이오.”
“연락처는?”
“핸드폰도, 전화도 없습니다. 산속 깊이 사는 사람이라 제가 한 번씩 올라가서 물건을 받아 왔어요.”
“주소는?”
“정확한 주소는 모르겠고 계룡산 자락에 초막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태산은 초막의 위치를 꼬치꼬치 물었다. 오종석은 몇 번 지방 도로를 타고 얼마나 가서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진술했다. 심지어 약도까지 그려줄 정도였으니 아예 터무니없는 장소는 아닌 모양이었다.
취조를 끝내고 오종석을 구치감으로 돌려보낸 태산이 생각에 잠겨 있으니 송봉근 계장이 물었다.
“오종석의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못 믿지요. 몹시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진술 내용을 확인해 보지 않을 수는 없겠죠.”
“연락처도 없다는데 약도 하나 달랑 들고 어떻게 찾습니까? 한양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송 계장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주말에 산행이라도 할 겸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태산이 별일 아니라는 듯 선뜻 말하자 송 계장이 머쓱해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찾으러 가기 귀찮은 게 아니라 오종석이 꼼수 부리는 게 짜증이 나서 그랬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연일 야근인데 주말에라도 좀 쉬셔야죠. 저 혼자 다녀와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거짓말일 확률이 높은데 괜히 여러 사람 오갈 거 있나요. 후딱 다녀올 테니 걱정 마세요.”
그제야 송 계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말씀하신 대로 미행을 붙였지만 딱히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부친의 거처에 자주 들러 들여다보는 거 외에는 거의 공식적인 일정만 소화하고 있고요. 아내와 보좌진 외에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여자는 없는 듯합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범진이 담담하게 보고했다.
혐의가 있다곤 해도 수사관들에게 미행을 시킬 수는 없어 태산은 범진에게 구준태 시장의 미행을 맡겼었다. 선화가 구 시장에게 내연녀가 있는 것 같으니 그쪽으로 조사해 보라고 말한 이후 내린 지시였지만 지금까지는 딱히 수확이 없는 듯하다.
-그리고 그…….
범진이 보고하다 말고 어울리지 않게 말꼬리를 늘이며 망설였다.
“뭔데 그러냐?”
태산이 채근해서야 범진은 다시 말을 꺼낸다.
-선화 누님과도 종종 만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로…….
범진은 변명을 덧붙이며 허둥댔다. 무슨 생각으로 보고를 망설였는지 알 것 같아 태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알고 있다. 내가 시켜서 접근한 거니까.”
-예? 형님은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도 전에는 두 분이 각별한 사이셨고…….
범진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설마 내가 선화한테 몸 로비라도 시켰을까 봐? 선화가 사람 구슬리는 재주가 있으니 사업적으로 접근해서 정보 좀 뜯어내라고 한 거다.”
그런 당치도 않은 오해를 하다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 태산은 범진을 타박했다.
“너 나를 그렇게 모르냐?”
-아닙니다. 제가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즉각 사과하는 범진의 목소리에서는 어쩐지 안도감이 느껴졌다.
-선화 누님도 알고 계신 겁니까?
범진은 기대를 담아 물었다. 하지만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라. 임태산의 복수를 도와준 고마운 검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임태산이라는 걸 아는 건 세상에 너뿐이라고 했잖냐.”
말을 꺼내놓고 보니 어쩐지 가슴이 서늘하다.
제 속을 알아줄 사람은 범진뿐이건만 그런 범진과도 이젠 마음을 터놓고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법과 주먹이라는 완전히 반대되는 세상의 사람이 된 것이다.
세상에 오직 혼자뿐이라는 실감이 불현듯 선명하게 실감되었다.
태산은 퍼뜩 감상에서 깨어나 지시했다.
“미행은 당분간 계속 붙여둬라. 변화가 있으면 보고하고.”
-예, 형님.
보고가 끝나고도 범진은 바로 전화를 끊지 않고 머뭇거렸다.
-형님, 멀리 가신 후에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못 뵈었습니다.
“멀기는. 서울에서 인천이면 지척인데.”
-간다 하면 금방이지만 갈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아서요.
범진도 태산과 거리를 두어야 함을 의식하고 하는 말이리라.
-오랜만에 찾아뵙고 싶습니다. 이번 주말에 올라가겠습니다.
“오지 마라.”
잘라 말하니 범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고야 태산은 범진이 서운해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설명을 덧붙였다.
“와도 못 본다. 지방으로 출장 가게 됐다.”
-아, 그러십니까? 어디로요?
“공주 쪽이다.”
-그럼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됐다. 뭘 그렇게까지…….”
-편히 가시려면 운전할 사람이 있는 게 좋지요.
“네가 운전이나 할 군번이냐?”
태산이 웃음 섞어 말하니 범진도 웃음기를 띠고 답했다.
-바람 좀 쐬고 싶어 그럽니다.
그제야 태산도 허락했다.
“그래. 그러자.”
토요일 오전 일찍 범진의 연락을 받고 태산은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범진이 태산이 내려오자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가벼운 아웃도어 차림으로 밝게 웃는 범진의 모습을 보고 태산은 풉 웃어버렸다.
“놀러 왔냐, 김범진?”
“예, 형님은 출장이시지만 저는 놀러 가는 거 맞습니다.”
범진도 농담으로 받으며 쿡쿡 웃었다.
범진은 태산의 지시에 따라 목적지로 운전해 갔다. 계룡산 자락에 차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산행을 하려는데 범진이 차에서 내리며 배낭을 둘러멘다.
“그건 뭐냐?”
혹시 뭐라도 묻으러 온 건가 미심쩍어하며 태산은 물었다. 범진은 조금 쑥스러운 듯 답했다.
“마실 거랑 주전부리할 것 좀 싸 왔습니다.”
태산은 어처구니없어 혀를 찼다.
“진짜 본격적으로 놀러 왔구먼.”
처음에는 타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성 좋은 범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초막은 듣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리가 멀었고 산길도 상상 이상으로 험했다.
범진이 텀블러에 넣어 온 아이스커피와 얼음물이 갈증을 달래주었고 육포와 에너지바, 견과와 건과일 등이 기운을 내게 해주었다.
한창 산을 타던 중 갑작스러운 인기척을 느끼고 태산은 발길을 멈추고 귀를 세웠다. 뒤따라 올라오던 범진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사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이고, 깜짝이야!!!”
사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자신이 더 화들짝 놀랐다.
사내는 작업용 목장갑에 지팡이를 짚고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어깨에 비스듬히 멘 가방에는 약초로 보이는 풀 몇 가지와 호미가 삐죽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심마니인가?’
이 일대에서 활동하는 심마니라면 오종석이 말한 장문덕이거나 적어도 그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태산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내에게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 근방에 장문덕이라는 분이 사는 초막이 있다던데요.”
“예, 저 위에…….”
사내는 수상쩍다는 얼굴로 경계하며 답했다.
“길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이 길로 쭉 올라가면 돼요. 길이 험해서 오래 걸릴 텐데… 지금 올라가면 해 지기 전에 못 내려와요.”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근데 그 양반 아직 거기 사나 모르겠네. 얼굴 못 본 지 한참 됐는데. 연세도 있으니 어디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사내는 부랴부랴 발길을 옮기며 등 뒤로 경고를 던졌다.
“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봐야 못 만날 거요. 야밤에 산에서 헤매기 싫으면 나 따라 내려가는 게 좋아요.”
* * *
“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봐야 못 만날 거요. 야밤에 산에서 헤매기 싫으면 나 따라 내려가는 게 좋아요.”
사내가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고 난 후 범진이 태산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어쨌든 확인은 해봐야지. 올라가자.”
태산은 성큼 앞서 비탈을 올랐다. 마음이 급해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산길을 따라 뛰듯이 달려 드디어 초막에 도착했다.
다 쓰러져 가고 있는 초막에는 최근 사람이 산 흔적이 없었다.
“제길, 오종석 이 새끼…….”
태산은 욕지거리를 뱉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긴 했으나 찾지 못할 줄 알고 댄 이름인 것이 틀림없다.
등 뒤로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그제야 범진이 초막 앞에 도달했다. 숨이 턱에 닿아 무릎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뒤따라오는 범진은 생각지도 않고 속도를 높여 버린 것이다. 그나마 낙오하지 않고 이만큼 따라온 것은 발 빠른 범진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허탕이다. 해 지기 전에 내려가자.”
기껏 올라왔더니 바로 내려가자는 말에 투덜댈 법도 하건만 범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바로 답했다.
“예, 형님.”
태산과 범진은 부지런히 발을 옮겼지만 산을 채 내려가지 못한 채 해가 넘어갔다.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 기능을 켜고 산길을 더듬어 내려갔다. 밝은 조명을 켠 핸드폰은 금방 배터리가 닳아버렸고 이내 산길은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다.
어둠 속에 갇히자 태산의 오감이 활짝 열렸다. 야행성 산짐승처럼 태산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의 실루엣을 꽤 잘 포착했다. 귀는 나뭇잎과 풀잎이 사락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장애물과의 거리를 정확하게 가늠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와 뿌리가 얽혀 있는 어두운 산길은 걷기가 녹록지 않아 속도가 느려졌다.
태산조차 그런 상황이니 범진은 더더욱 걷기가 힘들 것이었다. 급한 내리막에 자꾸만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려는 범진에게 태산은 손을 내밀었다. 범진은 태산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미간을 모은다.
“괜찮습니다.”
범진은 고집스럽게 답했다. 분명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조직 생활을 하면서 체구가 작다고 무시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범진은 그런 취급을 받으면 절대로 참지 않았다. 상대가 무시했던 것을 후회하고 질겁하며 물러나게 만들어주었다. 태산이 거두어 함부로 칼을 뽑지 말라 가르치기 전에는 거침없이 칼을 꺼내 상대 입을 찢었다는 소문조차 있었다.
범진에게 칼을 맞아본 적이 있는 태산은 범진이 작다고 우습게 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등 뒤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수하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단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평범한 인간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내민 손이었지만 범진이 생각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태산은 바로 손을 거두고 앞장섰다. 차라리 안전한 길을 먼저 확보해 등 뒤를 바짝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걷는 속도도 조금 더 줄였다.
등 뒤를 잘 따라오고 있던 범진이 문득 헉! 소리를 내더니 무언가에 발이 걸려 몸이 앞으로 홱 기울었다. 공중에 반쯤 몸이 떠 그대로 비탈로 굴러떨어질 위기에 태산이 재빨리 범진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괜찮냐?”
태산이 급히 묻자 범진은 불퉁하게 답했다.
“예. 이제 내려주십시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범진의 발이 바닥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대롱대롱 떠 있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몸의 감각으로 낚아챘는데 워낙 키가 큰 강 검사의 몸이 되다 보니 과하게 들어 올린 모양이다.
태산은 머쓱하게 범진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조금 쉬었다 가자.”
태산은 길가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범진도 바닥에 앉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어둠이 내린 숲속은 고요했고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와 산새 소리가 정적을 깰 뿐이었다.
범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제가 괜히 따라오겠다고 고집부려서 형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범진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에서는 자괴감이 묻어났다.
그제야 태산도 알아챘다. 범진은 자존심이 상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형님께 필요치도 않은 놈이 곁에 있어봐야 무슨 소용인지… 태산건설과는 이제 거리를 두시라고 제 입으로 말씀드렸음에도 제가 미처 미련을 못 버렸던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범진아.”
길어지는 범진의 넋두리를 태산은 단호히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억나냐? 언젠가 주안파 애들이랑 붙었을 때 말이다. 거의 다 제압했다고 생각했는데 미리 숨어 있던 잠복조가 뒤에서 급습했잖냐. 그때 쇠 파이프 든 놈이 뒤에서 내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는데 니가 막아서서 그놈 손목을 끊어버렸지. 그뿐이냐? 뉴송도호텔에서 신촌파 자객이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을 때는 니가 귀신처럼 달려들어서 그놈 배때지에 먼저 칼빵을 냈지.”
태산은 과거를 돌아보며 즐거운 듯 말했다. 범진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너는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다. 그걸로 네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 다른 쓰임이 없어도 괜찮다. 피를 나눈 형제가 필요 때문에 함께하는 건 아니지 않냐.”
“형님…….”
범진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으니 태산이 급히 말을 끊었다.
“쉿!”
태산이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에 범진도 숨을 죽이고 가만히 도사렸다.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태산이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펴보고 올 테니 여기 좀 있어라.”
태산은 그 말을 남기고 숲으로 뛰어들었다. 잡힐 듯 말 듯 사람의 말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었다. 태산은 온 귀의 신경을 바짝 세우고 산짐승처럼 어두운 산속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소리를 따라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서 작은 빛이 시야에 잡혔다.
“역시 있었어!”
태산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나무판자로 지은 작은 인가의 창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었다. 태산이 들은 사람의 소리는 초막 안에서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였다.
태산은 문간에 서서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계십니까?”
답이 없어 태산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한 번 더 불렀다.
“계십니까?!”
그제야 문을 삐걱 열고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뉘슈?”
이런 밤중에 산속에서 사람을 볼 리 없다고 생각해 잔뜩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사람을 찾아 올라왔다가 해가 져서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룻밤만 신세 좀 질 수 있을까요?”
“이 산중에 누굴 찾아왔기에.”
노인이 수상쩍다는 듯 물었다.
“장문덕이라는 심마니를 찾아왔는데 초막에 가보니 비어 있었습니다. 혹시 어르신께서는 그 사람 모르십니까?”
“난데?”
노인이 아무렇지 않게 답해 태산은 깜짝 놀랐다.
“죽을 날 다 된 늙은이를 무슨 일로 찾아왔소?”
“오종석 대표 소개받고 왔습니다. 그 사람이 어르신과 진삼을 거래했다던데요.”
오종석의 이름이 나오자 노인은 바로 눈살을 찌푸린다.
“그 사기꾼 놈이랑은 상종도 안 한 지 오래요. 돌아가시오.”
바로 돌아서 문을 닫아버리려는 노인을 태산이 다급히 불러 세웠다.
“어르신! 바로 그 사기꾼 놈을 잡아넣으려고 조사하러 왔습니다.”
노인이 그제야 멈칫하며 태산을 다시 돌아보았다. 태산이 예의를 갖춰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자기소개를 했다.
“서울중앙지검 강바른 검사입니다.”
노인은 의심스럽다는 듯 태산을 찬찬히 보았다.
“검사라… 기운이 펜 드는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진짜 칼을 쓰는 검사라면 모를까.”
노인은 중얼거리며 태산을 살피다가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 밤에 내쫓기도 그러니 들어오시오. 얘기나 들어봅시다.”
태산은 성큼 초막 안으로 발을 들이려다 멈칫했다.
“참, 산중에 두고 온 친구가 있는데 데려오겠습니다. 손전등이 있으면 빌려주시겠습니까?”
노인은 선뜻 초막 안을 뒤져 손전등을 꺼내주었다. 하지만 태산은 손전등을 켜지 않고 바지 뒷주머니에 꽂은 채 그대로 숲길을 내달렸다.
처음에는 감각만으로 원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곧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수월하게 왔던 길을 짚어갈 수 있었다. 달빛과 바람, 소리와 냄새까지 이전의 몸이었다면 미처 포착하지 못했을 모든 미세한 요소들이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태산은 숲에서 뛰어나와 드디어 범진의 앞에 도달했다. 범진은 긴장한 몸을 잔뜩 웅크리며 경계하고 있다가 태산임을 알아채고 반가워 벌떡 일어났다.
“장문덕 심마니를 찾았다. 거처를 옮겼던 모양이야.”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전등을 켜 들고 앞장섰다.
“바짝 붙어 와라.”
범진까지 길 없는 숲을 달리게 할 순 없어 걸을 만한 길을 찾아 되짚어 오느라 장문덕의 초막을 다시 찾아오는 데는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장 노인은 태산이 범진을 데리고 들어오는 걸 보더니 혀를 찼다.
“눈빛이 사나운 게 어디서 들짐승 같은 걸 잡아 왔구먼. 정말로 나랏일 하는 사람들 맞소?”
태산은 초막 안으로 발을 들이며 신분증을 꺼내 검사임을 확인시켰다. 그러고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천으로 고이 싼 삼을 꺼내 장 노인의 앞에 펼쳐놓았다.
“오종석이 팔고 있는 산삼입니다. 오종석 말로는 이 산삼을 어르신께 건네받았다던데요.”
장 노인은 콧방귀부터 뀌었다.
“난 그놈이랑 거래한 적도 없수. 옛날에 한번 삼이랑 약초를 사겠다고 찾아온 적은 있었지만 그놈 하는 짓이 더러워서 쫓아버렸지.”
태산은 재차 물었다.
“이게 진삼이 맞긴 합니까?”
장 노인은 흘낏 보더니 더 고민하지도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
“가짜요.”
“세 뿌리 모두 말입니까?”
“전부 다. 더 볼 것도 없수. 산삼 아니고 중국산 장뇌요. 뇌두 길이만 봐도 알지. 길쭉헌 것이. 중국산 장뇌도 제대로 된 물건이면 약효에 큰 차이가 없긴 하지만 이건…….”
장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 가가 이걸 산삼이라고 팔았다고? 얼마에?”
“세 뿌리 한 세트에 육백이 넘습니다.”
태산의 답에 장 노인의 입에서 바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이런 미친눔이! 한 뿌리에 2천 원도 안 하는 물건을 몇 배를 튀겨먹은 건가? 햇수도 안 채운 데다 방부제에 농약 범벅이라 안 먹은 것만도 못한 이런 쓰레기를! 육시럴 놈!!”
태산은 얼떨떨해서 물었다.
“이게 그렇게 질이 나쁜 물건이라면 수입 시에 통관을 할 수 없었을 텐데요. 농약 기준치도 통과해야 할 테고.”
장 노인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대놓고는 못 들여오지. 하지만 막는다고 들여오려 작정한 놈이 안 들여오겠소?”
“밀수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 외엔 생각할 수 없어.”
장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언했다.
* * *
태산과 범진은 그날 밤 장문덕의 초막에서 새우잠을 잤다. 다음 날 일찍 산을 내려오려는데 장 노인도 부랴부랴 짐을 싼다.
“나도 같이 갑시다. 내 그 오 가 놈이 이런 파렴치한 짓거리를 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깊은 산에 홀로 숨어 사는 노인이 너무 선뜻 내려간다는 말을 꺼내서 태산은 얼떨떨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젯밤 진술하고 감정해 주신 것으로도 충분한데요.”
하지만 장 노인은 막무가내다.
“그 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대질인가 하는 그런 것도 시키던데 나 그거 좀 시켜주시오. 오 가 놈 면상 좀 보고 오게. 다시는 내 이름 팔고 다니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줘야겠어.”
장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휘적휘적 앞장섰다.
타고 온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거의 다 내려왔을 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태산은 범진의 것인가 하고 돌아보았지만 범진에게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장 노인의 점퍼 주머니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오~ 드디어 터지는구먼.”
장 노인이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냈다.
‘아이폰?’
장 노인에게서 나오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물건에 태산은 깜짝 놀랐다. 정작 장 노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어, 잠시 내려왔다. 서울 좀 다녀오려고. 이 낙도 없으면 내가 뭐 하러 살겠냐? 잔소리 좀 그만해라. 그래, 너무 더워지기 전엔 내려가마.”
구시렁거리며 전화를 끊은 장 노인은 무심히 태산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 태산을 향해 뚱하니 물었다.
“왜? 뭐요?”
“아, 아니오. 오종석이 어르신 핸드폰도, 전화기도 없어서 연락할 수가 없다고 진술했는데…….”
장 노인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뀐다.
“늙은이 혼자 산에 산다고 핸드폰 하나 없을 줄 아나. 발전기 돌려서 충전도 하는데. 신호가 안 터지니 못 쓰는 거지. 그래도 이게 있으면 무료할 때 간단한 게임 정도는 할 수 있다오.”
아이폰으로 모바일게임까지 하는 노인이라니. 처음에 보고 생각했던 편벽한 괴짜 노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랐기에 태산은 슬쩍 물어보았다.
“산에서 꽤 자주 내려오시나 봅니다.”
“그럼 일 년 사시사철 내내 산에서만 살 줄 알았소? 내가 무슨 자연인도 아니고.”
심지어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TV 프로그램도 아는 모양이다.
“어차피 한겨울에는 추워서 못 지내요. 한여름에도 벌레가 몰려들어 지내기 고약하고. 약초 캐기 좋은 계절 한때 바짝 하는 거지.”
장 노인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마저도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산에 올라오면 딸년이 내려오라고 성화요. 산에서 갑자기 쓰러지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냐고. 성화에 못 이겨 딸네 집에서 몇 년 얹혀살기도 했는데 때 되면 발이 절로 산으로 옮겨지는 걸 어쩌겠소. 그래서 버려진 초막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한 계절 살다 내려가고 그러길 수년째인데… 보는 놈마다 살아 있었냐면서 놀라는 게 아주 죽으라고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장 노인은 궁시렁궁시렁 투덜거렸다.
장 노인이 삼을 넘겼다고 진술한 오종석의 속셈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행방도 알 수 없고 생사도 불분명한 노인을 내세움으로써 수사가 벽에 부딪치도록 할 셈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저만치 차가 보이자 범진이 먼저 달려가 트렁크를 열고 배낭을 던져 넣었다. 태산과 노인이 와서 조수석과 뒷자리에 올라타자 범진도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서울로 달렸다.
범진은 태산과 노인을 태산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내려주고 인천으로 돌아갔다. 태산은 노인을 자신의 오피스텔에 재우고 다음 날 서울지검으로 함께 출근했다.
송봉근 계장이 태산을 뒤따라 들어오는 노인을 보고 태산에게 슬쩍 물었다.
“누구…….”
“오종석이 산삼을 건네받았다고 진술한 장문덕 심마니입니다. 대질을 원하기에 모셔 왔습니다.”
그리고 서류 가방 안에서 무명천으로 싼 삼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이건 전부 가짜랍니다. 심지어 중국산 하품이고.”
“역시 그랬군요.”
송 계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계장님, 유치감 가서 오종석 데려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송 계장이 서둘러 검사실을 나가자 태산은 김민하 실무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실무관님, 각 기관에 감정 보낸 삼들 지금 다 돌아와 있죠?”
“예, 검사님.”
“나머지 여섯 뿌리도 이분한테 보여 드리세요.”
김민하 실무관이 보관하고 있던 삼 두 상자를 꺼내 장 노인 앞에 올려놓았다. 첫 번째 상자를 열어 보이니 장 노인이 고개를 젓는다.
“이것도 다 가짜요.”
김민하 실무관이 두 번째 상자를 열었을 때 장 노인의 눈빛이 살짝 바뀌더니 유심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호오~ 이거 요행히 괜찮은 것도 하나 들었구먼.”
김민하 실무관도 호기심을 보인다.
“산삼이에요?”
“아니, 이것도 중국산 장뇌이긴 한데 수령도 차고 꽤 실한 놈이라 아주 싸지는 않을 거요.”
장 노인은 삼 하나만 상자에 남기고 다른 것들은 꺼내 앞서 본 상자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그때 구치감에 내려갔던 송 계장이 오종석을 데리고 올라왔다. 오종석은 검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장문덕 노인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노, 노인네… 살아 있었나?”
오종석이 놀라는 꼴을 보고 장 노인은 씨익 웃더니 호쾌하게 외쳤다.
“이놈, 오 가야! 오랜만이다! 내 쌩쌩하게 살아 있었지.”
* * *
“장문덕 심마니와 대질시키니 오종석도 순순히 털어놓았습니다. 오종석의 자백에 따라 가짜 산삼을 밀수한 유통조직도 검거했고요. 이들이 밀수한 중국산 장뇌가 경동시장에 상당히 풀려 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식약처와 공조해 전수조사를 했습니다. 상당수의 약재상을 적발해 입건한 상태입니다. 식약처에서도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불량건강식품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후부터는 우리 부서보다 형사2부 쪽에서 담당하는 게 더 관할이 적절할 것 같아 사건 인계했습니다.”
태산의 보고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원신영 부장이 책상 위에 놓인 신문을 태산 쪽으로 밀어놓으며 물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고요?”
신문 사회면을 관련 기사가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가짜 산삼 농축액 제조 판매 일당 적발]
[농약 범벅 가짜 산양삼, 산삼으로 둔갑해 고가에 유통]
[경동시장 약재상 전수조사 결과 밀수불량삼 대거 적발]
[식약처 건강기능식품 관리 강화, 대규모 실태조사 착수]
원 부장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가볍게 해보라고 던져준 사건이었는데 결국 큰일로 만들어 버렸네요. 아무튼 강 부장은 일 키우는 데 뭐가 있어. 한번 손댔다 하면 화끈하게 해치우니 확실히 시답잖은 일을 시킬 그릇은 아닌 것 같군요.”
처음 사건을 맡을 때는 태산도 잠깐이지만 사소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불만스러워했다. 원 부장은 알면서도 태산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일까?
“테스트해 보신 겁니까?”
태산의 물음에 원 부장은 빙긋 웃는다.
“테스트라니요. 그저 앞으로 같이 일할 사람이니 어떤 스타일인지 한번 보고 싶어서 즉흥적으로 일을 맡겨봤을 뿐이에요.”
원 부장은 유쾌한 투로 말하고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제는 슬슬 큰 거 한번 해봐야죠? 강 부장이 직접 인지한 사건 착수해도 좋아요. 생각해 둔 거 있나요?”
드디어 때가 온 건가? 태산은 덥석 말을 꺼냈다.
“이전에 특수부 있을 때 조사하던 사건을 계속 파보고 싶습니다.”
“그래요. 한번 해봐요. 말린다고 안 할 사람도 아닌 것 같고 한번 하면 제대로 할 것 같으니.”
원 부장은 그렇게 답하고는 더 이상 용건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사건인지 묻지 않으십니까?”
“내가 꼭 알아야 하나요? 강 부장이 알아서 하고 성과 나오기 시작하면 보고하면 돼요.”
아예 위에서 모르고 있는 쪽이 더 자유롭게 수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책임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일까?
“알겠습니다.”
태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기 전 재킷 안주머니에서 둘둘 만 무명천 꾸러미를 꺼내 원 부장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수사를 위해 구입한 삼은 전부 폐기 처분 했습니다. 그런데 장문덕 심마니 말이 이거 한 뿌리는 중국산 장뇌라곤 해도 꽤 괜찮은 것이라고 해서 남겨뒀습니다. 처음엔 장 심마니에게 수사에 협조해 준 사례로 넘기려고 했습니다만 산에 오가며 더 좋은 것도 많이 먹는다며 극구 사양 하더군요. 그래서 부장님께 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요? 정작 수사하느라 고생한 것은 강 부장인데 자기가 먹지 이걸 왜 나한테 가져와요?”
원 부장은 타박하면서도 얼굴에는 흐뭇한 기색이 흘렀다.
“저는 지금도 기운이 넘쳐서 삼까지 먹으면 감당 못 합니다.”
“오오~ 자신감이 대단하네요.”
원 부장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태산은 아차 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성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구나 뒤늦게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아, 그런 뜻이 아니라… 체질적으로 열이 많아 삼이 안 받는다는 얘깁니다.”
“뭘 그걸 변명까지.”
원 부장은 쿡쿡 웃고는 받은 삼을 챙겼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태산이 나가고 난 뒤 원 부장은 받은 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대로 싸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으로 올라간 원 부장은 그대로 1302호 검사장실로 들어갔다. 부속실 비서관이 문으로 들어오는 원 부장을 돌아본다.
“검사장님 지금 계신가요?”
“예, 안에 계십니다.”
원 부장은 집무실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들어섰다.
“반부패수사2부 원신영 부장입니다.”
“무슨 일인가?”
신승렬 검사장이 돌아보며 물었다. 따로 부른 일이 없었으므로 용건이 궁금했던 것이다.
“가짜 산삼 사건이 거의 마무리되어서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기사 통해서 보았네. 수고했어.”
신 검사장은 건성으로 말했다. 이 수사의 주역이 강바른 부부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진심으로 격려하고픈 기분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건…….”
원 부장이 손에 든 꾸러미를 신 검사장에게 건넸다.
“강바른 부부장이 검사장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뭔가 이게?”
신 검사장은 흙이 묻어 꼬질꼬질한 무명천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모았다. 상사에게 주는 선물치고는 포장에 몹시 성의가 없는 것이다.
“장뇌삼입니다. 강 부장이 수사 중에 입수한 것인데 심마니에 따르면 꽤 등급이 높은 삼이라고 합니다. 약효가 좋을 겁니다.”
신 검사장은 어리둥절해 되물었다.
“강바른이 이걸 왜 내게…….”
원 부장은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강 부장이 태도는 거칠어도 수사에는 진심인 친구입니다. 비록 검사장님과 개별적인 사건에서 의견은 다를지라도 사건을 대하는 진심만은 자신과 같다는 걸 알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먼저 챙기는 것이겠죠.”
검사장이 슬그머니 무명천을 들춰 삼을 살펴본다. 척 보기에도 튼실한 삼이 쌉싸름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검사 회의에서 있었던 일은 제가 충분히 꾸짖고 타일렀습니다. 강 부장도 반성하는 기색이고요. 그때 일 때문에 차마 직접 전해 드리지 못하겠다 해서 제가 대신 가지고 왔습니다.”
검사장의 동요하는 눈빛을 확인한 원 부장은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제가 보기에는 정의감 넘치고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강단 있는 성격에 위풍당당한 풍채까지 검사장님과 강 부장이 쌍둥이처럼 닮았지 뭡니까?”
닮은 부분이라면 키가 크다는 정도밖에 없었지만 원 부장은 노련하게 입 발린 말을 꺼냈다. 강바른 부부장의 우월한 외모야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었으므로 키든 뭐든 닮았다고 하면 상대가 불쾌해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제 그만 마음 푸시고 용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