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묻지마 기소
“석남동 살인사건 말씀입니까?”
“그렇네.”
얼마 후 형사 3부 장진호 부장검사가 은밀히 태산을 호출하여 꺼낸 말에 태산은 국밥집에서 이흥렬 계장과 함께 보았던 뉴스를 떠올렸다.
“최근 많이 보도되었으니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 사건이 우리 부에 배정이 되었어. 묻지마 살인사건인 데다 워낙 수법이 잔인해서 대중의 이목이 쏠려 있네.”
장진호 부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런데 골치 아픈 점이 있단 말이야. 용의자가 둘인데 그중 누가 범인인지 경찰도 확신을 못 하는 모양이야. 일단 둘 중 하나를 피의자로 해서 송치하긴 했는데 영 입증이 부실해. 까딱하다간 재판 올라가서 무죄판결이 날 수도 있겠어. 그러면 기소한 검찰에게 화살이 돌아오겠지.”
장 부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만큼 검사장님께서 특별히 이번 사건 신경 써서 증거 보강해 기소하라는 엄명이 있었네. 저번 사이버 도박 조직 검거한 실적도 있고 하니 자네를 다시 한번 믿어보겠다 하시는군. 특별히 자네에게 맡기시는 만큼 빈틈이 없도록 해보게.”
태산은 이번 사건을 자신에게 맡기는 검사장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실적이 좋아서 맡긴다고 하지만, 골치 아픈 놈에게 골치 아픈 사건을 떠넘기려는 것이다. 잘하면 다행이고 못 하면 총알받이로 쓰겠지.
얼마나 까다로운 사건일지 눈에 선했지만 그렇다고 못 하겠다 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태산은 사건기록을 넘겨받고 506호 검사실로 돌아와 책상 위에 기록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 사건부터 살펴보죠. 피의자가 특정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선입견에 매이지 마시고 용의자 둘 중 누구라도 범인이 될 수 있다 생각하고 봐주세요.”
모두 사건기록을 하나씩 들고 살피기 시작했다. 태산도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읽어본다.
피의자 이종도, 28세. 근방 공단에 다니고 있으며 직장 동료인 참고인 배태성과 함께 퇴근 후 술을 마시러 갔다. 피해자 유준필이 화장실에 가는 것을 보고 배태성과 함께 뒤따라갔고 배태성이 손을 씻는 사이 소변기 앞에 서 있는 유준필을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간략히 요약하면 그렇지만 이종도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찌른 것은 자신이 아닌 배태성이며 범행에 사용된 공업용 커터도 배태성의 것이라고 한다.
배태성의 진술에 따르면 이종도가 술에 취해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화장실로 따라갔다고 한다. 칼을 빌려달라기에 빌려주었는데 손을 씻는 사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부검 결과를 보면 칼을 위에서 내리꽂았다고 되어 있는데요. 피해자 키가 176인데 배태성은 172밖에 안 돼요. 이종도는 키가 180이니까 상식적으로 이종도가 범인이 아닐까요? 경찰도 이걸 보고 이종도를 피의자로 확정한 것 같은데요.”
최진우 검사가 부검 소견서를 보면서 의견을 제시했다.
“그건 알 수 없어. 피해자와 용의자들 키 차이가 5센티도 안 난다고. 심지어 용의자 둘의 키 차이도 10센티를 넘지 않아. 이 정도라면 칼을 꽂는 각도 같은 건 키 차이로 크게 좌우되지 않지. 범인과 피해자의 자세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태산은 당장 반박하며 자세를 취해 보였다.
“피해자가 살짝 하체를 숙인 상태에서 소변을 보다가 돌아보았는데 이종도가 발돋움을 해 내려 찔렀다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각도인 거지. 처음 찌른 후에는 당연히 자세가 무너졌을 테고 그럼 그다음부터는 내려 찌르는 건 문제도 아니었을 거야.”
황수진 실무관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법의학자의 전문적인 소견이 필요하겠네요. 의뢰 넣어두겠습니다.”
이흥렬 계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이종도가 범인이라고 하기에는 혈흔이 너무 약한데요. 피해자는 경동맥을 여러 번 난자당했는데 이종도는 상의와 신발에 피가 약간 튀었을 뿐이에요. 오히려 배태성 상의에서 혈흔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보면 배태성 쪽이 더 수상합니다.”
“배태성 진술로는 피해자가 칼에 찔린 후 자기 쪽으로 쓰러져서 깜짝 놀라 밀어냈다는데요.”
이 계장의 말에 최진우 검사가 반박하고 나섰다.
“에이~ 그렇다고 해도 찌른 사람한테 혈흔이 이렇게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오히려 찌른 쪽이기 때문에 얼른 증거를 은폐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약품처리를 해서 세탁했다거나. 오히려 자기가 안 찔렀기 때문에 배태성은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이 계장이 재반박했지만 이번에는 황수진 실무관이 안경을 들어 올리며 지적했다. 검사실 안에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릴 정도로 증거가 애매한 사건이었다.
이 계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거 골치 아프네요. 이대로 기소하면 이종도 자칫 무죄판결 받을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 배태성을 기소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범인이니.”
태산이 그렇게 되묻자 최진우 검사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하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사정을 잘 아는 이 계장은 이마를 문지르며 설명해 주었다.
“잘 아시다시피 형사절차에서는 이놈 아니면 저놈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유죄가 되지는 않잖습니까? 한 명 한 명 개별적으로 유죄가 인정될 만한 충분한 증거가 필요하죠.”
이 계장은 태산도 잘 아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말했다.
“배태성도 유죄라는 증거가 불분명하니까 이종도를 피의자로 만들어 조서 올린 거잖아요. 이종도가 유죄 인정을 못 받은 상황에서 배태성을 기소했는데 배태성까지 무죄판결 받아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이죠. 살인사건은 났는데 범인이 없는 거예요. 후에 둘 중 하나가 자백을 한다 해도 그땐 이미 처벌을 못 해요. 단일한 사건을 두 번 재판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군요.”
태산이 공부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진술이 모순되고 있으니 대질을 한번 시켜봅시다. 그럼 한쪽의 논리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태산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두 사람을 만나보면 어느 쪽이 살인범인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사람을 해쳐본 놈은 척 보면 알 수 있다.
“알겠습니다. 대질신문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날 이미 구속되어 있던 이종도가 먼저 검사실로 불려 왔다. 이종도가 이 계장에게 이끌려 검사실로 들어선 순간 태산은 이종도가 범인임을 확신했다. 하이에나의 상이었던 것이다.
하이에나는 사자를 보면 꼬리를 숨기지만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사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목숨을 잃을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힌다. 이런 놈은 평소에는 짐승의 본능을 숨기고 비굴함의 탈을 쓰고 있지만, 기회만 생기면 얼마든지 상대의 약점을 물어뜯을 수 있는 잔인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본성을 숨긴채 몸을 낮추고 있다는 점에서 대놓고 위험한 기운을 풍기는 이들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종도 씨, 14일 오전 1시 30분경에 인천 석남동의 주점 화장실에서 유준필 씨의 목과 가슴을 찔러 살해한 사실이 있습니까?”
“제가 아닙니다. 배태성이 그 새끼가 저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저는 쏙 빠져나간 거예요. 처음부터 칼도 그 새끼 거였는데 왜 저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종도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태산은 가증스러운 상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대질하려고 배태성 씨도 불렀어요. 말 들어보면 알겠죠.”
태산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사건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에 쓰여 있는 진술과 별다를 것 없는 대답이 나왔다.
“검사님, 참고인 도착했습니다.”
그때 이 계장이 이번에는 배태성을 데리고 검사실로 들어섰다. 태산은 배태성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놈도 하이에나의 얼굴이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처음부터 같은 놈들끼리 어울렸나 보다. 이렇게 되니 둘 중 누가 피해자를 찔렀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개새끼! 살인죄 뒤집어씌운 새끼가 아주 뻔뻔하게 낯짝을 들이미는구나!”
“누굴 보고 뒤집어씌웠대? 지가 죽여놓고 지랄하고 있네.”
두 용의자는 눈을 부라리며 팽팽하게 맞섰다.
“닥치고 앉아!”
태산이 목청을 높이자 둘은 눈치를 보며 움찔한다.
“니들 얘기는 양쪽 다 잘 들어줄 테니까 억울하면 차근차근 얘기해. 악다구니 쓰지 말고. 지금부터 목소리 높이는 놈 있으면 그놈을 피의자로 처넣을 거야.”
태산이 으름장을 놓자 두 용의자는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배태성이, 이종도 말로는 칼이 네 거라면서? 조서 보니까 범행 후에 칼을 챙겨 나가서 멀리 떨어진 편의점 쓰레기통에 버린 것도 너였다던데?”
배태성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이 새끼가 칼을 빌려달라고 해서 별생각 없이 빌려줬는데 갑자기 사람을 찌르잖아요. 그러고는 저한테 칼 맡기고 나가 버리는데 계속 가지고 있으면 제가 의심받을까 봐 버렸습니다.”
“그럼 네 옷에 있는 핏자국은 뭐야? 루미놀 검사 결과를 보니 엄청나게 튀었던데? 거의 뒤집어쓴 정도로.”
“바로 옆에 있었잖아요. 저 새끼가 찌른 후에 그 사람이 이쪽으로 쓰러져서 저한테 피가 다 묻었던 거예요. 진짜 억울합니다. 전 저 새끼가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고 해서 화장실까지 따라간 죄밖에 없다고요.”
태산이 이번에는 이종도를 향해 물었다.
“재미있는 걸 보여주겠다고 한 게 사실이야? 그때 살인 고의를 형성한 걸로 볼 수도 있는데?”
태산의 질문에 이종도가 펄펄 뛰었다.
“새까만 거짓말이에요. 화장실 앞에서 칼을 주면서 안에 있는 사람 찌를 수 있겠냐고 도발했던 건 저 새끼라고요. 겁쟁이라서 못 찌를 거라고 놀리기까지 했어요. 못 찌르는 게 아니라 안 찌르는 거다 하고 바로 돌려주었는데 미친놈이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사람을 찌르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바로 도망쳐 나온 게 답니다. 믿어주세요.”
“CCTV 상으로는 니가 조금 더 늦게 나왔어.”
“그, 그건 하도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쨌든 급히 나오긴 했어요.”
둘 모두 억울하다며 입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억울할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칼을 맞고 죽은 피해자일 것이다. 이놈들은 똑같은 놈들이고 억울해할 자격이 없다.
“왜 구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
태산의 질문에 둘 다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한다.
“네놈들 말대로 상대방이 찔렀다 치자. 왜 10번이나 찌르도록 막지 않았나?”
“아니… 미친놈을 어떻게 막아요? 그러다 저도 찌르면요…….”
배태성이 눈치를 보며 기어 들어가듯 답했다.
“그렇다면 왜 바로 나와서 신고하지 않았지? 119든 경찰이든…….”
“겨, 경황이 없어서…….”
“그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신고 안 한 게 죄는 아니잖아요.”
둘이 다투어 대답했다.
태산이 본 첫인상이 맞았다. 이놈들은 하이에나다. 둘 중 누가 찔렀든지 상관없다. 피해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둘 모두에게 있었다.
* * *
“그래, 석남동 살인사건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형사 3부 장진호 부장검사가 태산을 호출해 진행 상황을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찌른 놈은 판명이 되었어?”
“아니요. 확정 못 했습니다.”
태산의 답에 장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려운 건가?”
태산이 바로 덧붙였다.
“누가 찔렀는지가 중요합니까? 어쨌든 피의자만 확정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장 부장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태산을 보았다. 찌른 놈이 누군지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피의자를 확정한단 말인가.
태산이 의뭉스럽게 답했다.
“부장님도 그렇지만 법 다루는 사람들은 논리라는 함정에 빠지기 쉬워요. 이 사건만 해도 누가 찔렀는지 추리하는 데만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둘 중 누가 직접 칼을 들고 찔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습니다. 둘 다 피해자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죠. 둘이 함께 서로를 부추겨 가며 사람의 목숨을 재밋거리로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태산은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공모공동정범으로 기소할 생각입니다.”
장 부장은 끄응 신음했다. 가능하기는 하겠지마는…….
“범행을 공모했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 있나?”
“쉽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단독범행을 입증하는 것보다는 수월할 겁니다.”
태산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짐작하는 듯 장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범의 진술은 강력한 증명력을 가진다. 자백은 그것만으로는 증명력을 가지지 못하고 보강증거를 요구하지만, 공범의 진술은 그러한 제한도 없기 때문이다.
“이종도는 배태성이 흉기를 제공했고 범행 후에 증거를 인멸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배태성은 이종도가 처음 범행을 제안했다고 증언했고요. 범행 중에 서로 범행을 부추기고 격려하는 말을 했다고도 했습니다. 혈흔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만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도 한 명이 뒤에서 붙잡고 다른 한 명이 찔렀다고 보면 설명 가능합니다. 아무런 구호 조치나 신고 없이 둘 모두 도주했다는 점도 심증을 강하게 해줄 것이고요.”
장 부장은 태산의 설명을 가만히 들으며 턱을 문질렀다.
“공동정범으로 기소했다가 유죄판결 받지 못하면 범인은 영영 놓치고 마네.”
“단독범행으로 두 번 기소했다가 기 다 빼고 결국 둘 다 놓치는 것보다는 낫겠죠.”
장 부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그렇게 해보게.”
장 부장은 승인을 내리고는 태산의 얼굴을 찬찬히 본다.
“자네 참 많이 변한 것 같군. 예전에는 철두철미하게 법리를 앞세우는 타입이었는데.”
사고 후 갑작스러운 강 검사의 변화가 장 부장은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뭐 그쪽이 대중의 법감정에는 더 부합하긴 하겠지. 너무 위험한 짓만 하지 말게.”
위험한 짓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완력을 쓴 과잉수사 정도가 아니라 증거를 조작해 범인을 잡아넣은 적도 있다는 걸 알면 이 점잖은 척하는 얼굴이 어떻게 바뀔까? 놀란 토끼 눈을 하고 파랗게 질리겠지?
태산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장 부장이 의아해하며 돌아보기에 태산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서 부장실을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산은 이종도와 배태성을 살인죄의 공동정범으로 기소했다. 기소장을 작성하고 수사를 종결한 후 수사 기록들을 보자기에 싸 들고 공판부가 있는 3층으로 향했다. 중요하고도 까다로운 사건인 만큼 공판검사에게 직접 기록을 넘기며 공소 유지에 더욱 신경 써달라고 당부할 셈이었다.
공판부인 307호실로 들어가니 커다란 방 안에 6개의 책상이 붙어 있었다. 책상은 대부분 비어 있다. 입구 쪽에 별도의 책상을 놓고 앉아 있던 실무관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건기록 넘기러 왔습니다. 공판검사에게 직접 설명할 것도 있고 해서요. 전윤지 검사가 담당이라고 들었는데요.”
실무관이 6개 책상 중 제일 구석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저기 계시네요. 방금 전에 들어오셨어요.”
실무관이 가리킨 자리에는 수세미 같은 머리를 한 여검사 하나가 법복을 입은 그대로 엎어져서 잠이 들어 있었다. 공판검사들은 법정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므로 공판실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것을 생각하면 운이 좋게 바로 만난 셈이다.
그러나 자신이 언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 검사는 깨어날 줄 몰랐다. 태산은 사건기록 보자기를 들고 전 검사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반응이 없어 일부러 쿵 하고 보자기를 세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전 검사가 고개를 번쩍 든다.
파마인지 악성 곱슬인지 알 수 없는 단발머리가 산발이 되어 마구잡이로 뻗쳐 있었고 입가에는 침이 고여 있다. 이마에는 빨갛게 찍힌 자국이 선명하다. 아주 가관이다 싶다.
“전윤지 검사? 형사 3부의 강바른입니다. 석남동 살인사건 기록 가져왔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전 검사는 부랴부랴 팔로 입가를 훔쳐 닦고는 곁에 벗어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집어 썼다. 그러고는 묶을 것도 없는 짧은 단발머리를 눈이 당기도록 바짝 잡아당겨 고무줄로 묶으며 말했다.
“아아~ 석남동 살인사건? 그거 유명하죠? 골치 아픈 거 가져오셨네요.”
“공모공동정범으로 묶어서 최대한 증거 보강해 뒀습니다. 생각만큼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가능한 한 중형으로 구형 부탁합니다.”
“걱정 마세요.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는 사건이니까 사형 때려 버리죠.”
전 검사는 시원시원하게 답했지만 태산은 오히려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 신뢰가 가지 않았다.
전 검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 기록을 풀어보고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태산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더 궁금한 점이 생기면 제가 다시 찾아뵙든가 할게요.”
전 검사가 그렇게 마무리하기에 태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서 공판실을 나가려는데 마침 생각났다는 듯 전 검사가 물었다.
“아~ 강 검사님. 그러고 보니 안소영 검사실에서 보낸 택시 기사 살인사건 수사 같이 하지 않으셨어요?”
“공동수사는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주임은 안소영 검사고 전 조언을 부탁받아서 사건 검토나 같이 했을 뿐입니다.”
“그래요?”
전 검사가 개구쟁이처럼 장난기 담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사건도 진짜 골치 아팠거든요.”
“골치 아플 것이 뭐 있나요? 증거가 분명하고 자백도 나온 사건인데.”
“그 사건 피고인이 검사가 증거 조작을 했다고 재판 내내 길길이 날뛰었거든요. 이미 범행은 인정했기 때문에 판사님도, 심지어 피고인 측 변호사조차도 신경을 안 썼기 망정이죠. 변호사가 각 잡고 증거 조작이라고 주장했으면 쉽지 않았을 뻔했어요. 사실 흔하디흔한 양말이잖아요. 비슷한 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테죠. 발견된 장소도 석연치 않고.”
‘이거 꽤 예리한 데가 있는 친군데?’
태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흥렬 계장이 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피해자가 살해되는 와중에도 진상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양말을 벗어 숨겼다고 생각하면 참 안타깝지 않습니까?”
전 검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일 따름이었다.
“저는 그 가설보다는 누군가 증거 조작을 했다는 피고인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려서 말이죠.”
전 검사는 빙긋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뭐 어쨌든 맡기신 사건은 최선을 다해서 중형 받아보겠습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안녕히 가세요.”
당장에라도 ‘당신이 조작했지?’ 하고 추궁할 것 같은 기세더니 금세 상관없다는 듯 기록을 펼쳐 일에 몰두하는 전 검사였다.
태산은 희한한 여자다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인천지방법원은 오늘 석남동 살인사건의 피고인 이종도와 배태성에게 각각 징역 30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행동이 매우 잔인하고 사회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고 판결 사유를 밝혔습니다. 앞서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피고인들에게 ‘죄책감과 반성이 없어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할 필요가 있다’며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퇴근 후 TV 앞에서 캔 맥주를 마시던 태산은 뉴스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궁금한 게 있으면 더 물어보겠다던 전윤지 검사는 내내 소식이 없었는데 어느새 1심이 저만큼 진행된 모양이다.
“사형 구형하겠다더니 정말로 한 모양이네.”
태산은 맥주를 마시다 말고 중얼거렸다. 사형을 선고받지는 못했지만 각각 30년형을 받은 것을 보면 까다로운 사건이다 엄살을 했으면서도 알아서 야무지게 처리한 것 같다.
허술해 보이긴 해도 일 하나는 잘 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 택시 기사 살인사건의 증거 조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것도 단순히 예리한 육감으로 넘겨짚은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전 검사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떠본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생각보다 더 경계해야 할 대상일지도 모른다.
* * *
“수법이 교묘하네요.”
사기 사건 수사 기록을 보며 태산은 혀를 내둘렀다.
피의자인 김영숙이라는 여자는 바지 사장을 내세워 소규모의 건실한 뷰티 사업체를 인수했다. 1년간 꾸준히 거래하면서 회사 규모를 키우고 여기저기서 투자를 받는다. 거래는 모두 약속어음으로 하고 결제도 확실히 한다. 이렇게 1년 정도 신용을 쌓은 후 서서히 작업에 들어갔다.
대기업이나 중국, 혹은 홈쇼핑에서 대량의 주문이 들어왔다면서 엄청난 양의 뷰티 용품을 업체로부터 납품받았다. 갑자기 대량의 주문을 받은 업체들이 불안해하면 믿을 만한 직원에게 납품할 대기업이나 홈쇼핑 임원 행세를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거래 업체들을 속여 물품을 외상으로 구입한 다음 헐값으로 처분해 버리고 그 대금을 편취한 후 회사는 부도 절차를 밟는다.
피의자의 변명은 실제로 대량 주문 계약이 있었으나 계약이 파기되면서 물품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 헐값으로라도 처분해 대금을 결제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일부러 사기를 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경영실패로 부득이 부도가 난 것뿐이라고 진술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려고 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어휴~ 갑자기 대량 주문을 하면 의심을 해봐야 한단 말이지. 사업하는 사람들이 그걸 그렇게 덥석 믿어버리다니.”
함께 기록을 검토하고 있던 이흥렬 계장이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외모나 인상만 보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더욱이 1년 이상 좋은 관계로 거래를 계속해 온 상대라면 믿고 싶었을 것이다.
몇 번을 속아도 믿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마음의 틈을 절묘하게 파고드는 재능이 있는 인간도 있다.
누구라도 무장해제 시키는 친화력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귀여움으로 속는 줄 뻔히 알면서도 속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여자를 태산도 하나 알고 있었다.
“저기… 조사받으러 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그때 검사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여자를 보고 태산은 깜짝 놀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수수한 메이크업과 차림새이긴 하지만 선화가 틀림없었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로비스트. 자신에게 유리하기만 하면 거짓말과 거짓 눈물도 자유자재로 짜내는 요물. 그리고 태산의 여자.
한선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