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잠입
법정으로 들어서려던 한경욱 변호사는 저만치에서 걸어오고 있는 강바른 검사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얼른 피하려 했지만 강 검사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주, 아니, 한 변호사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한 변호사는 어쩔 수 없이 멈춰 서서 강 검사의 인사를 받았다.
“예, 덕분에요.”
말속에 뼈를 넣어 한껏 날카롭게 대꾸했다.
한 변호사에게 강 검사는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이자 항상 감시당하는 불안과 언제 손가락이 잘릴지 모른다는 공포를 선사해 준 장본인이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여러 감정이 다투어 솟구쳤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확연히 달라졌는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가 그 고생을 시킨 강 검사에게 울컥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결국 그 이상은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는 한 변호사였다.
“훨씬 말쑥해지셨네요. 건강도 좋아 보이고. 이제 주 변이라고는 못 부르겠는데요.”
강 검사는 놀리듯이 말했다. 강 검사가 자신을 주 변이라고 부를 때마다 죽은 임태산이 겹쳐 보여 흠칫 놀라곤 하는 한 변호사다.
욱하는 기분에 한 변호사는 쏘아붙였다.
“검사님, 되게 한가하신가 봅니다? 공판검사도 아닌데 법정에까지 직접 나오시고. 아니면 시키는 대로 변호를 잘했는지 검사라도 하러 오신 건가요?”
오늘은 윤선자의 마약 운반 사건 선고공판이 있는 날이었다. 윤선자는 강바른 검사의 소개로 연락했다며 한 변호사에게 변호를 의뢰했었다.
강 검사는 태연하게 답했다.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결과가 궁금해서요. 검사 입장에서는 피고인에게 준엄한 심판이 내려지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선을 잡아서 판매망을 괴멸시키는 데 협조를 해줬으니 선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공판을 맡은 전윤지 검사는 단순 투약도 아니고 마약을 운반한 것은 죄책이 무겁다며 구형량을 줄여주지 않았다.
마약사범 중 이른바 ‘야당’ 딜러들은 검거되면 자신의 고객들 연락처를 검사에게 넘기고 수사 협조서를 받아 법원에 제출해 형량을 줄이곤 했다. 이들은 단순 투약자인 고객들보다 기껏 3~4개월을 더 언도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윤선자는 마약을 운반했으므로 단순 투약자보다는 유통업자에 가깝다는 것이 전 검사의 생각이었다. 전 검사는 수사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마약을 유통하는 이들이 쉽게 선처를 받는 관행에 일조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평소에는 항상 나른하고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보이는 전 검사다. 하지만 범죄자들에게만은 엄격하고 냉정했다. 평소 멍해 보이는 것도 과중한 업무를 최선을 다해 소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전 검사이니만큼 선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사는 태산이 했다 해도 공판은 어디까지나 전 검사의 책임 영역이므로 태산도 굳이 전 검사의 고집을 말리지는 않았다.
공판 중 한 변호사는 윤선자가 운반한 내용물이 뭔지 몰랐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고의를 부인하도록 전략을 세웠다. 이에 맞서 전 검사는 윤선자가 불법을 인식했으며 운반물이 마약이라는 사실을 미필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한 변호사는 윤선자가 협박을 받아 부득이 천용식에게 협조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판부에 수사 협조서를 제출하고 상선인 천용식 체포에 공헌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만약의 경우 유죄판결이 내려지더라도 형량을 줄일 수 있도록 어필해 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 재판의 향방을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태산은 양측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하는 마음으로 선고공판을 보러 온 것이었다.
“뭐 결과가 어쨌든 열심히 변호해 주셨으니 수임료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검사가 사건을 소개해 주고 소개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임료를 내겠다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태산의 말에 힌 변호사는 고개를 저으며 냉랭하게 답했다.
“검사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수임료는 의뢰인에게 적정한 수준으로 받을 만큼만 받을 겁니다. 일시불로 받든 할부로 받든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검사한테 소개받아서 수임한 사건이라 영 마음이 찜찜했어요. 뒷얘기 나오지 않도록 더는 관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럼 재판 잘 보고 들어가세요.”
잘라내듯 인사하고 법정으로 들어가는 한 변호사의 뒷모습을 보며 태산은 쓰게 웃었다. 술을 끊게 하려고 극약 처방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생을 바꿔준 은인인데 저렇게까지 냉랭하게 굴 일인가.
태산은 한 변호사를 뒤따라 법정으로 들어섰다. 방청석 앞쪽에 윤선자의 딸이 나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공교롭게도 한 변호사와는 마주쳤지만 딱히 관련자들의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았다. 태산은 방청석 맨 뒷자리에 앉아 법정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전윤지 검사가 들어와 검사석에 앉더니 방청석 뒤에서 태산을 발견하고는 알아볼 듯 말 듯 슬쩍 목례를 했다. 태산도 고개를 까딱했다.
곧 판사가 입정해 법대에 앉았다.
“피고인 윤선자, 앞으로 나오세요.”
한 변호사의 곁에 앉아 있던 윤선자가 법대 앞으로 나와서 섰다.
“피고인의 사정은 딱하지만 운반 대가로 받기로 한 금액과 입국 시 소외 고정숙에게 짐을 떠넘긴 것으로 미루어 판단했을 때 불법한 물건, 나아가 마약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판사가 판결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판사 역시 선처할 수 없다는 데 전 검사와 의견을 같이하고 있음을 밝히는 말이었다.
판사의 추상같은 눈빛에 윤선자는 절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판사는 반성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피고인 윤선자를 징역 3년에 처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형량이었다. 윤선자가 순간 무너져 내릴 듯 휘청거렸다.
“…다만, 판결 확정일로부터 3년간 형의집행을 유예한다.”
이어지는 판결문을 듣고 윤선자는 비로소 몸을 가누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판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윤선자의 딸도 감격해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검사석에 앉아 있던 전윤지 검사가 태산을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결과는 이렇게 되었으니 미련은 없다는 뜻이리라.
태산의 입장에서도 납득할 만한 판결이었다. 태산은 그쯤에서 일어나 법정을 나왔다.
태산이 법정에서 나와 차를 타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에는 서은섭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태산은 바로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
“결정했냐?”
-예, 한번 해보겠습니다. 대신 선금은 좀 챙겨주셔야겠습니다. 약속만 믿고 목숨 걸 수는 없으니까요.
태산은 빙그레 웃었다. 구체적인 교섭 조건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서은섭은 이미 결심을 굳힌 모양이다.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알았다. 위에 보고하고 다시 연락하마.”
* * *
“으음…….”
배진만 부장은 태산이 만들어 온 서은섭의 파일을 들여다보며 턱을 문질렀다. 과연 잠입 요원으로 쓸 만할 것인가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부친이 유흥업소 사장 출신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유복하게 자랐지만 그때도 밤 문화에는 익숙했다고 하고요.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학교 그만두고 바로 뒷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10대 후반부터 나이 속이고 유흥업소 삐끼며 웨이터며 이러저러한 잡일들을 하다가 여자 후리는 재주를 인정받아서 호스트로 전향했고요. 여자들 등치는 자잘한 사기로 입건된 적은 몇 번 있지만 노련하게 잘 처신해서 전과는 없습니다.”
잠입 요원으로 투입하기 전에 신상 파일을 만들며 뒷조사를 해보았다가 태산도 미처 몰랐던 서은섭의 배경을 알게 되었다.
배 부장이 파일을 넘겨보며 물었다.
“최근 몇 년간은 별다른 데이터가 없군.”
“예, 태산건설 임태산 대표와 여자 문제로 트러블이 있었다고 합니다. 호되게 당하고 뒷세계에서 완전히 잠적했습니다. 듣자 하니 여자들 기둥서방 역할 하면서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도 저쪽에도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그 점은 요원으로 활용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겁니다. 정보가 백지이니 그쪽에서 뒷조사를 해도 알아볼 것이 별로 없을 겁니다.”
서은섭의 장점을 어필했으나 배 부장은 묵묵부답이었다. 태산은 조금 더 밀어붙여 보았다.
“영리한 놈이고 연기도 좀 합니다.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어서 그쪽 생리도 잘 알고요. 임태산이 죽었으니 시기도 매우 적절하지요. 그 세계에 다시 기어들어 온 핑계로 딱 알맞으니까요.”
조바심을 내는 태산을 향해 배 부장은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믿을 만한 놈이긴 한가?”
배 부장으로서는 그 부분이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일 것이다. 과연 이자를 믿고 중요한 작전을 실행할 수 있는가. 혹여 저쪽으로 돌아서 버리지는 않을 것인가.
“의리는 있는 놈입니다. 개과천선하려는 의지도 확고하고요.”
태산은 서은섭이 자신의 앞에 처음 잡혀 왔을 때를 떠올렸다.
두려워 떨면서도 서은섭은 선화에게 잘못을 돌리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선화가 먼저 추파를 던졌느니 하며 둘러댔을 법도 한데 말이다. 서은섭은 스승인 선화와의 최소한의 의리를 지킨 셈이다.
태산의 죽음을 이미 알고도 어울리지도 않는 프리터 생활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달리 살겠다는 의지도 충분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뭐로 설득했나? 역시 돈인가?”
태산은 쓰게 웃으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수사비나 현상금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가?”
태산은 솔직히 털어놓아야 하나 숨겨야 하나 고민하다가 답했다.
“아니오. 턱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과거에 그놈과 정산해야 할 것이 있어서 그 부분을 정리해 주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상세한 부분까지 다 밝힌 것은 아니었지만 태산으로서는 밝힐 수 있는 부분까지는 최대한 정직하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태산이 서은섭에게 선뜻 거금을 내놓겠다고 한 것은 와룡회가 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마약 조직을 추적하는 일이 그만큼 태산에게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만한 돈을 지불할 여유도 충분하다.
하지만 또 하나, 스스로도 썩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과거 선화와의 관계를 의심해 멀쩡한 불알 한쪽을 아작 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말하자면 불알 한쪽의 값을 함께 쳐준 셈이다.
“다행이군.”
의외의 답에 태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배 부장을 다시 보았다.
“어중간한 돈에 넘어왔다면 저쪽에서 돈으로 유혹했을 때 거꾸로 매수될 확률이 높아. 제 목숨 거는 값은 확실히 받아내려는 놈이 다루기도 편하지. 합리적으로 접근하면 되니까.”
배 부장은 그렇게 설명하고는 태산을 찬찬히 다시 보았다.
“자네 같은 사람이 제대로 정보원 역할을 할 놈을 진짜로 데려올 줄은 몰랐군.”
하지만 배 부장은 그 이상 태산에게 어떻게 정보원을 찾았느냐, 구체적으로 어떤 조건을 걸고 데려왔느냐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눈을 빛낼 뿐이다.
“한번 해보세. 대신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전까지는 우리 둘만 알고 수사관들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는 걸로 하지.”
“예, 맡겨주십시오!”
* * *
“앞으로는 대포 폰 번호로 연락해라. 그리고 이거…….”
태산이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와 카드 하나를 꺼내 은섭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수사 기간 동안 쓸 중고차 한 대 사놨다. 그리고 니 명의로 카드도 하나 개설해 놨고. 선금이랑 수사자금조로 계좌에 돈 넣어놨으니 재량껏 쓰면 된다.”
그리고 이어서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명함도 한 세트 꺼내놓는다. 은섭은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신광상사 영업부 대리 서은섭]
“대외적인 위장 신분이다. 회사 사무실 간판은 변두리에 있는 복합 빌딩에 걸어놨고 사무실 번호는 검사실에 연결되게 해둘 거다. 상대가 네 신원을 확인하려고 하는 경우를 대비한 거니까 너무 막 뿌려대진 말고.”
“별걱정을 다 하시네요. 남을 속이려 할 때는 제 발 저려서 쓸데없이 TMI를 너무 많이 풀어놓지 않는 게 기본이에요. 필요 최소한으로만 쓸 테니 염려 마세요.”
은섭은 차 키와 카드, 명함을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태산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하면 됩니까?”
“부평에 BND라는 클럽이 있다. 와룡회 쪽에서 소유하고 있는 클럽인데 정보에 따르면 상질 마약이 대거 풀리기 시작하면서부터 클럽에 갑자기 출몰하기 시작한 놈이 있다고 한다.”
태산이 사진 몇 장을 은섭 앞에 내놓았다. 콧수염을 기르고 선글라스를 썼으며 화려한 패턴의 슈트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클럽 BND 간판을 배경으로 찍혀 있었다.
“이름은 최성일. 재일교포 사업가로 행세하고 있지만 사실은 야쿠자 출신이다. 원래는 고베야마구치구미 산하의 소조직에 몸담고 있었는데 내부 항쟁이 격화되면서 조직이 해체되었다. 살길을 찾아 국내로 들어온 모양인데 그놈이 신흥마약조직에서 유통책을 맡은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그 클럽을 거점으로 딜러들과 접촉한다는 소문이다.”
태산은 천용식에게서 얻은 정보를 풀어놓으면서도 입맛이 썼다.
와룡회가 마약을 다룬 경험이 있는 전직 야쿠자를 마약 판로를 관리하는 유통책으로 스카우트했다고 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태산으로서는 이웅배 회장이 하필이면 야쿠자까지 끌어들여 마약 사업을 시작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건달의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다 던져 버렸단 말인가.
“BND에 정기적으로 출근하면서 기다리다가 그놈이 나타나면 접근해라. 충분히 경계를 무너뜨리고 나서 딜러로 거래를 트는 게 목표다.”
태산의 말에 은섭은 새삼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보고 태산은 씩 웃었다.
“벌써부터 쫄지 마라. 일단은 거기서 놀면서 월급 사장 눈에 띄는 것부터 시작할 테니까. 수완 좋고 돈 쓰기 좋아하는데 돈이 궁해 뭐든 할 것처럼 안달이 난 놈으로 비치면 알아서 최성일에게 끈을 대줄 거다.”
서은섭이 흐흥 하고 코웃음을 웃었다.
“우선은 화끈하게 돈 쓰고 놀면 된다 이거죠? 내 전공이네요.”
그러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태산이 어리둥절해 올려다보았다.
“어딜 가? 갑자기.”
“당연히 돈 쓰러 가죠.”
은섭은 대뜸 답했다.
“카드 받자마자 쓸 생각부터 하냐?”
태산이 어처구니없어하며 타박하자 은섭은 쿡쿡 웃으며 덧붙였다.
“그 물에서 놀려면 그 물에 맞는 차림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단 옷부터 뽑으려고요. 뭐 딱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 최대한 날티 나게.”
“아주 신이 났군.”
태산은 혀를 찼다.
“어차피 돈은 알아서 쓰라고 준 거니 어떻게 쓰든 내 알 바 아니다만. 네 본분은 노는 게 아니라 수사라는 걸 잊지 마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서은섭은 유쾌하게 답하고는 그 길로 바에서 나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에서 강 검사가 준 키를 누르니 근처에 주차된 자동차에 불이 들어온다.
일명 과학 5호, 양아치가 탈 법한 세단의 전형인 흰색 K5였다. 은섭은 쓰게 웃었다. 강 검사가 캐릭터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중고차를 구해둔 것이다.
은섭은 차를 타고 나가 가까운 백화점부터 들렀다. 그리고 강 검사가 준 카드로 본격적인 쇼핑을 시작했다. 클럽룩 캐주얼과 시계, 슈트와 구두를 거침없이 구입했다.
새 옷을 풀 장착한 은섭은 매장 거울 앞에 서서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아~ 이 느낌, 정말 그리웠어.”
그동안 가지고 싶었으나 마음에만 둔 물건들을 은섭은 남김없이 쓸어 담았다. 백화점 마감 시간이 되어서야 은섭의 쇼핑은 끝이 났다. 은섭은 쇼핑한 물건을 자동차 트렁크에 밀어 넣고 새 옷 차림으로 운전석에 앉았다.
“준비는 마쳤으니 사전 답사라도 한번 가볼까?”
은섭은 팔목을 들어 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아직 저녁 8시. 클럽 오픈 시간은 보통 11시고 줄을 서는 것도 최소 10시는 되어야 할 것이다.
남은 시간이 길었지만 바로 귀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은섭은 근처 레스토랑에서 여유를 부리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리고 차를 몰아 시내를 드라이브하며 시간을 때웠다.
마침내 10시가 되자 은섭은 그대로 차를 몰아 클럽으로 향했다. 클럽 앞에 도착해 발레파킹을 맡기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시간은 아직 10시 20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입구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서울의 클럽에 비하면 규모는 작아도 화려하고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못지않았다. 헐벗은 여자들과 금발의 외국인들이 뒤섞여 웃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클럽 밖까지 울려 나오는 음악 소리에 취해 무아지경으로 머리를 흔들어대는 이들도 있었다.
은섭은 줄 뒤에 서 입장을 기다리며 화려하게 번쩍이는 클럽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BND, Brand New Day.
오늘부터 은섭에게도 과거와는 완전히 새로운 날이 펼쳐질 것이다. 신흥마약조직을 적발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미끼가 되어야 하는 날들.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짜릿한 스릴을 기대하며 가슴이 뛰었다.
은섭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은섭이 강 검사에게 협조하자고 결심한 것은 돈도 돈이었지만 그 스릴에 이끌린 것이 컸다. 그렇게 애썼건만 결국 자신은 처음부터 안온한 삶을 살 수 없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괴감이 엄습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야지.”
은섭은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각오를 다졌다.
남을 속이려고 마음먹었으면 나 자신도 속을 만큼 확실히 속여 넘긴다. 그것이 은섭의 모토였다.
그깟 마약조직 따위 홀딱 속여 넘겨서 정보 탈탈 털어 일망타진하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사는 거다.
* * *
“형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요즘 좀 뜸하셔서 사장님이 궁금해하시던데요.”
은섭이 클럽 입구로 다가가자 MD가 마중 나와 인사를 건넸다.
“월급쟁이 처지에 어떻게 맨날 클럽에만 붙어 있냐?”
“그래도 형님은 시원시원 잘 쓰시잖습니까? 잘 버시는 모양입니다?”
“카드값 때문에 죽겠다, 인마.”
은섭이 MD와 함께 클럽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 앞에 늘어선 줄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 오빠!”
은섭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핫팬츠 위에 인조 퍼 재킷을 입은 긴 머리 여자 하나가 친구와 함께 줄에 서 있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 민지야. 왔어? 같이 들어갈래?”
은섭이 제안하니 여자는 반색했다.
“그러면 좋지. 테이블 잡아놨어? 일행은?”
“내가 누구 데리고 다니는 거 봤냐? MD가 같이 놀 애들 붙여준다고 해서 테이블만 잡아놨지. 너도 껴.”
“아싸! 안 그래도 기다리기 지루했는데. 내 친구도 같이 가도 되지?”
옆에 서 있던 친구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새침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은섭은 붙임성 있게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같이 와. 들어가자.”
은섭은 여자 둘을 데리고 귀가 멍멍하도록 음악이 쏟아지는 클럽 안으로 발을 들였다. MD가 미리 잡아둔 플로어 바로 앞의 명당 자리로 안내했다.
클럽 죽돌이, 죽순이들이 지나가며 은섭에게 아는 척을 할 만큼 은섭은 이곳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잘 놀고 돈 잘 쓰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것 같아도 은섭의 속내는 초조했다. 은섭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놀며 마냥 돈만 펑펑 써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완이 좋고 발이 넓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클럽 단골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고 술을 쏘는 등 과감히 선심을 쓰기도 했다.
돈 쓰는 걸 좋아하지만 벌이가 그에 미처 못 따라가 쪼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 클럽에서 노는 날짜와 쓰는 돈에도 패턴을 만들며 신경을 썼다. 월급날은 물 쓰듯 돈을 쓴 다음 조금씩 쓰는 돈을 줄이고 다음 월급날이 다가오면 한동안 뜸하다가 다시 나타나는 식이었다.
사장과 안면을 튼 이후에는 일부러 카드 한도가 넘었다며 월급날까지만 외상을 해달라 해서 이자까지 쳐 계산을 하기도 했다. 이른바 고리 단기사채였다.
단골인 데다 비싼 이자까지 쳐서 돈도 척척 잘 갚으니 사장은 은섭 전용 장부까지 만들어 안심하고 외상을 주었다. 은섭은 그 외상 금액을 아슬아슬해 보일 수준까지 조금씩 늘려갔다.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있었건만 최성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사장도 딱히 최성일을 연결시켜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 성과 없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강 검사가 입수했다는 첩보가 사실은 거짓 정보가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형님, 사장님이 룸에서 잠깐 보자고 하시는데요.”
술잔을 든 채 플로어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 일행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은섭에게 MD가 다가와 속삭였다. 은섭은 고개를 끄덕이고 MD를 따라나섰다. MD가 VIP룸 쪽으로 은섭을 데리고 갔다.
VIP룸에 들어섰을 때 은섭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상석에 최성일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선글라스만 끼지 않았을 뿐, 강 검사가 보여준 사진 속의 인물과 완전히 같았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아 고스란히 드러난 눈빛은 형언할 수 없이 섬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은섭은 등골을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새끼, 눈이 완전히 돌아 있잖아.’
하지만 은섭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일부러 시선을 돌려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제가 금방 다 갚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다 결제할게요. 뭘 그걸 또 독촉을 하고 그러십니까?”
“아니, 난 은섭 씨 믿지. 독촉을 하려는 게 아니고. 오늘은 소개시켜 줄 형님이 있어서 말이야.”
사장은 최성일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개인 사업 크게 하시는 최성일 사장님이야. 재일교포시고 일본에서 사업하다가 지금은 한국 들어오셨지.”
은섭은 그제야 최성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서은섭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김 사장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최성일이 핥듯이 은섭을 살피며 인사를 받았다. 억양에 일본 어투가 살짝 섞여 있었다.
“앉아. 앉아.”
사장이 은섭을 자리에 끌어 앉히려 하니 은섭은 술병부터 잡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먼저 술 한잔 올려야죠.”
은섭은 그렇게 말하며 능숙하게 폭탄주를 제조해 최성일에게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 사장님.”
최성일은 흡족한 표정으로 잔을 받으며 답했다.
“딱딱하게 사장님은 무슨. 그냥 형이라고 불러요.”
“예, 형님. 잘 모시겠습니다.”
은섭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 * *
은섭은 싹싹하게 최성일의 비위를 맞추며 최성일의 눈에 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사업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최성일도 태생은 어쩔 수 없는 야쿠자다. 깍두기들은 서열을 확실히 올려주며 형님 대접을 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은섭은 그런 최성일의 심리를 훤히 들여다보며 입속의 혀처럼 살갑게 굴었다. 최성일도 은섭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술에 거나하게 취했을 때 최성일이 아예 말을 놓으며 물었다.
“일행들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그냥 우연히 시간 맞아 같이 노는 애들인데요 뭐. 형님 같은 귀한 인연과 자리 만드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요.”
그렇다. 지금까지 얼마나 고대해 왔던 자린데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뜬단 말인가.
최성일은 그런 은섭의 속내를 모르고 흐뭇하게 답했다.
“귀한 인연은 무슨. 그냥 작은 사업체 하나 굴릴 뿐인데.”
그 작은 사업이라는 게 마약 유통이니 범상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우는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사나?”
그렇게 묻는 최성일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빛났다. 드디어 호구조사가 시작된 것인가? 태산은 일부러 더 무심하게 답했다.
“저요? 그냥 월급쟁이죠.”
“돈 좀 쓴다던데 남의 월급 받아서 그 씀씀이가 해결이 되나?”
“그러게 말입니다.”
은섭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제가 좀 수완이 있는 편입니다. 코딱지만 한 상사 제가 발로 뛰어서 영업해 가지고 매출 올리고 있어요. 거의 회사를 제가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누가 번다고 저한테는 눈곱만 한 성과급 외에는 돌아오는 게 없어요. 아주 좆같죠. 따로 독립해 회사를 차릴까 싶어도 월급 받아서 어디 자본금이 쉽게 모여야 말이죠.”
은섭은 그렇게 한탄하다가 최성일을 향해 호소했다.
“형님도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사내로 태어나서 한번쯤은 큰돈 좀 만져보고 싶은 야망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좆 빠지게 일해서 남의 주머니만 불려주고 있으니 허탈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최성일은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마는… 어디 큰돈 만지는 게 쉬운 일인가? 남들 버는 것처럼 벌고 세금 꼬박꼬박 내가면서 큰돈 버는 건 불가능해. 구정물에 발도 좀 담그고 이럴 각오가 없으면 힘들지.”
최성일의 말에 은섭이 픽 웃는다.
“형님, 저 그렇게 애송이로 보지 마십시오. 저도 구정물에 발 담글 만큼 담가봤습니다. 제가 영업하는 물건에 깨끗한 것만 있을 거 같습니까?”
은섭은 그렇게 말하고는 최성일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였다.
“저 밀수품도 상당히 가지고 있습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은섭의 말에 최성일이 사장을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이 친구 참 재미있는 친구구먼.”
최성일은 이내 표정을 바꾸고는 은섭을 돌아보았다.
“내가 말하는 건 그 정도의 불법이 아니야. 큰돈 벌려면 그 이상 손을 더럽힐 각오가 필요해.”
최성일의 소위 ‘돌아 있는’ 눈이 은섭을 빤히 바라본다. 바라볼수록 어쩐지 소름이 끼치는 눈빛이었다.
“아우는 그럴 각오가 되어 있나?”
은섭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짐짓 목소리를 높여 유쾌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큰돈 벌 수 있는 건수 있으면 부디 소개 좀 시켜주십시오.”
“그래?”
최성일이 빙글빙글 웃으며 술잔을 마저 비웠다.
하지만 일을 소개해 주겠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다 하는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술을 몇 잔 더 마시고 난 뒤 최성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함 하나 줘봐.”
은섭이 명함을 내밀자 최성일은 명함을 낚아채 주머니에 넣었다.
“조만간 연락하지.”
최성일은 룸을 나가며 사장에게 말했다.
“김 사장, 저 친구 외상값 내 앞으로 돌려놔.”
은섭은 최성일의 뒤통수에 대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살펴 가십시오.”
은섭은 최성일이 사장과 룸을 나가고 난 후 테이블로 돌아갔다. 혹시나 타깃에 접근한 후 바로 클럽을 떠나면 의심을 살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좀처럼 노는 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타깃이 접촉을 해왔다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대충 자리를 파하고 나왔다.
대리운전자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기대 은섭은 태산에게 문자를 보냈다.
[타깃 접촉했습니다. 곧 연락이 올 것 같으니 준비해 주세요.]
* * *
뚜르르르르르~
전화벨이 울린 순간, 검사실 안의 직원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언제까지나 울리지 않을 것 같던 전화기가 처음으로 소리를 냈던 것이다.
은섭에게서 최성일과 접촉했다는 연락이 온 후 태산은 바로 그 사실을 배진만 부장에게 보고했다. 배진만 부장은 비로소 수사관들에게 잠입 요원의 존재를 알렸다.
수사관들 중에는 서은섭을 신뢰할 수 있느냐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지만 이미 사태가 급전개되고 있었으므로 반대를 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배 부장이 수사관들의 그러한 반응까지 예상하고 잠정적으로 비밀에 붙인 것인지도 모른다.
611호 검사실은 이후 비상 태세에 들어갔다.
미리 만들어둔 번호는 이미 검사실과 연결해 둔 상태였다. 혹시나 최성일 쪽에서 서은섭의 신원 조회를 해오지 않을까 해서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며칠째 전화는 도통 걸려오지 않고 있었다.
최성일은 딱히 서은섭을 스카우트할 생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딱히 신원조회를 하지도 않고 거래를 틀 정도로 믿고 있는 것일까?
이대로 전화가 이대로 영영 울리지 않은 채 끝나는 것이 아닐까 슬슬 조바심이 나려는 차였다.
역시 최성일이 그렇게 무른 놈일 리 없다.
“전화받겠습니다.”
미리 회사 여직원 역할을 맡기로 말을 맞춰놓은 황수진 실무관이 조금 긴장한 톤으로 말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 실무관은 크게 한숨을 몰아쉬더니 금세 분위기를 바꿨다. 그러고는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린 후 수화기를 들었다.
“네. 신광상사입니다.”
나른한 목소리가 별다른 일 없이 무료한 오후를 버티고 있는 작은 사무실의 여직원을 떠올리게 했다. 이 무슨 갑작스러운 메소드 연기란 말인가 하고 태산은 내심 놀랐다.
-거기 혹시 서은섭이라고 있습니까?
“영업부 서은섭 대리님 말씀이십니까? 지금 외근 중인데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다고 전해 드릴까요?”
황 실무관은 조금 귀찮다는 듯이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서은섭을 찾는 것에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됐습니다. 핸드폰으로 전화해 보지요.
“아, 예. 그러시겠어요?”
왜 진즉에 핸드폰으로 전화해 보지 않았냐는 투로 황 실무관이 무심히 답했다. 상대는 대꾸 없이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황 실무관은 손이라도 덴 것처럼 수화기를 재빨리 내려놓았다. 그리고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저 잘했나요?”
태산은 진심으로 감탄하여 말했다.
“훌륭한데요. 깜박 속았을 겁니다.”
수사관들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인다. 이흥렬 계장은 숫제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너무 자연스럽던데? 언제 연기 배웠어?”
그제야 황 실무관도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고했어요.”
태산은 공치사를 건네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서은섭에게 대포 폰으로 문자를 넣었다.
[타깃이 사무실로 전화했다. 신원조회 통과했으니 곧 연락 갈 거다.]
잠시 후 서은섭에게서 답문이 왔다.
[본격적인 잠입이군요. 떨리네요.]
[긴장할 것 없어. 첫 거래니까 그렇게 깐깐하게 굴진 않을 거다. 살짝 떠보기만 하겠지. 만에 하나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거래 엎고 빠져나와라.]
거기까지 썼다가 태산은 잠시 망설였다. 굳이 미리부터 겁을 줄 필요가 있을까? 은섭도 이 정도 위험 부담이야 각오하고 일을 한다고 했을 텐데.
태산은 마지막 문장을 지워 버리고 문자를 전송했다.
[긴장할 것 없어. 첫 거래니까 그렇게 깐깐하게 굴진 않을 거다. 살짝 떠보기만 하겠지.]
강 검사의 문자를 받은 은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괜찮다. 최성일도 첫 거래부터 밑천을 전부 드러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더 깊이 잠입했을 때가 문제다. 깊이 잠입할수록 더 내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고 그럴수록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이제 겨우 발끝만 담그려는 건데 겁을 먹어서는 앞으로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띠롱~ 하고 문자 알림음이 다시 울린다. 강 검사에게서 문자가 하나 더 도착해 있었다.
[조심하고 다시 접촉하는 대로 연락해라.]
조심하라는 것이 안전을 걱정해 주는 말인지 그저 정보원이 발각되어 작전을 망치지 않기를 바라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 검사가 평소 하는 짓을 보면 역시 후자일 테지만.
다음 날 바로 최성일에게서 연락이 왔다.
“예, 형님. 어쩐 일이십니까?”
은섭은 일부러 더욱 반가운 척 전화를 받았다.
-부업해 볼 생각 있냐?
“벌이만 괜찮다면야 감사하죠.”
-벌이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조금 위험 부담은 있어도 너 하는 데 따라서는 본업 때려치우고 이것만 하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고.
“그런 쏠쏠한 일이 있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해야죠. 형님이 권해주시는 건데.”
은섭이 반색하자 최성일이 바로 물었다.
-지금 어디냐?
“외근 중인데요.”
-쨀 수 있으면 바로 BND로 와라.
“이 시간에요?”
은섭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반문했다. 낮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클럽은 오픈은커녕 아직 영업 준비도 시작하지 않았을 시간이다.
최성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은섭이 토를 다는 것이 불쾌한 기색이다. 은섭은 얼른 답했다.
“일 마무리하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은섭은 전화를 끊고 슈트를 차려입었다. 일하다가 바로 온 것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차를 끌고 클럽으로 가는 길에 은섭은 카페에 잠시 들러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시켰다. 그리고 물 먹듯 꿀꺽꿀꺽 들이켰다. 혹시나 실수하지 않도록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두는 것이었다.
BND에 도착해 입구로 다가가니 셔터가 내려와 있고 문이 잠겨 있었다. 은섭은 최성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저 도착했습니다.”
-기다려라.
최성일이 전화를 끊자마자 눈에 익은 클럽 직원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직원은 은섭을 VIP룸으로 안내했다.
활짝 웃으며 VIP룸으로 들어서던 은섭은 최성일과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순간 얼굴이 굳었다.
“여어~ 저스틴! 오랜만이다!!”
호스트 시절 마담이었던 형이다. 이 형이 왜 여기 있지?
최성일은 은섭의 뒷조사를 어디까지 했단 말인가. 순간 등골에 소름이 좌악 끼쳤다.
은섭은 침착을 유지하려 애쓰며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넸다.
“어, 성종이 형! 형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 * *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최 사장님한테 얘기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너일 줄이야.”
성종은 잔뜩 들떠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게요. 저도 형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은섭도 반가운 척 성종과 악수를 나누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혹시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불안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때 너 갑자기 소식도 없이 안 나와서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다, 인마.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었네. 게다가 무슨 영업 일 한다며? 너 같은 놈이 월급쟁이 회사원 생활을 하고 있다니. 경력도 없는데 어떻게 직장은 잘 구했네.”
최성일은 흥미로운 듯 술잔을 기울이며 가만히 은섭을 바라보았다. 꿰뚫는 듯한 눈빛이 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 세계에서 증발했으며 회사원 생활을 해본 적도 없는 놈이 어떻게 실적 좋은 영업 사원으로 변신했는지.
답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은섭과 거래를 틀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다. 아니, 자칫 답을 잘못하면 꼬리를 잡혀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른다.
은섭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장 효과적인 거짓말은 거짓과 진실을 적당히 섞는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 스킬을 쓸 때인지 모른다. 약간 양념을 친 진실을 털어놓는 것.
은섭은 과장 섞어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하아~ 진짜 이런 얘기는 창피해서 어디 가서 안 하려고 했는데…….”
은섭은 곤란한 표정으로 망설이는 척한 뒤 이윽고 호스트바를 그만둔 사정을 털어놓았다.
“형, 혹시 내가 그때 공사 들어가려고 찍어둔 여자 사장 기억나요? 사업 크게 하고 있다고 하는데 얼굴은 되게 젊어 보이고 돈 팍팍 잘 써서 거기 선수들이 다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아~~~ 기억나. 한… 선희였던가 선화였던가. 아무튼 한 사장님!”
“네, 맞아요. 제가 그 누님 밖에서도 종종 만나면서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유명한 조폭 이거였더라고요.”
은섭이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인다. 성종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물었다.
“그래? 누구?”
“임태산이라나 뭐라나. 어휴~ 그 이름 입에 담기도 싫어요.”
은섭은 치를 떨며 말했다. 태산의 이름이 나오자 의외로 최성일이 관심을 보인다.
“태산건설 임태산이?”
“그런 것 같은데요. 형님도 아세요?”
“아니. 하지만 건달 세계에서는 꽤 유명한 이름 아닌가?”
최성일은 모른 척 의뭉을 떨었다. 은섭도 무관심을 가장하며 화제를 돌린다.
“글쎄요. 아무튼 저는 전혀 몰랐고요. 그 누님이 조폭의 여자라는 건 더더욱 알 턱이 없죠. 어쨌든 그 때문에 어깨들한테 끌려가서 완전히 경을 치고 그날로 바로 일 그만두고 숨었던 거예요. 다시 보이면 죽인다는데 화류계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알바를 하며 지냈는데 알바하던 가게 사장님이 지금 회사를 소개해 주셨어요. 취급하는 물건에 법적으로 하자가 있는 것들도 있고 해서 범생이들은 안 뽑는다더라고요. 저처럼 적당히 유도리 있는 놈이 딱 좋다고.”
최성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섭이 전에 밀수품도 취급하고 있다고 언급해 둔 탓에 의심 없이 믿는 눈치다.
“한동안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돈만 벌었죠. 그것도 슬슬 지겨워지던 찰나에 임태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길로 바로 클럽으로 떠서 이제껏 못 놀았던 한을 실컷 풀었습니다. 근데 놀다 보니 모아놨던 돈도 슬슬 녹아 없어지고 월급으로는 도통 감당이 안 되어서 말이죠.”
은섭이 거기까지 말하자 성종이 무릎을 친다.
“아~ 최 사장님, 얘 딜러 시키시려고요?”
최성일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성종은 답을 지레짐작하고 멋대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놈 이거 써먹기 괜찮죠. 똘똘하고 수완도 좋고. 얘가 내 밑에 처음 들어왔을 때 다른 애들이 무시했다고. 내 밑에 있는 선수들 다 연예인 뺨치게 생긴 정빠 애들인데 걔들에 비하면 얘가 인물이 좀 달리는 것도 사실이지. 내가 현역은 한참 지났지만 인물로만 보면 내 쪽이 훨씬 낫지 않나?”
성종의 뜬금없는 인물 자랑에 은섭은 쓰게 웃었다.
“아무튼 처음엔 다들 얜 그냥 박스에 구색 맞추기로 넣어두고 병풍으로 세우는 용이다 생각했죠. 지명을 받아봤자 얼마나 받겠냐고. 그런데 이놈이 의외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이더라고요. 깔끔하고 착해 보인다나. 귀티가 난다고도 하고. 야금야금 지명을 받기 시작하더니 지명 받았다 하면 손님을 흐물흐물 녹여 버리더라고요. 얘가 참을성 있게 잘 맞춰주고 워낙 입도 잘 터니까 여자들이 푹 빠져서 뭐든 퍼주지 못해서 안달을 했죠. 그렇게 명실상부 넘버원이 된 겁니다.”
성종은 혀를 차며 덧붙였다.
“갑자기 없어져서 정말 아까웠어요. 그 공사 솜씨로 계속 호스트 했으면 지금쯤 지 가게를 차리고도 남았을걸.”
은섭은 성종이 계속 옛날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애써 화제를 돌려놓으려 한다.
“그보다 형이야말로 어떻게 지냈어요? 아직 마담 일 하고 계세요?”
성종은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나? 내 가게 낸 지 좀 됐지. 우리 가게 애들이랑 단골손님들이 종종 찾아서 이렇게 한 번씩 최 사장님한테 물건 받아 가는 거야. 그런데…….”
성종이 최성일을 힐끗 곁눈질하더니 물었다.
“너 약 파는 일이란 건 알고 있는 거야?”
“예? 아, 아니요.”
“진짜 이 일 할 수 있어? 너 전에는 약이라면 질색을 했잖아.”
은섭은 성종의 방정맞은 입을 그대로 꿰매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최성일이 무슨 얘긴가 하고 득달같이 돌아보자 성종은 기다렸다는 듯 종알종알 일러바친다.
“호스트 일 하면 밤낮이 바뀌니까 수면장애 오는 애들이 꽤 있어요. 전에도 그런 애들한테 푹 자라고 졸피뎀이나 러미날 같은 거 몇 알씩 나눠주고 그랬다고요. 근데 이 놈은 그것도 자주 하면 중독된다면서 선수들한테 약 권하지 말라고 따박따박 따지고 들었어요. 신인 주제에 아주 맹랑했지. 수면제 몇 알에도 그리 호들갑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것도 아니고 뽕을 팔 수가 있겠어?”
최성일의 시선에 은섭은 옆얼굴이 따가웠지만 애써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그것도 옛날 일이죠. 물 쓰듯이 남의 돈 쓰다가 한 푼이 아까운 처지가 되어보세요. 뽕 아니라 더한 것도 팔죠.”
은섭은 농담 섞어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다면 어디 뽕을 팔 각오가 되어 있는지 확인을 한번 해볼까?”
최성일의 입에서 뭔가 불길한 말이 떨어졌다. 대체 뭘 어쩔 셈일까 생각하며 은섭은 마음을 졸였다.
“찬술 한잔 들고 얘기하지.”
그 술이 지금 최성일이 홀짝대고 있는 위스키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최성일은 슈트 안주머니를 더듬더니 주사기 하나를 꺼냈다. 30mg, 딱 한 대 분량의 약물이 들어가 있다. 보나마나 필로폰일 테다.
테이블 밑에서 유리로 된 작은 증류수 병을 꺼낸 최성일은 주사기의 마개를 뽑고 바늘을 증류수 병에 찔러 넣었다. 증류수를 뽑아 올려 필로폰을 희석하는 것을 보며 은섭은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약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애써 공들인 잠입 작전은 허사가 된다. 꿈꿔왔던 인생 역전의 기회도 날아가는 것이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약을 맞는다면 성공적으로 최성일과 거래를 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회의가 느껴졌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은섭은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잡기 위해 이 위험한 임무를 자청했다. 지금 약을 맞아버리면 임무에 성공한다 해도 결국 이 세계에 매인 것이 된다.
단 한 번만 타협하자는 것, 그것은 중독자들이 즐겨대는 핑계였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게 마련이다. 지금 여기서 타협한다면 은섭도 마약중독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최성일이 주사기를 내미는 순간 은섭은 마음을 굳혔다.
“그거 뽕입니까?”
최성일 대신 성종이 킬킬 웃으며 답했다.
“그럼 뭐겠냐? 영양제이기라도 할까 봐?”
은섭은 한껏 불쾌한 기색을 비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형님! 정말 실망입니다. 저는 형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저한테 뽕을 권하시는 겁니까? 뽕쟁이들도 자기 가족한테는 뽕을 안 권한다는데 형님한테 저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최성일이 물끄러미 은섭을 올려다본다.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은섭은 밀리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저는 약 팔아서 한몫 잡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그렇다고 뽕쟁이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형님이 저를 뽕쟁이로 만들어서 써먹고 버리실 거라면 저는 이 자리에 잘못 온 것 같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은섭은 거침없이 돌아섰다. 여기서 최성일이 잡지 않는다면 작전은 이대로 끝내고 알바 생활로 돌아가는 거다. 죽기보다 싫지만 세상 사람들 원래 다 그러고 살지 않나. 남들처럼 열심히, 가늘고 길게 살아보는 거다.
그 순간 최성일이 목소리를 높였다.
“앉아!!”
은섭은 멈칫했지만 미간을 찌푸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갑자기 최성일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식 이거 배짱이 보통 아니구먼. 그냥 한번 떠본 거다. 앉아라.”
거래를 트기 전에 한번 떠볼 거라던 강 검사의 말이 맞았다. 은섭은 안도하며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잔뜩 긴장해 미친 거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은섭을 보고 있던 성종도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이거 아주 맹랑한 놈이라고.”
성종은 숫제 은섭의 어깨를 팡팡 치며 낄낄거렸다.
“내가 일본에서 이 사업을 할 때 밑에 있던 딜러들 중에는 약쟁이였다가 판매로까지 돌아선 놈들이 많았어. 그런데 그런 놈들은 결국에는 점점 심하게 중독되어서 헛짓거리를 하더란 말이야. 파는 것보다 지가 맞는 게 더 많아서 뒤지거나 미쳐 가지고 꼭 중요한 일을 그르쳐. 그렇게 민폐 끼치는 놈들보다는 철저하게 사업적인 마인드로 접근하는 놈이 훨씬 믿음직하지.”
최성일은 그렇게 말하고는 드디어 은섭이 기다려 왔던 말을 꺼내놓았다.
“같이 일 한번 해보자.”
그리고는 바로 거래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건은 최상으로 내가 대고 넌 알아서 팔아 오면 된다. 내가 매상의 50%를 떼고 나머지는 니가 가지는 거야.”
“반반이요? 중간 마진이 너무 센 거 아닙니까? 약은 유통하는 게 더 어려운데요. 위험 부담도 크고.”
은섭이 농담 섞어 볼멘소리를 했다.
“처음부터 너무 욕심부리지 마라. 이 장사는 정가가 있는 게 아니야. 니가 프리미엄만 잘 붙여서 팔면 그만큼 더 벌 수 있다. 니 말대로 약은 유통이 다지. 상질의 약을 안전하게 살 수 있으면 값이 좀 비싸도 사려는 사람들이 많아. 고로 니가 상대에게 얼마나 신뢰를 줄 수 있는지에 따라서 가격은 얼마라도 받을 수 있다.”
은섭은 빙그레 웃었다.
“사람 믿음을 사는 거, 그게 또 제 전공이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형님.”
은섭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 * *
“동업 축하드립니다, 최 사장님.”
최성일과 서은섭이 거래를 트는 것을 지켜보던 성종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저스틴 만났고 좋은 일 있는 것도 봤으니 저는 이만 제 볼일을 봐야 할 것 같네요.”
김성종이 두툼한 봉투 하나를 최성일 쪽으로 건넸다. 봉투에는 5만 원짜리 지폐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판매 대금에서 뗀 수수료일 것이다.
최성일이 봉투를 받아 챙기더니 이번에는 지퍼 백에 든 하얀 가루를 주머니에서 꺼내 성종에게 건넸다. 성종이 지퍼 백을 받아 들며 물었다.
“이번에도 상질이겠죠? 색은 좋은 것 같은데… 한번 맛본 애들이 그거 아니면 다른 건 거들떠도 안 봐서요.”
최성일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의심스러우면 테스트해 보든가.”
성종이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은섭에게 말했다.
“너도 잘 봐둬. 앞으로 이 일 하려면 알아둬야 하니까.”
성종이 꺼내 든 것은 은박지와 라이터였다.
성종은 지퍼 백 안에 든 하얀 가루를 약간 덜어내 은박지 위에 발랐다. 그리고 라이터를 켜 은박지 아래에 놓고 가루를 녹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루가 다 녹자 성종은 라이터를 끄고 은박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채 잠시 지켜보았다.
“식고 난 후에도 달고나처럼 은박지에 눌어붙어 있으면 하질이야. 하얗게 결정이 되면 상질이고.”
성종이 말을 마치자마자 은박지 위의 물질이 맛소금 같은 하얀 결정으로 굳어갔다. 성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퍼 백을 챙겼다.
“틀림없네요.”
최성일은 은섭에게도 작은 지퍼 백을 하나 내놓았다.
“10g이다. 300잔 이상은 나올 테니 새끼 딜러한테는 적지 않은 양이지. 재주껏 한번 팔아봐라. 파는 것 봐서 물건은 더 대줄 테니까.”
은섭은 지퍼 백을 집어 슈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겨우 10g의 무게였지만 가슴이 묵직할 정도의 중압감이 느껴졌다.
은섭은 필로폰을 챙겨 성종과 함께 클럽을 나왔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
“예, 형. 들어가세요.”
은섭은 성종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잔뜩 긴장해 있던 신경이 한순간에 풀어지면서 급히 들이켰던 커피가 배 속에서 울렁거렸다.
은섭은 욕지기를 눌러 참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속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좁은 룸 안에 퍼지던 필로폰 연기 냄새가 코끝에서 떨어지지 않아 더욱 위장을 흔들어놓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은섭은 화장실로 달려가 신물을 모조리 토해냈다. 한참을 헛구역질을 한 후에야 속이 진정되었다. 은섭은 세수를 하고 나와 강 검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거래 성사됐습니다. 물건 받아 왔습니다.]
잠시 후 강 검사에게서 답문이 왔다.
[양은?]
[10g으로 시작합니다.]
[수고했다. 저녁에 수거하러 가마. 거기서 보자.]
그날 저녁 은섭은 강 검사와 회원제 바의 비밀룸에서 다시 만났다. 은섭은 강 검사에게 받았던 지퍼 백을 넘겨주었다. 뭔가 끔찍한 물건을 건네는 듯 지퍼 백을 밀어놓고 얼른 손을 뗐다.
“어서 가져가 주세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하니까.”
강 검사는 픽 웃었다.
“좀 더 의연해지라고. 그래 가지고 100g, 1킬로씩은 어떻게 거래하려고 그러냐?”
“연기는 확실하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은섭은 툴툴거렸다.
“그래서 얼마를 상납해야 되는 거냐?”
“50%요.”
“완전 날강도로군.”
강 검사는 혀를 찼다. 그리고 빠르게 계산기를 돌린다.
“300대 분량에 상질 마약이니 대당 10만 원씩으로 치고 단순 계산 하면 3천만 원 정도 되는군. 첫 거래라는 걸 감안하면 가격을 많이는 못 받을 테고. 프로모션용으로 일부 뿌려야 되기도 할 테니… 매상은 많아야 2천 정도나 올릴까? 천만 원 정도 상납하면 최성일도 만족할 거다.”
은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후에 조금씩 받는 양을 늘리고 상납하는 금액도 늘리면서 계속 정보를 수집해라. 기회를 봐서 도청을 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심장이 쫄깃해지겠네요. 도청기 설치하려다 들키면 변명의 여지 없이 골로 갈 테죠.”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이 일 시작한 건 아니겠지?”
“목숨 걸 각오를 했다곤 해도 겁이 안 나는 건 아니라고요.”
투덜거리는 은섭을 보며 강 검사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잘해줬다. 오늘은 실컷 마시고 가라.”
강 검사는 은섭을 그렇게 격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아직 최성일 위의 상선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만 최성일이 신흥마약조직의 유통 총책이라는 사실은 확실해 보입니다. 클럽 BND를 근거지로 해서 유통망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태산이 배진만 부장 앞에 은섭에게서 입수한 약을 나란히 놓아두고 보고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증거물은 세 봉지. 10g, 20g, 50g짜리였다. 은섭이 입수하는 필로폰의 양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정보원에게는 성실히 상납금을 내면서 점점 더 긴밀하게 접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혹시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상납하는 금액과 상납하는 간격은 적당히 조절하고 있고요. 현재 거래가 주로 이루어지는 VIP룸에 정보원이 도청기를 설치해 둔 상태입니다.”
“최성일이 출현했을 때 BND를 급습하면 유통망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건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회의적으로 생각합니다.”
태산의 답에 배 부장이 왜냐는 물음을 담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청기를 통해 녹취한 음성을 분석한 결과 클럽을 근거지로 유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클럽 내에 물건을 보관해 두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가져와 거래를 하는 모양입니다. 정보원에게 거래 날짜를 알아내라 해서 검거할 수는 있겠지만 성과가 보잘것없을 겁니다. 섣불리 클럽을 쳤다가 큰 증거는 못 잡고 되레 유통망이 흩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최성일도 유통이 아니라 단순 소지라고 발뺌할 가능성이 있고요. 그래서야 정보원까지 투입해 가며 지금까지 공들여 설계한 보람이 없죠.”
“그렇다면 자네 계획은?”
“조금 더 깊이 접근하도록 기다린 후 제조 라인까지 함께 칠 생각입니다.”
배 부장은 턱을 문질렀다.
“그렇다고 지금 드러난 딜러들이 계속 암약하도록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나.”
“물론입니다. 정체가 드러난 딜러들은 은밀히 추적해 외부에서 순차적으로 체포할 계획입니다. BND에서 정보가 유출되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말입니다. 단번에 BND를 덮쳐서 산개하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딜러들을 체포할 수 있을 겁니다.”
배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그대로 진행하도록 해. 대신 너무 서두르진 말고. 자칫하면 최성일이 정보원의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태산이 보고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와 막 업무에 복귀하려는데 대포 폰이 울렸다. 은섭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의외로 범진이었다.
범진은 꼭 필요한 긴급 연락이 아니면 문자로 보고하지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양지에 있는 태산에게 누가 될까 봐 조심하는 것이다.
일부러 전화를 했다는 것은 꽤 중요한 소식이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소식이라는 건 아마도 그놈에 대한 정보가 아닐까?
“무슨 일이냐?”
태산이 전화를 받으며 물으니 범진이 조금 격앙된 톤으로 답했다.
-백준용 정보 입수했습니다.
“그래? 지금 어디 숨어 있냐?”
-아직 소재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쥐새끼 같은 놈이… 잘도 피해 다니는군.”
태산이 분기에 차 중얼거리자 범진이 얼른 입수한 정보를 알렸다.
-필리핀 밀수업자가 대만 업자에게 얻은 정보인데 대만에서 백준용 의뢰로 출발한 화물선이 있답니다. 공업용 대나무 수출하는 배인데 그놈 이력을 보면 이번에도 위장한 밀수선일 것 같습니다.
밀수선 적발보다는 백준용 검거 쪽이 태산에게는 더 우선적인 목표였지만 밀수선을 적발하면 백준용의 행방에 대한 단서도 잡힐 것이다.
백준용은 현재 수배 중이라 정상적인 경로로 입국한다면 바로 검거된다. 밀수선 선원으로 위장해 입국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었다.
-백준용이 밀수선 타고 입국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범진이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범진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흥분한 기색으로 정보를 전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도 있다.
“어떤 배인지 알아냈고?”
-파나마 선적의 만다린 호입니다. 홍콩에 들러서 밀수품 싣고 9월 7일경에 인천항으로 입항한답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였다. 이 정도면 더 조사할 것도 없이 검거할 수 있다.
“수고했다.”
들뜬 톤으로 공치사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태산에게 범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직접 치실 겁니까?
“당연하지.”
태산은 두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답했다. 수사관들에게만 맡겨두었다가 진짜 목적인 백준용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파나마 선적이라 해도 대만 선원들이 주축인 배입니다. 말이 선원이지 선장, 항해사, 기관사를 제외하고는 다 밀수꾼들이고요. 아주 거친 놈들로 한 스무 명쯤 된다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 필요하시다면 애들 모아서 지원 가겠습니다.
태산은 웃어버렸다. 아무리 남의 몸에 들어왔다지만 천하의 임태산이 아우에게 몸 걱정을 듣다니 말이다.
마약전담반 인원만으로는 벅찰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검찰이 하는 일에 조폭을 동원할 수는 없다.
“아서라. 나 혼자서 다 쓸어버리고도 남응게.”
자신도 모르게 임태산의 말투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듣고 범진이 피식 웃는 것이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졌다.
-예, 걱정 안 합니다.
믿음이 느껴지는 답이었다. 태산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슬쩍 한마디 던졌다.
“고맙다.”
범진은 잠자코 듣고만 있고 묵묵부답이다. 태산은 얼른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러고는 방금 들어왔던 집무실 문을 다시 나간다.
태산이 다시 610호 부장검사 집무실로 들어서자 업무를 보던 배진만 부장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오늘 자주 오는군. 깜박한 얘기라도 있나?”
“방금 입수한 정보입니다. 수배 중인 프로포폴 밀매업자 백준용이 의뢰한 밀수선이 지금 인천항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배 부장은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자네는 그런 정보들을 어디서 입수하는 건가?”
“정보원을 밝힐 수는 없지만 신뢰할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은 보장합니다.”
태산이 머쓱해서 답하자 배 부장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못 믿겠다는 뜻은 아니야. 계속해 보게.”
“약물 밀매업자인 만큼 밀수품 중에 약물이나 약물 원료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입항하자마자 단속했으면 합니다.”
태산은 선원들 중에 백준용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밀수 단속이라면 해경이나 세관에도 협조를 요청해야겠군.”
순간 태산은 구준태 시장의 비밀장부 파일을 떠올렸다. 백준용이 시장을 매수할 정도라면 해경이나 세관에 끄나풀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요. 안 됩니다.”
태산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밀수를 계속해 왔다는 건 어딘가 조력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보가 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역수사대는?”
검찰은 수사상 필요한 경우 광수대를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인천경찰청장이 구준태 시장과 결탁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과도 중요한 수사 자료를 공유할 수 없다.
“그 조력자가 최소 경찰청장 이상이라고 추정됩니다. 광수대도 안됩니다.”
배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우리 인력만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얘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