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25화 (25/78)

제1장 눈눈이이(2)

서은섭은 고소취하서를 태산에게 넘긴 후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억울해요. 진짜 너무 억울합니다.”

누가 보면 정말 이놈이 피해자인 줄 알겠네. 여러 여자 골고루 만나면서 돈 뜯어내 편히 살아놓고 뭐가 그렇게 억울하다는 거야?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통수라도 한 대 쳐줄까 생각했다. 하지만 서은섭의 입에서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난 정말 그 누님이랑 얘기 나눈 죄밖에 없는데… 조폭 두목의 여자인지 누가 알았냐고요.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것 때문에 조폭이랑 엮여 평생 가슴 졸이면서 살아야 하다니… 이렇게 인생이 망가질 줄은…….”

태산은 선화 얘기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 그게 억울하다는 얘기였나?

“니 인생은 여자들 등쳐서 먹고살려는 마인드를 장착한 순간 이미 망가졌어. 누구 탓을 하는 거야?”

태산은 서은섭의 덜미를 잡아 끌어냈다.

“이제부턴 정신 차리고 성실히 일해서 먹고살아.”

태산은 서은섭의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집무실로 나오자 태산은 검사실 식구들을 의식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서은섭은 여전히 울상이었지만 별수 없이 마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쫓기듯이 검사실을 나가는 서은섭이다. 서은섭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검사실 식구들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태산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됐습니까?”

이 계장의 말에 태산이 태연하게 답했다.

“역시 사기죄로 걸기는 좀 힘들겠더라고요.”

직원들은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태산은 씩 웃으며 손에 든 문서를 흔들어 보였다.

“대신 고소 취하는 받아냈어요.”

최 검사가 오옷 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황 실무관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휴, 다행이네요. 그 여자분들도 한시름 덜겠어요.”

태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소취하서를 든 채로 검사실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504호 검사실로 향했다. 504호 검사실 식구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무실 노크를 하자마자 안으로 들어섰다. 업무에 몰두하고 있던 안 검사가 번쩍 고개를 든다.

“강 검사님, 무슨 일로…….”

안 검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태산은 안 검사의 책상에 문서를 내려놓았다.

“이거면 불기소되겠죠?”

안 검사가 미간을 모으며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강경하게 처벌을 고집하던 그 고소인이 이렇게 쉽게 고소를 취하했다고?

바로 뒤돌아 나가려는 태산을 안 검사가 급히 불러 세웠다.

“혹시 고소인을 폭행하거나 그러신 건 아니죠?”

“전혀요. 손가락 하나 안 댔습니다.”

태산은 씩 웃으며 답하고는 뒤돌아섰다. 다음 말을 꾹 눌러 삼킨 채.

‘협박은 했지만.’

안 검사는 뒤돌아 나가는 강 검사의 뒷모습을 미심쩍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태산은 돌아와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정신이 흩어졌다. 억울해하던 서은섭의 표정이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여자들에게 사기 친 혐의를 추궁했을 때 보이던 가식적인 억울함과는 달랐다. 진심으로 한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선화도, 서은섭도 처음부터 일관되게 말동무를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서로 말을 맞춰 변명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더욱 괘씸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사실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태산은 퇴근 후 잠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뒤척이다 충동적으로 선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검사님이 이 밤에 웬일? 내 생각 난 거야?

따지고 보면 정말로 선화 생각에 뒤척이고 있었지만 괜스레 욱하고 반발심이 솟았다. 태산은 다짜고짜 서은섭의 이름을 꺼냈다.

“서은섭이라고 알아?”

수화기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흐른다.

-…누구?

선화가 느리게 되물었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것일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걸까?

“서은섭이는 당신 안다고 하던데?”

-자기야, 나 사람 얼굴이랑 이름 정말 잘 기억하거든? 이게 사업 밑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서은섭이라는 이름은 정말 모르겠는데? 진짜 나랑 아는 사람 맞아?

그러고 보니 호스트 시절에는 가명을 썼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오늘 검찰청에서 만난 놈이야. 당신이랑은 호스트 시절에 인연이 있었다던데? 당신한테 손댔다가 임태산이한테 혼쭐이 났다고.”

-아아~~~!!! 저스틴?!

저스틴이라니. 생각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예명이었다.

중2스러운 언행으로 10대나 꼬셔서 데이트할 법한 남자의 이름 아닌가.

-어머! 걔 소식을 검사님한테 들을 줄이야! 잘 산대?

선화는 마치 친구에게 동창생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반가워했다. 태산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잘 사는 놈이 검찰청 출입을 하겠어?”

-검찰엔 어쩌다 갔는데?

“여자들 등치다 걸렸어. 여덟 다리로.”

태산의 답에 선화가 큭큭 웃었다.

-걔도 참 여전하네.

하지만 이내 석연찮은 듯 중얼거렸다.

-내가 가르쳐 준 대로만 잘했으면 법에 걸릴 일은 없었을 텐데…….

예상치 못한 말에 태산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가르쳤다고? 뭘?”

-뭐긴 뭐야? 안 걸리면서 잘 벗겨먹는 법이지. 어디까지나 상대의 호의에 기대라. 어려운 척하면서 필요한 걸 어필하되, 절대 먼저 달라고 해서는 안 되고 상대가 주면 자발적으로 줬다는 걸 확실히 해두기라든가… ‘결혼’이라는 단어는 절대 금기라든가…….

노련하다 했더니 선화가 가르친 거였나?!

태산은 충격을 받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그놈, 당신 제자였어?!”

태산의 말에 선화가 깔깔 웃었다.

-아하하하, 제자? 뭐 제자라고 볼 수도 있겠네. 근데 걔가 지 입으로 그래? 지가 나 건드렸다고?

“정확히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태산은 자신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렇지? 설마 안 한 짓을 했다고 하고 다니진 않겠지.

표면적으로 태산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선화는 강 검사가 태산인지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굳이 강 검사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정말로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임태산이 혼자 미쳐 날뛰었다고?”

태산은 자괴감 섞어 중얼거렸다.

-그렇다니까. 난 분명 그냥 말동무만 했다고 얘기했는데도 믿어주질 않더라고. 원래 그 사람은 날 조금도 신뢰하질 않았으니까.

태산은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선화를 사랑하면서도 못 믿을 여자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한 데는 선화가 원인을 제공한 면이 있긴 하지만.

-걔도 처음에는 내가 돈이 있어 보이니까 잘 구슬려서 좀 뜯어내 보려고 했던 거 같아. 꿈도 야무지지. 내가 제 수법을 뻔히 꿰고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어? 근데 얘기 나누다 보니까 말이 꽤 잘 통하더라고.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줬어. 여자 꼬시는 법 같은 것도 조언해 주고. 얜 나랑 같은 과구나 싶어서 어쩐지 정이 가더라고. 뭐 연애 감정은 아니었지만 내가 걔를 애틋하게 여기긴 했으니 태산 씨 입장에서는 착각할 수도 있었겠지.

선화는 어쩐지 아련한 투로 옛일을 회상했다. 태산이 곁에 있을 시절을 그리워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선화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저스틴 걔도 참 안됐지. 순진하게 생겨 가지고 거짓말도 태연하게 잘하고 머리도 팽팽 돌아가는 게 될성부른 떡잎이었는데 말이야. 태산 씨가 그렇게 기를 꺾어놓지만 않았어도 대성했을 거야.

태산은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큰 사기꾼 되기 전에 일찍 싹을 잘라놓길 잘했네. 안 그랬다면 여자 몇 명 등쳐먹는 걸로 끝나진 않았을 텐데.”

-사기꾼과 사업가의 경계는 종잇장처럼 얇다고. 어떻게 알아? 진취적인 청년 실업가로 대접받고 살았을지.

“당신처럼 말이지?”

선화는 대답 대신 흐흥 코웃음을 웃었다.

* * *

윤찬열 경장은 아까부터 뒤를 쫓아오고 있는 검은색 세단을 룸미러로 재차 확인했다. 안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선팅을 짙게 한 것이 척 봐도 수상해 보였다. 저 정도면 당장 딱지를 떼도 될 정도다.

누군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수상한 기운을 풍기며 미행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고 따라오는 것일까?

윤찬열은 서서히 차 속도를 늦추었다. 세단도 같이 속도를 늦춘다. 도로변에 차를 대자 세단도 그 뒤에 멈춰 섰다.

그대로 잠시 기다렸지만 세단은 멈춰 서 있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납치하거나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아닌 것 같다.

윤찬열은 세단의 차량번호를 주시하며 본부에 무전을 쳤다.

“차량 조회 부탁합니다.”

곧 본부에서 회신이 왔다.

-태산건설 법인 차량입니다.

태산건설이라. 합법적인 기업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조폭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다. 와룡회 두목 이웅배가 회장으로 있는 WB홀딩스의 자회사이고, 대표인 임태산은 이웅배의 오른팔이라 했다.

최근 임태산이 사고로 사망했는데 그 사고가 발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뒷말이 무성했으나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없었다.

임태산이가 죽은 후 젊은 중간 간부가 그 자리에 앉았다 하더니 그놈일까? 그런데 나에게는 무슨 볼일로?

세단은 윤찬열이 차량 조회를 마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해칠 뜻은 없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신뢰를 주기 위한 배려일까?

윤찬열은 천천히 운전석에서 내려 세단으로 다가갔다. 선팅 때문에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쯤에 사람이 있을 것이다 생각되는 부분을 한껏 노려보며 윤찬열은 천천히 입을 뗐다.

“뭐요?”

잠시 후 뒷문이 열렸다. 윤찬열은 머리를 숙여 세단 뒷좌석을 훑어보았다. 볼이 움푹 파인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체구는 작은 편이었지만 온몸으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딱 봐도 일반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장발을 뒤로 넘겨 질끈 묶은 탓에 베일 듯 예리한 눈빛이 더욱 또렷하게 빛났다.

사내는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타라는 뜻이었다.

윤찬열은 잠시 망설이다 세단에 몸을 실었다.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미추홀 경찰서 윤찬열 경장이시죠?”

“그렇습니다만.”

“태산건설 김범진 대표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자가 바로 임태산의 후임인가 하고 생각하며 윤찬열은 김범진의 얼굴을 훑었다.

“용건이 뭐요?”

윤찬열은 잔뜩 날 선 어투로 물었다.

“사업하다 보면 인맥이 아쉬운 경우가 많아서요. 인연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결례가 되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말투는 조폭답지 않게 공손하기 짝이 없었지만 눈빛이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윤찬열은 코웃음을 쳤다.

“요즘 조폭들은 이렇게 대놓고 경찰한테 로비를 넣는 건가?”

도발할 셈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범진은 태연하게 받았다.

“알고 계시다니 얘기가 쉽겠네요.”

범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빙그레 웃었지만 웃는 얼굴조차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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