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29화 (29/78)

제5장 이 검사 그 검사의 사정

“살인사건이요. 아내가 남편을 죽였어요.”

아내가 남편을 죽였는데 피의자가 불쌍하다? 그렇다면 뻔한 스토리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남편을 죽였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학대를 당해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묵은 상처들이 온몸에 가득했고요.”

역시나 안 검사는 예상했던 이야기를 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린다. 상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동요하는 반응만 보아도 피의자가 겪은 참상이 짐작될 정도였다.

보통 반대의 경우, 아내를 폭행하다 살해한 남편은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진술한다. 끝까지 발뺌하며 버티면 살해의 고의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살인죄가 아닌 폭행치사, 혹은 상해치사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폭행당하던 아내가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남편을 살해하는 경우에는 살해의 고의가 인정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으로까지 비화될 위험이 있다. 당연히 형량도 더 무거워진다.

안 검사는 그런 점을 부당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정당방위가 인정될 가능성은 없나요?”

“전혀요. 폭행이 완전히 종료되고 피해자가 잠이 들었을 때 식칼로 심장을 단번에 찔렀습니다.”

태산은 으음… 하고 신음했다.

정당방위는 현재의 침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요건이다. 이미 폭행이 끝나 버린 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방위는 인정되지 않는다. 해석상으로도 판례상으로도 이론의 여지가 없이 명확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석연찮은 느낌이 있었다.

“피의자의 나이와 체격은 어떻게 됩니까?”

“55세입니다. 체격은 저보다 조금 더 작고요. 체중은 50킬로가 채 안 나갈 듯하네요.”

“약물을 사용했습니까?”

“아니오. 검시 결과 약물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태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대체 뭘 주저하는 겁니까?”

“예?”

안 검사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진짜 찌른 사람이 누군지 찾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안 검사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벽으로 막혀 있는 방이었지만 누가 들을까 반사적으로 살피는 모습이었다.

그 반응으로 태산은 알 수 있었다. 안 검사도 피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범인의 존재가 밝혀질까 꺼리고 있다.

안 검사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 방에 심장을 찾아 찔러 죽이는 건 칼을 좀 써본 건달도 힘들어요. 50킬로도 안 나가는 50대 여자라면 보통은 찌르려다가 실패했을 거예요. 힘이 부족해서 칼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거나 갈비뼈에 걸리거나. 그랬다면 잠든 피해자가 깨어나 거세게 저항했겠죠. 한 방에 심장을 찔러 즉사시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는 건 공범이 있거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얘기겠지요.”

태산이 은밀히 물었다.

“피의자가 보호하려는 게 누굽니까? 내연남이라도 있는 건가요?”

안 검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짐을 받았다.

“강 검사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킨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약속하죠.”

태산의 약속을 받고야 안 검사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피의자가 바로 신고도 했고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했습니다. 게다가 현장에는 침입 흔적이나 다른 범인이 있었던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에서는 별 의문 없이 피의자를 송치한 것 같습니다.”

안 검사는 앞에 놓인 술을 마저 들이켜고는 무거운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저는 수사 기록을 살펴보는 중에 강 검사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문점을 발견하고 피의자를 좀 더 밀도 있게 신문해 보았습니다. 범행 후 신고하고 체포되기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억을 하더군요. 그런데 범행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몇 번 찔렀다고 했다가 한 번 찔렀다고 했다가 목을 찔렀다고 했다가 가슴을 찔렀다고 했다가 말이 계속 바뀌었습니다.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니 나중에는 아예 입을 다물었고요. 범행 시 입고 있었다는 잠옷에도 핏자국은 거의 없었어요. 그것으로 피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태산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진범은 누굽니까? 의심되는 사람이 있나요?”

“가정불화로 일찌감치 가출해 따로 살고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피의자는 의도적으로 아들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고, 아들에 대해 물으면 유난히 동요했습니다. 그로 미루어 봤을 때 어머니가 학대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아들이 부친을 살해했고, 피의자가 이를 대신 뒤집어쓰려고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한 증거는 없다 해도 개연성 있는 추론이었다.

“나무랄 데 없네요. 그럼 그 방향으로 수사 진행해서 아들을 기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검사의 직분으로는 그것이 당연하겠지마는 피의자의 심정을 생각하니 망설여집니다.”

태산은 ‘아니 왜?’ 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모았다.

“피의자는 자신의 인생을 걸어서 아들을 보호하려고 결심했어요. 평생 노예처럼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인생을 거는 결단을 내렸는데 제가 그것을 좌절시켜야 하는 상황이에요. 피의자야 당해온 세월이 있으니 정상이 참작되겠지만 아들은 중형을 면치 못할 겁니다. 이유야 어떻든 존속을 계획적으로 살해했으니까요. 평생 맞고만 살다가 아들이 자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감옥 가는 걸 봐야 하다니 너무 기구한 인생 아닙니까?”

안 검사는 그렇게 설명을 마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만의 상념에 빠졌다.

“저만 입 다물고 있으면 모두가 만족하는 방향으로 해결될 거예요. 경찰도 재수사로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고 피의자도 행복한 방향으로…….”

태산은 테이블을 두드려 심각하게 빠져들려는 안 검사의 주의를 끌었다.

“이봐요, 안 검사. 부모의 인생은 자식의 인생과는 별개예요. 자식이 인생 망쳤다고 해서 부모 인생까지 망가지라는 법은 없어요.”

태산을 마주 보는 안 검사의 눈이 크게 떠진다.

“피의자 이제 겨우 오십 대예요. 인생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자식이 감옥에 들어가도 자기가 안 들어가면 자기 인생 살 수 있어요. 그동안 괴롭히던 인간이 사라졌으니 이제야 본격적으로 꽃필지도 모르죠. 자식의 인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피의자의 행복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요.”

안 검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태산의 말에 공감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것일까?

“인생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우린 우리 할 일을 하자고요. 진범을 기소하세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안 검사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산이 분명한 답을 내려주니 마음의 동요를 크게 덜어낸 모양이었다.

“제가 감정에 휘둘려 피의자의 인생을 멋대로 속단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안 검사는 후련한 얼굴로 다시 술잔을 들더니 중얼거렸다.

“의외네요. 강 검사님이 원칙대로 하라는 조언을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안 검사가 강바른 검사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강 검사라면 원칙은 밀어두고 원하는 결과를 얻으라고 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증거 조작을 해서라도 집어넣고 싶은 놈은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강 검사의 전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산도 술잔을 들며 흐흥 코웃음을 웃는다.

사실 태산이 원칙대로 하라고 거침없이 말한 이유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해서도 아니었고, 피의자의 남은 인생을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안 검사보다 훨씬 회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아들이 나서 아버지를 죽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어머니는 안중에도 없이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홧김에 살해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돈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살해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어머니를 구하려는 동기로 살인을 한 것이라 해도 평생 학대당하던 어머니와는 다르게 장성한 아들에게는 다른 수단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어머니를 떼어놓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의 등 뒤에 숨는 아들에게 태산은 눈곱만큼도 동정이 가지 않았다.

“지금 남 걱정 할 때입니까? 재수사하라고 하면 경찰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게다가 피의자가 자백하는 바람에 다른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증거도 그사이 다 사라졌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지간히 멍청한 변호사를 쓰지 않는 한 묵비권만 잘 행사해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받을 수 있어요. 멀쩡한 피의자 놔주고 재수사한 범인도 무죄 받으면 살인사건은 있는데 범인이 없는 사태가 되는 거예요. 안 검사도 위에서 문책 내려올 것을 각오해야 할 텐데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기소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선을 다해야죠.”

안 검사는 의연하게 답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마음의 동요를 깨끗이 털어낸 모습이었다. 취한 기색도 전혀 없다. 안 검사의 고민은 종료된 모양이다.

식사를 끝낸 후 계산하고 음식점을 나오니 음식점 입구에서 기다리던 안 검사가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조언해 주신 것도, 밥 사주신 것도요.”

그렇게 인사하는 안 검사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비친다. 이 정도면 평소보다는 꽤 애교 있는 태도라고 할까. 이렇게 보니 귀여운 것도 같고.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고음의 소리가 재잘거리며 들려왔다.

“어머~ 이게 누구야? 강 검사님~~!!”

목소리의 정체를 깨닫고 태산은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이 여자가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거야?

태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 검사를 재촉했다.

“택시 잡아줄까요?”

“아뇨. 차 가져왔는데요. 대리 부르려고요.”

얼른 택시를 태워 보내려 했더니 그것도 안 될 모양이다.

“강 검사님?! 강바른 검사님 맞죠?”

등 뒤에서는 끈질기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다 못한 안 검사가 고개를 빼고 보더니 한마디 한다.

“검사님 부르는 거 같은데요.”

태산은 그제야 마지못해 돌아섰다.

“아, 예~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이런 데서 다 만나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것은 선화였다. 유독 부티가 나게 차려입은 것이 오늘도 귀 얇은 이들에게 한탕의 꿈을 전도하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태산은 안 검사에게서 등을 돌린 김에 한쪽 눈썹을 잔뜩 들어 올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선화에게 눈치를 준다. 하지만 선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다.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그 호기심은 명백히 안 검사를 향하고 있었다.

“먼저 들어가요.”

태산은 서둘러 안 검사를 보냈다.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안 검사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굳이 선화가 누군지는 캐묻지 않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선화에게도 슬쩍 묵례를 하고 검찰청 주차장 쪽으로 올라가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대리 기사를 부르려는 것일 테다.

* * *

선화는 안 검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팔꿈치로 태산의 옆구리를 찔렀다.

“누구야, 누구야? 귀엽잖아. 혹시 만나는 여자?”

“아니야!”

부인했지만 선화는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직장 동료야.”

“직장 동료면 실무관?”

태산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대답하지 않자 선화는 재차 물었다.

“설마 검사? 어머~ 배운 여자네! 어쩐지 똑똑해 보이더라.”

선화는 저만치 걸어가는 안 검사의 뒷모습을 다시 확인하며 재잘거렸다.

“분위기 달달하던데? 둘이 썸 타는 중이야?”

“무슨 소리야? 나이 차가 몇인데 저런 어린애랑.”

“딱 좋잖아. 서너 살 차이 나나?”

그러고 보니 태산은 자신의 원래 나이를 의식했지만 강 검사의 나이를 생각하면 선화가 오해할 만도 했다.

“이야~ 청춘이네. 좋~을 때다.”

선화의 어투에는 놀리는 투가 역력했다.

태산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아줌마가 여긴 어쩐 일이야? 미행이라도 한 거야? 스토커야?”

선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자기, 자의식과잉 아니야? 나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엄청 바쁜 사람이라고.”

“그래서? 무슨 일로?”

어디 그 바쁘다는 용건 한번 들어보자는 투로 태산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선화의 변명을 기다렸다. 선화는 그런 태산을 슬쩍 흘겨보고는 말을 이었다.

“요 근처에 대학 있지? 거기 평생학습센터랑 연계해서 뷰티 크리에이터 양성 과정 진행하고 있는데 교육생들이랑 회식 나왔어.”

선화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근처 식당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가 두리번거리다가 선화를 발견하고 옆 사람에게 뭔가 수군거린다. 웅성거림은 삽시간에 일행 전체로 퍼져 나갔다. 시선이 순식간에 선화에게서 태산에게로 옮겨 와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태산과 나란히 서 있는 선화에게로 몰려들었다. 뷰티 크리에이터를 지망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하나같이 스타일이 화려한 데다 리액션이 크고 텐션이 높은 젊은 여자들이었다.

젊은 여자에 약한 태산은 그들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잔뜩 위축되어 주춤주춤 물러났지만 선화가 대뜸 옷자락을 잡아 끌어당긴다.

“대표님, 이분은 누구세요?”

누군가 선화에게 묻자 선화는 조금 젠체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아아~ 내가 아는 검사님이세요. 방금 우연히 만났어요.”

선화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금세 달라졌다. 선화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가 순간 급상승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검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사업가에게는 상당히 큰 카드가 된다. 선화는 태산과 우연히 마주친 이 순간을 바로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되도록 이용하고 있었다. 아무튼 참 영악한 여자다.

“와아~ 신기해. 실물 검사님 처음 봐요.”

“되게 미남이시다.”

“진짜 잘생기셨어요.”

여자들은 다투어 말해놓고 뭐가 재미있는지 자기들끼리 깔깔 웃었다.

강 검사의 몸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있다면 여자들은 정말로 잘생긴 사람에게는 대놓고 잘생겼다고 말한다는 사실이었다.

태산도 ‘오빠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외모에 은근히 근자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 검사가 된 후 처음 보는 여자들이 아무런 맥락 없이 ‘잘생기셨네요’라고 말을 거는 것을 숱하게 들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나쁘지 않다’는 건 적어도 잘생기지는 않았다는 뜻이라는 걸.

“안 바쁘시면 같이 한잔하세요.”

“그래요. 저희 지금 2차 가려고 하는데…….”

불쑥 합류하라는 제안이 튀어나오자 여자들이 반색한다. 이대로라면 어영부영 2차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태산은 재빨리 선화를 돌아보며 선을 그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세요. 다음에 봬요. 연락드릴게요.”

선화는 선뜻 보내주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선화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달라진다. 검사와 그저 안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연락하고 종종 만남을 가지기도 한다는 것을 인사말만으로 암시한 것이다.

잠깐 마주친 것을 사업적으로 톡톡히 이용해 먹는 선화에게 혀를 내두르며 태산은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 * *

“새해를 앞두고 곧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인데 자네도 이제 부임 2년 차니 슬슬 옮길 때가 되었지?”

형사3부 장진호 부장 검사가 태산을 불러 앉히고 운을 뗐다.

태산은 감회가 새로웠다. 갓 부임한 강 검사와 실랑이를 벌였던 것이 벌써 2년 가까이 되었단 말인가. 하긴 사고 후 복귀한 것이 올 봄이니 벌써 강바른 검사 행세를 한 지도 1년 가까이 흘렀다.

태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장 부장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최근 수도권 지역 약물 유통 구조에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 같다는군. 기존 유통 조직들 사이에 항쟁이 격화되고 있는 데다 새로운 판로도 늘어나는 것 같고. 유통량이 늘면서 가격도 떨어지고 있는데 대부분 인천에서 흘러들고 있다는 첩보야. 위에서는 인천 지역을 기반으로 새롭게 약물 사업에 뛰어든 조직이 생긴 것 아닌가 추측하고 있네.”

그 순간 태산은 번뜩 떠올렸다. 박중성 이사가 약물 사업을 제안했다는 말을 전했던 이웅배 회장. 그리고 사고 후 강 검사가 된 자신에게 큰 형님이 약물 사업에 손을 대려는 것 같다고 보고했던 범진.

그럴 리 없다고 극구 부정한 후로 범진은 자신이 잘못 알았던 모양이라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롭게 대두된 마약 조직의 근거지가 하필 인천이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건 그렇고, 장 부장은 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아무튼 이런 사정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인천 지역의 마약사범을 더욱 강력히 단속하고 신흥 마약 조직을 근절하기 위한 정책을 세운 모양이야. 인천지검 강력부에 마약전담반을 신설하기로 했어. 법무부의 직접적인 요청인 만큼 지검 내에 꾸려지는 부서라 해도 독립적으로 운영될 거야. 지검장이 아니라 법무부장관, 나아가서는 대통령 직속인 셈이지.”

말이야 번드르르하지만 실질은 다르리라는 것을 태산은 금방 눈치챘다.

검찰은 엄밀히 말해 정부기관으로 대통령 휘하지만, 독립된 사법기구로 행세하고 싶어 한다. 검찰청장은 법무부장관은 물론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는 것도 내키지 않아 했다. 더욱이 개혁적인 정부가 검찰 개혁의 칼을 들기라도 하는 날에는 대통령과 척을 지고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인천지검 내에 법무부 직속의 독립 부서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지검장의 협조를 기대할 수도 없고 다른 검사들의 눈총까지 받아가며 고된 일을 맡아서 할 외인 부대가 생긴다는 얘기였다.

그제야 이 이야기를 태산에게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왕 지검장의 눈에 난 것, 외인 부대로 빠져 설거지나 하라는 것일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네. 험한 일이 되겠지마는 자네는 체력도 좋고 파이팅도 좋으니 잘 해낼 거야. 어때? 마약전담반으로 지원할 생각 없나?”

태산은 잠시 망설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선뜻 답하기가 힘들었다.

“고민이 된다면 시간을 줄 테니 생각해 본 다음 답해줘도 좋네. 당장 대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만 용건을 마무리하려는 장 부장에게 태산은 대뜸 물었다.

“마약전담반 책임자는 정해졌습니까?”

“아, 강력부 배진만 부장으로 내정됐네.”

태산은 배 부장의 이름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역시 눈 밖에 난 놈들을 쓸어 보내려는 용도인가?

강력부 배진만 부장이라면 검사장도 안중에 없이 들이받는 돈키호테형 인물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미 출세는 포기한 출포검이고 편의상 부장으로 부르는 것일 뿐, 직급은 부부장이었다. 물론 나이는 부장급이었지만. 장 부장과는 동기로 알고 있다.

태산은 이웅배 회장을 떠올렸다. 만약 정말로 형님이 마약 사업을 시작한 것이 맞다면 그것을 막을 사람은, 그리고 막아야만 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만약 이 회장이 얽혀 있다면 이 회장과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우현중 검사장이 수사를 방해할 공산이 컸다. 그러나 독립 부서인데다 책임자가 배 부장 같은 이라면 지검장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수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더 생각해 보게.”

장 부장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태산을 내보내려 했다.

태산은 넙죽 답했다.

“더 생각해 볼 것 없이 그냥 제가 가겠습니다.”

운명과 같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태산은 흐름을 믿고 몸을 던지기로 했다.

“그, 그러겠나? 그럼 인사부서에 말해두지.”

장 부장은 태산이 너무 선뜻 자원해 얼떨떨한 듯 더듬더듬 답했다.

“마약전담반 구성은 어떻게 됩니까?”

“배 부장이 강력부에서 평검사 하나를 데리고 나오기로 했네. 그 외에 2~3명 정도 지원자를 더 받기로 했는데 일단 자네가 지원했으니 능선은 넘은 셈이지. 지원자가 없으면 인사부서에서 적당한 인물로 인선해서 보낼 거야. 직원은 실무관 둘에 수사관 여섯 해서 여덟 명 정도를 배정할 거라고 하고. 아무래도 현장에서 직접 뛰는 인원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현장에서 뛰는 인원이 많아야 한다면서 수사관 여섯은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다. 아마도 검사가 직접 현장을 뛰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일은 힘들어도 어쩌면 태산의 적성에는 더 맞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태산은 별수 없지 하고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력부에 마약전담반이 신설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마약전담반 반장에는 배진만 부장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고 구성원으로는 강바른과 구태호라는 이름만 덜렁 올라가 있었다.

구태호는 아마도 배 부장이 강력부에서 데려온다는 평검사일 테다. 그렇다는 건 다른 자원자는 더 못 구했다는 얘기일까?

공문을 본 506호 식구들은 펄쩍 뛰었다.

“이게 대체 언제 이렇게 결정된 건가요?!”

“슬슬 전출하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갑자기 마약전담반이라뇨.”

“그게… 부장님이 언질을 주셔서 며칠 전에 자원했습니다.”

태산이 난감해하며 답하니 더욱더 펄쩍 뛴다.

“아니, 자원을 하셔놓고 아무 말도 안 하시면 어떡합니까?”

“맞아요. 정말 서운하네요.”

식구들이 다투어 불만을 토로하기에 태산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했다.

“아니 저… 얘기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이렇게 빨리 결정될 줄은…….”

태산의 변명을 다 듣지도 않고 이흥렬 수사관과 황수진 실무관은 서로의 얘기에 빠졌다.

“근데 이거 아예 다른 청으로 옮긴다면 모를까 같은 청 안이니 우리도 같이 수행하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우리도 마약전담반으로 같이 이동하게 되는 건가요?”

앞서가는 대화에 태산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죠. 지금보다 훨씬 힘들어질 텐데 두 분께 계속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실무관과 수사관은 마약 수사에 특화된 분들로 새로 배정받을 겁니다. 최 검사도 이제 슬슬 수습 마칠 때가 되었으니 내년부터는 독립검사실 배정받지 않을까요? 그쪽으로 가실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최 검사는 움찔했다.

“저요?”

이 계장과 황 실무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최 검사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휙 고개를 돌려 태산을 향해 다투어 말하는 것이다.

“나도 강력범죄라면 꽤 오래 맡아왔어요. 마약 수사 경력도 없지 않고요. 프로포폴 정도였지만. 어쨌거나 손발 맞춰왔던 사람들끼리 같이 가면 일이 훨씬 잘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어차피 다 서류작업인데요. 여기나 거기나.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태산은 망설이다 답했다.

“함께 이동하겠다고 하면 위에서도 환영하겠지마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계장과 황 실무관이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태산도 기꺼이 고개를 숙여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럼 저도…….”

최진우 검사가 덩달아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태산은 풉 웃어버렸다.

“이제 수습 뗄까 말까 한 주제에 뭐라는 거야? 최 검사는 자기 앞가림 하는 법이나 더 배우지. 마약 수사는 아직 무리야.”

최 검사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 * *

안소영 검사는 공문에 실린 ‘강바른’ 세 글자를 한참 노려보았다.

강력부에 마약전담반이 생긴다는 것 자체도 금시초문인데 거기에 강바른 검사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구성원이 확정되어 공문으로까지 내려온 것을 보면 강 검사 본인은 이 인사이동을 사전에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건을 함께 수사하고 해결한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강 검사에게 마약전담반으로 차출되었다는 얘기 같은 건 들은 적도 없다.

서운함과 당혹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안 검사는 공문을 든 채로 형사 3부 부장검사실로 들이닥쳤다. 장진호 부장검사가 고개를 들자마자 안 검사는 공문을 들이대며 추궁했다. 장 부장이 뭔가 하고 공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이게 어떻게 결정된 건가요?”

“아아~”

장 부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사전에 적당한 사람 몇 명 인선해서 의사를 물어보고 자원을 받았네.”

“저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요.”

안 검사가 따지듯 말하니 장 부장은 조금 곤란해하는 톤으로 민망한 웃음을 섞어 설명했다.

“여검사를 보내기에는 아무래도 좀 험한 부서 아닌가.”

처음부터 후보로 고려하지도 않았다는 말이었다. 부장 나름대로는 배려한 것이겠으나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또 다른 이유로 안 검사는 마음이 복잡했다.

원래대로라면 부임 2년 차인 자신과 강바른 검사는 내년이 되면 서로 다른 청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었다.

자신의 검사 인생과 도덕관을 완전히 흔들어놓은 사람이었지만 이런 식의 어쩔 수 없는 이별이라면 받아들이고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전까지의 흔들림 없이 평화로운 검사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매번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관을 의심하며 괴로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원을 한다면 앞으로 2년간, 어쩌면 정세에 따라서는 그 이상 강 검사와 함께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 검사는 피해자의 옷장에서 남은 양말 한쪽을 주머니에 숨겨 나왔던 순간을 떠올린다. 강 검사의 증거 조작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이 했던 선택이 새삼 뼈아프게 다가왔다.

이미 강 검사와 공범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강 검사는 안 검사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있었다. 이후 강 검사가 자신만의 정의를 위해 거침없이 법과 원칙을 침해할 것을 상상하니 도무지 남의 일처럼 태연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내가 곁에서 막아야 해.’

안 검사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도 마약전담반으로 가고 싶습니다.”

장 부장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마약전담반으로 보내주십시오.”

방금 전까지도 부드러웠던 장 부장의 표정과 어투에 금방 불쾌감이 서렸다.

“만만한 일이 아니야. 가고 싶다고 해서 막 보내줄 수는 없어.”

“2년간 강력사건을 주로 맡아왔습니다. 마약 사건이라고 여성 피의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고요. 게다가 현장에서 직접 뛰는 수사관도 아닌데 검사 업무에 남녀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겁니다.”

장 부장은 완강하게 밀어붙이는 안 검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단순히 부서만 옮기는 게 아니네. 이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하는 말이겠지?”

그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장 부장은 단순히 여자이기 때문에 안 검사를 열외로 친 것이 아니었다.

이 선택은 검사 인생에 큰 전기가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안 검사를 아끼는 마음에 보호한 것을 이런 식의 반항으로 갚으니 장 부장으로서도 서운할 만했다.

안 검사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질문해 보았다. 이 선택으로 검사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강바른 검사로 인해 자신의 검사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어떤 선택을 한들 이 이상 궤도를 벗어날 수가 있을까?

“알고 있습니다. 보내주십시오.”

안 검사의 답에 장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안 검사의 굳건한 결의를 느끼고 더는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알았네. 가보게.”

장 부장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보았다. 안 검사는 꾸벅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왔다. 안 검사가 나가고 난 후, 장 부장이 닫힌 문을 돌아보며 혀를 끌끌 찼다.

* * *

“대박 사건! 그거 아세요?!”

황수진 실무관이 점심 식사를 끝내고 506호 검사실로 들어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흥렬 계장과 최진우 검사가 자리에 앉아 커피 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돌아보았다.

“안소영 검사님도 마약전담반으로 자원하셨대요.”

“예? 안 검사님이요?”

“아니, 여자가 왜 그 험한 곳에?”

이 계장의 말에 황 실무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저도 여잔데요.”

“아니, 그래도 실무관이랑 검사는 하는 일이 다르잖아.”

이 계장이 진땀을 흘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근데 왜 갑자기 마약전담반 자원하신 걸까요? 전 이미 인사이동 다 확정된 줄 알았는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안 가도 될 것 같은데 굳이 힘든 자리에…….”

최 검사와 이 계장이 중얼거리자 황 실무관이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말했다.

“그게요… 강 검사님이 먼저 이동 확정되셨잖아요. 혹시 같이 가시려고 그런 것 아닐까요?”

“아니, 왜 굳이 같이 가? 둘이 세트야?”

이 계장이 바로 반박하자 황 실무관도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세트로 같이 일해왔잖아요. 둘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죠. 그게 연애 감정이든 끈끈한 동료애든. 솔직히 계장님이랑 저도 그동안 강 검사님하고 함께 일한 정이 있어서 함께 가는 거잖아요. 안 검사님도 그래서 강 검사님이랑 같이 마약전담반으로 가고 싶으셨을 수 있죠.”

“누가 또 마약전담반으로 간다고요?”

등 뒤에서 불쑥 들린 소리에 황 실무관은 화들짝 놀랐다. 강 검사가 마침 점심을 먹고 검사실로 들어서는 중이었던 것이다.

황 실무관은 괜히 죄지은 듯한 기분이 되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안 검사님이요. 점심 먹다가 이유정 실무관한테 들었어요.”

“그래요?”

태산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그대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전혀 상관 안 한다는 듯 무관심한 태산의 태도에 황 실무관은 머쓱해졌다. 그대로 슬쩍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오히려 이흥렬 계장이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더니 커피를 다 마시도록 일어났다 앉았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다가 결국 슬그머니 집무실로 다가가 노크를 하는 것이다.

“저, 검사님. 잠깐 얘기 좀 하시죠.”

이 계장은 그렇게 운을 떼며 집무실로 쓱 발을 들여놓았다.

“예, 말씀하세요.”

태산은 선뜻 얘기했다. 하지만 이 계장은 한참을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변죽만 울렸다.

“그게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괜한 오지랖으로 느껴지시겠지만… 아니, 뭐 오지랖이 맞죠. 근데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닌 데다 그간의 정도 있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러는 건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태산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안 검사님과는 사전에 함께 부서를 옮기기로 말씀을 나누신 건가요?”

방금 전 안 검사가 마약전담반으로 옮긴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실 태산도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은 탓에 이 계장은 태산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요.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이 계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태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계장은 대체 뭐가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문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젊은 여자가 하기에는 험한 일 아닙니까?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정말 안 검사님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강 검사님이 영향을 미치신 건지 궁금해서요.”

자신이 무슨 죽을 곳으로 억지로 끌고 가기라도 한단 말인가? 태산은 이 계장의 말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부서 이동에 대해서는 안 검사와 의견을 나눈 바가 전혀 없습니다.”

잘라 말해놓고 보니 더욱 부아가 솟아 태산은 열을 올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런 일에 남녀가 어디 있습니까? 마약사범 상대한다고 해도 직접 현장 가서 구르고 몸싸움할 것도 아닌데. 계장님 이 일 하면서 몸 좋고 싸움 잘하는 검사 봤어요?”

‘나 빼고’라는 말은 간신히 삼켰다.

“과중한 업무 해치우느라 온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고, 쉴 때도 술이나 퍼마시고, 그러다 보니 팔다리는 가는데 배만 잔뜩 나온 사람이 태반 아닙니까? 깡으로 따지면 그런 ET 검사들보다 안 검사 쪽이 훨씬 나을 겁니다.”

태산이 격하게 나오니 이 계장은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제가 옛날 사람이라 말이 좀 그렇게 나와서 그렇지, 여자 검사라서 문제가 된다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이 계장은 그렇게 말해놓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검사님은 안 검사님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을 한 건지 전혀 모르고 계시는군요.”

이건 또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태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니 이 계장이 그제야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한때 강력부가 공안부와 함께 출세의 지름길인 적이 있었죠. 하지만 요즘은 기피 부서인 거 아시죠? 더욱이 강력부 마약전담반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이 계장은 멍하니 듣고 있는 태산을 힐끗 한번 보았다. 이거 아주 똥인지 된장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먼 하는 얼굴이었다. 아직 강 검사의 기억이 다 회복되지 않아 그러려니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왜 강력부가 기피 부서가 된 줄 아십니까? 업무는 고된데 나름 숙련도가 필요한 분야거든요. 한번 이쪽으로 발을 들여 숙달된 인력이 되면 다른 쪽으로 뺄 수가 없어요. 계속 이쪽으로 배정되는 겁니다. 더욱이 마약전담부서로 가게 된다? 숙련도가 쌓이면 쌓일수록 마약, 조폭, 강력 이런 쪽으로만 돌게 될 겁니다.”

이 계장은 의미심장하게 결론을 내렸다.

“한마디로 출셋길과는 영원히 멀어지게 되는 거예요.”

책임자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 태산도 막연히 ‘요주의 인물들 처리하는 부서인가’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강 검사님은 시기적으로 생각해도 승진해서 가실 테니 부서에서의 서열도 두 번째가 되겠지요. 평소 스타일 생각하면 적성에도 맞으실 테고. 마약전담반으로 간다 해도 공만 잘 세우시면 앞으로 승승장구하실 가능성도 없지 않아요. 하지만 안 검사님은 다르지 않습니까?”

이 계장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제가 그동안 알던 안 검사님은 꽤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어려운 가정에서 악바리처럼 공부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열심히 일했어요. 영리하고 성실하니까 조직의 평가도 상당히 좋았지요. 다음에는 꽤 좋은 임지로 발령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근데 그걸 다 포기한 겁니다.”

이 계장의 말에 태산도 절로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검사가 왜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따라오려는 것일까?

“안타까운 생각에 드린 말씀입니다. 혹시 강 검사님의 의사가 개입된 것이라면 다시 생각해 주십사 하고요.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이 계장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심란한 고민거리는 태산에게 넘겨줘 버린 채.

* * *

안 검사가 마약전담반으로 자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태산이었다. 하지만 이흥렬 계장의 오지랖 섞인 잔소리를 듣고 나니 정말로 자신 때문에 힘든 길을 선택한 건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정말로 자신을 따라서 자원한 것이라면 더 늦기 전에 말려야 하는 것 아닐까?

태산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504호 검사실로 건너갔다. 노크를 하고 슬그머니 들어서자 안 검사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슨 일인가 하고 본다.

“안 검사, 혹시 저녁에 시간 됩니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식사라도 같이 하죠.”

“예, 시간은 괜찮습니다만…….”

안 검사는 바로 대답했지만 어쩐지 말꼬리가 흐려지며 말을 분명히 맺지 못했다. 무슨 용건인지 궁금해하는 눈치다. 뭐라 더 설명하기도 곤란해 태산은 재빨리 못을 박았다.

“그럼 퇴근 후에 데리러 오죠.”

태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집무실을 휙 나가 버렸다.

“벌써 가세요?”

이유정 실무관이 궁금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 예. 용건이 금방 끝나서…….”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변명처럼 말하고 머쓱해져서 얼른 506호로 돌아왔다.

이흥렬 계장의 말을 들은 후로 묘하게 안 검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약속을 정했으니 태산은 저녁 식사를 할 장소를 미리 예약해 두기로 했다. 국밥집이나 지난번 술을 같이 마셨던 고깃집 같은 곳은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것 같아 태산은 프렌치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전화를 하면서도 너무 오버가 아닌가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일단 정해놓고 나니 어쩐지 조금 설레는 느낌이 되었다.

금세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태산은 정시에 딱 맞춰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짧아져 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두워진 창 위로 태산, 아니, 강바른 검사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쳐 보였다.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을 꼼꼼히 살피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 정도 되면 젊은 여검사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별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먼저 퇴근합니다!”

태산은 검사실 직원들에게 인사를 툭 던져놓고 미처 직원들이 고개도 들기 전에 이미 검사실을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황수진 실무관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지? 왠지 좀 들떠 계신 것 같은데?”

“데이트라도 있나 보지. 젊은 사람인데.”

이흥렬 계장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아~ 좋겠다. 데이트라니.”

최 검사의 부러움에 찬 중얼거림에 이 계장이 바로 되묻는다.

“아니, 최 검사님은 더 젊잖아요. 만나는 사람 없어요?”

“만날 기회가 나야죠. 뚜쟁이한테 선이나 들어오지.”

“선봐서 결혼하는 건 또 싫으신가 봐요?”

황수진 실무관이 웃음기 섞어 놀리듯 물었다.

“저도 서로 조건 안 보고 푹 빠지는 연애에 대한 로망이 있답니다.”

최 검사가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황 실무관은 먼저 물어놓고도 최 검사의 답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막 생각났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제안했다.

“불금인데 오늘은 우리도 일찍 퇴근할까요?”

“…그럴까?”

집에 가도 별달리 할 일이 없는 이 계장은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지만 최 검사는 벌써 말없이 컴퓨터를 종료시키고 있었다.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검사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때 504호 검사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본 최 검사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올렸다.

“어?!”

강 검사가 안 검사와 함께 504호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이 계장도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강 검사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 퇴근들 하십니까?”

“네, 불금이라 저희도 일찍 마무리했어요.”

어버버하며 답을 못 하고 있는 이 계장 대신 황수진 실무관이 빙긋 웃으며 넉살 좋게 답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506호 직원들이 먼저 안쪽으로 타고 그 앞에 강 검사와 안 검사가 섰다.

뒷자리에 선 506호 직원들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지금 상황을 추론하기에 바빴다. 아무렇지 않게 강 검사의 인사를 받았던 황 실무관조차도 강 검사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장난스럽게 눈을 굴리며 입이 간지러워 안달인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안 검사가 갑작스럽게 강 검사와 함께 마약전담반행을 결정한 것을 두고 뭔가 둘 사이에 썸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던 직원들이었다. 방금 전까지 들떠서 퇴근하던 강 검사의 모습에 청춘사업을 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냐고 농담을 나눴던 차라 더욱 공교로웠다.

태산은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주차장까지는 모두 동선이 같았으므로 뒤통수에 박힌 시선은 계속 뒤를 따라왔다.

지금 뒤통수에 와 박히는 506호 직원들의 눈빛은 안 봐도 비디오다. 안 검사를 에스코트해 나올 때 504호 직원이 보여준 눈빛과 판박이일 것이었다.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거 아닌가 하는 호기심의 눈빛.

태산은 혀를 찼다. 직장 동료와 밥 한 끼 먹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 호들갑인 것일까.

태산은 자동차 조수석에 올라타는 안 검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안 검사는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전혀 말이 없었다.

미리 예약해 둔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안내하니 안 검사는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불편한 기색이었다. 자리로 안내받아 테이블 앞에 앉은 안 검사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 태산은 어리둥절해 물었다.

“왜요? 프랑스 요리 안 좋아해요?”

“아뇨. 그보다 할 말씀이 뭔지는 몰라도 너무 과한 자리가 아닌지…….”

너무 비싼 곳으로 온 것이 부담스러웠을까?

“괜찮아요. 내가 자리 제안한 거니까 내가 살게요.”

“얻어먹기 부담스러워서 그렇죠.”

“나 돈 많으니까 부담 없이 얻어먹어요.”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안 검사의 눈빛이 돌연 싸늘해지는 것 같다.

“그건 알아요. 모는 차나 입는 옷만 봐도 알 수 있죠. 검사 월급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말은 안 해도 다들 꽤 유복하게 자라셨나 보다 짐작하고 있어요. 집안이 좀 사니까 저렇게 꼿꼿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요.”

묘하게 가시가 돋친 말이었다. 그런 뒷말이 있는 줄은 태산도 몰랐다.

“검사님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상관없어요. 그냥 이유 없는 호의는 받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안 검사는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면 혹시 다른 이유가 있어서 베푸시는 호의인가요?”

태산은 헛웃음을 웃었다. 아무튼 귀염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여자다.

“안 검사, 너무 융통성이 없는 거 아니에요? 사람 사이에는 조금 기름칠도 하고 그래야 잘 돌아가는 면이 있다고요.”

“기름칠이라고 생각하고 넙죽넙죽 얻어먹다가 떡값 검사가 되는 법이죠.”

“아이고, 참 청렴결백하십니다. 검사가 천직이네, 천직.”

태산의 너스레에 그제야 안 검사가 조금 웃음기를 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잘 먹겠습니다. 하지만 두 번은 사양입니다.”

“알겠습니다. 나도 괜히 돈 쓰고 사람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네요.”

코스가 나오자 안 검사는 언제 불평을 했냐는 듯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태산이 그런 안 검사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불편한 것치고는 잘 먹잖아요? 요리가 입에 맞아요?”

“드문 기회니까요. 어차피 먹을 거라면 충분히 즐겨야죠.”

“좋은 자세네요.”

테이블에 앉았을 때의 딱딱했던 태도를 생각하면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저번에 얘기했던 그 사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어머니가 아들 대신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려 했던.”

“수사 보강해서 아들을 기소했고 지금은 공판 넘어가 있습니다. 역시나 묵비권을 행사하더군요. 덕분에 분명한 범행 동기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공판부 전윤지 검사도 어려운 사건을 넘겼다면서 불평이 많았어요.”

“어머니 쪽은요?”

“아들이 대신 구속되자 처음에는 상당히 충격을 받는 듯했지만 외외로 금방 회복했어요. 지금은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열심입니다. 변호사와 상의했는지 증인 진술도 거부하고 있고요.”

“유죄 받기가 쉽지 않겠네요.”

“네, 하지만…….”

안 검사는 그렇게 말을 잇다 픽 웃었다.

“검사님 말씀처럼 어머니와 아들의 인생은 별개더군요. 잡혀 들어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오히려 더 힘을 내서 뛰어다니더라고요. 자포자기한 것처럼 기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에너지 쏟을 곳을 찾은 것 같습니다. 괜히 지레 걱정해 주었구나 싶어서 조금 허탈하기도 하네요.”

그렇게 말하는 안 검사의 표정은 편안히 풀어져 있었다. 슬슬 배도 부르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안 검사의 손도 확연히 느려졌다. 이쯤이면 얘기를 꺼낼 타이밍이 됐다 싶어 태산은 운을 뗐다.

“그런 그렇고… 마약전담반에 자원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네.”

안 검사는 와인 잔에 손을 가져가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왜 하필 그런 험한 부서에…….”

“검사님도 자원하셨잖아요.”

“난 뭐… 나한테 잘 맞을 거 같아 지원한 거지만.”

“저도 여러 가지로 고려해 보고 결정했어요.”

안 검사는 자원 이유를 분명하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

“혹시… 나 때문입니까?”

태산이 불쑥 말을 꺼내니 안 검사는 멈칫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태산을 마주 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나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함께 가기로 결정한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봤으면 해요. 그게 그런 마음으로 막 결정할 일도 아닐뿐더러 안 검사의 마음이 그렇다고 해도 난 그 마음에 답해줄 수가 없는…….”

“자, 잠깐만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듣고 있던 안 검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을 막는다.

“그러니까 제가 검사님을 짝사랑해서 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렇게 말해놓은 안 검사의 눈빛에 경악이 비쳤다. 아, 그래서 이런 과한 자리에 불러내서 포기시키고 달래려 한 건가?

그 표정을 보고야 태산은 자신이 뭔가 크게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안 검사가 그런 결정을 하는 데 혹시 내가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듬더듬 변명하면서도 태산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검사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죠. 검사로서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고, 그것도 결정할 때 고려한 요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안 검사는 그럴듯한 변명을 지어내려 안간힘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느꼈다.

자신은 강 검사로 인해 검사 인생과 도덕관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마약전담반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런 치열한 고민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 사태의 원흉인 강 검사는 그것을 태평하게 연애 감정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 제기랄. 못 해먹겠네.”

안 검사가 얘기를 하다 말고 불쑥 중얼거린 말에 태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 * *

“맞아요. 검사님 때문에 함께 가기로 결정한 겁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안 검사는 강 검사 때문에 마약전담반을 자원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인정해 버렸다. 태산은 혼란스러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안 검사가 슬쩍 한마디 덧붙인다.

“검사님과 저는 이제 공범이니까요.”

태산은 미간을 모은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안 검사는 잠시 주위를 곁눈질해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물었다.

“성춘모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가 된 양말, 택시 뒷자리에 숨겨놓은 거 검사님이시죠?”

증거 조작을 했다는 사실을 딱히 철저하게 숨긴 것은 아니었지만 안 검사가 눈치채고 있었다니 의외였다. 태산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안 검사를 마주 보았다.

그 눈빛에 안 검사는 적잖이 당황했다.

비록 가타부타 말하진 않았지만 진지한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테냐’라는 눈빛이었다. 긍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직접적인 답을 얻으니 새삼 충격이었다. 안 검사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습니다.”

안 검사는 남은 양말 한쪽을 숨겨 와 인멸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차마 그것만은 밝힐 수 없었다.

“제가 지켜오던 원칙을 거스르고 타협하게 만드셨으니 검사님은 이제 제 약점이기도 합니다. 한번은 눈감아 드렸지만 앞으로 계속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제가 곁에서 감시하고 막으려 합니다.”

태산은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태산이 살아오던 세계에서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원칙과 도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융통성 없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태산이 무심히 중얼거린 말에 안 검사가 눈썹을 치켜뜬다.

“강 검사님은 더하셨어요. 사고 이후에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하셨지만… 뻣뻣하다고 뒷말은 많이 들으셨어도 저는 그런 강 검사님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하셨나요?”

안 검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말끝에는 울음기마저 묻어난다.

태산은 생각했다. 안 검사가 강 검사에게 특별히 마음을 두었다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 예전의 강 검사에게였을지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그 마음에 보답할 길은 없을 것이다.

“사고 이후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죠. 예전의 강 검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어요.”

태산은 선화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더 이상 세상에 없는 태산을 잊고 행복해지라고.

그렇다면 태산도 아니고 강바른도 아닌 자신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강바른의 몸에 태산의 영혼이 깃든 이 기이한 존재는.

태산은 심란한 마음으로 와인 잔을 기울이고는 안 검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보다는 안 검사가 오히려 강 검사 같군.”

“무슨 뜻입니까?”

안 검사가 불퉁하니 물었다.

“앞뒤 꽉꽉 막힌 고집불통인 점이 예전의 강 검사랑 똑 닮았다는 얘깁니다.”

태산은 예전에 만났던 강 검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남 얘기처럼 말씀하시네요.”

안 검사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태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안 검사가 한번 결심한 일을 내가 막을 수는 없겠죠. 원하는 대로 해요. 하지만 나도 원하는 대로 할 테니 날 막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안 검사는 결의에 찬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럼 같이 한번 잘해봅시다.”

태산이 내민 손을 잠시 물끄러미 보던 안 검사가 손을 뻗어 굳게 맞잡았다. 비로소 안 검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강 검사의 손을 맞잡은 것으로 안 검사는 마음속 갈등은 일단 접어두었다. 그리고 새로운 길에 대한 순수한 열의를 빛내고 있었다.

* * *

새해를 앞두고 인사이동이 확정되었다.

태산은 수석검사로 안소영 검사와 함께 마약전담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흥렬 계장, 황수진 실무관도 같이 이동해 계속 태산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부임 1년 차인 최진우 검사는 이동하지 않고 형사3부에 남았다. 대신 수습 딱지를 떼고 독립검사실을 배정받았다. 안소영 검사가 있던 504호실의 공민아 수사관과 이유정 실무관이 최 검사를 보좌하게 되었다.

이로써 506호 검사실은 구성원 전원이 다른 사무실로 옮기면서 새로 구성되는 검사실에 방을 비워주게 되었다. 부서 이동 전에 맡은 사건을 모두 정리를 해두어야 하는 와중에 사무실 정리까지 해야 해서 몹시 번거로운 연말이었다.

태산도 집무실 물품 중 버릴 것과 가지고 이동할 것, 다른 곳으로 옮길 것들을 분류해 두어야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물품의 태반이 강바른 검사의 것이니 태산은 보아도 이게 뭔가, 어찌해야 하나 막막한 것들이 많았던 것이다.

“검사님, 짐 정리 다 하셨어요?”

황수진 실무관이 집무실을 들여다보며 참견을 했다.

“아니, 아직 못 했는데요.”

“오늘이 송년회 날인데 아직도 안 하고 계시면 어떡해요? 짐을 빨리 싸주셔야 제가 남은 걸 정리하죠.”

“알겠습니다. 이것만 마무리하고 할게요.”

귀찮은 마음에 대충 답했더니 황 실무관이 나가지 않고 가는눈을 뜬 채 지켜본다.

“알았어요. 지금 하면 되죠?”

태산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히 저 캐비닛에 든 거요. 꼭 정리해 주세요.”

황 실무관은 태산이 제일 피하고 싶던 그곳을 딱 짚어 언급했다.

태산은 미적미적 서랍 안에서 열쇠를 꺼내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황 실무관은 태산이 열쇠를 캐비닛에 찔러 넣는 것을 보고야 만족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태산은 캐비닛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열쇠를 돌렸다. 캐비닛 문을 열자 각종 문서와 파일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강 검사가 개인적으로 수집했다는 수사 자료들이다.

복귀 당시 이흥렬 계장은 강 검사가 평소 업무 외에도 다른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미루어 보면 강 검사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사건의 단서가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몸을 사용하기로 하면서 태산은 강 검사에게 빚을 졌다. 그 대신 억울한 죽음의 사연을 밝히고 복수를 해주기로 맹세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태산은 틈틈이 이 캐비닛의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샅샅이 다 살피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자료였다. 파편화된 정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읽어보아도 정리가 되기는커녕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다.

결국은 포기하고 다시 캐비닛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바쁜 업무에 치여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 애썼다.

골치 아프게 신경 쓰지 말고 모조리 다 파기해 버리자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혹시라도 단서가 될 물건이 저 안에 있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외면하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캐비닛은 태산은 마음 한구석을 무거운 돌덩이처럼 누르고 있었다. 그것을 부서 이동과 황 실무관이 눈앞에 강제로 들이민 것이다.

태산은 턱을 문지르며 한동안 고민했다. 이걸 다 어쩌면 좋을까?

그러다 결국 하나하나 꺼내 검찰청 압수수색용 파란색 박스에 담기 시작했다.

버릴 수 없다면 일단 집으로 가져다 두자고 생각한 것이다. 집이 좀 좁아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혼자 사는 처지에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역시 이 파란색 박스는 튼튼하고 많이 들어가서 좋군. 몇 박스나 나오려나? 택배 기사를 부르면 한 번에 다 가져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캐비닛의 맨 아래쪽 단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파일 하나가 무언가에 걸려 밖으로 잘 빠지지 않았다. 몇 번 덜컥거리다 빠진 파일을 상자 안에 집어넣고 나서 태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걸릴 만한 게 없을 텐데?’

그냥 지나치려다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태산은 무릎을 꿇고 앉아 캐비닛 안을 들여다보았다. 맨 아래쪽 단의 상판,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무언가 볼록한 것이 붙어 있었다.

손을 넣어 더듬어보니 작고 납작한 물건이 스카치테이프로 단단히 붙어 있었다. 태산은 손끝으로 테이프를 떼어냈다. 마침내 떨어져 나온 물건을 꺼낸 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았다.

작은 USB였다.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이것은 태산이 찾아오던 강 검사 죽음의 결정적 단서일지도 모른다.

“검사님, 다 끝나셨어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태산은 화들짝 놀라 손에 쥔 USB를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퇴근 시간 벌써 지났어요. 송년회 가셔야죠.”

황 실무관이 집무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제 다 끝났어요. 나갑시다.”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어나 캐비닛을 닫고 외투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506호 식구들과 함께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송년회 자리로 가는 동안에도 신경은 계속 바지 주머니의 USB에 가 있었다.

506호 식구들은 미리 잡아둔 중식당으로 가 송년회를 가졌다. 506호가 곧 해산하게 되므로 송별회를 겸한 자리였다.

이흥렬 계장과 황수진 실무관은 태산과 함께 마약전담반으로 이동하는 것이라 딱히 아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왁자지껄한 송년 분위기 속에 최진우 검사만이 내내 불퉁하게 입이 나와서 독한 중국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거나하게 술이 들어가자 이 계장이 젓가락으로 술잔을 두드리며 태산의 등을 떠밀었다.

“강 검사님, 506호가 해산하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한 말씀 하셔야죠.”

“다 같이 갈 건데 뭐 별다를 거 있습니까?”

그렇게 답하긴 했지만 태산도 은근히 기분이 들떠 못 이기는 척 술잔을 들었다.

“그동안 정말 수고하셨고 앞으로도 함께 잘해봅시다. 인천 뽕쟁이들 다 쓸어버리기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이 계장과 황 실무관 모두 다투어 잔을 들었지만 최진우 검사만은 혼자 잔을 홀짝거리고만 있다.

“최 검사님은 건배 안 해요?”

이 계장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최 검사는 중얼거렸다.

“다.같.이. 옮기셔서 참 좋으시겠어요. 저만 쏙 빼놓고.”

태산은 아차 했다. 같이 가지 못하는 최 검사가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신들만 너무 들떠 있었던 모양이다.

정작 최 검사에게 선택지가 있었다면 엘리트 코스가 보장된 처지에 덥석 마약전담반으로 따라올 것인가는 의문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과 처음부터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태산은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달래듯이 말을 걸었다.

“최 검사만 다른 부서로 옮기니 아쉽네. 그런 의미에서 최 검사도 건배사 한마디 하지?”

최 검사는 의외로 마다하지 않고 술잔을 들었다. 그러더니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하게 목을 가다듬는다.

“그동안 부족한 저를 물심양면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특히 강바른 검사님, 여러모로 많이 배웠습니다. 저에게 강 검사님은 누구보다도 좋은 검사, 최고의 검사이십니다. 앞으로도 강 검사님을 모범으로 삼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르쳐 주신 은혜에 누가 되지 않도록 어엿한 한 사람의 검사 몫을 해내겠습니다.”

말을 하는 최 검사의 목이 점점 메나 싶더니 말을 끝내놓고는 울컥 눈물을 쏟는다. 최 검사는 급히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 앉았다.

“최 검사, 우리 6층으로 올라가는 거야. 겨우 1층 떨어지는데 뭘 영영 이별할 사람처럼 서러워해?”

“원래대로라면 강 검사님은 아예 다른 청으로 부임해 가셨을 텐데 오히려 최 검사님 옮기실 때까지 1년 더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요. 자주 놀러 오세요, 검사님.”

506호 식구들은 당황해서 다투어 최 검사를 위로했다.

처음엔 공부만 한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되레 순수한 면이 있구나 생각하며 빙긋 웃는 태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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