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우유 빛깔 악마
“어떤 계기로 프로포폴을 처음 투약하게 되었죠?”
“새론성형외과 원장의 권유로 시작했습니다.”
새론성형외과 원장 이정환은 프로포폴 유통 혐의로 구속수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가 언제쯤이었죠?”
“한 10년쯤 전인 것 같아요. 제가 학교 졸업하고 간호사로 막 취업했을 무렵이니까요.”
피의자 조혜진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꿈에 부풀었을 초임 간호사 시절에서 너무 멀리 와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었으리라.
“이정환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입니까?”
그 질문에 혜진은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태산이 잠자코 대답을 기다려 주자 혜진은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고객과 의사로 만났어요. 종합병원급에 취직하려면 스펙도 스펙이지만 외모가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상담을 받고 몇 군데 손도 봤죠.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사귀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고…….”
혜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중년의 성형외과 원장과 20대 초반의 젊은 간호사가 어영부영 내연관계가 되었다니 정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혜진은 그런 시선을 의식한 듯 더듬더듬 해명했다.
“부모님이 제가 어렸을 때 이혼하시고 편모가정에서 자라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어요. 자존감도 낮았고요. 그런데 넌 몇 군데만 손보면 미인이 되겠다고 칭찬도 해주시고, 관심 갖고 돌봐주시고, 여러 가지로 자상하게 살펴주시니 아빠 같아서 좋았어요. 5층짜리 병원 건물 있는 잘나가는 의사라 큰돈 턱턱 쓰는 것도 대단해 보였고요.”
그러니까 대디 이슈가 있는 젊은 처자를 살살 그루밍하다가 결정적으로 재력을 과시해 꼬드겼다는 말일 테다.
“아빠 같은 사람이 프로포폴을 권했다 이 말이군요. 약쟁이들은 절대 자기 가족에게는 약을 권하지 않아요. 그게 얼마나 삶을 망가뜨리는지 잘 아니까. 피의자는 이정환을 부친처럼 생각했을지 몰라도 이정환 쪽은 피의자를 전혀 소중하게 생각지 않은 것 같은데요.”
태산의 신랄한 말에 조혜진은 아픈 표정으로 변명했다.
“자기도 피곤할 때 자주 맞는다면서 권하기에 별생각 없이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프로포폴이 아직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되기 전이라 아무 문제 없었고 지정된 후에는 쉽게 끊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조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끊어지지가 않았어요.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우유 주사 한 대만 맞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노곤하고 개운했어요. 차마 그 맛을 못 잊겠더라고요. 아무런 낙도 없는 현생이 주사 한 대에 천국으로 바뀌는데 그걸 어떻게 포기하나요?”
혜진은 여전히 프로포폴의 마수에 사로잡혀 있는 듯 홀린 것처럼 말했다.
프로로폴은 육체적인 의존성이 거의 없다. 체내에서 빠르게 사라지기 때문에 금단증상이랄 것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진이 말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에 정신적 의존성은 매우 높다. 혜진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직종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타입은 더더욱 중독되기 쉬운 것이다.
“처음에 시작했을 때는 공짜로 놓아주었어요. 말 잘 들은 상이라고 하면서 용돈처럼 줬죠.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된 후에는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면서 돈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원장님이 저한테 싫증을 내고 병원에 새로 들어온 간호사를 눈독 들이면서 자연스럽게 결별하게 되었죠. 근데 원장님은 잊어도 우유 주사 맛은 못 잊겠더라고요. 참고 참다가 찾아가서 사정사정했더니 놔주긴 했는데 가격이 몇 배로 뛰더라고요. 그것마저도 감지덕지했죠. 나중에는 한 대에 오십만 원씩 주고 맞았어요.”
“한 대에 오십만 원이라…….”
태산은 조서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피의자가 진술한 내용과 새론성형외과 측 장부를 종합해 보면 최근 1년간만 해도 100회 이상을 투약했는데요. 대당 오십이라면 최소 오천은 들었단 말인데 그 대금이 다 어디서 났습니까?”
혜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듯 당황해 더듬거렸다.
“그게… 모아놓은 돈도 조금 있었고… 여기저기 빌려서…….”
“10여 년간 프로포폴에 빠져 있었는데 모아놓은 돈이 있었다? 저축은커녕 지금쯤은 빌릴 곳도 더 이상 없을 것 같은데요. 큰 빚이나 없으면 다행이고.”
“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태산의 추궁에 간신히 평정을 찾은 듯했던 혜진은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입술은 파랗게 질렸다. 꽉 움켜쥔 손은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태산은 확신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가 신문은 안에서 하겠습니다. 일어나시죠.”
혜진은 망설이며 주춤주춤 일어섰다.
그때 안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어왔다.
“꼭 집무실에서 추가 신문을 하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안 검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태산이 신문 과정에서 완력을 행사하거나 위협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더욱이 피의자가 여성이라면 고립된 공간에 갇혀 남자 검사의 취조를 받는 상황 자체가 큰 심리적 압박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태산이 불법 강압수사를 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겠다는 각오로 함께 온 안 검사인 만큼 그런 상황이 발생할 여지를 처음부터 확실히 차단할 생각인 것 같다.
“마약 대금을 구하기 위해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여죄를 추궁할 예정입니다. 피의자가 공개적으로 밝히고 싶지 않을 내용이 있을 수도 있으니 프라이버시를 배려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는 것이고요.”
안 검사는 주춤했다. 태산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우 바닥까지 몰리게 되면 성매매로 돈을 구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 경우 직원들이 가득한 방에서 범행을 자백하는 것은 심리적인 거부감이 있을 것이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주임검사와 피의자가 단둘이 담판을 해야 하는 상황은 존재한다.
마약사범이 마약 대금을 벌기 위해 가장 손쉽게 빠지는 일이 판매상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피의자의 경우 성형외과 원장에게 고객을 연결해 주고 그 대가를 받는 식으로 유통에도 가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브로커나 마약사범의 정보도 캐낼 수 있다. 그러한 정보를 모두 털어놓는 대가로 형량 협상을 하려면 듣는 귀가 많아서는 곤란하다.
강력부 출신 두 수사관은 이미 그 상황을 예상한 듯 딴청을 하거나 자리를 피했다. 내심 또 한번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검사라고 흉을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 검사가 망설이는 기색이자 태산은 쓱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안 검사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해요.”
태산은 다시 한발 물러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정 걱정되면 입회하든가요.”
안 검사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누군가 강 검사에게 청부 살인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안 검사도 알게 될 것이다.
딱히 충격을 주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알게 되면 복수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 고집한다면 어쩔 수 없지.
태산이 그런 생각으로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갑자기 조혜진이 당황해서 나섰다.
“괘, 괜찮아요. 자리 옮겨서 얘기할게요. 검사님에게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역시 혜진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피의자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안 검사도 더는 고집할 수 없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물러나는 안 검사다.
태산은 혜진을 집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은 뒤 자리를 권했다. 혜진은 창백한 얼굴로 무너지듯 소파에 기대앉았다. 태산은 혜진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자, 이제 진솔하게 얘기를 한번 나눠볼까요?”
태산은 시간을 끌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강바른 검사를 죽이라고 한 사람이 누굽니까?”
태산의 질문에 혜진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역시 다 알고 계신 거였군요.”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포폴 건은 제대로 처벌받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배후만 확실히 밝혀준다면 살인미수 건은 없던 일로 해줄 수 있어요. 난 수족이 아니라 대가리가 궁금한 거니까.”
태산의 말에 혜진은 화들짝 놀랐다.
“사, 살인미수라뇨? 사주를 받은 것은 사실이고 얼마간 선금을 받기도 했지만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멀쩡히 깨어나신 거고…….”
“아무 짓도 안 한 것이 아니라 미처 못 했는데 내가 먼저 깨어난 거겠죠.”
태산이 비웃듯 말하니 혜진은 파르르 입술을 떨며 입을 다물었다.
“판례상 흉기를 들고 피해자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실행의 착수가 인정됩니다. 꼭 주삿바늘을 찔러 넣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혼수상태로 혼자 누워 있는 환자의 병실에 약물을 지니고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인 행위를 실행한 거죠.”
엄밀히 따지면 혜진은 카트를 밀고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미 깨어난 태산을 보고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실행의 착수가 인정될 것인지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산은 혜진을 압박하기 위해 세게 밀어붙여 본다. 어차피 살인미수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도 살인의 예비죄가 성립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졸지에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혜진은 크게 동요했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결국엔 입을 연다.
“…저도 누군지는 잘 몰라요. 원장님이 소개시켜 준 사람이었어요. 원장님이 더는 저를 직접 만나고 싶지 않다 하시면서 프로포폴을 살 수 있는 사람을 연결시켜 준다고 했어요.”
병원 환자에게만 판 것이 아니라 뒤로 빼돌려서 밀매상에게까지 팔았단 말인가. 태산은 혀를 찼다.
“그 사람이 돈 필요하지 않냐고 하면서… 금방 끝나는 일이라고… 어차피 지금도 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니… 그냥 놔둬도 곧 죽을 거라고… 자비를 베풀어서 고통 없이 먼저 보내준다고 생각하라고… 그런데 말했던 것과 다르게 멀쩡하게 깨서 일어나 있더라고요. 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하마터면 멀쩡한 사람을 죽일 뻔했구나 하고… 그제야 제가 얼마나 미쳐 있었는지 깨달았어요. 그 후로 바로 직장도 옮기고 프로포폴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힘들 때면 자꾸만 생각이 나서 또 빠지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웠어요. 살인도 우습게 여기는 그런 끔찍한 인간이 될까 봐…….”
혜진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짐작 가는 게 있어 태산은 물었다.
“새론성형외과에서 프로포폴을 불법투약 한다는 사실을 검찰에 알린 익명의 제보자가 혹시 조혜진 씨입니까?”
혜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물을 쏟았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검사님. 제가 한 짓에 대해서는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수사에도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저는 그저 약물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미래를 꿈꿀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태산은 복잡한 마음으로 눈물을 쏟는 혜진을 바라보았다. 비록 피의자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마약사범들의 손에 놀아난 피해자이기도 했다. 스스로도 감옥에 갈 수 있음을 각오하고 익명 제보를 했다는 것은 진심으로 중독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비록 강 검사를 죽일 뻔했던 인물이지만 태산은 혜진이 약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프로포폴 중독의 원흉인 성형외과 원장과 밀매업자를 엄벌해야 할 것이다.
* * *
“살인을 사주했다는 그 프로포폴 밀매상에 대해서 얘기를 해봅시다. 신상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잘은 몰라요. 프로포폴만 살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었으니까 알려고도 안 했어요. 이름은 백준용이고 나이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 원장님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 무역업체 사장님이라고 소개를 받았어요. 외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 가지 물품들 수출입하신다고. 업체명은 잘 기억 안 나는데 그때 받은 명함은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혜진에게 알려준 이름이나 업체명은 어차피 가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태산은 재차 물었다.
“외모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나요?”
“예. 여러 번 만났으니까요.”
혜진은 그렇게 답하면서 태산의 눈치를 보았다. 백준용과 여러 차례 프로포폴을 거래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럼 몽타주 한번 만들어보죠.”
태산은 혜진을 집무실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직원들 앞에서 지시했다.
“새론성형외과와 거래를 트고 있는 프로포폴 밀매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에 파악해 낸 사실에 수사관들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황수진 실무관, 인천경찰청에 몽타주 요원 파견 좀 요청해 주세요. 우형진 수사관은 피의자 취조실로 데리고 가서 몽타주 요원 오면 함께 몽타주 작성하는 것 좀 도와주고요.”
“예!”
우 수사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조혜진을 인계해 나갔다. 황 실무관은 급히 전화를 돌린다.
“지금 바로 출발한답니다.”
황 실무관이 전화를 끊고 보고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프로포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밀매상이 있다는 것은 다른 병원 중에서도 밀매상과 거래를 하는 곳이 있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보건복지부와 식약처에 협조 요청해서 제약 회사들의 프로포폴 판매실적을 파악하고 각 병원의 장부와 비교 검토 해 프로포폴을 불법 거래 하는 병원들을 추가로 적발해야 할 것 같군요.”
갑자기 수사 스케일이 엄청나게 커져 버리자 이흥렬 계장이 당황하여 말했다.
“프로포폴이라고 가볍게 봤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작년 한 해 기록만 살펴본다 해도 어마어마하게 방대할 텐데요. 대한민국에 성형외과만 해도 한두 군데가 아닌데. 지금 인력으로 다 들여다볼 수 있을까요?”
직원들 모두 기가 질린 표정이다. 태산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 답했다.
“밀매상의 주요 활동 무대가 인천 일대인 듯하니 일단 수사 범위는 수도권으로 한정 짓도록 하죠.”
안 검사도 의견을 보탰다.
“어차피 종합병원급은 불법으로 의약품을 빼돌리기 힘든 구조입니다. 개인병원 중에서 연간 구매량이 평균을 훌쩍 넘어서는 곳만 추려서 수사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관련 부처에 협조 요청하고 자료 오는 대로 검토 들어갑시다.”
태산의 지시에 하명중 수사관이 어깨를 돌리며 의욕적으로 말했다.
“뭔가 이제 본격적으로 수사 시작하는 느낌인데요?”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우형진 수사관이 프로포폴 밀매업자의 완성된 몽타주를 들고 검사실로 건너왔다.
태산은 책상 위에 놓인 몽타주를 유심히 본다.
나이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인다. 눈썹이 짙고, 눈이 툭 튀어나왔으며 입이 크다.
주위에 몰려들어 몽타주를 들여다보던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흐음… 뭔가… 닮았는데…….”
“그러게요. 왜 눈에 익지?”
“이렇게 생긴 동물 있지 않아요?”
황 실무관이 문득 중얼거린다.
“…두꺼비…….”
“아아~”
직원들이 깨달음의 환성을 올린다.
“이름 백준용, 아마도 가명일 테니 당분간 두꺼비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겠네요.”
태산이 덧붙인 말에 이 계장이 바로 물었다.
“두꺼비 바로 수배하시겠습니까?”
“지금 바로는 안 되죠. 프로포폴 수사 들어간 게 알려지면 불법 거래 하던 병의원들 다 증거인멸 하려고 들 겁니다. 증거가 어느 정도 확보되면 그때 수배하도록 하죠.”
태산의 말에 직원들은 잠정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새론 성형외과 이정훈 원장의 신문이 이어졌다.
“새론 성형외과에서 제출한 장부에 의하면 지난 한 해 구입한 프로포폴이 총 30리터가량이군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거 이상하군요. 새론에 의약품을 납품하고 있는 의약품 도매상의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기간 새론에 판매한 프로포폴 물량이 100리터에 달하는데요.”
“예, 예? 그럴 리가요.”
태산은 의약품 도매상의 결산보고서를 이정훈 앞에 놓고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여기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데요. 1000 앰플, 100리터.”
“뭐,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정훈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의약품 도매상에서 결산을 부풀리기 위해 조작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태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조작이라면 도매상보다는 병원 쪽에서 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도매상 영업부장이랑 대질을 한번 해보죠. 난 뻔히 드러날 범행을 두고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제일 싫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공연한 시간 낭비를 시키니까요. 거짓이 드러나면 할 수 있는 한 중형을 구형하는 게 내 방침이에요. 그건 감안하시고… 이 계장님? 신독약품 영업부장 당장 호출해 주세요!”
구형이 더 무거워질 수 있다는 경고에 이정훈은 급격히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깐만요. 제가 좀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대외적인 공식 장부에는 30리터로 표시했지만 실제 구입량은 비밀 장부에 따로 기입을 하고 있어서…….”
“비밀 장부라… 지금 어디 있죠?”
“제 노트북에 있습니다.”
“당장 임의제출 하세요.”
“지금 말입니까?”
당황하며 되묻는 이정훈에게 태산은 머리 뒤로 손깍지를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여유 있게 답했다.
“기다릴 시간은 많습니다. 덕분에 검토해야 할 자료가 산더미라 읽으면서 기다리면 되니까요.”
“그, 그럼 전화를 좀…….”
이정훈은 검사실 전화를 빌려 병원으로 연락했다.
“어, 나야. 원장실 책상 맨 아래 서랍에 보면 내 서브 노트북이 있을 거야. 그거 지금 좀 인천지검으로 가져다줘. 어, 611호실.”
노트북이 도착할 때까지 이정훈은 쩔쩔매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직원들은 빠르게 기록들을 검토해 나가며 분주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척 보기에도 앳되어 보이는 여성이 종이 백에 담긴 노트북을 가지고 도착했다. 아마 간호사나 직원일 것이다. 조혜진의 진술을 돌이켜 보았을 때 이 처자도 이정훈의 마수에 걸린 내연녀일지도 모르겠다고 태산은 생각했다.
여자는 원장에게 힐끔거리며 눈인사를 하고는 종이 백을 건넸다. 그러고는 잽싸게 검사실을 빠져나갔다. 혹시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 두려운 것이리라.
태산은 종이 백을 손에 든 채 망설이고 있는 이정훈을 채근했다.
“열어봐요.”
이정훈은 노트북을 꺼내 실행시키고 장부 파일을 찾아 넣었다. 이정훈의 등 뒤에서 그것을 유심히 보고 있던 태산이 노트북을 빼앗아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빠르게 눈을 굴리며 프로포폴 매입 매출 내역을 훑어보던 태산의 입꼬리가 씨익 비틀려 올라간다.
“다 합산해 봐도 60리터밖에 안 되는데? 나머지 40리터는 어디로 증발한 겁니까?”
“아, 그게… 제가 직접 관리하는 것이라… 가끔은 계산 착오도 있고…….”
태산은 콧방귀를 뀌고는 백준용의 몽타주를 꺼내 이정훈의 앞에 들이밀었다. 이정훈의 눈이 흡 하고 크게 떠진다.
“팔았지요? 이자에게.”
백준용의 몽타주까지 나오자 이정훈은 자포자기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40리터면 10밀리리터짜리 앰플로 400개 분량인데… 얼마에 팔았습니까?”
“앰플당 30만 원에 팔았습니다.”
“원가 만 원짜리를 30만 원에? 어마어마한 폭리군.”
태산이 어처구니없어하며 중얼거리자 이정훈은 억울하다는 듯 변명했다.
“병원에서 고객한테 팔면 50만 원까지도 받을 수 있어요. 좀 싸게 넘겨도 한 번에 많이 사준다니까 넘긴 건데…….”
태산이 노려보자 이정훈은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태산은 노트북을 닫아 이 계장에게 넘겨주었다.
“증거 확보하세요.”
그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놓아둔 몽타주를 이정훈 쪽으로 밀어놓는다.
“이번엔 이자에 대해서 얘길 좀 해봅시다. 두꺼비처럼 생긴 이 프로포폴 밀매상. 알고 있는 것 다 털어놔 봐요.”
“정보를 드리면 정상참작 해주시는 겁니까?”
이정훈이 간을 보며 눈치를 살피자 태산의 눈이 금세 날카로워졌다.
“당신이 지금 나한테 협상을 시도할 입장이 아닐 텐데?”
이정훈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태산이 계속 노려보고 있으니 우물쭈물 입을 연다.
“이름은 백준용이고 삼전무역상사라는 회사 사장입니다. 골프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수출입하는 물품은 여러 가지인데 개중에는 합법적으로 들여오는 것도 있지만 불법으로 들여오는 것도 있는 눈치고요.”
“밀수도 하고 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동남아 출장을 자주 가는 것 같았어요. 필리핀을 다녀왔다, 대만으로 나가야 한다, 홍콩에서 막 들어왔다 그런 얘기를 종종 했습니다.”
“프로포폴 거래를 하게 된 계기는?”
“제가 성형외과 원장인 것을 알고 병원에서는 마약류 의약품을 다루지 않느냐, 남는 게 있으면 값을 잘 쳐줄 테니 넘기라고 부추겼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었는데 진료기록부와 장부를 잘 고치면 어렵지 않다고 재차 권해서 혹하는 바람에…….”
이정훈 역시 두꺼비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신문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태산은 두꺼비의 몽타주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대포 폰으로 사진을 찍어 범진에게 전송했다.
[동남아 일대에서 활동하는 밀수업자다. 예전에 우리랑 거래했었던 현지 업자들한테 수소문해 봐라.]
수배는 아직 할 수 없다 해도 개인적으로 추적해 보는 것은 상관없을 것이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온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시간 되실 때 사무실로 한번 나와주십시오. 암호 파일 거의 푼 것 같습니다.]
태산은 시계를 흘낏 본다. 퇴근 시간은 이미 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태산건설 사무실을 방문하려면 조금 더 늦은 시간이 나을 것이다.
[오늘 밤 11시. 일 좀 마무리해 놓고 가마.]
태산은 그렇게 답을 보내고 수사 자료를 집어 들었다.
밤 11시가 다가오자 태산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검사실로 나가보니 다른 직원들은 다 퇴근했는데 안소영 검사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 퇴근 안 했습니까?”
안 검사는 시계를 흘낏 보더니 급히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지금 막 퇴근하려는 중이었습니다.”
“한번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타입이죠?”
태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검사님도 퇴근이 늦으셨네요. 아직 안 나가시기에 저도 시간이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몰랐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기다리는 김에 겸사겸사 일을 좀 했죠.”
“이렇게 늦은 시간에요?”
안 검사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친구도 워낙 바빠서 말이죠.”
태산은 대충 얼버무리며 안 검사가 퇴근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코트를 챙겨 나서는 안 검사와 함께 주차장까지 가며 둘은 별말이 없었다.
안 검사의 차 앞에 먼저 도착하자 안 검사는 걸음을 멈추고 태산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래요. 안 검사도 조심해서 들어가요.”
태산은 그대로 돌아서려다 야근으로 고생했는데 좀 더 살가운 인사를 건네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첫 사건부터 일을 너무 크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꼭 해야 할 일인데요.”
안 검사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느끼고 노력을 다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일을 좋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검사가 법을 모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