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49화 (49/78)

제2장 작별 그리고 재회

[검사 강바른 → 서울중앙지검 부부장]

강 검사는 파격적인 결과에 한동안 멍하니 인사 명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약전담반의 다른 검사들은 어디로 인사 발령이 났는지 찾아보았다.

[부부장 배진만 →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장]

배진만 부장의 이름을 찾은 태산은 자신의 일처럼 뛸 듯이 기뻤다. 만년 부부장이었던 배 부장이 드디어 승진하게 된 것이다. 강력통이던 배 부장을 반부패수사부장으로 앉힌 것은 의외였지만.

[검사 안소영 → 서울중앙지검 검사]

태산은 깜짝 놀랐다. 안 검사까지 서울중앙지검으로 가게 된 것인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아무래도 안 검사가 가까이 있으면 시선을 의식해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이번 인사로 헤어지게 되리라 생각해 시원섭섭하게 생각했었는데 또 함께라니. 정말 질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검사 구태호 → 부산지검 검사]

구 검사야말로 안 검사와 함께 발령을 받고 싶었을 텐데 거리가 너무 먼 곳으로 가게 되었다. 구 검사의 짝사랑도 이대로 끝인가 생각하며 태산은 혼자 웃었다.

결국 마약전담반은 해체 후 강력부에 흡수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인사이동을 앞두고 송별회 자리에 둘러앉은 마약전담반 동료들은 소속 검사들이 영전하는 것을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부장님! 이제 진짜 부장님 다시겠네요. 축하드립니다.”

“진즉에 올라가셔야 했는데 너무 늦은 거죠. 우리 배 부장님처럼 열심히 하시는 분이 어디 있다고.”

“제가 축하주 한잔 올리겠습니다.”

수사관들의 인사에 배진만 부장은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다 자네들이 열심히 뛰어준 덕분이지.”

그러고는 자신의 승진에 몰린 관심을 돌리기 위해 슬그머니 화살을 태산에게로 돌렸다.

“나야 나이도 차가니 마지못해 올려준 것이지만 강 검사야말로 이례적인 초고속 승진 아닌가. 그 나이에 중앙지검 부부장이라니. 축하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강 검사인 것 같은데.”

배 부장의 말에 동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흥렬 계장이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펴며 말했다.

“와룡회 박살 내고 한국을 다시 마약청정국가로 만드는 데 강 검사님의 공이 큰 건 사실 아닙니까? 같이 일해본 사람으로서 판단하자면 이례적이긴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인사죠.”

“맞습니다. 강 검사님을 승진 안 시키면 누구를 승진시킨단 말입니까? 강 검사님도 축하주 한잔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태산이 인사를 받고는 박경구 수사관이 따라준 술을 한입에 꿀꺽 털어 넣었다. 동료들이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친다.

그때 우형진 수사관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중얼거렸다.

“근데 전 마약반에서 낸 성과라 승진하시더라도 강력부 쪽으로 가실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두 분 다 반부패수사부라니 그건 의외네요.”

태산 역시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로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태산과 배 부장이 은근한 눈빛을 나누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대통령의 뜻인 것 같아.”

배 부장이 중얼거린 말에 동료들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일제히 돌아보았다. 배 부장은 비밀 얘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강 검사랑 청와대 오찬에 갔었잖나. 그때 대통령님이 강 검사에게 마약범 잡는 실력으로 비리 정치인을 잡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란 말이야. 이제 마약 쪽은 한숨 돌렸으니 비리를 잡으라는 특명인 게지.”

배 부장은 자랑스러운 투로 말했다. 동료들이 오오~ 하며 탄성을 질렀다.

“어깨가 무서우시겠습니다. 약쟁이랑 조폭 놈들은 저희가 잘 감시할 테니 두 분은 비리 정치인들 아주 혼쭐을 내주십시오.”

“부탁하네.”

배 부장이 우쭐해서는 비장하게 답해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특명이니 뭐니 그런 거 없어요. 부장님이 멋대로 해석하신 거라고요. 자, 자!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시고 술이나 드십시다.”

“어허~ 이 사람 이거 막판이라고 말 함부로 하는구먼.”

배 부장은 태산을 타박하면서도 유쾌한 표정이었다.

수사관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일제히 잔을 비우는 것을 본 황수진 실무관이 안 검사의 잔에 잔을 부딪치며 말을 걸었다.

“안 검사님도 영전하신 것 축하드려요. 꽤 오래 같이 일했는데 떠나보내려니 아쉽네요. 그래도 강 검사님과는 같은 곳으로 가시니 좋으시겠어요.”

안 검사는 황 실무관의 말에 분명히 답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더니 딴소리를 했다.

“같은 지검이라 해도 강 검사님은 반부패수사부고 저는 형사부인데요. 얼굴 볼 일이 그리 있을까 싶어요.”

태산은 안 검사의 말을 흘려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도 안 검사와 같은 곳으로 발령이 난 것이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냥 말만이라도 좋다고 하면 안 되는 걸까? 아무튼 저 고지식함은 답이 없다.

“구 검사님도 축하받으셔야죠. 부산지검 강력부면 상당히 규모가 있는 곳 아닙니까? 조폭이나 마약대응 역사로 따지면 인천지검보다도 유구하죠.”

“근데 우리 구 검사님은 역시 강력통이네요. 강력부를 벗어나지를 못해.”

“이 사람은 강력부 아니면 보낼 데가 없다 이런 거 아냐? 그냥 강력부가 천직인 거지.”

“인상만 봐도 딱 강력하게 생기셨잖아요. 이게 검사의 얼굴입니까? 형사나 조폭의 얼굴이지.”

수사관들은 술이 들어간 핑계로 구 검사를 마음껏 놀리고 있었다. 평소 수사관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탓일 테다.

원래도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내내 입을 다물고 술만 쏟아 넣고 있어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구 검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가게를 나갔다.

수사관들이 깜짝 놀라 구 검사를 돌아보다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마지막이라고 너무 놀렸나?”

“좀 심했던 거 같아요. 그러게 외모 드립은 왜 치세요?”

“아니, 놀리다 보니 너무 신나서. 근데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잖아. 다들 같이 놀려놓고 왜 그래?”

수사관들이 머쓱해서 입을 다물고 술을 들이켜는데 밖으로 나갔던 구 검사가 한참 만에 불쑥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는 안 검사의 옆으로 다가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꽃다발이었다.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 미리 만들어둔 것을 들고 온 듯 미묘하게 시들거리고 꽃의 조합도 대강이라 영 볼품이 없었지만 구 검사의 표정만은 전장에 나가는 장군처럼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오다가 주웠어요.”

경악할 만한 멘트였다. 안 검사는 황당해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구 검사가 재촉하듯 꽃다발을 들이밀자 마지못해 받았다.

“아… 고맙습니다.”

안 검사가 거절하지 않고 받으니 구 검사는 더욱 고무되어 쩌렁쩌렁 외쳤다.

“이제 곧 안 검사님과도 마지막이고 더 이상은 직장 동료도 아니니 용기 내서 고백합니다! 안 검사님, 좋아합니다! 제 사랑을 받아주신다면 서울과 부산까지의 거리 매주, 아니, 매일이라도 달려가겠습니다!”

안 검사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허공을 보며 부동자세로 서서 외치는 구 검사의 모습에 수사관들은 웃음을 참느라 죽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황 실무관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아… 남들 다 보는 회식 자리에서 고백이라니. 저래서야 안 검사님을 잡기는커녕 평생 연애 한 번 못 하고 늙어 죽을 듯.”

안 검사는 물끄러미 구 검사를 보더니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단칼에 답했다.

“죄송하지만 제 취향이 아니십니다.”

폐부를 후벼 파는 한마디에 구 검사는 고개를 떨구고 좀비처럼 터벅터벅 제자리로 돌아왔다. 수사관들이 무너지듯 자리에 앉는 구 검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

“자, 자. 기운 내요.”

“구 검사님은 축하주보다 실연주를 드셔야겠네.”

“세상에 여자가 안 검사님뿐입니까? 구 검사님 인연이 있을 거예요.”

“그럼요. 우리 구 검사님이 얼마나 남자답고 진국인데. 안 검사님이 아직 젊고 남자를 많이 안 만나봐서 모르는 거예요.”

구 검사를 위로하느라 애먼 안 검사가 끌려 나와 입방아에 오르고 있었지만 안 검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술잔만 홀짝였다. 오히려 황 실무관이 불쑥 끼어들었다.

“저기요. 그렇게 고백하시면 세상 어떤 여자도 못 꼬셔요.”

수사관들이 득달같이 돌아보면서 눈치를 주고 손사래를 친다. 자신들도 모르지는 않으나 일단 달래고 보자는 투에 황 실무관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안 검사가 황 실무관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아뇨. 정우성이 그렇게 고백했다면 받아줬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긴 얼굴이 딱 제 취향이거든요.”

“정… 우… 성…….”

가만히 중얼거린 구 검사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정우성과 구태호 사이에는 안드로메다만큼의 간극이 있었다. 아예 넘보지도 말라는 엄포에 다름 아니다.

“안 검사님, 아주 확인 사살을 하시네.”

“완전 무서운 분이시네요.”

수사관들이 혀를 차며 서둘러 내상을 입은 구 검사를 다독였다.

“세상에 구 검사님의 진가를 알아줄 여자가 한 명은 있을 거예요.”

“그게 위로야, 욕이야? 구 검사님 같은 스타일 은근히 인기 많다고. 걱정 말아요. 내가 소개팅시켜 줄 테니. 좀 많이 연상이라도 괜찮죠?”

“조금 연상이라는 거예요, 많이 연상이라는 거예요?”

“이 계장님이 아는 여자면 뻔하지.”

“그래도 이모님뻘은 좀 곤란하지 않아요?”

“그러는 우 수사관은 소개시켜 줄 사람 없어?”

“있으면 제가 사귀죠.”

“누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시집갔어요.”

당사자는 내버려 두고 자기들끼리 소개팅시켜 줄 궁리에 여념이 없다.

“다른 여자는 필요 없다고요…….”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린 구 검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술잔을 들며 외쳤다.

“오늘 한번 마시고 죽어봅시다!!!!”

“오오옷, 좋았어! 그래야 구 검사지!”

“가랏, 구태호!!!!”

“그럼, 그럼. 실연의 상처는 술을 부어 소독하는 거야.”

수사관들이 덩달아 불타올라 부어라 마셔라 하는 가운데 태산은 안 검사가 잔으로 입을 가리고 남몰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안 검사도 구 검사를 놀리고 있었던 건가.

이러니저러니 티격태격해도 함께 일하는 기간 동안 서로 진한 전우애가 싹텄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폭소를 터뜨리며 술잔을 부딪치는 동료들을 태산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이제 슬슬 끝나가는구나.

배 부장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찬찬히 동료들을 돌아보다가 문득 울컥해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동안 고마웠네! 자네들은 어디를 가든 변함없이 내 소중한 부하들이야. 결코 잊지 않겠네.”

배 부장이 부하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다. 왁자지껄하던 마약전담반 식구들은 배 부장의 돌발 행동에 일제히 멈칫했다.

돌연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게다가 우 수사관은 덩달아 코를 훌쩍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저희야말로 감사했습니다.”

“떠나셔도 부디 건강하십시오.”

“이젠 연세도 있으신데 적당히 몸도 사려가며 일하시고요.”

배 부장은 인사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어깨가 가볍게 들썩인다.

태산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하고 얼른 나섰다.

“이분이 승진하시더니 너무 기분에 취하셨네. 영감님, 불판에 이마 데십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태산은 배 부장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배 부장은 흐려진 눈가를 얼른 문지르고는 잔을 높이 들었다.

“오늘 기분 최고구먼! 자, 축배를 들자고! 이 멤버! 리멤버!”

배 부장이 선창에 마약전담반 식구들이 다 같이 잔을 들며 따라 외쳤다.

“포에버!!!!”

* * *

기분에 취해 부어라 마셔라 한 마약전담반 동료들은 일찌감치 녹다운 되어 하나둘 실려 나갔다. 좀처럼 술에 취하지 않는 태산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페이스를 유지한 안 검사만이 최후까지 남아 자리를 정리했다.

“우리도 이제 돌아가죠.”

태산은 동료들을 돌려보내고 안 검사와 마지막 잔을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집을 나서는 안 검사의 볼은 붉었다. 페이스를 유지하긴 했으나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신 탓이다.

“택시로 갈 겁니까? 아니면 대리를 부를 건가요?”

“검찰청 주차장까지 금방이니까 대리 불러놓고 걸어 올라가려고요.”

“그래요? 그럼 같이 좀 걸읍시다.”

검찰청으로 걸어가며 대리운전을 부른 안 검사는 전화를 끊은 후 태산과 나란히 걷다가 불쑥 말했다.

“저랑 또 같이 가게 되셔서 놀라셨죠?”

태산은 피식 웃고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안 검사야말로 놀라지 않았습니까?”

“안 놀랐다면 거짓말이겠죠. 이걸로 검사님과 실랑이하는 것도 끝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정말 질긴 인연이네요.”

안 검사도 태산과 같은 감상이었을까.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그러게 말입니다.”

태산이 중얼거린 말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안 검사가 갑자기 울컥 하더니 샐쭉하니 답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꺼리실 것까진 없잖아요.”

“아니, 내가 뭐랬는데요?”

“방금 엄청 성가시다는 얼굴 하셨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렇게 된 게 다 강 검사님 업보라고요. 지나치게 공을 많이 세우셔서 저까지 덩달아 좋은 보직으로 발령이 났잖아요. 아주 쌤통이네요.”

안 검사는 붉어진 볼을 부풀린 채로 툴툴거렸다. 평소답지 않게 감정적인 태도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보면 역시 술기운 탓일까.

태산은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허허 웃었다.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나랑 같은 곳으로 발령받아서 싫은 건 나보다는 안 검사 쪽 아닙니까?”

태산의 말에 안 검사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했다.

“모르겠어요. 이런 상황 빨리 끝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또 계속 뵙겠구나 생각하니 어쩐지 안심이 되기도 하고 조금 겁이 나기도 하고…….”

그래도 그간에 서로 정이 많이 붙은 것일까. 태산은 흐음… 하고 애매하게 반응했다.

“어쨌든 강 검사님한테는 그리 나쁜 일이 아닐 거예요. 강 검사님은 행동에 좀 제약이 생기는 편이 좋으니까요. 너무 폭주하지 않으시도록.”

“사람을 시한폭탄 취급 하는군요.”

“시한폭탄보다 더하시죠. 시한폭탄은 언제 터질지 예상이라도 되잖아요?”

태산과 안 검사는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더 이상 함께 일하는 동료는 아니지만 멀지 않은 거리에서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안 검사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태산도 꾸벅 묵례를 하며 답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주고받고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간지러운 분위기를 깨듯 안 검사의 핸드폰이 울린다. 안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얼른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다.

“대리 기사님 벌써 왔나 봐요. 저 먼저 가볼게요.”

안 검사가 전화를 받으며 얼른 주차장 쪽으로 뛰어갔다.

뒤에 남겨진 태산은 잠시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걸었다. 동료들과 헤어져 새로운 환경으로 뛰어들 생각을 하니 어쩐지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사람이 그리워졌다.

태산은 대포 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선화는 이미 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늦은 밤에 용건 없이 전화할 만큼 내밀한 사이도 아니고.

태산은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다.

“범진아, 데리러 와라. 나 술이 좀 부족한 것 같은데 같이 먹어줘야겠다.”

범진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바로 답했다.

-예, 형님.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 * *

“배당금은 다시 재투자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게 해줘요. 요즘 검찰 서슬이 시퍼래서 아무래도 당분간은 한 대표가 맡아서 굴려주면 좋겠어요.

선화는 내심 실망했다. 구준태 시장이 배당금을 비자금 계좌로 넣어달라고 한다면 강바른 검사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단서를 단번에 입수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너무 밀어붙이면 겁을 내고 발을 빼버릴 수도 있다. 시간을 들여 구슬리는 거다.

“역시 시장님 투자 감각이 있으시네요. 통도 크시고. 제가 화끈하게 불려 드리죠. 맡겨두세요.”

구 시장은 허허 하고 흐뭇하게 웃더니 문득 은밀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대표한테는 내 긴한 부탁이 있는데…….

“무슨 부탁이세요? 어려워 말고 말씀해 주세요.”

-아내한테 백을 하나 선물하려고 하는데…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 대표는 보아하니 패션 감각도 훌륭하고 유행도 잘 아는 것 같으니 선물 고르는 걸 좀 도와줬으면 해요.

“아휴, 그런 걸 뭘 그렇게 어렵게 말씀하세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고마워요. 그럼 사서 나한테 보내주면 비용은…….

“서운한 말씀 마세요. 저한테 투자하신 금액도 있는데 제가 선물로 드려야죠.”

-허헛, 참…….

구 시장은 곤란한 척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몇 가지 골라서 보여줘요. 그중에서 고민해 보고 정할 테니.

“네, 그래요.”

선화는 구 시장과의 통화를 끊고 혀를 찼다.

“요것 봐라? 여자가 있었잖아?”

아내 선물이라지만 선화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내연녀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선화였다. 선화의 은근한 미인계에 넘어오는 듯하면서도 선을 넘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의외로 매너가 좋은 타입인가 생각했더니 이미 바람피우는 여자가 있는 모양이다.

다음 날 바로 백화점으로 간 선화는 명품 매장을 마음껏 누비며 이것저것 훑어보았다. 쇼핑이야말로 선화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 중의 하나였다. 선화는 백을 세 개 정도 찍어 구 시장에게 전달했다.

[어떠세요?]

선화가 보낸 메시지에 잠시 후 답이 왔다.

[두 번째 것이 좋아 보이네요.]

[역시 안목 있으시네요. 제 생각도 그래요. ^^]

컬러도 디자인도 가장 과감한 것을 택한 구 시장이었다. 꽤나 젊은 여자를 만나고 있나 보다.

[댁으로 보내 드릴까요?]

선화는 떠보듯이 물었다.

[아니오. 아내를 놀라게 해주고 싶네요. 가지고 계시면 보좌관에게 사무실로 들러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역시라고 생각하며 웃음을 띠는 선화다.

선화는 즉시 매장을 돌며 골라둔 세 개의 백을 모두 구입했다. 상대에게 기대치 않은 놀라움과 감동을 주는 것이 바로 로비의 핵심이다.

선화는 자동차에 올라탄 후 영수증을 꼼꼼히 챙기고 조수석에 놓아둔 쇼핑백도 찍어두었다. 이것이 나중에 어떻게 사용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

선화는 차를 출발시키려다 말고 강바른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사님, 내가 지금 뭐 하러 나왔는지 맞춰봐.”

강 검사는 성가시다는 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 그냥 말해. 뭐야?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네.”

투덜거리고는 사실을 털어놓는 선화다.

“쇼핑하러 나왔지.”

-그걸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럼, 구 시장한테 로비할 선물을 샀으니까.”

강 검사가 숨죽이고 듣는 기색이 느껴졌다.

“여자한테 줄 백을 사달라더라고. 내 감인데 검사님이 아무리 해도 못 찾았다는 그 비자금 계좌, 내연녀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구 시장 주변은 싹 파봤어. 여자가 있었다면 진즉에 알았을 거야. 내연녀가 있는 거, 진짜 확실해?

“아내한테 백을 선물한다면서 나한테 골라달라고 했다니까. 그게 정말 부인 주려는 거겠어?”

-왜? 아내 사랑이 극진할 수도 있지.

“기념일도, 생일도 아닌데 아내한테 아무 이유 없이 고가의 백을 선물한다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어. 근데 아내 주려는 선물을 보좌진도 아닌 다른 여자한테 신경 써서 골라달라고 주문했다? 그것부터가 쓸데없는 오해를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게다가 알아서 골라 보내라는 것도 아니고 고른 걸 세심하게 확인한 후에 하나를 선택했단 말이야. 이건 이미 잡힌 고기한테 주는 게 절대 아니지. 현재 진행형으로 불타오르는 여자가 있는 거야.”

선화는 의기양양하게 마지막 단서를 던졌다.

“결정적으로 선물을 집으로 보내겠다고 하니까 아주 뜨끔해서 펄쩍 뛰더라고. 이래도 아니야?”

강 검사는 흐음… 하고 신음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하긴 연애 문제에 대해서는 당신만 한 전문가가 없겠지.

강 검사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선화는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말하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도 더 파볼 테니까 당신도 그 여자가 누군지 가능하면 한번 캐봐.

“오케이.”

자신의 추리가 인정받았다는 기분에 우쭐한 선화는 기분 좋게 전화를 끊으려 했다.

-참, 나 서울로 돌아가게 됐어.

전화를 끊으려면 선화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검찰 인사 철이다.

“어디?”

-중앙지검.

“잘됐네.”

서울과 인천은 지척이지만 지역이 달라지니 어쩐지 떠나보내는 기분이라 선화는 괜히 쓸쓸해졌다.

“그동안 쌓인 정도 있는데 참 일찍도 말해준다.”

-미안.

선화는 부러 새된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사과하고 그래? 안 어울리게.”

-그래도 구 시장 수사는 계속할 거야. 오히려 수사가 더 편한 부서로 옮기는 거니까. 반부패수사부로 가게 됐어.

“반부패수사부?”

-응. 특수부에서 이름이 바뀌었어.

“아, 그래?”

-응, 그러니까 계속 도와줘.

“글쎄, 어쩔까?”

선화는 장난스럽게 눈을 굴렸다.

“부탁합니다는?”

강 검사가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한다. 아무래도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건가? 선화는 쿡쿡 웃었다.

-…부탁합니다.

강 검사가 낮은 목소리로 불쑥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묘하게 부드러운 태도가 아무래도 적응되지 않았다. 강 검사 역시 떠난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재미없네. 고분고분한 검사님은…….”

선화는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또 뭔가 알아내면 전화할게. 전화 씹지 말고 잘 받아.”

서둘러 전화를 끊은 선화는 바로 차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핸들을 잡은 채 감상에 젖었다.

강바른 검사는 선화가 태산에 대한 죄책감을 고백한 유일한 사람이고 태산의 복수를 해주기도 했다. 강 검사에게 선화가 느끼는 유대감은 결코 얕지 않았다. 강 검사로 인해 선화는 목표를 가지고 삶을 다시 살아갈 동력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강 검사와의 인연도 구 시장을 무너뜨리고 복수를 완결 지으면 끝나 버리는 것일까? 선화는 복수의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날을 유예하고 싶다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선화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어휴, 태산 씨가 알았다면 인물 반반한 젊은 놈한테 빠져서 잘하는 짓이다 하겠네.”

선화는 선바이저를 내려 그 속에 든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런 것 아니야, 태산 씨. 오해하지 마. 그 사람은 어쩐지 남 같은 생각이 안 들어서 그래. 알지?”

선바이저 안에는 태산과 선화가 해변에서 수영복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피서를 즐기고 있는 스냅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죄책감을 덜어내고 이런 사진이나마 지니고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다 강바른 검사 덕이었다.

선화는 미소를 띤 채 한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선바이저를 다시 올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 * *

태산은 사무용품이 든 박스를 들고 서울중앙지검 10층 검사실 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문에 붙은 명패를 확인했다.

1012호.

여기가 앞으로 새롭게 일할 장소인가.

태산은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수사관과 실무관이 들어오는 태산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산은 상자를 든 채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된 강바른입니다.”

수사관과 실무관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음기를 띠고 서로 눈을 맞춘다. 태산은 왜 그러나 하고 어리둥절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성 수사관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검사님은 여전하시군요. 아무리 그래도 한때 호흡을 맞췄던 동료인데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하실 건 뭡니까?”

“그러게요.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대하시니 저희도 어색하네요.”

여성 실무관도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보탠다.

‘그랬었나?’

이미 4년 전에 떠나온 조직에서 옛 동료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검사들은 보통 2년마다 인사이동을 한다. 하지만 검사장급이 오래 함께 호흡을 맞춘 비서관을 데려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검사가 이동을 해도 직원들은 지검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직원을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조사를 좀 해둘 걸 그랬다.

“아아~~”

태산은 기억이 나는 척 짐짓 탄성을 냈다. 하지만 수사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대뜸 말했다.

“기억 안 나시죠?”

부인할 틈도 주지 않는 추궁에 태산은 넙죽 시인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태산이 머쓱하게 답하자 남성 수사관이 답했다.

“검사장님이 특별히 배려해 주셨어요. 예전에 호흡을 맞췄던 직원들이 편할 거라면서.”

“그렇습니까?”

여전히 초면의 어색함을 풀지 못하고 있는 태산을 보며 남성 수사관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얼굴이 기억 안 나시면 당연히 이름도 기억 못 하실 테니 새로 인사해야겠네요.”

수사관이 태산의 손에서 박스를 받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손을 내밀었다.

“송봉근입니다. 전에 중앙지검 계실 때만 해도 주임이었습니다만 그사이 계장으로 진급했습니다.”

태산은 슬그머니 수사관의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아, 축하합니다.”

“진급한 지가 언제인데요. 딱히 지금 축하받을 일은 아니고요.”

“그건 그렇네요.”

“저보다 검사님이 축하를 받으셔야죠. 부부장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빨리 진급하셔서 돌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성 실무관은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들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깔깔 웃더니 장난스러운 인사를 건네며 손을 내민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바른 부장님. 김민하 실무관입니다.”

송 계장이 쿡쿡 웃음을 터뜨리자 김 실무관이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며 되묻는다.

“왜요? 부장님 되시고는 처음 뵙는 거 맞잖아요.

태산은 손을 내밀어 맞잡고 난처한 미소로 답했다.

“좀 봐주세요. 옛날 기억을 되돌리고 어색함을 깨려면 저도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태산은 인사를 마치고 상자를 다시 집어 들고는 그대로 집무실을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회식은 천천히 잡도록 하고 오늘은 점심이라도 같이 하시죠. 제가 쏠 테니 구내식당 말고 다른 데서 비싼 거 드셔도 됩니다.”

태산이 집무실 문을 닫고 사라지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던 김 실무관이 송 계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죠? 저 붙임성은? 심지어 좀 귀엽기까지 한데요?”

“그러게요. 우릴 전혀 기억 못 하시기에 남 신경 안 쓰는 건 여전하시구나 하면서도 조금 서운했는데… 사람이 좀 바뀐 것 같은 느낌인데요. 외모가 변해서인가?”

“진짜 많이 변하셨죠? 미리 얘기를 못 들었다면 저도 못 알아볼 뻔했어요. 예전에도 인물이 나쁘진 않았지만 몸도 좋아지고 뱅글뱅글 안경도 던져 버리니 완전 미남이신데요.”

흥분한 김 실무관의 수다에 송 계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본다.

“김 실무관, 아주 신이 났네요.”

김 실무관은 머쓱해 입을 다물고 얼른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 집무실 쪽을 바라본다. 입이 근질근질한 듯 조바심을 내더니 결국은 송 계장을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강 검사님이 무심하셨다고 하셔도 머리 하나는 비상하셨던 분이잖아요. 그런데 2년 동안 고생고생하며 함께 일한 우리를 어떻게 저렇게 까맣게 못 알아볼 수가 있는 건가요?”

그러더니 집무실 쪽으로 목을 빼 동정을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혹시 말이에요. 그 사건 있잖아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김 실무관이 무슨 사건을 말하는지 송 계장은 바로 눈치챘다.

강 검사의 투신자살 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사건이 알려졌을 때 송 계장과 김 실무관은 큰 충격에 빠졌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강 검사가 그럴 리가 있느냐고 입을 모았다.

송 계장은 내심 그 사건을 뒤에서 설계한 이가 있지 않을까 의심했다. 강 검사는 특수부 시절 늑대처럼 집요하게 사건을 물고 늘어졌다. 강 검사의 그런 집요한 수사가 부담스러워진 누군가의 소행이 아니었을까.

“그때 머리를 다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거나…….”

송 계장은 문 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얼른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댔다. 김 실무관도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문다.

그때 검사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문안으로 뛰어들었다.

같은 반부패수사 1부 검사이자 바로 옆 검사실인 1014호의 최진우 검사였다.

“강바른 검사님 계시죠?”

“예, 지금 막 출근하셨…….”

최진우 검사는 김 실무관의 답을 채 다 듣지도 않고 집무실로 달려 들어갔다.

짐 정리를 하고 있던 태산은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온 최 검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사님! 드디어 오셨군요! 부부장 승진 축하드립니다! 같이 다시 일할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최 검사는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태산은 웃음기를 띠고 최 검사를 찬찬히 보았다. 3년 전 처음 만났을 때는 영 어린애 같기만 하더니 중앙지검으로 떠난 1년 사이 한층 성숙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갈색 슈트가 꽤 잘 어울려 이제는 아무리 봐도 교복 블레이저를 걸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동네 꼬맹이가 듬직한 어른이 되어 나타난 것 같아 태산은 괜스레 제 마음이 뿌듯했다. 최 검사에게 반갑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준다.

“최 검사! 눈빛이 아주 날카로워졌어. 제대로 한 사람의 검사 몫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태산의 말에 최 검사는 얼굴을 붉혔다. 태산이 인천지검 506호 식구들과 마약전담반으로 이동할 때 혼자 떨어졌던 최 검사가 송별회에서 눈물을 쏟으며 했던 말이었다. 어엿한 한 사람의 검사 몫을 해내겠노라고.

“그걸 아직 기억하고 계셨어요?”

최 검사는 뒷머리를 긁었다. 이런 모습은 여전히 소년 같은 데가 있어 태산은 껄껄 웃으며 최 검사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최 검사의 마른 몸이 팔랑팔랑거리며 콜록콜록 기침을 뱉는다.

“마른 건 여전하군.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저도 검사님처럼 현장에서 뛰어야 할 때가 있으면 몸 사리지 않으려고 운동도 시작했는데요. 살은 안 붙네요. 운동했다가 좀 쉬면 하기 전보다 오히려 더 빠져서.”

“근골격은 타고나는 거야. 최 검사는 아무리 봐도 장사 체형은 아니잖아.”

“강 검사님도 전에는 마르셨다면서요.”

“말라도 골격은 좋았지.”

실없는 잡담을 나누다가 최 검사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안 검사님도 오셨죠?”

“그렇겠지. 형사 3부로 배속받았다던데?”

태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형사3부면 강력부는 아니라도 강력사건 전담인데. 안 검사님 이제 강력통 다 되셨네요.”

최 검사가 신이 나서 물었다.

“저 안 검사님한테도 인사하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뭘 그렇게까지…….”

태산은 고개를 저었지만 최 검사는 포기하지 않고 반짝반짝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럼 업무 시작하기 전에 커피나 한잔하고 올까?”

못 이기는 척 중얼거리니 최 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색한다.

“형사 3부는 4층입니다.”

태산은 최 검사와 함께 검사실을 나가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예, 다녀오세요.”

송 계장과 김 실무관은 닫히는 문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송 계장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 검사님을 저렇게 반기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네.”

김 실무관이 득달같이 듣고 말을 보탠다.

“전 그보다 강 검사님이 저렇게 반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한데요.”

“그것도 그렇네요.”

두 사람은 4년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옛 동료가 마냥 낯설기만 했다.

“이래서야 정말 처음 보는 사람과 일하는 기분인걸.”

“그러게요.”

* * *

“반부패수사부의 단합을 위하여!”

태산이 부임한 날, 김성근 부장검사 휘하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 1부 검사들은 전원 주점에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최진우 검사를 포함한 평검사만 해도 모두 여덟, 부부장인 태산을 포함하면 모두 아홉이다.

인천지검에서 부장검사가 거느리는 검사의 수는 보통 대여섯, 반부패수사부 같은 인지부서는 서너 명을 넘지 않았다. 그것을 감안하면 중앙지검의 규모를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김성근 부장은 과거 특수부였던 서슬 퍼런 인지부서의 검사들을 위풍당당하게 거느리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만 보면 검사나 건달이나 매한가지구나 싶어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김성근 부장은 부하들에게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라 지시하고는 거침없이 술을 들이부었다. 부하들도 예외 없이 부장을 따라 깨끗이 잔을 비워야 했다.

술이 여러 순배 돌았지만 폭탄주 러시는 좀처럼 멈출 기미가 없다. 술이 세지 못한 최진우 검사는 벌써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김성근 부장은 꽤 많은 인원이 거침없이 쏟아붓는 폭탄주를 만드느라 비싼 양주를 줄줄이 까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환영회 겸 회식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씀씀이가 크다고 태산은 생각했다. 항상 수사비가 모자랐던 마약전담반 시절 회식은 대체로 돼지껍데기집이나 삼겹살집에서 했었기 때문이다.

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는 역시 수사비가 남아도는 것일까? 아니면 화끈하게 쏘는 대신 회식 횟수를 줄이는 것일까?

씀씀이가 수상쩍다 해서 태산이 나온 술을 마다할 리는 없다. 태산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오오~ 강바른 검사, 술 잘하는구먼. 역시 기대주야. 술자리에도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소문만큼 꼴통은 아닌가 봐?”

술을 마시던 태산은 멈칫했다. 그러고는 가만히 부장을 돌아보았다.

이거 지금 싸우자는 건가?

눈을 부라린 것도 아니건만 김 부장은 태산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압박감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돌연 분위기가 냉랭해지려는 때에 갑자기 누군가가 룸 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여어~ 김 부장, 잘들 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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