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원解冤
임태산의 말투와 표정을 한 젊은 검사가 이웅배를 뚫을 듯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접니다. 형님이 죽인 임태산이.”
이웅배는 당황하여 범진을 돌아본다. 범진은 강바른 검사의 말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뭐, 뭐야? 저놈이 자기가 임태산이라고 하는 말만 믿고 날 배신한 거냐? 제정신이야? 그런 미친 소리를 나더러 믿으라고?”
이웅배는 애써 부인하면서도 태산과는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태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웅배에게 다가갔다.
“못 믿으시겄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믿게 헐 마음은 없습니다. 형님 입으로 직접 이유를 듣고 싶은 것뿐인게.”
태산은 몸을 숙여 이웅배와 눈을 맞추고는 물었다.
“임태산을 죽인 이유가 뭐요?”
이웅배는 피식 웃었다.
“이제 와서 이유가 중요한가?”
“중요허지. 들어보고 이유가 합당허면 곱게 죽여줄 수도 있응게.”
“어차피 죽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이웅배는 강 검사의 눈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강 검사의 눈은 진심 어린 분노로 가득했다. 그저 압박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검사가 건달 거느리고 다니면서 사람 죽인다는 얘기를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다니… 정말로…….”
이웅배는 정말 니가 임태산이기라도 한 거냐 중얼거리려다가 말을 꿀꺽 삼켰다.
태산은 기다리지 못하고 채근해 물었다.
“돈이오? 고작 돈 때문에 신념을 저버리고 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형제들까지 죽였단 말이오?”
모두가 돈 때문일 거라 했지만 태산은 차마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돈? 그깟 게 뭐라고.”
이웅배는 코웃음을 쳤다. 의외의 답에 태산은 눈을 크게 떴다.
“일개 검사인 당신이 조직의 정점에 있는 나의 고뇌를 감히 짐작할 수나 있을까? 모든 것은 조직을 위해서였다. 와룡회는 커도 너무 커버렸어. 그 큰 덩치를 유지하려면 계속 더 큰돈을 벌어들여야만 해. 주위를 모두 집어삼킬 때까지 멈출 수가 없는 공룡인 거야. 멈추는 순간 무너지는 거니까.”
이웅배는 회한에 젖어 말했다.
“아우들과 힘들게 키워온 조직이다. 와룡회는 우리의 청춘이고 꿈이었어. 나는 어떻게든 와룡회를 지켜야 했다. 태산이도 내 입장이었다면 아마도 나를 이해했을 거야.”
태산이 발끈 언성을 높였다.
“아니오. 이해 못 하겄소! 약 파는 일은 사람 죽이는 것보다 더한 짓이오. 그냥 죽지도 못하게 사람 피를 말리믄서 주변 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내모는 일이오. 그런 짓까지 해야 유지될 조직이면 차라리 해산하는 게 낫지.”
태산은 충동적으로 두 손을 들어 웅배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서서히 손아귀를 조이며 말했다.
“변명은 잘 들었소. 와룡회는 나가 깨끗이 정리할 텐게 미련 없이 잘 가시오. 지옥에 가더라도 재호와 나랑은 다른 곳으로 가시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다시는 보덜 맙시다.”
태산이 손아귀를 조여가자 이웅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단번에 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태산은 차마 그러지 못한다.
이웅배의 목을 조이는 태산의 눈이 차츰 젖어들었다.
“형님, 어쩌다 이렇게 변하셨다요. 울 엄니 세상 버렸을 때 장례식장 찾아와서 친엄니 돌아가신 것처럼 통곡해 주셨던 분이… 대체 어쩌다가…….”
이웅배의 충혈된 눈이 더욱 흡 떠진다. 대체 그 사실을 강 검사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며 어째서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의식이 가물가물해져야 이웅배는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사내가 태산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태사… ㄴ… 이냐?”
이웅배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간신히 목소리를 내 태산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리자 태산은 더는 손아귀를 누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범진은 태산의 마음을 눈치챘다. 태산은 지금 웅배를 간절히 죽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비록 복수를 위해서라 해도 오래 모셔온 형님을 쉽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범진은 품에서 칼을 뽑아 들고 소리도 없이 웅배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태산이 비통함에 젖어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웅배의 뒤에서 팔을 뻗어 목 위를 가로로 길게 그어버렸다. 태산이 잡고 있는 사이 범진이 목을 가른 형국이었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피가 솟구친다. 이웅배의 동공이 맥없이 열리고 태산의 얼굴로 피가 튄다. 태산은 당혹해 빛이 사라져 가는 이웅배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피에 젖은 손아귀가 미끄러지며 태산은 이웅배의 목을 놓쳤다. 이웅배는 눈을 부릅뜬 채로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하지만 바로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한동안 컥컥 소리를 내고 경련하며 계속 피를 쏟아냈다.
이웅배의 숨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태산은 꼼짝 않고 곁에 앉아 이웅배를 내려다보며 웅크리고 있었다. 이웅배가 숨을 거두자 그제야 범진이 태산의 앞에 칼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형님의 원수는 저의 원수이기도 하다 보니 감정이 앞섰습니다. 주제넘게 나선 벌은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차마 죽이지 못할 것 같아 대신 손을 썼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산 역시 범진이 끼어든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못 죽일 것 같더냐?”
태산이 되묻자 범진이 당황하여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닙니다. 단지 형님이 이런 일로 직접 손을 더럽히셔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범진은 뭐라 더 변명하려 했지만 태산이 말을 막았다.
“됐다. 내가 직접 보내 드릴 셈이었지만 내가 직접 하나 네 손을 빌리나 다를 게 뭐냐. 광주에서 도원결의를 했던 세 형제가 서로 죽이고 죽여 이제 남은 이가 하나도 없는데.”
“형님… 형님이 이렇게 건재하시지 않습니까?”
회한에 젖어 자조하는 태산을 범진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건재라…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내가 나인지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을 과연 건재라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범진은 입을 다물었다. 범진이 덩달아 침통해져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태산은 비로소 마음을 다잡았다.
“네가 그런 얼굴 할 것 없다.”
범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움직이자. 날 밝기 전에 처리하고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 형님.”
태산은 웅배의 시신을 다시 트렁크에 옮겨 실었다. 범진은 차를 몰아 장례식장으로 달렸다. 와룡회 산하에는 상조회사와 장례업체도 있었기 때문에 장례 시설을 은밀히 이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범진은 장례식장 옆의 화장장 앞에 차를 댔다.
차를 세워둔 채 범진이 화장장 안으로 들어가 사체를 싸는 시트를 들고 나왔다. 태산은 범진과 함께 웅배의 시체를 둘둘 싸서 화장장 안으로 떠메고 갔다. 그리고 화장로 앞에 미리 준비된 나무 관에 웅배의 시신을 눕혔다.
웅배의 시신을 싼 시트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화장장 직원은 미리 얘기를 들은 듯 아무 말 없이 화장로를 작동시켰다. 관이 화장로 안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고 화장로의 문이 닫혔다.
“한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직원의 말에 태산과 범진은 화장장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은 채 조용히 기다렸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직원이 유골함을 들고 나와 태산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며 주머니를 뒤지더니 삼베 손수건을 꺼냈다. 직원은 손수건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접힌 부분을 열어 보여준다.
손수건 위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납작한 금속 같은 것이 몇 개 올려져 있었다. 태산은 이게 뭐냐는 눈으로 물끄러미 직원을 바라보았다.
“치금입니다. 뼈를 추릴 때보니 화로 바닥에 눌어붙어 있어서…….”
태산은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난 필요 없으니 넣어둬요.”
화장장 직원들이 화장 후 녹아내린 금니를 모아 쏠쏠한 용돈벌이를 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유족들은 경황이 없어서 또는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서 치금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하지 못한다. 그렇게 주인 잃은 치금들을 모아서 팔면 1년에 기백만 원 정도의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직원은 슬그머니 손수건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화장장 안을 정리하러 들어갔다.
범진이 유골함을 들고 있는 태산을 보며 물었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봉안당으로 안내해다오.”
누구의 봉안당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범진은 태산의 뜻을 알아채고 조용히 앞장섰다. 봉안당으로 들어서자 가장 눈에 띄는 안쪽 한가운데 태산의 자리가 보였다.
태산의 생년월일과 사망일이 적힌 유골함과 태산의 영정 사진이 나란히 서 있었다. 태산의 옆자리는 재호의 유골함이 차지하고 있었다.
가족의 보살핌을 잘 받고 있는 듯 재호의 자리는 가족사진과 재호가 생전에 좋아하던 물건들로 따뜻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태산의 자리는 깨끗하게 유지되긴 했으나 쓸쓸히 비어 있었다.
태산은 자신의 영정을 옆으로 치워놓고 재호의 유골함과 자신의 것 사이에 이웅배의 유골함을 놓았다. 이웅배의 유골함은 이름도 날짜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태산은 재호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재호야, 웅배 성님 왔다. 이제야 우리가 예전처럼 한자리에 모였구나.”
[형님이 꼭 갚아주씨요.]
재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니 말대로 내가 갚았다. 나 임태산이 약속은 꼭 지키는 놈 아니냐.”
태산은 애써 호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금방 목이 메어 말꼬리가 흐려진다.
“…약속은 지켰는데… 그런데… 내 마음이 왜 이러냐, 재호야?”
하소연하는 태산의 눈이 붉었다. 곁을 지키고 선 범진도 눈물을 삼킨다.
태산은 한동안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부옇게 아침 해가 밝아서야 태산은 자리를 뜨며 범진에게 지시했다.
“오늘로 와룡회는 해산한다. 뒷정리는 너에게 맡기마.”
“예, 형님.”
그날 오전 안소영 검사가 출근했을 때 마약전담반은 비상이 걸려 있었다. 허둥거리던 황수진 실무관이 검사실로 들어서는 안 검사를 보고 반색하며 보고했다.
“안 검사님, 아침부터 경찰에서 연락이 와서 마약전담반 검사님이나 수사관 좀 빨리 현장에 보내달라고 난리예요. 지금 강 검사님은 입원 중이시고 구 검사님은 아직 출근 전이시라 우 수사관 혼자 보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안 검사는 두말없이 나섰다.
“제가 갈게요.”
우형진 수사관이 반색하여 앞장섰다.
“현장이 어딘가요?”
“와룡회 소유의 룸살롱이라고 합니다. 우리한테 연락이 온 것을 보면 마약 관련인 것 같은데요.”
와룡회의 이름이 나오자 안 검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바른 검사가 괴한의 칼을 맞은 직후였다. 아직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해 강바른 검사 본인의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CCTV는 미리 손을 댔는지 무용지물이었고 블랙박스 분석은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황상 와룡회에서 손을 쓴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짙었다.
안 검사는 강 검사의 독직폭행을 축소 기소한 것을 한동안 자책했었다. 하지만 강 검사가 조폭의 린치를 당해 생사가 오가게 되니 또 다른 자책이 일었다. 수괴를 한시라도 빨리 체포하는 것이 우선이었을까? 강 검사의 독직폭행을 애초에 숨겨주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까?
안 검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감히 검사를 건드린 조폭 놈들에게 쓴맛을 보여주는 수밖에. 안 검사는 어떻게든 와룡회의 범죄를 낱낱이 밝히겠다 결심했다.
* * *
룸살롱 앞은 폴리스라인이 촘촘히 처져 있었다. 입구로 다가가니 앞을 막아서는 경찰에게 안 검사는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인천지검 강력부 안소영 검사입니다.”
순경이 경례를 붙이고는 폴리스라인을 열어주었다. 안 검사는 우형진 수사관과 함께 룸살롱 안으로 들어갔다.
룸살롱 프론트에서 형사 하나가 마담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안 검사를 돌아보았다. 나이로 생각했을 때 이 사람이 이곳 책임자구나 싶었다. 안 검사는 형사에게 다가가 다시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인천지검 안소영입니다. 지원 요청 하셨죠?”
“아, 예…….”
형사는 젊은 여검사와 햇병아리 수사관 단둘이 출동한 것에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라 그런대로 납득한 듯 별말 없이 앞장섰다.
안 검사와 우 수사관은 형사를 따라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형사가 방향을 틀더니 가장 안쪽에 있는 대형 룸 안으로 불쑥 들어간다.
형사를 따라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 안 검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테이블과 바닥, 벽과 천장까지 온통 피가 튀어 있는 와중에 현장감식원들이 분주히 증거를 모으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가 들어와서 출동해 보니 보시다시피 이 지경이었습니다. 와룡회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칼부림이 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부 항쟁이 아닐까 싶네요. 최근 와룡회가 뒤숭숭하긴 했잖습니까?”
형사가 안 검사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덧붙였다.
“검찰에서는 칼 맞은 분도 계시고.”
안 검사는 표정을 굳히며 딱딱하게 답했다.
“그 사건은 아직 파악 중입니다. 와룡회 소행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젠 단정할 수 있겠죠. 증거가 있으니까.”
형사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현장에서 이런 게 나왔는데 말입니다.”
형사가 증거 수거용 비닐 백에 담긴 소형 녹음기를 꺼내 보였다.
“간부 회의에서 오간 대화를 누군가 녹음해 남긴 것 같습니다. 이웅배 회장이 강바른 검사를 살해하라고 사주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안 검사는 얼떨떨한 채로 녹음기를 받아 들었다.
“그뿐 아니에요. 이웅배가 박중성에게 마약사업을 지시했다는 내용, 앞으로 기회를 봐서 다시 마약사업을 시작하자고 모의하는 내용 모두 담겨 있습니다.”
형사는 선심 쓰듯 말했다.
“인천지검 마약반이 와룡회를 계속 조사해 왔고 그 때문에 희생되신 분도 있으니 이 건은 그쪽에서 직접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
형사는 안 검사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직원을 건드렸으면 그만큼 갚아주는 게 조직의 생리 아닙니까? 적어도 우리 경찰은 그렇거든요. 마약전담반도 와룡회에 이를 갈고 있을 테지요.”
수사권을 나눠 가지고 경쟁하는 검경은 태생적으로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경찰은 현장직이기 때문에 책상물림인 검사보다는 오히려 아웅다웅 싸워온 조폭들과 정서적으로 가까움을 느끼는 편이었다.
하지만 조폭이 검사를 찌른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찰에게도 공분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녹음기를 남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안 검사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현장에 있던 놈들이 몽땅 병원에 실려 가서 아직 자세한 정황을 파악하지 못했거든요. 녹음본을 들어보면 분명 이웅배도 현장에 있었는데 실려 간 놈들 중에는 이웅배가 없었다는 것도 이상하고.”
“다른 목격자는 없나요?”
“아예 와룡회에서 전세를 낸 것이라 다른 손님들은 없었다고 합니다. 마담은 계속 프론트에 있었고 종업원 몇이 서빙을 하긴 했는데 멤버가 다 모이고 난 후에는 어깨들이 입구를 막아서서 출입을 못 하게 했다는군요. 아무것도 못 봤다고 말하고 있긴 한데 정말 못 본 건지 아니면 보고도 입을 닫는 건지는 알 수 없죠.”
“CCTV는요?”
“달리 양아치들이겠습니까? 내부엔 전혀 없고요. 입구 쪽에 있는 것도 껍데기뿐입니다. 녹화가 전혀 안 되어 있어요. 뒤가 구린 놈들이니 제 발등 찍을 증거를 안 남기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주차장 CCTV를 뒤져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 물어도 그 이상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듯했다. 안 검사는 녹음기에 녹음된 내용부터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현장을 넘겨받는 절차를 밟기 위해 배진만 부장에게 보고하러 들어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 한시라도 빨리 이 내용을 열어볼 수 있을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일단 인천지검으로 돌아가서 수사팀을 꾸려 다시 보내겠습니다. 인계할 때까지만 계속 수고 부탁드립니다.”
안 검사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형사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받았다. 안 검사가 우형진 수사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부장님께 보고드리러 가겠습니다. 우 수사관님은 주차장 CCTV 확보해서 바로 따라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발치에 뭔가 밟히는 느낌이 난다. 물컹하면서도 속은 단단한 기묘한 감각에 안 검사는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서서히 발을 치우고 바닥을 내려다본다.
퉁퉁하면서도 길쭉한 물체의 끝에 무딘 광채를 띤 껍질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손… 가락?”
안 검사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더니 형사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물체를 확인하더니 당황해서 얼른 집어 들었다.
“어휴, 이거 여기도 하나 떨어져 있었네. 이건 또 어느 놈 거야? 시간이 꽤 지나서 붙이지도 못할 것 같은데…….”
형사는 옆에 놓인 얼음통을 집어 들어 물을 쏟아버린 후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문간에 서 있는 경찰을 큰 소리로 불렀다.
“김 순경! 이거 얼음 채워서 그놈들 실려 간 병원으로 보내.”
형사는 순경에게 얼음통을 건네고는 안 검사를 돌아보더니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현장에 굴러다니는 손가락이 한두 개였어야 말이죠.”
그러고는 쯧쯧 혀를 차며 덧붙였다.
“그냥 찔러댄 게 아니라 아주 작정하고 병신을 만들었더군요. 모르긴 몰라도 이 자리에 있던 간부 놈들 다신 이 바닥에서 재기하기 힘들 겁니다. 아킬레스건 잘린 놈, 팔 인대 끊어진 놈, 손가락 잘린 놈, 눈알 파인 놈 아주 골고루예요.”
형사의 말에 피비린내가 새삼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안 검사는 속이 울렁거렸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한 뒤 얼른 룸을 빠져나왔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안 검사는 부장실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출근해 있던 배진만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안 검사, 경찰 연락받고 현장 나갔다면서? 무슨 일인가?
“와룡회에 내부 항쟁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간부들이 중상해를 입고 대거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합니다. 이웅배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무슨 일로? 항쟁을 주도한 것은 누구고?
“아직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간부회의 대화 내용을 녹음기에 남겨놓았습니다. 이것을 분석하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경찰 말로는 이웅배가 강바른 검사 살인을 사주한 것부터 마약사업을 지시한 내용까지 전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안 검사의 보고에 배 부장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그게 정말인가? 직접 들어봐야겠군. 어서 가지고 들어오게.
“예, 지금 출발하려고 합니다. 현장 인계받고 조폭들 실려 간 병원에도 조사할 인원을 보내야 하니 수사 팀을 꾸려서 바로 파견해 주십시오.”
-알았네. 구 검사를 보내지.
전화를 끊고 난 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안 검사는 녹음기를 2배속으로 틀어놓고 차를 출발시켰다.
[…강바른 그놈이 우리 와룡회를 못 찍어 눌러서 안달을 하더니 결국 칼 맞고 뒤지는군요.]
[…회장님이 손을 안 쓰셨으면 저라도 썼을 겁니다.]
[와룡회를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신 거죠…….]
녹음된 음성들은 하나같이 즐거운 어조로 강바른 검사의 죽음이 기정사실인 양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듣는 안 검사의 속에서 불길이 확 솟구쳤다. 안 검사는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그동안 박중성 이사가 맡아 해왔던 사업들을 자네들이 하나하나 맡아서 정상화시켜야 하네.]
[마약사업도 말입니까?]
[…시대가 변하는데 언제까지나 예전의 생각을 고집할 수는 없지.]
[그럼요. 약장사만큼 돈 되는 장사가 또 어딨습니까? 그걸 포기하긴 아깝죠.]
배 부장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귀를 세우고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녹음된 내용이 끝나자 안 검사는 녹음기를 끄고 배 부장에게 보고했다.
“이것으로 이웅배가 강 검사를 살해하라고 사주한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살인 교사 내지는 간접정범으로 처벌이 가능합니다. 또한 마약류단속법 위반과 범죄단체조직죄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대체 누가 이걸 녹음해서 증거로 남겼단 말인가. 아무래도 이웅배를 제거하고 와룡회를 해산시키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와룡회 내부 소행이라면 이렇게 해서 이익을 볼 사람이 없지 않나.”
배 부장이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검사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웅배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간부가 아니겠습니까? 현 체재를 뒤엎어서 차기 수괴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라면요?”
“박중성이 구속된 이상 지금 와룡회 내부에 안정적으로 차기를 차지할 단일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간부는 없네. 그러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연합을 구축해야 할 테지. 게다가 조직을 이어받으려면 제대로 된 조직을 이어받아야지 이렇게 박살 내서는 차지하는 보람이 없지 않나.”
안 검사가 배 부장이 품고 있는 의문을 재차 확인했다.
“누군가… 오직 와룡회를 해산시키려는 목적으로 움직였단 말입니까?”
“그렇게 보이니까 말일세.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문득 현장에서 형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자리에 있던 간부 놈들 다신 이 바닥에서 재기하기 힘들 겁니다.]
어쩌면 배 부장의 말이 안 되는 짐작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묘하게 불안하고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어 안 검사는 복잡한 심경으로 검사실에 돌아왔다. 마침 우형진 수사관이 도착해 있어 안 검사는 반색했다.
“주차장 CCTV는 확보했나요?”
“주차장 쪽도 룸살롱과 사정이 비슷했습니다. 엘리베이터 근처에는 제대로 찍힌 CCTV가 없었고요. 주차장 구석에 있는 CCTV 중에 엘리베이터 근처가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었습니다. 화질이 나쁘고 거리가 멀어서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우 수사관은 말을 흐리고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건넸다.
“해당 CCTV 영상 복사 파일입니다.”
안 검사가 USB를 컴퓨터에 꽂고 영상을 재생시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큰 키의 남자가 사람을 떠메고 내렸다. 그 뒤로 정장을 입은 단신의 남자가 내린다. 장신의 사내가 엘리베이터 근처에 세워둔 차 트렁크에 메고 온 사람을 처넣는 사이 다른 남자는 운전석에 올랐다. 트렁크를 닫은 사내가 조수석에 타자 잠시 후 차가 움직였다.
“인상착의가 분명히 식별되지는 않지만 이걸로 왜 이웅배가 사라졌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 수사관이 설명했지만 안 검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실루엣을 처음 본 순간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눈에 익은 실루엣이다. 심지어 그 사내와 함께 있는 단신의 남자조차도 눈에 익다. 인천항에서 밀수범을 잡는 것을 도왔던 정체불명 집단의 리더가 꼭 저런 체격이었다.
‘설마…….’
등 뒤에서 모니터를 넘겨보던 황수진 실무관이 안 검사의 불안한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근데… 저 키 큰 남자, 꼭 강 검사님 같지 않아요?”
* * *
“근데… 저 키 큰 남자, 꼭 강 검사님 같지 않아요?”
황수진 실무관이 불쑥 꺼낸 말에 우형진 수사관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고 보니 비슷하네요. 체격도 그렇고 움직임도 그렇고.”
우 수사관은 이내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강 검사님은 괜찮으실까요? 병원에서는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면회도 못 하게 한다면서요? 이런 일이 일어난 거 아셨다면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셨을 텐데 병실에 누워서 생사도 모르는 상태라니…….”
“괜찮으실 거예요. 워낙 강골이시라 이번에도 잘 이겨내실걸요.”
황 실무관이 우 수사관을 달랬다. 하지만 달래는 목소리 역시 침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영상 속 남자가 강 검사를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칼을 맞고 병원에 누워 있는 강 검사가 현장에 나타났으리라곤 추호도 생각지 않는 눈치였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편이 맞겠지만 안 검사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저 좀 나갔다 올게요.”
“현장으로 돌아가십니까?”
“아니요.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와룡회 놈들 진술 받으시게요? 다녀오십시오.”
우 수사관이 지레짐작해 말했지만 안 검사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안 검사는 입원해 있는 강 검사의 상태를 확인할 셈이었다. 혹시 저렇게 나돌아 다니며 와룡회를 깨부술 수 있을 정도인데도 모두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칼을 맞았다는 것부터가 처음부터 거짓이었던 것은 아닌지.
안 검사는 강 검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외과 입원실로 올라가 배진만 부장에게 전해 들었던 병실 호수를 떠올리며 1인실 쪽으로 걸어간다. 1108호실 문을 열려는데 스테이션에서 간호사가 내다보고 헐레벌떡 달려온다.
“무슨 일이시죠?”
“강바른 환자 면회 왔습니다.”
“그분은 아직 상태가 불안정해서 면회는 안 됩…….”
안 검사는 들은 척도 않고 입원실 문을 열어젖혔다.
병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안 검사는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넋을 놓았다. 뒤따라온 간호사가 병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탄식하더니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환자분 또 나가셨네.”
안 검사가 놓치지 않고 돌아보며 추궁했다.
“또… 라니요?”
간호사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는데 환자복을 입은 강 검사가 불쑥 문 안으로 들어섰다. 간호사는 화제를 떠넘길 수 있는 데 반색하며 강 검사에게 말했다.
“강바른 환자분, 회복이 늦어질 수 있으니 돌아다니지 마시고 절대안정 하세요. 의사 선생님께 혼나요.”
“죄송합니다. 계속 병실에만 있으려니 갑갑해서 복도만 좀 걸어 다녔습니다.”
강 검사의 시선이 안 검사에게로 향하자 간호사가 변명하듯 설명했다.
“죄송해요. 기자들 못 들어오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분이 워낙 막무가내로…….”
“아니요. 기자 아니고 직장 동료입니다. 괜찮습니다.”
간호사는 그제야 안도하고 물러났다.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간 후 강 검사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생사를 오가신다 들었는데 듣던 것과 다르게 너무 멀쩡하시네요.”
잔뜩 날을 세운 말이었건만 강 검사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일부러 숨겼습니다. 그래야 범인이 기고만장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동료들까지 속였다고요? 배신감 느껴지네요.”
“걱정 끼친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결국 내 기대대로 되지 않았나요? 와룡회 놈들 설쳐대다가 자멸한 것 같은데…….”
“병실에 누워서도 소식이 빠르시네요.”
“벌써 기사 떴어요. 핸드폰만 있으면 알 수 있는 내용이죠. 방금 휴게실 가서 뉴스로 확인도 했고.”
강 검사가 끙 하고 침대에 몸을 올렸다. 안 검사는 칼을 맞았다는 복부를 유심히 보았다. 하지만 헐렁한 환자복에 가려져 상처 부위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건강하게 돌아다니시니 칼 맞은 것 자체가 처음부터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돈데요.”
안 검사의 말에 강 검사는 그저 피식 웃었다.
“범인의 얼굴은 보셨나요?”
“못 봤습니다. 꽁꽁 싸매고 있기도 했고 워낙 경황이 없어서.”
“기억나는 인상착의는요?”
“잘 모르겠네요.”
강 검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건성으로 답했다.
“범인을 잡는 데 별로 관심이 없으신 거 같네요.”
“그런 건 아니지만 어차피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웅배 짓이겠죠.”
그렇게 눙치는 강 검사를 안 검사는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강 검사에게 달려들어 상체를 눌렀다. 당황한 강 검사가 멈칫 뒤로 몸을 눕히자 안 검사는 그때를 틈타 강 검사의 환자복 옷자락을 들췄다.
탄탄한 복근 한가운데 가로로 길게 드레싱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드레싱 한가운데는 피가 배어 나와 붉게 젖어 있었다.
상처가 없으리라 예상했던 안 검사는 당황해 굳어버렸다. 강 검사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안 검사의 상체를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뭡니까? 갑자기 옷을 들추다니. 이거 성추행 아니에요?”
안 검사가 얼굴을 붉히며 얼른 떨어졌다.
“실례했습니다.”
안 검사는 부랴부랴 병실을 나가며 말했다.
“상처가 벌어진 거 같습니다. 제가 가서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스테이션으로 나간 안 검사는 아까 실랑이를 벌였던 간호사에게 전했다.
“강바른 환자 수술 부위에 피가 묻어 있던데요. 상처가 벌어진 거 아닌가요?”
“수술 후에 아직 드레싱을 새로 하지 않아서요. 조금 배어 나온 정도는 괜찮아요. 어차피 드레싱 다시 할 때도 되었으니 살펴볼게요.”
간호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해 안 검사는 걱정을 덜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담당 선생님도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네, 잠깐 기다리세요.”
간호사가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가 전화로 호출을 넣었다. 잠시 후 담당의가 스테이션 쪽으로 다가왔다.
“강바른 환자분 직장 동료시래요.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고.”
간호사가 귀띔하니 담당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 검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강 검사님 동료분이시라면 검사님이시겠네요.”
“예, 사건 관련해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의사가 짐작한다는 듯이 조용히 안 검사의 질문을 기다렸다.
“응급실에 실려 올 당시에 강 검사님 상태가 어땠습니까?”
“제가 응급실 당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생명이 위중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복부에는 칼이 그대로 꽂혀 있었고 출혈도 심했다고 하더군요. 순환혈액량이 급격히 감소해서 쇼크에 빠질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호출받고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는 수혈을 통해 쇼크는 막은 상태였지만 복부 자상이 심각했고 장기에도 상당 부분 손상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수술이었죠. 기적처럼 빠르게 회복하고 있긴 합니다만 강 검사님이 큰 위기 넘기셨습니다.”
의사의 설명에 비로소 안 검사가 가지고 있던 의혹이 눈 녹듯 스르르 녹았다. 강 검사가 칼을 맞은 것도, 생사의 기로를 오간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안 검사는 엉뚱한 의심으로 강 검사를 몰아붙인 것이 못내 민망했다.
“감사합니다. 강 검사님 회복하실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안 검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니 의사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안 검사는 인사를 마친 후 그대로 부랴부랴 병원을 빠져나갔다.
의사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건 관련해서 물을 것이 있다더니 강 검사의 상태에 대해서만 묻고 그냥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것이다.
간호사가 말을 걸어 의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 강바른 환자 드레싱 다시 할 때 된 거 같은데요.”
“아, 그래요. 드레싱 하는 김에 환부 좀 봅시다.”
의사가 간호사를 따라 강 검사의 병실로 들어섰다.
“강바른 환자분, 상태가 좀 어떤가요?”
강 검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간호사가 투덜거리며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글쎄, 말도 마세요. 그렇게 안정하라고 말씀드렸는데 또 돌아다니다 오셨다니까요.”
간호사의 말에 의사도 덩달아 타박했다.
“한동안 회복한 거 비밀로 해달라 하시더니 그렇게 돌아다니시면 의료진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기자들한테 먼저 잡히겠는데요. 이제 비밀로 안 해도 괜찮은 겁니까?”
강 검사는 피식 웃고는 답했다.
“예, 이제 괜찮습니다. 상황 종료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이제 기자들이랑 실랑이 좀 덜해도 되겠네요. 한숨 덜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쫓겨 다녔는지…….”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음기를 띠었다.
“드레싱 좀 제거할게요.”
간호사가 그렇게 말하며 강 검사의 환자복을 들췄다. 드레싱에는 꽤 많은 양의 피가 묻어 있었다.
“어? 출혈이 꽤 있네요. 상처가 벌어졌나. 무리하게 움직여서 그런 거 아닙니까? 복압이 많이 올라갔으면 안까지 터질 수 있는데…….”
의사의 말에 간호사가 급하게 드레싱을 제거했다.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던 의사는 매끈한 상처 부위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실밥이 남아 있긴 했지만, 흉터가 깊지 않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였다.
“벌써 이렇게 아물었다고?”
의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며 카트에 놓여 있는 소독용 집게를 들어 강 검사의 상처를 면밀하게 헤집어보았다. 상처는 벌써 거의 아물어 있었다. 오히려 봉합한 실밥이 방해되어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상처는 극적으로 치유된 것이 분명했다. 의사는 멍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강 검사의 질문에 의사가 홀린 듯이 답했다.
“잘못됐다면 잘못되었죠. 이렇게 빨리 나을 수가 없는데… 환자분께는 잘된 일이겠지만.”
의사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는 말했다.
“어… 일단 피검사, CT, 엑스레이 검사 다 해보도록 합시다. 이상이 없다면 생각보다 상당히 빨리 퇴원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간호사가 상처를 소독하고 드레싱을 새로 해준 뒤 의사와 함께 병실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되자 비로소 태산은 깔끔하게 드레싱 된 상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 피가 아니었는데…….”
복수하는 과정에서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겉옷은 돌아온 직후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버렸지만, 거즈에까지 피가 배어들었을 줄은 몰랐다.
“다행이군. 피가 없었으면 반창고까지 뜯어낼 기세였는데 말이야.”
자신의 피라고 착각한 안 검사가 그쯤에서 물러나서 다행이었다. 만약 상처가 거의 아문 것을 안 검사가 보았더라면 또다시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테다. 그러면 피차 피곤해진다.
태산은 문득 필사적인 얼굴로 자신을 누르고 있던 안 검사의 작은 몸을 떠올린다. 안 검사가 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완력도 약하고 숫기도 없는 젊은 여자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강단을 보일 수 있는 것인지 태산은 다시금 감탄했다.
무서울 것 없는 지금의 태산이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이 있다면 끝내 곁에서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는 안 검사의 존재였다. 성가신 한편으로 묘한 애증이 깊어졌다. 아마 안 검사도 자신에 대해 그러한 양가감정을 느끼고 있을 테지만.
“잠이나 자자.”
태산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떨쳐내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이내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마침내 복수를 끝낸 후 찾아든 달콤한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