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마성의 여인
“저기… 조사받으러 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선화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태산이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이흥렬 계장이 먼저 답했다.
“아, 김영숙 씨세요?”
“네.”
뭐라고?
태산은 들고 있던 조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이 교묘한 수법의 사기꾼이 선화였다고? 그럼 한선화는 가명이었단 말인가?
꽤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던 사이인데 본명도 모르고 있었다니 태산은 배신감에 미간을 모으며 선화를 노려보았다.
“김영숙 씨… 라고요?”
“네, 검사님이시죠?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선화는 태산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수 어린 눈빛과 애조 띤 음성, 예의 바르고 우아한 태도.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정말 추호도 그러고 싶지 않았던 불행한 여인 코스프레를 제대로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건기록을 보며 혀를 차고 있던 이 계장의 눈빛이 벌써 동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김영숙 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태산은 선화를 집무실로 데려갔다. 이 계장이 따라 들어오려는 것을 태산이 막아섰다.
“이 건은 저 혼자 신문해도 될 것 같네요.”
“아, 예… 그러시면 뭐…….”
왜 밖에서 취조하지 않고 굳이 집무실 안으로 데려가 혼자 취조를 하겠다는 것인지 이 계장은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 이상 들이대지 않고 바로 물러났다.
태산은 블라인드까지 꼼꼼히 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소파에 선화를 앉혀두고 한동안 기록을 읽는 척했다. 선화는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우아하고 조신한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로.
태산은 그런 선화를 힐끔 훔쳐보았다. 청순하게 보일 셈으로 한 옅은 메이크업 때문에 코끝에 찍힌 이른바 고소영 점과 눈웃음 지을 때마다 접히는 눈가의 희미한 주름이 가까운 거리에서 잘 보였다.
선화를 딱히 대단한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균 이상의 외모이긴 하지만 길을 가다 돌아볼 정도의 미모는 아니다. 하지만 어딘지 귀티가 나고 친근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압도적인 미인이 아니기 때문에 남녀 불문하고 쉽게 벽을 허물어 버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여자들은 금세 간도 쓸개도 다 내줄 것 같은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고 남자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제 여자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선화는 그 믿음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제가 필요한 것을 쏙쏙 빼먹을 줄 알았다.
태산이 선화와 꽤 길게 관계를 유지하자 아우들은 선화를 누님 취급 해주었다. 하지만 태산은 언제나 선을 그었다.
그것은 태산이 선화의 그런 면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선화를 제 여자감이라고 여기는 그 수많은 멍청이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기록을 보니 이름도 가명이었고 심지어 나이도 다르다.
선화는 항상 자신이 30대라며 40대인 태산을 늙은이 취급 하곤 했다. 그런데 기록상으로는 선화 역시 40대였다. 태산과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 것이다.
대체 이 여자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 것일까? 조금이라도 진실을 보여주긴 한 것일까?
태산은 괘씸한 생각이 치밀어 빈정대듯이 입을 열었다.
“김영숙 씨? 42세이시고요?”
선화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사기 혐의로 다수의 고소를 당한 건 아시죠?”
“네. 피해 입으신 분들께는 정말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저도 사업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힘드실지 잘 알아요.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여기저기서 주문을 받으니 저도 들떠서… 제가 정말 뭐에 씌었었나 봐요. 소중하게 키워온 회사였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선화는 눈물까지 글썽이더니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냈다. 이 위력적인 눈물에 남자라면 백이면 백 흔들렸겠지만 태산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며 질문을 이어갔다.
“사기 칠 의도가 아니었다면 바지 사장은 왜 내세웠습니까?”
“여자 혼자 사업하면 얼마나 힘들고 서러운 일을 많이 겪는지 모르실 거예요. 그래서 대외적으로 내세울 사람이 필요했어요.”
“피해자들 얘기로는 대기업 임원 명함까지 파서 뿌렸다던데요.”
“그건 오해예요. 실제로 납품 문제로 만나 뵙고 받은 명함을 안심하시라고 보여 드린 것뿐인데요. 그때만 해도 계약이 거의 이루어질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함 건넨 우리 직원을 대기업 임원이라고 착각하신 것 같네요.”
아주 청산유수로 대답을 한다.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이봐, 한선화.”
갑자기 불린 또 다른 이름에 선화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피곤하니까 우리 서로 이것저것 재지 말고 솔직히 털어놓자고. 사기 친 건 사실이잖아. 아주 세심하게 신경 쓴 것 같으니 그 정도면 내가 어떻게 잘 처리해 줄 수도 있어. 굳이 내가 당신 콩밥 먹여야 할 이유도 없고.”
선화는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쳤다. 그리고 마치 허물을 벗듯 삽시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우수 어린 표정은 사라지고 은근한 도발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콧소리 섞어 묻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명인데?”
“조사하면 다 나와.”
선화는 흐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나한테 관심 있으신가 봐.”
그리고는 콧등에 살짝 주름을 잡고 눈가를 접으며 애교 있게 웃는다.
“우리 미남 검사님이 그냥 봐주실 것 같지는 않고… 뭘 원하실까?”
나왔다. 상대를 홀리는 선화의 필살기. 이 눈웃음에 흔들리지 않는 사내가 있다면 고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산은 마음이 흔들리기는커녕 기분이 상했다. 새로운 남자에게 꼬리를 치고 있는 선화가 너무나도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다만 정말로 죽자마자 잊었냐? 언제나 나에게만은 진심이라고 속삭였으면서.’
그 말을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다른 남자가 되어 지켜보니 불쾌한 감정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신 돈 많잖아? 피해자들한테 제대로 배상해. 그럼 감방에는 안 보낼 테니까.”
“하아~ 이거 꽤 공들인 건수였는데… 빠삭하신 분한테 딱 걸렸으니 별수 없죠.”
선화는 가볍게 포기했다. 원래도 딱히 돈이 궁한 사정은 아니었다. 단지 남의 눈먼 돈을 뽑아 먹는 걸 게임처럼 즐기면서 한탕 해보고 싶은 욕망이 들끓을 뿐이다.
언제나 투기성 사업과 사기에 발을 반쯤 걸친 새로운 사업을 야심 차게 론칭했고 그 와중에 정말로 성공하는 경우도 있어 대외적으로는 유능한 사업가의 이미지였다. 실패하는 경우에도 자신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았다.
“근데 그걸로 끝이에요? 보통 이렇게 특별히 봐주는 경우에는 검사님도 뭔가 바라는 게 있으시던데…….”
선화가 망설임 없이 검사실로 조사를 받으러 온 이유가 있었다. 이전부터도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주임검사를 찾아와 잘 구슬려 보는 수법을 종종 써온 모양이다. 선화의 연기에 넘어가 무고하다 생각한 검사도 있을 테고 선화의 말처럼 대놓고 거래를 한 검사도 있을 테다.
만약 검사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고 해도 당장 잡혀 들어갈 염려는 없다. 요즘은 조사 중에 긴급체포 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기범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조사를 끝내면 구속영장을 받기 전에 일단 귀가를 시킨다. 귀가 후 다른 방법을 간구해 보거나 여차하면 튈 여유가 있는 것이다.
태산은 별달리 선화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뭔가 번뜩하는 것이 있었다. 선화와 다시 엮이는 건 부담스럽지만 정보력이나 인맥 등 선화가 가진 인프라를 생각할 때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었다.
“긴 얘긴 여기서 하긴 그렇고… 오늘 저녁 7시에 여기로 와. 10분 이상은 안 기다려. 튈 생각 안 하는 게 좋아. 안 나오면 다음 날 바로 지명수배 할 테니까.”
태산은 카드를 하나 꺼내 선화에게 건넸다. 검은색 플라스틱 카드에 바 이름과 주소가 찍혀 있었다. 멤버십 따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비밀스러운 회원제 바였다. 입회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데다 기존 회원의 추천을 통해서만 입회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가입할 수 없는 이 멤버십을 태산이 가지고 있는 것은 강바른 검사의 생일에 조현영이 선물로 가입해 주었기 때문이다.
선화는 빙긋 웃으며 카드를 받아 백에 넣었다. 태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문을 열고 선화를 배웅하며 밖의 직원들에게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김영숙 씨, 번거롭게 오가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무혐의로 종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검사님. 수고하세요.”
그렇게 답하며 문을 나서는 선화는 어느새 검사실에 들어올 때의 청순하고 우수 어린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는 선화를 보며 태산은 가증스럽다고 생각한다.
선화는 506호 식구들에게도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는 검사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506호 식구들이 선화가 나가자마자 태산을 돌아보며 다투어 말했다.
“역시 그렇죠?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네요. 되게 교양 있고 선해 보이는 인상인데. 저런 사람이 사기꾼일 리가 없죠.”
“최 검사님, 뭘 모르시네. 제 경험상 사기꾼들은 인상 좋은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근데 저 사람은 확실히 아닐 것 같네요. 보통 사기꾼은 자기 과시적이고 언변도 화려하고 그런데 뭐랄까… 되게 가녀리다고 해야 되나…….”
“두 분 다 예뻐서 좋게 보시는 거 아니에요? 이래서 남자들한텐 미인계가 백발백중이라니까.”
황수진 실무관이 웃으며 타박하자 최진우 검사가 머쓱해 되물었다.
“되게 미인은 아니지 않나요?”
“저 정도면 미인이죠. 피부 좋고 몸매 좋고 스타일 좋고. 저렇게 꾸민 듯 안 꾸민 듯 예쁘게 보이는 게 진짜 고수라고요. 게다가 저분 기록상으로 40대 아니었어요? 누가 저 얼굴을 40대로 봐요?”
‘그래, 나도 깜빡 속았지.’
태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잡담이 꽃핀 직원들을 채근했다.
“자, 다시 일합시다. 계장님, 김영숙 씨 사건은 제가 처리할 테니 다른 일 보세요.”
* * *
그날 밤, 바에 나타난 선화는 낮과는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낮에는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수수한 정장 차림에 화장도 옅게 했었다. 선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내숭을 떨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자 마음껏 꾸미고 나왔다.
스스로도 최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몸매를 한껏 드러내는 검은색 칵테일드레스 차림이다. 화장도 짙고 화려하다. 본격적으로 꾸미니 수수했던 인상은 사라지고 미모가 더욱 돋보였다. 바 안의 사내들이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선화가 바 안을 둘러보다가 태산을 발견하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곁으로 다가와 스툴 위에 절묘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각선미가 더욱 드러나는 각도다.
오랜만에 보는 선화의 매력적인 모습에 태산도 마음이 동했지만 일부러 냉랭하게 말한다.
“아줌마, 젊은 남자 꼬셔보려고 너무 힘주고 나온 거 아니야?”
일부러 자존심을 상처 내보려 한 말이지만 선화는 쿡 웃을 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검사님, 그런 말에 상처받고 그럴 만큼 나 순진하게 살아오지 않았어요. 내가 꼬시면 넘어와 주긴 할 거예요?”
선화는 팔로 턱을 괸 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검사님 꼬셔서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 없고요. 장소에 맞는 매너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여기 분위기 되게 좋네요. 쉽게 못 들어오는 곳이죠? 카드 보여주기 전까지 어찌나 경계를 하던지. 검사님 돈 많으신가 봐요. 이런 데도 출입하고. 근데 검사 월급으로 이게 되나?”
꼬실 생각이 없다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다. 선화는 이 바가 쉽게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알고 강 검사가 원래 부유하거나 아니면 로비가 통하는 검사라고 인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유혹해 볼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알 거 없고. 본격적인 얘기는 들어가서 하지.”
태산은 룸으로 옮기기 위해 일어섰다.
* * *
태산이 일어나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원칙적으로 바 안에는 룸을 설치할 수 없지만, 이곳에는 회원들이 은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비밀스러운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룸을 쓰고 싶으니 준비해 달라 하고 왔더니 어느새 선화는 와인을 한 잔 시켜놓고 있었다. 분위기에 취해 바에 기댄 선화는 노려보는 태산을 향해 손사래를 쳐 보였다.
“여기 분위기 좋은데 조금만 있다 가요. 이거 한 잔만 마시고.”
태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다 마시면 룸으로 와.”
“어휴~ 쌀쌀맞으셔라.”
선화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와인을 느긋하게 마시며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한 여자가 선화의 옆자리에 와 앉았다. 선화는 힐끗 옆을 쳐다보았다.
키가 크고 늘씬한 여자가 스툴에 앉아 선화의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싱긋 웃는다. 선화는 절로 감탄하고 말았다.
입고 있는 민트색 원피스도 팔찌도 흔한 명품이 아니었다. 보면 바로 알 만한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디자이너 제품임에 틀림없다. 흔치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는 안목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한 자신만만한 분위기가 여성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어머~ 언니, 스타일 되게 좋다. 그 원피스 잘 어울리네요. 그런 색이랑 패턴 소화하기 까다로운데. 어디 거예요?”
선화는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다. 여성은 고개를 까딱할 뿐 대꾸가 없더니 문득 다른 것을 물었다.
“아까 옆에 있던 남자랑은 어떤 사이예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선화는 눈을 굴린다.
왜 이런 것을 묻는 것일까? 강바른 검사와 아는 사이일까? 남녀 관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불쾌감이나 질투심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장난기가 고개를 들었다. 강 검사로 인해 곤란한 처지가 되었으니 자신도 조금 오해를 만들어서 곤란하게 해볼까 싶었던 것이다.
“아아~ 스토커요. 꼼짝 못 하게 잡아서 가둬두고 싶다나 뭐라나. 오죽 귀찮게 쫓아다니기에 만나주는 거예요.”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언뜻 들으면 치정 관계 같지만 검사랑 사기 사건 피의자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도 틀리지 않은 것이다.
“근데 왜요? 아는 사람이에요?”
“안다면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여자는 애매하게 답하고는 씩 웃으며 덧붙었다.
“이 안에서의 일은 알아도 모른 척해주는 게 불문율이니까요.”
여자는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입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했다. 외국 영화에서나 봄 직한 제스처가 저렇게 그림같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이다. 선화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현영 씨.”
저만치에서 한 남자가 부르자 여자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즐거운 시간 보내요.”
여자가 남자와 함께 저만치 구석 자리의 테이블로 가 자리를 잡는다. 선화는 여자와 동행한 남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되게 잘생겼네. 배우 차민혁이랑 엄청 닮았는데?”
선화는 이내 와인 잔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룸으로 갔다. 선화가 룸으로 가는 것을 곁눈질한 사내가 현영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몰라. 옷 어디 거냐고 묻기에.”
현영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중얼거렸다.
“천박하게. 꼭 저 같은 것만 만난다니까.”
“예?”
“아니야.”
현영은 고개를 젓고는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실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여자는 자신보다 어려 보이기도 하고 나이가 더 들어 보이기도 하는 모호한 얼굴이었다. 맑고 깨끗한 피부나 결점 없는 몸매를 보자면 어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곳에 익숙지 않은 것 같은데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뻔뻔한 태도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는 연륜이 느껴졌다.
나이가 많든 어리든 상관없다. 대뜸 언니라고 부르며 친한 척하는 것부터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사내가 현영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근데 옷 정말 예쁜데요? 당신이랑 잘 어울려요. 어디 건지 나도 궁금하네요.”
“파리 마레 지구에서 소호샵을 하는 신인 디자이너 작품이야.”
현영은 중국 부호들이 점령한 대규모의 유명 명품샵보다 예술가와 신인 디자이너들이 밀집해 있는 소호 거리에서 새롭고 도발적인 작품을 찾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이 찍었다 하면 그 디자이너는 몇 년 안에 메인 스트림에서 주목받아 인기 작가가 되었다. 현영은 남들보다 한발 앞서는 자신의 안목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바른과 만나고 있다는 그 천박한 여자가 옷을 마음에 들어 하니 갑자기 흥미가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여자와 같은 취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그 샵에서 나오는 옷들 싹 털어서 샀었는데 이젠 질렸어. 정리해야 할까 봐.”
“변덕도 참. 나도 언젠가 그렇게 정리되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내가 민혁 씨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아?”
현영은 빙긋 웃어 보였다.
방송국을 비롯한 한성그룹의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이끌고 있는 현영에게는 그 영향력을 노리고 접근하는 연예인 지망생들이 많았다. 배우 지망생이었던 차민혁도 그중 하나였다. 인물 수려하고 배짱도 있는 것이 꽤 싹수가 보여 현영은 패트런이 되어주기로 했다. 차민혁이 뜨기까지 현영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현영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아는 민혁은 현영을 극진하게 대했다. 하지만 현영은 요즘 조금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패션과 마찬가지였다. 뜰 것을 미리 선점한 자신의 안목이 자랑스러울 뿐 이미 뜨고 나면 흥미가 빠르게 식어버리는 것이다.
현영은 턱을 괸 채로 민혁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다른 데 팔려 있었다.
‘얘 원래부터 말할 때 이렇게 맹해 보였나?’
* * *
“이번 사기 건은 무혐의 처분 해주고 앞으로도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어지간한 건 내가 막아줄 거야. 대신 구준태 인천시장에게 접근해서 빼 올 수 있는 정보는 뭐든지 빼 와.”
룸에서 선화와 마주 앉은 태산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선화는 테이블 위에 세팅된 위스키를 따서 잔에 따르며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무슨 수로 접근하라는 건가요? 설마 미인계 같은 거 쓰라는 얘긴 아니죠?”
그러면서 풉 하고 웃더니 잔을 기울여 위스키에 입술을 적시는 것이었다.
“당신 잘하는 거 있잖아? 솔깃한 투자거리 만드는 거. 시에서 지원해 줄 만한 구미 당기는 사업 하나 기획해 보란 말이야.”
“시 지원 따내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선화는 회의적으로 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당신 끗발 좋은 로비스트 아니야? 그 정도는 따낼 수 있어야지. 못 하겠으면 그냥 감방 가든가.”
선화가 수상쩍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런데 구준태 시장 뒤는 왜 캐려는 거예요? 이 정도 집요하게 노리는 걸 보면 뭔가 굉장히 구린 게 있는 모양인데.”
태산은 등을 소파에 기댄 채 잠시 고민했다.
얘길 해줄 이유는 없다. 꼭 밝히지 않더라도 감방행 카드를 쥐고 있는 한 선화는 고분고분 자신의 지시대로 할 것이다.
하지만 태산은 얘기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만약 구준태 시장이 태산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선화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것이 궁금했다.
“재건축 비리 사건으로 조사하던 피의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어. 그게 아무래도 사고 같지가 않단 말이야.”
거기까지 얘기하자 선화의 눈이 크게 떠진다.
“사고 낸 트럭 운전수를 조사하던 중에 이번에는 그 트럭 운전수가 감방 안에서 죽었어.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내 생각은 달라.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사주한 누군가가 있어. 그게 구준태 시장일 수도 있다는 게 내 가설이야.”
완전히 얼어붙어 있던 선화가 떨리는 손으로 위스키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비로소 물었다.
“설마… 조사하고 있던 피의자라는 그 사람… 임태산이에요?”
“맞아.”
태산의 대답에 선화의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화는 애써 울음을 참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위스키 잔을 잡았다.
“사고가 아니었다고요? 살인이었다고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선화는 위스키잔을 단번에 기울였다.
“할게요. 내가 구 시장 털 수 있는 대로 낱낱이 털어볼 테니까 검사님도 하나만 약속해 줘요. 우리 태산 씨 죽인 놈 꼭 좀 잡아줘요.”
간곡히 부탁하는 선화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분노와 슬픔이 느껴져 태산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야? 그자랑 각별한 사이이기라도 했던 거야?”
“각별했죠.”
선화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 한 번 잔에 술을 따라 단번에 들이켰다.
“내가 막 마사지샵 체인사업을 시작했을 때 인천 영업점 중에 몇 개가 그 사람 구역에 있었어요. 그 지역이 유흥가에 우범지대라 항상 시끄러웠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샵을 보호해 주고 영업도 도와줄 테니 수익을 떼달라더라고요. 명분이 어쨌든 보호비를 걷은 거죠. 처음엔 아까운 생각도 들었는데 확실히 매장이 정리되니 수익도 올랐어요. 사람 점잖은 데다 그렇게 심하게 갈취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계속 같이 일하다 보니 정이 붙었지요.”
선화는 계속 술을 홀짝이며 태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태산은 조용히 들었다. 선화가 스스로 태산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진솔하게 얘기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난 그 사람이 참 좋았어요. 내가 만나본 중에 가장 사내다운 사내였어요.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었지만 나한테만은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많이 의지가 되었어요.”
선화는 꿈꾸는 것처럼 말하더니 갑자기 울컥해서 토로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난 당신밖에 없다, 당신에게만은 진심이다 항상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그 사람은 날 결코 믿어주지 않았어요. 언제나 벽을 세웠죠. 그 사람한테 나는 그냥 잠깐 즐기고 말 여자였던 거예요. 그 마음을 알고 나니까 그 사람이 곁에 있어도 항상 외롭기만 했어요.”
그 말에는 태산도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삼류 멜로드라마 대사 같은 이 말을 선화는 예전에도 똑같이 한 적이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호스트랑 바람이 났을 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게 발각당했을 때 선화는 세상 서럽게 통곡하며 태산이 자신을 너무 외롭게 내버려 두어 홧김에 만난 거라고 했다.
선화와는 그냥 즐기는 것뿐이니 서로 의리를 지킬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분노를 누를 길 없었다. 어디 상판이나 보자 하고 끌고 오라 했는데 비쩍 마른 몰골에 대단한 미남도 아니어서 더 화가 났다.
태산은 놈의 불알 한쪽을 잡아 터뜨려 버리고 다시는 선화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다시 눈에 띄면 완전히 고자로 만들어주겠노라고 경고하며.
그 일이 있고 선화가 태산에게 겁을 냈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태산이 독점욕을 발휘해 준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애틋했다면서 왜 빈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
태산의 물음에 선화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 * *
“그렇게 애틋했다면서 왜 빈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
태산의 물음에 당황한 선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빈소는 당신이 아니라 임태산이 심복이 지키고 있더군.”
선화는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살아 있을 때는 애틋했지만 어차피 죽은 것, 재빨리 딴 놈 낚으러 갔겠지. 안 그래?”
태산은 한껏 빈정거렸다. 선화가 탁 하고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검사님은 빈소만 가봤죠? 그 사람 중환자실에 있을 때 가본 적 있어요?”
그 질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쪽이었으므로. 태산이 대답하지 않으니 선화는 멋대로 받아들이고 울컥 감정을 쏟아냈다.
“당신이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선화는 이제까지 참았던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소리쳤다.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꼴로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면서 누워 있는 걸 도저히 볼 수가 없었어… 그 상황이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차라리 사고로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거야. 너무 무서워서 결국 못 견디고 도망쳐 버렸어. 무서워서 도망친 주제에 죽었다고 어떻게 빈소에 얼굴을 내밀어? 그 사람 영정을 무슨 낯으로 보냐고.”
선화의 토로에 태산도 얼이 빠졌다. 선화가 그런 마음이었을 거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 뭐라 위로할 말이 없어 태산은 머뭇거렸다. 선화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엉엉 울었다.
울음이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려 태산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머쓱해하며 말을 건넸다.
“미안해.”
“뭐가?”
선화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퉁명스레 물었다. 선화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한 것, 그리고 그 마음을 모르고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한 사과였지만 전자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함부로 이야기해서.”
선화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결연하게 말했다.
“나 태산 씨 그렇게 되게 한 인간한테 복수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거야. 그러니까 검사님도 범인 꼭 잡아줘.”
태산은 그런 선화의 얼굴을 빤히 본다. 새삼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 내가 이 여자의 이런 면에 약했었지.’
태산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얼굴로 뭘 비장하게 얘기하고 있어? 눈은 퉁퉁 붓고 화장도 다 번졌구먼. 판다야 뭐야?”
“아잇! 엄청 힘주고 나왔는데 이게 뭐야?”
선화는 급히 백을 뒤져 콤팩트를 꺼낸 뒤 거울로 메이크업이 망가진 얼굴을 들여다보며 탄식했다. 그러더니 곧바로 수정에 들어간다. 작은 백 안에서 놀라울 만큼 많은 화장품이 나왔다 들어간다.
급히 메이크업을 고친 선화는 또 분위기가 달라졌다. 처음 바에 나타났을 때는 짙은 메이크업으로 화려함을 강조했지만 이번에는 화장이 지워진 김에 아예 누드 톤으로 청순하게 연출했다. 뷰티 사업을 오래 해온 노하우라지만 태산은 항상 화장만으로 분위기가 급변하는 선화의 기술에 감탄하곤 했었다.
오랜만에 새삼 그 기술에 감탄하며 유심히 보았더니 선화는 메이크업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나 남들 보는 앞에서 화장 고치고 그러는 비매너 아닌데… 자기는 이상하게 편하네. 꼭 오래 알던 사이처럼.”
태산은 뜨끔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뭐야? 은근슬쩍 말 놓는 거야?”
“이제 한배를 탔으니 말 편하게 해도 되잖아. 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 것 같은데.”
선화는 태산을 마주 보며 놀리듯이 물었다.
“왜? 기분 나빠? 꼭 존대를 들어야겠어, 영감님?”
“됐고. 임태산이에 대해서나 더 말해봐.”
태산이 자기 잔에도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태산 씨 얘긴 왜 들으려고?”
“조사차. 계속 추적하던 피의자에 대한 호기심도 있고.”
사실은 선화가 추억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흐응~ 하고 애매하게 반응한 선화는 홀짝홀짝 술을 마시더니 어느새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오래 만났지만 나도 그 사람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 서로에게 연연하지 않는다는 주의였으니까. 와룡회인가 뭔가 하는 조직에 있고 인천에 올라오기 전에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는 정도? 그 정도는 조사해 본 검사님이 더 잘 알겠지?”
선화는 조금 쓸쓸히 얘기하다가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건 설마 검사님도 절대 모르겠지. 그 사람 엉덩이에 젤리곰처럼 생긴 빨간 반점이 있는데. 생긴 것도 곰탱이처럼 생긴 주제에 그런 반점이 있는 게 너무 귀여워서 내가 한번은 작정하고 동생들 다 있는 데서 젤리곰이라고 불렀거든. 그랬더니 어찌나 펄쩍 뛰면서 부끄러워하는지, 그 후로는 한 번도 그렇게 못 불러봤지만…….”
선화가 이야기를 꺼내 다시 그때가 떠오르고 말았다. 태산은 질색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야.”
선화가 입을 삐죽인다.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우들 앞에서 그런 별명으로 불리면 체면이 안 서잖아. 나 같아도 치를 떨겠네.”
“자기 여자한테 애칭으로 불린 정도로 무너질 카리스마면 완전 허당이잖아. 우리 태산 씨는 안 그래. 아우들이 얼마나 극진히 모시는 줄 알아?”
“예, 예. 그러시겠죠. 범죄단체 조직죄를 범했고 게다가 끗발 좋은 간부였다. 잘 접수했습니다.”
선화가 깔깔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되게 잘 들어준다. 별로 자기 일하고는 관계없는 얘기인데도.”
“뭐 관계없긴 하지만… 임태산이 얘기라면 해도 좋아. 당신한테도 애도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그리고 태산에게도 자신의 이전 삶을 돌아보고 떠나보낼 시간이 필요했다.
선화는 태산을 가만히 다시 보았다.
“무서운 검사님인 줄 알았더니 자기 의외로 스윗한 데가 있네.”
선화가 예의 코를 찡긋하는 눈웃음을 짓는다.
“꼬실 생각 하지 마.”
“어휴~ 안 해요, 안 해.”
선화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태산은 선화가 즐겁게 웃는 것이 못내 유쾌했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태산도 취한 모습을 본 것을 손에 꼽을 만큼 술이 센 선화였지만 추억에 취해서인지 금방 혀가 풀리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태산은 선화를 부축해 근방의 호텔로 데려갔다. 침대에 눕혀놓고 태산은 선화의 잠든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보았다. 선화의 눈가에 물기가 비친다.
“…태산 씨…….”
들릴 듯 말 듯 선화가 잠꼬대를 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태산은 이불을 덮고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선화를 침대에 남겨둔 채 그대로 객실을 나왔다.
태산이 객실을 나가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 후 선화가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한번 엮어보려 했더니 쓸데없이 매너가 좋네. 눈물 작전도 안 통하고.”
약한 면을 보이면 위로해 준다는 핑계로 어찌해 보려는 사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탄식하며 선화는 무심코 침대맡 협탁으로 눈을 돌렸다. 협탁 위에는 차가운 녹차 페트병이 놓여 있었다.
아까 호텔로 오는 길에 강 검사가 대리 기사에게 편의점 근처에 잠시 차를 대게 했었는데 그때 사 온 모양이다.
선화는 어리둥절했다.
술 마신 다음 날 해장 녹차를 마시는 것은 선화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이뇨 작용이 있어서 몸에 더 해롭다고는 하지만 급한 대로 술 마신 다음 날의 부기를 빼는 데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대체 강 검사가 어찌 알고…….
함께 술을 마신 다음 날은 항상 녹차를 내려 얼음을 타주곤 했던 태산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선화는 고개를 붕붕 저어 떨쳐낸다.
“그냥 우연의 일치겠지. 그런 것까지 조사했을 리는 없고.”
선화는 금방 잊어버리고 페트병을 집어 올려 시원하게 마셨다.
* * *
“인천시와 주식회사 뷰티테크의 협약서 교환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진행에 구준태 인천시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위로 올라왔다. 뒤이어 미소 띤 얼굴로 단상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한선화였다.
인천시가 선화가 대표로 있는 주식회사 뷰티테크와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자리였다. 인천시의 뷰티 크리에이터 양성 프로그램에 뷰티테크가 협력사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뷰티테크는 뷰티 플랫폼 서비스 기업을 표방하며 직접 양성한 뷰티 크리에이터들을 통해 자사가 제조 판매 하는 뷰티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사업 구조를 제시했다. 한류에 힘입어 전 세계 뷰티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는 무지갯빛 청사진도 내놓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각 지자체는 지역에 기반을 둔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유치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메이저 유튜버는 기업에 버금갈 만한 규모였으므로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활동 반경이 문화 인프라가 풍부한 서울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지자체 기반의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기획도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그 와중에 뷰티테크의 청사진은 지역 기반의 유튜버를 양성함과 동시에 뷰티 사업 유치로도 확장될 수 있는 매력적인 기획으로 보였다. 그리고 인천시는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협약서에 서명하고 교환하며 선화는 구준태 인천시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펑펑 터지는 와중에도 선화와 구 시장은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둘 다 카메라에 잘 찍히는 요령에는 통달한 능구렁이였던 것이다.
“구 시장님, 오늘 실물 처음 뵙는데 카메라 잘 안 받으시나 봐요. 실물이 훨씬 핸섬하신데요.”
선화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한 대표님이야말로 이렇게 미인이신데 성공한 사업가이시고 대단하십니다.”
구 시장이 유쾌하게 껄껄 웃었다.
“돈 많은 게 뭐 자랑인가요?”
선화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입을 구 시장의 귀 가까이 가져가 속삭였다.
“정보만 있으면 돈 벌 방법이야 많아요. 저랑 친해 두시면 또 모르죠. 고급 정보 나눠 드릴지.”
그렇게 말하고 선화는 얼른 떨어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구 시장도 음험하게 마주 웃는다. 그 얼굴을 보고 선화는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그래, 당신이 용의자란 말이지?’
선화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럼 뷰티테크의 한선화 대표님 모셔서 한 말씀 듣겠습니다.”
진행에 따라 선화는 우아한 걸음으로 마이크 앞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주식회사 뷰티테크 대표, 한선화입니다. 인천시와 협력하여 뷰티 관련 업계에서 활약할 인력들을 양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영광입니다. 뷰티테크는 수많은 특허와 상표출원 등 지식재산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기술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입니다. 혁신도시 인천은 뷰티테크가 발전해 나갈 좋은 요람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발맞춰 혁신도시 인천시와 함께 세계적인 뷰티 선도기업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강당에 울리는 우레 같은 박수 소리를 들으며 선화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