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위험한 연극
태산은 병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했다.
뭐라도 사 가야 하는 것 아닐까? 꽃이든 먹을 것이든.
그러고 보니 병실에 꽃은 사 가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세균이 번식하고 공기에도 나쁘다나.
그렇다면 역시 먹을 것일까? 환자니까 죽이 좋을까? 하지만 어차피 밥은 병원에서 나올 텐데. 무난하게 음료수?
태산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좋은 일이라고 선물까지 사서 간단 말인가. 오래도록 입원해 있으라고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괜찮은지 얼굴이나 보고 빨리 나아서 복귀하라는 인사만 하면 될 것을.
태산은 그냥 병실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미리 알아둔 병실 번호를 확인하고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안에서 “네”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목소리는 씩씩하다.
태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안소영 검사가 이쪽을 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환자복을 입은 모습이 낯설었지만 병실에 누워서도 흐트러짐 없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안 검사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 검사는 조금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검사님?”
“그래요. 몸은 괜찮아요?”
“네, 별것 아닙니다. 부장님이 과하게 염려하신 거예요.”
“별것 아니라뇨. 검사가 취조 중에 피의자한테 공격당해서 병원에 누워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안 검사의 태도에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발끈했다.
안소영 검사가 취조 중 갑자기 달려든 피의자에게 목이 졸려 실신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504호 검사실의 공민아 수사관이 진압봉을 꺼내 빠르게 제압했기에 부상은 가벼운 편이라 했다. 외상은 목 주위의 타박상과 찰과상 정도라고 한다. 실신한 것은 과로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있었던 탓이었다고 의사는 진단했다.
안 검사는 확실히 평소보다 좀 마른 것처럼 보였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에 붙어 있는 거즈와 팔에 꽂힌 링거를 제외하면 환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혈색도 나쁘지 않고 목소리도 또랑또랑하다.
과로 외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은 사실인 듯했다.
하지만 과로라는 진단을 듣고 책임을 느낀 형사 3부 장진호 부장은 안소영 검사에게 체력이 회복될 때까지 입원을 명했다. 안 검사가 당장에라도 병원에서 퇴원해 복귀하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다며 태산을 보내 달래보라고 한 것도 장 부장이었다.
“그래서 더욱 빨리 복귀하려는 겁니다. 그 피의자 제 손으로 기소하고 싶습니다.”
안 검사의 눈빛이 냉랭하게 빛났다.
“그 사건만 사건이 아니잖아요. 푹 쉬어서 충분히 회복해야지 앞으로 제대로 일을 할 것 아니겠어요? 부장님이 그 건 나에게 인계했습니다. 내가 맡아서 잘할 테니 안 검사는 건강 회복에나 전념해요.”
“아니요. 그 사건 어떤 사건보다 중요한 건입니다. 제가 해야 해요.”
안 검사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고집이 센 줄은 알았지만…….
태산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의자를 가져다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얘기해 봐요. 안 검사가 우려하고 있는 부분 내가 충분히 고려해서 수사할 테니까.”
그제야 안 검사는 눈빛을 누그러뜨리고 물었다.
“어떤 사건인지는 대충 보셨죠?”
“예. 상습가정폭력범이 결국 아내를 살해했는데 심신상실을 주장하고 있죠. 정신병력과 알코올 중독을 내세우면서.”
“그 인간, 미친 거 아니에요. 미친 척하는 거지.”
안 검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제 목을 조를 때 분명히 봤어요. 그건 미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어요.”
“무죄를 받기 위해 거짓으로 심신상실을 주장하고 있다는 거죠? 그거야 놀랄 일도 아니네요.”
멀쩡한 정신에 범행을 저질러 놓고도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을 주장해 형을 줄여보려는 범죄자들은 흔하디흔하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취조할 때 돌연 목을 조른 것도 욱해서 덤빈 것이 아니라 공들여 연출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오히려 제 반응을 관찰하면서 즐기고 있는 눈빛이었어요.”
태산은 안 검사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심신상실을 주장하는 것이야 뻔뻔하기는 해도 피의자의 자유다. 피의자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무슨 수단이든 동원하는 것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심신상실을 가장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검사를 해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건 악질적인데?
“그렇단 말이죠? 정말 계산해서 한 짓이라면 절대 뜻대로 되게 놔둘 수 없죠. 염려 말고 나한테 맡겨둬요.”
태산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안 검사는 아무래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영 얼굴이 펴지지 않는다.
태산은 가슴을 툭툭 쳐 보이며 물었다.
“안 검사, 나 못 믿어요?”
하지만 정작 안 검사는 강 검사가 못 미더운 것이 아니었다. 강 검사에게만은 의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는 강 검사 본인도 모르게 증거 조작의 공범자가 되어버린 이후부터 강 검사와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더는 폭주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치열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그런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처리해야 할 사건을 강 검사에게 맡긴다는 것이 좀처럼 내키지 않았다.
“못 믿죠. 검사님은 같이 목을 조르실 분이니까요. 혹시나 피의자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안 검사는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그 안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만일 강 검사가 피의자에게 목이 졸리는 일이 생긴다면 옳다구나 하고 상대의 목을 조를 것이다. 정당방위가 인정될 수 있으니 망설이지도 않을 테다.
실제로 살인범 성춘모가 달려들었을 때 강 검사는 정말로 죽여 버릴 기세로 목을 졸랐었다.
[죽여 버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안 검사는 그 순간 강 검사가 중얼거렸던 말과 눈빛을 떠올리며 동요하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강 검사는 다행히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킬킬 웃었다.
“걱정 말아요. 그럴 일 없으니까.”
강 검사는 푸근하게 웃으며 안 검사를 안심시켰다. 안 검사도 자칫 마음을 놓을 뻔했다. 하지만 이내 눈빛에서 짓궂은 장난기를 비치며 덧붙이는 것이다.
“날 건드리지만 않으면.”
안 검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자 강 검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요?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하잖아요?”
“검사님, 상대가 먼저 공격했다는 핑계로 심각하게 반격하면 정당방위 인정 안 돼요. 어디까지나 공격과 반격 사이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고요.”
“예, 예. 알고 있습니다. 잔소리하는 걸 보니 금방 퇴원하겠네요.”
태산은 그렇게 응수하며 일어섰다.
“괜찮아 보여 안심입니다. 부장님께도 그렇게 말해두죠. 한시라도 빨리 복귀하고 싶을 테니. 그럼 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태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안 검사 역시 말만이라도 좀 더 있다 가라며 잡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태산이 나가고 난 뒤 안 검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아무튼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 * *
안 검사에게 인계받은 살인범은 왜소한 체격의 50대 남자였다. 이런 자가 자기 가족에게는 폭군으로 군림하며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행사했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변호사와 함께 검사실로 들어온 사내는 눈에 띄게 손을 떨고 있었다. 살인범과 마주 앉은 태산이 취조 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옆에 앉은 변호사가 덧붙였다.
“알코올 금단증상입니다. 구치소에 있는 동안 술을 마실 수가 없으니 금단증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임검사님을 공격한 것도 여검사의 목소리로 취조를 받다 보니 아내가 살아 와서 비난하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려서 그랬답니다.”
“알코올중독이 그렇게 심했다고요? 못 믿겠는데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온 탓에 태산은 알코올중독자들을 숱하게 봐왔다. 가까이는 주 변이 알코올의존증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자는 주 변보다 오히려 낯빛이 좋아 보였다.
“정신감정 중이니 결과를 보면 알겠지요.”
변호사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태산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피의자에게 다시 물었다.
“오선용 씨, 취조 중에 환청을 들어서 주임검사를 공격했다? 맞습니까?”
“답하기 어려우시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별달리 어려운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변호사가 어린애를 달래듯 피의자에게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태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피의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그렇습니다.”
손을 떠는 것에 비하면 목소리는 오히려 또렷했다.
“어떤 환청을 들었지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경멸하는 투로 나를 무시하는 말을 했어요. 술이나 처먹고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밥버러지라고.”
피의자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희미하게 목소리가 떨리며 분노가 묻어났다.
변호사가 아내의 환청을 듣고 안 검사를 폭행했다고 설명했을 때만 해도 태산은 왜 나를 죽였느냐 하는 식의 원망을 듣고 피의자가 미쳐 날뛰었다는 얘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죽은 아내가 자기를 무시했다고 화를 내고 있으니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죽은 후에도 이 정도인데 살아 있을 때는 아주 죽이고 싶어 안달을 했겠군.
“경멸하는 투로 무시하는 말을 했다. 그거 정말 환청이었나요? 아니면 젊은 여검사가 경멸하는 투로 무시하듯이 취조를 하는 게 마음에 안 든 건가요?”
태산이 묻자 변호사가 얼굴을 굳히며 잽싸게 피의자의 답을 가로막았다.
“대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고는 태산을 향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검사님, 지금 오선용 씨가 보이는 증상은 조현병환자에게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피해망상입니다. 오선용 씨가 정신병력이 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고의적으로 검사를 해치려 한 것처럼 곡해하시는데 아무래도 선입견을 가지고 수사하시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머리가 슬쩍 벗겨져 가는 이 초로의 변호사는 항의를 하면서도 유들유들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주 잘나가는 변호사는 아닌 것 같지만 경험 많고 능란한 타입이다.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태산은 대꾸 없이 다시 취조를 계속했다.
“범행 당시 상황으로 가보죠. 피해자를 수차례 식칼로 찔러 살해했는데 왜 그런 겁니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마셨나요?”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시다 보니 기억이 끊겼습니다. 경찰서에 끌려와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를 보아도 피의자는 계속 범행 상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었다. 태산은 경찰 조서를 뒤적여 보며 비아냥 섞어 말했다.
“그렇게 정신이 없던 와중에도 정신병력이 있다는 것과 알코올중독 상태라는 건 빠짐없이 진술했군요.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하다니 참 편리한 기억력이네요.”
피의자는 뜨끔했는지 아무 대꾸 없이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 * *
피의자 신문을 마친 후 이흥렬 계장이 오선용을 구치소로 돌려보내려 일어섰다. 피의자와 변호사가 검사실을 나가자 최진우 검사가 태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말이야?”
태산은 무심히 되물었다.
“오선용, 범행 시에 진짜 심신상실 상태였을까요?”
태산은 콧방귀를 꼈다.
“안 검사한테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는 놈이 내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얌전하던데? 미친놈이라면 상대 가려가면서 날뛰진 않겠지.”
“미친놈도 무서운 건 있을 수 있죠. 본능적으로 상대가 안 될 거라고 느끼고 꼬리를 말았다거나.”
최 검사는 농담 섞어 첨언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광인이 대상을 고르지 않고 광기를 발산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의 편견일 수도 있다. 광인들은 이성이라는 필터가 날아간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광기에는 사회의 분위기, 집단무의식이 투명하게 반영된다. 광인은 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대중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한다.
오선용이 자신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은 공격하고, 완력이 강해 보이는 권력자인 태산에게는 고분고분한 것을 들어 광인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역시 광기의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뭐 미친놈일 수도 있겠지. 상관없지만.”
“예? 상관이 없다뇨?”
태산이 중얼거린 말에 최 검사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심신상실인가 아닌가는 범죄를 처벌함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된다. 책임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어 무죄가 되는 것이다.
유무죄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쟁점에 대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태산의 태도가 최 검사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태산은 최 검사의 표정을 힐끗 보고는 덧붙여 설명했다.
“원래 술 취해서 개 되는 놈들은 본성이 개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선량한 사람이 정신병 있다고, 술 취했다고 아무나 찌르고 그럴 거 같아?”
태산의 답에 최 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긴 정신병으로 진단받고 치료 중인 사람은 오히려 정상인보다 범죄율이 낮다고 하더라고요.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태산은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사람을 죽였으면 정신병 때문에 갑자기 확 돌아서 그랬든, 술에 절어서 자기도 모르게 찔렀든 책임은 그놈에게 있는 거야. 난 그 새끼가 심신상실이든 뭐든 상관없어. 그냥 최선을 다해서 처넣을 거니까.”
태산의 말에 최 검사도, 황수진 실무관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멀뚱멀뚱 태산을 보았다. 태산이 큭큭 웃으며 되물었다.
“확실히 법리부터 따져야 할 검사가 할 말은 아니네요.”
최 검사도 따라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 실무관만은 웃음기 없이 말했다.
“강 검사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요.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집 딸이 진술한 거 보셨어요?”
태산도 피의자 딸 오시은의 참고인 진술 조서를 이미 읽어보았다.
피의자 오선용은 범행 당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고, 이상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헛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오시은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방으로 피해 있다가 밖에서 모친의 비명 소리가 들려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심지어 오시은은 아버지가 정신병과 술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않아 저지른 일이니 선처해 달라고까지 진술하고 있었다.
심신상실 상태에서 저지른 범행이라는 오선용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증인인 셈이다.
“오시은 씨 소환해 주세요. 자세한 얘기를 직접 한번 들어봐야죠.”
태산의 지시에 황 실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사님.”
* * *
“범행 당일 경찰에 신고한 것이 오시은 씨죠?”
“네…….”
“방에 피해 있다가 비명 소리를 듣고 신고했다고 진술했는데 그럼 범행장면을 직접 목격하신 건 아니고요.”
“네…….
“부친이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었다고 했는데 오선용 씨 평소 주량이 어떻게 되나요?”
“모르겠어요… 한번 드시면 끝도 없이 드시는데 제가 세어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어느 정도 멀쩡한 정신으로 마시는 경계가 있을 것 아닙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모호한 답이 이어지자 태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냈다. 태산의 반응에 오시은은 갑자기 움찔 놀라더니 눈치를 살핀다. 태산은 그런 시은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고 마른 체구의 오시은은 언뜻 아버지와 많이 닮아 보였다. 하지만 신문하며 자세히 보니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데다 계속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손을 심하게 떤 것을 제외하면 사람을 죽인 오선용 쪽이 훨씬 여유로워 보일 정도였다.
만성적인 폭력 피해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태산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런 딸이 어머니를 죽인 아비를 위해 선처를 호소했다니 믿을 수 없다.
태산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신문을 계속했다.
“범행 당일 오선용 씨는 술을 얼마나 마셨나요?”
“모르겠습니다. 퇴근하고 오니 이미 잔뜩 취해 있었어요.”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소주 한 병이고 그나마도 다 비어 있지 않았는데요. 그 정도로 인사불성이 될 정도의 주량이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밖에서 더 마시고 들어왔을 수도 있고…….”
“그럼 정확한 주량과 얼마나 마셨는지도 전혀 몰랐는데 만취상태라고 판단했던 이유는요?”
그렇지 않아도 주눅 들어 있던 오시은이 이 질문에서 확연하게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오시은은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자꾸 이상한 소리를 중얼중얼하시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글쎄요… 잘 안 들리기도 했고… 분명하게는 기억 안 나는데… 자꾸 무슨 목소리가 들린다고… 죽여라… 죽여라… 하면서… 너무 섬뜩해서 바로 방으로 들어왔어요.”
오시은은 얼버무리며 얼른 말을 맺었다. 태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오시은을 바라보았다.
“흐음… 척 들어도 위험하게 들리는데 그냥 들어와 버렸다고요?”
오시은은 눈치만 살피며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태산은 수사 기록을 들추어보며 말을 이었다.
“오선용 씨, 정신병력도 있는 데다가 이전에도 가정폭력으로 경찰이 출동한 적이 두 번이나 있는데요.”
“네. 하지만 멀쩡할 때는 좋은 아버지였기 때문에 엄마랑 저도 처벌을 원치 않았고…….”
오시은의 항변을 무시하고 태산은 강하게 추궁했다.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 일촉즉발인 상황에서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죠? 적어도 모친과 함께 피신했다면 살인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요.”
태산의 추궁에 오시은은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지르듯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너, 너무 무서웠어요!”
반응을 보니 그 대답만은 진심인 게 확실해 보였다. 오시은은 부친을 두려워하고 있다.
태산은 최진우 검사에게 슬쩍 눈짓했다. 최 검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사실을 나간다. 잠시 후 최 검사가 이흥렬 계장과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이흥렬 계장의 옆에는 오선용이 함께 있었다. 태산이 미리 오선용을 취조실에 데려다 놓은 뒤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오시은은 오선용이 검사실에 들어선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선용 쪽이 먼저 딸을 발견했다.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시은아!”
아버지의 목소리에 오시은은 전기에 감전된 듯 놀라 펄쩍 뛰었다.
부친의 얼굴을 확인한 오시은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기 시작했다. 오선용은 개의치 않고 반가운 기색으로 오시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시은아, 잘 지내고 있지? 경찰에 선처해 달라고 했다면서? 고맙다. 아빠 금방 나갈게.”
부친이 다가가자 오시은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태산은 다가가는 오선용을 저지했다.
“사담은 그쯤 하고 거기 맞은편에 앉아요. 어디까지나 대질을 위해서 부른 거니까.”
오선용은 딸의 맞은편에 앉아 싱글싱글 웃었다. 하지만 오시은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줄곧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렇게 심약해 보이는 자가 가족에게는 폭군으로 군림했다니 의아하다 싶을 정도였던 오선용은 가족 앞에서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여유 만만했다.
태산은 비로소 확신했다.
오시은은 자발적으로 오선용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두려워 요구하는 대로 한 것일 뿐. 오선용의 의사를 전한 것은 변호사일 테고.
기록에 남아 있는 두 번의 가정폭력 사건 때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던 것 역시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설사 자발적으로 불처벌을 원했다고 하더라도, 장기간 폭력에 노출되어 오선용의 노예나 다름없는 심리 상태였다면 그 또한 모녀의 진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태산은 오선용에게 오시은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해보았다.
“오선용 씨, 평소 주량이 어떻게 되시죠?”
“그게 뭐 대중없습니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끝을 보니까요. 얼마나 먹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죠.”
“범행 당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했지요?”
“예.”
“범행 전,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왔습니까?”
“아니요. 집에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건 반쯤 빈 소주 한 병뿐이었는데, 그걸 먹고 필름이 완전히 끊길 정도로 취할 수 있나요?”
“예전에는 아니었겠지만 요즘은 저도 늙고 몸도 안 좋아져서 몸 상태에 따라서는 적은 양에도 빨리 맛이 가더군요.”
오시은이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 이상 추궁해 봐야 그 이상의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의심하던 사실을 확인한 이상, 굳이 오시은을 더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
태산은 간단히 취조를 끝내고 오선용을 검사실에서 내보냈다.
오선용이 검사실에서 나가고 나서야 오시은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태산을 바라보는 오시은의 눈빛에서 언뜻 분노와 원망이 비쳤다.
“아버지를 부른다고는 말씀 안 하셨잖아요.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시은은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오시은 씨, 아버지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죠? 경찰 기록상에는 두 번뿐이지만 사실은 그 외에도 기록에 없는 수많은 폭행이 있었던 거지요? 오시은 씨도, 돌아가신 모친도 오선용 씨의 폭력에 평생 시달려 오신 것 아닙니까?”
오시은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면 부친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사실대로 증언하는 게 옳지 않나요? 형을 길게 받을수록 그렇게 두려워하는 부친을 오시은 씨에게서 오래 격리시킬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지배당해 왔으니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야 해요.”
태산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오시은은 한참 만에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사형시켜 주실 수 있나요? 아니면 평생 감옥에서 못 나오게 해주실 수 있나요?”
* * *
“그렇다면 아버지를 사형시켜 주실 수 있나요? 아니면 평생 감옥에서 못 나오게 해주실 수 있나요?”
오시은은 절박하게 물었다. 하지만 태산은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태산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구형한다 해도 형을 얼마나 선고할지는 판사에게 달려 있다. 치밀하게 계획한 잔인한 수법의 살인이거나 연쇄살인이 아닌 한, 사람을 죽였다 해도 사형이나 무기징역은 그렇게 쉽게 선고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이 유명무실한 제도가 된 지 오래되었다. 사형선고를 한다고 해도 집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태산이 답을 망설이자 오시은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 거죠? 그렇다면 못 해요. 언젠가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올 텐데 제가 불리한 증언을 했다고 죽이려 들면 어떡해요? 제 목숨은 누가 책임져 줄 건가요? 엄마도 죽인 사람인데…….”
오시은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오시은의 깊은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너무 쉽게 얘기한 것일까?
하지만 태산이 그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태산은 누군가에게 공포를 준 적은 있을지라도 누군가를 이렇게 두려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강자가 약자의 공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여기서 주저앉으려는 오시은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태산은 다시금 오시은을 설득했다.
“지금 이대로 심신상실이 인정되면 부친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져요. 하지만 제대로 증언하면 최소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두려움에 떨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장래의 불확실한 위험 때문에 그 소중한 시간을 포기하겠습니까?”
그제야 비로소 오시은이 태산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죠. 영원히 가둬두겠다는 보장은 못 해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합니다. 공판까지 내가 책임지고 맡아서 최대한 중형을 받아내겠습니다.”
태산은 아직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오시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농담 섞어 말했다.
“어찌 압니까? 감옥에서 늙어 죽을지. 혹시 형기 마치고 나오더라도 기력이 없어서 오시은 씨 해치지 못할 만큼 형 받아내면 돼요.”
하지만 오시은은 웃지 않았다.
“…아버지가 늙고 쇠약해졌다고 해서 두렵지 않을까요? 물리적인 힘 때문이 아니에요. 평생 두려워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오시은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단 하루를 살아도 자유롭게 살아야겠죠… 저도 알아요… 그러고는 싶은데… 그렇게 살아보지를 못해서…….”
한참을 고민하던 오시은이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검사님, 도와주세요. 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세요. 그러면 저도… 용기를 내서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맡겨주세요. 공판까지 내가 맡겠다고 했죠? 법정에서도 함께할 테니 무서워할 것 없어요.”
수사검사가 공판까지 담당하는 것은 사안이 복잡한 중대 사건이 아닌 한 예외적인 일이었지만 딱히 이 사건이 그러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볼 수도 없다. 공판까지 담당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태산의 호언장담에 오시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날… 아버지는 취해 있었지만 정신이 없을 정도로 많이 취하지는 않았어요. 헛소리를 했다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변호사님이 그렇게 얘기하면 아버지한테 유리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길 원한다고 해서…….”
역시 예상대로였다. 태산은 흥분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그렇다면 범행 상황도 목격했습니까?”
“아니요. 말씀드린 대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으로 피했기 때문에…….”
태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많이 취한 상태도 아니었고 위험한 신호도 보이지 않았다면서 왜 바로 피했나요?”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까요.”
오시은은 치를 떨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셨다 하면 엄마랑 저를 쥐 잡듯이 잡았어요. 예외는 한 번도 없었어요. 그날도 더 머뭇거렸다가는 바로 머리채가 잡혔을 거예요. 엄마는 결국 피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고 말았지만… 사실은 엄마도 저도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살다간, 우리 모녀 언젠가는 아버지 손에 죽을 거라는 걸.”
오시은이 갑자기 손바닥에 얼굴을 묻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내가, 내가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었다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슬퍼하지는 않았던 오시은이었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슬픔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오시은이 울기 시작하자 검사실 식구들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렇게 따지면 어른이면서 어린 딸을 보호하지 못했던 어머니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책임은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행사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른 부친에게 있고요.”
그제야 오시은은 간신히 눈물을 그쳤다. 황수진 실무관이 급히 티슈를 빼 오시은의 손에 쥐어주었다.
오시은이 경찰에서 했던 진술을 번복하고 검사실을 나선 후에야 무거웠던 검사실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최진우 검사가 상황이 바뀐 데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희망이 생긴 거죠? 심신상실 상태가 아니었다는 확실한 증언이 나온 거니까요.”
“낙관할 수는 없어. 범행 상황을 목격하지 못한 건 변함없으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
태산도 내심 들뜬 상태였지만 신중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오시은 씨가 너무 안됐어요. 오선용이 감옥에 간다 해도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상황에서 손도 못 썼다는 죄책감이 계속 따라다닐 텐데…….”
황 실무관의 말에 태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들으라는 듯 반박했다.
“아무튼 약한 것들은 남 탓을 너무 못해서 문제야. 공격을 받아도 쥐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려 있고, 남을 먼저 쳐도 모자랄 판에 제 탓만 하고 있으니. 그러니까 잡아먹히는 거지.”
태산은 쯧쯧 혀를 차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황 실무관이 입을 떡 벌리고 그런 태산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책하지 말라고 오시은을 따뜻하게 위로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쓸데없이 자책하는 것을 약자의 패배주의적인 본성이라고 매도하며 자업자득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황 실무관이 최 검사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저럴 때 보면 참 정나미 떨어지게 얘기하지 않아요?”
“새삼스럽게 뭘 그러세요? 원래부터 쌀쌀맞은 분이었다면서요?”
최 검사는 맞장구를 치는 대신 슬그머니 답을 피해 되물었다.
“그렇긴 한데, 그때는 너무 잘난 바른생활맨이어서 재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도 정석을 지키는 느낌은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좀 유들유들해진 대신 훨씬 위험해 보여요. 배덕한 남자의 냄새를 흠씬 풍긴달까? 범죄자들을 오래 상대하다 보면 눈빛이 험해지는 검사님들도 많긴 하지만 갑자기 저렇게 변하시니 적응이 안 되네요.”
최 검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 예전의 강 검사님 모습을 모르니 바뀌셨다 해도 잘 모르겠지만요.”
“단적으로 얘기하면 방금처럼 피해자에게 범죄의 원인을 돌리는 말, 예전의 강 검사님이라면 절대 입에 올리지 않으셨을 거예요.”
“엄밀히 따지자면 피해자들이 범죄를 자기 탓으로 돌리며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 아닌가요? 말이 좀 거칠어서 그렇지.”
“사회를 약육강식 상태로 보고 먹히지 않으려면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건 어떻게 봐도 체제전복적이라고요. 검사는 법 제도를 수호해야 하는 사람 아닌가요?”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상정하고 그 상태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것이 법 제도의 존재 의의잖아요.”
최 검사는 은근슬쩍 계속 강 검사의 역성을 들고 있었다. 황 실무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 검사를 다시 보았다.
“왜, 왜요?”
최 검사가 당황해 말을 더듬자 황 실무관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대꾸했다.
“하긴 최 검사님은 강 검사님 극성팬이니까 뭐든 다 좋아 보이겠죠.”
“하하하하…….”
최 검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부정하지 않으시네요?”
“네? 하하하하…….”
최 검사는 그저 웃기만 했다.
* * *
형사3부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검사실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망설이고 있기에 어리둥절해진 태산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황수진 실무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선용 측에서 제출한 증거목록이 나왔는데요…….”
황 실무관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요?”
“오선용 정신감정서가 증거목록에 포함되어 있어요. 근데 그게…….”
오선용의 변호사가 피고인의 정신감정을 신청했고 판사는 법무부 치료감호소에 감정을 의뢰해 둔 상태였다. 검사실 분위기만 봐도 결과가 결코 유리하게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시적 알코올성 심신미약이라네요.”
태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황 실무관이 건넨 감정서를 받아 들었다. 진단명만으로는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정서를 읽어보니 오선용이 현재 중증의 알코올중독 상태이며 금단증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환청과 환각 등의 이상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어려워지겠는데요.”
최 검사가 근심스레 말했다.
“알코올 금단증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라면 범행 당시에는 심신미약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체포된 후부터는 술을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유발된 거겠지.”
태산은 애써 긍정적으로 말했지만 검사실 식구들의 침통한 분위기는 밝아지지 않았다. 오시은이 중형을 받게 해달라고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 감경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태산은 침울해져 있는 검사실 식구들을 격려했다.
“내가 말했죠? 오선용이 심신상실이든 아니든 반드시 처넣는다고. 심신미약이 인정된다고 해도 심신상실이 아닌 이상 무죄는 이미 물 건너 간 거 아닙니까? 그것만 해도 고무적이라고 봐야죠. 감정결과 이런 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을 가중할 수 있는 요인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죽지 말고 힘내서 일합시다.”
“예, 검사님.”
“네, 그래야죠.”
이 계장과 황 실무관은 겨우 힘을 내 답했다.
하지만 최 검사는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지 물끄러미 상대측의 증거목록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불리한 감정결과가 나왔으니… 오시은 씨가 겁내고 법정에 안 나오는 거 아닐까요?”
그 부분은 태산도 자신할 수 없었다. 오시은이 출석한다 해도 자칫하면 겁을 내고 증언을 재차 번복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애써 끌어 올려둔 분위기가 다시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태산은 집무실로 돌아온 후 의자에 걸터앉아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검사실 식구들을 안심시키느라 긍정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태산 역시 심난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시은에게 책임지고 중형을 받게 하겠다고 장담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전문가가 심신미약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피고인의 신청으로 법원이 직접 법무부 치료감호소에 의뢰해 나온 감정결과다.
심신미약이 인정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어렵더라도 끝까지 심신미약을 다퉈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심신미약을 인정하고 다른 부분에서 승부를 볼 것인가.
전자가 훨씬 까다로운 선택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후자로 결정하자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범행 당시의 정신상태가 어땠든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태산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적인 책임…’
순간 태산의 머릿속에 반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거라면 심신미약이 인정된다 해도 오선용에게 완전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오히려 단순히 우발적 살인인 경우보다 형이 가중될 가능성도 있다. 비록 그 역시 어려운 싸움이 될지라도.
한참을 고민하던 태산은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에라잇! 한번 해보자! 전략 수정이다!”
태산은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전략을 바꾼다는 사실은 극비가 되어야 하므로 검사실 식구들에게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태산은 마음속으로만 비밀을 담아둔 채 공판준비에 전념했다. 그리고 드디어 공판이 시작되었다.
감정결과는 현재 오선용이 심신미약 상태라는 것일 뿐, 범행 당시에도 심신미약이었는지까지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변호사는 공판 기간 동안 증인신문을 통해 오선용이 범행 당시에도 심신미약이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려 애썼다.
태산은 그것을 굳이 방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