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은폐
“목걸이 하나, 팔찌 하나, 귀걸이 한 쌍, 반지 둘. 백금 바탕에 사파이어가 박혀 있는 디자인으로 한 세트야. 목걸이는 사파이어를 중심으로 하얀색 큐빅이 둘러싸고 있고, 귀걸이도 같은 디자인. 팔찌에는 사파이어가 3개, 반지에는 사파이어가 하나 박혀 있다는군. 이 패물 판 놈 좀 찾아봐. 경찰은 모르게.”
-알겠습니다.
태산은 범진에게 은밀하게 범인을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비공식 수사인지라 수사관들을 동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혼자서 관내의 금은방과 장물 취급하는 전당포를 모두 찾아다니기는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범진은 태산의 지시를 받은 후 바로 조직원들을 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서를 잡은 범진이 태산에게 연락했다.
-금은방 한 군데에서 기억을 해냈습니다. 백금에 사파이어가 박힌 게 결혼 예물로는 그렇게 흔한 디자인은 아니라서 기억하고 있더군요. 판 놈 인상착의는 전달받았습니다만 구역 내의 잡범들 중에서 비슷한 놈을 솎아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고생했다.”
-그런데 금은방 사장 말로는 이미 경찰이 다녀갔고 범인도 잡혔다고 하던데요. 만약 정말로 잡혀 들어간 거면 밖에서 찾는 것이 헛수고가 아닐지…….
경찰이 현찰만 분리해서 다른 놈에게 덮어씌우고 이놈은 패물만으로 절도죄를 구성해 입건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말이 안 된다.
“일단 판 놈은 계속 찾아보고. 금은방이 어디야? 내가 직접 가보지.”
태산은 범진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태산은 금은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일어서는 사장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인천지검 강바른 검사입니다. 제보 받고 장물 추적 중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태산이 거기까지 얘기하자 금은방 사장이 바로 물었다.
“혹시 백금에 사파이어 박힌 예물 세트 말하시는 건가요?”
“예, 그런데요.”
금은방 사장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열을 올린다.
“아니, 진짜 저도 장물인지 모르고 그냥 매입만 한 건데 왜 이렇게 자꾸 괴롭히시나요? 형사들이 찾아오질 않나, 무슨 깍두기 같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추궁하질 않나. 이제 검사님까지 직접…….”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 독립한 수사기관이기 때문에 별도로 수사를 진행하게 되면 이런 경우가 좀 생깁니다.”
태산은 금은방 사장을 살살 달래고는 다시 물었다.
“경찰은 뭐라고 하던가요?”
“뭐라긴요. 패물 매입했다고 했더니 참고인으로 나와달라고 하더라고요. 경찰에 출두해서 패물 넘긴 사람 확인하고 진술도 다 끝냈는데요. 그런데 검찰에서도 또 그걸 반복해야 하나요?”
금은방 사장은 투덜투덜 하소연했다.
“그렇습니까? 혹시 그 피의자가 이 사람인가요?”
태산은 준비해온 빈집털이범의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금은방 사장이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생뚱맞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요.”
금은방 사장의 답을 듣고 태산은 의구심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 새끼들 봐라. 범인을 다 잡아서 증언까지 확보해 놓고 놔준 거야? 다른 놈한테 슬쩍 뒤집어씌워 가면서?’
구린 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겨오기 시작했다. 실적 점수에 목을 매는 경찰이 다 잡은 절도범을 그냥 놓아줄 리가 없는 것이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에 참고인 진술로 검찰에서 다시 한번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예… 뭐…….”
금은방 주인이 입맛을 쩝 다시며 떨떠름하게 답했다.
태산이 금은방을 나와 다시 검찰청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범진에게서 급히 연락이 왔다.
-형님, 그놈이 산다는 곳 정보를 알아내서 가보는 길입니다. 지금은 주소가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확인차…….
“어디냐? 나도 나온 참이니 같이 가보자.”
태산은 범진이 알려준 주소로 바로 달려갔다. 빌라가 빽빽이 들어선 좁은 골목 앞에 차를 세우자 먼저 와 있던 범진이 다가왔다. 범진은 태산을 지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허름한 빌라 쪽으로 안내하며 설명했다.
“금은방 사장 말로는 눈이 약간 사시 끼가 있고 아귀같이 생긴 얼굴에 손등에 큰 점이 있다고 합니다. 상당히 특징이 있는 얼굴이라서인지 찾아보라 했더니 저희 애들 중 하나가 바로 알아보더군요. 경륜장에 돈을 상당히 꼬라박고 조직에서 돈을 좀 빌렸던 모양입니다. 소액을 빌리고 금방 갚고를 반복했는데 최근에는 영 보이지가 않는다네요.”
태산은 빌라 입구 우편함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몇 호야? 이름은?”
“지하 102호 김진남입니다.”
B102가 새겨진 우편함은 가스요금 청구서 하나만 달랑 꽂혀 있을 뿐 깨끗이 비어 있었다. 낡은 빌라의 우편함은 누군가 거주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광고 전단지와 밀린 청구서로 쓰레기통이 된다.
태산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청구서를 낚아채 들여다보았다. 김진남의 이름이 찍혀 있는 가스요금 청구서의 금액은 여름이라 높지 않았지만 생활감이 느껴질 정도는 되었다.
“아직 여기 사는 모양이군.”
태산은 범진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 B102호 앞에 섰다. 벨을 눌러보지만 답이 없다. 문손잡이를 돌려보니 잠겨 있었다.
“기다려야겠는데?”
“바쁘실 텐데 들어가십시오. 제가 애들 세워두고 들어오는 대로 잡아 오라 하겠습니다.”
태산이 범진과 그런 대화를 나누며 다시 계단을 오르는데 현관으로 누군가 들어선다. 편의점 봉투를 덜렁덜렁 들고 들어온 사내의 모습은 범진이 설명했던 김진남의 인상착의와 판박이였다. 봉투를 든 손등에 박힌 커다란 검은 점이 쐐기를 박아주었다.
태산은 씨익 웃으며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김진남 씨?”
김진남이 멈칫한다. 그러고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갑자기 손에 든 비닐봉지를 태산에게로 던지고는 바로 튀어 나갔다. 범진이 반사적으로 뒤따라 뛰어나간다.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던 도시락과 맥주 캔이 태산의 머리를 때리고 바닥을 굴렸다. 태산은 씩씩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 새끼가 도망을 가?”
태산이 빌라를 나선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 골목을 진남과 범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어가고 있다. 발은 범진이 빨랐지만 골목 구석구석을 잘 아는 진남이 교묘하게 골목골목을 꺾어 들며 범진을 따돌리고 있었다.
태산이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뒤를 쫓았다.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은 발로도 어마어마한 속도를 낸다. 발이 깃털처럼 가볍고 바람이 귓가에서 휘휘 소리를 내며 밀려가는 것이 경쾌해 태산은 목적을 잊고 종일이라도 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태산이 범진을 휙 하니 추월해 앞서 달린다.
몰입감이 점점 더 고조되면서 개코에게 칼을 맞았던 순간처럼 시간이 점점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이 다시 찾아왔다. 뒤를 살피며 뛰는 점박이의 근육의 결이 하나하나 들여다보인다.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들여다보이니 방향을 어디로 틀지도 미리 다 예상이 된다.
점박이는 이 골목 저 골목 지그재그로 뛰어다녔지만 전혀 태산을 따돌리지 못한다. 오히려 빠르게 등 뒤로 좁혀오는 것이다.
마침내 태산이 몸을 날려 점박이의 등을 낚아챘다. 점박이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태산은 몸을 굴려 일어나 바로 점박이의 팔을 뒤로 꺾어 제압했다.
“으아아아악~~!! 이거 놔!!!”
점박이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제야 범진이 달려와 가쁜 숨을 고른다. 한참 헉헉거리고 나서야 허리를 펴고 머쓱하게 말하는 것이다.
“제가 이제까지 달리기로는 누구한테도 져본 적이 없는데 엄청 빠르시네요.”
범진의 반사신경과 빠른 발은 태산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자신의 신체 능력이 범진의 속도를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에 태산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태산은 점박이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김진남 씨? 검찰에서 나왔습니다. 물어볼 것이 있으니 지청까지 임의동행 하시죠.”
점박이는 일단 잡히자 불안하게 눈을 굴리면서도 순순히 따라왔다. 태산이 점박이를 데리고 검사실로 돌아오니 검사실 식구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다.
“검사님, 다녀오셨습니까?”
이흥렬 계장이 인사를 하며 점박이에게 보이지 않게 입 모양으로만 묻는다.
‘누구?’
“피의자요.”
점박이는 직접 뛰면서 자신을 잡아 온 태산을 검찰 소속 사법수사관 정도로만 생각했다가 검사라고 불리는 것을 보고 더욱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태산은 피의자를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밖의 직원들이 수군거린다.
“뭔 피의자를 직접 잡아가지고 오셨대?”
“그러게요.”
“그거 아니에요? 저번에 빈집털이 사건. 한 건만 좀 이상하다고 빼두라고 하셨잖아요.”
황수진 실무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 그건가? 아니, 근데 그러니까! 그 피의자를 대체 어디서 덥석 잡아 오신 거냐고.”
“그러게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러게요’를 반복하는 최진우 검사를 이 계장과 황 실무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았다.
* * *
“경찰에서 다 조사받았고 혐의 없다고 해서 풀려났는데 왜 또 검찰에서 부르는 건지 모르겠네요.”
점박이는 불안한 얼굴로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렇게 떳떳한 사람이 왜 도망갔어요?”
어차피 감방을 들락날락거리며 살았을 인생, 절도 전과 하나쯤 추가되는 것으로 그렇게 사색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망을 갔을 리 없다. 뭔가가 더 있다. 피의자와 경찰이 합심해 숨기려 하는 뭔가가.
“그거야 시커먼 양복 입은 사내들이 인상 쓰고 집 앞에 서 있으니까 겁이 나서 그런 거고요.”
“김진남 씨, 다 알고 부른 거예요. 여기서 더 부인하면 괘씸죄만 붙어요. 형량이라도 좀 줄이고 싶다면 솔직히 실토하는 게 좋을 겁니다.”
급기야 김진남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김진남은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우물쭈물 말했다.
“하지만 경찰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찔렀다고 한 것은 자꾸 다른 건을 더 대보라고 추궁하시니까 오기가 발동해서 둘러댄 거짓말이었고요. 형사님들도 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풀어주셨는데 이제 와서 왜…….”
‘찔렀다? 확실히 뭔가 더 중대한 건이 있었군.’
피의자는 절도 건이 아니라 다른 중대 사건으로 취조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태산은 피의자가 절도 혐의로 불려 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은 채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때랑은 상황이 다릅니다. 이번에 김진남 씨가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추가로 발견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재수사를 시작한 것 아니겠습니까?”
태산은 피의자가 말했던 ‘찔렀다’는 말에 힌트를 얻어 더욱 몰아붙였다.
“잘 생각해서 털어놓으세요. 피의자에게 상해 고의를 인정해 기소할 것인지, 아니면 살.해. 고의를 인정해 기소할 것인지는 제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태산은 ‘살해’라는 단어를 더욱 힘주어 강조했다. 피의자의 눈동자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요동쳤다. 태산은 피의자가 곧 넘어올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게…….”
* * *
“정말로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칼도 그냥 위협용으로 들고 간 것이었고요. 안방에 여자 혼자 자고 있기에 묶어놓고 방을 뒤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하나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덤벼드는 거예요. 놀란 나머지 칼을 들었는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정신 차려보니까 남자가 칼에 찔렸더라고요. 놀라서 그대로 도망 나왔어요.”
피의자는 덜덜 떨면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뉴스를 보니까 그 사람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후로는 겁이 나서 도둑질할 엄두도 못 냈어요. 한참 숨어 지냈는데… 가진 돈이 떨어지는 바람에… 달리 돈 나올 데도 없고…….”
피의자는 태산의 눈치를 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태산은 혀를 끌끌 찼다.
“사람을 죽여놓고도 또 도둑질을 할 생각이 들던가요?”
피의자는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다니까요. 그건 정말 어쩌다 보니 일어난 사고였어요. 저도 그게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칼도 안 들었고요. 사람 마주치는 게 무서워서 집이 비는 틈을 노려서 들어갔다고요. 그냥 당분간 입에 풀칠할 정도만 훔쳐 나오자 했는데… 하필 그것 때문에 잡힐 줄이야…….”
피의자는 억울하다는 듯 한탄하더니 말을 이었다.
“형사들이 살벌하게 추궁하니까 지레 겁을 먹고 결국 그때 사람 찔렀던 것도 자백해 버렸어요. 근데 형사들 반응이 이상하더라고요.”
피의자의 눈동자가 이채를 띤다. 태산도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어떻게요?”
“정말로 니가 한 거 맞느냐고 몇 번이나 묻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난감해하는 거예요 . 아, 증거가 없나 보다, 이건 내가 부인하면 못 집어넣겠구나 그런 감이 팍 오더라고요. 그래서 두 번째 불려 갔을 때는 극구 부인을 했습니다. 자꾸 추궁하니 뭐라도 고백해야 할 것 같아서 지어낸 얘기다. 그 건은 내가 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형사들이 너무 쉽게 그러냐 하면서 풀어주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피의자는 숫제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절도로만 입건되나 보다 하고 안심했는데 그 후로 영 소식이 없어서… 저는 그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범행이 완전히 묻힐 수 있었는데 뒤늦게 밝혀진 것이 못내 안타깝다는 투로 말하는 피의자가 태산은 몹시 괘씸하게 느껴졌다.
“검사님, 저 진짜 죽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살인죄로는 처벌 안 하시는 거죠?”
“강도살인이 될지, 강도치사가 될지는 두고 봐야죠. 피의자의 일방적인 진술을 어떻게 다 믿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불면 살해 고의는 없었다고 해주신다고…….”
“내가 언제 그랬어요? 잘 들어보고 판단하겠다고 했지.”
피의자는 낭패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태산은 일어서서 집무실 문을 열고 이흥렬 계장을 향해 말했다.
“이 계장님, 이 피의자 일단 강도 혐의로 긴급체포 하세요. 추가 신문은 피해자 측 얘기 들어본 뒤에 계속하겠습니다.”
분명 빈집털이범이리라고 추측하고 있었던 검사실 식구들은 강도라는 얘기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리둥절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 계장이 집무실로 들어가 피의자를 데리고 나온다. 그사이 태산은 황수진 실무관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범행 장소 주소 받아놨으니까 피해자 연락처 좀 알아봐 주세요.”
피의자는 분명 남자를 칼로 찔렀을 때 여성이 함께 있었다고 했다. 피해자의 증언을 들어보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경찰들이 단순 절도범도 아니고 강도범을, 그것도 사람이 죽은 사건을 은폐하려 한 이유를.
태산이 집무실로 돌아가 다른 업무를 보고 있는 사이 실무관이 피해자의 연락처를 찾아 건네주었다. 태산은 즉시 피해자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전화벨이 울리고 한참 만에 상대방이 받았다.
“안녕하세요. 홍민선 씨이시죠? 인천지검 강바른 검사입니다. 5월경에 피해 입으셨던 강도 사건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 정적이 흐른다.
“여보세요?”
통화가 연결이 안 된 건가 하고 태산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그제야 전화기 저편에서 마치 검찰청을 사칭하는 보이스 피싱을 의심하는 듯한 미심쩍은 목소리로 피해자가 답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강도 범인이 체포되어서 기소를 위해 피해자분의 진술을 듣고 싶습니다.”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용건을 밝혔음에도 피해자의 의심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혹해하는 기색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는 태산도 당황하고 말았다.
-범인 벌써 잡아서 얼마 전에 재판도 끝났는데요.
* * *
“그러니까 피의자와 피해자의 말을 종합해 본 결론은 이렇습니다. 경찰이 엉뚱한 사람을 피의자로 만들어서 강도치사로 처넣었는데 후에 다른 건으로 체포한 범인이 사실 진짜 강도범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자기들이 애먼 사람을 잡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경찰은 그냥 묻으려고 한 겁니다. 그러려면 피의자를 체포했던 그 건도 범인을 잡아 해결해야 하니까 상습 빈집털이범한테 적당히 덮어씌워 지운 거고요.”
태산이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비로소 검사실 식구들에게 알렸을 때에는 모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대체 왜 그런 짓을 해요? 그냥 수사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사과하면 될 일을. 억울하게 범인이 된 피의자의 인생은 어떡하라고.”
“남의 인생보다 지들 체면이 중요한 거지. 경찰 새끼들 대체 수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검찰도 뭐 잘한 거 없죠. 재판까지 받았다는 건 의심 없이 그대로 기소했다는 거 아니에요?”
다투어 성토하던 황 실무관과 이 계장은 최진우 검사의 자조하는 말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태산이 말을 이었다.
“수사과정 조사해보고 강요죄나 직무유기죄로 기소할지 말지 결정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루죠. 일단 강도치사 사건부터 바로잡아야 해요. 다행히 아직 항소기간이 안 끝난 거 같으니 누명 쓴 피고인은 항소 제기해서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우리는 빨리 증거 확보해 진범을 기소해야 합니다. 우리 쪽이 먼저 유죄를 받으면 그쪽은 당연히 2심에서 무죄를 받을 수 있겠죠.”
태산의 말에 검사실 식구들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관님은 그쪽 변호사 찾아서 빨리 연결해 주세요. 그리고 이 계장님은 진범 주변 탐문해서 범행을 증명할 단서가 더 있는지 알아보시고요. 최 검사는 나랑 같이 바로 진범 신문 들어가지. 좀 더 상세한 진술을 받아서 최대한 빨리 조서를 작성해야 하기도 하고. 피해자가 범인 확인하러 오기 전에 진술 영상도 찍어두어야 하니까.”
“그래야죠. 피해자랑 직접 대면시킬 수는 없잖아요. 옆에서 사람이 죽었으면 트라우마가 클 텐데.”
최 검사가 의욕적으로 답했다.
“그럼 저는 나갔다 오겠습니다.”
이 계장이 재킷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선다. 황 실무관은 벌써 전화기를 들었다. 태산도 최 검사와 함께 영상 녹화 설비가 있는 취조실로 자리를 옮겼다.
피의자를 다시 불러내 진술을 받고 있던 중, 실무관이 취조실로 태산을 찾아왔다.
“검사님, 변호사분께 연락했더니 바로 찾아오셨어요. 지금 검사실에 계십니다.”
태산이 실무관과 함께 검사실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한 남자가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태산은 흠칫 놀랐다. 아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주변?!’
주변도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태산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다.
“아아~ 오셨습니까?”
태산은 주변이 먼저 아는 척을 하기 전에 얼른 선수를 써 인사를 한 다음 주변의 등을 집무실 쪽으로 떠밀었다. 태산은 주변을 집무실에 밀어 넣고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저는 강바른이라고 합니다. 성함이…….”
태산은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한경욱이라고 합니다.”
“아, 예. 한경욱 변호사님.”
주변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묻는다.
“우리 구면 아닌가요? 분명 어디선가…….”
주변은 분명히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말했지만 범진이 소개해 줘서 만난 그 과외 학생을 잊어버릴 리 없다. 만난 계기도 특이했을 뿐 아니라 인상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하하, 닮은 사람 아닐까요?”
태산은 그렇게 둘러댔다.
닮은 사람이라니. 3류 추리소설 트릭도 그렇게 허접하지는 않겠다고 주변은 생각했다. 누가 봐도 그 과외 학생 본인이건만.
이렇게 빨리 합격해서 검사 배지를 달고 독립된 검사실을 배정받았을 리는 없고. 원래 검사였는데 과외를 받은 건가? 어째서?
궁금증이 일었지만 상대가 굳이 숨기는 것을 보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은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일 순위가 아니다. 더 중요하고도 급박한 일이 있는 것이다.
“그보다 진범을 찾았다니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본인이 자백했고 현재 다른 보강증거를 찾는 중입니다. 항소기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빨리 항소하시라고 연락드린 겁니다.”
주변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천만다행이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최태선 씨가 범인일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자백 했다고 해도 진술이 계속 바뀌는 데다 증거도 약하고요. 아무리 배정받은 국선변호인이라지만 억울한 사정을 뻔히 보고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서 항소를 하자고 거듭 권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안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항소하면 감방에서 더 오래 있어야 한다더라면서 항소 포기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설득하느라 애먹고 있었는데 진범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마음을 바꿀 겁니다.”
피고인만 항소한 경우는 불이익변경금지원칙이 적용되어 원심보다 중한 형을 선고하지 못한다. 하지만 검찰 또한 항소하는 경우에는 형이 더 중해질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피고인은 아마도 구치소 안에서 그런 얘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태산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너무 쉽게 자백하고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아닌가?
태산은 그러한 의문을 담아 주변에게 물었다.
“수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 같습니까?”
“아마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수사하긴 했겠지만… 가혹 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왜…….”
태산은 차마 왜 그렇게 바보같이 당했느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태산이 말을 흐리자 주변은 그 뜻을 알아채고 쓰게 웃었다.
“직접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안 그래도 항소장 작성 때문에 최태선 씨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 되시면 같이 가보시죠. 최태선 씨가 절대 범인일 수 없다는 심증을 형성하시면 진범 수사해 기소하시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태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