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국면 전환
송년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태산은 비로소 바지 주머니에 있던 USB를 꺼내 들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컴퓨터에 USB를 꽂아보았지만 열린 폴더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태산은 미간을 모으며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설마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USB를 그렇게 은밀히 숨겨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지만 컴퓨터라고 하면 ‘컴’ 자도 모르다가 검찰청 서류작업을 하느라 문서프로그램만 간신히 배워서 사용하고 있는 태산이 손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태산은 팔짱을 낀 채 끙 하고 고민했다. 그러고는 다시 USB를 빼서 챙겼다. 아무래도 자신이 항상 몸 가까이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 USB를 넣어둔 후 태산은 대포 폰을 꺼내 들었다.
“범진아, 잠깐 보자.”
범진과 통화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피스텔 벨이 울렸다. 태산은 당연히 범진이리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빨리 왔구나.”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태산은 잠깐 움찔했다. 눈앞에 전혀 다른 모습의 범진이 서 있었던 것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이었던 범진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잘려 있었다. 심지어 안경까지 쓰고 있다.
터틀넥 니트에 재킷을 걸치고 가는 검은색 금속 테 안경을 쓴 범진은 조폭이라기보다 인텔리의 풍모를 풍기는 젊은 사업가나 예민한 예술가처럼 보였다. 안경으로 가려져서인지 눈빛도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이 정도면 미친놈 같은 섬뜩한 눈빛이 아니라 신경질적인 고뇌 정도로 보일 수도 있겠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에 태산이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으니 범진은 먼저 현관으로 발을 들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형님?”
범진은 인사와 함께 위스키가 든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연말이기도 하고 마침 좋은 술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조금 쑥스러운 듯 웃는 범진의 모습은 멜로드라마의 젠틀한 남자주인공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남주까지는 아니라도 서브남주 정도로는 봐줄 법했다.
이것이 정말 미친개라고 불리던 고독한 칼잡이 범진이란 말인가? 태산은 어처구니가 없어 중얼거렸다.
“김범진 너 이 자식… 되게 낯설다?”
그제야 범진은 태산이 자신의 바뀐 외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채고 당황해 뒷머리를 긁었다.
“형님을 대신해 회사를 대표하는 자리에 서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사업으로 운영한다는 게 형님 뜻이셨고. 그래서 저도 사업가다운 모습을 갖추려다 보니…….”
범진은 그렇게 설명하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안 어울립니까?”
태산은 피식 웃어버렸다.
“이제 좀 사람 같아 보이네.”
“전엔 아니었습니까?”
“항상 굶주린 짐승 같아 보였지.”
태산과 범진은 식탁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태산은 수석검사로 승진해 마약전담반으로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USB를 발견한 경위를 범진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 줄 기술자가 필요해. 적당한 놈 없냐?”
범진은 곰곰이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나 있긴 합니다만…….”
말을 꺼내기 망설이는 기색이라 태산은 눈으로 채근했다. 범진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게… 박중성 이사 쪽 사람입니다. 예전에 형님이 싹 소탕하셨던 박 이사 산하의 인터넷 도박 조직 말입니다. 그 시스템을 그놈이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같이 잡혀 들어가 짧게 살고 나왔는데 박 이사 쪽에서 혈안이 되어 찾고 있답니다.”
“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송일권이라고 하는 놈인데 잘 피해 다니고 있는지 아직 잡혔다는 얘기는 없고요.”
“송일권?”
익숙한 이름에 태산은 눈을 크게 떴다.
“예, 아시는 놈입니까?”
범진이 어리둥절해 되물었다. 태산은 대답 대신 비린 웃음을 머금었다.
‘이놈 봐라?’
살인미수로 집어넣겠다고 협박해서 도박 조직의 정보를 캐냈던 노랑머리 피의자의 이름이 바로 송일권이었다.
단순히 센터 관리자인 척 의뭉을 떨더니 시스템 설계부터 맡아서 했던 핵심 인물이었단 말이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정보를 넘겨주었다 해도 그렇게 가볍게 구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찾아내라. 박중성이 애들보다 먼저.”
“예.”
범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태산이 다시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너, 박 이사 쪽 사정을 꽤 잘 알고 있구나.”
범진은 뜨끔했다. 박중성 이사가 마약 사업에 발을 들였다는 확신이 생긴 이후로 태산에게는 알리지 않고 박 이사 쪽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태산이 마약전담반으로 옮긴 이상 이웅배 회장이 박중성 이사에게 지시해 마약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시간문제겠지만 범진은 아직 그 사실을 태산에게 밝힐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유를 댄다.
“저는 형님을 그렇게 만든 놈이 박 이사 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꼭 밝혀내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계속 감시하고 있는 겁니다.”
“복수는 내가 하겠다는데도…….”
태산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래도 범진을 바라보는 눈은 따뜻했다. 범진도 그윽하게 태산을 마주 보았다.
“형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뭐가 말이냐?”
“반년도 넘게 감쪽같이 검사로 지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정말 어엿한 검사로 보이십니다.”
“세상에 이렇게 잘난 검사가 어디 있냐?”
태산은 농담을 섞으며 훗 웃었다.
“사실 나도 몰랐다. 정신병원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검찰에 완전히 적응도 하셨고 승진해서 부서도 옮기시니… 이제는 그만 그 세계로 넘어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태산은 범진의 진의를 알 수 없어 미간을 모았다.
“하늘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것도 이유가 있을 테지요. 이왕 이렇게 된 것 조직 일은 잊으시고, 복수도 잊으시고 강바른 검사로서 새 인생을 사시는 겁니다. 저는 압니다. 형님은 큰일을 하실 분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가실 겁니다. 그러려면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과감히 떠나는 용단을 내리실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말을 다른 놈에게 들었다면 그 저의를 의심했을 것이다. 태산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직을 온전히 차지하려는 꿍꿍이가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범진은 몹시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내고 싶지 않지만 진심으로 태산을 위해서 하는 이야기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형님의 복수는 제가 반드시 하겠습니다. 그러니 미련 없이…….”
태산은 손을 휘휘 저어 범진의 말을 중단시켰다.
“니 뜻은 알았으니 더 말할 것 없다. 복수는 내가 해. 그에 대해서는 더 토 달지 마라. 나와 재호의 복수, 그리고 강바른 검사의 복수를 할 때까지는 떠날 생각 없다.”
“그럼 복수가 끝나면 떠나시겠습니까?”
무얼 그렇게 쓸쓸한 표정으로 묻는 것일까? 그런 매달리는 얼굴을 하면서 떠나라는 말을 진심으로 들으란 말인가?
“범진아, 세상에 내가 임태산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너뿐이다. 내가 널 두고 어딜 가겠냐?”
“형님…….”
태산은 범진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같이 옛날이야기 하며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는 놈도 이젠 너뿐이다. 너야말로 어디 가지 마라.”
“예, 형님!”
범진은 훨씬 후련한 얼굴로 잔을 받아 한번에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놓은 뒤 밝게 웃었다. 태산은 흠칫 놀라 물러났다.
“야, 야. 그 얼굴 치워라. 누구냐, 너? 미친개 범진이 다시 데려와.”
“제가 할 말입니다. 형님이야말로 얼굴 크기가 예전의 절반이 되셨잖습니까? 그야말로 태산 같으셨던 형님이 모델 라인이라니요.”
태산과 범진은 낄낄 웃으며 잔을 나누었다. 비록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서로의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형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 * *
“어휴, 이 병신이 2시 방향이랑 10시 방향을 헷갈려 하고 있네.”
일권은 피시방 구석에 앉아 게임을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와룡회 조직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고 있다고 했다. 한동안 숨어 있으면 좀 나아질까 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최근에 자신의 거취를 캐고 다니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었다.
피시방과 모텔과 찜질방을 전전하며 계속 옮겨 다니고 있었지만 언제 이 생활이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로 몸과 정신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었다.
피시방에 있을 때도 출입구나 비상구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고 항상 모자나 후드를 눌러쓴 채였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하는 게임도 너무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언제라도 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피 생활이 길어지고 체력이 약해지니 점차 주의가 흩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등 뒤까지 바싹 다가온 상대의 기척을 인지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등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에 일권은 어깨를 움찔 움츠리고는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를 알아본 일권은 눈을 흡 떴다.
얼마 전 호되게 덴 바로 그 미친 검사였다. 살인미수로 집어넣겠다고 협박해서 정보를 뜯어낸 다음 와룡회의 인터넷 도박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켜 버린 장본인, 인천지검 형사3부 강바른 검사.
일권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딴청을 하다가 그대로 비상구를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후드 뒷덜미를 덥석 잡혔다.
일권은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껏 팔다리를 내지르고 버둥거렸다. 평균 이상의 키에 그리 작지 않은 체구라 자부하는 일권이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발버둥 칠수록 발이 점점 공중으로 떠올라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일권은 이내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흘낏 돌아보니 강 검사가 가소롭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의 목덜미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그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참 볼품없었다.
“내려줘요. 내 발로 갈게요.”
강 검사가 손을 놓아주자 일권은 순순히 강 검사를 뒤따랐다. 마인드도 미친놈이고 힘도 미친놈처럼 세니 저항하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 싶었다. 검사에게 잡히는 게 조폭들에게 잡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강 검사는 일권을 주차장으로 데리고 가 차에 태웠다.
“오랜만이다, 노랑머리.”
도피하는 동안 제대로 염색을 하지 못해 일권의 머리는 뿌리가 검게 올라오고 끝만 노랬지만 강 검사는 여전히 일권을 노랑머리라고 불렀다.
“용건이 뭡니까?”
“어디 가서 얘기 좀 하자.”
“어딜요?”
“닥치고 따라와.”
강 검사는 차를 몰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일권은 조수석에 앉아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차가 어느새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내려.”
태산의 명령에 일권은 흘낏 창밖을 내다보았다가 태산건설의 간판을 보고 기함을 했다.
“여, 여긴 와룡회 소유 회사잖아요!”
“누가 아니래냐? 내려!”
“검사님, 절 와룡회에 넘겨주실 셈이세요? 왜 그러시는 건데요? 아, 제가 그 도박 사이트 설계한 프로그래머인 거 얘기 안 해서 화나신 거예요? 저도 살아야 하니까 제가 지은 죄를 솔직히 다 밝힐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도 전 최선을 다해 협조해 드렸고…….”
“이 새끼가 이제야 실토하네.”
강 검사는 일권의 말을 한마디로 자르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됐으니까 내려. 여기가 제일 안전해서 데려온 거니까.”
“예?”
일권은 얼떨떨해 멍하니 입을 벌렸다.
* * *
일권은 키보드를 한동안 두드려 보더니 말했다.
“역시 비어 있는 USB는 아니었네요.”
일권이 살짝 비켜 앉으며 모니터를 보여주었다. 폴더 안에는 파일이 빽빽이 들어 있었다. 태산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내용은?”
일권은 또 한참 컴퓨터를 두드려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꽤 정교하게 암호화되어 있는 파일인데요. 이건 금방은 안 될 거 같은데…….”
“니가 할 수는 있고?”
“하긴 하죠. 시간만 있으면.”
“그래, 좋아. 그럼 여기 숨어서 계속 작업해.”
“예에?”
일권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태산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태산건설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빌딩의 구석진 방이었다. 컴퓨터가 한 대 들어와 있을 뿐 다른 비품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콘크리트 냄새가 풍기고 구석에는 먼지가 굴러다녔다. 여기저기 배관이 드러난 곳도 있었다. 아마도 창고 같은 것으로 쓰던 자투리 공간인 듯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긴 WB 홀딩스 계열사라고요. WB 홀딩스가 와룡회에서 운영하는 회사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에요. 여기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입이 바짝바짝 타는데 지금 호랑이 아가리 속에서 일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태산이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 거냐? 박중성이가 왜 널 찾고 있지? 설마 밀고한 게 너라는 걸 들킨 건가?”
일권은 콧방귀를 뀌며 볼멘소리를 했다.
“협박할 때는 증인 보호를 해주겠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시더니 지금은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네요. 보호 안 해주시는 바람에 완전 진땀 뺐다고요. 단순 도박장 관리자로 행세해서 일찍 나왔다고 둘러대서 간신히 모면하긴 했지만.”
“그걸 믿던가?”
“실제로 그러기도 했잖아요. 도박 사이트 프로그래머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중형을 면치 못할 텐데 제 입으로 밀고를 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겠죠.”
태산은 하!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식했다. 아무튼 잔머리 하나는 비상한 놈이다.
“그게 아니면 대체 뭐 때문에 쫓아다니는 거야?”
일권은 잠시 눈을 굴리며 망설였다.
“박중성이한테 연락할까?”
태산이 핸드폰을 꺼내는 시늉을 하자마자 일권이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새 일을 맡아달래요.”
“무슨 일인데?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다시 만들려는 건가?”
“그쪽은 이제 아예 관심 끈 거 같던데요. 다시 시작한다 해도 지금은 아닐걸요.”
“그럼?”
“다크웹에 거래 사이트를 만들고 관리까지 해달라고 했어요.”
다크웹이라는 말에 태산의 눈이 커진다.
“설마… 약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일권이 단번에 듣고 확인 사살 했다.
“그럼 뭐 권총이라도 팔까 봐요?”
태산은 충격을 먹고 입을 닫았다. 그동안 완강히 믿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 차마 믿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드러내고 있었다.
태산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일권은 멋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가 아무리 막장이라도 약은 좀 아니잖아요. 그것만은 차마 할 수 없었어요. 잡혀가면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계속 도망 다녔던 거예요.”
태산은 일권을 새삼 다시 보았다.
사람 장사, 약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웅배 회장과 자신이 약속한 원칙이었다. 형님이 그 약속을 어겼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는 이 청년이 어쩐지 살갑게 느껴졌다. 문득 USB 분석이라는 목적이 없어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말했듯이 여기 있는 게 제일 안전해. 등잔 밑이 어둡기도 하고. 같은 와룡회라지만 박중성과 임태산은 예전부터 경쟁 관계였어. 그러니 더욱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지. 여기까지 쳐들어와서 널 잡아간다는 건 전면전 선포나 마찬가지야. 전쟁을 감수할 만큼 니가 박중성이에게 큰 가치가 있을 것 같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권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비상구 옆에 은밀하게 자리 잡은 이곳 출입구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딱히 주의를 주지 않을 법한 장소다.
여기에 조용히 박혀 있으면 태산건설 관계자조차도 쉽게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되는 도피 생활로 잔뜩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쾌적하지는 않은 장소라 해도 잠시 머물며 쉬기에는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매트리스라도 하나 가져다 놓으면 훨씬 지내기 좋을 것이다.
일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괜찮을 것 같네요.”
“잘 생각했다. 여기 대표가 보살펴 줄 테니 나돌아 다니지 말고 잘 숨어 있어라. 암호 풀리는 대로 바로 연락하고.”
그대로 나가려는 태산에게 일권이 슬쩍 물어보았다.
“근데 여기 대표랑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박중성 이사 쪽 도박 조직에서 일할 때 소문으로 들은 바로는 임태산 대표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고 그 밑에 있던 중간 보스가 누더기가 된 회사를 맡았다고 했다. 듣기론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라고 하던데.
대체 그런 놈과 현직 검사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암암리에 서로 손을 잡은 것일까? 스폰서 검사라든가 그런 건가?
“내 아우다.”
태산이 짧게 대답하고 그대로 문을 나갔다. 남은 일권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 친척이었나?”
하긴 피의자를 살인미수로 집어넣겠다고 협박이나 하는 미친 검사니 조폭과 혈연관계라는 것도 썩 어울리는 것 같긴 하다.
* * *
태산이 620호 회의실로 들어섰을 때 자리에는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까까머리에 무뚝뚝한 인상, 청바지에 점퍼 차림의 사내였다. 인상으로 봐서는 형사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마약전담반에 배치받은 수사관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하며 태산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강바른 검사입니다. 다른 분들은 아직인가요?”
남자는 턱을 괸 채 물끄러미 태산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답했다.
“배 부장님은 조금 이따가 오신답니다.”
태산은 남자가 자기소개를 하길 기다렸지만 남자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태산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
‘이 자식은 인사를 못 하나? 목이 부러졌나?’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보통 사법수사관들은 검사와 상명하복 관계이므로 나이나 직급에 관계없이 대체로 검사들에게는 깍듯하게 대한다. 그런데 이 자식은 뭐가 이렇게 뻣뻣한 거지?
그때 회의실 문을 열고 안소영 검사가 들어섰다.
“와계셨습니까? 제가 늦었나요?”
안 검사가 태산을 보고 인사를 했다.
“아니오. 나도 금방 왔습니다.”
태산이 인사를 받고 돌아서는데 방에 있던 사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길고 가는 눈이 한껏 크게 떠지고 볼에는 발그레하게 홍조가 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탁자 위에 놓은 서류뭉치를 이리저리 들춰보는 척하는 것이다.
‘뭐지? 이 신선한 반응은?’
태산이 당황하고 있는데 안 검사가 눈짓으로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예요?’
태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누가 봐도 강력부 형사의 거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들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수사관들임을 알 수 있었다.
“새로 오신 검사님들이신가요?”
수사관들은 그렇게 말하며 태산과 안 검사를 향해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하지만 제대로 인사를 다 나누기도 전에 돌아서 가장 먼저 와 있던 사내와 하이 파이브를 나누고는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잡담을 나누었다.
태산은 미간을 모은다.
강력부 소속이라지만 마약전담반은 새로 구성되는 조직이었다. 자신들도 새롭게 부임해 온 처지에 태산과 안 검사에게만 새로 온 검사라고 선을 긋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이흥렬 계장과 황수진 실무관이 도착한 후에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사관들은 새로 온 이들을 소 닭 보듯 하며 자기들끼리만 뭉쳐 있었다. 자리에 넘을 수 없는 선이라도 그어진 것 같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마침내 배진만 부부장이 도착했다.
“다들 모여 있었구먼. 이제 한식구가 되었으니 인사부터 나누지.”
배 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소개부터 했다.
“나는 마약전담반 반장을 맡게 된 배진만 부부장이네. 그리고…….”
배 부장의 시선이 태산에게 와 닿았다.
“자네가 형사3부의 강바른 검사지? 장 부장에게는 얘기 많이 들었네.”
배 부장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얼굴을 보아하니 장 부장이 그저 좋은 말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자네가 연차로 보면 마약전담반 수석이 되네. 잘 리드해 주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 부장이 이번에는 회의실에 처음 와 있던 까까머리 사내 쪽을 쳐다보았다.
“이쪽은 강력부의 구태호 검사네.”
사내가 슬그머니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인다.
‘검사였어?’
수사관이라고만 생각했던 태산은 깜짝 놀랐다. 그 기색을 배 부장이 눈치채고 쓴웃음 섞어 설명했다.
“검사처럼 보이지는 않지? 계속 강력부에서 수사관들과 구르면서 한솥밥을 먹다 보니 구 검사도 형사 다 됐지.”
배 부장의 설명에 수사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쪽은 형사3부의 안소영 검사.”
안 검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수사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안 검사를 훑고 간다. 결코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구 검사만이 안 검사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귀를 붉힐 따름이다.
검사들의 소개가 끝나자 수사관과 실무관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가장 연장자인 이흥렬 계장이 먼저 인사를 시작했다.
“이흥렬 계장입니다.”
“황수진 실무관입니다.”
형사3부 출신들이 인사를 마치자 강력부 출신들의 인사가 이어진다. 이 계장보다는 나이가 적은 듯했지만 강력부 출신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수사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기성 주임입니다.”
“신용수입니다.”
“박경구입니다.”
“하명중입니다.”
“우형진입니다.”
“김진 실무관입니다.”
수사관이라고 생각했던 이들 중에 한 명은 실무관이었다. 강력부에서 차출된 인원은 검사부터 수사관에서 실무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남성인 극한의 남초였던 것이다.
인사가 끝나자 배 부장이 일장 연설로 출사표를 던졌다.
“원래 전통적으로 히로뽕은 부산이 중심이고, 인천은 프로포폴 등 그 외의 기타 마약류가 중심이었네. 그런데 최근 국내 필로폰 유통량이 크게 늘어났는데 거점이 인천이라는 첩보가 다수 있었어. 바로 그것이 우리 부서가 생겨난 이유네. 국내 마약사범을 근절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임하도록 하세.”
비장하게 말하던 배 부장이 돌연 미소를 띠었다.
“딱딱한 소리는 이만하고. 배치표를 봐서 알겠지만 마약전담반 전체가 들어갈 만큼 큰 사무실도 없고 해서 팀을 둘로 나눴네. 610호실은 나와 구 검사가, 611호실은 강 검사와 안 검사가 함께 사용할 거야. 검사실당 수사관 3명, 실무관 1명을 배정했네. 강 검사실은 기존에 함께 일했던 두 사람을 그대로 데려가고 추가로 수사관 2명을 더 보냈어. 혈기 왕성한 강력부 막내 둘을 보냈으니 전력이 될 걸세.”
배 부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이 마냥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막내들을 보냈다는 것은 경험이 많고 노련한 수사관들을 배 부장이 쥐고 있겠다는 이야기였다. 강 검사실을 노골적으로 B팀으로 취급하고 수사는 A팀 위주로 하겠다는 계획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한 사무실에 여섯이 북적대면 다소 좁은 감이 있겠지만 감수하는 수밖에.”
배 부장이 한탄하듯 꺼내놓은 불평에 강력부에서 온 수사관들이 다투어 투덜댔다.
“아니, 그렇게 우리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지원이 이게 뭡니까? 최소한 검사 한 명당 사무실 하나는 내줘야죠.”
“그러게요.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사명감 하나로 일하라니. 못 해먹겠네요.”
투덜대는 수사관들의 어투에는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격의가 없었다. 험한 부서에서 함께 일해온 사내들의 끈끈한 연대가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이들을 튕겨낼 정도로.
이 소외감의 정체가 무엇일까 태산은 가만히 고민했다.
* * *
611호실의 검사 집무실을 수석인 태산이 차지하여 안 검사는 수습 시절처럼 직원들과 함께 오픈된 사무실을 쓰게 되었다.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태산은 그것이 어쩐지 미안해 안 검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리가 불편하겠지만 이해해 줘요.”
“전 괜찮습니다. 주변 소음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편이라.”
안 검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라 태산도 조금 마음을 덜었다.
태산이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리가 정리되는 대로 같이 점심 먹으러 나가죠.”
태산의 말에 611호로 배정받은 하명중, 우형진 수사관이 쭈뼛거리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하 수사관이 슬그머니 손을 든다.
“저희는 강력부 선배님들이랑 같이 먹기로 해서…….”
“아, 그렇습니까?”
또 한번 싸한 느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약전담반에서 506호 검사실 식구들만 마치 물에 기름 뜨듯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이 분위기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태산은 당장 같이 밥을 먹자고 고집하지는 않았다.
사무실 정리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배진만 부장이 611호실로 찾아왔다.
“대충 정리됐으면 다 같이 나가지.”
아마도 부장이 앞장서 분위기를 유화하기 위해 같이 식사할 자리를 마련했나 보다.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배 부장을 따라나섰다.
배 부장이 팀을 끌고 간 곳은 돼지 껍데기에 소주를 파는 술집이었다. 가게 앞에서 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태산이 배 부장을 향해 물었다.
“대낮부터 말입니까?”
“첫날이라 오늘은 일도 없는데 조금 일찍 끝내면 어떤가?”
배 부장은 그렇게 말해놓고 먼저 가게로 들어섰다.
첫날이라 일이 없다는 배 부장의 말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전담반이 처음 구성되긴 했지만 강력반에서 인계받은 마약 관련 사건이 산더미였다. 게다가 전담반까지 꾸린 만큼 경찰이 송치하는 사건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뛰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직접 범죄를 인지하는 활동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조직에서 내놨다고 너무 태평한 것 아닌가. 태산은 내심 투덜대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강력반 출신들은 익숙한 상황인지 아무렇지 않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배 부장이 시킨 소주를 신나게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낮술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소주가 돌아서 황수진 실무관 앞에까지 오자 황 실무관은 곤란해하며 손을 저었다.
“저는 이 시간에 술 마시는 건 좀 부담스러운데요.”
황 실무관의 말에 수사관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렇지. 여성분들은 빼야죠.”
“그래, 이 시간에 여자들한테 술을 먹일 순 없지.”
그러면서 황 실무관의 옆에 앉은 안 검사도 그대로 뛰어넘으려고 한다. 안 검사가 눈썹을 치뜨더니 소주병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잔에 술을 따라 단번에 원샷 해버린다.
수사관들이 오오~ 하고 환호성을 울렸다. 하지만 경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우습게 보는 투가 역력했다.
안 검사는 잔을 탁 하니 내려놓고 말했다.
“여자라서가 아닙니다. 술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요. 하지만 업무 시간에 모여서 낮술을 마시는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안 검사가 자신들의 분위기에 맞춰주려는 줄 착각했던 수사관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자기들끼리 눈을 맞추며 고개를 젓는다.
“역시 강력부 경험이 없으신 분들은 잘 모르시네요.”
‘역시?’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에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안 검사 역시 화를 꾹 참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형사3부에서는 강력사건도 담당했습니다.”
“그래도 강력부에서 일하는 것과는 좀 다르죠. 우린 내내 조폭이나 약쟁이들만 상대하거든. 그래서 일이 좀 거칠고 들쭉날쭉해요. 출퇴근 시간 칼같이 지키면서 일 못 하지. 이렇게 일찍 나오는 날이 있으면 철야를 밥 먹듯 하고 그런 날도 있는 거예요.”
전기성 주임이 젠체하며 설명하더니 혀를 차며 슬쩍 덧붙였다.
“사람이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서 어떻게 같이 일을 합니까?”
“뭐라고요?!”
아무래도 수사관이 안 검사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 안 검사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듯 몸을 일으켰다. 태산이 얼른 팔을 뻗어 안 검사를 잡았다. 안 검사는 씩씩거리면서도 화를 꾹 누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수사관들은 ‘그래 봤자 어쩔 테냐’라는 표정으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그 태도를 보고 있으니 태산은 가슴에서 무언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지들이 조폭을 상대해 봤자 얼마나 했다고. 나만큼 조폭에 대해서 잘 알아?’
태산은 수사관들을 향해 비아냥 섞어 말했다.
“아~ 그래서입니까? 강력부 출신들이 형사3부 출신들에게 대놓고 뻣뻣한 것이? 그런 가소로운 유세 때문이었나요?”
“뭐, 뭣? 가소롭……?”
전 주임이 발끈해서 몸을 일으키자 다른 수사관들이 바로 주저앉힌다. 하지만 주저앉히는 쪽도 눈치가 좋지는 않다. 신용수 수사관이 떨떠름한 태도로 한마디 던진다.
“유세라뇨? 말씀을 참 이상하게 하시네요.”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하건만 배 부장은 술잔을 기울이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구경만 하고 있다. 대신 구태호 검사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검사가 됐을 때 말입니다. 저는 변한 것이 없는데 주변에서 자꾸 변했다고 하더란 말입니다. 어른을 봐도 인사도 잘 안 하고 뚱하니 말도 잘 안 한다고. 근데 저는 그냥 원래 그런 놈이거든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의아한 것은 수사관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들 뜨악한 표정으로 구 검사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그렇게 일해왔고 원래 그런 놈들이에요. 그걸 유세 떤다고 생각하는 건 그쪽의 과민 반응인 것 같고…….”
수석검사를 그쪽이라고 부르고 있으면서 과민 반응이라고? 태산은 눈썹을 치켜떴지만 구 검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흘낏 안 검사의 안색을 살폈다.
“솔직히 이렇게 가녀린 여검사분까지 같이 오시면 우리로서는 과연 험한 강력부 일을 버텨낼 수 있을까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안 검사는 기가 막혀 탄식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안 검사 대신 태산이 맞받아쳤다.
“안 검사가 그렇게 가녀린 사람도 아니지만 강력부 출신이라고 해서 딱히 터프해 보이지는 않는데 말로만 센 척하는 거 아닙니까? 안 검사까지 갈 것도 없이 당신들, 나 하나도 감당 못 할 것 같은데?”
“다, 당신드을?!”
전 주임이 이번에는 숫제 뒷머리를 잡으며 벌떡 일어난다. 강력부 수사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따라 일어서며 도끼눈을 떴다.
태산도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노려보았다.
“이 친구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구먼.”
이흥렬 계장이 나이를 어필하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황 실무관도, 안 검사도 따라 일어서며 대치했다.
수로는 형사3부 출신들이 열세였지만 장신에 체구가 좋은 태산이 버티고 있으니 양측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던 배 부장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같은 팀끼리 패싸움이라도 할 셈인가? 황 실무관, 그만 됐으니까 그 소주병 내려놔요.”
혹시 싸움이 붙으면 체력의 열세를 만회하려 슬그머니 소줏병을 집어 들던 황 실무관이 흠칫해서 손을 거두었다.
“아무튼 사내들은 희한한 걸로 서열을 잡고 힘겨루기를 하려고 해서 문제야. 뭐 그래도 한번 풀고 갈 필요는 있겠지.”
배 부장은 이미 술이 상당히 된 듯 흥겹게 잔을 들었다.
“오늘 첫 회식 여흥으로 팔씨름 한판 어떤가?”
배 부장 옆에 멍하니 앉아 있던 구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뭐야, 이 자식은? 남 얘긴가? 구경났냐?’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구 검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강력부 출신 수사관들은 반색했다.
“좋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그럼 우리는 누가 대표로 나갈까? 역시 젊은 피가 힘이 좋겠지?”
“그래도 팔뚝 굵기나 체구를 생각하면 박경구 수사관님이 낫지 않겠습니까?”
벌써 대표선수를 뽑느라고 난리다. 건방진 검사 코를 납작하게 해줄 기회라고 여기는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현장을 뛰어다니는 수사관들이 책상물림 검사 하나 못 이기겠나 싶은 모양이다.
“순서만 정하십시오. 다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태산이 그렇게 말하니 수사관들이 황당해 돌아보았다. 태산은 보란 듯이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탄탄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내자 수사관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제가 맡겠습니다!”
막내인 우형진 수사관이 정적을 깨고 패기만만하게 덤벼들었다.
“심판은 내가 하지!”
배 부장이 신이 나서 빈 원탁을 끌어왔다. 태산과 우 수사관은 테이블에 엎드려 손을 맞잡았다. 배 부장이 맞잡은 손을 움켜잡았다 놓으며 신호를 주었다.
“시~작!!!”
신호와 동시에 우 수사관의 손이 맥없이 넘어갔다. 형사3부 식구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안 검사는 조용했지만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구 검사를 노려보았다. 구 검사는 딴청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태산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태산은 그전에도 평생 누군가에게 팔씨름으로는 져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신체 능력이라면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하루 종일이라도 팔씨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힘을 못 써?”
“아니, 이게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는데… 타이밍을 잘못 맞춰서 그런 것 아닐까요?”
“잔말 말고 비켜봐.”
우 수사관이 머쓱하게 돌아서자 이번에는 박경구 수사관이 나섰다. 강력부 출신 수사관 중 가장 체구가 탄탄한 사람이다. 귀가 찌그러져 있는 것을 봐서는 레슬링 같은 운동선수 출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팔을 걷어붙이며 기세 좋게 덤빈 것이 무색하게 박 수사관도 금세 나가떨어져 버렸다. 박 수사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반사신경이 좋은 건가?”
강력부 출신의 수사관들과 실무관이 차례로 도전했지만 모두 한 방에 넘어갔다. 다들 홀린 듯한 얼굴로 입을 닫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산은 마지막 남은 구 검사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이네요. 구 검사도 한판 붙을 건가요?”
태산은 도발을 담아 물었지만 구 검사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저 팔씨름 잘 못하는데요.”
의외로 너무 솔직해서 태산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다들 했는데 저만 빠질 수는 없죠.”
구 검사가 슬그머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팔씨름 테이블로 걸어왔다.
손을 맞잡자 배 부장이 시작 신호를 보냈다. 태산은 바로 넘기지 않고 이번에는 상대의 반응을 살핀다. 생각보다는 꽤 힘이 좋다. 힘 자체는 박 수사관보다 약한 듯하지만 지구력이 있었다.
‘제법인데?’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팔에 힘을 주었다. 잠깐이나마 구 검사는 바로 넘어가지 않고 안간힘을 쓰며 죽을 둥 살 둥 버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꽤 근성이 있는 놈이군.’
태산은 조금 밀고 당겨주다가 팔을 그대로 테이블에 쾅 밀어붙여 버렸다. 둥근 테이블 상판이 기우뚱하더니 구 검사와 함께 우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져 버렸다.
그와 함께 배 부장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하하하! 역시 형사3부 최고의 또라이야! 장 부장이 갖다 맡긴 이유가 있었다니까. 우리 마약전담반 수석이 이런 사람이니까 유념들 하고 앞으로 잘 따르도록.”
* * *
팔씨름이 태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 후 강력부 출신 수사관들의 태도는 조금 고분고분해졌다. 더는 책상물림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일 테다.
배 부장의 장난으로 비롯된 여흥이 나름대로는 수석으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술이 들어가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둘로 갈려 신경전을 벌이던 마약전담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분위기가 풀어져 서로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내가 말이야. 운동 좀 했다는 놈들과 붙어도 팔씨름으로는 져본 적이 없다고. 아니,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사님한테 질 줄이야.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겠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박경구 수사관이 억울하다는 듯 한탄하자 줄줄이 깨진 다른 수사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 검사님은 대체 언제 그렇게 운동을 하셨대요? 이렇게 몸 좋고 힘 좋은 검사님 처음 봤습니다.”
“타고났죠. 숨만 쉬어도 근육이 붙는 타입이라.”
태산이 농담을 던지자 와아~ 하고 왁자지껄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단지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말이었다. 지금 태산의 신체 능력은 단련의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초인적인 수준이었으므로. 정말 숨만 쉬어도 능력치가 쑥쑥 올라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모르시는구나. 우리 강 검사님 원래 인자강이에요, 인자강.”
낮술이 꺼려진다 했던 황 실무관이건만 어느새 분위기에 취해 한 잔 두 잔 마시더니 텐션이 쑥 올라가 있었다. 황 실무관의 말에 수사관들이 서로 돌아보며 술렁거렸다.
“인자강이 뭐예요?”
“글쎄?”
“하아~ 이분들 아주 트렌드랑은 거리가 백만 년이시네. 신조어 이런 거 통 모르시죠? 존버, 시강, 갑분싸 이런 거.”
황 실무관이 으쓱하며 설명하려는 순간, 전기성 주임이 발끈하며 나선다.
“아니, 나이 많다고 무시해요?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아요? 존버! 엉? 그 뭐냐… 존나…….”
수사관들 기대에 찬 시선으로 전 주임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이내 전 주임은 확연히 작아진 목소리로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번다?”
황 실무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다른 수사관들은 솔깃해했다.
“오오~ 그건가 보네!”
수사관들의 반응에 자신감이 생긴 전 주임이 반색하며 덧붙였다.
“맞지? 존나 많이 버는 사람! 부자!”
“그럼 시강은 뭐야? 시범 강의?”
배 부장도 신이 나서 끼어들었다.
“맞네요! 그거네요!”
“와아~ 생각도 못 했네. 어떻게 그렇게 잘 맞히세요?”
황 실무관은 당장에라도 ‘전혀 못 맞히고 있다고요!’라고 외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잔뜩 흥이 난 전 주임이 또다시 자신 있게 외쳤다.
“갑분싸! 갑자기 분뇨를 싸지름!”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 그건 좀…….”
돌연 싸늘해진 분위기에 모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황 실무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네, 바로 이런 상황을 갑분싸라고 한답니다.”
이흥렬 계장이 젠체하며 끼어들었다.
“거 사람들 참. 아무리 나이가 있어도 그런 유행 정도는 알아둬야 해요. 인자강! 인간 자체가 강하다는 거잖아.”
황 실무관, 최진우 검사와 함께하면서 젊은 사람들 쓰는 농담 같은 것을 잘 주워듣고 재미있어하던 이 계장이 그간의 귀동냥 실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근데 강 검사님 복귀하시기 전만 해도 멸치셨잖아. 골격은 나쁘지 않았지만. 갑자기 몸이 확 좋아지셨는데…….”
“사람이 강하다는 게 체력이 강하다는 의미만은 아니죠.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할 것 같은 강함이 있으셨잖아요. 그전에도.”
“그건 그랬지.”
황 실무관의 설명에 이 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증언에 수사관들의 이목이 태산에게 집중된다. 새삼 다시 보는 시선이다.
신용수 수사관이 가장 먼저 다시 잔을 들며 말했다.
“아무튼 형사3부분들 장난 아니네요. 검사님은 물론이고 여성분들까지 깡이… 어휴~ 아까 황 실무관님 소주병 잡으실 때 저 좀 쫄았습니다.”
“제가 왕년에 좀 놀았거든요. 면도칼도 예사로 씹었는데 소주병쯤이야.”
“하하하! 농담도 잘하시고.”
“농담 아닌데요?”
황 실무관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답하자 수사관들이 일순 굳어진다. 그제야 황 실무관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긴장하시는 거 봐.”
어설픈 사내들을 쥐락펴락하는 하는 걸 보면 황 실무관도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안 검사는 조용히 돼지 껍데기를 씹고 술을 들이켰다. 막내인 우형진 수사관이 안 검사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안 검사님은 술을 꽤 드시네요.”
“그냥 남들 먹는 만큼 먹습니다.”
“어디 가서 술로는 안 빠진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술 때문에 열외 취급 받기는 싫어서요. 그렇다고 딱히 술로 인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검사는 업무로 인정받아야 하는 거니까요. 걱정하시는 것만큼 팀에 누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안 검사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각오를 밝혔다. 강력부 수사관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힐끔거린다. 그 시선에 등 떠밀린 전 주임이 슬그머니 사과하고 나섰다.
“…아까 융통성이 없다느니 했던 건 정말 죄송합니다. 정석을 지키는 검사님 보기가 참 드문 일이라… 사실 저희도 마음속으론 그런 검사님들을 존경합니다. 좀 피곤하긴 해도…….”
전 주임이 말하다 말고 아차 해서 입을 다물었다. 강력부 출신 수사관들이 주책이라는 듯 눈총을 주었다. 그 상황에 안 검사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많이 피곤하게 만들어 드릴 것 같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안 검사의 반응이 나쁘지 않으니 수사관들 사이에서도 안도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낮부터 시작한 회식 자리는 퇴근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안 검사였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일 업무도 있으니 너무 늦지 않게들 들어가세요.”
“저도요. 같이 나가요.”
황수진 실무관도 따라 일어났다.
갑자기 구태호 검사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구 검사님도 가시게요?”
“왜 벌써?”
“구 검사님은 끝까지 같이 가셔야죠.”
수사관들이 의외라는 듯 다투어 잡았다.
“아니요, 택시라도 잡아드리려고…….”
‘아니, 가도 내가 가야지, 니가 왜 일어나?’
태산은 황당해 구 검사를 떨떠름하게 돌아보았다. 안 검사와 황 실무관도 태산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이다.
“괜찮습니다. 늦은 시간도 아니고. 저희끼리 가도 돼요.”
안 검사는 딱 잘라 답하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먼저 가볼게요.”
황 실무관도 손을 흔들며 돌아선다.
하지만 구 검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엉덩이를 엉거주춤 든 채였다. 태산은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내가 갔다 오죠.”
태산은 안 검사를 뒤따라 나가며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구 검사는 확연히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주변의 수사관들이 “뭐야, 뭐야?” 하며 구 검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그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수사관들은 이미 구 검사가 안 검사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태산이 음식점 문을 나오니 안 검사가 돌아보고 웃는다.
“진짜 괜찮은데요.”
“바람도 좀 쐴 겸요.”
큰길로 나가서 먼저 황 실무관을 택시에 태워 보낸 후 태산과 안 검사는 길가에 서서 다음 택시를 기다렸다. 태산이 문득 입을 열었다.
“텃세가 심해서 많이 불편했죠? 강력부 출신이 아니라는 게 이렇게 소외감 느낄 일이라니.”
나름대로는 위로로 건넨 말이었지만 안 검사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강력부 분위기가 좀 유난인 면이 있긴 하지만 남초 환경에서 공부하고 일한 이후로 어딜 가나 항상 소외감은 느끼게 되니까요.”
그 말에는 태산도 뭐라 답할 말이 없었다. 태산이 은연중에 느꼈던 소외감이 여검사에게는 일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저런 식으로 유치한 힘겨루기 하는 건 귀여운 편이죠. 자기 성 접대 받은 이야기 같은 거 자랑하면서 은근히 성희롱하던 답 없는 검사도 있었고…….”
“그런 제정신 아닌 놈이 있단 말입니까?!”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안 검사는 그저 빙긋 웃었다.
“택시 왔네요. 가볼게요.”
안 검사는 마침 달려온 택시를 세워 탔다. 택시에 탄 안 검사가 행선지를 말한 후 창밖을 내다보며 태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태산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태산이 다시 음식점으로 돌아오니 이흥렬 계장은 수사관들과 어울려 부어라 마셔라 아주 신이 나 있다. 귀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다.
“강 검사님, 오셨네! 술 대결도 한판 하셔야지. 팔씨름만 이기고 내빼기 없어요.”
“맞아요. 설마 술까지 괴물처럼 센 건 아니겠지.”
태산이 돌아오자마자 수사관들은 반색하며 술병을 들고 달려들었다. 태산은 코웃음을 친다.
“얼마든지 받아드리죠. 다 덤비세요.”
그때부터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태산은 술을 마실수록 수사관들에게 묘한 애증을 느끼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예전에 자주 맞붙었던 관할서 형사들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조폭과 형사는 분명 적이지만 서로 오랜 시간 다투다 보면 정이 붙는다. 같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전우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서로 성향도, 생활도 비슷했으므로.
양복 입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검찰수사관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묘하게도 강력부 출신 수사관들에게서 과거의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호기롭게 술 대결을 제안했던 수사관들이 하나둘 뻗어가고 있었다. 배 부장은 아까부터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이 계장과 전 주임도 그로기 상태가 되어 진즉에 술잔을 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막내가 결국에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더니 중얼중얼 마지막 말을 남겼다.
“…괴물이야… 진짜 괴물이었어…….”
박경구 수사관은 눈을 부릅뜨고 앉아만 있다. 이번에는 절대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기를 쓰고 버티는 눈치다. 하지만 더 이상 술잔에 손을 못 대는 것을 봐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한 방에 끝내죠?”
태산은 아예 빈 사발을 두 개 얻어 와 거기다 찰랑찰랑 소주를 채웠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하나, 박 수사관 앞에 하나를 놓았다.
태산이 사발을 들어 소주를 꿀꺽꿀꺽 원샷 한 다음 손등으로 입을 쓰윽 닦고 박 수사관을 바라보았다. 박 수사관은 사발을 손에 들고도 차마 입에 대지 못하고 망설인다. 술을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눈치다.
마침내 결심한 듯 눈 꼭 감고 사발을 입에 가져가던 박 수사관이 갑자기 술 사발을 던지듯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린다. 보나 마나 속이 뒤집혀 거하게 토하고 있을 터였다.
화장실에 간 박 수사관은 도통 돌아올 줄을 몰랐다.
“…흑기사…….”
죽은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구 검사가 슥 손을 들었다.
* * *
“…흑기사…….”
죽은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던 구 검사가 슥 손을 들었다.
아직까지 버틴 것을 보면 남들이 기세 좋게 부어라 마셔라 할 때 혼자 구석에서 홀짝홀짝하며 페이스를 조절했음이 분명하다.
“아직 살아 있었습니까?”
태산이 킥 웃으며 물었다.
“예, 뭐 아직 살 만합니다.”
구 검사는 센 척하며 대꾸하고는 천천히 사발 속의 소주를 들이켰다. 한참이 지나 사발을 내려놓은 구 검사가 거하게 트림을 올렸다.
“잘 마시네요. 더 마셔요.”
태산은 약이라도 올리듯 구 검사의 사발에 다시 소주를 채우고 자신의 사발에도 소주를 채웠다. 건배를 하려 사발을 들어 올리는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구 검사가 왼손에 숟가락을 쥔 채 돼지 껍데기를 퍼먹고 있었다. 태산이 물끄러미 보자 숟가락을 놓고 사발을 든다.
“왜 왼손이에요?”
“저 왼손잡인데요.”
“아까 팔씨름할 때는 오른손 썼잖아요.”
“예, 그러니까 저 강 검사님한테 팔씨름 진 거 아닙니다?”
“아니, 그런 게 어디…….”
태산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 검사는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사발에 코를 박았고,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근성 있게 오래 버티긴 했지만 역시 여기까지군 생각하며 태산은 사발에 담긴 소주를 마저 마시고 배 부장을 흔들어 깨웠다.
“부장님, 일어나세요.”
배 부장은 고개를 벌떡 일으키더니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어? 2차? 2차 가나?”
“아니요. 회식 끝났습니다.”
배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비틀거리면서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사이 태산은 계산을 하고 와 배 부장을 부축했다. 그리고 다른 어깨에는 이 계장을 거의 떠메다시피 끌고 나왔다.
택시를 잡아 두 사람을 귀가시키고 돌아온 태산은 한 번에 두 사람씩 척척 메다 나르며 자리를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쓰러져 자고 있던 박 수사관과 구 검사를 택시에 실어 보낸 후 태산은 비로소 한숨을 뱉었다.
술기운이 도는 와중에 장정들을 메고 왔다 갔다 한 탓에 몸은 기분 좋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밤바람이 차가웠지만 집까지 뛰어서 귀가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회식 다음 날,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며 태산은 한동안 고민했다. 송일권에게서 제보받은 다크웹 관련 정보를 배진만 부장과 공유할 것인지에 대해 아직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참 고민하던 태산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610호 검사실을 찾았다.
어쨌든 이제부터 한 팀이고 효율적으로 수사를 하려면 팀원들 간의 정보 공유는 필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핵심 정보를 혼자만 쥐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10호 검사실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간신히 고개를 들고 돌아본다. 다들 안색이 말이 아니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태산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수석님?”
“강 수석님은 왜 이렇게 멀쩡하세요? 우린 완전히 죽을 맛인데.”
“어제 마지막까지 남아서 뒤처리 다 하셨다면서요? 감사합니다.”
수사관들의 호칭이나 태도가 전날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태산은 웃으며 물었다.
“부장님 안에 계시죠?”
“예, 들어가 보십시오.”
태산은 집무실로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구 검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 검사는 아직 출근 안 했습니까?”
태산의 질문에 수사관들이 낄낄 웃었다.
“술병 나서 쓰러져 계시겠죠.”
“구 검사님이 좀 미련하신 데가 있어서 무리할 때가 많아요.”
그러다가 검사 앞에서 검사 뒷말을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신용수 수사관이 슬쩍 변명했다.
“사람이 좀 뚱하고 느리지만 그만큼 우직하고 근성이 있는 분이세요. 첫인상이 그리 살갑지는 않으셨겠지만 좋은 동료가 되어주실 겁니다.”
감싸는 걸 보니 그래도 수사관들에게는 잘했나 보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 검사가 어제 저랑 끝까지 붙었어요. 근성이 있는 건 잘 알겠더군요.”
“역시 그래서 출근이 아직이었구먼.”
수사관들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어~ 강 수석. 무슨 일인가?”
집무실에 들어서니 배진만 부장도 시체 같은 얼굴로 커피 잔을 손에 쥐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태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하니 배 부장도 얼굴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와 앉았다.
“앉게.”
태산은 배 부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보를 공유하겠다 결심하긴 했지만 막상 털어놓으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배 부장은 조용히 태산을 마주 보며 기다려 주었다.
“인천 지역 폭력 조직 계열의 사업체에서 다크웹 쪽에 판로를 뚫으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약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추정됩니다.”
태산은 단정하지 않고 신중하게 답했다.
“어디에서 입수한 정보인가?”
“인터넷 도박 조직 검거할 때 포섭한 정보원에게서 나온 얘깁니다. 믿을 만한 정보라는 건 보장합니다.”
“의심되는 폭력 조직은 어디지?”
태산은 잠시 망설이다 털어놓았다.
“…와룡회입니다.”
“와룡회?”
배 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와룡회라면 이제까지 합법적인 쪽으로 사업을 잘 세탁해 오지 않았나? 새삼 약 같은 데 눈을 돌릴 조직은 아닐 것 같은데?”
“최근 조직 내의 권력 판도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배 부장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해도 당장은 단속하기 어렵네.”
“왜입니까?”
태산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이웅배 회장의 마약 사업을 자신의 손으로 막기로 한 이상,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손을 떼게 하고 싶었다.
“다크웹은 추적이 어려워. 어설프게 쫓다가 잔챙이들만 걸리고 몸통은 자칫 더 숨어들 수 있네. 그렇게 되면 더더욱 잡기 힘들어지겠지.”
배 부장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태산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시간을 끌면 그사이에도 중독되는 사람들은 늘어날 겁니다. 조금이라도 피해자가 덜 생기도록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약 조직의 핵심이 꼬리를 자르고 완전히 숨어들어 버리면 장기적으로 피해자는 더욱 크게 늘어나게 되네. 냉정한 말이지만 전략적으로 고려해서 충분한 정보를 모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어. 우리의 목표는 신흥 마약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것이니까.”
태산은 침통하게 입을 다물었다. 배 부장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당장은 이웅배 회장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태산을 심란하게 했다. 배 부장은 태산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달래듯 말했다.
“자네 기분은 잘 알겠네. 일단 다크웹 쪽은 모니터를 전담할 수사관을 정해서 계속 추적하도록 하지.”
결국 배 부장의 제안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마음으로 610호 검사실을 나오는데 구태호 검사가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오른쪽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고 얼굴색도 흙빛이다.
구 검사가 태산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인다.
“늦었네요. 팔은 왜 그래요?”
구 검사가 민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붕대 감긴 팔을 슬쩍 몸 뒤로 돌려 숨겼다.
“인대가 늘어났다고 하네요.”
태산은 어처구니가 없어 타박했다.
“아니, 적당히 하지 그렇게 될 때까지 버텼어요?”
미련한 데가 있어 무리를 한다는 수사관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분명 어제 팔씨름 이후 왼손만 썼던 것도 왼손잡이여서가 아니라 통증 때문에 오른팔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산은 피식 웃었다.
“근성이 있어서 좋군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태산이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구 검사는 무의식중에 붕대 감긴 오른손을 내밀어 태산의 손을 맞잡았다. 태산이 손을 잡은 채 씨익 웃으며 마주 보자 구 검사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오른손잡이 맞잖아요. 내가 이긴 겁니다?”
구 검사는 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뒤끝 있으시네요, 수석님. 예, 제가 완전히 졌습니다.”
* * *
인간이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다. 태산건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사무실에 갇혀 있는 송일권도 처음에는 그 상황에 감지덕지했다. 하지만 도피 생활의 노독이 슬슬 풀리고 나니 몸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강바른 검사의 말처럼 태산건설 새 대표는 일권의 생활을 잘 돌봐주었다. 매트리스와 이불, 수건, 갈아입을 옷가지, 난방기, 코펠까지 준비해 주었고 정기적으로 문 앞에 생수병과 간편 조리 음식들을 쌓아놓고 갔다.
화장실도 코앞이니 건물을 나가지 않고도, 아니, 그 층의 이쪽 모퉁이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생활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어디 인간이 의식주만 해결된다고 만족하고 사는 생물이던가. 처음에는 안락하다 생각했던 사무실이 갈수록 불편하고 사람 살 환경이 못 된다 느껴졌다.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눈곱만 한 창문도 답답했고, 그 창 위에서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도 신경을 거슬렀다. 그렇다고 환풍기를 꺼두면 실내공기는 금방 탁해졌다.
일권은 잠시라도 이 공간을 벗어나 콧구멍에 바람을 넣고 싶어 안달이 났다.
바람을 쐬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지다 보니 자신을 쫓고 있을 박중성 이사 조직원들에 대한 두려움도 옅어졌다.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도 한동안 잘 피해 다녔으니 잠시 나갔다 온다고 그사이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바른 검사나 태산건설 대표가 자신이 막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터였다. 암호 푸는 작업에 필요한 컴퓨터 부속품이 필요하다고 핑계를 대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두드릴 사람은 김범진 대표뿐이었다. 김 대표는 정기적으로 일권의 생활을 살피고 작업 진행 상황을 확인하러 오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컥 열린 문으로 들어온 이는 김범진 대표였다.
“일은 잘 진행되어 갑니까?”
김 대표가 인사 대신 물었다.
그렇게 묻는 김 대표의 모습은 박중성파에서 훔쳐 들었던 미친개라는 소문과는 과연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랐다. 마치 팀원에게 프로젝트 진척 상황을 묻는 청년 사업가 같은 느낌이었다.
“열심히 하고 있기는 한데 역시 어렵네요. 기존의 암호화 프로그램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든 프로그램으로 암호화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요.”
“예…….”
김 대표는 딱히 잘 알지 못하는 사안이라서인지 더 캐묻지는 않았다.
“불편하신 점은 없습니까? 필요한 것이라든가.”
“예, 저기 사실은 작업하는 데 필요한 부품이 몇 개 있어서요. 잠시 전자상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것만 사서 후딱…….”
김 대표는 바로 일권의 말을 끊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구해 드리죠. 필요한 게 뭔가요?”
갑자기 물어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아, 그게… 설명해도 잘 모르실 텐데…….”
김 대표의 눈빛이 바로 험악해지며 붉은 기를 띠었다. 일권은 화들짝 놀라 서둘러 말했다.
“제가 나중에 따로 적어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김 대표의 눈빛이 누그러진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어려워 마시고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강 검사님의 손님이시니 최선을 다해 모셔야죠. 다만 안전이 걱정되니 되도록 외출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책임지고 맡기로 했는데 쏘다니다가 박중성파에 잡혀가기라도 한다면 제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섣불리 그러지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 무단 외출을 감행하다 들키면 그때는 지금처럼 편하게 계시지는 못하게 될 겁니다.”
정중한 어투였으나 결론은 나갔다가 걸리면 뼈도 못 추릴 줄 알라는 내용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일권은 잔뜩 위축되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