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51화 (51/78)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10만 원짜리 백화점상품권 5장이었다. 태산은 코웃음을 치고는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말씀대로 정말 약소하네요.”

신 변호사보다 김 부장이 더 발끈해 언성을 높였다.

“야! 강 검사! 선배님이 신경 써서 챙겨주신 건데 고맙다고 받지는 못할망정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왜 고마워해야 합니까? 공짜로 챙겨주시는 건 아닐 텐데. 이거 청탁성 아닌가요? 법무법인 이연이 맡고 있는 사건, 우리 부에 걸려 있는 거 없습니까?”

그제야 신 변호사가 얼굴을 굳히며 답했다.

“자네 듣자 듣자 하니 말이 너무 심하군. 후배들을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긴가? 맹세컨대 우리 회사 건 중에 반부패수사부에 올라가 있는 사건은 없어.”

신 변호사는 완강히 부인했지만 태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은 없어도 앞으로는 있겠지요. 이딴 애들 용돈 수준의 껌값으로 쉽게 매수하려 드는 게 후배들을 생각하는 마음입니까? 정말로 후배들을 생각한다면 행여나 청탁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먼저 거리를 두시는 게 옳은 행동 아닌가요?”

태산은 그렇게 받아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 자리가 부서 회식인 줄 알고 왔습니다. 접대 자리인 줄 알았다면 참석하지 않았을 겁니다. 퇴근이나 하겠습니다.”

문 가까이 앉아 있던 최 검사가 밝은 표정으로 덩달아 일어났다.

“저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최 검사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는 태산의 뒤를 재빨리 뒤쫓았다.

“저, 저 꼴통이!!!!”

김 부장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뒷목을 잡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최 검사가 태산의 뒤를 따라오며 신이 나서 떠든다.

“정말 속이 다 시원하네요. 부장님도 받은 마당에 저 혼자라면 차마 못 받겠다고 하지 못했을 텐데. 검사님이 먼저 거절해 주셔서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산은 힐끗 최 검사를 돌아보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홀로 1년을 버텼단 말인가. 범죄자들 취조하느라 눈에 독기가 생긴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범죄자들뿐 아니라 동료들과도 크고 작은 싸움을 해야 했을 것이다.

어쩐지 안쓰러운 기분을 느끼며 태산은 최 검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끼리 한잔하러 갈까?”

“그거 좋죠!”

최 검사는 반색하여 답했다.

최 검사와 밤거리로 나와 적당한 술집을 물색하고 있는데 저만치 술집 문에서 안소영 검사가 씩씩거리며 뛰쳐나왔다. 그러다가 마주 오는 태산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안 검사는 태산을 알아보고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태산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안 검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저희 부서 회식 자리가 있었는데 분위기가 영 불편해서요.”

태산은 최 검사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하네요.”

하지만 안 검사는 정말 이들이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 * *

“강력부는 아니라도 우리 형사3부가 강력사건 전담부다 보니 여검사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야. 이제 홍일점이 하나 들어왔으니 젊은 남자 검사들이 아주 힘을 불끈 내서 더욱 열심히 일하겠구먼.”

형사 3부 윤건용 부장검사의 말에 술자리에 둘러앉은 검사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다지 우스운 이야기도 아니고 여검사를 꽃 취급 하는 성희롱성 농담이었지만 뭐가 그렇게 웃긴지 다들 배를 잡는다.

안 검사는 얼굴을 굳히고 있을 수만은 없어 곤란한 얼굴로 쓰게 웃었다.

“자, 자! 마시자고!”

윤건용 부장검사가 술을 권하더니 곁에 앉은 부부장이 빈 잔에 술을 따라주려 하자 잔을 물리며 눈치를 준다. 아차 한 부부장은 얼른 안 검사를 돌아보며 말한다.

“우리 여검사가 부장님 술 좀 따라 드리지.”

안 검사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술병을 들어 부장검사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다음으로 부부장이 당연하다는 듯 술잔을 내민다. 안 검사는 마지못해 부부장의 잔에도 술을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선배 검사들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술잔을 들고 술을 따라주기를 기다리며 안 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선배라 해도 같은 평검사끼리인데 왜 자신만 술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안 검사가 불만을 품고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데 윤 부장이 재촉한다.

“새로 부임한 인사로 선배들한테도 한잔씩 따라봐.”

부장의 명이니 별수 없이 다시 일어나 선배들에게 술을 돌린다. 한 번이면 되겠지 했는데 선배 검사들은 술잔이 빌 때마다 자꾸 안 검사에게 눈치를 주었다. 부장도 뻑하면 안 검사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역시 여검사가 술을 따라주니 술맛이 더 나네.”

“정말 그렇습니다.”

부부장도 맞장구치며 얼렁뚱땅 같이 술을 받아 마신다.

그뿐만 아니다. 부부장은 화장실에 가거나 전화를 받는다며 뻔질나게 들락날락하면서 꼭 좁은 자리를 밀치고 부장 옆까지 밀고 들어와 앉는다. 그 와중에 자꾸만 몸이 닿는데 아무래도 이건 고의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꾹꾹 눌러 참고 있던 안 검사는 부부장이 나갔다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중심을 잃은 척 안 검사의 허벅지를 짚었다가 슬쩍 주무르고 나서 손을 거두었을 때 완전히 임계점에 다다랐다.

그동안에도 남초 직장에서 여검사라고 숨 쉬듯이 무시하는 분위기를 버티며 일해왔다. 하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성추행을 했던 곳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선뜻 그리되지는 않았다. 이후에 일어날 일들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부서의 다른 검사들이 한통속이 되어 따돌리고 괴롭힐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참고 있을 것인가. 그러면 계속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더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추행할 것인데.

안 검사는 문득 강바른 검사를 떠올렸다. 어떤 일에도 참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검사. 그 방법이 항상 옳지는 않았지만 그라면 적어도 이런 자리에서 참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자네는 아까부터 뭘 그렇게 왔다 갔다 하나?”

부장이 미간을 모으고 타박하자 부부장은 뒷머리를 긁으며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자꾸 전화가 걸려와서.”

부부장은 자신에게 쏠린 화살을 얼른 안 검사에게로 돌렸다.

“이봐, 부장님 잔이 비었잖아. 멍하니 뭐 하는 거야?”

부부장의 채근에도 안 검사가 앉아만 있으니 부부장은 대놓고 타박했다.

“여검사라서 싹싹할 거라고 생각했더니 어디서 둔탱이를 갖다놨구먼.”

안 검사는 조용하지만 냉랭하게 반문했다.

“왜 제가 술을 따라 드려야 하나요? 다들 손이 없으십니까?”

갑작스러운 반발에 술자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안 검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한 사람의 검사입니다. 접대하러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윤 부장이 비로소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인다.

“상사랑 선배한테 술 한잔 못 따라주냐?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말씀대로라면 이 자리에 저보다 기수도 낮고 나이도 어린 후배가 둘이나 있는데 왜 하필 저만 술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술은 자기가 따라 먹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윤 부장은 기가 막혀 입만 뻐끔거렸다.

“이거 싸가지가 아주…….”

부부장이 부장을 대신해 뭐라 한마디 하려는 것을 안 검사가 가차 없이 끊어낸다.

“부부장님은 아까부터 지나다니면서 은근슬쩍 계속 만지시는데 그러지 좀 마세요.”

“뭐, 뭐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뜨끔했는지 부부장은 당황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변명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자리가 좁아 닿은 건데 어쩌라는 거야?”

“제가 실수로 닿은 건지 의도를 가지고 만지는 건지도 구분 못 하겠습니까? 자리가 좁다는 핑계가 있으니 옳다구나 하고 계속 만지신 거 아니냐고요.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대검 감찰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 하겠습니다.”

부부장도 어버버 입을 다문다.

안 검사는 속이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뜨기 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툭하면 여검사, 여검사 하시는데 저 여씨 아닙니다. 안소영입니다. 앞으로는 안 검사라고 불러주십시오.”

* * *

안소영 검사가 뛰쳐나가고 난 후 회식 자리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아주 술맛 뚝 떨어지게 만드는군.”

윤건용 부장이 입을 열어 무거운 침묵을 깼다. 부부장이 재빨리 윤 부장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차라리 부르지 말 걸 그랬습니다. 그럼 룸으로 갔을 텐데. 아가씨가 있으면 분위기도 더 삼삼해졌을 테고요.”

윤 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타박한다.

“자네는 아무 데서나 여색 밝히는 그 성정 좀 조심하게. 그러다가 언젠가 크게 한번 사고를 치고 말지.”

부부장이 뜨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면서도 부부장은 반성의 기미라곤 없이 괜히 안 검사 때문에 쓸데없는 지적을 받았다고 내심 이를 갈았다.

“강력통이라더니 계집애 주제에 성질 한번 지랄 맞군. 고분고분한 맛이 없어. 저거 어떻게 교육시켜서 쓰지?”

윤 부장은 골머리를 앓았다. 부부장이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말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대충 데리고 있다가 시골 지청으로 내려보내시면 되지요. 인사고과를 짜게 주면 지가 날고 기는 재주가 없는 한 어쩌겠습니까? 몇 년 한직에서 구르면서 치받아봐야 저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정신 차릴 겁니다. 그때면 부장님은 더 높이 올라가 계실 테니 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으실 테고요.”

“뭐 그렇긴 하지.”

부부장의 은근한 아첨에 윤 부장도 금방 기분을 풀었다.

“자, 자! 죽상들 하고 있지 말고 마시자고! 원샷!”

윤 부장은 검사들을 채근하며 잔을 들이켰다.

* * *

“잘했습니다. 우리도 방금 불편한 회식 자리 박차고 나온 참이거든요.”

태산이 웃으며 말하자 안 검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따라 웃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강바른 검사라면 이런 자리에서 참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며 용기를 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본인을 딱 마주친 데다 자신의 예상과 한 치도 다름없이 행동했다 하니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해 실소가 흘렀다.

“우린 같이 술 한잔 더 하러 갈 건데 안 검사님도 같이 가실래요?”

이번에는 최 검사가 물었다.

“술은 충분히 마셨고요. 커피 한잔하면서 술 좀 깨고 싶은데…….”

안 검사의 말에 최 검사가 덥석 답했다.

“그거 좋죠! 카페 갈까요? 이 근처에 새벽까지 하는 카페 있는데.”

최 검사의 말에 태산이 눈총을 주었다.

“최 검사! 내가 술 마시러 가자고 할 땐 좋다더니 그렇게 쉽게 말 뒤집기야?”

“저 술 많이 못 마시는 거 검사님도 아시잖아요. 검사님이랑 기분 전환하러 가는 게 좋아서였지. 그냥 커피 마시러 가요.”

태산은 못 이기는 척 답했다.

“그러지 뭐.”

최 검사가 안내한 카페로 들어가 카운터 앞에서 메뉴를 고르는데 안 검사가 쇼케이스 앞을 서성인다. 태산도 안 검사의 옆에 가 섰다.

“케이크 고르려고요?”

“네, 시발 비용 좀 지불해야 할 것 같아서요.”

“…시… 발?”

태산이 분명 욕을 들은 것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하니 최 검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기분 더러워서 기분 전환하는 데 돈 좀 쓰셔야겠대요.”

“아아~”

그 시발이 그 시발 맞았나 보다.

“안 검사님, 과격해지셨는데요. 회식 자리가 진짜 거지 같았나 보네요.”

“완전 역대급이었어요.”

안 검사는 그렇게 답해놓고 허리를 굽혀 쇼케이스 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음… 생크림으로 할 것인가, 레드벨벳으로 할 것인가… 무스도 땡기는데…….”

태산도 슬쩍 끼어든다.

“치즈케이크는 어때요?”

“그것도 좋지만 역시 이럴 땐 시각적으로도 화려한 걸 먹고 싶거든요.”

고민하고 있는 안 검사에게 직원이 물었다.

“뭘로 드릴까요?”

“잠깐만요.”

상당히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는 안 검사를 보고 태산은 피식 웃었다.

“여기 있는 조각 케이크 종류별로 하나씩 다 주세요.”

안 검사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아니, 그거 저 다 못 먹어요.”

“내가 먹을 건데요?”

태산은 놀리듯이 말했다. 안 검사는 머쓱해 입을 다물었다.

계산하고 자리에 앉으니 테이블이 색색의 케이크로 가득 찼다. 태산과 안 검사는 부지런히 포크를 놀려 여러 종류의 케이크를 골고루 맛보았다.

최 검사는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질린 표정을 했다.

“두 분 단 거 정말 잘 드시네요.”

안 검사는 훨씬 풀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딱히 되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단 게 엄청 땡길 때가 한 번씩 있더라고요.”

“그렇죠?”

태산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태산은 오로지 고기가 중요한 단백질 파였다. 달달구리한 디저트 같은 건 입맛만 버려놓지 왜 먹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바른의 몸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단맛에 눈을 떴다. 강바른의 입맛이 원래 단 것을 선호하는 편인 듯했다. 게다가 불쑥불쑥 단 것이 엄청나게 땡길 때가 있는데 주로 야근하는 날같이 머리를 많이 쓰고 피로가 높아질 때였다.

태산과 안 검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야근하는 날…….”

“생리 직전에…….”

서로 전혀 다른 엉뚱한 대답을 해놓고 두 사람은 머쓱해 멀뚱멀뚱 바라만 보았다. 최 검사는 푸웁 하고 마시던 에스프레소를 뿜었다. 최 검사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깔깔 웃었다.

“아니, 그건 강 검사님이 절대 이해 못 하시죠.”

안 검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최 검사를 노려본다.

“왜, 왜요?”

“그 앞에 있는 건 최 검사가 먹어요.”

“전 단 건 별로…….”

“크림 위에 에스프레소가 뿌려져 있네?”

“…죄송합니다. 먹을게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태산은 어쩐지 인천지검 형사3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유쾌해졌다. 그때에도 안 검사는 최 검사가 눈치 없이 굴 때마다 은근히 퉁을 주며 티격태격했던 것이다.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불쑥 털어놓고 말았다.

“이렇게 다시 함께 모이니 좋군요.”

두 검사가 일제히 태산을 돌아보았다. 최 검사는 눈을 접으며 화답했다.

“저도요.”

하지만 안 검사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회식 자리에서 불편한 일이 있었다면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는 전혀 털어놓지 않는 안 검사에게 태산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홀로 부패한 동료들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을 최 검사에게 느꼈던 안쓰러움과 비슷한 감정이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요. 그래도 명색이 부부장 아닙니까? 내가 막아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막아줄 테니까.”

태산의 말에 엉뚱하게 최 검사가 감동한다.

“아~ 강 검사님이 우리 지검에 오셔서 제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실 거예요.”

안 검사는 물끄러미 태산을 보더니 갑자기 얼른 화제를 돌린다.

“와아~ 이거 진짜 맛있네요. 치즈케이크 안 시켰으면 후회할 뻔!”

최 검사가 낄낄 웃었다.

“안 검사님 쑥스러워하시네.”

안 검사가 최 검사를 홱 노려보니 최 검사가 뜨끔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난다.

“전 화장실 좀.”

최 검사가 사라진 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태산이 불쑥 물었다.

“그렇게 회식 자리 나와 버리면 앞으로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여차하면 대검 감찰부에 찌르겠다고 엄포를 놨으니 대놓고 괴롭히진 못할 거예요. 기껏해야 인사고과 가지고 더럽게 구는 정도겠지만 어차피 출세는 진즉에 포기했으니까요.”

태산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 검사가 출세를 포기한 것이 자신의 뒤를 쫓기로 결심한 탓인 것만 같아서다.

“잘 버티기만 해요. 내가 먼저 위로 올라가서 언젠가 안 검사를 꼭 끌어주겠습니다.”

안 검사는 순순히 답하지 않고 당돌하게 되물었다.

“왜요? 저랑 같이 일하는 거 불편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안 검사가 일 잘하는 것만은 분명하니까요.”

태산의 답에 안 검사는 피식 웃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도와주지 않으셔도 잘 버틸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최 검사가 돌아오자 안 검사는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 술도 꽤 깬 거 같은데 그만 들어가죠. 강 검사님, 남은 건 싸 가도 되죠?”

“그래요.”

안 검사는 케이크 상자를 손에 들고 아이처럼 달랑거리는 발걸음으로 큰길로 나갔다. 안 검사의 뒤를 따르며 최 검사가 중얼거린다.

“안 검사님, 꽤나 들떠 계시네. 술 때문인가? 아니면 당뽕?”

“…뽕?”

태산의 반문에 최진우가 낄낄 웃었다.

“마약전담반 출신 아니랄까 봐 뽕이라는 말에는 귀신같이 반응하시네요. 단 걸 많이 먹어서 들뜬 거 아니냐고요.”

“흐음…….”

태산은 애매하게 답했다. 들떴다기보다 오히려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있는 게 아닐까.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아!!”

안 검사는 어느새 대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고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쌩하니 사라졌다. 태산과 최 검사는 서로 마주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수사 기록을 검토하던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법무법인 이연의 신성식 변호사는 접대 자리에서 자신의 회사가 맡은 건이 반부패수사부에 걸려 있는 것은 없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그랬던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이연이 맡은 사건이 올라온 것이다. 비록 신성식의 이름은 없었지만 변호사 선임계에는 떡하니 이연의 변호사들이 올라가 있었다.

주임검사는 조준철, 평검사 중에서는 연차가 가장 높은 수석검사였다. 단순히 연차나 나이로만 따지면 강바른 검사보다도 앞설 것이다.

태산이 지금까지 이 사건을 모르고 있다가 결재 단계에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협조적으로 나올 리 없다고 판단한 김성근 부장이 일부러 태산을 빼고 주임검사에게 직접 사건을 배당했다는 얘기였다. 다른 건들에 끼워서 결재를 올리면 대충 보고 승인하리라고 생각했을까?

태산은 당장 주임검사를 호출했다. 조준철 검사는 찔리는 것이 있는지 쭈뼛거리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태산은 수사 기록을 조 검사에게 내밀며 물었다.

“이 사건 말입니다. 어떻게 불기소처분 하게 된 건가요? 내가 볼 때는 명백히 기소해야 하는 사건인데.”

“아, 그게… 제 생각에는 어차피 법원으로 가도 무죄 나올 것 같아서…….”

정수기로 유명한 기업의 회장이 치매를 앓고 있는 자신의 모친을 회사에 고문으로 등재하고 급여 명목으로 거액의 연봉을 지급했다. 누가 봐도 회삿돈을 빼돌리려는 의도인데 이게 무죄를 받을 것 같다고?

“내가 볼 때는 명백히 횡령인데요. 설사 무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해도 법리에 다툼이 있을 수 있는 사건이라면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죠. 불기소가 말이 됩니까?”

“담당 변호사와 여러 차례 통화하면서 면밀히 검토해 판단한 겁니다. 지금 잠깐 기록 좀 들여다보고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담당 변호사와 여러 차례 통화했다는 말에 태산은 위화감을 느꼈다. 변호사가 피의자와 함께 검찰에 출두해 대변을 했다는 것도 아니고 주임검사와 전화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나누었다는 건가?

“통화했다는 담당 변호사가 대체 누굽니까?”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이 조 검사의 얼굴을 스쳤다. 태산은 확신을 가지고 추궁했다.

“신성식입니까?”

* * *

“신성식입니까?”

신성식은 선임계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았지만 태산은 확신했다. 직접 후배들을 찾아와 로비를 하면서도 변호사 선임계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것은 이른바 전화변론 수법이 분명하다.

전화변론은 전관 변호사들이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고 사건을 수임한 후에 주임검사나 판사에게 전화해 수사나 재판에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선임계를 제출하지 않는 이유는 보통 신고하지 않고 고액의 수임료를 받기 위해서이거나 소득에서 누락시켜 탈세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신성식의 경우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전관 변호사는 1년간 퇴임직전에 근무했던 기관에 걸린 사건을 수임할 수 없다. 중앙지검에서 퇴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성식이 중앙지검에 걸린 사건을 수임하게 되면 변호사법 위반이 된다. 그러니 선임계를 내려야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조준철 검사는 답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더니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아무리 상사라도 부하가 진행하고 있는 수사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건 수사 개입이 아니라 지휘죠. 부하의 수사를 존중하기 때문에 불러서 이유를 묻는 겁니다. 내가 수사에 개입하려고 했다면 왜냐고 묻지도 않겠지요. 당장 구속기소 하라고 호통을 쳤지.”

태산의 말에 조 검사가 당황해서 되묻는다.

“구속기소요? 아니, 구속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사회 지도층 인사이고 체면도 있으신 분인데 이런 건으로 도주를 하실 리도 없고…….”

“알아보니 대부업 등록도 안 했으면서 사채업자들 쩐주 노릇까지 해서 형사7부에도 사건이 하나 걸려 있는 것 같던데요. 도주를 안 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고 증거인멸 우려가 있으니 구속 이유는 충분합니다.”

태산은 그렇게 몰아붙이며 다시 한번 조 검사를 추궁했다.

“전화변론으로 조 검사를 구워삶은 변호사가 나도 설득할 수 있는지 한번 봅시다. 누굽니까?”

조 검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었다.

“좋습니다. 말로 하지 못하겠다면 구두변론 관리 대장에서 관련 부분 제출하도록 하세요.”

구두변론 관리 대장은 선임계를 제출한 변호사의 전화변론이나 방문변론을 서면으로 기록해 보관해 둔 것이다. 전관변호사의 특혜를 막기 위해 검찰이 고안한 개혁책이었다.

“그것이…….”

조 검사가 난감해 중얼거린다.

“왜요? 제출 못 하겠습니까?”

조 검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못 하겠지요. 선임계를 제출한 적도 없을 테니.”

태산은 바로 수화기를 들고 내선으로 실무관에게 지시했다.

“법무법인 이연의 신성식 변호사 연결해 주세요.”

“부부장님!”

조 검사가 화들짝 놀라 나섰다. 하지만 태산은 휙휙 손사래를 쳤다.

“정호성 회장 불기소처분 건은 반려합니다. 나가보세요.”

조 검사는 흙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집무실을 나갔다.

곧바로 신성식 변호사가 연결되었다.

-예, 신성식입니다.

태평한 목소리였다. 중앙지검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니 충성스러운 후배의 사건 처리 보고 전화일 것이라 여기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그머니 가학심이 솟구쳤다.

“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 강바른 부부장입니다.”

이름을 밝히자마자 신 변호사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바뀌었다.

-자네가 무슨 일인가?

“조 검사에게 다 들었습니다. 정호성 회장 사건 전화변론 하셨다면서요?”

신 변호사는 끄응 앓으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미 다 들었다고 눙치고 들어가니 차마 부정하지 못한다.

“후배들 살뜰히 챙기는 척하시더니 대가는 톡톡히 받아내시려나 보네요. 꼼수 쓰지 말고 앞으로는 선임계 내시고 정당하게 변호하세요. 또다시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변호사법 위반으로 입건하겠습니다. 그리고 정 회장은 기소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태산은 용건만 말하고 끊으려 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신 변호사의 노성이 귀를 잡아챘다.

-물정 모르는 햇병아리 검사가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구먼. 이봐, 강바른이. 이 사건 법원까지 가봐야 어차피 무죄야. 고문에게 급여를 지급한 것이 대체 뭐가 잘못되었나? 치매 노인이라고 하지마는 후에 진단받은 것이지 고문 등재 당시에는 멀쩡했다고. 게다가 그 급여를 정 회장이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증거도 없어. 이 사건 절대 유죄 인정 안 돼.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불기소하라고.

확실히 수사의 맹점을 잘 포착한 노련한 변론이었다. 하지만 태산은 물러나지 않았다.

“등재 당시에는 치매가 아니었다 해도 치매 직전이었던 노인이 회사 경영에 얼마나 중요한 조언을 해주었을지 의문이네요. 심지어 연봉 1억 가까이를 받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걸 정당한 급여 지급으로 인정한다면 법원의 판단에도 의심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만약 무죄가 나온다면 유죄가 나올 때까지 상소할 생각입니다.”

-이, 이봐!

신 변호사가 당황하여 소리를 높였지만 태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불기소처분이나 무죄판결 받아줄 수 있다고 장담하고 거액의 수임료를 받으셨다면 돌려주셔야 할 겁니다. 참, 청탁 비용으로 쓴다고 추가로 청구하신 금액이 있으면 그것도 잘 챙겨서 돌려주셔야겠네요.”

-야, 강바른!

신 변호사의 노성이 귓가를 울려 태산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 * *

“아니, 하늘 같은 선배한테 전화질하지 말고 선임계 내고 와서 똑바로 변호하라고 했다잖습니까? 내가 그 때문에 선배님한테 얼마나 깨진 줄 압니까? 지금 떠올려도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니까요. 진짜 강바른 이 새끼 완전 또라이 아니요? 그렇게 할 것까지 뭐 있냐고요. 관행으로 다 하는 건데.”

김성근 부장은 얼굴까지 붉히며 열을 올렸다.

서울중앙지검 인지부서 부장들이 새로 부임해 온 인원을 포함해 서로 친목을 다지고 고충을 나누는 자리였다. 김 부장은 그 자리에서 다루기 힘든 꼴통 부하를 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부장들은 남 얘기 듣듯 그저 낄낄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는 그런 놈이 내 밑으로 안 들어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일말의 안도감이 숨어 있었다.

“폭탄을 떠안으셨네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전에 그 친구 공적인 자리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아주 말도 못 하게 오만하더라고요.”

강력부장 김헌상은 아주 대놓고 혀를 찬다. 청와대 전국 강력부장 초청 오찬에서 강바른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던 것이다.

“참 특이한 친구네요. 보통은 뻣뻣한 스타일이라고 해도 고려해 보겠다 정도로 답하는 성의는 보이는데.”

반부패수사2부의 원신영 부장은 오히려 은근한 호기심을 보였다.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사회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니까요. 술자리에서 선배님이 용돈 좀 집어준 거로 눈을 부라리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놈이니까.”

“어휴~ 그건 김 부장님이 잘못하셨네요. 요즘 젊은 검사들은 그런 회식 자리 별로 안 좋아해요. 술 먹이면서 용돈 주는 것보다 빨리 퇴근시켜주는 걸 더 좋아한다고요.”

원 부장이 웃으며 타박하니 김 부장은 머쓱하게 답했다.

“그래도 팀이 단합을 하려면 같이 모여서 으쌰으쌰 하고 술도 좀 마시고 그래야죠. 원 부장님은 회식 같은 거 안 합니까?”

“우린 술자리 안 가지고 공연 보러 갔다 왔어요. 예술의 전당에서 마침 보고 싶던 오페라 공연이 있어서.”

김 부장은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투로 삐딱하게 말했다.

“그런 거로 단합이 됩니까?”

“왜요? 젊은 검사들은 좋아하던데.”

“그래도 상사가 부하들을 휘어잡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너무 애들 좋다는 대로 풀어만 주면 결정적인 경우에 지도력을 행사하기 힘들어요.”

원 부장은 빙그레 웃었다. 원 부장이 아무 대꾸 없이 웃기만 하니 김 부장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원 부장은 김 부장보다 기수도 나이도 앞섰다. 지청을 전전하다 운 좋게 중앙지검으로 한번 올라온 여자 부장이다 보니 얕보는 마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가르치듯 말해 버렸지만, 주제넘는다고 발끈해 문제 삼는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김 부장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쭈뼛거리니 원 부장이 선선히 답했다.

“네, 명심하죠.”

김 부장은 그제야 안도했다. 웃는 표정도 그렇고 딱히 어투에서도 뾰족한 가시는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로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고 넘기는 것 같다.

역시 얼굴도 미인이고 여자답게 부드러운 면이 있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는 김 부장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맹탕이니 지방만 전전했지 하며 만만하게 보는 마음도 커졌다.

“그 친구 데리고 있기 불편하시면 저 주시죠?”

원 부장이 불쑥 뱉은 말에 김 부장이 바로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예?”

“강바른 부부장 저 달라고요. 우리 부에서 데려갈 테니까.”

진심인가 떠보려고 김 부장은 속에도 없는 말을 주절거린다.

“그렇지만 부하가 물건도 아니고 이미 보직이 정해진 마당에 막 주고받을 수는 없죠.”

“왜 안 되나요? 지검 소속 검사들은 간부들이 의논해서 보직을 정할 수 있고 중간에 보직 이동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닌데요. 차라리 인사이동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빨리 교체하는 게 적응도 쉬울 테고요.”

“강바른의 이번 인사에는 청와대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검사장님이 승인하실까요?”

“어차피 같은 반부패수사부고 1부에서 2부로 옮기는 것뿐이니 검사장님도 크게 반대하진 않으실 거예요.”

원 부장은 은밀한 톤으로 김 부장의 손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우리 둘 사이에 이야기만 잘되면 문제없는 거 아니겠어요?”

김 부장은 솔깃했지만 마지막으로 떠본다.

“그럼 2부에서 부부장 하나를 대신 데려와야 할 텐데 반발이 없겠습니까?”

“대놓고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거부하지도 않을 거예요. 지도력 있으신 김 부장님 밑에서 일하게 된다고 하면 속으론 반기지 않겠어요?”

지도력 운운하며 가르치려 했던 것에 대한 가시가 담겨 있었지만 워낙 살가운 태도로 스스럼없이 말하니 김 부장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오히려 은근한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속없이 으쓱하는 것이다. 하기야 원 부장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야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출세에도 더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김 부장은 거의 다 넘어간 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원 부장님은 그 친구 데려가서 어쩌시게요? 잘 다루실 수 있겠습니까?”

“잘 다룰 자신은 없지만 그냥 무난하게 지내면 별문제 있겠어요? 김 부장님이 워낙 거슬려 하시니까 제가 좀 도와드리려는 거예요. 저한테 빚 하나 지셨어요.”

“어이쿠,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김 부장은 헤벌레해서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원 부장은 빙그레 웃었다.

언론을 통해 지켜본 그간의 활약이나 김 부장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들어도 강바른은 꼭 데려오고 싶은 부하였다. 하지만 딱히 필요 없는 문제아를 떠맡아주는 것처럼 가장해 김 부장에게 빚을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 안 듣는 놈이 가라고 한다고 순순히 가겠습니까?”

강력부장 김헌상이 삐딱하게 말했다. 원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강바른 검사는 제가 설득해 보죠.”

* * *

-검사님, 반부패수사2부 원신영 부장님 호출입니다.

김민하 실무관이 내선으로 알려와 태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2부 부장이 왜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2부요? 1부가 아니고?”

-네, 2부입니다. 1114호실로 가시면 됩니다.

김 실무관은 혹시 모를까 봐 부장실 호수까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태산은 집무실에서 나와 11층으로 올라갔다. 부장실로 들어서니 비서관이 고개를 든다.

“반부패수사1부 강바른 부부장입니다. 부장님이 호출하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아,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세요.”

집무실 문으로 성큼 다가선 태산은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집무실 안에서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원신영 부장이 돌아보며 빙긋 웃더니 살갑게 말한다.

“왔어요?”

마치 원래부터 잘 알던 사람을 대하듯 다정한 말투였다.

“거기 앉아요.”

원 부장은 소파를 권하고는 자신도 태산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주 앉아 눈을 맞추는 원 부장을 보며 이런 경우 보통 상사들은 상석에 앉지 않나 생각하는 태산이었다.

“차라도 한잔할까요? 뭐 좋아해요?”

“커피면 됩니다.”

원 부장은 직접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집무실 문밖을 빼꼼히 내다보면서 비서관에게 지시했다.

“박 비서관, 여기 커피랑 홍차 한 잔씩 내와줘요.”

자리로 돌아온 원 부장은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고 잠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태산은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원 부장은 태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클래식 좋아해요?”

“잘 모릅니다. 일할 때는 집중을 해쳐서 음악은 안 듣는 주의고요.”

“자주 듣고 귀에 익으면 오히려 집중력을 높여주기도 해요. 멘탈 관리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취미 삼아 한번 들어봐요.”

그러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치는 것이다.

“그렇지. 내가 좋은 음반으로 골라서 선물해 줄게요. 초심자에게는 뭐가 좋으려나…….”

원 부장은 즐거운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태산은 내심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검사들 중에서 이렇게 부드러운 인물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만면에는 인자한 미소가 떠나지 않고 부하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고 예의를 차리며 어디까지나 고상한 품격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검사보다는 판사나 교수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물론 속까지 말랑말랑할 것인가, 의외로 속은 강단이 있는 사람인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비서관이 차를 들여오고 잔이 거의 비어가도록 원 부장은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았다. 얼마 전 부하들과 다녀온 오페라 공연 이야기, 여행 가서 공수해 온 향이 좋은 차 이야기 그런 것들을 즐겁게 늘어놓을 뿐이다.

태산은 어느 타이밍에서 원 부장의 이야기를 끊고 자신을 호출한 용건을 물어봐야 할까 바쁘게 가늠하고 있었다.

“내 정신 좀 봐. 강 부장은 들어봤자 지루하기만 할 이야기만 늘어놓았네.”

태산은 원 부장이 사용한 호칭에 내심 놀랐다.

부부장은 보통 간략히 부장으로 칭하기는 하지만 평검사들이나 그렇게 부를 뿐 부장검사가 부하에게 그러한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과 같은 직급도 아닌데 부하를 높여 불러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태산의 경우 이례적으로 빠른 진급이었기 때문에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평검사 중에서도 부장은커녕 부부장이라는 호칭조차 아끼는 인간들이 있다.

하지만 원 부장은 부하인 태산에게 아무렇지 않게 부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평등한 조직문화를 지향하는 사람일까? 그렇다 해도 이 정도면 다른 부장들에게는 부하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조직의 기강을 해이하게 한다고 눈총을 받을 법도 한데.

어쩌면 이 사람도 서울중앙지검에서 상당한 아웃사이더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태산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강 부장, 혹시 나랑 같이 일해볼 생각 없어요?”

원 부장이 불쑥 꺼낸 말을 태산은 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반부패수사 1부의 김성근 부장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 탐이 나서요. 내가 데려오고 싶다고 졸랐더니 김 부장이 강 부장 말을 들어보고 결정하자고 해서.”

아주 아름답게 포장한 말이었지만 상황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김 부장님이 저에 대해 좋게 얘기하셨을 리가 없는데요. 골치 아프니 좀 데려가라고 하시던가요?”

원 부장은 빙긋 웃었지만 실제로 김 부장이 어쨌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의사를 다시 확인해 준다.

“내가 데려오고 싶다고 제안했던 건 사실이에요.”

“쫓아낸다고 조용히 쫓겨 가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요. 거절하겠습니다.”

태산은 단칼에 잘라내고 일어서려 했다. 그때 지금까지 듣던 중 가장 단호한 목소리가 원 부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미련한 짓 하지 말아요. 김 부장과의 자존심 싸움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강 부장이 해야 할 일을 차질 없이 수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계속 그렇게 상사한테 발목 잡히고 다퉈가면서 제대로 일할 수 있겠어요?”

태산은 멈칫했다. 태산이 반부패수사부에서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 듯한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수사를 팍팍 밀어줄 만한 힘은 없어요. 라인을 잘 타서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도 아니라. 하지만 적어도 부하에게 압력은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압력도 할 수 있는 한 내 선에서 최대한 막아내도록 노력할 거예요.”

원 부장이 자신만만하게 제안했다.

“강 부장이 원하는 수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주겠다, 그거 하나만은 약속합니다.”

태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타 부서에서 기피하는 불편한 부하인데 저를 데려가서 부장님이 얻으시는 건 뭡니까?”

“꼭 얻는 게 있어야 하나요? 검사로서의 직업적인 정의감으로 훌륭한 후배를 도와주고 싶은 것뿐인데.”

원 부장의 답에 태산은 딱히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 부장은 피식 웃어버리고는 실토했다.

“좋아요. 굳이 이유를 들자면… 부하의 실적이 곧 내 실적 아니겠어요? 확실히 실적을 올려줄 유능한 부하를 확보하기 위해서죠. 마침 대통령님께서도 대단히 기대하고 있는 인재라고 하고.”

원 부장의 표정이 이내 장난스럽게 변한다.

“덤으로 오만한 직장 동료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아주 속이 시원하겠고요.”

중앙지검의 아웃사이더일 거라는 짐작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그건 걱정 말아요. 당연히 담당 수사관과 실무관도 함께 이동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태산은 고민하다가 어렵게 물었다.

“한 사람 더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뜻밖의 말에 원 부장이 되물었다.

“누굴 말이죠?”

“최진우 검사라고 있습니다.”

“아아~ 강 부장의 열렬한 추종자?”

원 부장이 웃음기를 띠며 물었다. 대체 무슨 소문을 들었기에. 태산은 머쓱해서는 부정했다.

“그냥 전에도 같은 부서에서 일한 적이 있는 동료라 손발을 맞춰 일하기에 편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잖아도 1부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저마저 이동해 버리면 더 힘들어질까 봐 걱정도 되고요.”

자신이 김 부장에게 찍힌 마당에 자신에게 동조했던 최 검사라고 김 부장의 보는 눈이 좋을 리 없다.

“좋아요. 김 부장과 얘기해 보죠.”

원 부장은 흔쾌히 말했다. 원 부장 역시 자신의 스타일에 불만을 가지고 비협조적인 부하들이 있었으므로 이 기회에 맞바꾸면 모두가 만족하는 트레이드가 될 것이었다.

“요구 사항은 그뿐인가요?”

“예.”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 *

“현재 우리 검찰은 대외적으로 무리한 강압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오해를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검찰이 정권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공정한 수사를 하고 있다는 방증으로써…….”

서울중앙지검장 신승렬은 단상 앞에서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산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금방이라도 하품이 나올 듯했다.

바쁜 검사들을 별 이유 없이 불러놓고 별 내용도 없는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은 최근 검찰에 대한 대외적인 여론이 영 좋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지검은 최근 대통령의 최측근인 법무부 장관에 대한 무리한 수사를 펼치다 한계에 직면했고 여론은 검찰이 청와대의 강한 개혁요구에 저항하며 법무부장관을 쳐내려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민감한 상황 가운데 지검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피의자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 가득했던 여론은 검찰의 강압수사를 강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신승렬 검사장의 부임 이후 피의자가 수사 중 자살한 것이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였다. 대중이 충분히 강압수사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 검사장은 해명하고 반성하기는커녕 검찰의 수사에 대한 외압이라며 발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성역 없이 수사하는 정의로운 검찰이라는 역할에 취해 바쁜 검사들을 강당에 불러다 놓고 쓸데없는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으니 불편하고 지루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비록 구속하지는 못하였지만 현 정권의 최측근 비리를 수사해 기소하였다는 것은 권력으로부터 검찰의 진정한 독립을 이뤄낸 쾌거이며 그야말로 ‘서초동의 봄’이 찾아왔다고 할…….”

계속되는 개소리에 태산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말았다. 너무 대놓고 하품을 한 것일까? 신 검사장이 멈칫하다가 말을 놓치고 말았다.

“…에… 그러니까 서초동의 봄이…….”

다시 말을 이어가려 해보지만 한번 맥이 끊기니 좀처럼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신 검사장은 미간을 모으더니 갑자기 태산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

“거기! 강바른 부부장인가? 검사장이 말하고 있는데 하품이나 찍찍 해대고 뭐 하는 짓이야? 잠 안 자고 왔나?”

태산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어젯밤 늦게까지 야근을 해서 영 피곤하네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으니 다른 용건이 없다면 그만 자리를 끝내주셨으면 합니다.”

태산의 당돌한 답에 강당에 앉은 이들이 술렁거렸다. 간부검사들은 눈을 부라리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지만 젊은 평검사들 중에는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며 은근히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최진우 검사 역시 눈을 반짝거리며 태산을 올려다본다.

신 검사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애써 분을 참고 입을 열었다.

“지금 밖에서는 우리 검찰을 공격하지 못해 안달하는데 우리끼리 똘똘 뭉쳐 단합해도 될까 말까 할 판에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일처럼 태평할 수가 있나.”

“그건 검사장님의 생각이시고 검찰 내부에서도 이번 수사에 대한 의견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그럼 나와 달리 생각한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보다 못한 제1차장 검사가 급히 연단에 올라 속삭였다.

“검사장님, 무시하십시오. 검사장님과 의견을 나눌 급이 안 됩니다.”

신 검사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저지하는 차장 검사를 밀어냈다.

“자네는 가만있어. 난 일개 평검사의 의견이라 해도 무시한 적이 없는 사람이야. 한번 들어보자고.”

신 검사장이 태산을 향해 물었다.

“그래. 말해봐. 자네 의견은 뭔가?”

* * *

“그래. 말해봐. 자네 의견은 뭔가?”

검사장이 오기를 부리니 태산도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태산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내놓았다.

“검사장님께서는 법무부장관을 기소한 일을 두고 ‘서초동의 봄’ 운운하시는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소 전부터 언론에 대대적으로 피의 사실을 공표한 것부터가 위법의 소지가 있는데 그 난리를 치며 기소한 내용도 애초에 언론플레이 했던 것에 비하면 사소하기 그지없고요. 오죽하면 법원에서도 구속영장 발부는 안 된다고 몇 번을 돌려보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무슨 대단한 개가를 올린 양 말씀하시니 얼떨떨해서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요란을 떨며 천지 사방을 뒤집어놓고 겨우 쥐 한 마리 잡은 꼴인데 말입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닙니까? 쓸데없는 일에 인력을 과하게 낭비해 진짜 써야 할 곳에 쓰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부들부들 떨며 듣고 있던 신 검사장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살아 있는 권력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일이 그렇게 쉬운 건 줄 아나?”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까지는 대단히 어려운 일인 줄 알았습니다. 검찰은 오랫동안 권력에 고개를 조아리고 시녀 역할을 해왔으니까요.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은 이런 사소한 일로 정권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걸까요? 유독 약한 권력에만 달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란 말입니다.”

“뭐, 뭐야?!”

신 검사장이 노성을 질렀지만 태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러면 다음 정권에서는 이놈들은 세게 나가야 말을 듣는 놈들이니 초장부터 목줄을 확 휘어잡아야 된다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거침없는 태산의 발언에 김성근 부장이 더 초조해서 원신영 부장을 채근했다.

“아니, 저 인간이 미쳤나? 원 부장님, 좀 말려봐요.”

하지만 원 부장은 직속 부하가 큰 사고를 치고 있는데도 태연하기만 했다.

“제가 말린다고 듣겠어요? 저야 김 부장님 말씀처럼 지도력이 약한 사람 아닙니까? 잔소리를 해도 귓등으로 듣고 흘려 버리더라고요.”

그제야 김 부장은 원 부장의 지도력 운운하는 얘기가 뼈가 있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별수 없이 쓴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비판은 겸허하게 받아들이시고 개혁할 부분이 있다면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마하니 검찰이 개혁요구를 받아들이기 싫어 정권을 공격한다는 의혹이 사실은 아니리라 믿고 싶습니다.”

비록 의견이 다르다고 하나 마지막으로 던져놓은 태산의 말은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었다. 부들부들 떨며 태산을 노려보고 있던 검사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한 오명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지검 검사들이 더욱 청렴하고 투명하게 업무를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를 당부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이게 했습니다. 용건은 끝냈으니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죠.”

검사장은 그렇게 말을 맺고는 불쾌한 기색으로 강당을 나갔다. 차장들이 다급히 검사장을 따라 뛰어나갔다.

검사장과 차장들이 강당을 나가자 검사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에서 태산을 향해 따가운 시선이 쏟아진다. 대부분은 적대적인 시선이었고 그중 일부는 경외감을 느끼는 눈빛이었다.

수많은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원 부장이 다가와 짐짓 화가 난 얼굴로 채근했다.

“강 부장, 나랑 얘기 좀 해요.”

그러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먼저 강당을 나간다. 태산이 원 부장의 뒤를 따르니 최진우 검사도 부랴부랴 일어나 따라왔다. 최 검사가 태산의 옆에 바짝 붙으며 속삭였다.

“오늘 좀 깨지시겠는데요. 그래도 소신 있는 발언 멋있으셨습니다.”

최 검사가 슬그머니 엄지를 들어 보인다. 태산은 쓰게 웃었다. 제 기분에 따라 막 쏟아낸 발언이었다. 그로 인해 원 부장이 곤란해지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깨진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에 내려 1114호 부장실 앞에 섰다. 최 검사는 원 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원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장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최 검사는 원 부장의 등 뒤에서 태산에게 은밀히 파이팅 제스처를 해 보이더니 1119호 검사실 쪽으로 바쁘게 사라졌다. 태산과 함께 반부패수사2부로 이동한 후 새로 배정받은 검사실이었다. 태산도 송봉근 계장, 김민하 실무관과 함께 바로 옆인 1118호실로 옮겼다.

태산은 원 부장의 뒤에 서서 1119호로 쏙 들어가는 최 검사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원 부장이 부장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뒤를 흘낏 돌아보더니 물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요? 일하러 안 가요?”

“예? 얘기 좀 하자고 하셔서…….”

태산이 어리둥절해 말끝을 흐리니 원 부장이 눈꼬리를 휘면서 웃는다.

“강 부장도 의외로 눈치가 꽝이네.”

원 부장이 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그래요. 그 김에 좀 쉬었다 합시다. 들으나 마나 한 얘기 듣느라고 귀 고생도 했는데.”

원 부장도 검사장의 발언이 영 불편했었다는 뉘앙스였다. 한 소리 들을 것으로 생각했던 태산으로서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집무실에 들어가 소파에 앉자마자 원 부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빨리 빼내준 거예요. 내가 혼내는 제스처라도 취해야 강 부장에게 화살이 조금이라도 덜 가죠.”

“죄송합니다.”

곤란하게 만들었는데도 감싸주려 애쓰는 원 부장을 보니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들어 태산은 고개를 숙였다. 원 부장은 피식 웃었다.

“죄송한 사람이 그렇게 대놓고 검사장을 들이받아?”

태산은 곤란해서 입을 다물었다.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원 부장이 어떤 입장에 처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타박하는 원 부장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죄송할 거 없어요. 아무리 상사라지만 부하가 자기 소신을 개진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죠. 검사장이 요즘 상당히 오버하는 것도 사실이고.”

원 부장이 슬그머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반가운 마음에 태산도 슬쩍 맞장구를 쳤다.

“검찰 안에서는 비교적 개혁적인 인물이라는 평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행보가 저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태산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신승렬 검사장은 인천지검 우현중 검사장과는 정적이었으므로 우 검사장을 쳐내는 데 신 검사장을 이용한 바 있었던 것이다. 과거 만들어두었던 청탁 장부를 최 검사를 통해 신 검사장에게 넘겼고 신 검사장은 재빨리 반부패수사부를 투입해 우 검사장을 찍어냈다.

대통령이 태산을 부부장으로 전격 승진 시켜 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로 인사이동 시킨 것도 신 검사장의 동의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신 검사장은 기본적으로 비리 정치인을 강력히 수사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방침에 찬동했을 테고 정적을 제거할 단서를 던져준 태산에게도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검찰 고위직 중에서 비교적 개혁적인 성향이라는 것뿐이죠. 대통령과 정치적 성향이 같은 것도 아니고. 검찰이 워낙 서열이 철저하고 조직을 지키려는 관성이 강하다 보니 아무리 개혁적인 리더라 해도 검찰 자체를 개혁하라고 하면 반발하게 마련이에요.”

원 부장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사람의 그릇이 드러나게 되죠. 신 검사장은 그릇에 비해 너무 높은 자리에 올랐어요. 소인배가 분수에 맞지 않은 큰 권력을 가지다 보면 반드시 오버하게 되거든요. 자기는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정의로운 검사라는 걸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게 다른 쪽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건 생각 못 하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거죠. 햇병아리 평검사한테나 어울릴 정치 감각이건만…….”

원 부장은 혀를 쯧쯧 찼다.

“햇병아리 평검사조차도 구체적인 사안을 검토하지 않고 무조건 구속기소 하겠다 이러면 지도검사한테 욕먹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에요.”

태산의 말에 원 부장이 쿡쿡 웃는다.

“신 검사장 같은 사람이 이만한 자리에 올랐다는 건 지금 대통령 주위에 쓸 만한 인물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죠. 대놓고 반대하고 칼 겨눌 사람들을 거르고 거르다 보니 직급에 맞는 인물이 저이밖에 없어 임명된 것인데 자기도 그걸 아니까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과도하게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거예요. 아이러니한 일이죠.”

그렇게 말해놓고 원 부장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하기야 대통령 주위에 쓸 만한 인물이 많았으면 나 같은 사람이 여기까지 올라올 일도 없었을 테지만.”

지청을 전전하던 여자 부장이 요직에 앉은 것에 대해 주변에서 얼마나 입방아가 많을지 짐작이 되는 말이었다.

아직 함께 일한 시간이 짧고 지금 처리하고 있는 사건들도 전임자가 수사하던 것을 인계받은 것뿐이었지만 그동안 겪은 원 부장의 인상은 독특했다.

처음 약속한 대로 부하의 수사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도 않았다. 대외적으로 태산에게 다루기 힘든 부하라는 낙인이 찍힌 것을 핑계로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태산으로서는 사사건건 다투는 상사보다야 훨씬 편하긴 했지만 특이한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장검사는 휘하의 부하들을 얼마나 확실히 휘어잡아 자신의 치적에 활용하느냐로 능력이 증명된다. 이 정도로 부하를 풀어준다는 것은 소신도, 능력도 없어 부하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원 부장의 생존 비결인지도 모른다.

안소영 검사가 젊은 여검사의 고충에 대해 은연중에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은근한 무시와 갖은 성희롱들. 태산은 지금 새삼 그 얘기를 떠올렸다.

지금도 상당한 미인인 원 부장은 젊었을 때는 더 돋보이는 미모였을 테고 젊은 미인 검사가 겪었을 더러운 꼴과 갖가지 유혹들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 것들에 대응하며 만들어진 처세술일 테다.

원 부장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아무것도 모르는 맹탕인 것처럼 행동하며 똥물에 발을 담그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출세와는 거리가 멀지만 크게 눈 밖에 나지 않았던 행보가 지금의 원 부장을 이 자리까지 끌어올렸는지도 모른다. 자기 의지를 분명히 내보이는 타입은 아니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 태산의 판단이었다.

태산이 그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듣고 있으니 원 부장은 퍼뜩 감상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검사장 연설 듣느라 피곤했을 사람한테 내 연설까지 듣게 해서 미안하네요. 참, 온 김에 이거 가져가요.”

원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 태산에게 건네주었다. 클래식 CD였다.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예요. 이건 차이코프스키 작품을 모은 건데 들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도 선물해 줄게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원 부장이 클래식 CD를 선물해 주겠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감사합니다.”

태산은 CD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강 부장, 주말에 시간 되나요?”

집무실로 불러들인 원신영 부장이 대뜸 물어 태산은 얼떨떨하게 답했다.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그래요? 혹시 골프 좀 쳐요?”

태산의 골프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사업을 하면서 접대차 사람을 만나게 되면 골프를 치지 않을 수가 없어 배운 것인데 의외로 상당히 재능이 있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답했다.

“오래 쉬기는 했습니다만… 칠 줄은 압니다.”

“아~ 다행이다. 그럼 나 대신 골프 모임 좀 나가줘요?”

“예?”

태산이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주말에 부하 직원 산행에 데려가는 상사도 아니고 쉬는 날 골프 모임에 부하를 불러낸단 말인가. 게다가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대신 가라니.

불만스러워하는 기색에 원 부장은 곤란한 얼굴로 재차 부탁했다.

“3차장님 휘하의 인지부서 부장들 골프 모임이에요. 내가 그런 자리는 좀 불편해서. 골프를 못 치기도 하고요. 표면적으로는 참석이 자유로운 사적인 자리라지만 실질적으로는 반쯤 공적인 자리라 아예 빠지기도 그래요. 강 부장이 대신 가주면 훨씬 마음이 덜어지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원 부장의 눈빛에 짓궂은 장난기가 언뜻 스치는 것을 태산은 놓치지 않았다.

원 부장은 정말로 골프를 못 치는 것일까? 아니면 태산이 대신 모임에 나가 판을 깨놓고 오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다시는 그런 부담스러운 자리에 부르지 못하도록.

3차장 휘하 인지부서 부장들 모임이면 반부패수사1부 김성근 부장도 참석할 테니 태산으로서도 썩 편한 자리는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태산의 답에 원 부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부탁해요. 다음에 보답은 톡톡히 할게요.”

* * *

주말, 용인의 한 골프장 클럽하우스 라운지에 모여 있던 중앙지검 부장들은 강바른 검사가 들어서자 당황하여 웅성거렸다.

“저 자식이 여기 왜 온 거야?”

김성근 부장이 가장 발끈하여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설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다른 일이 있어서 왔겠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경제범죄형사부 부장 이복만이 김 부장을 달랬다.

이곳에는 제3차장 휘하 부장들 중에서도 반부패수사부, 경제범죄형사부, 공정거래조사부, 방위사업수사부 부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판부와 형사부를 제외한 인지부서 부장들만 따로 모인 것이다.

경찰이 송치한 사건을 받아 수사하는 형사부와 수사를 끝낸 사건의 재판을 맡아보는 공판부와는 달리, 인지부서는 직접 혐의를 포착하여 사건을 수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타 부서들보다 힘이 있는 곳이었다.

김 부장은 이 부장의 만류에 끙 하고 못마땅한 신음을 내며 자리에 앉았지만 강바른 검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입구에 서서 라운지 안을 둘러보던 강 검사가 갑자기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부장들은 더욱 당황했다.

못 본 척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강 검사는 바로 테이블 앞까지 다가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원신영 부장님이 오늘 대신 참석하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부장들은 흠흠 헛기침만 하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특히 김 부장은 대놓고 자리에 없는 원 부장을 탓했다.

“아니, 못 오면 못 온다고 하면 되지. 뭐 하러 부하를 대신 보내? 이 자리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릴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무시하셔서가 아니라 이 자리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저라도 대신 나가 좋은 말씀 듣고 오라고 보내셨습니다. 다행히 부부장인 제가 골프를 조금 쳐서요.”

태산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빈자리에 떡하니 가 앉았다. 김 부장은 기가 차서 쯧쯧 혀를 찼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원 부장이 워낙 눈치가 없잖습니까?”

“없는 건지 없는 척하는 건지 원.”

“다음에는 그냥 원 부장 부르지 말고 우리끼리 봅시다.”

원 부장의 부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들으라는 듯이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는 부장들이다.

이래서 원 부장이 자신을 대신 보낸 것일까? 사정이 있어 빠진다고 하면 때마다 나오라고 계속 성화를 하겠지만 한 번 크게 학을 떼고 나면 다신 오라 가라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창밖으로 펼쳐진 푸른 잔디를 바라보면서 딴청을 하고 있었지만 태산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뭔 얘기들을 하느라고 사람이 오는데도 몰라?”

그때 김진욱 차장검사가 부장들에게 다가오며 웃음 섞어 타박했다.

“차장님, 오셨습니까?”

부장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모였나?”

김 차장은 자리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러다가 태산을 발견하고는 눈을 흡 뜬다. 그러고는 떨떠름하게 묻는 것이다.

“자네는 여기 왜?”

검사장 발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반기를 들었던 장본인이니 김 차장이 못 알아볼 리 없다.

“원 부장님이 보내셨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김 차장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아는 척을 한다.

“김 부장 아닌가? 라운딩 나왔나?”

검사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신성식 변호사가 김성근 부장을 보고 반갑게 다가오고 있었다.

“선배님! 이것 참 반가운 우연이네요.”

김성근 부장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두 손으로 신 변호사의 손을 잡았다. 이미 퇴직을 했음에도 평소 차장님, 차장님 하더니 그래도 진짜 차장 앞에서는 차마 그 호칭은 쓰지 못하는 것일까? 태산의 마음속에서는 이게 정말로 우연일까 새록새록 의심이 일었다.

“차장님 모시고 라운딩 나왔습니다.”

김 부장의 말에 신 변호사가 김 부장의 어깨 뒤를 넘겨다보더니 차장에게로 다가갔다.

“김진욱 차장님이시지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법무법인 이연의 신성식입니다. 퇴직 전에 김 부장이 제 밑에 있었습니다.”

신성식은 재빨리 명함을 꺼내 김 차장에게 건네주었다. 김 차장은 명함을 한번 쓱 보고 주머니에 넣더니 신 변호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중앙지검에 계셨군요. 반갑습니다. 기수가 어떻게 되시는지…….”

“25기입니다.”

“어이쿠, 선배님이셨군요.”

두 사람은 십년지기라도 만난 듯 반가워했다. 태산은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았다.

신 변호사가 시선을 느끼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태산을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린다. 그리고 김 부장을 돌아보며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는 듯 추궁하는 눈빛을 보냈다. 김 부장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맸다.

“신 변호사!”

그때 저만치 라운지 문 앞에서 누군가 신 변호사를 부른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김 차장에 신 변호사에게 물었다.

“아, 예.”

신 변호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는데 미처 소개를 하기 전에 남자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태산은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 눈에 익은 얼굴이다 생각한다.

‘분명 저 얼굴은…….’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태산은 이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신 변호사는 김 차장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내를 소개해 주었다.

“정호성 회장님이십니다.”

역시 짐작대로였다.

정호성 회장은 치매 노모를 회사 고문으로 등재해 놓고 급여를 횡령한 혐의로 결국 기소되었다. 신 변호사를 통한 로비가 통하지 않으니 이번에는 직접 나설 자리를 마련하라 했을 것이다. 정 회장에게 접대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신 변호사는 미리 김 부장과 약속을 하고 나왔을 테고.

지금 중앙지검에 걸려 있는 사건도 몇 가지 있거니와 정 회장의 사업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이 자리에 있는 부장들의 신세를 질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미리 포석을 깔아둘 셈이겠지.

“여기는 제 검찰 후배들입니다.”

신 변호사는 정 회장에게 현직 검사들을 그렇게 소개했다. 인맥을 강조하는 그 말만으로도 슬그머니 비벼보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중앙지검분들이십니까?”

“중앙지검 김진욱 차장입니다.”

정 회장과 김 차장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태산은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접대 골프가 목적이라면 시작은 골프비인가?’

태산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정 회장이 말을 꺼냈다.

“제가 신 변호사님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후배들 앞에서 신 변호사님 체면 좀 세워 드려야겠군요. 골프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역시나 정 회장은 자연스럽게 골프비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어이쿠, 그럴 수는 없지요. 괜찮습니다. 저희도 골프비 정도는 있습니다.”

“큰돈도 아닌데 성의라 생각하시고 내게 해주십시오.”

몇 번 그렇게 실랑이가 오가더니 김 차장이 못 이기는 척 정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기업 회장이 골프비를 부담해 주는 것만으로 김 차장은 어깨가 으쓱한 듯 흐뭇한 표정을 했다. 골프장 회원권이라도 선물했다면 보나 마나 홀라당 넘어갔을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코스 나가실 거면 같이 도시죠.”

“그럴까요?”

신 변호사의 제안을 김 차장이 의뭉스럽게 받았다.

일동은 골프백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필드로 나갔다. 본격적으로 골프를 치기 전 정 회장이 슬그머니 제안을 했다.

“그냥 골프만 쳐서야 재미가 있습니까? 돈을 좀 걸어보면 어떻습니까?”

드디어 2단계가 나왔다. 내기 골프.

태산은 태산건설 시절 유력자들과 접대 골프를 칠 때 썼던 방법을 떠올려 본다. 골프비를 부담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내기 골프를 제안해 적당히 잃어주는 것이 다음 단계 접대였다.

게임을 즐기는 척하면서 대놓고 뇌물을 찔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받은 사람은 뇌물이라는 인식을 못 하고 받지만 결국 그것도 하나의 빚이 되어 카르텔을 공고하게 해준다.

“그럴까요?”

“난 현금 가진 게 없는데…….”

“돈을 거는 건 좀…….”

반기는 사람도 있고 꺼리는 사람도 있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뭐 어떻습니까? 큰돈 안 걸면 되지요. 제가 제안한 것이니 판돈은 제가 내드리겠습니다. 분위기 한번 띄워봅시다. 1타에 10만 원 정도 걸면 부담 없겠지요?”

신 변호사도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다.

“일시오락 목적이고 우리가 사회적지위나 경제 수준도 있는데 그 정도 판돈이면 도박이라고 볼 수 없죠.”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금액처럼 말했지만 1타에 10만 원이면 홀을 다 돌았을 때에는 수백만 원의 판돈이 오가게 된다.

하지만 판돈을 모두 정 회장이 부담하겠다고 나서니 부장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묵인했다. 어차피 자신이 부담하는 돈은 없고 골프에서 이기면 눈먼 돈을 딸 수도 있으므로 손해날 것이 없는 것이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태산이 그제야 나섰다.

“제 판돈은 제가 내겠습니다. 자기 판돈은 자기가 걸어야 쪼는 맛이 있죠.”

태산의 제안에 검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그렇게 뻣뻣하게 굴었어도 내기 골프에는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다 싶었던 것이다. 강바른이도 어쩔 수 없군 하는 표정이었다.

“대신 룰을 좀 바꾸죠. 홀 하나 돌 때마다 동점이 생겨 무승부가 되면 다음 홀에서는 1타당 판돈은 더블로. 그리고 멤버가 원하는 경우 언제든 판돈 더블을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검사들은 태산의 제안에 입을 떡 벌렸다. 태산의 제안대로 하면 10만 원에서 시작했다 해도 판돈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었다. 차마 그러자고 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 회장이 문득 껄껄 웃더니 답했다.

“좋습니다. 이제야 좀 공 칠 맛이 나겠군요.”

* * *

“웬일이야, 강바른이?”

“공 좀 치나 보지?”

“내기 좋아하나 봐. 혹시 뒤로는 카지노 다니고 원정 도박 하고 이러는 거 아냐?”

부장들은 다투어 비아냥댔지만 강바른이 내기 판을 뒤집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데 안도하는 듯했다. 이것으로 강 검사도 공범이 되는 것이니 안심한 것이리라.

“예, 좀 칩니다. 그리고 골프 실력을 떠나서 기왕 내기를 하려면 쪼잔하게 푼돈 주고받느니 화끈하게 걸어야죠.”

태산은 상대의 배포를 은근히 깎아내리는 말로 부장들의 비아냥을 받아쳤다. 부장들이 불쾌감을 보이며 얼굴을 굳힌다.

분위기가 살벌해지려 하니 신성식 변호사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지금 우리 수가 여덟이니 한 번에 다 칠 수는 없겠고. 실력에 따라서 넷씩 두 팀으로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군요.”

정 회장이 찬성하고 검사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신 변호사가 다시 물었다.

“여기 회장님 골프 실력이야 준프로에 가까우시고 김 부장이 골프 좀 치는 거로 아는데… 차장님 실력은 어떠신지…….”

김성근 부장이 나서서 아는 체를 한다.

“차장님은 저보다 한 수 위시죠.”

자연스럽게 정호성 회장과 김진욱 차장, 김성근 부장까지 한 조가 되었다. 로비를 위한 세팅인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 조합이었다.

태산이 재빨리 손을 들었다.

“저도 어디 가서 골프로 빠지진 않습니다.”

신 변호사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물색 모르는 정 회장이 덥석 받았다.

“그럼 우리랑 같이 칩시다. 내기 룰 바꾸는 것을 보니 젊은 양반 배짱이 아주 대단하던데. 패기 있는 젊은 피가 하나는 있어야 게임이 재미있게 돌아가죠.”

“회장님, 높은 분들이 함께하는 자리인데 평검사를 끼우는 건…….”

신 변호사가 정 회장을 말리고 나섰다. 엄밀히는 부부장이었지만 관리직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서 수사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간부들에게는 평검사와 다름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신 변호사는 정 회장에게 슬쩍 귀엣말을 하려 했다. 아마도 눈앞의 패기 있는 젊은 검사가 바로 정 회장을 기소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언질을 주려는 것일 테다. 하지만 정 회장은 성가시다는 듯 신 변호사의 말은 듣지도 않고 지시했다.

“괜찮으니 신 변호사는 그쪽 팀을 부탁해요.”

어차피 다른 조에도 로비를 해야 하니 신 변호사가 맡아서 잘 구워삶아 달라는 의미였다. 신 변호사는 언질을 줄 기회를 놓치고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일행은 두 팀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홀로 이동했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누가 아너를 맡아 제일 먼저 퍼팅을 할 것이냐로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다. 결국 서열에 따라 김진욱 차장이 선 플레이를 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태산이 치게 되었다.

일행은 골프채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선 태산을 얼마나 잘 치는지 한번 보자는 냉랭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태산이 골프채를 휘두른 순간 공은 빠르게 솟구쳐 날아가더니 순식간에 그린 바깥쪽 러프로 떨어져 버렸다.

“이거 홈런이네, 홈런이야. 어디까지 날아간 건지 잘 보이지도 않는구먼. 잘 친다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영 허당 아닌가? 강 프로 오늘 돈 좀 잃겠는데? 지갑 빵빵하게 채워 왔나?”

“힘만 앞서고 테크닉이 영 별로네. 하긴 골프를 잘 모르니까 겁도 없이 돈을 팍팍 걸었지.”

김진욱 차장은 껄껄 웃으며 태산을 놀렸고 김성근 부장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태산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공이 날아간 쪽을 시선으로 좇으며 생각했다.

‘너무 오래 쉬었나?’

강바른의 몸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골프채를 잡아본 적이 없었다. 평검사의 업무 강도로는 한가롭게 골프나 치고 있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강바른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신체 능력이 초인적으로 발달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무심코 움직이면 힘 조절이 안 될 때가 있는 마당에 골프채를 휘두를 때에는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하는지 경험치가 전무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스윙이 제대로 컨트롤되지 않는다. 치면서 감각을 찾는 수밖에.

첫 번째 홀은 김진욱 차장의 승리로 끝났다. 멤버들이 연신 나이스샷을 외치며 눈치껏 져주면서 판돈을 몰아준 덕분이다. 정 회장과 김 부장이 앞다투어 김 차장을 상찬했다.

“이야~ 차장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어휴, 이거 못 당하겠는데요. 오늘 많이 따 가실 테니 캐디비는 차장님이 부담하셔야겠습니다.”

“물론이지요. 한데 정 회장님 실력도 만만치 않으시고 우리 김 부장도 꽤 잘 치니 다음 홀에서는 역전되는 거 아닙니까?”

김 차장의 화답에 정 회장이 제안했다.

“그렇다면 동기부여도 할 겸 더블 한번 불러볼까요?”

“어차피 판돈은 정 회장님이 부담하실 텐데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역시 통들이 크십니다. 저는 벌써 후달리는데요.”

완전히 방심해서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일행의 모습을 태산은 심드렁하게 지켜보았다.

‘잘들 노는군.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자고.’

홀이 여러 번 돌면서 태산의 실력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실수도 훨씬 줄었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예민한 감각 때문에 오히려 예전보다 실력이 훨씬 더 좋아진 듯했다.

하지만 일행들은 자기들끼리의 선두 다툼에 빠져 태산의 실력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들끼리 슬렁슬렁 판돈도 조금씩 불린다.

10홀째를 넘어가면서 판돈이 상당히 불어났다 싶은 순간, 태산이 갑자기 선두로 치고 나왔다. 버디가 나오고 이글이 나오고 알바트로스가 나오더니 기어이 홀인원을 해낸다. 심지어 파4 홀에서 홀인원을 넣었을 때는 일행의 얼굴이 완전히 흙빛이 되었다.

“파4에서 홀인원이 가능합니까?”

“저도 뉴스에서나 들었는데요.”

공을 친 태산 본인도 내심 놀랐다. 파4 홀에서 홀인원이 나온 것은 PGA와 LPGA 역사상으로도 단 한 번씩밖에 없던 일이다. 프로경기용보다 짧은 파4 홀임을 감안하더라도 몹시 진귀한 경우였다.

태산은 판돈을 처음 딴 이후 홀이 넘어갈 때마다 거침없이 더블을 불렀다.

큰돈이 걸리자 김성근 부장은 잔뜩 쫄아서 계속 실수를 했다. 자신의 돈이 걸린 것은 아니라지만 정 회장이 판돈을 부담하는 것이다 보니 정 회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눈치를 볼수록 실수는 더 많아졌고 타수는 점점 벌어졌다. 자신이 잃은 돈만 수천에 달하자 김 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결국 18홀을 다 돌았을 때에는 1타당 천만 원이 넘는 판돈이 걸렸고 태산은 총 2억에 가까운 판돈을 쓸어 모았다.

“제가 승부욕이 있다 보니 너무 인정사정없이 따버렸네요. 상금 지급할 돈은 있으신 거죠?”

놀리는 듯한 태산의 물음에 정 회장이 씁쓸하게 답했다.

“내려가는 대로 인출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럼 캐디비는 제가 내겠습니다.”

태산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게임을 끝내고 클럽 하우스로 내려온 일행은 모두 흙 씹은 표정이었다. 조금 늦게 합류한 다른 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정 회장은 김진욱 차장에게 로비를 하려다가 엉뚱한 사람에게 거금을 몰아줘 버렸고 쏠쏠한 뒷돈을 기대하고 있던 김진욱 차장은 손가락만 빨고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김성근 부장은 정 회장에게 큰 손해를 끼쳤다는 부담감에 위통을 느낄 지경이었다.

“재미있게 치셨습니까?”

정 회장은 신 변호사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수행비서에게 지시했다.

“가서 돈 좀 뽑아 와.”

정 회장이 귓속말로 얘기한 금액을 듣고 수행비서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얼른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후 가방 하나를 들고 와 정 회장에게 건넸다. 정 회장은 가방째로 태산에게 넘겨주었다. 영문 모르는 신 변호사와 타 부서 부장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태산은 빙긋 웃으며 가방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불러주십시오.”

아마 다시는 부르는 일이 없을 테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인 정 회장은 아무래도 본전 생각이 나는지 김진욱 차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에 따로 한번 보시죠. 제가 이번에 별것 아닌 일로 중앙지검에서 기소가 되었는데 억울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차장님이 툭 터놓고 설명을 좀 해주시면 납득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 차장이 곤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요즘 대외적으로 검찰의 수사에 대해 말이 많다 보니 검사장님께서 예민하십니다. 내부적인 반대도 있고 바깥 시선도 의식하다 보니 불기소는 할 수가 없었어요. 재판 가시면 잘 해결될 테니 걱정 마십시오. 분위기가 좀 풀리면 앞으로의 일은 차차 함께 얘기해 보시죠.”

쏠쏠하게 용돈벌이도 하고 정 회장과 검사들도 골려주었느니 만족스럽게 돌아가려 했던 태산은 그 말을 듣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정 회장에게 다가갔다.

“그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불기소처분 반려시킨 것이 바로 저니까요.”

정 회장이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평검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사건의 원흉이었을 줄이야.

“명백히 기소해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구속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주임검사의 의견을 존중해 기소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다행이다 생각하실 일이지 이런 사적인 자리에서 검사에게 로비할 일은 아닙니다. 정 억울하시면 변호사 통해 법정에서 호소하세요.”

태산은 말을 마치고 김 차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정 회장이 돌아서는 태산의 등 뒤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의 돈을 2억이나 먹어놓고 그런 사소한 청탁 하나 못 들어주겠다니 완전히 도둑놈 심보 아니요?”

2억이라는 액수에 다른 팀에서 골프를 쳤던 부장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수군거렸다.

“2억이라니. 무슨 소리지?”

“아까 그 가방? 강바른이가 2억이나 딴 건가?”

태산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뒤돌아섰다.

“왜요? 돌려받고 싶으신가요? 내기를 먼저 제안한 건 정 회장님 아닙니까? 저는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판돈을 딴 건데요.”

“여기서 그 돈이 단순히 내기 판돈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 있습니까?”

정 회장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검사들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면 뭡니까? 뇌물? 아니면 도박? 뇌물이든 도박이든 정 회장님이 스스로 그 사실을 밝히실 수는 없을 텐데요. 차장님도 원치 않으실 테고요. 요즘같이 여론이 눈 벌겋게 뜨고 검찰을 감시하고 있는 시점에 간부들이 골프도박을 했다고 하면 검사장님이 아주 좋아하시겠네요.”

골프도박, 그것이 태산이 노린 지점이었다. 판돈이 2억에 육박해 버렸으니 내기를 한 이들의 경제적 능력을 고려할 여지 없이 명백한 도박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공범이다. 이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을 것이었다.

검사들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저도 같이 했고 많이 따기도 했으니 골프도박은 눈감아 드리는 겁니다. 아니면 돈 돌려받으시고 도박죄로 입건할까요?”

정 회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김진욱 차장 이하 다른 검사들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부들부들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의 없으신 거지요? 그럼…….”

태산은 빙긋 웃고는 돌아섰다. 등 뒤로 검사들의 노성이 터졌다.

“강바른, 저 미친 새끼 저거!!!”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 거야?”

“원 부장은 왜 저딴 놈을 보내 가지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