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23화 (23/78)

제10장 전략 수정

검사의 구형이 예정되어 있는 마지막 공판기일, 법정에는 안소영 검사와 최진우 검사도 와 있었다.

처음 이 사건의 주임을 맡았던 안 검사지만 이번에는 어디까지나 방청석 뒤편에 방청객으로 앉아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안 검사는 자신이 처음 담당했던 이 사건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반면 최 검사는 어디까지나 호기심으로 온 것이었다. 재판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고, 강바른 검사가 드물게 공판검사로서 법정에 서는 귀한 구경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공판검사는 원래 검사에 임명된 직후 잠시 스쳐 지나가는 보직이기 때문에 경험이 적은 젊은 검사들이 태반이었다. 경험 많고 능력 있는 수사검사가 공판까지 맡아 법정에 서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고, 검찰에서도 각별히 신경 쓰는 중대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위에서 딱히 지침이 내려온 것도 아닌데 10년 차에 가까운 초엘리트인 검사가 발 벗고 직접 법정에 나서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는 얘기였다.

최 검사는 이 공판이 강 검사에게 크게 한 수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내심 가슴 두근거리며 강 검사의 활약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지난 공판기일에 끝내지 못한 증인신문이 계속될 예정이었다. 첫 번째 순서는 검찰 측 증인으로 오시은이 진술하게 되어 있었다.

“증인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오시은 씨, 앞으로 나오세요.”

방청석에 앉아 있던 오시은이 일어나 증인석으로 다가와 섰다.

변호사 옆에 앉은 오선용은 오시은이 선서를 하고 증언석에 앉기까지 눈을 떼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오시은은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시선을 의식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오선용의 정신감정 결과가 심신미약으로 나오면서 태산은 오시은이 동요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다행히 한번 마음을 정한 오시은은 결정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두려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태산은 검사석에서 빠져나와 증인석 옆에 섰다. 보통은 검사석에 앉은 채 증인을 신문하지만 오선용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 굳이 증인석까지 간 것이다. 태산이 변호인석 쪽을 가로막아 서서 오선용의 모습이 가려지자 오시은은 한결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범행 당일, 증인이 퇴근 후 귀가했을 때 오선용 씨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취해 보이던가요?”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느냐고 말을 걸었는데 발음도 또렷한 편이었습니다.”

“당초 경찰에는 피고인이 만취해 있었으며 헛소리도 했다고 진술했는데요. 왜 진술을 바꾸었나요?”

“경찰에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왜 피고인이 무서웠죠?”

“술만 마시면 때렸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맞으며 자랐기 때문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결국 돌아가신 마당에 사실대로 말하면 저도 죽일 것 같았습니다.”

태산이 막아주어서일까? 오시은은 생각보다 침착하게 증언을 이어갔다.

검찰 측의 신문이 끝나자 변호사의 반대신문이 이어졌다. 태산이 검사석으로 돌아가자 오시은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기색이었다.

“증인은 피고인이 상습적으로 폭행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경찰에 신고된 것은 단 두 건뿐인데요. 사실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는데 과장해서 진술하는 것 아닙니까?

“과장이 아닙니다. 신고하지 못한 폭행은 훨씬 많았습니다.”

“그렇게 폭행이 심했다면 왜 신고를 하지 않았나요?”

“두 번 다 저희가 신고를 한 게 아니라 이웃에서 소란한 소리를 듣고 신고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풀려나자마자 더 심하게 맞았습니다. 그렇게 보복을 당하는데 어떻게 신고할 생각을 하나요?”

오시은의 하소연에 변호사는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슬쩍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술을 마시면 폭행을 했다고 했는데, 그럼 평소에는 어땠나요?”

“…어땠냐니요?”

“피고인이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가족에게 다정하게 대했습니까?”

변호인의 질문에 오시은은 은근히 분노를 내비치며 답했다.

“깨고 나면 미안하다, 잘하겠다 말하긴 했어요. 그때뿐이었지만요.”

“어쨌든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니라면 좋은 사람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경찰이 두 차례 가정폭력으로 입건하려 했을 때도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던 것 아닙니까?”

“그건 앞서서도 말했듯이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런 거였어요.”

오시은은 답답하다는 듯 호소했다.

“술에 안 취했을 때는 좋은 사람이라는 게 무슨 소용인가요? 어차피 술을 끊지 못하는데. 취해 있지 않을 때가 거의 없었는걸요.”

“어쨌든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폭력 성향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요?”

“…….”

오시은은 대답을 망설였다. 변호인은 재차 추궁했다.

“피고인의 폭행은 전적으로 주취 상태에서만 일어난 일이지요? 맞습니까?”

오시은은 입을 뻐끔뻐끔하다가 결국엔 작게 대답하고 말았다.

“…네.”

“이상입니다.”

오시은에게서 원하던 답이 나오자 변호인은 그대로 물러났다. 태산은 그 상황을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검찰 측은 더 질문할 것 있습니까?”

“없습니다.”

판사의 질문에도 태산은 미련 없이 대답했다.

방청석에 앉아 공판을 지켜보고 있던 최진우 검사가 미간을 모은다. 충분히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더니 증인신문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는데도 흐름을 빼앗아 올 궁리도 하지 않고 재주신문(再主訊問)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최 검사는 그런 태산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답답해했다. 입이 근질근질하다 못해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안소영 검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대로라면 오선용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걸 더 뒷받침하게 되지 않나요? 상대방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데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걸까요?”

안 검사는 동의를 구하는 최 검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히려 심신미약을 확실하게 인정받으려는 거 같은데?’

안 검사가 생각을 미처 말로 꺼내기도 전에 다음 증인신문이 시작되었다.

“서지상 씨, 나오세요.”

판사가 이름을 부르자 금테 안경에 피부가 하얗고 냉랭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증인석으로 나왔다. 피고인 측이 신청한 증인이므로 변호사가 먼저 신문을 시작했다.

“오선용 씨와는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10여 년쯤 전에 저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았습니다.”

“당시 오선용 씨 상태가 어땠나요?”

“조현병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약물 치료에 들어갔고 상담 치료도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치료는 얼마나 받았나요?”

“두어 달 받고 중단했습니다.”

“완쾌해서 중단한 건가요?”

“아니요. 차도가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변호사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도 여전히 위험한 상태였다면 치료를 오랜 기간 중단하고 알코올 문제까지 겹친 현재에는 상태가 대단히 심각해졌을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환청을 듣거나 환각을 볼 정도로 악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나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상입니다.”

변호사는 거기서 만족하고 물러났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 정도면 심신미약뿐만 아니라 심신상실을 주장해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역력했다.

이번에는 태산이 일어나 신문에 나섰다.

“그렇게 위험한 상태였다면 본인이나 가족에게 연락해서라도 계속 치료를 받도록 강권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10년 이상 전이라면 기억이 분명치는 않을 텐데요.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던 거 아닌가요?”

정신과의사의 눈매가 조금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차분한 어투를 무너뜨리지 않고 답했다.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선용 씨가 치료를 중단할 당시, 이사를 가게 되었으니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충분히 위험성을 경고했기 때문에 전원을 해서 치료를 계속하겠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태산은 손을 들어 보이며 과장되게 놀라는 척을 해 보였다.

“주치의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일방적으로 치료를 중단했다는 건가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의사의 답이 떨어지자마자 태산은 신문을 마치고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태산의 신문에 불만이 많았던 최 검사가 어쩐 일인지 고개를 갸웃한다.

“전예숙 씨, 앞으로 나오세요.”

판사가 호명하자 이번에는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긴장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왔다. 역시 피고인 측 증인이라 변호사가 먼저 신문에 나섰다.

“오선용 씨의 이웃에 살고 계시죠?”

“네, 맞습니다.”

“그리고 오선용 씨를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으시고요.”

증인이 힐끔 오선용 쪽을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네. 그때는 가정폭력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고요. 하도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비명 소리랑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계속 들리기에 강도라도 든 줄 알고 신고했던 겁니다.”

“가정폭력일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다… 어째서 그랬죠?”

“그야 평소에는 워낙 점잖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낮에 마주치면 조용히 인사만 하고 지나갔어요. 말도 별로 없었고. 얼굴이 늘 붉은 편이기는 했지만 그저 그런가 보다 했죠. 술에 취하면 사람이 그렇게 바뀌리라고는… 나중에 경찰한테 가정폭력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안 믿기더라고요.”

“술에 취했을 때와 안 취했을 때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는 거죠?”

“맞아요.”

“술에 취했을 때 했던 행동에 대해서는 기억을 하던가요?”

“전혀 못 하는 것 같았어요. 신고했던 그때도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찾아와서는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고 싹싹하게 사과하고 갔어요.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면 난폭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고요.”

변호사는 신문을 통해 오선용이 주취 상태에서만 폭력 성향을 보였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증인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자신이 받은 인상을 천진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검찰 측의 반대신문 차례가 되었다.

“피고인, 본인 입으로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기면 난폭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고요?”

“네, 분명히 그랬습니다.”

“주취 상태가 되면 폭력 성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오선용 씨 본인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얘기군요.”

태산의 얘기에 증인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방청석 쪽에서 갑자기 가벼운 동요가 일었다.

“설마…….”

최 검사가 문득 중얼거리며 안 검사를 돌아보았다. 안 검사가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최 검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안 검사는 얼른 최 검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최 검사도 안 검사의 뜻을 알아채고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바꿔 바로 앉았다.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해 이웃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그때뿐이었습니까?”

증인이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그 후에도 종종 소란스러운 일이 있었고, 가끔 그 집 부인을 마주치면 다리를 절거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경우도 있었어요. 하지만 뭐 한번 신고했는데 가족들이 처벌을 원치 않아서 풀려났다고 하고… 그냥 서로 이해하고 사는 모양이다 했죠. 하지만 동네에는 소문이 좌악~ 났어요. 그 집 바깥양반이 술만 취하면 손버릇이 나빠진다고.”

“술만 마시면 상습적으로 폭력 성향이 나타났다는 거군요. 심지어 이웃들도 모두 눈치챌 정도로.”

“재판장님!!!”

변호인이 득달같이 이의를 제기하러 일어섰다.

“이상입니다.”

태산은 재빨리 신문을 마무리해 버렸다.

* * *

증인신문이 끝나자 재판장이 검사와 변호사를 보며 확인했다.

“이것으로 증거조사 절차를 마무리해도 괜찮겠습니까?”

“재판장님, 추가로 제출할 증거가 있습니다.”

태산이 증거서류를 들고 일어서니 재판장이 대번에 미간을 모았다.

“왜 사전에 제출하지 않았죠? 피고인의 방어권 침해라는 거 모릅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태산이 증거서류를 재판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사망한 피해자 채명순 씨의 최근 1년간 진료기록 사본입니다.”

판사가 진료기록을 훑어보는 동안 태산이 설명을 덧붙였다.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해왔지만 대외적으로 알릴 수 없었기에 혼자 집에서 치료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난 1년간은 폭행 정도가 점차 심해지면서 스스로 치료를 하기가 불가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료하는 중에 가정폭력이 의심되는 경우, 신고 의무를 집니다. 한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으면 혹시나 발각될까 봐 피해자는 주소지에서 거리가 있는 여러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태산은 단순히 사실을 설명한 것이라지만, 피고인에 대한 나쁜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방청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때문에 피해자가 치료받은 병원을 찾아 진료기록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건강보험공단에서 의료 정보를 제공받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보공단에 의료 정보를 요청하려면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고요.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태산의 설명에 변호인이 밉살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검사가 수사상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건보공단은 영장이 없이도 의료 정보를 쉽게 넘겨주는 편이었다. 이 젊은 검사는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증거 제출이 늦은 데 대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피고인이 적절하게 방어하기 곤란한 시점에 극적으로 내놓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절차를 확실히 밟은 것이므로 그에 대해 반발할 수도 없었다. 변호인은 혼자 이를 갈았다.

‘젊은 놈이 하는 짓은 완전 양아치네.’

변호사는 그런 생각을 하며 태산을 노려보았지만, 태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최근 1년간의 진료기록을 보시면 점점 더 상해 정도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 엑스레이 사진을 보십시오. 장기간 폭행을 당하면서도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해 곳곳에 골격이 변형된 부분까지 보입니다.”

판사는 줄곧 객관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기색이었지만, 진료기록을 보며 은연중에 눈살을 찌푸렸다. 태산은 내심 반기며 슬쩍 말을 보탰다.

“이 정도면 피해자가 범행 당일까지 살아 있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날이 아니라도 조만간 살해당했을 겁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검사는 지금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검사, 자제하세요.”

재판장이 주의를 주었지만, 할 말은 했기에 태산은 미련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재판장이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재판을 계속 진행했다.

“더 제출할 증거가 없으면 다음으로 피고인 본인 신문을 하겠습니다. 피고인 가운데로 나오세요.”

판사가 부르자 오선용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오선용이 법정 한가운데 서자 변호사가 일어나 질문을 시작했다.

질문은 지금까지의 피고인 측 주장을 다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오선용은 짧게 대답만 했다.

피고인신문을 마무리하며 변호사는 오선용에게 심경을 밝힐 기회를 주었다.

“그 당시 심정이 어땠는지 직접 진술해 보세요.”

“아내가 죽었다고 들었을 때, 처음에는 너무 놀랐습니다. 경찰에게 정말 죽은 게 맞냐고 몇 번이나 물었으니까요. 경찰은 아내가 확실히 죽었다고, 내가 휘두른 칼에 찔렸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그동안 술을 끊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한테도 미안하고 시은이한테도 너무 미안합니다.”

사전에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었겠지만 오선용은 피해자가 자신에게 살해당했다는 인상을 최대한 피해가며 진술했다. 마치 전혀 다른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아내를 죽인 범인은 자신이 아니라 술이라는 듯이.

검사의 신문 차례가 되자 태산은 그런 감상을 담아 한껏 비아냥거리며 질문을 열었다.

“피고인이 휘두른 칼에 찔렸다… 실수로 벌어진 일처럼 말했는데, 부검 기록을 보면 복부를 여섯 차례 난자당했다고 하는데요. 아닙니까?”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그랬다고 하더군요.”

“복부를 그렇게나 난자했는데 단순히 휘두르다 찔렸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 아닌가요?”

“…아무튼 저는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아서요.”

‘기억나지 않는다’로 일관하는 오선용을 태산은 지그시 노려보았다. 오선용은 슬쩍 시선을 피한다.

“정신과 치료는 왜 중단했습니까? 의사는 위험을 충분히 경고했다는데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느라 바쁘기도 했고요.”

“이사를 한다고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적극적으로 치료를 중단하지 않았습니까? 심각하다는 걸 충분히 알면서도 이후에 발생할 결과를 묵인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깊은 생각까지는…….”

태산은 피고인이 미처 답을 하기 전에 다음 질문을 던졌다.

“피고인은 주취 상태가 되면 자신에게 폭력 성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맞지요?”

피고인이 대답을 망설이자 태산이 채근했다.

“이웃의 증언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대답 회피하지 마세요.”

“…그렇습니다.”

“이미 폭력의 정도가 심각했고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겠지요?”

“…그건 잘…….”

“진료기록 똑똑히 보세요. 함께 생활하는 부부가 이 정도 심한 부상이 잦은데 전혀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이 뭐라고 답하려 했지만 태산은 아랑곳없이 다음 질문을 이었다.

“주취 상태가 되면 가족을 해치는 일이 반복되는데도 왜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지 않았나요?”

“받으려고는 했었는데…….”

“받을 생각도 없었던 거 아닙니까? 술에 취해서 가족을 폭행하든 말든 상관없었겠지요.”

“재판장님!!!”

변호사가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태산은 들은 척도 않고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범행 당일도 술에 취하면 가족을 심각하게 폭행할 수 있고 살인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서 그래도 상관없다고 용인한 채 술을 마신 것 아닙니까?!”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검사, 신문 중단하세요!”

변호사에 이어 재판장까지 목소리를 높이고야 태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백하게 물러났다.

재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절차를 진행했다.

“이것으로 피고인신문을 끝내겠습니다. 검사, 의견 밝히세요.”

드디어 검사의 구형 차례가 왔다. 최진우 검사는 강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피고인은 이미 수없이 가족을 폭행한 상습 가정폭력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반성하고 개선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의사가 조현병이 위험한 상태까지 진행될 수 있다고 심각하게 경고했음에도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치료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술에 취하면 반드시 폭력 성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범행 전까지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피고인은 술을 마시면 피해자 채명숙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죽어도 상관없다는 미필적고의를 가지고 음주를 강행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에 해당합니다.”

최 검사가 역시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법조기자들도 덩달아 술렁거렸다. 심지어 내내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있던 재판장조차도 눈을 크게 떴고, 배석들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는 행위자가 고의나 과실로 스스로를 심신미약 혹은 심신상실 상태에 빠지게 한 후 범죄를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행위자는 책임이 감경되거나 조각되지 않는다. 즉, 완전한 책임능력을 가진 자와 동일하게 처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실무에서 적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검사가 법정에서 이를 직접 언급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범행 당시 피고인의 심신미약, 더 나아가 심신상실을 인정한다 해도 피고인에게는 범행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장기간 가족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가해 고통을 주었던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 없이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는 점에서 중형이 불가피합니다.”

태산은 잠시 뜸을 들이며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극적인 효과를 노린 연출이었다.

“이에 본 검찰은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합니다.”

방청석 안의 술렁거림이 더욱 높아졌다. 피해자가 단 한 명이고 계획적인 살인이 아닌 사건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구형이었기 때문이다.

“와~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를 들고 나오실 줄이야.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어요.”

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오면서 최 검사가 흥분해 떠들어대자 안 검사는 흐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뭐랄까…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하긴 하네요. 자칫하면 판사한테 실무에서는 이런 뜬구름 잡는 이론 안 쓴다고 한 소리 듣고 얼굴만 붉힐 법한 주장이잖아요. 마치 이제 막 공부 시작해서 멋모르는 법학도가 치기에 던져놓을 법한 무모한 주장인데… 강 검사님 같은 분한테서 저런 생각이 나오다니…….”

“그만큼 용감하신 거죠. 쪽팔릴 거 무릅쓰고 어떻게든 피의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겠다고 결심하신 거니까요. 진짜 멋지네요. 싸나이네, 싸나이야.”

최 검사는 강 검사에게 새삼 반한 듯 흥분한 상태였지만 안 검사는 이유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강 검사의 주장이 초심자의 용기였다는 사실은 추호도 알지 못한 채.

2주 후, 최종 선고일이 되자 안 검사는 애초에 가졌던 의구심을 말끔히 잊었다. 강바른 검사가 결국 만족할 만한 판결을 받아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법원은 오선용의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3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비록 강 검사의 이론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검사의 만용으로 치부하고 무시해버리지도 않았다. 감정의가 심신미약을 진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오시은의 증언과 강 검사의 주장이 상당히 영향을 미친 덕분이었다.

10년 가까운 경력의 유능한 수사검사가 이렇게까지 무리한 주장을 펼친다는 것은 그만큼 피고인의 죄질이 나쁘고 검사가 피고인의 엄중한 처벌을 원한다는 인상을 재판부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재판부 역시 최 검사와 비슷한 해석을 했던 것이다. 강바른 검사가 검사로서의 체면이나 평판마저 내던지고 피고인이 중형을 받는 데 명운을 걸었다고.

결과적으로 태산의 압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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