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48화 (48/78)

제1장 깃털과 몸통(2)

그저 검찰청에 나가 앉아 있다가 몇 마디 하고 온 것뿐인데 희경은 온몸에 진이 빠져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대로 기절한 것처럼 잠들었다가 일어나 부랴부랴 가게에 나갈 준비를 했다.

욕실에서 씻고 들어와 화장대 앞에 앉은 희경은 화장을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화장기 없는 자신의 얼굴이 너무나 낯설어 보였던 것이다. 움푹 파인 볼과 떼꾼한 눈, 짙은 다크서클, 창백한 안색이 큰 병을 앓는 병자처럼 볼품없었다.

[자기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 스스로는 잘 모르죠. 거울을 한번 보세요.]

젊은 여검사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남들 보기에는 자신의 얼굴이 이렇게 참담했을까? 대체 언제부터.

[너 요즘 군살 좀 붙은 거 같다?]

[맨날 늦게까지 술 마시니까 그렇지 뭐.]

[나한테 좋은 약 있는데 해볼래? 그거 맞으면 살도 빠지고 전혀 안 피곤해. 간 해독 작용을 해서 술도 잘 안 취하고 빨리 깬다고.]

[…중독되거나 그러는 약은 아니야?]

[자주만 안 쓰면 괜찮아. 전혀 문제없어.]

처음 이용태가 그렇게 말하며 꼬드겼을 때 문제가 되는 약이라는 건 뻔히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지금은 기억도 희미하지만 한때는 사랑했었고 그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으며 유흥업소를 벗어난 삶은 상상해 볼 수도 없는 자신에게 안전한 벽이 되어주고 있는 남자였다.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은 직감했지만 부디 믿을 수 있는 말이길 바라며 이용태가 시키는 대로 약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정말로 에너지가 넘치고 중독되는 느낌도 없었기에 안심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투약 횟수와 투약량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도저히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 안의 금고에는 아직도 필로폰과 주사기가 숨겨져 있다. 문희경은 이용태의 지시대로 금고 안의 필로폰을 덜어 연고 안에 숨겨서 변호사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이용태가 거짓 진술을 하라고 했을 때도 문희경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이용태가 하루빨리 석방되어야 가게 경영에도 차질이 없을 테고 그것이 자신도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이용태의 울타리 밖으로 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몰골을 보니 이용태에게 매여 있는 것이 과연 살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용태는 자신에게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다.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는 한 한때의 이용 가치가 있을 뿐.

골수까지 뽑아 먹힌 후 늙고 병든 마약중독자가 되어 버려지면 그때 남는 선택지는 길거리를 헤매다 객사하는 것뿐일 테다.

문희경은 나쁜 상상을 떨치려 급히 화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얼굴에 짙게 드리운 중독자의 안색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려보려고 필사적으로 애쓸수록 화장이 과장되게 두터워지며 기괴한 인상이 되어갈 뿐이었다.

문희경은 결국 브러시를 집어 던지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볼을 따라 눈물 자국이 그려지며 화장이 일그러진다. 문희경은 더 참지 못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인천검찰청 강력부 마약전담반입니다.

수신이 되자마자 문희경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거기 여자 검사님 한 분 계시죠? 그분 좀 바꿔주세요.”

즉각 여검사가 전화를 받았다.

-안소영입니다.

“검사님, 저 문희경이에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자신도 모르게 오열하며 희경은 애원했다. 희경의 흐느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안 검사는 낮은 목소리로 신중하게 답했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마음 놓으세요.

* * *

“검사님, 문희경 씨에게 연락 왔습니다. 진술 변경하겠답니다.”

안 검사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기쁜 기색으로 외쳤다.

오후 내내 태산과 안 검사는 불편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강 검사의 내면이 밑바닥 인생들과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던 태산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안 검사는 문희경의 사정을 미리 짐작한 태산을 보며 자괴감을 느낀 듯했다.

하지만 태산은 안 검사만큼 정의를 추구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검사를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다. 강 검사 정도가 있었을까.

하지만 강 검사도 다른 이들의 평을 듣고 보면 정의와 원칙을 추구하면서도 인간미는 좀 떨어지는 인물이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안 검사는 태산에게 검사의 이상처럼 느껴졌다.

태산은 그런 마음을 전할 셈으로 잘하고 있다고 격려했지만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바람에 오히려 안 검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뭐라 변명하기도 애매해 불편한 상황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좋은 소식이 전해지며 둘 사이를 막고 있던 살얼음은 부지불식간에 녹아버렸다. 태산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보안에 각별히 신경 써서 은밀히 다시 소환하도록 하세요. 아무래도 영상녹화를 통해 진술을 분명히 남겨놓는 게 좋겠습니다.”

“수사 차량으로 이송하는 건 너무 눈에 띄겠죠? 제가 개인적으로 만나서 데려올까요?”

“그것도 좋겠네요. 하지만 검사를 따로 만난다는 얘기가 나와선 안 되니 황수진 실무관을 대신 보내는 게 좋겠어요. 지인을 만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접선해 황 실무관 개인 차를 타고 검찰청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안 검사는 의욕을 불태우며 집무실을 나갔다.

다음 날 오후, 문희경은 황수진 실무관과 함께 은밀히 검찰청으로 들어왔다. 주차장과 민원실 로비, 엘리베이터 등에 미리 배치한 수사관들이 007 작전을 방불할 정도로 긴밀히 연락해 사람의 인적이 없는 틈을 타 취조실로 입장했다.

태산이 영상녹화실로 들어섰을 때 문희경은 안 검사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산을 올려다보는 문희경의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진술을 철회하고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애초 자신을 강하게 압박하며 ‘나쁜 검사’ 역할을 했던 장본인이 등장했으니 절로 경계가 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태산은 취조 전 문희경을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어려운 결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술 내용은 다른 증거를 포착하기 전까지 수사의 단서로만 사용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검찰과 저의 명예를 걸고 문희경 씨의 안전은 반드시 지켜 드릴 테니 안심하고 협조하셔도 좋습니다. 또한 문희경 씨의 투약 부분에 대해서는 완치될 때까지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형사처벌을 하지 않겠습니다. 원하신다면 국립부곡병원에 입원 절차를 밟아 완치까지 무료로 치료받으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생각 외로 사려 깊은 배려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문희경의 태도도 조금 풀어졌다. 그제야 태산은 취조를 시작했다.

“어떤 경위로 전윤철 변호사에게 마약이 든 피부 연고를 건넸나요?”

문희경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결연한 얼굴로 털어놓았다.

“용태 씨가 집 안 금고 안에 히로뽕을 숨겨두었으니 비닐에 담아서 연고 속에 숨겨 변호사님께 건네주라고 했어요. 변호사님께는 미리 말을 해놓았다고요.”

“필로폰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변호사에게도 알렸다고 하던가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냥 변호사가 연고를 전달해 주기로 했다고만 말해서…….”

태산은 쓴 입맛을 다셨다. 변호사까지 엮어 넣기는 역부족인가.

“필로폰의 출처에 대해서는 이용태에게 들은 바 있습니까?”

“아니오. 그냥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약을 처음 시작한 것도 용태 씨가 권해서였고.”

“문희경 씨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지는 않았나요?”

그 질문에 다다르자 문희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태산은 문희경이 마음을 진정시킬 때까지 잠깐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문희경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진술을 이어갔다.

“…저뿐만 아니라 용태 씨 소유 유흥업소의 종업원들 중 어느 정도 연차가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 약을 하고 있어요. 빚을 지게 해 잡아두는 게 옛날 수법이라면 지금은 약으로 잡아두고 있는 셈이죠. 다음 단계는 그렇게 잡아둔 종업원들을 통해 단골손님들에게 약을 영업하는 거구요. 한번 맛을 보고 나면 손님들이 먼저 약을 찾아요. 심지어 업장에서 손님과 함께 약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생각보다 훨씬 충격적인 실태에 태산은 할 말을 잃었다. 안 검사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산을 돌아보았다.

“이용태가 실소유 하고 있는 업소가 어디 어디입니까?”

“저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문희경이 하나하나 업소명을 댄다. 범진이 사전에 조사해 준 업소 목록과 대체로 일치했다.

진술이 끝나고 문희경을 황 실무관 편에 돌려보낸 후 태산과 안 검사는 심각한 얼굴로 집무실에 마주 앉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네요. 지금까지의 혐의를 바탕으로 압수수색영장 받아서 자택 수색하면 문희경 씨를 노출시키지 않고도 증거 확보는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영장 신청할까요?”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압색 들어갔다가는 업장들 정리하고 꼬리를 끊을 가능성이 커요. 그러면 유통 혐의를 입증하기는 어려워집니다. 믿을 것은 문희경 씨의 증언밖에 없는 셈인데 그런 상황이 되면 이용태 쪽에서도 문희경 씨를 집중적으로 흔들려고 할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이니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어요. 그런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은 처음 했던 약속과도 다르고요.”

“그렇다면 어떻게…….”

안 검사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마약을 유통하는 것이 확실한 업장들 중심으로 현장을 덮쳐 일제 검거해야죠. 투약한 종업원과 손님 등이 다수 체포되면 개개인의 진술 부담은 줄어들 겁니다. 누구한테서 어떤 정보가 나왔는지 특정하기도 힘들어질 테고요.”

안 검사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문희경 씨에게는 당분간 지금과 변함없이 계속 출근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업장에서 마약 파티가 벌어질 때 우리에게 살짝 언급만 해주면 바로 출동하겠다고 하고요. 우리 마약전담반은 그때까지 비상대기상태에 들어갑니다.”

“네, 알겠습니다.”

안 검사가 의욕적으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 검사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집무실에 다시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고 태산은 지레짐작해 물었다.

“문희경 씨가 협조 못 하겠답니까?”

“아니요. 의외로 선뜻 수락했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점이 있다는군요.”

“뭔가요?”

“고급 유흥업소인 만큼 고객들이 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이용태와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단골 중에 꽤 잘나가는 사업가가 있는데 국회의원 자제라는군요. 이용태가 곧잘 친분을 과시하면서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듯이 굴었다고 합니다. 문희경 씨는 자신이 설령 정보를 제공한다 해도 고객들에게까지 수사가 제대로 미치겠느냐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용태만이라면 몰라도 고객들까지 건드리면 역풍이 있을 거라고요.”

태산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일제 검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기밀을 유지할 것이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검거 후에 압력이 내려오든지 하겠죠. 그 전까지는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전혀 아닙니다.”

태산은 잘라 말하고는 지시했다.

“문희경 씨에게도 그렇게 전해주세요. 수사는 우리가 책임지고 할 테니 뒷일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태산의 단정적인 말에 안 검사의 근심 어린 표정도 누그러졌다.

“네, 그렇게 말해두겠습니다.”

안 검사가 나간 후 태산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생각했다.

국회의원 자식이라… 뜻밖의 대어가 또 하나 숨어 있었나.

* * *

“이 사장 구치소까지 마약 숨겨 들어갔다가 걸렸다며? 암튼 그 자식 정말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니까.”

이용태 소유의 룸살롱 러브시티의 룸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던 문희경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잔뜩 거들먹거리며 얘기하고 있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이제까지는 내가 좋은 변호사도 소개시켜 주고 아버지 친구들한테 아쉬운 소리까지 해가며 도와줬지만 그 정도까지 나대는 데는 두 손 들었어. 이 사장도 좀 쓴맛을 보고 나와야 정신 차리지.”

사내의 이름은 이현수. 이용태의 절친으로 무슨 투자회사 대표에 아버지가 국회의원이고 유력한 지인도 많다고 했다.

“용태 씨가 좀 막무가내인 데가 있잖아요. 저도 그 때문에 검찰청 들락거리느라 피곤해 죽겠어요.”

희경은 이쪽을 돌아보는 이현수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안 도와주시려고요?”

애교를 담아 사내의 잔에 술병을 기울이려는데 이현수가 훠이훠이 손을 젓는다.

“야, 됐다. 니 술은 받기 싫으니까 좀 떨어져 앉아. 내가 용태랑은 형제 같은 사이고 둘 다 전주 이씨라 사촌 삼기로 했는데 너랑 놀면 형제끼리 동서 간 되는 것 같아 기분이 드럽단 말이야.”

“됐어요. 저도 오빠 싫어요. 이쪽 사장님이 훨씬 젠틀하시고 미남이시고…….”

희경은 따르려던 술병을 그대로 옮겨 자신의 옆자리 남자에게 따르며 간지러운 눈짓을 보냈다. 후하게 쳐줘도 결코 미남이라고는 볼 수 없는 남자가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희경의 허벅지를 더듬는다. 손이 슬금슬금 치마 속까지 기어 들어올 기세라 희경은 슬그머니 몸을 빼며 다리를 꼬고는 화제를 돌렸다.

“용태 씨 이번에는 좀 힘들겠죠? 오래 살고 나올까요?”

“단순투약으로 걸린 거라며? 그럼 그렇게 오래 있진 않을걸.”

이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낄낄 웃었다.

“그래도 서방이라고 오래 떨어져 있을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네?”

희경은 그저 빙긋 웃었다. 자신이 걱정하는 것은 검찰이 제대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이용태가 너무 일찍 풀려나는 것이라는 것을 이현수가 알 리 없다.

희경의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슬쩍 운을 뗀다.

“이 대표, 얘기했던 그건 언제 맛볼 수 있나?”

이현수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쿠! 우리 김 사장님 완전히 몸이 다셨네. 뉴비라 참을성이 없어요.”

“안 그래도 술만 마시려니까 영 흥이 안 나던 참인데 슬슬 들여오죠?”

다른 일행도 은근히 부추긴다.

“그럴까?”

이현수도 마음이 동하는 듯 혀로 입술을 핥고는 말석에 앉은 호스티스에게 말했다.

“야, 너 나가서 찬술 한 잔씩 들이라고 해라. 여기 언니들 것도 내가 싹 쏠 테니까.”

이미 중독 증세를 겪고 있는 막내 호스티스가 반색하며 일어섰다.

막내가 나갔다 들어온 후 곧 웨이터가 주사기와 생수, 작은 비닐 팩에 담긴 필로폰을 쟁반 위에 올려 들고 들어왔다.

이현수는 능숙하게 필로폰을 주사기에 담고 생수로 희석해 한 잔 분량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정맥을 찔러 약물을 주입해 넣었다.

이현수의 투약을 신호로 호스티스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 약물을 희석해 파트너의 팔에 주사해 주고 자신의 것도 만든다. 희경은 떨리는 손으로 필로폰 주사기를 김 사장의 팔에 주사했다.

“자기도 맞아야지?”

김 사장이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눈빛이었다. 각성상태에서 절정에 오르는 극도의 쾌감. 그 성적흥분을 못 잊어 희경도 거듭 약에 손을 대곤 했다.

희경은 혐오감을 애써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화장실 좀요.”

이현수가 별일이라는 듯 희경을 돌아본다.

“니가 웬일이야? 평소엔 먼저 맞지 못해서 안달을 하더니.”

이현수는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라지만 희경은 뜨끔해 변명했다.

“뭘 잘못 먹었나 배가 살살 아파서… 금방 올게요.”

희경은 급히 문으로 다가갔다. 이현수가 다시 한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룸 안에 화장실 있잖아. 뭐 하러 밖에까지 나가?”

희경의 심장이 다시금 덜컹 내려앉았다.

눈치챈 건 아니겠지? 희경은 떨리는 손끝을 간신히 잡아 누르고는 현수를 뒤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오빠들한테 적나라한 생리현상 소리까지 들려주고 싶지는 않다고요. 나도 자존심이 있는 여자거든요?”

희경의 대꾸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영부영 넘어간 것 같아 희경은 그 틈에 볼일이 급한 것처럼 서둘러 룸을 빠져나왔다.

룸을 나온 후 희경은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변기 위에 걸터앉아 밖에서 희경의 연락만 기다리며 잠복 중인 강 검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VIP룸에 찬술 들어갔어요. 빨리 오세요.]

희경은 문자를 보낸 후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오늘 밤 상황이 끝날 때까지 이 화장실 칸 안에 박혀 꼼짝 않을 셈이다. 제발 한시라도 빨리 끝나주길 바라며 희경은 의식하지 못한 채 곱게 칠해둔 손톱을 물어뜯었다.

한편 룸살롱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승합차를 대고 대기 중이던 태산은 문자 알림음이 울리자 반사적으로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희경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태산이 수사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로 들어갑니다.”

태산이 먼저 승합차에서 내린 후 마약전담반 수사관들과 인천지검 강력부에서 지원받은 수사관들이 뒤따라 우르르 내렸다. 태산은 업소 안으로 돌입하기 전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안 검사에게 지시했다.

“B팀과 C팀에도 들어가라고 연락하세요.”

“네.”

B팀은 마약전담반 610호 검사실 수사관들과 강력부 수사관들로 구성되었으며 구태호 검사의 지휘로 이용태 소유의 호스트바 인근에 잠복 중이었다. 배진만 부장이 광역수사대의 지원을 받아 꾸린 C팀은 이용태가 소유한 클럽에 나가 있었다.

한 곳을 단속하면 다른 곳에서 연락받고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을 생각해 동시에 진입하기로 한 것이었다.

태산은 수사관들과 함께 룸살롱 입구로 뛰어들었다. 시커먼 사내들이 우르르 뛰어 들어오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종업원들이 동분서주한다. 곧 어깨가 떡 벌어진 거구의 기도들이 몰려들어 복도를 막아섰다.

“니들 뭐야? 남의 영업장에서 뭐 하는 거야?”

태산은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인천지검 강력부 마약전담반 강바른 검사입니다! 단속 중이니 비켜서세요!”

태산은 그렇게 외치며 어깨의 등 뒤를 넘겨다보았다. 다행히 아직 안쪽 VIP룸은 조용했다.

하지만 앞을 막아선 어깨들은 좀처럼 길을 내주지 않았다.

“공무집행방해로 들어가기 싫으면 비켜!”

“뭐야? 니들이야말로 영업 방해잖아!”

“약 파는 새끼들이 영업을 보장받으려고 해?!”

“누가 약을 판대?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고성이 오가고, 수사관들과 기도들이 밀고 당기며 실랑이했다. 하지만 태산은 이런 데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태산은 가장 가까이 선 기도의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앞으로 밀고 나가며 전진했다.

“어어~”

뒤쪽을 막고 있던 기도들이 맥없이 밀리며 쓰러지고 밟혀 진입할 공간이 생겼다. 태산이 바로 뛰어들려는데 VIP룸 쪽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던 거구의 기도 하나가 그대로 태산에게 주먹을 날렸다.

태산은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주먹을 맞았다. 상당한 위력의 주먹에 태산의 얼굴이 모로 돌아갔다. 수사관들은 흠칫 놀라 침묵했다. 때린 기도조차도 그렇게 제대로 들어갈지 모르고 엉겁결에 후려친 것인 듯 멈칫한 채로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태산의 고개가 서서히 바로 돌아온다. 분명 주먹에 제대로 맞아 고개가 돌아갔건만 얼굴에는 타격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태산은 악의를 담아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니가 먼저 때렸다? 여기 다들 봤어. 이거 명백히 공무집행방해고 지금부터는 정당방위다. 오케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태산은 기도를 향해 크로스카운터를 날렸다. 기도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 저만치 날아갔다. 날아가 복도 구석에 구겨지는 기도를 보며 룸살롱 안은 잠깐 정적에 잠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사관들이 와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기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사이 태산은 복도를 달려 VIP룸으로 육박했다. 중간에 막아서는 놈들은 그대로 몸으로 부딪쳐 탱크처럼 밀어내고 VIP룸에 도달했다.

룸 문을 열려는데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는다. 밖의 소란에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채고 누군가 재빨리 안에서 문을 잠근 모양이다.

태산은 그대로 힘을 주어 손잡이를 돌렸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박살 나고 문이 떨어져 나온다.

문 안으로 뛰어든 태산은 룸 안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헐벗은 남녀가 빛을 본 바퀴벌레처럼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있었다. 새된 비명을 지르며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몸을 가리는 여자, 허연 엉덩이를 드러낸 채 덜덜 떨며 테이블 밑으로 기어드는 사내, 룸 구석에 얼굴을 처박고 자기한테 안 보이면 남에게도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 숨죽이고 있는 사내, 젖가슴을 내놓은 채 문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여자. 그 와중에도 약에 취해 교성을 올리며 여전히 정사에 여념이 없는 남녀도 있다.

테이블 위에는 주사기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고 하얀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필로폰의 잔해가 분명했다.

절로 구역질이 날 것 같아 태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리수거도 안 될 쓰레기들…….”

태산은 중얼거리며 여전히 호스티스를 누르고 있는 사내의 덜미를 잡아 떼어내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전원 마약 투약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정신 챙기고 고분고분 따라오지 않으면 거칠게 다뤄줄 테니 알아서 해. 수갑 차기 전에 먼저 옷부터 꿰입으라고.”

태산의 말에 다른 놈들은 슬금슬금 제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으나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간 놈은 벌벌 떨며 나오지를 않는다. 태산은 한숨을 쉬고는 사내의 발목을 잡아 끌어낸다.

“으악! 으악!”

사내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끌려 나왔다. 그 틈에 호스티스 하나가 슬금슬금 문 쪽으로 기어 나가려다가 마침 들어오는 수사관에게 가로막혔다. 하명중 수사관이 여자에게 수갑을 채우며 룸 안을 둘러보고는 혀를 내두른다.

“아주 난잡하게들 놀았네요.”

“증거 확보하고 현행범들 연행 부탁합니다.”

태산은 하 수사관에게 자리를 맡기고 룸을 나왔다.

태산이 VIP룸으로 진입하는 사이 다른 수사관들은 사무실을 확보하고 있었다. 태산은 거침없이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한쪽 벽에 있는 금고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희경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눌러보았다.

문희경은 이용태가 필로폰을 구치소로 반입하라고 지시하면서 집 금고 비밀번호만 알려주었다 했다. 하지만 단순하고 조심성 없는 이용태의 성격상 사무실 금고 비밀번호도 집 금고 비밀번호와 같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번호를 누르자 잠금이 해제된다. 문희경의 말대로였다.

태산은 금고 문을 망설임 없이 벌컥 열었다.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든 비닐 팩 세 덩이와 주사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태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당한 양이로군. 역시 여기가 이용태의 필로폰 유통 본부인 건가.”

수사관들도 웅성거리며 몰려와 금고 안을 들여다보며 탄식했다.

중요 증거를 확보한 후 수사관들은 룸살롱 안을 싹 훑으며 뒷정리를 했다. VIP룸뿐 아니라 다른 룸에서 약을 하던 자들도 모조리 색출해 연행했다. 화장실에 숨어 있던 문희경은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사유를 들어 은밀히 귀가 조치 했다.

현장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고 철수하기 직전 태산이 차고 있던 무전기가 울렸다. 안 검사의 목소리다.

-B팀, C팀도 증거 확보했다고 합니다. 작전 성공입니다.

무전기 소리에 현장에 있던 수사관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울렸다. 태산도 빙그레 웃음 지었다.

* * *

“이현수 씨, 전에도 약물 관련해 체포된 기록이 있네요. 이번이 세 번째인데요.”

태산은 이현수와 관련된 수사 기록을 확인하며 내심 혀를 찼다. 이전까지 필로폰 투약으로 두 번이나 체포되고도 모두 치료한다는 조건으로 기소유예를 받았다. 역시 든든한 백이 있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태산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본다. 지난밤 단속이 들이닥쳤는데도 호스티스와 섹스하는 데 여념이 없던 막장 약쟁이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체포된 후 임시로 검찰청 건물 안의 구치감에 갇혀 있다가 불려 나온 것이다.

문희경에 따르면 바로 이놈이 전도유망한 청년 사업가이자 국회의원의 아들이라는 놈이었다. 문희경의 말만 전해 들었을 때는 유흥업소 사장에게 과시하듯 한 소리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느냐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수사 기록을 보니 꽤 먹어주는 뒷배가 있긴 한 모양이다.

“예, 죄송합니다. 치료를 한다고는 했는데 잘 안 끊어지네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젯밤 보았던 답 없는 모습과는 다르게 제법 예의를 차려 공손하게 답한다. 하지만 수사기관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있다는 긴장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전처럼 쉽게 풀려나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태산은 내심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예, 뭐 그건 알아서 하시고요. 이미 필로폰 투약 이력이 두 번이나 있으니 더 이상은 봐줄 수 없겠네요. 구속수사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징역 살 각오 해야 할 겁니다.”

태산의 말에 이현수가 눈을 흡 뜬다.

“하, 하지만 단순투약일 뿐인데…….”

“단순투약이라도 이 정도 반복되면 끊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죠.”

태산은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면 끊을 생각이 없든가.”

“아, 아니요. 저는 정말 끊을 결심으로…….”

이현수가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태산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구속 여부에 이의가 있으면 영장실질심사 때 판사 앞에서 얘기하세요. 그리고 정말로 단순투약인지 아니면 이용태와 마약사업을 동업하기로 하고 영업을 뛰었는지는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요. 듣자 하니 이용태와 절친 사이라던데…….”

태산의 추궁에 이현수는 발끈해서 발뺌했다.

“누가 그래요?! 절대 아닙니다! 그냥 가게 물이 좋아서 종종 다니다 보니 안면이 생긴 것뿐이에요.”

태산은 쓴웃음을 입가에 걸고 가만히 이현수의 변명을 들었다. 약쟁이들의 의리란 얼마나 알량한가. 결국 자신한테 불리할 것 같으니 재빠르게 손절하는 것이다.

태산이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으니 이현수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으며 이 말 저 말 둘러댔다.

“약만 해도 그 자식만 아니었다면 다시 시작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 자식이 하도 권해서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살짝 맛만 본다는 게…….”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면 실언을 하게 마련이다. 태산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이용태의 권유로 약을 다시 시작했다? 지금 이용태는 구치소에 수감 중인데요. 그렇다면 어젯밤 한 차례가 아니라 이용태가 수감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약을 해왔다는 얘기죠?”

이현수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되더니 입을 닫았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태산이 뭐라 물어도 입을 꾸욱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묵비권 행사하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종업원들도 이현수 씨가 러브시티 단골이었고 방문 때마다 투약했다고 진술했어요. 증거가 산처럼 쌓였는데 차라리 빨리 실토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면 판사가 조금이라도 감안해 줄지 모르죠.”

그제야 여유 만만이던 이현수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현수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요구했다.

“저, 전화 한 통화만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기소유예로 그치도록 힘을 써준 누군가에게 연락할 셈인가? 태산은 딱 잘라 거절했다.

“죄짓고 피의자로 검사실 와 있으면서 요구가 많네요. 우린 개인 통화 제공할 의무 없고요. 변호사를 부를 셈이면 구치감으로 돌아가서 절차에 따라 하세요.”

그런데 취조를 끝낸 직후부터 갑자기 정체불명의 전화들이 걸려오기 시작했다.

-강 검사, 나야. 김종웅 부장.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꺼내는 말에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누구시죠?”

태산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상대가 흠흠 헛기침을 한다.

-기억 안 나나? 자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있을 때 내가 자네 직속 상사였잖나.

그때의 일이 기억날 리가 없다. 그때는 강바른이었지만 지금은 임태산이므로. 태산은 애매하게 답했다.

“아, 예… 그런데 무슨 일로…….”

태산이 단도직입으로 용건을 묻자 상대는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어, 음… 그게… 어제 어젯밤 자네 부서에서 마약 사건으로 체포한 이현수 대표 있잖나. 내가 그 친구랑 좀 아는 사이인데 참 건실한 기업인이야. 사람 됨됨이는 진국인데 나쁜 지인들 꾐에 빠져서 약을 좀처럼 끊지 못하는 게 개인적으로 너무 안타까워서 말이야. 내가 보증할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학부형 전화도 아니고 이 무슨 ‘우리 애는 착한데 나쁜 친구들이 꼬여서’ 핑계란 말인가. 앞으로 어떤 레퍼토리가 나올지 뻔히 들여다보였다.

다른 검사가 직속상관이었던 검사 선배의 로비 전화를 받았더라면 대놓고 거절은 못 하더라도 얘기를 들어주는 척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산은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이야기를 참고 들어줄 인내심이 없었다.

“안 그래도 지금 그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요. 일이 마무리되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산은 마치 스팸전화를 거절하는 사람처럼 가차 없이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강바른 검사, 나 정민후네.

“누구시라고요?”

태산이 되묻자 잠시 정적이 흐르는 것까지 똑같았다.

-하하하, 자네도 참. 자네 연수원 있을 때 형법 가르쳤던 정민후 말이야.

이 사람은 숫제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각별히 영특한 제자여서 내 자네를 참 많이 아꼈지. 요즘 활약은 잘 지켜보고 있네.

“아, 예…….”

-다름이 아니라 내가 지금은 로펌으로 옮겨 자문을 맡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로펌에서 이현수 대표 사건을 맡았어. 내가 그 부친과도 잘 아는 사이고…….

또냐?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교수님, 그 건은 재직 중이신 로펌 변호사가 알아서 잘할 겁니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연락드리죠.”

이후로 대뜸 전화해 아는 체부터 하는 전화는 용건을 듣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여~ 강바른이!

“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강바른 검사, 나예요.

“지금 바쁩니다.”

-강 검사…….

“…….”

나중에는 이름만 나와도 끊어버렸다.

“뭐야, 이놈들은…….”

태산은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강바른 검사 성격에 로비를 들어줄 만큼 가깝게 지내는 이들이 이렇게 많을 리 없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으면 싹 쓸어 전화를 돌리게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현재 인천지검은 직전에 검사장과 제1차장이 뇌물 스캔들로 낙마하고 제2차장이 검사장 대행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체제였다. 청탁을 주고받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울 시점이다.

그러니 그나마 전화 러시로 그쳤지 우현중 검사장이 건재했다면 분명 직접적으로 수사 방해가 들어왔을 것이 분명했다.

“성가시게 하는군.”

태산은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서 던져 버렸다.

“지금까지 수집한 증거와 관련자들 진술에 따르면 이용태의 마약 유통 혐의를 증명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다만 이현수의 경우 상습 투약 사실은 인정되지만 유통 혐의까지는 적용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렇다 해도 도주와 증거인멸의 위험은 있다고 판단되어 구속수사 하기로 했습니다.”

태산은 배진만 부장에게 수사 추이를 보고한 후 이현수 관련 로비 전화들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배진만 부장이 빙그레 웃음기를 띠었다.

“여기저기서 압력이 많이 들어오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는 배 부장을 태산은 새삼 바라보았다.

“배 부장님도요?”

배 부장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야 워낙에 불통인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서 한동안은 청탁 전화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전화에 불이 붙었어. 글쎄 우리 문중 어르신까지 전화를 하셨지 뭔가. 그 어른이 자유대한당 당원이라 여기저기 동원되어서 많이 다니긴 했는데… 이종길이 끗발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야.”

배 부장의 말에 태산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자유대한당 이종길 의원 말입니까?”

“그래. 이현수 부친이잖나.”

이현수의 국회의원 아버지가 바로 이종길이었단 말인가.

이종길은 구준태 인천시장과 같은 자유대한당 소속으로 친환경산업 게이트 당시에 구준태 의원을 적극적으로 지원사격 했던 인물이다. 때문에 태산은 이종길 의원에게까지 커넥션이 닿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 중이었다.

그런데 그 이종길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마주친 것이다.

“적당히 예, 예 하고 맞장구쳐 줘. 고려해 보겠다 정도로만 답하고 무시해도 되니까. 어차피 청탁 받은 대로 일 처리를 하지만 않으면 되잖아. 다 법조계 선배인데 싸가지 없다고 찍혀봐야 자네에게 좋을 게 없지.”

“그건 배 부장님이 찍혀봐서 아시는 건가요?”

태산이 맞받아치자 배 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이어 쓰게 웃었다.

“그래, 내가 겪어봐서 아네. 난 이미 망했으니 자네는 조심하라고 충고하는 거 아닌가.”

출포검인 자신을 자조하는 듯한 투였다. 후배들마저도 부장을 달 때 홀로 부부장 직급으로 버티고 있는 명색만 부장인 배 부장이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을 것인지는 다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배 부장도 딱히 아쉽다거나 후회하는 투는 아니었다.

태산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강바른 검사가 그동안에도 딱히 싸가지 있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태산의 답에 배 부장이 껄껄 폭소를 터뜨렸다.

“남 얘기 하듯 하긴가? 딴은 그렇군.”

사실 남이라면 남이기도 했지만.

“얘기 다 들어주고 고려하겠다고 답해주면 결과가 어떻든 청탁이 통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다가 자기네들이 원하는 것보다 요행히 결과가 좋게 나오면 청탁이 통했다고 떠벌리고 다닐 테고요. 그렇게 되면 또 전관 통해서 청탁 넣으려고 난리들이 날 겁니다.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도 확실히 거절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법조계 선배들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청탁이 통하는 검사가 되면 걸려올 수많은 전화들을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런 귀찮은 일은 질색이다.

배 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정론이긴 하지.”

배 부장이 긍정하자 태산은 빙긋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싸가지 없다는 소린 제가 듣는 거니까요. 충고는 감사합니다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배 부장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았네. 살살 하게.”

* * *

그날 퇴근해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다가가는데 엘리베이터 근처에 못 보던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선팅을 짙게 한 검은색 제네시스다.

차를 힐끗 한번 보고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조수석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강바른 검사님이시죠?”

태산은 어리둥절해 돌아보았다.

“그런데요.”

그러자 승용차 뒷좌석의 창문이 열리며 창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뉴스에서 종종 봤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국회의원 이종길이다.

“반갑습니다. 나 이종길이오.”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전화를 돌리다 돌리다 안 되니 직접 행차까지 하셨나. 정치생명을 유지하려 몸을 사릴 만도 한데 자식이 유달리 애틋하긴 한 모양이다.

“잠시 얘기 좀 합시다.”

“무슨 얘기를 말입니까?”

용건이야 뻔했지만 태산은 모른 척 되물었다. 차 안에서 거만하게 앉아 말하던 이종길이 그제야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간곡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식 걱정에 한달음에 달려와 내내 기다린 아비를 참 무안하게 만드십니다. 성의를 봐서라도 한마디만 들어주십시오.”

그러더니 깊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부탁합니다.”

이종길이 자세를 낮추자 운전석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이 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이종길이 이렇게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라는 뜻일 테다.

태산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이종길 같은 사람이 자식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유복자로 자랐던 태산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신기하고도 알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부성에 대한 그리움이 일종의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웅배를 목숨 걸고 따르며 신뢰했던 것도 유년 시절 아버지의 부재를 대체해 준 것이 바로 이웅배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타시죠.”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종길을 다시 차에 밀어 넣고 자신도 올라탔다.

“아무리 급해도 검사 집 앞까지 찾아오다니 남들 이목이 안 두려우십니까? 검사한테 청탁 넣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면 곤란하실 텐데요.”

“정치인으로서는 안 될 일이지만 아비 마음은 또 다르지요. 이 자리는 정치인 이종길로서가 아니라 현수 아비로서 온 겁니다.”

이종길의 약한 소리에 태산은 방어벽이 조금 낮아지고 말았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실랑이하기도 피곤하니까 빨리 끝냅시다.”

태산은 삐딱하게 되물었다.

배진만 부장의 조언처럼 반영은 안 할 테지만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주자 마음먹은 것이다.

“정치인으로 사느라 평생 아비 역할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습니다. 혹시나 자식이 내 체면을 깎아먹지는 않을까 항상 엄격하게 대하고 기준에 못 미치면 가차 없이 꾸짖었죠. 같이 놀아주며 시간을 보내주기는커녕 살가운 말 한마디 해준 적이 없네요. 현수가 약에 빠지고 난 후에야 뒤늦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회고하는 것처럼 먼 산을 보며 얘기하던 이종길이 문득 태산을 바라보며 호소하듯 말했다.

“현수 그놈이 그렇게 된 건 다 제가 잘못 가르쳐서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아껴주고 사랑을 베풀었다면 그렇게 엇나가지는 않았겠지요. 다 제가 미력한 탓이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책임지고 갱생시키겠습니다. 또 한 번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엄벌하셔도 이의 없습니다.”

“뭐… 고려해 보죠.”

태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도 듣는 척은 해주었으니 부모 마음은 이 정도면 위안이 되겠지. 태산으로서는 배려해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배려한 셈이다.

“그럼…….”

태산은 그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일어섰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데 보좌관이 재빨리 다가와 태산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태산은 받은 물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태산의 손에 들린 것은 드링크제 상자였다.

“이게 뭡니까?”

“의원님이 준비하신 작은 성의입니다.”

순간 태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상자 안에 든 것이 드링크제가 아니라는 것은 눈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고려하겠다는 태산의 말을 이종길은 청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했을까? 혹은 청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못 박으려는 것일까?

태산은 어처구니없어 차 안에 앉은 이종길을 돌아보았다. 이종길은 기름진 미소를 띠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본이 썩어빠진 모리배 놈 같으니라고. 틈이 보인다 싶으면 와이로를 먹이려고 미리 준비한 것일 테지.

태산은 상자를 든 채 뚜벅뚜벅 이종길에게 다가갔다. 이종길이 슬그머니 차창을 올리려고 했으나 태산이 올라가는 창을 손으로 잡아 세웠다.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차창이 꼼짝도 하지 않으니 이종길은 당황해 그제야 태산을 바로 보았다.

태산이 허리를 숙여 이종길을 코앞에서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분노로 눈을 빛내며 씹어 먹을 듯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짓거릴 하면 당신 아들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어. 형기 꽉 채워서 구형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말을 마치고 차창 사이로 드링크제 상자를 던져 넣은 태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리를 펴고 말했다.

“정치인이 아니라 아버지로 오신 거라고 하니 딱 한 번만 봐드리죠. 또다시 이런 수작질을 하면 증뢰죄로 바로 입건하겠습니다.”

태산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태산이 노려보고 있을 때는 옴짝달싹 못 하던 이종길이 돌아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 대고 악담을 퍼부었다.

“국회의원이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데도 무시하다니… 강 검사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혼자만 그렇게 잘나서 얼마나 출세하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태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뒤를 휙 돌아보았다. 움찔 놀란 이종길이 허둥지둥 차창을 올리며 보좌관을 향해 외쳤다.

“뭐 해? 얼른 출발해!”

“예, 의원님.”

멍하니 서 있던 보좌관이 헐레벌떡 운전석으로 뛰어갔다. 보좌관이 차에 타자마자 제네시스는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태산은 사라지는 이종길의 차 꽁무니를 보며 혀를 찼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기운차게 인사하며 검사실로 들어서는 태산을 보고 안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검사님, 혹시 이거 보셨어요?”

보수성향의 대표 신문 한 부를 내밀며 안 검사가 물었다. 왜 그러나 하고 태산은 신문을 받아 들었다. 신문 사회면의 4단 기사를 안 검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이현수가 이젠 언론플레이까지 하네요.”

태산은 안 검사가 가리킨 기사를 미간을 모으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저를 교도소로 보내주십시오” 이현수 씨 눈물의 참회]

기사 제목을 보고 태산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하고 생각하며 서둘러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하다 새벽에 집에 들어가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히로뽕 생각이 간절해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이 충동을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교도소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히로뽕 투약 혐의로 검찰이 지난 23일 구속기소 한 자유대한당 이종길 의원의 장남 현수 씨는 히로뽕의 마수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책감 때문에 형사처벌을 자청했다. 검찰 관계자는 원한다면 이번에도 형사처벌 하지 않고 치료 조건으로 기소유예를 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현수 씨가 “이번에는 반드시 히로뽕을 끊고 싶다”며 구속기소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두 번이나 약물중독 치료를 받았지만 병원을 나오자마자 또 히로뽕 생각이 났다. 이번에야말로 내 인생에서 히로뽕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고 검찰 관계자는 전했다. 두 차례에 걸친 체포 전력에도 불구하고 현수 씨가 마약에서 손을 떼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외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검찰 관계자는 말했다. 어려서 모친을 사고로 잃고 누나들은 모두 출가하여 일과 후 집에 들어오면 아무도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

수사 상황을 허위로 신문사에 알리고 이현수의 동기까지 살뜰하게 짐작해 주며 북 치고 장구 치는 이 검찰 관계자란 작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저 기자가 뇌피셜로 쓴 기사를 공신력 있어 보이려고 검찰 관계자 운운하는 소리를 끼얹은 것이 아닌가.

[구속 당시 그는 가족은 물론 아무에게도 자신의 구속 사실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 현수 씨는 인천지검으로 찾아온 아버지와의 면담 당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종길 의원은 안타까움으로 눈물만 흘리다…….]

태산은 거기까지 읽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신문을 구겨 버렸다.

“지랄하고 있네. 아주 소설을 쓰는구먼. 이게 대체 기사야, 삼류 멜로드라마야?!”

전방위 로비가 통하지 않으니 이종길 쪽에서 전략을 바꾼 모양이다. 이현수가 실형을 살게 될 것은 확실해 보이니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것인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해 대중의 동정을 사려는 것이다.

“실무관님, 고려일보 박기만 기자 전화 연결해 줘요.”

태산은 황수진 실무관에게 지시하고는 씩씩거리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분을 삭이고 있으니 곧 내선이 울렸다.

-검사님, 박기만 기자 연결되었습니다.

잠시 후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가 전화를 받았다.

-예, 박기만입니다.

“인천지검 강바른 검사입니다.”

-예… 무슨 일이시죠?

상대는 찔리는 데가 있어서인지 다소 위축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산은 비꼬듯 말했다.

“박 기자님, 기사 자알~ 봤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검찰 관계자가 그런 황당한 얘기를 정보랍시고 기자 앞에서 나불댔습니까? 피의자가 구속기소 여부를 제 입맛대로 정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수사 내용을 유출한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데요.”

-죄송합니다. 취재원 보호를 위해 누가 제공한 정보인지는 알려 드릴 수 없겠습니다.

“취재원이 정말 있기는 한 겁니까? 그냥 박 기자가 멋대로 꾸며낸 얘기를 검찰 관계자발 정보라고 둘러대는 건 아닌가요?”

-저희도 취재 윤리가 있는데 설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당신들 회사 원래 조작 기사로 유명하지 않아요? 정말 취재윤 리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네요.”

태산의 말에 갑자기 기자가 발끈하고 나섰다.

-검사님, 자꾸 이렇게 나오시면 명예훼손으로…….

태산이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뭐요? 법으로 한번 해보자 이거요? 전화상으로 한 말은 어차피 공연성이 없어서 명예훼손이 안 돼요. 그보다 명예훼손은 그쪽에서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태산의 본격적인 공세에 박 기자는 멈칫해서 숨을 죽인다.

“당신이 기사에서 언급한 그 검찰 관계자, 수사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고 피의자와 형량 협상까지 가능한 사람입니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해 보면 누가 봐도 주임검사 아닙니까? 그 검찰 관계자가 나라고 특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요. 지금 내가 피의자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그런 개소리를 언론에 전했다고 오해받고 있다 이겁니다. 이거야말로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 아닙니까?”

-그, 그건…….

박 기자는 뭐라 변명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정보 제공한 검찰 관계자가 누군지 당장 밝히세요. 이름을 밝힐 수 없다면 나를 특정한 것으로 보고 명예훼손으로 기소하겠습니다. 기사 통과시킨 데스크도 각오하라고 하세요. 사회부 전체를 탈탈 털어드리겠습니다.”

태산의 엄포에 박 기자가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잠깐만요. 검사님, 진정하시고…….

“진정이라고요? 내가 지금 잠깐의 기분으로 이러는 것 같습니까? 남의 수사에 코 빠뜨리려는 이런 비열한 수작을 그냥 눈감아준다면 검찰 전체의 위신이 깎이게 됩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데스크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 * *

전화기 너머가 시끌시끌하더니 한참 후에야 누군가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고려일보 사회부 부장입니다. 대강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희가 낸 기사에 불만이 있으시다고요?

사회부 부장의 태평한 답에 태산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불만이라고요? 제대로 전달받은 거 맞습니까? 당신네 신문사가 얼토당토않은 허위기사를 썼고 그 때문에 내 명예가 훼손되었으며 수사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이 말입니다.”

-어느 쪽 당사자의 입장에 초점을 맞추었느냐에 따라서 논조가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지요. 허위라고만 받아들이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이현수 입장에서 보면 허위가 아니다? 그 말입니까? 그렇다면 검찰 관계자의 제보까지 조작해 가며 대놓고 이현수의 입장에서 기사를 쓴 저의가 몹시 궁금하네요. 이현수 측으로부터 로비라도 받았습니까?”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사회부 부장이 난감해하며 뭐라 변명을 하려 하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태산은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

“데스크가 기사를 내는 조건으로 뇌물을 받거나 이현수 측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수사를 해봐야겠습니다. 곧 사무실 압수수색 들어갈 테니 각오하세요.”

압수수색이라는 말에 부장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거, 검사님. 잠깐만요. 압수수색이라니요. 저희가 취재원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과실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청탁받고 일부러 조작 기사를 냈겠습니까?

“잘못을 인정한다면 당장 기사 내리시죠. 그러면 향후에 정상참작은 해드리겠습니다.”

고려일보 사회부 부장은 난감한 듯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인터넷 기사는 지금 바로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지면은 이미 나간 것이라 어쩔 수가…….

“최대한 회수하세요. 그리고 내일은 정정 기사가 올라와야 할 겁니다.”

-그것은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국장님과 영업 부서와도 얘기가 되어야 하는데요.

“당장 얘기하세요.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한 시간 내로 협의가 안 되면 바로 영장 청구 들어가겠습니다.”

태산은 그렇게 선포해 놓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약 50분 정도가 지났을 때 고려일보 사회부 데스크에서 부랴부랴 전화가 왔다.

-말씀하신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압수수색만은 거둬주십시오.

“좋습니다. 성의를 보여주셨으니 압색은 철회하겠습니다. 하지만 명예훼손 건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형사는 물론이고 민사도 같이 제기해 손해를 톡톡히 배상받을 테니 법원에서 부르면 성실히 출석하십시오.”

태산은 전화를 끊기 전 한마디를 보탰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기사 제대로 쓰세요.”

전화를 끊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태산은 정신적인 피로감을 느꼈다.

인터넷 기사 송출 시간은 오전 3시. 오전 10시를 지난 지금은 기사를 내린다 해도 볼 사람은 이미 다 보았을 시간이다.

지면 쪽은 어떤가. 요즘은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지만 고려일보는 아직도 일간지 매출 1위를 찍는 전통의 강자였다. 식당만 가도 고려일보를 구독하고 있는 곳이 대다수였고 가판대 가장 잘 보이는 곳도 고려일보가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려일보의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정정 기사를 낸다 한들 그걸 누가 본단 말인가. 이미 기사를 본 사람들에게 이현수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마약에 중독되어 버린 안타까운 청년 사업가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종길은 그런 아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구제하기 위해 사사롭게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는 청렴한 정치인으로 생각하겠지.

“젠장, 그때 바로 증뢰죄로 처넣을 걸 그랬나.”

자식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거니 이해하고 넘겼던 것을 뒤늦게 후회하며 태산은 뼈아프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의아한 느낌이다.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상습 마약사범을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이렇게까지 보호할 일인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것조차 무릅쓰면서.

이종길이 그렇게까지 자식 사랑이 각별한 인간일까. 제 입으로도 젊은 시절에는 자식에게 전혀 애정을 쏟지 않았다고 말했건만.

태산은 문득 생각이 미쳐 이현수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빅월드 인베스트먼트는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명 투자회사다. 이종길의 정치적 근거지인 대구, 경북 일대의 대규모 휴양지 건설사업 등에 투자해 큰돈을 벌어들였다.

급속 성장의 비결은 바로 타이밍이었다. 빅월드 인베스트먼트는 항상 기가 막힌 타이밍에 투자를 들어가 큰 이문을 쓸어 담았다. 이권 사업이 아직 허가도 얻기 전 청사진 단계일 때 귀신같이 알아내 투자하는 것이었다. 절대로 허가가 나지 않을 것 같은 허황된 사업도 빅월드 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하면 성공은 보장되었다.

이것이 과연 이현수의 안목 덕분일까? 아니면 투자한 사업에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내고야 마는 노하우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최근 이현수 대표가 구속기소됨으로써 빅월드 인베스트먼트의 주가는 크게 빠지고 있는 추세였다.

이현수가 개인적인 비행으로 회사에 큰 손실을 안겼음에도 불구하고 주총과 다른 임원진의 동향은 잠잠했다. 다른 회사였다면 임원진이 먼저 나서서 이현수 대표를 해임하려 들었을 것이다.

태산은 빅월드 인베스트먼트의 재무제표를 통해 주식 지분을 조사해 보았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도 이현수가 의결권 있는 주식의 30%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종길이 10% 가까이를 보유하고 있었고 누나들의 이름도 있다.

게다가 아무리 이 씨 인구가 많다 해도 대주주 중에 이 씨가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약 20%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2대 주주 염민중을 제외하면 최대주주 이현수와 10% 내외를 보유한 대주주들은 모두 이 씨였다. 어쩌면 이들 대부분이 가족 등 특수관계인이 아닐까?

특수관계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보유한 주식을 눈대중으로 대충 합쳐보아도 50%를 훌쩍 넘었다.

아마도 빅월드 인베스트먼트는 이종길 일가의 가족회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현수가 물의를 일으켜 회사에 큰 손해를 입혔음에도 이렇게 잠잠한 것이 이해가 간다.

이현수가 구속되는 순간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빅월드 인베스트먼트는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이종길은 그것을 막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전방위 로비를 펼친 것일까.

태산은 마음속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종길이 필사적으로 지키려던 것은 이현수가 아니라 이현수의 회사이자 자기 자신이었다. 이현수와 이종길은 한 몸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애틋한 마음이라 착각하고 사정을 봐주었다니 태산은 분통이 터졌다. 당장에라도 빅월드 엔터테인먼트가 개발허가 실권을 가진 공무원들과 어떤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의 입지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검사님, 피의자 데려왔습니다.”

이흥렬 계장이 집무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태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나갑니다.”

마약전담반은 지금 이용태가 싸질러 놓은 분뇨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연일 약쟁이들 상대로 씨름하는 중이다.

구준태 시장의 환경산업 게이트처럼 이 사건도 때가 될 때까지 잠시 묵혀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태산의 생각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

* * *

어느덧 한 해가 저물고 슬슬 인사이동의 시기가 다가왔다. 일련의 마약 사건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 슬슬 후임자들에게 업무를 인계할 준비를 해야 할 때였지만 마약전담반의 분위기는 싱숭생숭했다.

“마약전담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우리가 일을 너무 잘해놔서 목표를 초과 달성 해버렸으니 슬슬 해산할 때가 된 건가요?”

“뭐 그렇겠지. 와룡회가 설치기 전에는 강력부에서 맡아 하던 업무였으니 이젠 강력부로 흡수되지 않을까?”

“검사님들도 뿔뿔이 떠나시겠네요.”

“어차피 강력부 식구들은 강력부 안에서 빙빙 돌잖아. 다른 지검 강력부 가셨다가 또다시 돌아오셔서 만날 수도 있지.”

“그거 좀 악담 아닌가요?”

611호 검사실 수사관들이 그런 얘기를 나누며 낄낄 웃었다.

2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마약범들과 싸웠지만 너무 열심히 일한 결과로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어 해산해야 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 고락을 함께한 동료들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태산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쉬움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일에만 몰두하려 노력했다.

한창 업무를 보는 도중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이현수 사건이 마무리되는 동안 태산은 쓸데없는 청탁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업무 시간 중에는 아예 핸드폰을 꺼놓고 있었다. 기소 후 재판으로 넘어간 후에야 태산은 다시 전화기를 켜놓았다. 이제부터는 청탁을 하더라도 판사에게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니 민철승 기자다. 기삿거리가 없나 하고 전화한 것일까?

비밀스러운 언론 창구 역할을 해줄 때는 꼭 필요한 사람이지만 태산 쪽에서 별다른 용건이 없을 때는 부담스러운 상대이기도 했다. 기자들은 본능적으로 코를 들이밀고 캐낼 것이 없나 냄새를 맡아대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태산은 조금 망설이다가 느리게 전화를 받았다.

“예, 민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어휴, 강 검사님! 왜 이렇게 연락하기가 힘듭니까? 전화가 통 연결이 안 되네요.

“여러 가지로 바빠서요.”

태산은 짧게 대꾸했다. 민 기자가 서운하다는 듯 답했다.

-어이쿠, 쌀쌀맞으시긴.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이 소식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요. 강 검사님, 서울중앙지검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예? 아직 인사 결과에 대해서는 통지가 없었는데요. 잘못 들으신 것 아닙니까?”

-영 소식이 늦으시네.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확실한 정보입니다. 괜히 기자겠습니까?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세요.

“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중앙으로 다시 올라가면 마약범 때려잡던 실력으로 더 큰 거악과 싸우셔야죠.

순간 전국 강력부장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대통령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강바른 검사가 마약범 잡는 실력으로 비리 정치인을 잡으면 얼마나 대단할지 벌써 기대가 되는데요.]

설마 대통령의 의중이 이번 인사에 영향을 주었을까? 구준태나 이종길을 잡으려면 마약부서에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태산은 민철승 기자의 전화를 끊은 후에도 그것이 신빙성 있는 정보일까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 발표가 났고 태산은 그제야 진위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검사 강바른 → 서울중앙지검 부부장]

인사이동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강 검사는 눈을 의심했다. 서울중앙지검도 중앙지검이지만 단번에 부부장으로 승진이라니. 파격적인 인사이동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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