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27화 (27/78)

제3장 입속의 칼

“자네가 맡아주었으면 하는 사건이 있네.”

태산은 장진호 부장검사가 꺼낸 얘기에 내심 의아했다.

사건이야 그냥 배당해서 내려보내면 그만인데 특별히 불러올려 맡긴다고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 무언가 로비라도 들어온 것일까? 그렇다면 말 안 듣는 자신보다는 차라리 형사4부의 서동욱 검사 같은 놈에게 보내는 것이 편할 텐데.

“연예인이 얽혀 있어서 말이야. 괜히 밖으로 얘기가 나가면 쓸데없이 파리들이 꼬일 거야. 기자니 뭐니 하는 놈들부터 말 옮기기 좋아하는 호사가들 있잖나. 그쪽 소속사 요청도 있고 해서 위에서도 조용하게 처리하고 싶은 눈치야. 연차도 있고 입도 무거운 주임검사를 요구해서 내가 자네를 추천했네.”

그런 일이라면 로비의 압박 없이 조용히 정석대로 처리하면 되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

“알겠습니다. 무슨 사건입니까?”

“대수롭지 않아. 사이버명예훼손과 모욕죄 정도라. 자네는 주임으로 이름만 올리고 수사는 수습검사에게 맡겨도 될 거야. 고소인이 그 누구더라… ‘순정이 있다’ 여주인공 있잖나.”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태산이 부장검사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은현서 말입니까?!”

“그래, 자네도 아는군. 악플러 중 하나를 고소했는데…….”

부장은 뭐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태산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배우 은현서. 간첩이 아닌 한 대한민국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 없을 유명 여배우였다.

하지만 태산이 놀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원래 문화와는 담을 쌓은 태산이었다. 공연이나 전시회는 물론이고 흔한 영화나 드라마에도 취미가 없었다.

선화에게 반강제적으로 끌려간 영화관에서 아직 신인이던 은현서의 첫 주연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시골 건달의 마지막 순정을 애절하게 다루었던 그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신파라고 욕도 먹었지만 태산의 심장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감정이입 해서 보았고 여주인공과 선화가 조금 닮았다는 생각도 했다.

눈시울이 붉어져 극장을 나온 태산을 선화는 내내 놀렸다. 태산은 극장 안의 공기가 나빠서 그렇다고 핑계를 댔다.

은현서의 풀꽃 같은 아름다움과 처연한 연기는 내내 잊히지 않았다. 조폭 두목이 멜로영화 따위를 보고 여배우에게 홀딱 빠졌다더라 같은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밖으로 내색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 후로 은현서의 영화가 개봉할 때면 반드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멜로영화라면 선화와의 데이트 핑계를 댔고 액션영화라면 사내 복지를 내걸고 아우들과 단체 관람을 하기도 했다. 그도 저도 아닌 영화는 혼자 몰래 심야 상영으로 보고 들어오기도 했다.

영화가 항상 태산이 본 첫 작품처럼 좋지는 않았다. 아리송한 것도 있었고 지루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태산은 은현서의 진솔한 연기가 좋았다.

말하자면 태산은 배우 은현서의 꽤 오랜 팬인 셈이었다.

은현서를 실제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만나려고 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은현서의 사건을 할당받게 되다니 얼떨떨하기만 했다.

태산은 부장검사가 하는 말에 기계적으로 응수하고는 부장검사실을 나왔다.

506호로 들어가려는데 어쩐 일인지 서동욱 검사가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온다. 서 검사는 태산과 코앞에서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씨~ 깜짝이야!”

서 검사는 슬그머니 태산을 피해서 달아나듯 508호 쪽으로 사라졌다.

태산은 서 검사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공사장에서 손을 봐준 이후로 서 검사는 태산을 슬금슬금 피했다. 어쩌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려 한 정체불명의 복면 사내가 태산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태산을 두려워하면서도 좀처럼 고분고분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항상 흰 눈을 뜨고 태산을 노려보곤 했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뺀질이 새끼야.”

태산은 중얼거리며 검사실로 들어섰다.

어쩐지 검사실의 분위기는 잔뜩 들떠 있었다. 특히 최진우 검사의 얼굴이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최 검사는 태산이 들어오는 것을 돌아보더니 손이라도 잡을 듯 바로 달려온다. 태산은 부담스러워 미간을 모으며 슬쩍 물러섰다. 하지만 최 검사는 아랑곳없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검사님! 은현서 사건이 우리 실로 배당된 게 정말인가요?!”

태산이 잠자코 있으니 황수진 실무관이 설명을 덧붙였다.

“서 검사님이 은현서 관련 사건이 우리 실에 배당됐다는 얘길 듣고 왔다면서 무슨 사건이냐 언제 소환하느냐 꼬치꼬치 캐묻고 가셨어요. 우린 전혀 모르는 얘기라고 했지만요.”

그제야 서 검사가 506호에 얼쩡거린 이유가 짐작되었다. 보아하니 연예인 고소 사건이라고 궁금해서 달려온 모양이다. 아무튼 쓸데없이 소문이 빠른 놈이다.

장진호 부장이 자신에게 사건을 맡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부터가 소문 좋아하는 호사가인 서동욱 검사 같은 놈한테 사건을 맡겼다가는 은현서 사건이 만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었다.

태산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예, 대단한 건 아니고 악플러 고소건입니다.”

최 검사가 반색하더니 어쩐지 의욕적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고작해야 사이버명예훼손이거나 모욕죄 아닙니까? 그 정도 사건을 강 검사님이 직접 수사하실 필요는 없죠. 더 중요한 사건도 많은데.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흠… 뭐 그러든가.”

태산은 마지못해 수락했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 검사는 벙긋 웃으며 기세 좋게 답했다. 태산은 이 자식은 또 왜 이러나 하고 생각하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 * *

“어휴, 정말 이런 놈들은 손가락을 잘라 버려야 한다니까!!!”

최진우 검사가 경찰조서를 읽다 말고 분통을 터뜨렸다. 506호 검사실 식구들이 별일이라는 눈으로 최 검사를 돌아보았다.

최 검사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세상 경험이 적어서인지 피의자를 신문하거나 피해자의 진술을 받을 때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서류만 접한 상태에서 이렇게 감정이 고조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오히려 서류만으로 사건을 대할 때는 누구보다 냉정하게 법리만을 파악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의아하게 돌아보는 검사실 식구들에게 최 검사는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악플을 달 수가 있어요? 진짜 눈이 더러워지는 것 같네요. 이런 놈들은 다시는 키보드 못 두드리게 손가락을 다 잘라 버려야 한다니까요.”

살인자한테도 저렇게 화를 내지는 않겠다 싶을 정도로 최 검사는 격앙되어 있었다.

“아~ 배우 은현서 악플러 사건요? 어휴, 은현서 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요? 결혼하고 이혼하는 동안 악플이 숱하게 달렸는데. 또 어디서 찌질이 하나가 모니터 뒤에 숨어 아가리 파이트라도 했나 보죠.”

황수진 실무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아니, 악플도 정도껏이죠. 이건 뭐 패드립에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성적 비하에… 조서 한번 보시라고요. 이게 제정신으로 쓸 수 있는 말인가.”

최 검사는 숫제 자리에서 일어서서 경찰조서를 황수진 실무관에게 밀어주려 했다. 황 실무관은 더러운 것이라도 본 듯 질색했다.

“으으… 싫은데요. 그거 제가 꼭 다 볼 필요는 없잖아요? 어차피 피의자 와서 신문받을 때 듣기 싫어도 다 들을 텐데.”

말하고 보니 짜증이 밀려오는지 황 실무관은 휴우~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떨어뜨렸다.

“내가 이놈 꼭 콩밥 처먹이고 말겠어!!!”

최 검사는 의욕을 불태웠으나 이흥렬 계장은 회의적으로 말했다.

“실형은 힘들걸요. 피의자가 초범이고 좋은 대학 다니는 건실한 청년이던데 앞길 창창한 학생한테 징역을 때리겠어요? 벌금형이 고작이겠죠.”

“건실한 놈이 할 일이 없어서 악플이나 달고 다닙니까? 왜 그런 놈들의 미래까지 염려해 줘야 돼요?”

최 검사가 열을 올리자 이 계장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아니, 왜 나한테 그래요? 그게 내 생각도 아니고. 판사들이 판결을 그렇게 내리는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태산이 벌컥 검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도 시끌시끌 분위기 좋네요. 힘내서 열심히 일해봅시다!”

형사3부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던 태산은 분위기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파이팅을 하더니 집무실로 들어간다.

멀뚱히 태산의 뒷모습을 보던 황수진 실무관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강 검사님, 오늘 되게 들떠 계신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별일이네.”

이 계장도 집무실 쪽을 바라보며 맞장구를 쳤다.

태산은 자리에 앉아 사건 기록을 뒤적이고 있었지만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문득 아직 켜지도 않은 컴퓨터 모니터에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배우 은현서가 검찰에 출두하는 날이다.

어쩐 일인지 최 검사가 의욕을 보이며 자신이 맡겠다고 나서기에 수사를 넘기긴 했지만 어쨌거나 주임검사는 태산이었다. 자신은 검사로, 은현서는 피해자로 검찰청에서 조우하게 되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좋은 일로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설레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태산은 은현서가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시간이 다가오자 집무실에서 나와 괜히 검사실 안을 서성거렸다. 혹시나 기자들이 기웃거릴까 봐 은현서의 방문 날짜와 시간은 검사실 식구들에게만 알리고 철저히 대외비로 했다.

미리 약속된 시간을 살짝 넘었을 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은현서가 검사실로 들어섰다. 볼캡을 눌러쓰고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으며 수수한 캐주얼 점퍼 차림이었지만 온몸으로 연예인의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동행한 사람은 정장에 서류 가방을 든 것이 변호사인 듯 보였다. 아마도 소속사에서 붙여준 변호사일 것이다.

은현서는 검사실로 들어온 후 마스크를 벗었다. 해사한 얼굴이 드러나자 최 검사는 잠시 멍해졌으나 그것도 잠시 한달음에 달려 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은현서 님이시죠? 저는 최진우 검사입니다.”

최 검사의 인사에 검사실의 모든 식구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님’이 뭐란 말인가? ‘씨’도 아니고.

최 검사도 실수를 인지했는지 얼른 정정하며 화제를 돌렸다.

“은현서 씨, 이분은 주임검사이신 강바른 검사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최 검사의 소개에 은현서가 태산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번거롭게 오가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간단한 사실 확인만 하고 얼른 귀가시켜 드리겠습니다.”

평소보다 깊이 있는 저음으로 유독 매너 있게 말하는 태산이었다. 황 실무관이 오오~ 하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실룩거려 태산은 몹시 민망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은현서는 그렇게 답하고는 화사하게 웃었다. 주위가 절로 환해지는 것 같은 미소였지만 태산은 어쩐지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은현서는 최 검사와 자리를 마주하고 앉았다. 태산은 그 곁에서 진술을 참관하는 입장을 취했다.

* * *

“피의자 정은호 씨가 3년여에 걸쳐 은현서 씨의 SNS에 천여 개의 악성댓글을 작성했다고요.”

“네, 맞아요.”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나요?”

“아니요. 그전부터 팬이라면서 종종 댓글을 달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은현서의 진술서를 들고 최 검사는 하나하나 질문하며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3년에 걸쳐 천 개라니 거의 하루에 하나꼴이다. 참 정성 어린 스토커라고 태산은 생각했다.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다지도 집요하게 증오와 저주의 말을 퍼부을 수 있을까.

“팬에서 갑자기 악플러로 돌변한 계기가 있을까요? 짐작 가시는 점이라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꽤 정성 들여 댓글을 달기에 몇 번 답글을 써주기도 했어요. 그 후로는 수시로 쪽지를 보내더군요. 쪽지에는 답을 해주지 못했어요. 바쁘기도 했고 쪽지로는 선을 넘는 내용을 보내는 팬들도 많아서 소속사에서도 답장을 하지 못하게 했거든요. 여러 번 쪽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으니 그때부터 점점 내용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왜 답을 안 보내냐, 나를 무시하는 거냐로 시작해서…….”

은현서는 그다음 말을 생략했다. 소속사에서 캡쳐해 넘긴 PDF 파일이 증거 기록으로 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은현서가 경찰에 제출한 진술서에도 악플 중 심각한 내용이 발췌되어 꽤 길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부분을 언급하며 확인해야 하겠지만 최 검사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한참을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다가 결국은 조심스럽게 진술서를 은현서에게 넘기며 말했다.

“확인하시고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힘드시면 변호사님이 대신 확인하셔도 됩니다.”

“아뇨. 제가 볼게요.”

은현서는 담담한 얼굴로 진술서를 읽어보았다.

태산도 사전에 수사 기록을 확인했지만 자신이 보아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내용이었다. 그런 내용을 당사자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은현서는 진술서를 한번 훑어본 뒤 곁에 앉은 변호사에게 넘겨주었다. 변호사는 시간을 들여 더욱 꼼꼼히 진술서를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변호사가 고개를 들고 고개를 끄덕이자 은현서가 최 검사에게 말했다.

“모두 제 SNS에 정은호 씨가 단 댓글이에요. 바로 알 수 있어요. 특유의 어투가 있거든요. 레퍼토리도 항상 비슷하고.”

최 검사는 진술서를 받아 들고는 혼잣말처럼 탄식하며 말했다.

“이런 저질스러운 말들을 3년 동안이나 견디셨네요.”

사건을 조사하는 검사는 어디까지나 객관을 지켜야 하겠지만 최 검사의 어투에는 안쓰럽다는 뉘앙스가 짙게 묻어났다. 은현서는 빙긋 웃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자양분으로 사는 연예인의 삶을 선택했으니 감수해야 할 일이겠죠. 그것도 일종의 관심이라고 생각하고 딱히 고소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소속사에서 제일 극성인 악플러 한 명이라도 제대로 처벌받게 해서 본보기를 보이면 악성댓글 기세가 좀 주춤해지지 않겠냐고 권해서요.”

“예, 맞습니다. 이런 놈들은 엄하게 벌해야 정신을…….”

최 검사는 그렇게 말했다가 태산이 눈치를 주자 얼른 입을 다물고 화제를 돌렸다.

“그럼 합의하실 의사는 없으신 거고요.”

“네.”

최 검사는 피의자 진술과 사실관계가 갈리는 부분에 대해서만 몇 가지 더 질문을 했다. 하지만 워낙 증거가 분명해 크게 다툴 부분은 없었다. 짧은 사실 확인이 끝나고 최 검사는 신문을 마무리하며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원래 악플로 실형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만 이 경우는 기간도 길고 악플 수위도 상당히 높아서 실형이 내려질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최근에는 사이버명예훼손죄에서 일반 명예훼손죄보다 형을 더 무겁게 정하고 있기도 하고요. 피의자가 죄질에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잠자코 있던 태산이 문득 물었다.

“혹시 정신과 치료는 받고 계십니까?”

“네?”

은현서가 영문을 모르고 태산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수위가 낮은 악플이라 해도 당사자에게는 상당히 큰 상처를 남기죠. 더구나 저런 심각한 악플을 3년 동안 수도 없이 받아왔다면 멘탈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요.”

은현서가 다시 한번 희미하게 웃었다.

“타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아요.”

은현서는 잘라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산도 따라 일어서며 재차 권했다.

“연예인이라 해서 기꺼이 감수해야 할 고통은 없습니다. 병원에는 꼭 가보도록 하세요.”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은현서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답했지만 어쩐지 형식적인 대답으로 느껴져 태산은 반신반의했다.

은현서가 사무실을 나서려는 순간 안절부절못하던 최 검사가 불쑥 말을 던졌다.

“은현서 배우님! 사실 저 팬입니다. 만나 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태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도냐?

아니, 그 전에 검사가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사심을 막 표출하고 그래도 되는 거야?

태산은 그런 의미를 담아 최 검사에게 눈총을 주었지만 최 검사는 아예 태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은현서를 바라보며 몸을 배배 꼬고 있을 뿐이다.

“어머, 그러세요?”

“네…….”

최 검사는 뭐라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흘낏 태산의 눈치도 본다.

은현서가 웃으며 물었다.

“사진 찍을까요?”

“네?! 저야 그래 주시면 좋죠. 괜찮으신가요?”

최 검사는 펄쩍 뛰며 반색했다.

“원래는 안 되지만 어디 안 올리고 가지고만 계신다고 약속해 주시면 회사 몰래 살짝 찍어드릴게요. 변호사님, 못 본 척해주실 거죠?”

변호사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 검사가 핸드폰을 들고 은현서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멀뚱멀뚱 보고 있는 검사실 식구들의 얼굴에도 부러운 기색이 비쳤나 보다. 은현서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제안했다.

“그럴 게 아니라 다 같이 찍으시죠.”

“아휴, 나 오늘 화장 제대로 안 먹었는데… 현서 씨 옆에 서면 얼굴 너무 커 보이지 않을까요?”

황 실무관이 너스레를 떨면서도 얼른 은현서의 옆으로 다가가 선다. 그러고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얼굴이 작아 보일지 핸드폰 액정을 보며 이리저리 턱의 각도를 기울여 보는 것이다.

이흥렬 계장 역시 재빨리 황수진 실무관의 옆에 붙어 서더니 벌써 포즈를 잡고 벌쭉 웃고 있다.

황당함 반 부러움 반으로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 태산에게 은현서가 말을 걸었다.

“검사님도 오세요. 혹시 사진 찍는 거 싫어하시나요?”

“…딱히 싫어하는 건…….”

태산은 그렇게 얼버무리며 못 이기는 척 은현서의 뒤로 가 섰다.

“자, 찍겠습니다. 모두 웃으세요~~!!!”

최 검사가 카메라 앱 셔터 버튼을 누르기 직전 그렇게 말했지만 태산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이미 셔터 소리가 울리며 사진이 찍혔다.

“한 장 더 찍겠습니다아~~!!”

태산이 다 찍었나 하고 물러서려 할 때 최 검사가 다시 외쳤다. 한 장을 더 찍을 줄은 몰랐기에 두 번째 사진도 방심한 표정으로 얼떨결에 찍혔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보로 남기겠습니다.”

최 검사는 헤벌쭉한 얼굴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은현서는 검사실 식구들에게 골고루 묵례를 해 보이고는 다시 마스크를 쓴 뒤 변호사와 함께 문을 나갔다.

은현서가 나간 직후 검사실 안에는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윽고 정적이 깨지며 기다렸다는 듯 감상을 쏟아냈다.

“와아~ 역시 연예인은 다르네요. 영화로 볼 때도 예뻤지만 완전 실물 깡팬데요. 짱 예쁘네요.”

“그럼~ 연예인은 역시 아우라가 다르다니까. 그렇다곤 해도 내가 검찰청에 있는 동안 가까이서 본 연예인들 중에서는 아우라가 단연 최고인데?”

“우리 은짱 실물 깡패인 거 이제 아셨어요? 아, 실물을 영접했는데 팬카페에 자랑할 수가 없으니… 아깝네, 아까워.”

“우리 은짱? 최 검사님 이제 대놓고 덕밍아웃 하시네요? 어쩐지 팬이라서 그렇게 자기 일처럼 분개했던 거군요?”

“허헛, 참. 그동안 입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참았어요?”

“검사로서 사건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장렬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최 검사의 너스레에 검사실 식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산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을 따름이다.

하나둘 태산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최 검사도 아차 해서 뒷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어디까지나 공정하게 사건에 임해야 하는데…….”

“어차피 감정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수사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보다 아까 그 상황이 피해자에게 압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최 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예?”

“피해자에게 검사는 사건의 수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사람이야. 그런 힘 있는 사람이 무언가를 요구하면 내키지 않더라도 거절하기 힘들어. 대놓고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맞춰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도 있고. 최 검사는 단순히 호감을 표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는 충분히 폭력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러한 심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은 태산이 과거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압도적인 피지컬과 완력,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산이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계약이 척척 성사되고 안 나오던 돈이 나오고 비밀은 술술 풀려 나왔다.

완력이 약한 여성들은 더욱이 태산을 두려워했다. 밤길에 마주치는 여자들이 혼비백산하는 것은 예사고 안면이 있는 여자들조차 태산의 어조나 분위기만 바꾸어도 흠칫 놀랐다.

하지만 태산은 여자들을 이해했다. 사내들조차 자신이 눈썹만 모아도 오금이 저려 어쩔 줄을 모르는데 여자들은 오죽할까.

아니, 어쩌면 태산 역시 여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손아귀에 힘만 주어도 바스러질 것 같은 여자들을 앞에 두고 있으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절로 마음이 불편하고 쩔쩔매게 되었다. 여자들과 거리를 두고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산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는 오직 선화뿐이었다. 눈치 빠른 선화는 어쩌면 태산의 그런 속내를 꿰뚫어보고 마음껏 어리광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는 생각 못 했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제야 최 검사는 진지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산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태산의 기색을 살피며 최 검사가 물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게 있으십니까? 아까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는 얘기도 하셨고…….”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말이야. 절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표정이 밝던데요. 정말로 괜찮은 것 아닐까요? 멘탈이 아주 강하다거나.”

이흥렬 계장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야 다행이겠지만 어쩐지 꾸며낸 표정 같아서요. 투명한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연예인이니까 대중 앞에서는 유리 가면을 쓰는 게 일상 아니겠어요?”

황수진 실무관이 한마디 보태더니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태산을 유심히 본다.

“그런데 강 검사님, 은현서한테 유독 신경을 쓰시는 것 같은데요.”

“아니, 그냥 그렇게 보인다고요.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죠.”

황 실무관의 예리한 지적에 태산은 짐짓 태연하게 답하고 얼른 돌아섰다. 하지만 집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최 검사에게 당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사진 찍은 거 톡으로 날려줘.”

“넵!”

최 검사가 웃으며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집무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최 검사가 그사이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태산은 사진을 다운받아 유심히 본다. 은현서는 화사하게 웃고 있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이 계장의 말처럼 정말로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불편해 보이는 것은 자신이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이왕 잘생긴 얼굴이 된 것 좀 멋있는 표정으로 찍었어도 좋았을 텐데.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움의 탄식을 뱉었다.

하지만 이내 벌쭉 웃고 만다. 은현서와 생각지도 못했던 셀카라니. 그거면 충분하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태산은 우렁차게 아침 인사를 하며 검사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검사실의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다.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도 없다.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최진우 검사의 주위는 숫제 검은 아우라라도 뿜어져 나오는 듯 어두웠다.

태산은 어리둥절해 다른 검사실 식구들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태산의 질문에 이흥렬 계장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 계장과 눈빛을 교환하던 황수진 실무관이 목소리를 낮추고 되물었다.

“아침에 뉴스 못 보셨어요?”

“예? 무슨 뉴스요.”

황 실무관은 대답 대신 핸드폰으로 뉴스 화면을 검색해 태산에게로 내밀었다. 태산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속보]배우 은현서, 숨진 채 발견. 자살 추정]

글자 하나하나가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태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한참을 핸드폰을 든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예감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최 검사가 갑자기 울컥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그랬어요. 악플로 실형받기는 힘들다고. 제가 그 사람한테, 은짱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 악플러 새끼 실형받기 힘들다는 거였다고요! 어떻게든 콩밥 먹인다고 했어야 했는데… 말이라도 그렇게 해줬어야 했는데…….”

최 검사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정확한 워딩은 ‘일반적으로 악플로 실형은 힘들지만 이 경우 불가능하지만은 않으니 노력하겠다’였다. 하지만 은현서가 죽은 지금, 그 정도 말로는 회한을 거둘 수 없는 듯했다.

“어차피 그 새끼 어찌어찌 애써서 간신히 콩밥 먹여봤자 길어야 6개월이겠죠. 변호사 잘 사서 후회하는 척 말만 잘하면 벌금 몇 푼 내고 끝날 테고요. 씨발, 사람이 죽었는데! 검사님, 저 그 새끼 출두하면 수사고 나발이고 그냥 제 손으로 죽여 버릴 겁니다!”

태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흥분한 최 검사를 나무랐다.

“최 검사, 왜 이래? 너 검사야. 그런 식으로 피의자 앞에서 편파적인 감정을 내보이면 수사 자체에 흠을 낼 수도 있어. 변호사가 그걸 재판에 이용 안 할 거 같나? 그래서는 피의자만 더 유리하게 만들어줄 뿐이야.”

평소라면 태산의 폭주를 막기 위해 안소영 검사가 했을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 검사 이상으로 충격을 받은 자신을 달래기 위해 태산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더욱이 은현서의 죽음이 피의자 탓이라고 볼 증거도 없어. 속단하지 마.”

“검사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검사님도 은현서가 이상해 보인다고 그러셨잖아요. 정신과 치료까지 권하셨고요. 그런데 그 새끼 탓이 아니라고요?!”

“검사는 어디까지나 증거와 인과관계로 얘기하는 거야. 그딴 억지 쓰려면 이 사건에서 손 떼. 이대로는 최 검사에게 피의자신문을 맡길 수 없어.”

“검사님!”

“토 달지 마!”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난 꼬맹이였지만 태산의 말만은 두말없이 따르던 최 검사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지 씩씩거리고만 있더니 벌떡 일어나 검사실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일들 보세요.”

태산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지시하고 집무실로 들어와 버렸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태산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최 검사의 좌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 그렇게 감정이 앞서는 타입도 아니었으므로 적당히 받아주고 시간을 주면 금방 이성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산 역시 충격으로 감정이 격해져 과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피의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심정은 태산이라고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태산은 한숨을 내쉬며 슬쩍 핸드폰을 꺼내 은현서와 찍은 사진을 열어보았다. 지금 보니 화사한 미소가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언제나처럼 거기로.”

* * *

“불러줘서 고마워. 나 오늘 기분이 좀 그랬거든.”

선화는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우울한 투로 말했다. 태산은 말려들지 않으려 퉁을 주었다.

“놀자고 부른 거 아니야. 중간보고 받으려고 부른 거니까.”

“성질머리도 급하시네. 얼마 전에 보고했는데 또 뭘 더 보고하라는 거야? 신뢰를 사야지 고급 정보가 나오지. 이게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처럼 금방 되는 일인가?”

선화의 항변에 태산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태산도 중간보고 목적으로 선화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은현서의 부고를 접하고 보니 옛 생각이 났던 것이다. 충동적으로 연락을 했지만 핑계가 없어 둘러댄 것뿐이다.

태산은 무심한 척 물었다.

“뭐 때문에 기분이 나쁜데?”

“흠…….”

먼저 말을 꺼내놓고도 선화는 풀어놓기를 망설였다. 한참 뜸을 들이더니 불쑥 묻는다.

“검사님, 은현서 알아?”

불쑥 나온 이름에 태산은 뜨끔했다.

“왜 몰라. 오늘 죽었다고 기사 떴잖아.”

“걔 나랑 닮았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태산은 푸웁 하고 마시던 술을 뿜었다.

“꺄악~ 더럽게!”

선화는 질색하며 피하더니 이내 눈을 흘긴다.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그 반응은 좀 너무하잖아.”

터무니없어서가 아니다. 닮았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이었다. 오히려 속을 들여다본 듯이 얘기하는 선화 때문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태산은 너스레를 떨며 모른 척했다.

“터무니없다는 걸 알긴 아는 모양이네. 아줌마 주제에 얻다 갖다 대?”

선화는 태산의 놀림에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우리 태산 씨가 말이야. 나더러 그렇게 은현서를 닮았다고 그랬었단 말이야.”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기억에 없다. 그렇게까지 자주 얘기했던가?

“솔직히 걔가 예쁘긴 한데 좀 박복하게 생겼잖아.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청상과부상이랄까.”

“그런 걸 우수에 젖어 있다고 하는 거야.”

태산의 반박에 선화는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우수든 처량이든 어쨌든 난 걔 닮았다는 말 별로였어. 내가 나이도 더 많은데 걔가 나를 닮았으면 닮았지 내가 왜 걜 닮아?”

선화는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떠올리더니 피식 웃었다.

“그 사람이 은현서 영화만 나오면 쏜살같이 달려가서 보고 오더라? 그런 날은 꼭 나더러 은현서를 닮았대. 그런 타입을 좋아했나 봐. 팬인 거 다 티 나는데 아닌 척하는 게 귀여웠지. 근데 귀여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어쩐지 심술이 나서 일부러 모른 척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조금 질투를 했던 건지도 몰라.”

선화는 제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깔깔 웃었다.

“그때의 나도 꽤 귀여웠잖아?!”

그러나 선화의 웃음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허하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낮은 한숨이 뒤를 잇는다.

“은현서 영화는 전부 태산 씨랑 함께 봤어. 그런데 이제 태산 씨도 없고 은현서도 없네… 은현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날들도,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도, 가장 사랑했던 사람도 이젠 다 가버렸구나 싶어서… 너무 허무하더라고.”

선화와 함께했던 시절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 같은 것은 태산도 마찬가지였다.

속을 쏟아놓은 선화는 거기에서 말을 끊고 계속 술을 부어넣었다. 태산도 주거니 받거니 선화와 술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시고 바를 나왔다.

“2차 가자! 2차!”

“무슨 2차야? 나 내일 출근해야 돼.”

태산의 체력은 신비롭게 진화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말술을 퍼 넣지 않는 한 이제 술에 취하는 일도 거의 없다. 술 마시는 기분을 만끽할 수 없다는 것 자체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2차를 간다고 내일의 출근을 걱정할 일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술은 안 취해도 분위기에 취해 뭔가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젊은 사람이 약한 소리 할래? 우리 태산 씨는 말이야…….”

선화가 허리에 척 손을 올리고 태산을 향해 일장 연설을 하려다가 하이힐 굽이 보도블록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순간 휘청했다. 태산은 재빨리 선화를 잡아 부축했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웠다. 올려다보는 선화의 눈길에 태산의 가슴이 찡하게 요동쳤다.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당신 아직도 예뻐. 앞으로 더 행복한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 그 남자는 그만 잊고 행복해져.”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산을 올려다보던 선화의 입가에 갑자기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태산은 아차 했다. 죽은 자신을 잊지 못하는 선화가 안타까워 한 말이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듣자면 마치 마음이 있는 여자에게 과거의 남자를 잊으라 하는 말 같지 않은가.

“자암깐~ 방금 그거 뭐야?”

태산은 거의 밀다시피 선화를 뿌리치고는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저만치 택시가 오고 있어 태산은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방금 그거 뭐였어? 그거 마치…….”

태산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선화를 택시 뒷자리에 거의 욱여넣듯이 태웠다. 택시 문을 쾅 닫으니 선화가 창문에 납작 달라붙어 짓궂은 눈빛으로 계속 종알거린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입 모양은 읽을 수 있다.

‘자기, 나한테 반했어?’

택시는 그대로 출발했다. 하지만 선화는 계속 창가에 붙어 멀어지는 태산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산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 날은 은현서 사건의 피의자 정은호가 검찰에 출두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사무실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최진우 검사의 주위에는 냉랭한 먹구름이 드리웠고 태산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태산은 태산대로 다른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아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집무실에서 나와 직원들 주위를 서성거렸다. 다른 직원들은 내내 태산과 최 검사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직원들이 너무 불편해 보여 태산은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피의자가 출두할 시간에 맞춰 들어오기로 했다. 산책 겸 천천히 건물 밖으로 나가 민원실을 돌아서 주차장까지 다녀오면 될 것이다.

막 검사실을 나섰을 때 갑자기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선화의 번호다. 또 무슨 뻘소리를 하려고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질인가 하고 태산은 미간을 모았다.

받지 않고 그냥 끊어버렸더니 금세 문자가 온다.

[긎한 일이야 전화 줘]

간결하고 딱딱한 어투에 오타도 있고 구두점도 없다. 어쩌면 정말 급한 일이 생겨 서둘러 친 문자인지도 모른다. 혹시나 신변에 위험이 생기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태산은 반신반의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건물에서 나오며 선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주차장으로 걷자니 몇 번 신호가 간 후 선화가 받는다.

“무슨 일이야?”

-검사님, 그게요…….

선화의 목소리는 웃음기 없이 진지했고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태산은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내가 어제는 술 취해서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어제 그건 대체 뭐였어?

진지하게 꾸며냈던 선화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장난스러운 어조로 바뀌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억눌린 떨림은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태산은 열이 확 올랐다.

“급한 일이라며?”

-이보다 급한 일이 어딨어? 검사님 나한테 반했…….

태산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아예 전화를 꺼버린다.

진즉에 알아챘어야 했는데. 이 사기꾼 여자, 전화를 안 받으니 문자로 낚은 건가? 문자로까지 연기를 하다니 정말 당할 수가 없다. 사람 놀리는 것 하나도 이렇게 치밀하게 하다니.

태산은 어처구니없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포 폰을 주머니에 넣고 주차장을 따라 슬렁슬렁 걷는데 저만치에서 젊은 남자 하나가 차에서 내린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이다.

옆자리에서 내리는 안경 쓴 사내는 딱 봐도 변호사 관상이다. 아마도 조사를 받으러 온 모양이다.

“어, 엄마. 지금 도착했어. 뭐 별거 있겠어? 변호사님이 잘 도와주실 거야.”

사내는 변호사와 함께 통화를 하며 태산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게 말이야. 은현서 그년이 재수 없게 뒤져 가지고 괜히 나만 피 보게 생겼잖아.”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췄다.

* * *

“그러게 말이야. 은현서 그년이 재수 없게 뒈져 가지고 괜히 나만 피 보게 생겼잖아. 변호사 말로는 별 영향 없을 거라는데 그래도 기분이 드럽네. 왜 하필 지금 죽어? 재수 없게.”

태산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곁을 지나가는 정은호를 돌아보았다. 정은호는 흘낏 시선을 주었지만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나오면서 출입증을 벗어 주머니에 넣어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검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나 지금 조사받으러 들어가니까 끊어. 끝나고 나오면서 다시 전화할게.”

정은호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태산의 마음속에 불길이 일었다. 저놈을 당장 이 자리에서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원래의 태산이라면 진즉에 놈을 잡아다 묻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산은 분노하는 최 검사에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며 훈계했다. 정말로 그 죽음이 정은호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면서.

태산은 그렇게 말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태산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이성을 앞세운 것은 강바른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의 뇌와 몸에 남아 있는 기억이 자신의 정신에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태산은 은연중에 느껴왔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만은 가슴도 이성도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저놈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고.

태산은 마음의 불길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검사실로 천천히 돌아갔다. 검사실로 들어서는 순간 핸드폰을 들고 서 있던 이흥렬 계장이 반색하며 말했다.

“검사님, 지금 막 전화드리려 했습니다. 피의자가 출두했는데요.”

자리에 앉아 있던 정은호가 변호사와 함께 일어섰다. 태산을 돌아본 정은호의 눈동자가 언뜻 흔들린다. 아까 주차장에서 스쳐 지나간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은호는 내색치 않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태산도 모른 척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받았다.

검사실 안에 최 검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난동을 부린 흔적도 없다. 아마도 정은호가 나타난 순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최 검사도 상당히 자제한 모양이다.

태산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 피의자를 신문했다.

“은현서 씨에게 3년 여간 달았던 악플입니다. 기억하시죠?”

태산은 은현서의 소속사에서 제출한 PDF 파일의 출력본을 정은호에게 내밀었다. 정은호 대신 변호사가 문서를 받아 들었다.

“솔직히 하나하나 다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내키는 대로 쓴 거라. 기록에 그렇게 남아 있다면 맞겠지요.”

“인정하신다는 얘기죠?”

정은호가 흘낏 변호사의 눈치를 본다.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은호도 순순히 답했다.

“예, 인정합니다.”

“피해자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말인데 쓴 사람은 기억도 못 하다니…….”

태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변호사가 뭐라 반박하려고 도끼눈을 뜬다. 태산은 얼른 다음 말을 이었다.

“원래는 팬이었다면서요? 언제부터 악플을 달게 된 겁니까?”

“수험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습니다. 재수해서 의대에 들어갔고 들어간 뒤에는 학부 공부가 너무 고됐어요. 그 스트레스를 악플을 달며 풀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판사들은 앞날이 창창한 젊은 엘리트를 매우 좋아한다. 아마도 같은 부류라 감정이입이 되어서일까? 그들의 미래를 지레 걱정해 현재의 사소한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의대와 공부 스트레스를 들먹이는 것을 보면 이놈은 변호사와 그쪽으로 전략을 잡기로 정한 모양이다. 한때의 실수로 미래를 망칠 위기에 처한 건실한 청년 코스프레 말이다.

“딱히 납득이 가는 변명은 아니군요. 그렇게 치면 대한민국 범죄율은 수능 직전의 고3이 가장 높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산은 콧방귀를 뀌며 퉁을 주었다.

갑자기 정은호가 울먹이는 시늉을 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비겁한 변명이죠. 제가 왜 그랬는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은짱에게 그런 더러운 말들을 쓰다니! 은현서 배우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제 삶의 낙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좋아하다 보니 자꾸 미워지더라고요. 쪽지에 답을 안 주면 미워지고, 연애를 한다고 하면 미워지고, 결혼을 한다고 하면 더 미워지고, 이혼을 한다고 하면 그것 봐라 하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은짱에게 그렇게 상처가 되리라곤 생각 못 했어요. 연예인이니까 당연하다고, 아니, 연예인이니까 그런 댓글 하나하나 다 읽어보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까지 버릴 줄은…….”

정은호는 눈물까지 훔치는 척했다. 하지만 눈물은커녕 눈가가 젖지도 않았다. 개기름만 번들거릴 뿐이다.

변호사가 정은호의 등을 도닥이더니 말했다.

“은현서 씨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게 정은호 씨의 악플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은호 씨는 이미 충분히 반성하고 도의적인 책임도 느끼고 있고요. 피의자에게 그 이상의 과도한 책임을 묻지는 말아주십시오.”

이것이 정은호가 변호사와 상의한 전략인가. 정은호는 어디까지나 깊게 반성하는 건실한 청년인 척하고 은현서의 죽음과 관계없다는 주장은 변호사에게 일임시키는 것이다.

태산은 비릿한 웃음을 걸고 말했다.

“칼 들고 직접 찌르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이 아닌 건 아니죠.”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정은호를 돌아보았다. 찌르는 듯한 눈빛에 정은호가 흠칫한다.

변호사가 역정을 내며 반박했다.

“살인이라뇨. 말씀이 심하시네요. 또다시 그런 워딩을 쓰시면 법정에서 과잉강압수사로 정식으로 문제 삼겠습니다.”

태산은 변호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시 사실관계를 확인해 갔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이후부터는 쓸데없는 실랑이 없이 필요한 부분만 확인하고 넘어갔다.

빠르게 조사를 마친 후 태산은 더 보기도 싫다는 듯 속히 정은호를 내보냈다.

“어휴, 진짜 재수 없어. 저런 게 악어의 눈물이네요.”

황수진 실무관은 문이 닫히자마자 혀를 차며 말했다. 이흥렬 계장도 맞장구쳤다.

“눈물이라고? 쥐 오줌만큼도 안 나오던데?”

태산은 직원들의 뒷담화를 뒤로하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대포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정은호의 입에서 직접 은현서에 대한 모독을 들은 이상 재판이고 뭐고 더 기다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범진아, 한 놈 잡아 와라. 전에 서 검사 데려갔던 거기로.”

* * *

정신이 들었을 때 먼저 느껴진 것은 등에 닿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 안이 뜨거웠다. 검찰 조사를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은호는 재수 옴 붙은 하루를 털어보려 친구들과 술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야 선팅을 짙게 한 검은 세단이 백미러에 자주 비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검은색 세단이 드문 것도 아니고 다른 차를 같은 차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번호판까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약속 장소가 있는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내리는데 문제의 검은 세단이 들어와 옆자리에 차를 세웠다. 정은호는 무심히 뒤돌아섰다. 등 뒤로 발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채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정은호는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과 함께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납치인가?’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기억을 되새겨 보던 정은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는 악착같이 돈을 버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그 부를 악착같이 지켰다. 그 덕에 수없이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 적들 중 누구라도 벌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원한 때문에 어린애도 아니고 장성한 자식을 납치한단 말인가. 차라리 원한을 산 장본인을 납치할 것이지. 정은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인심을 잃은 부모를 원망했다.

“이 샛퀴를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그리 배짱이 있는 놈으로 보이진 않으니 손가락 하나 정도면 몸 사리지 않겠습니까?”

“손가락 하나로 되겄냐? 열 개를 다 자른다믄 모를까?”

“칼은 제가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만 손가락 여러 개를 자르려면 가위가 낫지 않겠습니까? 공구함 찾아보면 있을 것 같은데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내 둘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거리가 있는 데다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고 있어서 대화 전체가 분명히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자른다고 말하는 것만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등골로 소름이 달렸지만 정은호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깨어난 것을 눈치채면 지금 바로 손가락을 자를지도 모른다.

정은호는 눈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든 달아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이 잘릴 참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전부.

대화가 잠잠해지더니 부스럭부스럭 무언가 뒤지는 소리가 난다. 아마도 공구함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은호는 그 틈을 타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던 방향의 반대로 달렸다.

일단 도망쳐 나오긴 했으나 정은호는 길을 찾지 못하고 복도를 헤맸다.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핸드폰이 없다. 아마 그 사내들이 미리 빼놓았을 것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공사장의 가건물은 조명조차 없었다. 그나마 창가에서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복도는 침침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정은호는 필사적으로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옥죄어오는 심장을 달랬다.

‘나만 어두운 게 아니야. 쫓아오는 놈도 찾기 힘들 거야. 잘 숨기만 하면 도망칠 수 있어.’

정은호는 계단이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정신없이 발길을 옮겼다.

순간 등 뒤에서 바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은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고 숨을 곳을 찾았다.

근처에 있는 기둥 뒤에 바짝 몸을 붙인 정은호는 숨을 죽였다.

누군가 핸드폰 라이트를 켠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정은호가 숨은 기둥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불빛이 지나가는 순간 정은호는 자신의 코앞에 바로 계단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은호는 일 초가 천년 같은 심정으로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불빛이 사라지자마자 정은호는 네 발로 기다시피 계단을 향해 달렸다. 계단에 닿자마자 바로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다행히 높은 층은 아니었다. 한 층을 내려오니 곧바로 일층 로비가 나타났다.

정은호가 뛰는 소리를 듣고 추격자가 바로 계단 위에 나타났다. 라이트를 켜고 달려오는 추격자의 발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빨랐다. 정은호는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내달렸다.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흘낏 뒤돌아보니 긴 머리를 풀어 헤친 귀신 같은 남자가 붉은 눈빛을 짐승처럼 빛내며 뒤쫓아 오고 있었다. 손에서 번뜩이는 것은 분명 칼날이다.

“으아아아~~~ 누구 없어요?!”

그때였다.

쇳소리 섞인 기이한 음성이 정은호의 머리 위에 쩌렁쩌렁 쏟아졌다.

“목숨이 아깝기는 한 모양이군!”

정은호는 달리면서도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자신이 있었던 그 자리, 2층 창가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검은 복면을 쓰고 몸은 날개같이 얇은 옷으로 꽁꽁 감싸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압적인 몸의 실루엣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정은호는 생각했다.

‘박쥐?!’

다음 순간 거대한 박쥐가 2층에서 날개를 펼치고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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