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39화 (39/78)

제7장 내분

“말씀하신 대로 수감 생활 동안 회장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조건으로 백준용을 설득했습니다. 염산에페드린 밀수 건은 백준용이 전적으로 떠맡을 겁니다.”

WB홀딩스 회장실에서 이웅배 회장은 법무법인 대양의 전윤철 변호사를 독대해 수사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말이 보호지 이 회장의 이름이 나오는 날에는 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군요. 그놈 배짱이 제법이라 좀 더 시간 끌면서 협상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간의 정이 있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회장님께서 물심양면으로 잘 보살펴 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로 필요하니 챙긴 것이지요. 이 바닥에 의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 회장의 말에 전 변호사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고 보니 백준용 씨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긴 했습니다. 회장님이 정말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느냐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더라고요. 회장님이 아니라 다른 뭔가 더 두려운 것이 있는 것처럼요.”

“나보다 더 두려운 것?”

이 회장은 전 변호사의 말을 반복하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때, 전 변호사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참, 회장님께 이 말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강바른 검사가 알고 있다’라고…….”

이 회장이 눈을 부릅뜨고 전 변호사를 돌아보았다. 전 변호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대체 뭘 알고 있다는 건지는 얘기를 안 해주던데요. 말씀드리면 알 거라면서.”

전 변호사의 말처럼 이 회장은 단번에 눈치챘다. 자신이 백준용을 사주해 강바른 검사를 죽이려 한 것을 본인이 알아냈단 말인가.

이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구준태 시장에게 강 검사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이 회장은 실행자로 조직 내의 인간이 아니라 외부자인 백준용을 선택했다. 만에 하나 백준용의 범행이 발각된다 해도 꼬리를 끊는 것이 더 수월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준용은 강 검사를 제대로 죽이지 못했다. 그나마 구 시장에게 체면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강 검사가 사고 후 기적적으로 회복했지만 기억을 잃어 더 이상 구 시장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꼬리가 밟힐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와룡회 부하를 시켜 강 검사를 확실히 죽이는 쪽을 택할 걸 그랬다.

이 회장이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자 전 변호사가 이 회장의 심기를 살피며 슬쩍 떠보았다.

“확실히 강 검사가 뭔가 알고 있긴 한 모양이지요? 이번에는 인사만 드렸으니 다음에는 밀조조직을 제대로 치겠다고 큰소리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 회장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되물었다.

“강 검사가 그렇게 전하랍디까?”

“예, 그러긴 했는데 딱히 전해 드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뭐 사건 수임하다 보면 이쪽 당사자고 저쪽 당사자고 감정에 치우쳐서 별 쓸데없는 미친 소리들을 되는 대로 뱉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그걸 당사자에게 다 옮기지는 않죠. 굳이 불필요하다 싶은 말은 전하지 않는데 어쩌다 보니 얘기가 나왔네요.”

전 변호사는 의뭉스럽게 눙쳤다.

“괜한 걱정일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나 또 필요한 일이 생기신다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빙긋 웃어 보인 전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는 회장실을 나갔다.

이 회장은 전 변호사가 나간 문을 한동안 노려보았다. 변호사라는 놈들의 위선 어린 낯짝은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았다. 구린 실상을 뻔히 알고 뒷씻개를 자처하면서도 뜬구름 잡는 언어들로 맥락을 흐려 인텔리다운 고상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밀조가 발각되면 뒤를 봐줄 테니 돈이나 준비해 두라는 말을 영업하듯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 변호사가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터폰이 울렸다.

- 박중성 이사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여보내.”

이 회장은 불편한 심기로 비서에게 지시했다.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회장실 문으로 박중성 이사가 들어섰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박 이사의 뒤로 화려한 패턴의 셔츠 위에 재킷을 걸쳐 입은 배덕한 분위기의 사내가 뒤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최성일이었다.

이 회장은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회사엔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검찰이 필로폰 재료 밀수를 적발해 누가 연루되었는지를 수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필로폰 유통책이 회사에 드나들어서야 내가 주인이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다.

그러나 최성일은 아랑곳 않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제가 안 찾아오게 생겼습니까? 푸는 물량을 줄인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회장이 박 이사를 노려보았다. 박 이사가 고개를 푹 숙인다.

“죄송합니다. 알아듣게 설명을 한다고 했습니다만 회장님께 직접 해명을 듣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아니, 다짜고짜 물량을 줄이겠다고 하면 어떻게 납득을 하겠습니까? 회장님은 저한테만 통보하시면 그만이겠지만 저는 밑에 있는 딜러들, 거래처들한테 다 아쉬운 소리를 해야 됩니다. 회장님이 쏟아질 불만들 다 직접 들으실 거 아니잖아요.”

최성일이 박 이사의 변명을 냅다 끊으며 투덜거렸다.

이 회장은 화를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자신의 선택으로 백준용에게 원재료 수입을 맡겼고 그것이 적발되어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의 불찰을 인정해야 했다.

“원재료 들여오는 과정에서 차질이 생겼네. 새로 입수할 때까지는 부득이 물량을 줄일 수밖에 없어. 최대한 빨리 원료를 확보할 테니 그때까지는 버텨보게.”

이 회장의 설명에 최성일이 비실 웃었다.

“헤에~ 역시 그거죠? 인천항에서 적발된 염산에페드린 5백 킬로. 그게 회장님 물건이었습니까?”

최성일은 이 회장의 아픈 부분을 찔러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시덕거린다.

“어휴~ 일을 좀 제대로 하시지. 밀수꾼 놈들 믿고 있다가 이게 웬 망신입니까? 그래도 어떻게 회장님까지 추적해 올라오지는 않게 손을 잘 쓰셨네요. 역시 수완이 좋으시다니까.”

“이 새끼가 주둥이 닥치지 못해?! 감히 누구 앞이라고!!!”

이 회장의 안색이 변하는 것보다 먼저 박중성의 고성이 터졌다. 박중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최성일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최성일은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대로 박중성을 노려보았다.

“이거 왜 이러시나? 지금 누구 잘못으로 손해가 막심한데? 씨발, 이거 적반하장 아니야?”

이 회장은 잠시 두 사람이 팽팽히 대치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지시했다.

“박 이사, 그만하지. 동네 깡패 새끼들도 아니고 아무리 일이 우리 마음 같지 않아도 점잖은 사업가들끼리 멱살잡이는 하지 말자고.”

“하지만, 회장님!”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박 이사가 반발하는 순간 꾹꾹 누르고 있던 이 회장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회장은 손에 잡히는 대로 크리스털 재떨이를 집어 들고 힘껏 던졌다. 재떨이가 날아와 박 이사와 최성일의 등 뒤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피부에 생채기를 냈다. 두 사람 모두 움찔 몸을 움츠렸다.

최성일이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이 회장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 회장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이 회장이 최성일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이봐, 사이 세이치. 니가 고베야마구치구미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 넣고 다니지만 내부 항쟁으로 사람 몇 죽어나가니 겁이 나서 한국으로 도망 온 거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 있나?”

최성일이 이를 악물며 시선을 피했다.

“너한테 살길 마련해 준 게 우리 와룡회다. 그러니 사업가 대접 해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고 물건이나 잘 팔아 와. 주제 파악 못 하고 내가 하는 일에 자꾸 토 달면 갈아 치우는 수가 있어. 일본에 넘겨주면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겠지.”

최성일의 눈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비친다.

최성일이 몸담고 있던 고베야마구치구미는 2015년 이후 야마구치구미와 항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지도부와 대립한 일부 야마구치구미 조직원이 고베야마구치구미로 독립해 독자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거듭된 조직 간의 싸움에 조직원들이 다수 사망하자 겁먹은 구성원들이 탈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최성일 역시 그렇게 한국으로 탈주한 조직원이었다. 야마구치구미, 고베야마구치구미 어느 쪽에 건네줘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야마구치구미에는 적대조직의 전 조직원이고 고베야마구치구미에는 조직을 배신하고 탈주한 도망자였다.

이 회장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최성일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자~ 잘 한번 해보자고, 최 사장.”

따지러 온 본전도 건지지 못하고 회장실을 나가려는 최성일에게 이 회장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돌아보며 덧붙였다.

“아, 박 이사에게 들으니 요즘 최 사장 밑에 딜러들도 꽤 잡혀 들어갔다던데. 혹시 그중에 야당이 있는 거 아닌가? 나한테 일을 제대로 하라 하기 전에 최 사장 밑에는 쥐새끼가 없는지 잘 살펴야 할 것 같은데.”

“예, 조심하겠습니다.”

최성일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부랴부랴 회장실을 나섰다.

* * *

“개새끼들, 지들이 쥐좆만 한 원가로 사 들여온 원료를 공장에 가만히 앉아 뻥튀기하고 있을 때 좆 빠지게 뛰어다니면서 팔아 오는 건 난데. 뭐? 물건이 없으니 물량 나올 때까지 버티라고?”

BND에서 만난 최성일은 몹시 심기가 불편한 기색으로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어쩐지 눈썹 위에는 자잘한 생채기까지 나 있다. 아마도 필로폰 밀조자들과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다.

염산에페드린 대규모 적발 뉴스는 서은섭도 들었다. 아마 그 사건이 준 영향일 것이다.

태산은 은섭에게 본격적으로 마약밀매조직에 깊이 침투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최성일이 이렇게 예민한 상태여서야 작업을 걸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BND 사장이 최성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요즘 분위기가 좀 흉흉하지 않습니까? 김성종 사장 호스트바에도 불시 단속이 떠서 몇 명이 마약 소지로 잡혀 들어갔답니다. 김 사장도 조사받고 있다고 하고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당분간 몸을 좀 사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최성일은 이웅배 회장이 했던 말을 새삼 떠올렸다.

[나한테 일을 제대로 하라 하기 전에 최 사장 밑에는 쥐새끼가 없는지 잘 살펴야 할 것 같은데.]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쥐새끼가 있는 것 같군.”

듣고 있던 서은섭은 제 발 저려 심장이 뚝 떨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야당이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서은섭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최성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야당은 이 바닥 어디에나 있어. 일단 걸리면 형량을 줄여보려고 사 간 놈들 다 부는 건 딜러들에겐 상식이니까.”

“단골 고객이나 상선을 안 부는 것도 상식이죠. 그걸 불어버리면 먹고살 길이 없어지는 거니까. 최 사장님 이름 부는 간 큰 놈은 없을 것 같은데요.”

BND 사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정보를 캐내려고 접근하는 놈도 있을 수 있지. 예를 들어 경찰의 기획수사에 가담했다거나.”

최성일은 마치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했다. 서은섭은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 * *

꿰뚫어 보는 듯한 최성일의 시선에 서은섭은 화제를 돌리려 짐짓 분통을 터뜨렸다.

“형님, 진짜 그놈들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유통 쪽 사정은 전혀 고려도 안 해주고 말입니다. 당장 저한테도 빨리 약 좀 달라고 야단인 고객들이 한 트럭인데 말입니다.”

“오오~ 서 사장 요즘 끗발 좋은 모양이야?”

BND 사장이 웃으며 은섭을 추켜올렸다. 은섭이 다니던 상사를 그만두고 약물 유통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호칭은 서 사장으로 바뀌었다.

“그냥 뭐… 제가 지금까지 영업 일 하면서 쌓은 자산이 그것뿐인데요. 연락처랑 사람 구슬리는 기술.”

“그렇다 해도 빠르긴 하지. 희한할 정도로 수완이 좋단 말이야.”

최성일이 은섭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 같으면 그저 칭찬으로 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가슴이 뜨끔했다.

“잘 팔아 왔으면 뭐 합니까? 지금까지 확보한 고객들 다 놓치게 생겼는데. 물건이 없으니.”

은섭은 부러 더 분개하는 척하며 말했다.

“형님! 형님은 이런 대접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이렇게 주는 거 받아만 먹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당히 지분을 요청하죠. 어차피 원료 그거 얼마 안 하잖습니까? 우리도 돈 내고 원료 같이 사 와서 제조 단계에서부터 같이 관리하고 유통은 우리가 맡아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없이 재료 날려서 수급에 지장을 주는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은섭의 부추김에 최성일은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신중하게 답했다.

“니 말도 일리는 있다만 다음 원료 들어올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잖냐. 단속도 엄해져서 당분간은 들여오기가 힘들 텐데.”

“그렇게까지 대량으로 들여오는 건 힘들어도 조금씩 나눠서 들여오는 건 영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은섭의 말에 최성일이 솔깃하여 돌아본다.

“어떻게?”

“제가 전에 다니던 상사가 밀수품도 취급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사장님이 밀수품 들여오는 방법이 해상 던지기거든요. 중국 배랑 공해상에서 만나서 물건 주고받는 거요. 사장님한테 운임만 넉넉히 지불하면 그 방법으로 들여올 수 있을 겁니다. 위쪽에 해경이랑 끈이 있으면 던지기 할 시간과 장소도 훨씬 안전하게 정할 수 있을 거고요. 나중에 원료 수입이 정상화되는 때까지만 임시로 이 방법을 쓰면 됩니다.”

은섭의 설명에 최성일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원료는 제가 책임지고 들여올 테니까 위에다가 동업으로 바꾸자고 제안해 보세요. 그쪽도 원료 들여올 때까지 손 놓고 있을 수 없을 테니 아마 솔깃해할 겁니다.”

최성일은 망설였다. 바로 며칠 전 필로폰 수급에 차질이 빚어진 것을 항의하러 갔다가 본전도 못 찾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동업을 하자고 제안했다가 이웅배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면 더 큰돈을 손에 쥐기는커녕 목숨마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섭의 말처럼 이웅배 회장 쪽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장 얼마간이라도 원료를 들여올 방법이 있다면 분명 구미가 당겨 할 것이다.

“좋다. 내가 한번 협상을 해보마.”

은섭의 앞에서는 큰소리를 쳤으나 박중성 이사를 찾아간 최성일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진땀을 빼고 있었다.

박중성 이사가 최근 상주하는 곳은 와룡회 소유의 폐기물 수거업체 사무소였다. ‘아성환경’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이곳은 화성시 외곽의 야산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사무소 옆으로는 거대한 재활용 쓰레기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성환경은 폐기물을 수거해 그냥 산에 묻어버리거나 처리하지 않고 쌓아두기만 하는 등 불법을 저지르는 불량 폐기물 수거업체였다.

하지만 현재는 재활용 쓰레기장 안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쓰레기장 한쪽의 창고 안에서 염산에페드린을 필로폰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로폰을 제조하는 현장에서는 독한 염산 냄새가 난다. 때문에 대도시와 거리가 있으며 인적이 드문 재활용 쓰레기장은 작업하기에 그보다 적절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다소 악취가 나거나 커다란 화물트럭이 드나들어도 자연스러운 공간이다.

“뭐야? 또 불만이 있어서 온 건가? 회장님이 알아듣게 말씀 잘하셨잖아?”

박중성은 소파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비릿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최성일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또 뭔가 불만이 있어 온 것이려니 짐작한 것이다.

“아니오. 이번에는 그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최성일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박 이사를 마주 보며 운을 뗐다.

“저한테 원료를 빨리 들여올 방법이 있는데 혹시 관심이 있으실까 하고요.”

박 이사가 슬그머니 자세를 바꾼다. 상체가 이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냉정한 척하고 있지만 역시 구미가 당기는 것이다.

“어떻게?”

“제 밑에 있는 딜러 중에 상사 다니던 놈이 있는데 그 회사에서 소규모로 밀수도 했던 모양입니다. 거기 밀수 루트를 이용하면 적긴 해도 일단 급히 필요한 물량은 메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느 정도까지 들여올 수 있나?”

“한 번에 50킬로까지는 어떻게 가능할 것 같답니다.”

박 이사의 눈빛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회장님께 한번 여쭤보지.”

침착하게 말하고 있지만 활로를 찾은 기쁨에 눈썹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최성일은 슬쩍 단서를 달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희 쪽에서 원료까지 조달하는데 지금까지와 같은 조건으로 계속 거래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저도 동등하게 지분을 가지고 동업을 하고 싶습니다.”

박 이사는 요것 봐라 하는 눈으로 최성일을 가만히 보더니 픽 웃으며 물었다.

“그게 니 머리에서 나온 생각 같지는 않고… 니 밑에 있다는 그 상사 다니던 놈, 그 놈 생각이냐?”

“뭐…….”

최성일은 분명한 대답을 않고 얼버무렸지만 박 이사는 그렇게 알아들었다.

“똘똘한 놈인가 보군.”

박 이사는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딴소리를 한다.

“너 우리 물건이 상질 중에서도 상질이라고 이름난 이유를 알고 있냐?”

최성일이 박 이사의 눈치를 살피고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심양에 기술자 보내서 기술 배워 오게 할 때 그냥 눈대중으로 배워 올 놈이 아니라 확실한 놈을 보냈지. 우리 학교 화학과 후배를 스카우트해서 일을 시켰다. 머리가 좋은 놈들은 뭘 해도 잘하거든.”

박 이사는 은근히 명문대 출신임을 과시하며 말했다.

“그 정도 정교한 기술로 정제한 약물이야. 원재료가 얼마 안 한다고 해서 우리가 터무니없이 남겨먹는 게 아니라고. 그만한 기술이 들어간 값이지. 그 기술을 우리가 쥐고 있는데 원재료 공급한다고 갑자기 지분을 가지고 싶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일단 원료가 있어야 만들 것 아닙니까? 우리도 오죽 답답하니 이러겠어요? 여기저기서 물건 달라고 아우성인데 당분간은 거래를 다 끊어야 할 판 아닙니까?”

최성일은 물러나지 않고 밀어붙였다.

“회장님께 한번 여쭤나 봐주십시오.”

박중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 회장님. 접니다. 최 사장이 원료를 조달할 수 있는 루트가 있다는데요. 예, 일차로 50킬로까지는 가능하답니다. 근데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동업을 하고 싶다고… 예…….”

박 이사가 이웅배 회장에게 최 사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간략히 보고했다. 그리고 한참을 이 회장의 지시를 들으며 대답만 하고 있었다.

최성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거절이라면 얘기가 이렇게 길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마침내 박 이사가 전화를 끊고 최성일을 바라보았다.

“회장님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신다. 다만 동업을 하고 지분을 받으려면 너도 투자금을 좀 묻어야 되지 않겠냐?”

“얼마나 말입니까?”

“10억 묻고 10% 가져가는 거로. 매출 올리는 것 봐서 후에 재조정하기로 하고.”

“원료도 저희가 대는데 10억이나 묻으라고요?”

“싫으면 말든가.”

최성일은 고민한다. 10억이라면 현금이 넘쳐나는 최성일로서도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총 매출액의 3%를 유통 수수료로 떼서 받은 것을 생각하면 단번에 10%라니 쏠쏠한 조건이었다. 투자금의 일부는 서은섭에게도 나눠 부담하게 하면 된다. 지분의 3% 정도를 서은섭에게 떼준다 하더라도 7%로 수익이 늘어나면 10억을 벌충하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투자금 준비하겠습니다.”

* * *

“최성일이 요구해 온 조건은 투자금 5억에 1차로 염산에페드린 50킬로입니다.”

태산의 보고를 듣고 배진만 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원재료야 우리가 압수한 증거물 중 일부를 잠시 빼내서 쓴다고 해도 투자금 5억이 문제로군.”

배진만 부장이 침통하게 듣고 있더니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한번 해보겠네.”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태산은 어리둥절해 그렇게 물었다. 단순한 보고 차원이지 수사 비용을 배 부장에게 준비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어차피 서은섭에게는 한도 제한 없이 공작금을 써서 미끼를 던지라고 요구한 바 있다. 밀조조직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 정도 돈이야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내가 보증서서 검찰청 예비비 돌려쓰고 밀조조직 적발한 후에 국고에 반납하면 되네.”

배 부장은 쉽게 말했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예비비를 5억이나 빼달라고 상부를 설득해야 하거니와 가능하다 하더라도 수사가 실패하는 경우 사라진 5억은 보증을 선 검사가 개인 돈으로 갚아야 한다.

태산은 배 부장의 낡은 정장을 물끄러미 본다. 출세를 잘한 검사도 아니고 로비를 잘 받는 검사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제 돈 빼서 수사 비용으로 쓰느라 일찌감치 전세금도 빼고 마이너스통장 잔고도 아슬아슬하다는 소문이다.

배 부장은 태산의 시선을 의식하고 머쓱하게 답했다.

“걱정 말게. 자네 밀조조직 반드시 검거할 각오 아닌가? 그러면 문제 될 거 없네.”

“아니오. 문제가 있습니다.”

배 부장이 어리둥절해 태산을 바라보았다.

“검사장님을 믿으십니까?”

태산이 불쑥 물은 말에 배 부장은 미간을 모았다.

태산은 검사장이 이웅배 회장에게 관리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관리를 도맡아 했던 사람이 바로 태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예비비 승인받으려고 상부를 설득하는 순간 정보가 샐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백준용이 잡혀 오자마자 와룡회에서 귀신같이 알아채고 로펌 변호사를 보내 입막음을 했습니다. 그게 과연 우연이겠습니까?”

그 말에는 배 부장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밀수선 단속할 때처럼 극비리에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투자금은 어떻게 할 셈인가?”

“제가 알아서 마련하겠습니다.”

그동안은 태산이 수사비를 부담한다 해도 아무 말 없었던 배 부장이 이번만은 만류한다.

“지금까지도 자네가 계속 수사비를 부담해 오지 않았나? 한두 푼도 아니고 아무리 경제 사정이 넉넉하다 해도 그렇게까지 큰돈을…….”

배 부장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태산이 불쑥 말했다.

“한성그룹 조재용 회장 말입니다.”

말을 하다 끊긴 배 부장이 불퉁한 기색으로 말했다.

“갑자기 조 회장은 왜?”

“제 생물학적 부친입니다.”

갑자기 뱉어놓은 출생의 비밀에 배 부장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잠시 후 태산이 무슨 뜻으로 한 얘긴지 눈치채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어, 흠흠… 그렇군. 뭐… 그럼 그렇게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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