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사필귀정
“병원으로 가서 추궁해 봤지만, 눈치만 살피고 쉽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 그랬다고 얼버무리는 놈들도 있었고 아예 입을 조개처럼 다문 놈도 있었습니다.”
구태호 검사가 배진만 부장에게 수사 상황을 보고하며 짜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확보한 CCTV 영상은 보여줬나요?”
안소영 검사가 물었다.
“그걸 보여주니 더 겁을 내던데요. 하기야 조직은 박살 나고 자기들은 재기불능이고 이웅배까지 납치된 판에 잘못 입을 열었다간 목숨 부지하기 힘들겠구나 싶겠죠.”
구 검사가 콧방귀를 뀌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건달이란 놈들이 자존심도 없나. 잔뜩 쫄아가지고는…….”
투덜거리는 구 검사에게 배진만 부장이 채근하듯 물었다.
“그래서 참고가 될 만한 진술은 전혀 나온 게 없나?”
“살살 구슬리고 몰아붙여서 이름 하나 간신히 받아냈습니다. CCTV에 찍힌 덩치 작은놈, 태산건설의 김범진 대표 같다는군요. 마담도 그날 현장에 김범진이 있었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업혀 간 건 이웅배가 확실한 것 같고… 그런데 업고 나간 놈은 다들 전혀 모르는 놈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김범진을 소환해서 쪼아보면 뭔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배진만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범진 소환 절차 밟도록 해.”
“신문은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안 검사가 불쑥 얘기하자 배 부장이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가늠하는 표정이다.
안 검사는 희미한 CCTV 영상을 보고 키 큰 남자는 강 검사 같고, 작은 쪽을 인천항에서 강 검사를 도왔던 의문의 사내와 비슷하다고 의혹을 품었다. 첫 번째 오해는 풀었으니 두 번째도 직접 확인해 오해임을 밝히고 싶었다.
“자네 심정은 잘 알겠네. 파트너가 와룡회 놈들에게 죽을 뻔했으니 제 손으로 사건을 해결하고픈 욕심이 생기긴 하겠지. 하지만 사건에 너무 감정을 개입시키진 말게.”
배 부장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꽤나 의미심장하게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안 검사는 단박에 부정했다.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사건에 대해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있어서 확실히 파헤쳐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러고는 뾰로통하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강 검사님은 자기가 무사하다는 거 동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셨잖아요. 그런 강 검사님한테 저라고 무슨 의리를 지키겠어요?”
안 검사의 말에 배 부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화가 단단히 났구먼? 하긴 뭐 멀쩡히 돌아다닌다는 소식에는 나도 황당하긴 했네만.”
웃음기를 거둔 배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김범진이 신문은 자네가 맡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안 검사는 이것으로 의혹을 완전히 일소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소환 당일 김범진이 검사실로 들어서는 순간 안 검사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작고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 인천항 밀수범 검거 때 강 검사를 도왔던 검은 사내들의 리더가 분명하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안경으로 눈빛을 가려 사업가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어림없다. 자동차 하이라이트 불빛 속에 날카롭게 번뜩이던 그 눈빛을 안 검사가 쉽게 잊을 리 없었다.
“실례합니다.”
범진의 인사에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범진이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안 검사를 바라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김범진이라고 합니다. 조사받으러 왔습니다.”
여러 이유로 검사실을 찾은 사람들은 보통 안 검사를 검사라고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검사라는 직업 자체의 이미지가 고압적인 남성의 이미지인 탓에 젊은 여성인 안 검사는 실무관쯤으로 생각하기에 십상이었다. 그런데 범진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안 검사를 딱 찍어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든 범진은 눈을 반달처럼 휘며 미소를 지었다. 안 검사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인천항에서 자신을 달래듯 손을 들어 도닥일 때 보았던 웃는 눈과 너무나 똑같았던 것이다.
안 검사는 애써 동요를 숨기며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산건설 김범진 대표님?”
확인하듯이 다시 묻는다.
“예.”
범진은 넙죽 대답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영상녹화실로 이동하시죠.”
수사관을 따라 고분고분 취조실로 이동한 범진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성실한 태도로 조사를 받았다.
“예, 제가 맞습니다.”
CCTV 영상을 보여주자 범진은 영상 속의 키 작은 남자가 자신임을 선선히 인정했다.
“트렁크에 실린 사람은 현장에 있다 사라진 이웅배일 테고… 그럼 이 사람은 누구인가요?”
안 검사는 트렁크를 닫고 있는 키 큰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희 직원입니다.”
“그렇다면 태산건설 직원과 함께 이웅배를 납치했다는 걸 인정하시는 겁니까?”
“납치라니요. 어디까지나 안전하게 피신시키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범진은 여유로운 태도로 되물었다.
“룸 안의 상황 보셨나요?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웅배 회장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데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 나왔다면 이 회장은 진즉에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피신시킨다면서 트렁크에 처넣어요?”
“처넣은 게 아니라 숨긴 겁니다. 밖에 다른 계열사 직원들이 쫙 깔려 있을 텐데 이 회장 나간다고 동네방네 티 내며 나갈 수는 없잖아요. 눈치채면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모르는데.”
김범진은 정말로 사업가이기라도 한 양 다른 계파 조폭들을 계열사 직원이라 태연하게 지칭하고 있었다. 오리발을 내미는 범진을 보며 안 검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 아비규환이었다는 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씀해 보시죠. 대화 내용을 녹음한 파일을 입수했으니 섣부른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안 검사의 엄포에 범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웅배 회장이 갑작스럽게 임원들을 전부 소집하기에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WB 홀딩스를 위협하던 인천지검의 검사 하나를 사람을 시켜 담갔다고요. 대부분 간부가 속 시원해하는 분위기였지만 저는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그것도 검사를 죽이는 일은 큰 부담이 따르는 일이에요. 회사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살인조차도 득실을 따져서 판단하시는군요.”
안 검사가 뾰족하게 말했지만, 범진은 그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 회장은 걸림돌이 사라졌으니 회사를 재정비할 때라며 마약사업 등 불법적인 사업을 재개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애초에 마약사업을 함께 하고 있던 신진 이사들과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중진들이 사업 주도권을 놓고 격한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이 그 자리를 계기로 터진 것 같습니다. 모두 죽일 듯이 상대에게 덤벼들었죠.”
녹음된 파일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녹음이 끝난 후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중진들이 마약사업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데요.”
“이 회장이 비밀 유지를 위해 알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알렸다면 반대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을 거고요. 저부터가 반대했을 겁니다.”
범진이 문득 혀를 찬다.
“태산건설에 임태산 대표님이 계실 적에는 마약 같은 데 손을 댄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이웅배를 회장이라고만 하고 존칭을 쓰지 않으면서도 임태산 대표에게는 극존칭을 쓰며 아련하게 말하는 것을 안 검사는 놓치지 않았다.
“김범진 씨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예. 박중성 이사가 마약 밀조 건으로 검거되었을 때는 솔직히 배신감마저 느꼈습니다. 조폭사업장 이미지를 벗고 간신히 번듯한 기업으로 거듭났는데 또다시 불법 사업에, 그것도 마약사업에 손을 대다니요. 임태산 대표님의 유지에도 어긋나는 일이죠. 저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 불만을 가진 임원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안 보이는 얼굴들이 좀 있군.]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못 나온다는 간부들도 몇 있었습니다. 마약사업이 드러나고부터 영 태도가 삐딱합니다.]
[이전에도 임태산이랑 가깝게 지냈던 종자들이에요. 정리를 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검사는 녹음 내용을 떠올린다. 그러한 내부 사정은 녹음된 대화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이웅배 회장에게 불만이 있었다? 그렇다면 김범진 씨에게 이웅배를 납치할 동기는 충분하군요. 간부들을 제압하고 이웅배를 납치해 조직의 주도권을 잡으려 한 것 아닙니까?”
안 검사의 추궁에 범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다면 왜 번거롭게 납치를 하겠습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것이 훨씬 더 깔끔할 텐데. 마침 CCTV도 없고.”
“CCTV가 없다는 걸 잘도 알고 계시네요.”
범진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김범진 씨 진술이 사실이라고 칩시다. 이웅배를 납치한 것이 아니라 피신시켰다고. 그렇다면 지금 이웅배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고 있을까요?”
“잠잠해질 때까지 한동안 몸을 피해 있겠다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리지 않았고요.”
상당히 작위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해명을 범진은 척척 내놓았다. 안 검사는 골머리를 앓았다.
“거짓말탐지기 앞에서도 똑같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저는 지금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으로 소환된 것인데요. 자발적으로 임의출석 해서 진술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탐지기까지 사용해 진술을 받을 셈이라면 변호사 통해서 정식 절차를 밟아주십시오.”
압박을 넣어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거짓말탐지기는 피의자의 승낙을 얻어야만 사용할 수 있고 재판에서도 단일 증거로는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을 상대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탐지기라는 말만 들어도 제 발 저려하는 애송이 범죄자와는 차원이 다르다.
“같이 있었다는 직원 진술도 들어봐야겠는데요.”
“얼마든지요.”
범진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안 검사는 취조를 마치고 취조실을 나가려다 말고 범진을 돌아보며 불쑥 말을 꺼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범진이 물끄러미 안 검사를 바라본다.
“녹음기를 현장에 남겨둔 것이 혹시 김범진 씨입니까?”
범진이 또 한 번 처음처럼 눈을 크게 휘며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그렇게 해서 제가 얻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얻는 게 없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이죠.”
안 검사는 수사에 지장을 줄 것을 예상하면서도 강 검사의 독직폭행을 보고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김범진은 임태산 전 대표에게 유독 애착을 비쳤다. 혹시 임태산의 유지를 지키기 위한 동기는 아니었을까?
이자는 과연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이득을 버리고 위험을 감수할 타입인가? 안 검사는 탐색하듯 김범진을 살피며 대답을 기다렸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살인조차도 득실을 따져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얻는 것도 없는 일에 목숨 걸 이유가 없지요.”
하긴 조폭 따위에게 의리가 있을 리가 있나. 나와바리도 권리금 주고 사고파는 놈들인데.
안 검사는 기업가로 변신했다 해도 조폭은 어쩔 수 없는 범죄자임을 되새기며 돌아섰다.
* * *
다음 날 범진은 약속한 대로 영상 속에 함께 찍힌 태산건설 직원을 검사실로 보냈다.
“안녕하씨오. 태산건설 김범진 대표님이 보내서 왔는디라.”
검사실로 들어서며 우렁차게 인사하는 사내를 보고 안소영 검사는 입을 떡 벌렸다.
키만 보면 비슷할 것 같지만 아무리 봐도 덩치가 다르다. 정말 이자가 영상 속의 남자라고?
안 검사는 사내와 취조실에 마주 앉아 CCTV 영상을 보여주며 재차 추궁했다.
“정말로 이 영상 속의 사람이 본인인가요?”
“예, 확실히 지가 맞구먼요.”
“이보세요, 박병천 씨. 우길 걸 우겨야죠. 이 사람과는 체급부터가 다른데요.”
“검은 옷을 입어 그러지라. 지가 언뜻 보믄 살이 찐 것 같아도 벗어불면 몸이 탄탄하니 근육질 아니요.”
병천은 숫제 일어나서 점퍼를 벗어 보일 듯 나섰다. 안 검사는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앉으세요. 정말로 이 사람이 본인이다 이거죠?”
“그람요. 척 봐도 지구만, 검사님은 왜 아니라고만 생각하시는지 몰겄네요.”
얼굴이 분명히 잡힌 것도 아니고 주위는 어두운 데다 거리도 멀어 실루엣만 보이는 영상이었다. 그것을 믿고 이리 자신만만하게 버티는 것일까?
오리발을 내미는 박병천이 가증스러운 한편 안 검사는 일말의 자괴감도 느끼고 있었다.
뚜렷하지 않은 이 영상만을 가지고 강 검사가 분명하다고 믿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영상 속 인물은 눈앞의 이 사람이 맞는데도 선입견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아닐까?
안 검사는 더 이상 본인인지 여부에 대해 실랑이하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본인이라면 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겠네요.”
“아뇨. 지는 문밖에만 서 있다가 안에서 뭔 요란한 소리가 나기에 들여다볼까 말까 고민만 하고 있었어라. 으른들 하시는 일에 쫄따구가 괜히 껴들었다가 사달이 날 수도 있응게 차마 들어가덜 못하고 있었지라. 근디 대표님이 회장님을 부축하고 나와서 빨리 밖으로 모시라고 허덜 안혀요. 쿠데타가 나부렀응께 트렁크에 숨겨 갖고 나가라고 하셔서 황송하지만 지가 직접 회장님을 트렁크로 모셨지라.”
맥 빠지는 답이 아닐 수 없었다. 안 검사는 미간을 모으며 재차 추궁했다.
“그럼 그 후에 이웅배는 어떻게 되었나요?”
김범진의 주장처럼 제 발로 도피하는 것을 박병천도 보았을까?
“차를 타고 가다가 대표님이 중간에 지를 내려주고 가셔서 그 뒤는 어떻게 됐는지 통 몰러라.”
결국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정말로 아는 것이 없는지 사전에 입을 철저히 맞추고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안 검사는 박병천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나 박병천은 모른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주장이 단순하니 진술의 모순을 집어낼 여지도 없다.
“김범진의 진술과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룸 밖에 있다가 이웅배를 피신시키라는 김범진의 지시에 자신이 직접 트렁크에 실었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멀어진 후 바로 차에서 내렸기 때문에 이웅배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하고요. 그 외에 다른 중요한 진술은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안 검사가 분하다는 듯 격앙된 어조로 배진만 부장에게 보고했다.
“김범진과 같이 있었던 게 박병천이 분명한가?”
“체구가 좀 달라 보이긴 합니다만… 워낙 CCTV 영상이 불분명해서 명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본인이라고 한다면 본인이라고 볼 수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안 검사는 자괴감을 느끼며 말끝을 흐렸다.
“김범진이 제출한 차량은?”
“별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너무 깨끗한 점이 오히려 수상하긴 합니다. 트렁크에 이웅배를 실었으니 체모나 DNA라도 검출되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전에 깨끗이 지웠거나 모델만 같은 다른 차량을 제출했을 수도 있고요.”
“결국 이웅배를 김범진이 납치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배 부장의 질문에 안 검사가 뼈아프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배 부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
“김범진 쪽은 그만 포기하지.”
“하지만 부장님… 태산건설 조직원들이 사건 당일 적대 계파 사업장을 일시에 공격해 점거했습니다. 정황상 사건의 배후에 김범진이 있는 것이 유력한데 여기서 물러난다면…….”
“그렇다는 건 치기 전에 철저히 시나리오 짜서 준비했다는 얘기야. 더 파도 안 나와.”
배 부장이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그 외에도 할 일이 많지 않나. 김범진이랑 실랑이할 시간에 와룡회를 철저히 해체시키자고. 누군가 그걸 원해서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 이용당해 주는 거야. 마약조직까지 거느리고 있는 불법 기업을 일소하는 건 우리 역시 바라는 바니까.”
배 부장의 말에 안 검사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무언의 동의를 얻은 배 부장은 미련을 떨치고 본격적으로 지시했다.
“강 검사 복귀 전까지 김범진 건은 마무리하고 와룡회 간부들 기소에 집중하게.”
“알겠습니다.”
그제야 안 검사도 순순히 답했다.
* * *
“자기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선화는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미간을 곱게 찌푸리고는 콧소리를 내며 물었다.
진심으로 걱정한 얼굴로 보여 태산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이 여자, 표정을 꾸며내는 스킬만 본다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감이다.
“걱정한 것치고는 병원에 있는 동안 연락 한 번 없더라?”
“흥~ 언제는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더니.”
선화는 콧방귀를 끼며 투덜대고는 이내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여기저기 찔러보고 다니다가 자기마저 당한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알아? 우리 태산 씨도 그렇게 보냈는데 미남 검사님도 정들 만하니까 떠나보내는구나 하고… 무서워서 연락도 못 하겠더라. 전화를 안 받으면, 정말로 죽은 거면 어떡하나 싶어서.”
이쪽을 돌아보며 따지듯이 말하는 선화의 눈가에는 숫제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속지 말자. 악어의 눈물이다. 태산은 냉정해지려 애쓰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됐잖아.”
선화는 아이라인이 지워질까 젖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찍어 누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지 뭐야. 범인은 잡았어?”
“아직 수사 중이야.”
태산은 그렇게 답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선화는 이내 명랑한 태도로 돌아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이야? 밖에서 만나자고 다 하고.”
“데려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
“어딘데? 좋은 데야?”
선화가 반색하며 물었다.
“가보면 알아.”
“신난다! 검사님이랑 드라이브를 다 해보고.”
창밖을 내다보며 즐거워하던 선화는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급기야 봉안당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워 있었다.
“여긴 왜 데려온 거야?”
선화가 항의하듯 물었다.
어디인지를 바로 눈치챈 것을 보면 선화도 남몰래 알아보긴 한 모양이다. 태산의 시신이 안치된 장소를.
“임태산이랑 아직 작별 인사 못 했지? 제대로 인사하라고.”
선화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기가 뭔데? 자기가 뭔데 나더러 태산 씨랑 인사하라 마라 주제넘게 나서는 거야?”
따지고 보면 자신이야말로 누구보다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선화에게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당신도 계속 보러 오고 싶었던 거 아냐? 이미 장소를 알고 있는 것 보니 그런 눈친데?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등 떠밀어줄 때 보고 오라고.”
선화는 초조하게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 아직 태산 씨 얼굴 볼 용기가 없어.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서 그놈한테 복수라도 해야 얼굴 볼 낯이 서지. 그 전엔 못 가.”
“누군지 알아냈어. 복수도 했고.”
태산이 불쑥 던진 말에 선화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군데? 역시 구준태 시장?”
“구준태 시장이 죽이긴 했는데 지시한 사람은 따로 있었어.”
선화가 그게 대체 누구냐고 채근하듯 눈을 크게 뜨고 빤히 바라본다.
“이웅배.”
“이웅배? 와룡회 회장?”
태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경악했다.
“정말이야? 확실해?”
“본인이 시인했어.”
선화는 어처구니없어하며 혀를 찼다.
“어떻게 그럴 수가! 태산 씨가 목숨처럼 따르던 사람이었다고. 나랑 이웅배가 물에 빠지면 이웅배를 먼저 건지겠다고 했던 사람이란 말이야.”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선화가 그런 질문을 했을 때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가 토라진 선화를 달래느라 한동안 진땀을 뺐던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왜?!”
따지듯 묻는 선화에게 태산은 한숨 섞어 답했다.
“나도 궁금했지. 근데 궁금할 일이 아니었나 봐. 시간은 흐르고 자리도 바뀌었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어.”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개탄하는 태산을 보며 선화는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태산의 말에 반박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태산 씨는 절대 안 변해. 세상이 두 쪽 나도 자기 사람은 지키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못 알아보고 죽이다니… 그러니 와룡회가 그 모양 그 꼴이 되지.”
태산은 완전히 변한 모습으로 선화의 곁에 있었다. 알아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건방진 소릴 하는군.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죽은 놈을 두고 그런 말 해봤자…….”
“살아 있었다면 절대 안 변했을 거라고!”
울컥해서 소리치는 선화의 눈이 또 촉촉이 젖어든다. 태산은 그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조수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가자.”
태산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선화는 망설이며 태산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태산이 재촉하듯 말을 보탠다.
“당신은 임태산을 만날 자격이 충분히 있어. 누구보다도 임태산을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도 임태산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니까.”
선화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산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태산이 앞장서자 선화는 말없이 태산의 뒤를 따랐다. 봉안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 정면으로 태산의 사진이 보인다. 선화는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살얼음을 디디듯 조심조심 태산의 유골함 앞으로 다가갔다.
선화가 유골함 표면에 적힌 태산의 이름과 생몰 연도를 눈으로 훑어 확인한다. 태산의 사진을 마주하고도 의연하던 선화가 순간 무너지듯 오열했다.
“태산 씨, 나 왔어… 미안해… 이제야 와서 너무 미안해… 많이 아팠지? 많이 힘들었지?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도망쳐 버려서 정말 미안해… 흐아앙~~~!!!”
선화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했다. 코가 새빨개지고 목젖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고 가식적이기 짝이 없는 여자지만 이번만은 결코 거짓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태산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선화의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와 태산을 감쌌다. 태산도 슬픔에 젖어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 * *
한참을 오열하던 선화가 훌쩍이며 간신히 눈물을 그쳤다. 태산이 손수건을 꺼내 선화에게 건넨다. 눈물을 닦고 코를 푼 선화가 축축해진 손수건을 무심히 돌려준다. 태산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수건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문득 선화의 시선이 태산의 유골함 옆에 있는 이름 없는 유골함에 머문다.
“이건 뭐야?”
선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품이라도 넣어둔 것일까? 그런데 왜 하필 유골함에…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태산이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복수했다고 했잖아.”
선화가 멈칫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본다.
“서, 설마…….”
태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당혹해 중얼거렸다.
“자기가 이웅배를 죽였다고? 왜 그렇게까지…….”
“나도 이웅배와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었어.”
선화는 새삼 태산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법을 수호해야 할 검사가 태연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 대체 뭐야?”
태산은 선화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피식 웃었다.
“나? 검사는 검산데 법 따위는 모르는 검사지.”
하지만 선화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되묻는다.
“나한테 왜 얘기해 줬어? 나를 믿어?”
태산은 머쓱하게 볼을 긁으며 답했다.
“딱히 믿는 건 아니지만… 임태산을 그렇게 애틋하게 생각한다니까 복수를 했다는 얘기는 꼭 해주고 싶어서. 설마 입 다무는 정도의 의리는 지키겠지.”
태산은 선화를 마주 보고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야?”
선화는 태산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태산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고마워.”
쩔쩔매던 태산이 슬쩍 팔을 들어 선화의 어깨를 도닥이고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임태산 보는 앞에서 다른 놈한테 이렇게 덥석덥석 안겨도 돼?”
“태산 씨도 고마워할 거야.”
물론 강바른에게 고마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었으니 고마움만이 아니라 미안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라도 강바른의 복수를 마저 해주고 검사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태산이었다.
감정에 겨워 태산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던 선화가 마음이 가라앉자 슬그머니 떨어졌다.
“혹시나 알려주고 나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려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말이야.”
민망한 마음에 덧붙인 농담에 태산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장난스레 엄포를 놓았다.
“아무한테나 불고 다니면 정말로 없앨지도 몰라. 조심하라고.”
선화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태산의 사진을 향해 훨씬 밝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태산 씨, 나 이제 자주 올게. 담엔 자기가 좋아하는 술도 싸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선화는 후련한 얼굴로 미련 없이 손을 흔들고 돌아서 봉안당을 나왔다. 태산이 그런 선화를 뒤따르며 타박했다.
“이제 오지 마. 복수도 했으니 죽은 사람은 그만 잊으라고.”
“자기가 뭔데 잔소리야? 오든 말든 내 맘이지.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
“당신이 자꾸 왔다 갔다 하면 이목을 끌잖아. 이웅배가 저기 있다는 게 알려지면 골치 아프다고.”
“그러게 왜 그걸 저기다 갖다 놔? 유골뿐이라 해도 난 이웅배가 우리 태산 씨 옆에 있는 거 싫어. 내가 다음에 가져다가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다 뿌려 버릴 거야. 쓸쓸하게 구천을 떠돌라지.”
“그래도 청춘을 함께한 사이잖아. 마지막만이라도 셋이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자기는 보기완 다르게 묘한 부분에서 감성적이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주차장으로 나와 태산의 차에 올라탔다. 차를 출발시키기 전, 태산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복수는 했으니 내키지 않으면 이제 이 일에서 손 떼도 돼.”
선화가 어리둥절해 되묻는다.
“왜? 원래 검사님 타깃은 구준태 시장 아니었어? 이제 구 시장 정보는 안 필요해?”
선화의 말이 맞다. 아직 강바른 검사의 복수를 해줄 일이 남아 있다. 생전에 그가 파헤치려 했던 부정부패도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그것이 강 검사를 대신해 살고 있는 자신의 의무다.
하지만 관계없는 선화까지 이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다.
“필요하긴 하지만 당신은 이미 볼일 끝났잖아. 그런데 굳이 위험한 일을 계속할 필요가 없지.”
선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퉁을 주었다.
“태연히 사람 죽였다고 말하는 검사 주제에 묘한 데서 결벽증이 있네. 괜한 걱정 해주지 말고 정보가 필요하면 받아. 난 그만둘 생각 없으니까.”
선화는 이를 갈듯이 중얼거렸다.
“누가 시켰든 상관없어. 어찌 됐든 태산 씨 죽인 놈이야. 구 시장 그놈 잘 먹고 잘사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지. 언젠가는 그놈도 반드시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겠어.”
태산은 혀를 찼다.
“못 말리겠군. 구 시장 만만치 않은 인간이야. 너무 깊이 들어가진 마.”
“우리 검사님은 칼까지 맞아가면서 원수를 갚아주셨는데 나만 몸 사릴 수 없잖아? 은혜를 갚으려면 그 정도야 뭐.”
“결초보은이라도 할 기세네.”
“해야지, 그럼. 백골난망인데.”
농담 끝에 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태산은 큭큭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올 때까지만 해도 웃으며 돌아갈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건만.
* * *
WB 홀딩스 본사 건물 앞에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도열해 있었다. 회사원치고는 체격이 좋고 인상이 험했지만 다들 점잖게 갖춰 입으려 애쓴 느낌이다. 어울리지 않게 알록달록한 넥타이까지 맨 이들도 있었다.
사내들의 앞에는 태산건설 임원들과 WB홀딩스의 몇몇 이사들이 서 있었다. 가장 가운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은 태산건설 대표, 김범진이었다.
범진은 다른 임원들과 함께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긴 줄을 잡고 있었다. 줄은 건물 입구 위의 현판을 덮고 있는 흰 천에 달린 것이었다.
“지금부터 새 현판을 공개하겠습니다! 셋 세면 줄을 당겨주세요.”
사회자가 크게 선언하고는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신호에 임원들이 들고 있는 줄을 당기자 현판을 가리고 있던 천이 떨어지며 새 현판이 드러났다.
[(주)태산지주]
자리에 모인 조직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울렸다. 범진은 감격에 겨운 눈으로 새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축하해요, 김 대표.”
고상만 이사가 범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는 회장님이 받으셔야죠.”
범진은 새 회사인 태산지주의 회장 자리를 협력해 준 WB 홀딩스 이사 중 최고참인 고상만 이사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태산건설 대표로 남았다.
“하하하, 우리 김 대표 아니었으면 내가 이 자리에 올라올 수나 있었나. 앞으로 같이 잘해봅시다.”
고 회장이 흐뭇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 시각 인천지검 강력부 마약전담반에서는 와룡회 수사와 관련된 최종 브리핑이 있었다.
“이웅배 회장은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전국으로 수배를 걸어놓았지만 목격 신고조차 전혀 없습니다. 비록 물적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기소하지는 못했지만 김범진이 납치해 살해한 것으로 의심됩니다.”
구태호 검사의 브리핑에 팀원들은 모두 침통한 분위기였다. 매우 훌륭한 성과를 올린 와중에 이웅배를 놓친 것은 유일한 실패였기 때문이다.
“와룡회는 현재 내부 항쟁으로 완전히 붕괴되어 공식적으로 해산했습니다. 다만 일부는 태산건설 밑으로 흡수되었고 WB홀딩스는 구조조정을 통해 태산지주라는 지주회사로 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회장 자리는 WB 홀딩스의 친임태산 계파에서 가장 연장자인 고상만이 취임했고요. 이번 쿠데타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김범진이고 거느리고 있는 세력이나 사업 규모로 판단했을 때에도 김범진이 차기 회장으로 유력했는데 그것은 의외였습니다.”
구 검사의 의문에 배진만 부장이 답했다.
“자리 욕심이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대외적으로 주목받는 것을 피하고 싶은지도 모르지.”
“후자가 아니겠습니까? 이웅배를 납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니 덥석 회장 자리에 앉기는 부담스럽겠지요.”
안 검사가 냉소를 섞어 답했다. 구 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회장 명패만 달고 있는 거지, 실권은 김범진이 잡고 있다는 게 중론입니다.”
태산은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설마 범진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새 회사 이름을 지을 줄이야. 언젠가 복수를 마치면 떠나라고 충고했던 주제에 미련이 흘러넘치는 것은 제 쪽이 아닌가.
팀원들은 범진이 새 회사의 회장직을 맡지 않은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정치적인 술수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태산에게는 그 속이 뻔히 보였다. 범진은 태산과 함께 일궈내고 키워온 태산건설을 결코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끝까지 맡아 책임지려는 것이다. 그 고집이 미련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이웅배가 사라지고 와룡회가 박살 났으니 이름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임태산이 이름을 가지고 올 줄은 몰랐네요.”
가만히 듣고 있던 이흥렬 계장이 마치 태산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중얼거렸다. 박경구 수사관이 듣고 맞장구를 친다.
“그러게요. 임태산이 죽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렇게 기리고 있으니. 김범진이가 충신은 충신이네요.”
“지금 조폭 옹호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사람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자를요?”
안 검사가 딱딱하게 되묻자 박 수사관이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그건 뭐 확실한 것도 아니고… 조폭이라지만 남자로서 저 정도 의리면 인정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검찰이나 조폭이나 생리가 비슷하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네요. 저런 범죄자 따위를 올려치기 해주시다니요.”
안 검사의 날을 세운 말에 박 수사관은 결국 뜨끔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전환하려 배 부장은 얼른 다른 질문을 던졌다.
“태산지주가 다시 불법적인 사업에 뛰어들 기미는 없나?”
“그렇지 않아도 전신이 조폭기업이고 지금도 직원 대부분이 조직원인 만큼 강력부에서 계속 감시 중입니다. 다만 구조조정 단계에서 불법의 여지가 있는 사업장은 모조리 정리하면서 꼬리를 완전히 잘라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손을 씻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약 쪽은?”
“내부 갈등이 일어나 이웅배가 밀려나게 된 원인이 바로 마약사업 때문이라 김범진 체제에서 마약에 손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구 검사의 답에 기다렸다는 듯 태산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와룡회 쪽은 일단락된 것으로 봐야겠네요.”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태산의 말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와룡회의 마약조직이 궤멸된 이후 국내 필로폰 유통량이 예년 수준 이하로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것은 한동안 급격히 증가했던 필로폰 유통량이 대부분 와룡회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 마약전담반이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약전담반의 창설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것 같습니다.”
태산이 팀원들을 돌아보며 선언하자 팀원들은 뿌듯한 미소를 머금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동의하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두 수고 많았네. 이로써 와룡회 건은 마무리 짓고 기소된 놈들 기소 유지에만 각별히 신경 써주게.”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던 큰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기쁨에 팀원들은 모두 환호성을 올렸다. 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안 검사도 빙그레 웃음을 머금는다. 그러다 문득 동료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둘러보던 강 검사와 눈이 마주친다. 안 검사가 웃음기를 거둔 채로 강 검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강 검사는 김범진의 이야기가 나올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서둘러 주제를 바꾸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 김범진이랑 어떤 관계죠?’
안 검사는 인천항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 가까이 서 있던 강 검사와 김범진을 떠올린다.
강 검사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바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두었다.
* * *
“피고인에게 징역 4월과 자격정지 6월…….”
한순간 법정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의 선고를 유예한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선고유예의 판결이 내려지자 방청객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칼까지 맞아가며 목숨을 걸고 마약조직을 발본색원한 강바른 검사의 영웅담은 언론을 통해 크게 주목받았다. 그런 검사가 체포 과정에서 피의자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여론은 강 검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인간이 아닌 건 매가 답임.]
[개돼지는 때리면 동물 학대지만 개돼지만도 못한 마약딜러는 때려도 죄가 안 됨.]
[기생충을 때렸다고 기소하는 나라가 어딨냐? 공권력의 권위가 무너졌네.]
[아무리 그래도 경찰도 아니고 검사가 사람 때린 건 좀 아니지.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 이 샛퀴도 마약사범 아님?]
[???? 당신 가족이 마약중독 돼보세요. 그런 말이 나오나.]
그러한 여론을 반영하듯 강 검사의 선고공판일 방청석은 방청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자는 물론 사건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까지 대거 몰려 번호표를 발부해야 할 정도였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폭행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되나 피고인의 독직폭행행위와 피해자의 상해 및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으므로 특정범죄가중처벌에 관한 법률 제4조의 2가 아닌 형법 제125조로 의율하였다. 또한 시야가 제한된 심야에 피해자가 장전된 권총을 들고 저항한 사정, 피고인이 검사로서 성실히 근무하며 마약조직을 근절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을 고려하여 형을 정하였다. 독직폭행 범죄는 벌금형 없이 징역형과 자격정지형만 있는 점을 살펴 선고유예로…….”
판사는 판결 이유를 계속 낭독해 내려갔지만 법정 안은 이미 축제 분위기로 아무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공판이 끝나고 일어서는 태산에게 공판검사가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검찰에서는 항소 포기하려 합니다만…….”
“저도 판결에 만족합니다.”
태산의 답에 공판검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축하합니다, 검사님.”
“다행입니다. 힘내세요.”
“검사님, 멋져요. 응원합니다.”
“강바른 검사, 파이팅!!”
법정을 나가는 태산의 주위로 방청객들이 몰려나와 인사를 던졌다.
“감사합니다.”
태산은 내심 당혹해하며 꾸벅꾸벅 인사를 받았다. 법정 뒤에서 민철승 기자가 그런 태산을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이 북새통의 원흉이었다. 민철승이 다가오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강 검사님,”
“축하할 일인가요? 검사가 독직폭행으로 기소되어서 법정에 선 것이?”
태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도 선고유예 아닙니까? 이 정도면 아주 양호한 형량이죠. 판사도 법문에 벌금형이 규정되어 있었다면 벌금형으로 끝내고 싶었다는 뉘앙스고. 국민 영웅 다 되셨습니다.”
“다 민 기자님 덕분입니다. 무슨 범죄조직과 맞서 싸우는 슈퍼 히어로처럼 써놓으셨던데요.”
태산은 가시를 담아 말했다. 민철승 기자는 와룡회가 와해되고 난 후 그 일등 공신으로 강 검사와 인천지검 마약전담반을 집중 조명 한 기획기사를 내 또 한번 대박을 쳤다.
“아닙니까? 강 검사님 같은 분이 진정한 이 시대의 영웅이죠. 덕분에 저희도 부수를 상당히 늘렸고 저도 여기저기 방송에 바쁘게 불려 다니고 있습니다. 요즘 데스크가 아주 잔칫집 분위기입니다. 제가 언제 강 검사님께 밥이라도 사야겠어요.”
꼭 이번 기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태산이 흘려준 정보를 통해 민 기자는 마약조직의 배후에 WB홀딩스 이웅배가 있다는 것과 그를 검찰수뇌부가 비호하고 있다는 의혹을 밝히며 주가를 올렸었다.
민 기자는 태산 같은 귀중한 취재원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앞으로도 알짜배기 정보를 쏙쏙 빼먹을 셈이다.
민 기자가 태산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속삭였다.
“궁금한 이야기도 아직 많고요. 태산건설 김범진 대표가 대체 왜 이웅배로부터 저를 보호해 준 것인지, 이웅배는 또 어디로 사라졌는지 묘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란 말입니다.”
“공식적으로 발표난 것 외에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얘기는 별로 없습니다.”
태산이 딱딱하게 답하자 민 기자는 일단 물러섰다.
“뭐 그런 얘기는 차차 하고요. 큰일 겪으신 후니 격려 차 언제 밥이라도 같이 먹읍시다.”
“예, 연락드리죠.”
태산은 대강 답하고는 법정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법정 문을 나오자마자 플래시 세례를 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강바른 검사님, 소감이 어떠십니까?”
“선고유예 판결이 내려진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말씀 해주십시오.”
태산은 가볍게 한숨을 뱉고는 기자들에 둘러싸여 카메라를 바라보며 간략히 말했다.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반성하고 자중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태산은 재빨리 취재진을 헤치며 빠져나갔다.
* * *
“어서오세요!”
카운터에 서 있던 은섭이 카페로 들어서는 여자 손님 둘을 보고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카운터로 다가오던 여자 둘 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 하고 놀란 표정을 한다.
은섭도 그제야 여자를 알아보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 은섭에게 호감을 보이며 자잘한 선물들을 주고 가던 바로 그 여자다.
은섭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동행인 여자는 두 사람을 흘낏흘낏 돌아보며 빈자리에 가 앉았다.
“편의점 갑자기 그만두셨다고 해서 궁금했어요.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아르바이트 옮기신 거예요?”
“아니요. 제가 사장입니다.”
은섭은 조금 머쓱하게 답했다.
“와아~ 카페 차리신 거예요? 축하드려요.”
여자는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다. 은섭은 어쩐지 마음이 훈훈해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자주 올게요.”
여자는 신이 나서 말했다가 멈칫하더니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되죠? 부담스러우실까 봐…….”
말꼬리를 흐리는 여자를 보며 은섭은 피식 웃었다. 은근한 애정 공세를 벌이는 중에 갑자기 대상이 사라져 버렸으니 자신이 너무 부담스럽게 들이대서 일을 그만뒀나 고민했던 모양이다.
“그럼요. 자주 오세요. 친구분들도 많이 데려오시고. 가게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안그래도 홍보가 필요하던 참이에요.”
“그래요? 제가 많이 팔아드릴게요. 소문도 많이 내고요.”
“고맙습니다.”
은섭은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주문은 뭘로 하시겠어요?”
“아, 내 정신 좀 봐. 아메리카노 더블 샷으로 하나하고요. 카라멜 마끼아또랑…….”
디저트가 진열된 쇼케이스 안을 빠르게 훑어보던 여자가 중얼거렸다.
“아… 딸기 크레이프 맛있겠다. 딸기 크레이프 하나 주세요.”
“아메리카노 더블 샷, 카라멜 마끼아또, 그리고 딸기 크레이프 맞으시죠?”
“네.”
“만 칠천 원입니다.”
여자가 카드를 꺼내 은섭에게 건넸다. 은섭은 흰 면장갑을 낀 오른손을 들어 카드를 받으려 했다가 놓치고 만다. 아직도 오른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익숙하지 않다. 버릇처럼 오른손을 내밀었다가 머쓱해지는 상황이 종종 있었다.
“죄송합니다.”
은섭은 얼른 손을 바꿔 왼손으로 카드를 들고 결제를 한 후 여자에게 돌려주었다. 여자는 카드를 돌려받고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손이 불편하신 거예요?”
“예, 좀 다쳤습니다.”
“어쩌다 다치신 건지 물어봐도 돼요?”
“그게…….”
은섭은 망설였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한다면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댈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벌이가 되는 일을 하려고 위험한 작업을 맡았다가 손을 다쳤고 보상금으로 가게를 냈다고 하면 납득할 것이다. 정말 그런 보상금 정도로 번화가에 이 정도 규모의 카페를 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볼 수도 없다. 돈 때문에 위험한 일을 맡았다가 손을 잃고 대신 카페를 얻은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한 손을 잃은 것은 작업을 거는 데 상당한 핸디캡이 되지만, 오히려 사연만 잘 이용하면 동정심 많은 여자들에게 모성애를 자극하는 사연 있는 남자로 어필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렇게 다시 거짓된 말로 여자들의 환심을 사며 적당히 살아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은섭은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은 거짓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굳이 꾸며낸 말과 표정으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거짓은 위장 수사를 마지막으로 졸업하자.
“마약조직에 위장 잠입 했다가 야쿠자한테 걸려서 린치를 당했어요. 하마터면 총 맞고 죽을 뻔했는데 이 정도인 게 다행이었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던 여자가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을 재미있게 하시네요.”
“농담 아닌데…….”
은섭은 부정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따라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쩐지 이 상황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은섭이 웃어버리자 여자는 농담이라는 걸 더욱 확신하는 듯했다.
“다행이네요. 농담을 하실 수 있는 걸 보면 마음까지 다치신 건 아닌 것 같아서.”
뜻밖의 말에 은섭은 웃음을 그치고 여자를 새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성함도 모르네요.”
“은수빈이에요.”
“제 이름은 아시나요?”
“그럼요. 편의점에서 계속 명찰 달고 계셨잖아요.”
여자는 그렇게 답하고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이름을 불렀다.
“서은섭 씨.”
그러고는 환하게 웃는 것이다. 은섭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는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이 여자, 웃는 표정이 눈부시다.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으로 들어선다.
“어서오세요~”
이번에는 테이블 정리를 하던 아르바이트생이 대신 외친다. 빙글빙글 웃으며 문으로 들어서는 것은 다름 아닌 강바른 검사다.
은섭은 수빈에게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은 것에 내심 뜨끔했다. 강 검사가 카운터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물었다.
“장사는 잘되냐?”
“보시면 아시잖아요.”
제 발 저린 은섭은 괜히 날을 세우며 뾰로통하게 답했다. 수빈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일행이 앉은 자리로 간다.
“금방 밥 먹고 또 무슨 디저트야.”
“닥쳐, 기지배야. 내가 다 먹을 거야.”
“언젠 다이어트한다더니?”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
수빈이 친구와 티격태격하는 걸 곁눈질로 본 태산이 놀리듯 말했다.
“아까부터 밖에서 보고 있었는데 전혀 눈치 못 채고 대화 중이기에 한가한 줄 알았지. 여전히 인기 좋네.”
태산이 카운터에 상체를 기대 은섭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마약조직 잠입했던 무용담 풀면 여자들 좀 많이 넘어오냐?”
은섭은 입을 떡 벌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도청이라도 해요? 그걸 어떻게 들었어요?”
“입 모양 보고 대충 찍었는데 진짜 그 얘기 한 모양이네?”
태산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은섭은 어처구니없어 탄식하고는 뒤돌아 음료를 만들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나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카운터 좀 봐줘요.”
“네, 사장님.”
은섭은 카운터를 비우고 밖으로 나서려 했다.
“너희 가게 놔두고 왜 다른 델 가? 나 오늘 커피 마시러 온 거야. 커피 한잔 맛있게 내려봐. 니 것도 한잔 사줄게.”
“여기가 다방입니까? 분위기 망치지 말고 나가시죠.”
은섭이 막무가내로 태산의 등을 밀어냈다.
* * *
결국 은섭과 태산은 공용주차장에 세워둔 태산의 자가용에 나란히 앉았다. 은섭의 카페에서 가져온 커피를 한 잔씩 든 채였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차 안에는 은은한 커피 향이 떠다닌다.
문득 은섭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건 말이죠. 이젠 거짓말하고 살기 싫어서 저도 모르게 꺼낸 말이에요. 어차피 사실대로 이야기해 봤자 아무도 안 믿어요. 농담인 줄 알던데요.”
“누가 뭐라냐?”
태산은 관심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선고유예 받으셨다는 건 뉴스로 봤어요. 법정에는 못 가봐서 죄송합니다.”
“좋은 일도 아닌데 뭘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해. 유리하게 진술해 준 걸로 됐다.”
은섭이 물끄러미 태산을 본다.
“최성일의 권총엔 처음부터 실탄이 없었어. 넌 그걸 알고 있었고. 병원에서 수술 끝나고 의식을 찾았을 때 자초지종을 얘기했었잖아. 최성일이 김성종을 의심해서 권총을 주며 쏘라고 하기에 오히려 최성일을 겨누었는데 실탄이 없어서 당했다고. 그런데 안 검사에게 한 진술에서는 총을 받기는 했지만 쏘지 않았기 때문에 실탄이 있었는지 여부를 모른다고 했더군. 나를 감싸려고 말을 바꾼 거냐?”
은섭은 태산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검사님이야말로 최성일에게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예요? 나 때문입니까? 내가 그 놈 손에 죽은 줄 알고요?”
태산은 무심히 말했다.
“니가 아니라 누구라도 내 팀원이 당했는데 그냥 둘 수는 없지. 받은 만큼 갚아주는 게 내 방식이다.”
역시 그랬던 건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본인의 입으로 듣고 보니 은섭은 더욱 얼떨떨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니. 검사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 게 정상인가?
“무슨 조폭 두목처럼 말씀하시네요.”
문득 임태산에게 당했던 끔찍한 날이 떠올라 은섭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태산이 돌아보니 은섭은 목을 움츠리며 설명했다.
“조폭 두목한테는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요.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든다고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이 간 태산은 불편한 심경이 되어 슬그머니 화제를 돌린다.
“커피 맛 괜찮네. 잘 마셨다. 가게는 잘되는 것 같고 치료도 받을 만큼 받은 것 같고. 이 정도면 너랑 나랑 한 거래는 슬슬 마무리가 된 것 같다.”
태산은 슬쩍 뜸을 들이더니 조금 멋쩍게 본론을 던져놓았다.
“오늘은 다름 아니고 잘 살고 있나 마지막으로 보러 온 거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은섭이 새삼 태산을 돌아보았다.
“이제 과거는 완전히 잊고 새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 검사 만나러 오는 일은 다신 없도록 해라.”
은섭이 문득 하! 하고 웃음 섞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검사님께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요.”
그러고는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검사님. 저를 동료로 대해주신 것 잊지 않고 제대로 살겠습니다.”
은섭은 그 말을 남기고는 쑥스러운 듯 얼른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바로 돌아서 가지 않고 조수석 창을 톡톡 두드린다. 태산이 조수석 창을 내리자 은섭이 툭 던져 말했다.
“검사님으로 보는 건 마지막이라도 언제든 커피 마시러 오세요. 검사님께는 돈 안 받겠습니다.”
태산은 아무 대답 없이 피식 웃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은섭은 멀어지는 태산의 차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청와대 초청 오찬이요? 그런 자리를 제가 왜 갑니까?”
배진만 부장의 호출에 부장실로 간 태산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고 어리둥절했다.
“전국 검찰청 강력부장 초청 오찬이야. 요즘 강력부 활약을 언론이 주목하고 있잖아. 그 영향이라고 해야겠지.”
민철승 기자의 마약전담반 르포 기사가 발단이 되어 공영 방송사에서 강력부 검사들에 대한 현장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는데 그것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방송사의 취재는 정중히 거절하였지만 방송 내내 강바른 검사와 인천지검 마약전담반의 이름이 수시로 오르내렸다.
청와대에서는 그러한 여론을 의식하고 격려차 강력부장들을 불러들이는 것일 테다.
“강력부장과 함께 나도 초청받았어. 아무래도 법무부에서 마약대응을 위해 직접 신설을 지시했던 부서이기도 하니 불러올리는 것이겠지. 사실상 대통령 직속 아닌가.”
배 부장은 은근히 자랑스러운 투로 말했다.
“부장님도 예외적으로 초청받으신 자리인데 평검사인 제가 낄 곳은 아닌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지금 강력부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다 자네 덕분 아닌가? 마약전담반의 활약도 자네에게 크게 빚지고 있는데 자네야말로 그 자리의 주인공이지. 대통령께서 강바른 검사도 꼭 대동하라고 특별히 언질을 주셨다고 해. 그러니 두말 말고 시간 빼두라고.”
태산은 별수 없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원치 않는 유명세를 얻다 못해 뜻하지 않게 국가수반과 만나게 됐으니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일개 평검사가 그런 자리에 끼어들어 주목을 받게 되면 그 자리에 참석한 강력부장들의 눈총과 시기가 어느 정도일지 벌써 눈에 선했다.
오찬 당일, 태산은 배 부장과 함께 청와대 본관 1층 별채의 충무전실에서 서성거리며 대통령이 입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모인 강력부장들은 이례적으로 참석한 평검사인 태산을 신기한 듯이 흘끔거렸다.
“이 부장, 나도 이 떠오르는 신예 소개 좀 받읍시다.”
이마가 넓고 안경을 쓴 사내가 다가와 인천지검 강력부장 이재한에게 말을 걸었다. 이재한 부장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강바른 검사를 소개했다.
“예, 부장님. 제가 먼저 소개를 시켜 드려야 했는데… 마약전담반의 강바른 수석 검사입니다. 강 검사, 인사드려.”
“강바른입니다.”
태산은 단답을 하며 슬쩍 고개 숙였다. 이 부장은 뭔가 더욱 싹싹한 인사말을 덧붙이기를 바라는지 채근하는 눈짓을 보였지만 태산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상대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 태산도 손을 맞잡았다.
“반가워요. 나는 서울중앙지검 강력부 김헌상 부장이오. 요즘 아주 활약이 대단하던데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소. 언젠가 같이 일할 기회가 되면 좋겠구먼.”
어쩐지 같은 부장검사끼리인데도 이 부장이 쩔쩔맨다 싶더니 서울중앙지검 소속인가. 전국 강력부 중에 가장 끗발이 좋은 서울지검 강력부였다. 같은 부장이라 해도 사실상 차장급이나 마찬가지였다.
“예,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태산이 예의를 차려 답하자 김 부장은 빙긋 웃고는 멀어져 다른 부장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무전실에 대통령이 입장했다. 곁에는 최근 부임한 법무부 장관이 함께하고 있었다.
김 부장이 앞으로 나서 가장 먼저 대통령과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각 지검별로 한 사람 한 사람 대통령에게 소속과 성명을 대고 악수를 나누었다. 강력부장들이 모두 인사를 한 후 마지막으로 배 부장과 태산의 차례가 되었다.
“인천지검 강력부 마약전담반 배진만 부장입니다.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하는 배 부장에게 대통령은 반가운 기색으로 악수를 건넸다.
“활약은 잘 전해 듣고 있습니다. 수고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강력부 검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모습 보기 좋네요.”
“가, 감사합니다!”
배 부장은 벌겋게 얼굴을 상기시킨 채 부동자세로 외쳤다. 새로 산 빳빳한 와이셔츠를 목 끝 단추까지 꽉 채워 넥타이를 졸라매고 머리는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올백으로 넘긴 데다 움직임까지 뻣뻣하게 굳어 있으니 마치 고장 난 로봇 같았다.
곁에서 배 부장의 모습을 지켜보며 태산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평소에는 허허실실 풀어진 모습이던 배 부장이 오늘따라 잔뜩 긴장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것이 못내 우스웠던 것이다.
태산이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고 있자니 대통령이 앞에 와 선다. 그러고는 “오오~” 하고 낮게 탄성을 뱉는 것이다. 소개하지 않아도 얼굴만 보고 이미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대통령이 강바른 검사를 꼭 대동하라고 강권했다는 배 부장의 말이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과장한 말만은 아니었나 보다.
“인천지검 강력부 마약전담반 강바른 검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가장 젊은 피군요. 모임에 활력이 더해지는 것 같아 좋네요.”
인사를 마치자 대통령과 장관, 검사들은 충무전실에 도열해 서서 기념 촬영을 했다. 기념 촬영을 마친 후 대통령이 앞장서 오찬장으로 이동했다. 지정된 좌석에 따라 일동은 오찬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상석에는 대통령이, 그 양쪽으로 법무부장관과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장이 자리를 잡았다.
“식사 전에 잠깐 얘기들 나누시죠. 그간 일하시며 겪었던 고충이나 건의할 점 등을 가볍게 얘기해 주시면 됩니다.”
대통령의 제안에 기다렸다는 듯 서울중앙지검 김헌상 강력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혹시 대통령님께서는 얼마 전 강력부 검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공영방송의 일요 스페셜을 보셨습니까?”
“예, 법무부장관의 추천으로 봤습니다. 법무부장관이 우리 검찰에 이렇게 솔선수범해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거듭 강조하며 권하더군요.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을 실어 말했다.
“방송이 보여준 것은 저희 강력부 검사들이 겪는 고충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약사범과 조직폭력배를 전담하고 있는 강력부 검사들은 일선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승진에서는 번번이 누락되는 등 불이익도 감수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대통령님께서 그런 점을 헤아려 배려를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어렵게 말씀을 드립니다.”
김 부장이 포문을 열자 다른 지검의 강력부장들도 하나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 뉘앙스가 이렇게 어렵게 일하는 공을 왜 인정해 주지 않느냐는 하소연에 가까웠다.
태산은 슬슬 자리가 지루해지고 있었다. 간신히 하품을 참으며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을 한다. 오늘 오찬에는 어떤 음식이 나올까? 얼마나 맛있으려나.
그러는 사이 강력부장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발언을 마쳤다.
“예, 말씀 잘 들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시는 만큼 국가에서도 앞으로 여러분의 수사에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힘들게 일하기 때문에 강력부 검사들의 인사를 타 부서보다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그것은 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나…….”
대통령의 발언에 자리에 앉은 검사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어떤 부서에서 일하는 검사든 승진에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인사상 공정을 기하겠다는 것만은 약속드리겠습니다.”
은근히 자리 욕심을 내비치고 있던 검사들을 머쓱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지루함에 몸부림치고 있던 태산은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졌다. 말 한마디로 전국의 강력부장들의 얼굴을 삽시간에 흙빛으로 만드는 대통령의 솔직함과 단호함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주의를 배 부장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국내 마약조직 소탕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부서인데 아직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군요. 인천지검 마약전담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은데요.”
* * *
“인천지검 마약전담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은데요.”
대통령의 제안에 사람들의 시선이 배진만 부장에게 쏟아진다. 배 부장은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또다시 고장 난 로봇이 되어 삐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대통령님! 저희 마약전담반은 치밀한 공작수사로 신흥마약조직인 와룡회를 검거, 해산시킴으로써 국내 마약유통량을 크게 감소시켰다고 자부합니다.”
배 부장이 큰 소리로 보고하자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얼굴을 했다. 배 부장도 슬슬 긴장이 풀리는지 마음에 두고 있던 말을 신나게 쏟아놓았다.
“다만 외국의 기업형 마약조직들은 여전히 한국을 경유해 일본으로 마약을 수출하는 경로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동남아의 마약조직 쿤사 소속 시리아인들이 국내에 헤로인을 밀반입하려다 검거되었고요. 페루산 수입 원목에 구멍을 꿇고 코카인을 숨겨 들여오려던 남미 마약조직을 인천항에서 적발하기도 하였습니다. 홍콩 삼합회나 대만 죽련방도 호시탐탐 국내시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배 부장은 진지한 얼굴로 현 상황을 진단한 후 해결책을 제시했다.
“한국이 마약의 중간기착지로 활용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관세청과 세관의 협조, 일본과 중국, 미국 등 관련 당국과의 국제공조, 그리고 검찰 내부적으로도 각 지검들과의 긴밀한 공조체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삐걱거리면서도 정열적으로 열변을 토한 배 부장은 휴우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다.
“잘 알았습니다. 관련 기관이 유기적으로 협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지원하겠습니다.”
대통령이 이번에는 태산을 돌아보았다.
“강바른 검사는 할 얘기 없습니까? 방금 배진만 부장의 말만 들어도 마약전담반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또 어떤 활약을 할 계획이죠?”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태산은 멋쩍게 답했다.
“딱히 계획은 없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태산의 무심한 대답에 잔웃음이 터진다. 대통령은 조금 더 말을 붙여보고 싶은 듯 짓궂은 표정으로 계속 질문을 던졌다.
“강 검사는 마약조직을 검거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국민 영웅 아닙니까? 바라는 게 있으면 한번 말해보세요. 훈장은 못 주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들어주겠습니다.”
막 자신의 복수를 끝낸 태산에게 이제 남은 소원이라면 자신에게 새 인생을 내어준 강 검사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강 검사를 죽인 구준태 시장을 끌어내리고 강 검사가 하고 있던 수사를 완결시킨다. 그 외에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말해 버렸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있던 시절 끝내지 못한 수사가 있습니다. 그것을 언젠가는 마무리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태산의 말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던 대통령이 어느 순간 얼굴을 무너뜨리고는 껄껄 웃는다.
“아하하하! 강바른 검사 참 대담한 사람이네요. 대통령 앞에서 대놓고 인사 청탁을 하다니요.”
태산은 머쓱해서 변명했다.
“인사 청탁으로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예전 부서로 다시 옮겨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조폭이나 마약사범을 처넣는 것만큼 정치인을 수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의 비리가 끊이지 않는 나라는 존립하기 힘듭니다. 여야 불문하고 성역 없는 수사로 비리를 근절해야만 합니다.”
“그래요. 그건 맞는 말입니다. 검찰청장에게도 현장의 이런 이야기는 꼭 전하고 싶군요.”
법무부장관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오늘 오간 이야기들은 정리해서 검찰청장에게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강력부장들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강바른 검사가 마약범 잡는 실력으로 비리 정치인을 잡으면 얼마나 대단할지 벌써 기대가 되는데요.”
대통령은 유쾌하게 농담을 던졌지만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하던 강력부장들에게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분위기는 싸늘함을 넘어 살벌해지고 있었다.
오찬이 시작되고 맛있는 음식이 줄지어 들어왔지만 검사들은 음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태산만이 쉽게 맛볼 수 없는 진미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오찬이 끝나자 이재한 부장은 난처해 어쩔 줄을 모르며 김헌상 부장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김 부장은 불쾌한 기색으로 이 부장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쌩하니 발걸음을 돌렸다. 이 부장은 어깨를 늘인 채로 김 부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산은 배 부장과 함께 슬렁슬렁 청와대를 나왔다. 주차장에 다다라서야 이 부장이 버럭 성을 냈다.
“강 검사, 자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먼! 강력부장들이 고생하는 만큼 대접을 해달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는 와중에 대통령님이 인사 이익을 줄 수 없다고 거절하자마자 혼자 특수부로 쏙 빠지겠다고 어필하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그렇게 간사하게 사는 것 아니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강력부장님들 하시는 말씀도 썩 듣기 좋은 건 아니던데요. 수사에 어려움이 있다면 수사지원 받을 생각을 하셔야지 애들처럼 징징거리면서 승진을 더 시켜달라고 조르다니요.”
“뭐, 뭐야?!”
이 부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을 보고 배 부장이 얼른 나섰다.
“이 부장, 강바른 이 꼴통이 뭐 깊은 생각이 있어 한 말이겠소? 자리가 지루해서 아까부터 하품을 참는 눈치던데. 딴생각하다가 되는 대로 한 말에 너무 깊은 의미를 두지 말자고.”
배진만 부부장은 출포검이라 승진을 못해 이 부장보다 직급은 낮았지만 기수는 앞서는 선배였다. 부하라곤 해도 연장자에 선배인 배 부장이 말리니 이 부장도 더는 화를 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물러났다.
“그럼 우린 이만 들어가네.”
배 부장은 이 부장을 떼어놓고는 재빨리 태산을 데리고 차에 올라탔다. 태산과 함께 차에 올라탄 배 부장이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구, 강 검사! 자네 정말!!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겠지만 거기가 어떤 자리라고 그런 칼 맞을 소리를 하나?”
“칼 맞는 건 제가 또 전문 아닙니까? 뭐가 무서워서 하고 싶은 말을 못 해요?”
“하긴 칼 맞을 각오면 무슨 소리를 못 할까.”
태산의 농담에 배 부장은 혀를 끌끌 찼다.
* * *
“하도급 받은 영종도 복합리조트 공사는 설계를 소폭 변경하기로 하고 기성금 금액을 조정해 다시 공사 들어갔습니다.”
태산건설 임원의 보고에 범진은 재차 확인했다.
“앞으로의 공사는 차질 없겠습니까? 기성금 지급이 두 달째 밀리면서 시공사의 미국 본사에 경영난이 있다는 소문도 들리던데요.”
“본사 경영진 일부가 교체된 것은 사실입니다. 자금 조달이 어려운 건 아닌가 다방면으로 알아보았는데 프로젝트 파이낸싱 금액이 소진되면서 재투자를 받느라 잠깐 자금에 공백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문제없을 겁니다.”
범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건설은 주택건설뿐만 아니라 고급 리조트와 호텔 건설 쪽으로도 착착 발을 넓혀가고 있었다.
“부평 재개발 건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거시 성님…….”
병천이 급히 말을 꺼냈다가 아차 하고는 범진의 눈치를 본다. 와룡회를 해산한 후 범진은 어디까지나 기업 경영인의 마인드로 공적이고 전문적으로 업무에 임하라 지시했었다. 회사 대표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형님 운운하는 호칭을 꺼냈으니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다.
범진이 못 들은 척 별말 하지 않자 병천은 급히 호칭을 바꾸었다.
“쩌그 대표님, 지금 우리 회사와 수주받을라고 경쟁하고 있는 건설사 놈들 하는 짓이 아주 드럽기가 짝이 없어라. 조합원들 불러다 놓고 지들 호텔이랑 리조트에서 공짜로 놀다 가게 허고, 사업계획서 보여준다믄서 그 뭐시냐 네모나게 생겨서 들고 다니는 컴퓨터 있잖소. 두들기는 거 안 달린…….”
옆에서 듣던 임원 하나가 답답해서 끼어든다.
“태블릿 PC 말입니까?”
“맞소! 타블렛인가 타블로인가 그거! 그걸 막 조합원들한테 나눠주고 다닙디다. 거기다가 선정 날짜가 가까워지니까 아주 길바닥에서 현금을 뿌리고 다닌다 안 혀요.”
병천은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우리 애들 끌고 가서 그런 짓 하는 놈들 싹 다 멱살을 잡아서 끌어냈을 거인디… 성, 아니, 대표님이 이제 아그들 동원하는 건 일절 하지 말라고 혀서 그 꼴을 그냥 눈 뜨고 뻔히 보고 있어야 허니 속이 시커멓게 타부렀단 게요. 단물을 멕이믄 맴이 흔들리는 게 인지상정이라 조합원들도 그쪽으로 맴이 거의 넘어가서 선정이 영 어렵겠겄는디요.”
범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지시했다.
“일단은 경쟁사에서 불법행위를 하는 증거 꼼꼼히 모아서 경찰에 넘기는 것으로 하자.”
“근디 이제 선정 날짜가 얼마 안 남았는디라. 수사 결과 나올라믄 한참 걸릴 텐디 그걸로 결과가 바뀌겄어라?”
“결과가 바뀌려면 우리도 단물을 좀 먹여야지.”
범진의 말에 병천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지들도 와이로를 먹이자는 것이요? 허지만도… 대표님이 앞으로 불법은 안 된다고…….”
“조합원 개개인한테 뇌물을 먹이는 건 불법이지만 조합원 전체에 이익을 제공하는 건 도시정비법상 처벌 규정이 없어. 조합에 이주비 무이자 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안해.”
범진의 답에 다른 이사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정비사업계약업무처리기준에는 건설사가 시공과 관련 없는 재산상 이익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법령위반으로 입찰 자격이 박탈될 수도 있는데요.”
“입찰 자격 박탈은 입찰 공정성을 심하게 해칠 만한 사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입찰 자격 박탈까지 하기엔 애매한 정도면 충분해요. 부동산 전문 변호사에게 자문을 받아서 이주비 지원 규모를 잘 조정해 보도록 하죠.”
병천은 새삼 경외감을 가지고 범진을 바라보았다. 합법 기업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려는 범진의 노력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내심 생각하며 회의감을 가지고 바라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범진은 성공적으로 기업인으로 변신했고 관련 법규의 허점까지 꿰고 있을 정도다.
태산건설 임직원들에게 범진은 내내 태산의 대리자였다. 카리스마와 지도력은 비교할 수 없었으나 태산을 충직하게 따랐던 심복이었기에 범진을 신뢰했다. 범진 역시 그 이상을 욕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병천도 범진을 작은 형님이 아니라 회사의 상사로서 완전히 믿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태산건설 임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자고 결심하는 병천이었다.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던 병천은 대표실 한쪽 벽 위에 못 보던 액자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임원들이 다 나가도록 병천이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범진도 가만히 다가와 곁에 선다.
“뭔 사진인디 여기 걸어노셨다요? 가운데는 대통령인 거 같은디. 여그 청와대 아녀라?”
병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범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 * *
“뭔 사진인디 여기 걸어노셨다요? 가운데는 대통령인 거 같은디. 여그 청와대 아녀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며 묻는 병천에게 범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래. 전국 강력부장 초청 청와대 오찬 사진이다.”
“어따~ 그렇다면 이것들이 몽땅 다 우리의 적들 아녀라.”
혀를 차며 찬찬히 사진을 보던 병천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여그는 강바른이라는 그 검사 놈이구마요. 지가 뭐라고 쩌그 떡하니 서 있다냐.”
병천은 적개심을 불태우며 투덜거렸다. 범진은 피식 웃어버렸다. 제가 욕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존경해 마지않는 임태산 형님임을 추호도 모르겠지.
“이런 건 뭐 한다고 여그다 떡하니 걸어노셨다요. 싸게 띠버리씨오.”
“적이라 해도 존경할 만한 상대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우리도 이제 더 이상은 폭력단이 아니니 검사를 적으로 생각할 이유도 없고.”
“것은 그렇지만…….”
병천은 사진을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갸웃한다.
신문 기사를 오린 것이라 화질이 떨어져 그랬을까? 사진 속의 강바른과 검찰에 출두해 본 CCTV 속 사내의 실루엣이 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병천은 범진이 태산에게 보여준 충성심을 근거로 범진을 밑도 끝도 없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입 무겁고 믿을 만한 놈들로 소수 정예를 꾸려 밀수범 잡는 인천항 현장에 뛰어들었을 때도 두말없이 나섰다. 범진이 검찰에 출석해 CCTV 속의 인물이 자신이라고 진술하라 지시했을 때도 망설임 없이 그렇게 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보면 역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범진은 어디까지나 태산의 복수를 위해 움직였다. 만약 병천이 그 까닭을 알았더라면 더욱 적극적으로 범진을 지지했을 것이다.
강바른 검사가 범진을 돕고 범진이 강바른 검사를 돕고 있는 듯 보이는 이 상황도 까닭을 알고 보면 이해할 수 있을까?
병천은 범진에게 뭐라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은 단순한 놈이고 복잡한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범진을 믿을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범진에게 맡겨두면 된다.
“대표님, 그람 지는 나가볼랍니다. 재개발 수주는 맡겨주셔라.”
“그래, 수고해라.”
범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각 강바른 검사의 청와대 오찬 참석 사진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액자를 벽에 걸기 전 흐뭇하게 액자를 내려다보며 손바닥으로 유리를 몇 번이나 쓸어 닦고 또 닦았다. 그러고는 비로소 사진을 회장실 한쪽 벽에 걸었다.
태산건설 대표실에 걸린 것과 차이가 있다면 신문에서 오린 화질 나쁜 사진이 아니라 선명한 원본이라는 것이었다. 주인호 전략기획실장이 언론사 측에서 원본을 받아 현상한 선물이다.
조 회장은 내키지 않는 척하며 받았으나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보고 또 보고 하다가 결국 벽에 걸겠다고 나선 것이다.
회장실 벽에는 조 회장 인생의 결정적 순간들이 박제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역대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조 회장은 그 사진들 옆에 강바른이 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나란히 걸었다.
조 회장은 사진을 걸고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 이놈 내 젊은 시절 판박이 아닌가.”
바른의 외모는 유전자적으로 어디까지나 탤런트였던 모친 몰빵이었지만 주 실장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배짱이 두둑한 게 날 아주 쏙 빼닮았어. 경영을 물려받았다면 좋았을 것을.”
조 회장은 아쉬움이 남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저 자리까지 직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조 회장이 대통령이 선 자리를 슬쩍 눈짓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대다가 한직을 전전한다고 쓴소리를 했던 조 회장이었다. 그런 조 회장에게 검사로서 좋은 이미지를 쌓아 정계에 진출하면 대통령까지도 갈 수 있지 않겠느냐 말한 것은 주 실장 자신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 회장이 먼저 자식을 대통령 자리에 앉힐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마약범 잡고 조폭 잡아 유명해지는 것도 좋지만 이젠 슬슬 중앙으로 나가야지.”
조 회장은 지시가 아니라 혼잣말인 것처럼 속내를 내비쳤다. 그렇게 내비친 조 회장의 속내를 살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주 실장의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른의 인사 문제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다. 지난번 인사 때는 바른의 희망대로 마약전담반에 남았지만 이번에는 로비를 불사해서라도 중앙으로 돌려보낼 셈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던 듯하다. 마약전담반에서의 활약으로 청와대에서도 바른을 주목해 끌어올리고 싶어 하고 바른 본인도 슬슬 전출을 희망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예, 좋은 얘기가 들리고 있으니 곧 영전할 겁니다.”
구 실장의 답에 조 회장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검사님, 인천 구치소장이랍니다.
“예, 연결하세요.”
황수진 실무관이 내선으로 알려왔다. 태산은 답을 하면서도 구치소장이 웬일로 자신에게 전화를 한 것일까 어리둥절했다.
-강바른 검사님? 인천 구치소장 채종명입니다.
“예, 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구치소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 구치소 내에 필로폰이 밀반입된 것 같습니다.
소장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태산은 내심 놀랐다. 구치소 안까지 필로폰을 반입하는 놈이 있다니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태산은 놀란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같은 수감실 재소자 하나가 교도관에게 신고했습니다. 자기한테도 같이 하자고 꼬드겨서 신고하게 되었다는군요. 반입한 용의자를 취조해서 경위는 대강 파악을 했는데… 어디에 수사를 맡겨야 하나… 관할이 애매한 점도 있고…….
구치소장이 더듬거리다가 끝내는 말끝을 흐렸다. 차마 하지 못하는 그 말을 태산은 짐작할 수 있었다.
구치소 안까지 마약이 반입되게 했다는 것은 구치소장에게는 상당히 큰 실책이 된다. 이것이 언론에라도 널리 퍼지게 되면 몹시 곤란한 처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약사건을 쉬쉬 묻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구치소장은 조용히 마약사건을 수사해 줄 사람을 찾아 강바른 검사에게 연락한 것일 테다. 인천에서 마약수사 하면 강바른이고 장기간 공작수사를 한 경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비밀리에 수사를 해줄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겠지.
태산은 소장이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대신 해준다.
“구치소 안까지 마약을 반입했다면 밖에도 일당이 있겠군요. 밖에 있는 관련자까지 함께 검거하려면 보안이 중요합니다. 이야기가 새지 않도록 교도관들, 재소자들 입단속 잘해주십시오. 사건은 제가 맡아 수사하겠습니다.”
태산의 말에 구치소장이 반색하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눈앞에 있었다면 절이라도 할 듯 감격한 목소리였다.
다음 날 문제의 장본인이 검사실로 이송되어 왔다.
“이용태 씨, 구치소 안에서 아주 히로뽕 파티를 하셨네요. 같은 수감실 안의 동료 재소자들에게도 인심 좋게 뿌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검사님. 다른 할 일도 없고 수감실 안에 갇혀서 하루 종일 그 생각만 나다 보니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마약이란 것이 달리 마약이겠습니까? 저도 참 끊어지지가 않아 죽겠습니다.”
이용태는 비굴하게 눈치를 살피면서도 반성하는 기미 없이 느물거리며 말했다. 수감실 안에서도 재소자들에게 약을 나눠주며 어깨에 힘주고 대장 행세를 했을 것이 뻔히 보이는 언행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치밀한데요. 지인에게 피부 연고 안에 필로폰이 든 비닐봉지를 숨겨서 반입하라고 부탁하고 접견 시에 변호사를 통해서 받은 것 맞습니까?”
“예.”
“화장실 안에서 은박지 위에 올려 태운 연기를 흡입하는 식으로 사용했고요?”
“예.”
“냄새 때문에 눈치챈 같은 수감실 재소자들에게도 필로폰을 권했지요?”
“예.”
태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약류 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어서 재판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또 구치소까지 마약을 들여와 다른 사람에게도 퍼뜨렸습니다. 이건 아주 반성의 자세가 안 되어 있네요. 판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범죄자죠. 큰 건은 아니라도 자잘한 전과도 몇 개 있고. 죄질이 나쁘다며 중형을 때릴 게 뻔하네요.”
일부러 겁을 줘보지만 이용태는 알아듣는지 아닌지 멀뚱멀뚱 보기만 한다.
“그래도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상선을 알려주면 구형량을 감안해 줄 수 있어요. 아니면 얄짤없이 감방에서 썩는 것이고.”
약쟁이들은 보통 이런 식의 딜을 제안하면 혹해서 동공이 흔들린다. 상선을 팔아넘기지는 못하더라도 같이 약을 한 잔챙이 이름이라도 불어서 형을 감해보고 싶어 한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은 원하든 원치 않든 약을 끊을 수밖에 없다. 그 기간이 길어지는 것이야말로 약쟁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용태는 딱히 구미가 당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과는 별 관계 없는 일이라는 듯 심드렁하다.
“실례합니다. 이용태 씨 변호인인데요.”
태산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혀를 찼다. WB홀딩스의 법률 자문을 맡았던 법무법인 대양의 전윤철 변호사였다.
전윤철은 인천항에서 필로폰 원재료를 밀반입하려던 백준용을 체포했을 때 처음 나타났고 박중성이 마약밀조로 검거되었을 때에도 어김없이 개입했다. 두 번 다 이웅배가 꼬리를 자르기 위해 전윤철을 보내 수습하려 한 것이었다. 덕분에 백준용도, 박중성도 자신의 선에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고 이웅배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윤철은 이웅배가 행방불명되자 안면을 싹 몰수했다. 박중성이 모든 것은 이웅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진술을 번복했는데 역시 전윤철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태산은 콧방귀도 끼지 않고 구형량을 유지했지만 공소사실은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마약조직의 수괴인지 아닌지에 따라 법원에서 선고하는 형량은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박중성은 사라진 이웅배를 수괴로 몰아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지시받은 일만 수행했다고 주장해 다소간 형량을 줄일 셈이다.
그렇게 사사건건 태산의 심기를 건드려 왔으니 이용태의 변호사로 다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전윤철이 그다지 반갑지 않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이쿠~ 이거 조폭 뽕쟁이 전문 변호사님 아니십니까? 이렇게 또 뵙네요. 이번에도 뽕쟁이를 맡으셨으니 이거 정말 우연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요?”
태산은 날을 세워 인사를 건넸다.
전 변호사는 빙그레 웃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검사님이 저에 대해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네요.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으니 곱게 보이시지 않겠지만 저는 그저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여기 이 사장님도 저희 회사의 귀한 고객이시고요.”
이 사장?
태산은 전 변호사가 사용한 호칭에 주목했다. 그렇다는 건 이용태 이놈도 그저 그런 조무래기 약쟁이는 아니라는 건가.
하긴 법무법인 대양의 수임료가 상당히 비싸기는 하다. 보통 사람이 스스럼없이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재력이 받쳐주지 않는 한 수임은 불가능하다.
태산은 이용태를 찬찬히 다시 보았다. 수감실에서 우두머리로 군림했던 것, 검사실에서 취조를 받으면서도 이렇게 여유가 있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