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눈눈이이(1)
“1140번, 면회다.”
오선용은 느리게 엉덩이를 일으켰다. 누가 찾아왔을까 생각하다가 비실 웃음을 흘린다.
딸년이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우악스러운 젊은 검사 놈이 뭐라고 구슬렸는지 아비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지만 결국은 후회했을 것이다.
딸년은 평생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벌벌 떨며 살아왔다. 고것이 감히 아비의 그늘 없이 살 수 있을 리 없다.
교도관은 면회실이 아니라 사무실 쪽으로 오선용을 데리고 갔다. 오선용은 교도관을 따라가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교도관은 총무실 문을 열고 오선용을 들여보냈다. 방 안에는 자신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던 젊은 검사가 앉아 있었다. 오선용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교도관이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해준다. 강바른 검사는 어리둥절해하는 오선용의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검사가 좋긴 좋아. 말만 하면 미결수든 기결수든 데려다가 이렇게 넓은 방 전세 내서 볼 수 있으니.”
강 검사는 그렇게 말하며 뭔가를 테이블 위로 턱 올려놓았다. 비닐봉지에 든 치킨 박스였다.
“이런 것도 반입할 수 있고 말이야. 이래서 예전에 우리 형님이 그렇게 고위검찰들 구워삶으려고 애를 썼었나 봐.”
무슨 소린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선용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태산의 맞은편에 와 앉았다.
“딸년이 보낸 건가요? 역시 아비를 모함해 감옥에 가둬놓고는 발 뻗고 못 자겠는 모양이죠?”
오선용은 슬그머니 치킨 박스를 열어 닭다리를 하나 집어 들고 뜯었다.
“그래, 잘 못 자는 거 같긴 하더라고. 맞고 산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거든. 게다가 아비가 엄마 죽이는 걸 목격한 충격도 있을 테고. 계속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던가…….”
강 검사는 무심히 말했다.
“그런데 왜 변호사한테 안 보내고 검사님한테 보냈답니까? 온다면 변호사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순간 강 검사가 푸웁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무슨 소리야? 치킨 심부름 해주는 검사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그럼 이건…….”
오선용은 어리둥절해 뜯고 있던 닭다리를 다시 보며 물었다.
“내 선물이야. 내일부터는 지옥이 열릴 테니까 그 전에 위로차.”
“…예?”
강 검사는 보란 듯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나다. 인천 구치소에 우리 애들 좀 있지? 알아보고 제일 미친놈으로 하나 준비해 둬라. 장난감 하나 보낼 테니까 신나게 만져주라고.”
그러고는 오선용의 가슴에 달린 죄수 번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140, 오선용이.”
그러고는 오선용에게 보란 듯이 씩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환영식은 내일부터.”
오선용은 치킨을 뜯다 말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강 검사는 바로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먹고 가. 편히 앉아 먹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잔인한 눈빛이었다. 그것이 그저 허풍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눈빛만으로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강 검사가 그대로 방을 나가려는 것을 오선용은 다급히 몸을 던져 잡았다.
“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강 검사는 발치에 매달린 오선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마치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딸년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그년이 부탁했습니까?”
“아니. 딱하긴 하지만 당신 딸 인생이야 내가 알 바 아니지.”
강 검사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 그럼요? 혹시 상소 포기하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그거야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
강 검사는 그렇게 답하더니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근데 대법원까지 공판 불려 다니려면 좀 피곤하긴 하겠네.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 30년 감옥살이 채울지, 아니면 짧게 살려다가 비명횡사할지. 뭐 어느 쪽도 지옥이겠지마는.”
강 검사는 큭큭 웃었다. 도저히 검사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검사님께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강 검사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 식구한테 손을 댄 거?”
힌트를 얻은 오선용이 반색하며 더욱 강 검사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진다.
“잘못했습니다. 그 여검사님께 사과하라면 하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용서해 주실 건가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어차피 상황은 안 바뀔 테니까.”
오선용은 다급했지만 강 검사는 느긋하기만 했다.
“남의 인생 지옥으로 만들어놓고 자기는 편하게 감옥 생활 하려는 거 뻔뻔하잖아. 그 정도는 감수하라고.”
강 검사는 다리를 털어 오선용을 뿌리치고는 문으로 다가갔다. 오선용은 강 검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부들부들 떨며 악을 썼다.
“검사가 사람 협박해도 돼? 고소할 거야! 변호사한테도 알리고 언론에도 까발릴 거야. 두고 보라고!”
강 검사는 나가려다 말고 돌아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당신, 심신미약 판정받았잖아. 미친놈 말을 누가 믿어?”
그 말에 오선용은 맥이 빠져 넋을 놓았다. 강 검사가 킥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상또라이들한테 잘 먹힐 타입이야. 괴롭히는 보람이 있다고나 할까.”
강 검사가 장난스럽게 엄지를 척 들어 보인다.
“행운을 빌지.”
마침 오선용이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교도관이 방으로 들어섰다. 강 검사는 교도관과 스쳐 지나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입니다.”
강 검사가 손가락을 머리 가까이에 놓고 빙글빙글 돌려 보이기까지 하자 오선용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교도관에게 가로막혀 손끝도 닿지 못했다.
“야! 강 검사! 강바른 이 새끼야!!!!”
다른 교도관들도 달려와 오선용을 제압했다. 그사이 강 검사는 등을 보인 채 유유히 멀어졌다.
* * *
-처음에는 살인으로 들어왔다고 하기에 만만치 않을 줄 알았는데 너무 고분고분해서 의외였다고 합니다. 저항도 전혀 없고 아주 순한 양이 따로 없다는군요.
범진의 보고에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라 익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가족에게만 폭력을 행사했던 범행 패턴을 보면 강자에게는 꼼짝도 하지 못할 타입이다.
-상소도 포기했으니 곧 형 확정되고 교도소로 이감될 것 같습니다. 교도소 쪽에는 연쇄살인범이나 변태성욕자 같은 제대로 미친놈들도 많습니다. 오선용이 이감되는 대로 그런 놈들한테 넘겨주라고 얘기는 해두었는데 벌써 이 정도로 기가 꺾여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기는 합니다. 우리 애들한테 지속적으로 교육하라고 해두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지…….
“내 이름을 걸고 지옥을 맛보여 주겠다고 했는데 그 정도로 끝내면 체면이 안 서지. 예정대로 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는 해줘야지.”
태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윤찬열이 쪽은 어때?”
-업무 복귀했습니다만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몸 사리고 있겠지. 박대용이 죽은 지 얼마 안 지났으니.”
자살을 시도한 박대용 경위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중환자실에서 목숨을 거두었고 박 경위의 비위는 공소권없음으로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윤찬열 경장이 박 경위의 협력자였다 해도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 시점에는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지시하신 대로 조만간 우리 쪽에서 먼저 접촉을 해보려고 합니다.
“알았다. 조심해서 접근해라. 윤찬열이보다 위에 누가 있는지를 캐내는 게 더 중요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범진과의 통화를 끊고 다시 업무를 보려는데 누군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예!”
대답을 하자마자 안소영 검사가 들이닥친다.
“검사님, 바쁘실 텐데 죄송하지만 피의자 취조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고 특히나 강 검사에게는 유독 거리를 두는 안 검사였다. 그런 안 검사가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다급히 찾아와 부탁을 하는 것일까?
여자라고 우습게 보고 뺀질거리는 남성 피의자라도 나타난 것일까? 위압적인 외모의 남자 검사였다면 태도가 180도 달랐을 놈들이다. 태산이 곁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꼬리를 내리고 고분고분 협조하겠지.
태산은 내심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시간은 괜찮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합니까?”
“아, 다행이네요. 그럼 피의자들 506호로 보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안 검사를 따라나서던 태산은 어리둥절해 물었다.
“이쪽으로 보낸다고요?”
취조 중에 어려움이 있어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니 비협조적인 피의자가 있다 해도 안 검사가 그 정도 일로 엄살을 하며 태산의 도움을 청할 타입은 아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해결하려 할 것이었고 잘해오고 있었다.
태산은 새삼 무슨 일인가 궁금해졌다. 태산의 그런 기색을 알아채고 안 검사는 난처한 얼굴로 설명했다.
“공범인 피의자 8명이 동시에 들이닥쳤어요. 날짜를 나눠서 소환했는데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돌려보내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아서 이왕 이렇게 된 거 한꺼번에 조사 끝낼 셈입니다. 어차피 그리 복잡한 사안도 아니라…….”
안 검사는 마음이 급한지 설명하면서도 자꾸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범이 8명이나 된다. 게다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는데 서로 응원해 주려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주장이 조금이라도 갈리면 혐의를 정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테다. 그런데도 안 검사는 복잡한 사안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태산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안 검사는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지금 공민아 수사관과 이유정 실무관이 간신히 붙잡아두고 있어서요.”
안 검사는 채 설명을 다 해주지도 않고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태산은 안 검사의 뒤를 따라 집무실 밖으로 나온 채 얼떨떨한 기분으로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흥렬 계장이 어리둥절해 엉덩이를 일으키며 태산에게 물었다.
“피의자 몇 명 보내겠다고 신문하는 걸 도와달라네요.”
같은 형사 3부에 속한 504호실과는 사안에 따라 함께 공조해 수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전담 사건의 피의자를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넘기는 경우는 없었다. 검사실 식구들 모두 궁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사건인데요.”
“그건 나도 잘…….”
황수진 실무관이 물었지만 안 검사가 미처 설명해 주지 않고 떠났기에 태산도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504호 검사실의 공민아 수사관이 피의자들을 끌고 나타났다. 피의자들은 4명의 여성이었다.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30대 후반 정도의 여성은 눈썹을 치켜세운 채 금방이라도 싸움을 걸듯 씩씩거리고 있었고 가장 어려 보이는 한 명은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나머지 둘은 울고 있는 여성을 연신 위로하며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예상외의 구성인 데다 이 무리가 보여주는 떠들썩한 박력 때문에 검사실 식구들은 기가 질려 있었다.
공민아 수사관이 태산에게 목소리를 낮춰 슬쩍 귀띔한다.
“붙어 있으니 신문에 방해된다고 안 검사님이 일단 두 그룹으로 찢어놓으라고 하셨어요. 저쪽 그룹 신문 끝날 때까지만 좀 맡아주십시오.”
공 수사관은 그렇게 설명하고는 태산에게 서류를 덥석 안겼다.
“수사 기록입니다. 그럼…….”
그러고는 부랴부랴 검사실을 나가 버렸다.
공민아 수사관이 나가자마자 피의자들이 다투어 입을 열었다.
“검사님, 저쪽 여검사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정말 억울합니다. 나쁜 건 그놈인데 왜 저희가 고소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얘는 그냥 제가 부추겨서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어요.”
“아니에요, 언니. 저도 제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 그 자식한테 조금이라도 갚아주고 싶은 마음에… 흐흑…….”
“그만 울어.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우리가 다 같이 의논해서 한 일이잖아?”
“맞아.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다 나눠 지자고.”
피의자들끼리 이렇게 의좋기도 드문 일이었다. 설마… 정말로 서로 응원해 주러 온 것이었나?
태산은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 * *
“그러니까 여덟 다리를 걸치고 있던 남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합심해 벌인 일이라는 겁니까?”
태산은 경찰 조서를 뒤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여덟 다리면 다행이죠. 아마 아직 우리가 모르고 있는 여자도 분명 있을 거예요.”
가장 연장자인 유화영이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506호실에서 맡은 4명을 포함해 총 8인의 여성들은 고소인 서은섭과 동시에 교제 관계였다고 한다. 어떤 계기로 서은섭의 부정을 의심한 유화영이 핸드폰을 몰래 뒤져 사귀고 있는 여자들을 모두 알아내 연락을 취했다.
배신감에 불탄 여자들은 복수를 위해 머리를 모았다.
가장 어린 김은효가 여행을 가자며 서은섭을 유인한 사이, 유화영은 서은섭이 거주하고 있는 자신 명의의 오피스텔 현관 비번을 바꾸고 서은섭의 짐을 모두 처분했다. 서은섭의 짐은 대부분 사귀던 여자들이 사준 것으로, 사주었던 사람이 가져가 버리든 되팔든 했다.
김은효는 여행을 가서 묵은 호텔에서 서은섭이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핸드폰과 차 키를 훔쳐 도주했다. 자동차는 서은섭에게 자동차를 선물했던 여성에게 넘겼다. 그리고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번호로 서은섭의 만행을 고발하는 카톡을 돌렸다.
혐의는 분명했고, 피의자들도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한 남자에 대한 적의로 똘똘 뭉쳐 있어, 의리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없는 다른 공범들처럼 자신의 죄책만을 줄이려 발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감싸주려 애썼다.
안 검사의 말대로 크게 복잡한 사안은 아니었다. 진술을 듣고 사실관계만 조서로 정리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소당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했다. 유화영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호소했다.
“한동안 조용하기에 반성하고 있나 보다 했어요.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우리를 고소했을 줄이야. 걔가 우리한테 뜯어간 물건이며 생활비가 얼만데 그중 일부라도 되찾아간 게 어떻게 죄가 되나요?”
“이유야 어쨌든 한번 증여한 물건의 소유권은 증여받은 사람에게 귀속됩니다. 선물한 물건은 모두 서은섭 씨 소유가 맞고요. 남의 물건을 훔쳤으니 당연히 절도죄가 되는 거죠.”
“그럼 주거침입은요. 그거 제 명의 오피스텔인데요. 내가 내 집에 들어가는 것도 죄가 되나요?”
“주거침입은 소유관계와는 상관없습니다. 실제 살고 있는 사람 기준이죠. 소유자라고 해도 직접 점유하고 있는 사람의 주거를 침해했으면 주거침입죄가 됩니다.”
“아니, 그런 법이 대체 어디 있어요?!”
“만약 주인집 아저씨가 셋방 아가씨 방에 밤에 몰래 들어와서 내 집인데 어떠냐 하면서 버티고 있으면 납득하겠어요?”
태산의 말에 피의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장은 사이다 마신 듯이 속이 시원했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아요. 복수하고 싶었다면 좀 더 방법을 신중히 고민해 봤어야죠.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카톡으로 사방팔방 알린 건 여러분에게 무슨 이득이 됩니까? 괜히 명예훼손죄만 추가되는 것밖에 더 됩니까?”
딱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심하기도 해 퉁을 주었더니 김은효가 바로 눈물을 쏟았다.
“저희들처럼 아직도 당하고 있는 여자가 있을까 봐 그런 거였어요.”
다른 여자들도 다투어 말을 보탰다.
“얘, 울지 마! 우린 잘못한 거 없어. 우리가 한 짓이 위법일진 몰라도 도덕적으로는 전혀 꿀릴 거 없다고.”
“걔가 이렇게 많은 여자들 울려놓고 계속 순진한 척하면서 다닐 걸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요. 모두 그놈의 민낯을 똑똑히 알아야 해요. 난 눈곱만큼도 후회 안 해요.”
태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 예. 잘 알겠습니다. 부디 판사님 앞에서는 그렇게 말씀 안 하시길 바랍니다.”
판사라는 말을 꺼냈더니 여자들은 멈칫했다. 법정에 설 것을 상상하니 조금 겁이 나는 모양이다.
“사정이 딱하긴 합니다만 다수인이 모의해서 벌인 일이고 죄책이 많으니 주임검사도 불기소처분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판사가 사정을 고려해 줄 수는 있겠죠. 어지간하면 합의하시고요.”
합의하라는 말에는 모두 미간을 찌푸리며 묵묵부답이었다. 부정을 저지른 건 상대방인데 합의를 하라니 부아가 나기도 하겠지마는.
“정리해 보죠. 서은섭 씨가 거주하는 오피스텔은 유화영 씨 소유였기 때문에 비번을 알고 있었다. 당일 피의자들이 물건을 가져가도록 문을 열어주고, 상황 종료 후에 비번을 바꿔 서은섭 씨가 출입하지 못하게 한 것도 유화영 씨고요.”
“네.”
유화영은 한결 누그러진 기세로 대답했다.
“선물했다는 자가용은 누구 명의로 되어 있습니까?”
“그건 저쪽 방에서 여검사님이랑 얘기하고 있는 친구가 선물한 거라… 누구 명의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유화영의 설명을 들은 후 이번에는 다른 두 여자에게 물었다.
“송지현 씨는 가전제품을 가지고 나오셨고요. 엄선영 씨는 옷과 가방 등 잡화를 들고 나오셨네요. 모두 본인들이 서은섭 씨에게 선물한 물건이라는 거죠?”
“네.”
“네, 맞아요.”
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태산은 내심 생각했다.
서은섭이라는 이놈, 아주 지능범이다. 그냥 되는 대로 자기 좋다는 여자 몇 다리 만나고 다닌 수준이 아니다. 8명의 여자가 서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관리하려면 대체 얼마나 치밀하게 거짓말을 하고 숨겨야 할 것인가.
게다가 여자들에게 받은 아이템도 서로 겹치지 않게 고루 구성되어 있다. 이 여자한테는 집을, 이 여자한테는 차를, 저 여자한테는 세간을, 또 다른 여자한테는 패션 잡화를 받아냈다. 뜯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이 정도면 계획적인 범죄의 냄새가 난다.
태산은 원래 취조하고 있던 여자들의 용의점에서 벗어나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김은효 씨는 고소인한테 뭐 해준 거 없어요?”
“저는… 아직 어리고 그렇게 넉넉하지도 않아서… 큰돈은 아니지만 수시로 용돈이며 생활비를 현금으로 줬어요. 장 봐서 냉장고도 채워놓고… 아직 돈 못 버는 공시생이라고 그래서… 부모님께 계속 손 벌리기도 민망하다고 해서… 저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험 통과할 때까지만 제가 뒷바라지하자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태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디테일에 따라서는 고소인을 결혼 사기 혐의로 역고소할 수도 있었다.
“결혼을 생각했었다고요? 고소인이 시험에 합격하면 결혼하자고 약속했나요?”
“아, 아뇨. 분명하게 결혼하겠다고 말한 건 아니지만…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시험에 합격하면 꼭 보답하겠다고 했어요. 호강시켜 주겠다면서. 저는 그 말을 결혼 약속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 사람은 한 번도 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네요.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김은효는 말을 하다 말고 또다시 눈물 바람이다.
“혹시 다른 분들은 그런 적 없습니까? 서은섭이 결혼을 빌미로 뭔가를 요구했다거나.”
“결혼까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요.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유화영이 바로 답했다. 조서상 유화영은 30대 후반, 서은섭은 20대 후반으로 유화영이 10살 이상 연상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본 후 차례로 입을 열었다.
“자기가 합격하면 보답하겠다는 말은 항상 했어요.”
“딱히 보답을 바란 건 아니지만 인지상정으로 조금 기대를 한 건 사실이에요. 합격하고 나면 나한테 많이 고마워하겠지, 그 정도는 생각했죠.”
맥 빠지는 대답이었지만 태산은 오히려 더욱 의심이 들었다.
서은섭은 빈말로도 절대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이런 모호한 화법은 훗날 문제가 될 때를 고려한 지능적인 대응이 아니었을까? 어쩐지 더욱 프로 사짜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다른 피의자는 몰라도 김은효의 경우라면 서은섭에게 사기죄를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합격하면 결혼하겠다는 뉘앙스를 지속적으로 풍겼다. 김은효는 이를 철석같이 믿고 결혼자금을 미리 쓴다는 생각으로 금품을 건넸다. 이런 식으로 사건을 구성한다면 사기죄를 적용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태산은 서은섭을 소환해 좀 더 사안을 상세히 조사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피의자들이 조사를 마치고 돌아간 후, 안 검사가 태산의 집무실로 다시 건너왔다.
“신세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안 검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태산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고는 마음에 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피의자들 얘기 들어보니 이해되는 부분도 있던데… 안 검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안 검사는 의외로 냉담하게 답했다.
“한심하죠. 남자한테 빠져서 그 사달이 났으면 툭툭 털어버리고 제 갈 길이나 갈 일이지,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서 인생 더 꼬이게 했으니 말입니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쉰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피의자들을 동정하고 있는 눈치다. 안타까운 마음에 더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태산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고소인의 처벌 의지가 확고하고 죄책도 가볍지가 않아요. 피의자들은 고소인과 합의할 생각도 없는 듯하고요. 초범이고 동기가 참작할 만하다지만 이래서야 불기소는 안 될 거 같고요. 조서에서 동기를 충분히 강조하고 구형을 최소한으로 해 판사가 선처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태산이 피의자들에게 해준 말과 대체로 같았다.
“고소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냥 남녀 간의 치정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냄새가 나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사기죄로 걸 여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딱히 결혼을 조건으로 내건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의자들이 자발적으로 금품을 제공했으니까요.”
안 검사는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면 더 이상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태산은 다르다. 아무래도 사짜의 구린내가 짙게 나는데 확인해 보지 않고 지나가기에는 몸이 근질거린다.
“그럼 고소인은 내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조사해 보고 다른 범죄 혐의가 밝혀지면 기소하고 싶은데…….”
안 검사는 수상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무리하게 압박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도 어찌 됐든 이 사건에서만은 피해자인데요.”
“표면적으로는 이 사건 피해자의 진술을 듣는다는 핑계로 부를 겁니다. 다른 건을 조사하려고 한다는 건 알아채지도 못하게 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요.”
안 검사는 썩 믿음이 가지 않는 눈치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인지해서 수사하신다는데 제가 막을 명분은 없지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안 검사가 제안을 수락하자 태산은 빙긋 웃었다. 그 표정이 꽤나 악의에 차 보여 안 검사는 내심 조금 후회했다.
또 뭔가 큰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미 수락한 것을 이제 와 무를 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옆 검사실에서 이쪽으로 가보라고 하셔서…….”
한 청년이 506호 검사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검사실 가운데서 직원들과 업무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던 태산은 문으로 들어서는 청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청년은 태산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멋쩍게 웃으며 이름을 밝혔다.
“서은섭입니다. 고소 사건 조사받으러 왔습니다.”
분명 그놈이 맞다. 그때는 공포로 파랗게 질려 있었고 지금은 해사하게 밝은 얼굴에 살가운 미소를 띠고 있지만. 아무리 달라 보여도 태산이 그놈을 못 알아볼 리 없다. 목소리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 * *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사내는 파르르 떨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겁내지 마라. 내가 설마 널 죽이기야 하겄냐? 그깟 계집 하나 때문에?”
태산은 씩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에 내심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선화가 호스트 한 놈과 업장 밖에서도 따로 만나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가 태산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태산은 선화에게 사실이냐고 추궁했고 선화는 선선히 인정했다.
태산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지 않아서, 연락도 잘 받지 않고 방치해서, 너무 외로워 만났다느니 어쩌느니. 선화는 마치 태산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 펑펑 울면서 변명했지만 태산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태산은 관계를 정리할 셈으로 선화의 오피스텔을 나왔다.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 갈라설 수 있다고도 자신했다. 하지만 마음의 불길은 가라앉지 않았다.
부하들을 시켜 당장 그 호스트 자식을 잡아 오라 시켰다.
태산이 몸을 낮춰 호스트와 눈을 맞췄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데다 골격은 가늘고 딱히 잘생긴 얼굴도 아니다.
나 대신 이런 애송이를 만났다고? 태산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남의 여자한테 손을 댔으면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지?”
“손을 댔다뇨? 아닙니다. 오해예요. 전 그냥 외로우시다기에 말동무를 해드린 것밖에…….”
호스트는 발뺌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태산의 화를 돋웠다. 선화와 짠 것처럼 똑같은 변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태산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태산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호스트가 다급히 말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다시는 선화 누님을 만나지 않겠습니다. 멀리 떠나라면 어디든…….”
호스트의 입에서 선화의 이름이 나온 순간, 태산의 눈에서는 불길이 솟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호스트는 기가 질려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선화 누님? 니가 감히 선화 이름을 입에 올려?’
호스트는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났지만 태산은 성큼 다가가 그대로 호스트의 불알 한쪽을 잡아챘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으깨 버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호스트는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었다. 곁에 서 있던 재호는 몸서리치며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다른 부하 놈들도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시선을 돌린다. 범진만이 동요 없이 부동자세로 서 있을 뿐이다.
“그려도 사내 구실은 혀야 헐 텐게 한쪽은 남겨두마. 앞으로는 내 눈에 안 띄도록 조신허게 살아라. 다시 눈에 띄는 날에는 아주 고자로 만들어 불랑게.”
태산이 슬쩍 턱짓하자 부하들이 달려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끙끙거리는 호스트를 끌어냈다.
태산은 화장실로 가 놈의 불알을 아작 낸 손을 꼼꼼히 씻었다. 하지만 마음은 전혀 후련해지지 않았다. 분풀이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아예 묻어버릴 걸 그랬나 하고 잠깐 생각했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선화와의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지금도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상황이다.
태산은 화장실을 나서며 재호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몸 좀 풀러 가자. 체육관에 연락해 놔라.”
“예, 알겄습니다.”
재호가 재깍 대답하며 태산의 뒤로 따라붙었다. 오늘 스파링 붙을 놈들 줄초상 나겠구나 생각하며.
* * *
‘서은섭이가 너였냐?’
태산은 어처구니가 없어 픽 웃어버렸다. 어쩐지 구린내가 진동을 한다 했더니.
정작 그런 사연이 있었음에도 놈의 이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이름을 알았다 하더라도 호스트로 활동할 당시에는 가명을 쓰고 있지 않았을까?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던 태산이 갑자기 웃어버리니 서은섭은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죠.”
태산은 집무실로 앞장섰다.
서은섭이 태산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서고 문이 닫히자 숨죽이고 있던 506호 검사실 식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저 사람이 그 여덟 다리 문어발 카사노바?!”
황수진 실무관이 흥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완전 멀쩡하게 생겼잖아? 성실해 보이는데?”
“그러게요. 저는 여자들이 홀딱 넘어갈 만한 미남일 줄 알았는데 그다지 잘생기지도 않았고.”
이흥렬 계장이 의외라는 듯 말하자 최진우 검사도 한마디 거든다.
“아니, 왜요? 멀끔하니 잘생겼잖아요. 약간 순진하고 여리여리해 보이는 게 어쩐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데도 있고. 저래서 여자들이 목을 맸구나 싶은데.”
황수진 실무관이 반론하자 두 남자 모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들한테만 보이는 매력이 있는 건가?”
“기준을 도통 모르겠네요.”
“혹시 황 실무관 눈 낮은 거 아니야? 아무한테나 잘생겼다고 해주고.”
이 계장과 최 검사는 황 실무관의 안목을 도통 신뢰하지 못했다. 황 실무관은 발끈해서 답했다.
“아무한테는 아니죠. 저 눈 높다고요.”
황 실무관의 답에 이 계장은 숫제 테스트를 시작한다.
“인천지검 최고 미남은?”
“강바른 검사님요.”
황 실무관은 고민도 해보지 않고 즉답했다. 최 검사가 낄낄 웃는다.
“그건 테스트가 안 되죠. 인천지검에 인물이 누가 있어요? 강 검사님이 단연 톱이지. 누가 봐도 잘생겼고 체격도 좋고.”
“요즘은 그렇지만 예전 같으면 508호 서동욱 검사님이랑 둘 중에서 몇 초 더 고민했을 거예요. 강 검사님이 안경 벗으신 후로 미모가 급상승하셔서…….”
황 실무관의 설명에 이 계장이 바로 미간을 모은다.
“뭐? 서 검사? 그런 느끼한 기생오라비 타입 좋아해?”
“아니거든요! 그런 스타일 완전 별로지만… 그래도 잘생긴 편인 건 인정하셔야죠. 재수가 없어서 그렇지. 기름기 쫙 빼고 스타일링을 좀 다르게 하면 훨씬 나아질걸요. 안 긁은 복권이랄까. 하는 짓 보고 있으면 완전 긁기 싫어지지만.”
최진우 검사가 기대감을 가지고 슬쩍 끼어들었다.
“그럼 저는요?”
황 실무관이 팔짱을 끼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최 검사를 한참 찬찬히 본다.
“고민하지 말라고요!”
최 검사가 울컥해 소리쳤다.
“솔직히 좀 미묘하네요.”
황 실무관의 답에 최 검사는 시무룩해져서 서류 더미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나는?”
이 계장도 덩달아 물어본다.
“아, 어디까지 했더라?”
황 실무관은 얼른 답을 피하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버린다. 이 계장은 멋쩍어 뒷머리를 긁었다.
집무실 밖에서는 엉뚱한 얼평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반면, 집무실 안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애초에 태산은 서은섭의 사기 혐의를 조사할 목적이라는 것을 숨길 셈이었지만, 정체를 알고 보니 그런 소모적인 밀당은 하고 싶지 않아졌다. 단번에 본론으로 들어간다.
“서은섭 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범죄 혐의가 포착되었습니다.”
서은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피해자고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뉘앙스였다. 태산은 그런 서은섭을 가증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피의자 중 일부가 서은섭씨에게 결혼 사기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시험에 합격하면 결혼한다는 전제로 금품을 증여했다고 말입니다.”
서은섭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저는 결혼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요. 말도 안 됩니다. 협박하거나 강요한 것도 아니고요. 자기들이 좋다고 갖다 바쳐놓고 이제 와서 사기라니요. 어처구니가 없네요.”
“합격하면 보답하겠다고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는데 그럼 그건 뭐였죠?”
“합격해서 월급을 받게 되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길 테니까 그때 갚겠다는 취지였습니다.”
“갚겠다? 그럼 증여가 아니라 대차라는 얘깁니까?”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선물해 준 마음이 고마워서 나중에 사정 허락하면 갚을 수도 있다고 의례적으로 얘기한 거죠.”
서은섭은 자신에게 손해가 될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거듭 말을 할수록 처음에는 순하게 보였던 얼굴에 차츰 비열한 인상이 드러났다.
딱 잘라 잡아떼는 꼴을 보니 태산은 슬그머니 부아가 끓어올랐다. 과거, 자신 앞에서 벌벌 떨며 변명하던 서은섭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인지도 모르겠다.
태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며 저절로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서은섭이, 여전하구먼.”
“…예?”
서은섭이 당황하여 느리게 답했다. 방금 전까지 꾸며내었던 놀란 척하던 표정과는 달랐다. 정말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는 듯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가학심이 슬그머니 솟아올랐다. 태산은 이왕 뱉어놓은 거 한껏 쥐고 흔들어놓자 생각했다.
“한쪽 남은 불알로도 여전히 여자들 잘 후리고 다니네.”
태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서은섭은 경악했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숫제 공포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어깨를 움츠리고 뒤로 엉덩이를 뺀 채 서은섭은 간신히 입을 떼 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내가 임태산이를 잘 알아서. 네 얘기는 좀 들었다. 그 버릇 여태 못 버렸냐?”
서은섭의 턱이 덜덜 떨려온다. 그대로 믿는 눈치다.
하기야 서은섭이 한 쪽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강바른 검사를 조폭과 형님, 아우 하는 스폰서 검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임태산… 아니, 임 대표님은 제가 여기 있는 거 아시나요?”
서은섭은 아직 태산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태산은 조금 더 애를 태울 셈으로 능청스럽게 답했다.
“내가 알려줄 수는 있겠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은섭이 매달리기라도 할 것처럼 다급하게 사정했다.
“제, 제발 임 대표님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알게 되면 절 죽일지도 몰라요. 그동안 임 대표님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살려고 노력했어요. 더 이상 유흥업소에서는 일할 수 없어서 저도 먹고살려고 여자들 꼬셔서 입에 풀칠한 거라고요.”
태산은 혀를 찼다. 이제야 실토하는군.
“너 하는 거 보고 결정하지.”
“뭐든지 하겠습니다!”
서은섭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당장 고소 취하하고 여자들한테 성의 있게 사과해. 돈도 갚고.”
뭐든 하겠다고 해놓고도 정작 태산의 요구 사항에 서은섭의 눈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비쳤다.
“그게 싫으면 사기죄로 들어갔다 오든가. 감방에서는 임태산이 애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겠지만.”
“아, 아니요. 하겠습니다. 할게요!”
서은섭은 대답해 놓고는 울상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지금은 갚을 돈도 없고…….”
“그건 니 사정이고. 여자들한테 잘 빌어봐. 한때나마 사귀던 사이니 얼굴 들이밀고 애원하면 사정 봐줄지도 모르지. 일시불로 갚든 할부로 갚든 다 갚으라고. 여자들한테서 볼멘소리 나오면 바로 임태산이한테 연락 들어갈 테니까.”
태산은 그렇게 말하고는 악의를 담아 킥 웃었다.
“도망 못 가는 건 알지? 너 검사랑 조폭, 양쪽에 찍힌 거야. 양지에도 음지에도 숨을 곳은 없어.”
서은섭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산이 종이 한 장과 펜을 꺼내 서은섭 앞에 들이밀었다.
“부르는 대로 써. 고소인 서은섭, 주민번호랑 주소 쓰고…….”
서은섭은 태산이 부르는 대로 고분고분 고소취하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한 후 태산에게 넘겨주었다.
검사가 법을 모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