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반격
“이게 뭐예요?”
최 검사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태산은 딴소리를 한다.
“최 검사 이번에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로 발령 났다며?”
“언제 적 특수부예요? 반부패수사부로 바뀐 지 한참 됐는데.”
최 검사가 퉁을 준다. 하지만 태산은 오랫동안 들어온 특수부라는 이름이 바뀐 것이 영 적응되지 않았다.
“어쨌든 축하해. 역시 엘리트야.”
태산의 인사에 최진우 검사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이건 부임 선물.”
태산이 장부를 눈짓하며 말했다. 최 검사가 어리둥절해 장부를 열어본다. 한 장 한 장 넘어감에 따라 최 검사의 눈이 점점 커진다. 마침내 놀란 눈으로 태산을 마주 보는 것이다.
“이, 이게 대체…….”
“태산건설 임태산이 인천지역 검경 간부들을 접대한 내역을 상세히 적어놓은 장부야. 보면 알겠지만 우리 검사장도 이름이 올라가 있고.”
“어떻게 손에 넣으신 거예요? 믿을 수 있는 겁니까?”
“손에 넣은 경위는 알 거 없고. 백 퍼센트 믿을 수 있어. 확실한 물건이야. 날짜, 장소, 금액을 이 정도까지 구체적으로 꾸며낼 수 있을 거 같아?”
최 검사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장부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 정도 거물급들이 연관된 일이라면 제 선에서 처리하기가 버거울 것 같은데요.”
“최 검사가 직접 처리하라는 게 아니야. 서울중앙지검장에게 전달해 주기만 하면 돼.”
“같은 식구끼린데 감싸려 하지 않겠습니까?”
최 검사가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맡겨. 이 건을 물어다 준 최 검사의 입지도 올라갈 테니 부임 선물로 이만한 게 없지.”
서울중앙지검장 신승렬과 인천지검장 우현중은 오래된 앙숙이었다. 계파가 다른 두 사람은 정권에 따라 엎치락뒤치락 경쟁했다. 지난 정권 때만 해도 우현중이 먼저 고검장급으로 올라서면서 앞서 나가고 있었지만 정권이 바뀌며 역전되었다.
원래 서울중앙지검장은 요직 중의 요직이라 고검장급으로 임명하기 때문에 우현중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정권에서는 지검장급인 신승렬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해 버렸다. 우현중은 오히려 검사장급으로 좌천되었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옷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했겠지만 우현중은 소심하면서도 권력욕은 있어 그 자리에서 버텼다. 정권이 바뀌어 다시 역전될 가능성을 보고 몸을 낮추어 기다리는 것이다.
신승렬은 우현중이 재역전하는 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 계파를 대규모 숙청할 절호의 기회인데 두 눈 뜨고 놓칠 리 없다.
“가기 전에 예전 506호 멤버들 다 모아서 송별회라도 하자고.”
“예, 그래야지요.”
태산이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하자 최 검사는 서둘러 장부를 챙기며 답했다.
태산은 504호실을 나와 611호 검사실로 올라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검사님.”
“출근하셨습니까?”
태산의 쾌활한 인사에도 검사실 식구들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아마도 모두 이미 기사를 본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안 검사의 심기가 가장 불편해 보였다. 태산이 들어와도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리며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태산은 태연히 검사실을 가로질러 집무실로 쏙 들어가 박혔다.
팀원들이 종일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 태산은 집무실 안에서 홀로 섬처럼 고립되어 여유를 만끽했다.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약조직 수사에서 제외된 탓에 급히 처리해야 할 건은 없었던 것이다. 태산은 느긋하게 업무를 본 다음 가장 먼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퇴근하십니까?”
이흥렬 계장이 부럽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그래요. 먼저 가려니 미안하네요. 야식 필요하면 전화해요. 내가 시켜줄 테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맛있게 먹겠습니다.”
창가에 서 있던 안 검사가 그제야 힐끗 돌아보았다. 아직도 화가 난 듯 뾰로통한 태도로 툭 던져 말한다.
“정문으로 나가지 마세요. 기자들 쫙 깔렸습니다.”
태산은 고개를 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문 앞에 기자들이 몰려 진을 치고 있었다.
“고마워요.”
태산은 안 검사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안 검사는 받지도 않고 자리에 가 앉았다.
태산은 1층으로 내려가 구내식당 뒷문으로 검찰청 건물을 빠져나간 뒤 주차장으로 달렸다. 워낙 빠른 속도로 달리다 보니 설사 태산을 봤다 해도 누군지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것이었다.
운전석에 오르고 나서야 한숨을 쉬며 태산은 안전벨트를 매고 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지이이이잉~
그때 뜻하지 않게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을 들여다보았으나 모르는 번호다. 태산은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강바른 검사님 맞으시죠?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법정에서 명함 드렸던 KH저널 민철승이라고 합니다.
듣고 보니 생각이 났다. 강도살인 누명을 쓴 최태선의 항소심 방청을 갔을 때 만난 기자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그때 최태선 씨 변호하셨던 한경욱 변호사에게 들었습니다.
‘주 변이 쓸데없는 짓을 했군.’
태산이 씁쓸하게 생각하고 있자니 민 기자도 기색을 눈치채고 변명처럼 덧붙였다.
-안 알려주신다는 걸 사정사정해서 알아내느라 진땀 뺐습니다. 원래는 동아시아의 대규모 마약 카르텔에 관한 르포 기사를 내려고 인터뷰를 요청드리려 했습니다만 이번에 기사 난 것을 보니 이 사건에 대해서도 강 검사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지 않을까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태산은 잠시 고민했다. 믿을 만한 기자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한경욱 변호사가 문제없다고 판단해 연락처를 알려줬다면 기레기 수준은 아닐 것이다.
최 검사에게 장부를 넘겨주긴 했지만 그 전에 떡밥을 좀 뿌려놓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 검찰청 후문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법원 입구 삼거리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그 앞 주차장에서 뵙겠습니다.”
태산은 전화를 끊고 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기다리자니 잠시 후 민 기자가 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차에서 내린 민 기자가 태산의 차로 다가오자 태산이 문을 열어주었다. 민 기자는 조수석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긴 얘기는 못 합니다. 뭐가 궁금한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기사에 난 대로 가혹 행위가 정말 있었느냐지요. 강 검사님은 최태선 씨 사건에서도 약자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런 분이 피의자를 독직폭행 해 사망으로까지 몰고 갔다니 납득이 안 되어서 말입니다. 억울함은 없으십니까?”
“그에 대해서는 내부 감찰 중이고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억울함이 있다고 해서 이 자리에서 밝힐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억울함이 있다 그 말씀이지요?”
민 기자는 대답을 억지로 유도했다. 태산은 답하지 않고 쓰게 웃었다. 상식 있는 기자라 해도 이런 면에서는 하이에나 같다.
태산은 망설이는 척하다가 슬쩍 떡밥을 던져놓는다.
“아쉬움은 있지요. 제 손으로 마약조직의 몸통을 잡고 싶었는데 이 일로 인해 수사에서 제외되었으니 말입니다.”
“수괴는 체포되지 않았습니까? 몸통이 따로 있습니까?”
민 기자가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 이상 말씀드릴 수는 없겠네요. 명색이 기자신데 제가 다 떠먹여 드릴 수는 없죠. 수괴로 붙잡힌 박중성에 대해서 조사를 한번 해보세요. 인천에서는 꽤 유명한 기업가 행세를 하던 놈이었으니 특정하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조사해 보면 검사장이 누굴 보호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태산은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눈짓으로 어서 차에서 내리라 재촉했다. 민 기자는 아쉬운 눈치였지만 마지못해 차에서 내렸다.
차를 출발시키며 룸미러로 돌아보니 민 기자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취재에 착수할 기세다.
* * *
[대규모 필로폰 밀조조직 수괴 박씨, WB 홀딩스 이사로 밝혀져]
[WB 홀딩스는 인천지역 기반의 폭력단 와룡회 산하 기업]
[WB 홀딩스 이웅배 회장은 과연 연관이 없나?]
[밀조조직 검거 핵심인 강 모 검사 독직폭력 의혹 제기는 수사의 맥을 끊기 위한 것?]
[검찰 고위 간부 이웅배 회장 비호 의혹 있어]
“어떤 놈이 기자한테 이따위 소리를 흘렸어?!”
우현중 검사장은 분노로 길길이 뛰며 손에 들고 있던 시사잡지를 집어 던졌다. 공중으로 날아갔다가 바닥에 떨어진 KH저널에는 대문짝만 한 크기의 표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인천 마약 카르텔의 실체]
우현중 검사장은 내선으로 강바른 검사를 호출해 받자마자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강바른! 이거 너야? 아니면 안소영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서 물어? KH저널 기자 놈한테 무슨 소릴 지껄인 거야? 너 이거 책임질 수 있어?”
-지금 저한테 이러실 여유가 있으신지 모르겠네요. 곧 올라갈 것 같은데.
“대체 뭔 소리야?!”
그와 함께 검사장실 문이 활짝 열리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손에는 검찰청 마크가 찍힌 파란색 박스를 들고 있다. 얼굴이 익은 젊은 검사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선다.
“우현중 검사장님,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 최진우 검사입니다.”
최 검사는 문서 한 장을 우 검사장에게 들이밀어 보였다.
“수뢰 혐의로 압수수색영장 발부받았습니다. 지금부터 사무실 압색하겠습니다.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자, 잠깐. 갑자기 이렇게…….”
“수색해!
우 검사장은 뭐라고 외치며 저항하려 했지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최 검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 검사장은 수사관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 검사장은 다급한 마음에 일단 검사장실을 나왔다. 8층 복도를 걷고 있는데 제1차장 검사실도 수사관들로 북새통이다. 복도를 바쁘게 지나가는 우 검사장을 보고 제1차장 검사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온다.
“검사장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도 모르겠네. 지금 알아볼 테니까 쓸데없는 말 흘리지 않도록 입조심하고 있어.”
“검사장님…….”
제1차장 검사는 울상이 되어 뭐라 더 말을 걸려 했지만 우 검사장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지나쳐 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바로 이웅배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회장, 나 우현중이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중앙지검에서 수뢰 혐의로 압색이 나왔단 말이오. 강바른이 협박한 게 사실이었단 말이오? 장부가 없다더니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전화기 너머에서 이 회장은 한참 말이 없었다. 우 검사장은 초조해 어쩔 줄을 몰랐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뭐, 뭐라고?”
-저한테만 받아 드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건으로 조사받는지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장부 운운하면서 경거망동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무조건 입 다물고 모르쇠 해도 모자랄 판에 압색 좀 들어왔다고 바로 저한테 쪼르르 전화를 하시니 없던 혐의도 발각되겠군요. 자중하시고 조사 잘 받으십시오. 행여나 제 이름을 입 밖에 내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이웅배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뜸 전화를 끊었다. 우 검사장은 황당해 넋을 놓았다가 핸드폰을 엘리베이터 벽에 집어 던지며 분통을 터뜨렸다.
“깡패 새끼 따위가 사람을 가르쳐?!”
우 검사장은 뒤늦게 이웅배와 얽힌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받아먹을 때는 달콤하기만 했건만.
* * *
“지난 27일 수뢰 혐의로 법무연수원 연구 위원으로 전보 조치 되었던 우현중 전 인천지검장이 구속기소 되었습니다. 우 전 검사장은 태산건설 고 임태산 대표를 스폰서로 두고 호화요트여행 등의 접대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는 태산건설의 모기업인 WB홀딩스 이웅배 회장의 소환을 앞두고 일정을 조정 중입니다.”
회장실에 앉아 분을 누르며 뉴스 화면을 보고 있던 이웅배 회장은 노크 소리에 뉴스를 끄고 고개를 들었다. 범진이 회장실 문으로 들어서더니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앉아.”
이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상석으로 가 앉았다. 범진도 자리를 잡고 앉는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이 회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 주위가 몹시 어수선해. 우 검사장이 날라 간 뒤로 복귀한 강바른이 물 만난 듯이 날뛰고 있단 말이야. 칼날이 턱끝까지 들어온 기분이야. 그것도 인천지검과 서울중앙지검 양쪽에서.”
강바른 검사는 복귀 후 무시무시한 속도로 필로폰 밀조밀매조직을 궤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와룡회 산하 기업 중 조금이라도 불법의 여지가 있는 사업장은 깡그리 파서 엎었다. 탈세, 이중장부, 경쟁업체 사업 방해, 부당한 리베이트, 접대비 등등 족집게처럼 불법행위만 쏙쏙 끄집어내 탈탈 털었다.
도대체 와룡회 내부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내부고발자가 없다면 불가능할 정도의 수사였다.
이웅배는 내심 잡혀간 박중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믿었던 박중성이 결국 검찰과 형량으로 쇼부를 보고 정보를 야금야금 넘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교도소로 이감되면 밑에 애들 시켜서 손을 좀 봐야겠다 생각하는 이웅배였다.
우 검사장과 제1차장이 전보 발령 난 후 임시로 인천지검장 권한대행이 된 제2차장은 강 검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었다. 원래 제2차장 직속이었던 강력부와 연계수사 할 수 있도록 와룡회 전담팀을 구성해 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중성 이사가 구속된 차에 사방에서 수사가 몰아치니 와룡회 조직은 반토막이 났다. 맥을 못 추고 숨을 죽인 채 수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강바른 검사의 칼날은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딱 두 놈만 처리해 줬으면 해.”
“두 놈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KH저널 민철승 기자가 한 놈이다. 첫 기사로 재미를 좀 보더니 이제는 기고만장해서 여기저기 방송 나와 내 이름을 들먹이고 다닌단 말이지. 내 이름이 쏙 들어가도록 해주면 돼.”
“예.”
범진은 조용히 답했다.
“그리고 또 한 놈은 강바른이다.”
그 이름에는 범진도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낸다.
“검사에게 손을 대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와룡회에서 한 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보복이 거셀 텐데요. 검찰 조직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지금도 와룡회는 강바른 그놈 때문에 해체 직전이야. 더 손해날 게 뭐가 있나?”
이 회장은 버럭 역정을 냈다가 이내 태도를 바꿔 살살 달래듯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강바른을 없애는 데는 김 대표가 직접 나서줬으면 해.”
범진이 이 회장을 물끄러미 돌아본다.
“강 검사 만만치 않은 인간이야. 몇 번이나 죽이려 했지만 그때마다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니 아무한테나 이런 중대사를 맡길 수 있나. 김 대표가 칼 솜씨 하나는 믿을 만하니 쥐도 새도 모르게 담가주면 돼.”
이 회장이 범진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이며 말했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해 주면 그만한 보상이 따를 거야. 더 이상 태산이도 내 곁에 없고 박중성 이사도 잡혀간 마당에 내가 앞으로 큰일을 누구에게 맡기겠나.”
사실상 서열 2위를 약속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은 뱀과 같은 혀로 달콤하게 구슬리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범진을 바라보았다.
망설이던 범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김 대표만 믿고 있겠네."
이 회장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 * *
“민 기자님은 목숨 내놓고 사십니까? 조폭 두목을 자꾸 소환하시는데 무섭지 않으세요?”
“더 큰 권력과도 싸워야 하는 게 기자인데 무섭다고 말을 못 하면 기자 생활 때려치워야죠.”
“오우~ 패기 멋지네요.”
인터넷 시사 방송 진행자의 농담 섞은 걱정에 민철승 기자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방송이 끝난 후 진행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민철승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 그래도 상대가 상대니까 조심해. 더 큰 권력자는 그래도 법은 무서워하잖아. 조폭 걔네가 수단 방법 가리는 놈들이야?”
“아이고, 참 재수 있는 소리도 해준다. 내가 다 알아서 몸조심할 테니까 걱정 마.”
민철승은 그렇게 퉁을 주고는 스튜디오를 나왔다. 스튜디오에서 나와 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며칠간 집에 들어가 보지를 못했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곳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현중 검사장이 구속되면서 우 검사장과 이웅배 회장의 커넥션을 미리 내다본 민철승의 주가가 더욱 오른 탓이다.
기자로서의 신뢰도가 높아지다 보니 공식 일정뿐만이 아니라 취잿거리를 주겠다며 은밀히 접촉해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기삿거리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제보자들을 만나보지 않을 수는 없어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오늘은 방송 후 다른 일정이 없으니 늦게나마 귀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민철승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지금 들어가려고. 우리 딸내미는 자?”
전화기 너머로 “아빠, 아빠!” 부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녀석 아직도 안 자?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야지. 뭐? 치킨? 그래, 알았다. 사 가마.”
아파트 입구 맞은편에 치킨집이 하나 있으니 미리 주문을 해놓고 들어가는 길에 찾으면 될 것이다.
“30분쯤 후에 찾으러 갈 텐데요. 치킨 한 마리만 포장해 주세요.”
민철승은 운전석에 앉아 주문을 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아파트 주차장은 차로 꽉 차 있을 것이다. 자리를 찾아 몇 바퀴를 도느니 공영 주차장에 대는 게 나을 것 같아 민철승은 아파트 건너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치킨집까지 걸어갔다.
치킨집에서 치킨을 찾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간다. 한동안 걷고 있는데 어느새 등 뒤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민철승은 우뚝 발을 멈췄다. 등 뒤의 발소리도 우뚝 멈춘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형, 그래도 상대가 상대니까 조심해.]
왜 하필 그 말이 생각난 것일까?
주위를 곁눈질해 보지만 골목 안은 인적이 없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지만 오늘따라 유독 사람이 없다.
민철승은 발걸음을 빨리해 걸었다. 따라오는 발소리도 빨라진다. 민철승은 허겁지겁 뛰기 시작한다. 상대는 더 빨리 뛴다.
상대가 순식간에 민철승을 따라잡자 민철승은 히익~ 하며 움찔했다. 그런데 상대는 민철승의 옆을 그냥 휙 지나쳐 가버린다. 민철승은 한숨을 몰아쉬며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그놈이 괜히 겁을 주는 바람에.’
민철승이 속도를 줄여 걸어가는데 앞서 뛰어가던 남자가 골목길 초입에 우뚝 멈춰 서더니 아예 길을 막고 선다. 그러고는 이쪽을 돌아보고는 씩 웃는 것이다.
거대한 덩치에 까까머리, 볼을 따라 주욱 이어진 상처가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쫄지 마. 난 대한민국 기자고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야. 저런 놈한테 쫄 것 없어.’
민철승은 태연한 척 걸으려고 애썼다. 민철승이 가까이 다가오자 사내가 물었다.
“민철승 기자님 아니다요?”
지저분한 허스키에 남도 사투리. 이웅배가 광주 출신 조폭이라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런데요. 무슨 용건이시죠?’
마음속으로는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실제 입으로 새어 나온 말은 달랐다.
“아, 아닌데요.”
민철승의 말에 사내는 대뜸 핸드폰 손전등을 켜 민철승의 얼굴에 비추었다. 눈이 부셔 민철승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에이~ 맞구만요. 아파트 앞 편의점에서 계속 기다렸는디 참말로 만나기 힘들구마요.”
자신을 노리고 잠복까지 했단 말인가. 이웅배가 보낸 히트맨임을 확신한 민철승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들고 있던 치킨 봉지를 사내의 얼굴에 냅다 집어 던졌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아났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아따, 아까운 치킨은 왜 버린다요.”
사내는 혀를 차며 타박하고는 말했다.
“민 기자님, 지랑 쪼까 야그 좀 허시죠.”
그 시각 늦은 퇴근을 한 태산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운전석에서 내리고 있었다.
타다닥.
누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태산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볼캡에 검은 마스크를 쓰고 검은 점퍼를 입은 단신의 사내였다. 태산은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가 가까이 다가온 사내의 눈을 보고 빙긋 웃었다.
“범진아.”
순간 범진이 멈칫했다. 태산이 되물었다.
“왜 그러냐?”
“죄송합니다, 형님.”
범진은 그 말을 던지고는 품에서 신문지에 싼 사시미 칼을 꺼냈다. 그러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태산의 배에 뛰어들듯이 칼을 꽂아 넣었다. 피가 솟구치며 태산은 스르륵 아래로 무너졌다.
* * *
“어제 밤 11시경 인천지검 마약수사반 강 모 검사가 거주 중인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습니다. 강 모 검사는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생사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은 현장 CCTV를 분석했으나 각도가 틀어져 있어 범인을 특정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범인이 범행을 계획하고 미리 CCTV를 조작해 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경찰은 오피스텔 입주민들 차량의 블랙박스를 수거해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이웅배 회장은 거실에 앉아 아침뉴스를 보며 헤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역시 김 대표야.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군.”
하지만 속 시원한 한편으로 아쉬움도 있었다.
“진즉에 김 대표에게 시킬 것을. 꼬리를 감춰보겠다고 엉뚱한 놈에게 일을 맡겼다가 이 사달이 났으니.”
이 회장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마침내 일을 수습한 듯하다. 와룡회의 발목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강 검사는 제거되었다. 자신이 사주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눈치 있는 검사들에게는 멈추라는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마침 전화벨이 울린다. 범진의 전화였다. 이 회장은 반색하며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뉴스 보셨습니까?
범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런데 아직 생사 불명이라던데.”
-많이 헤집어놨습니다. 피도 많이 흘렸고요. 절대 못 살아날 겁니다.
“수고했어. 김 대표라면 해낼 줄 알았지.”
이 회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공치사를 했다.
“이렇게 의미 있는 날에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오늘 저녁에 와룡회 간부들 모두 집합시켜서 김 대표의 공을 치하하는 자리를 가질 테니 준비하고 있게.”
-예. 알겠습니다.
마침 아침 식사를 하러 침실에서 나오던 이웅배의 아내가 물었다.
“오늘 늦으세요?”
“안 들어올 것 같은데.”
이웅배가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답했다.
“그럼 나도 쇼핑이나 해야겠네.”
아내가 중얼거리고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입주 가정부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아줌마, 오늘 저녁은 안 차려도 돼요!”
하지만 가정부는 돌아보지 않았다. 젊은 시절 공장에서 오래 일해 가는귀가 먹었다고 했다.
“아, 진짜 불편하네. 저 아줌마 자르면 안 돼요?”
“일 잘하잖아. 귀먹어서 비밀 유지 되니까 그것도 좋고. 내버려 둬.”
“말귀를 알아먹어야 말이죠.”
아내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방으로 갔다.
“아, 아줌마!!!”
이웅배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 * *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WB홀딩스의 이사들이 룸살롱 대형 룸에 모여 이웅배 회장을 위시하고 축배를 들고 있었다. 명목상은 이사라 하지만 모두 와룡회의 중간 간부들이었다.
“속이 시원하시겠습니다. 강바른 그놈이 우리 와룡회를 못 찍어 눌러서 안달을 하더니 결국 칼 맞고 뒤지는군요.”
“회장님만 시원하신가? 나도 속이 시원하구먼. 새파랗게 젊은 검사 놈이 감투 좀 썼다고 그동안 오라 가라 하면서 얼마나 사람을 조지던지. 회장님이 손을 안 쓰셨으면 저라도 썼을 겁니다.”
“와룡회를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신 거죠. 정말 잘하셨습니다.”
간부들이 앞다투어 칭송하는 동안 이웅배 회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웅배 회장의 옆에는 눈엣가시던 강 검사를 화끈하게 제거해 준 범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흥겨운 잔치 분위기였지만 범진은 홀로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이 회장은 그런 범진의 안색을 살피며 현직 검사를 직접 담갔으니 긴장한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다.
“이젠 와룡회의 앞날에 거칠 것이 없네. 무너졌던 조직을 하루속히 예전 수준으로 되살리는 일만 남았어. 그동안 박중성 이사가 맡아 해왔던 사업들을 자네들이 하나하나 맡아서 정상화시켜야 하네.”
“마약사업도 말입니까?”
간부 하나가 대놓고 노골적으로 물었다. 이 회장이 무표정하게 돌아보자 간부는 움찔해서는 덧붙였다.
“그동안 약장사는 안 한다고 말씀하셨던 터라 박중성 이사가 마약사업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몇몇 간부가 눈빛을 교환하며 빙글빙글 웃는다. 이 회장이 마약장사를 시작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협조했던 간부들이었다. 항만하역, 운송, 쓰레기처리 등 기존에는 이윤이 높지 않아 찬밥 취급을 받던 업종의 젊은 간부들이다. 이들은 사업 구조가 바뀌면 자신들이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시대가 변하는데 언제까지나 예전의 생각을 고집할 수는 없지. 보안을 위해 부득이 알릴 수 없었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진 말게.”
“그럼요. 약장사만큼 돈 되는 장사가 또 어딨습니까? 그걸 포기하긴 아깝죠.”
“누구한테 맡길 생각이십니까?”
젊은 간부들이 이 회장의 역성을 들며 은근히 물었다.
“생각 중이야. 검찰이 좀 잠잠해질 때까지 두고 봐도 좋겠지.”
이 회장이 그렇게 말하며 간부들을 둘러본다. 간부들의 눈에서 탐욕의 빛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안 보이는 얼굴들이 좀 있군.”
“예, 구속된 간부들도 있고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못 나온다는 간부들도 몇 있었습니다. 마약사업이 드러나고부터 영 태도가 삐딱합니다.”
“이전에도 임태산이랑 가깝게 지냈던 종자들이에요. 정리를 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켜보도록 하지.”
이웅배는 애매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조만간 확실히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과거 임태산과 동조했던 몇몇 간부들은 바뀐 조직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임태산이 없는 지금 가뜩이나 개개의 세력이 약한 데다 구심점도 없어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내버려 두고 있는 중이었다.
새로운 조직으로 도약하려는 지금 내부 결속을 강화하려면 슬슬 잔가지를 쳐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 자.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좋은 날이니 좋은 이야기만 하자고.”
이웅배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위스키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룡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신나게 잔을 부딪쳤다. 범진도 마지못해 일어서 잔을 갖다 댔다.
한참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을 때 간부 하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거참, 좀 꺼놓고 들어오지. 분위기 깨지게.”
다른 간부가 그렇게 핀잔을 주자 얼른 휴대전화를 끈다. 그런데 방금 퉁을 준 그 간부의 휴대전화도 기다렸다는 듯 지이잉 하고 울렸다. 머쓱해진 간부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끊자마자 또 바로 전화가 걸려온다. 아예 전화를 꺼두려 하지만 어쩐지 전원 버튼이 말을 듣지 않아 난감해진 간부는 이웅배의 눈치를 본다. 이웅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받아.”
간부는 고개를 모로 돌린 채 얼른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이랑 같이 있어. 나중에 전화할 테니까 끊어.”
그때 전화기 속에서 바깥까지 다 들리도록 통화 내용이 크게 울려 나왔다.
-형님, 태산건설 애들이 갑자기 미쳐서 날뛰고 있습니다. 지금 쳐들어와서 막고는 있는데 빨리 오셔야… 으악!!!
비명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그와 함께 다른 간부들의 휴대전화도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간부들이 어리둥절해 하나둘 전화를 받는다.
“뭐? 태산건설? 걔들이 왜?”
“우리 업장도? 태산? 확실해?”
“형님, 태산건설 애들이…….”
전화를 받은 간부들이 일제히 이웅배를 돌아보았다. 이웅배는 경악하여 범진을 돌아보았다.
“김 대표… 설마…….”
내내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범진이 씩 웃더니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그 설마입니다.”
그와 함께 룸 바깥에서 무언가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 외마디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범진은 입구로 걸어 나가 문을 연다. 문을 열자마자 문 밖을 지키고 있던 덩치가 우당탕거리며 룸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문 밖에는 검은 옷에 검은 볼 캡, 마스크를 쓴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쓰러진 덩치를 밟고 룸 안으로 들어섰다.
“범진아, 문 잠가라.”
사내의 지시에 범진이 쓰러진 덩치를 발로 굴려 밀어내고 문을 잠갔다.
“넌 뭐야?”
입구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간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날렸다. 사내가 슬쩍 몸을 물리나 싶더니 간부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사내를 빗겨 간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간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날아온 주먹에 제대로 배를 맞은 간부의 몸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구쳤다. 잠시 후 간부는 테이블 위에 패대기쳐진 개구리 꼴이 되었다.
단단한 대리석 테이블은 부서지진 않았지만 간부에게 더 큰 타격을 입혔다. 간부는 명치를 제대로 부딪친 듯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끙끙댄다.
이번에는 범진이 품에서 칼을 뽑더니 정신 못 차리고 끙끙대는 간부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단번에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테이블 위에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으아아아악!!!!”
갑작스러운 상황에 간부들은 깜짝 놀라 얼어붙어 있었다. 검은 옷의 사내가 그런 간부들을 둘러보며 픽 웃더니 일갈했다.
“자, 다 덤벼! 오랜만에 한번 붙어보자고. 실력들 안 녹슬었는지 확인해 봐야지. 하기야 니들도 이제 배때지에 지방이 잔뜩 껴가지고 제대로 싸우기나 하겄냐.”
이웅배는 황망한 와중에도 사내의 말투에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어투는 분명히 귀에 익은데…….
이웅배는 이내 어디에서 들었던 말투인지 생각해 내고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임태산의 어투였다.
그사이 간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공간이 협소해 한 번에 덤벼들 수가 없었다. 사내는 줄지어 덤벼드는 간부들을 차례차례 해치웠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두 번째 놈을 등 뒤로 집어 던지고 세 번째 놈의 아구창을 날렸다. 술병을 들고 달려드는 네 번째 놈은 손목을 잡아 꺾어버린 뒤 유리컵으로 뚝배기를 박살 냈다.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와 발길질을 날리려는 다섯 번째 놈은 발목을 잡아당겨 넘어뜨리고 대리석 테이블과 이마를 거하게 조우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범진도 이에 질세라 꺼내 든 칼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하지만 범진의 목표는 적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쓰러진 적에게 최대한 손상을 입히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아킬레스건이 끊기고 팔 인대가 잘리고 손가락이 숱하게 날아갔다.
두 사람의 거침없는 폭력으로 룸 안은 피보라가 일고 비명과 부서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웅배는 아수라장이 된 룸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옷의 사내는 순식간에 간부들을 때려눕히고 상석에 앉은 이웅배에게 다가왔다. 이웅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드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보는 사내의 눈이 휘어진다. 웃는 것인가?
그 순간 사내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육박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뜨고 당했겠지만 그래도 이웅배는 한때 주먹으로 날렸던 사내고 지금도 신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이웅배는 몸을 뒤로 무르며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이웅배의 팔 끝에 사내의 마스크가 걸려 떨어진다.
“너, 너는?!!!”
드러난 얼굴을 보고 이웅배는 경악했다. 바로 강바른 검사였던 것이다. 분명히 칼을 맞고 병원에 누워 있다 했는데 어떻게 여기에?
“형님, 아직 녹슬지 않으셨습니다?”
강 검사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그 순간 태산의 얼굴이 강 검사의 얼굴에 겹쳐진다. 이웅배는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떴다.
다음 순간 강 검사의 주먹이 이웅배의 얼굴을 강타했다. 이웅배는 뒤로 나가떨어져 호되게 벽에 부딪친 뒤 기절해 버렸다.
태산이 기절한 이웅배를 어깨에 가볍게 둘러멘다. 마침 마지막 놈의 아킬레스건을 끊은 범진도 허리를 일으켰다.
“가자!”
태산은 그렇게 말하며 앞서 문을 나섰다. 범진이 얼른 칼을 털어 피를 털어내고 품에 다시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 올려두었다.
태산의 뒤를 따라 문을 나오던 범진은 복도 군데군데에 쓰러져 신음하는 조직원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이웅배가 방심했다곤 해도 이웅배를 수행하는 놈들과 각 간부들이 데리고 온 놈들을 합치면 상당한 수였다.
태산은 이 숫자를 혼자 조용히 해치우고 들어온 것이다.
태산은 별다른 대꾸 없이 널브러진 조직원들 사이를 지나 룸살롱 문을 나갔다. 카운터 안에서 마담이 고개를 숙인 채 쳐다보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범진이 카운터 톡톡 두드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힐끗 쳐다봤다가 피 칠갑을 한 모습에 깜짝 놀라 흠칫했다.
“경찰 불러요.”
“네? 네!”
마담이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손이 떨려 좀처럼 번호가 잘 눌러지지 않는다. 범진이 그 모습을 무심히 보다가 112를 누르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태산은 지하 주차장에서 자동차 트렁크에 이웅배를 구겨 넣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올라탄 뒤 운전석에 앉은 범진에게 물었다.
“민철승 기자는?”
“병천이가 가족들과 함께 잘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제 철수하라고 해라. 더 이상 보호할 필요 없으니.”
“예, 형님.”
범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형님, 살려주씨오!
“왜 그래? 무슨 일이냐?”
범진은 바짝 긴장해 소리쳤다. 태산도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꺄하하하핫!!!!
아이의 개구진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니, 애기가 자꾸 제 콧구멍에 뭘 집어넣고 입을 틀어막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아주 죽겠다니께요. 귀엽게 생겨 가지고 이걸 혼내불 수도 없고. 언제 끝난다요. 좀 살려주씨오.
범진은 맥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태산은 숫제 쿡쿡 웃는다.
“이제 됐다. 철수해도 좋다.”
병천은 반색하며 답했다.
-예, 형님. 그럼 싸게 들어가겄습니다.
범진이 병천과 통화를 마치자 태산은 표정을 굳히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이제 우리도 출발하자.”
이웅배와 빚을 청산해야 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범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태산의 심정이 짐작되어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