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10화 (10/78)

제9장 좋은 검사 나쁜 사람

“우리 강 검사님 진짜 개멋지지 않아요? 진짜 검사 중의 검사, 최고의 검사인 듯요.”

강 검사가 자리를 뜨자 최진우 검사는 아예 작정하고 입에서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해댔다.

“저 검사 연수 할 때 지도검사님은 조서 작성해 가면 빨간 펜으로 몇 줄 찍찍 그어주고 그만이었거든요. 그런데 강 검사님은 틀린 부분을 바로 지적하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찾게 하세요. 저한테 법알못에게 설명하듯이 해보라고 하실 때가 있는데 설명하다 보면 절로 미흡한 부분을 알게 되더라고요. 다른 검사님들은 수습검사를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는 꼭두각시 정도로 생각하잖아요. 독립적으로 사건 맡겨주시지도 않고. 근데 강 검사님은 저를 한 사람의 검사로 인정해 주세요. 진짜 다른 검사님들과는 다르다니까요.”

“어휴~ 우리 최 검사님이 강 검사님한테 완전히 반했네, 반했어.”

이흥렬 계장이 놀리듯 말하니 최 검사는 애꿎은 안 검사 쪽으로 화살을 돌리며 동의를 구했다.

“제가 틀린 말 했나요? 우리 강 검사님 진짜 좋은 검사님 아니세요?”

안 검사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좋은 검사이긴 한데 좋은 사람은 아니었죠.”

안 검사의 말에 모여 앉은 직원들 모두 이심전심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 검사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 어쨌든 자기 이야기에 빠져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쩐지 요즘은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네.”

안 검사는 강 검사가 김선동 피의자를 조사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존경할 만한 선배 검사지만 인간미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고 후 돌아온 강 검사는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변해 있었다. 인간적인 면은 찾은 것 같지만 검사 업무에는 건성이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모범적인 선배 검사로서 강바른 검사를 존경해 왔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런 강 검사의 변화가 썩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피의자의 내심을 이해하고 따듯하게 감싸주어 결국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수사 방식을 지켜보고 나니 여전히 검사로서도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존경심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니까 안 검사님도 동의하시는 거죠?”

최 검사는 포기하지 않고 채근했다.

“무슨 얘긴데 최 검사가 저렇게 열을 올려요?”

화장실에 갔던 태산이 돌아와 안 검사 옆의 빈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최 검사는 이야기에 빠져 태산이 은근히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강 검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안 검사만 태산의 등장에 잠시 움찔했을 뿐이다.

황수진 실무관이 농담 섞어 말한다.

“강 검사님 뒷담화 중이었죠. 최 검사님이요~ 강 검사님 참 좋은 검사님이시래요.”

태산은 심드렁하게 반문했다.

“어떤 검사가 좋은 검산데요?”

태산은 그렇게 물으며 슬쩍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서 잔을 집어 오려 한다. 최 검사가 바로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답했다.

“그야 당연히 강 검사님처럼 자백 척척 잘 받아내는 검사죠.”

“야근 안 시키는 검사님요!”

황수진 실무관이 번쩍 손을 들고 이야기해 폭소가 터졌다. 다른 수사관들과 실무관도 일제히 손을 들었다.

“동의합니다!”

“저도요!”

태산이 웃으며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웃음이 잦아들자 일동의 시선이 안 검사에게 꽂혔다. 안 검사는 어떤 검사를 이상적이라 생각하는지 모두 궁금해하고 있었다. 안 검사는 술잔을 홀짝이며 조금 쑥스러운 듯 툭 던져놓았다.

“음… 정의를 믿는 검사요?”

너무나 정석인 대답에 다들 웃음기를 거두고 눈을 크게 뜬다. 술기운이 돈 최 검사만 눈치 없이 풉 웃었다.

“와아~ 요즘도 이렇게 교과서 같은 검사님이 계시네요.”

쑥스러워하면서 꺼낸 얘기를 바로 웃음거리로 받으니 안 검사는 기분이 상해 귀 끝이 붉어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한다.

최 검사가 이번에는 강 검사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검사님은요? 어떤 검사가 좋은 검사라고 생각하세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였기 때문에 태산은 한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문득 안경 너머로 번뜩이던 강바른 검사의 매서운 눈빛이 생각났다.

“나쁜 놈들을 좆나게 쫄리게 하는 게 좋은 검사 아니겠어?”

연차 10년도 안 된 새파란 검사 따위를 겁낸 적은 없지만 하도 바락바락 달려드는 바람에 좆나게 귀찮기는 했다. 그건 인정!

“그런 의미에서 강 검사는 꽤 괜찮은 검사였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최 검사가 귀신같이 들었다.

“으아~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자신을 강 검사라고 칭하다니! 자기 모에화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모… 뭐?”

최 검사는 설명도 없이 그저 깔깔거리고 웃었다. 아무튼 요즘 애들 쓰는 말은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런 최 검사를 안 검사가 얄밉다는 듯 가만히 노려본다. 그러더니 문득 미간을 모으고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것이다.

“최 검사, 혹시 그 수염 일부러 기르는 거예요?”

“예? 아… 아니 그냥 바쁘다 보니까 면도를 못 해서…….”

피의자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기른 것이 뻔하지만 남한테는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최 검사의 속이 짐작되어 태산은 웃음을 삼켰다.

“다행이네요. 그게 최 검사 취향이면 그냥 존중해 주려고 했는데 솔직히 너무 이상해서. 아빠 분장한 어린애 같으니까 얼른 깎는 게 좋겠어요.”

“아… 네…….”

최 검사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시무룩하게 답했다. 두 사람이 서로 카운터펀치를 제대로 주고받은 형국이었다.

묘하게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자 이흥렬 계장이 얼른 분위기를 수습한다.

“자, 모처럼 마련한 자리인데 다 같이 건배라도 합시다.”

이 계장의 채근에 모두 소주잔을 채워 손에 들었다.

“최 검사님의 부임과 강 검사님 복직을 축하드리고요. 형사 3부의 단합을 위하여!”

“위하여!!!”

다 함께 잔을 부딪치고 소주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강 검사로서 동료들 사이에 녹아드는 이 시간이 태산은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꽤나 즐거운 것이었다.

조폭도 검사도 모두 조직을 회사라고 칭했지만 이 회사든 저 회사든 조직 생활은 비슷한가 보다. 태산은 ‘꽤 적성에 맞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강 검사님, 2차! 2차!”

“됐고요. 회식 자리 길어져 봤자 다들 불편할 테니 일찍 들어갑시다.”

고깃집 회식을 끝내고 나와서 최 검사는 2차를 종용했지만 태산은 딱 잘라 거절했다. 최 검사와 이 계장만 아쉬워하는 표정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반색했다.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아서 한 사람씩 보내는데 저쪽 도로변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형사 4부의 서동욱 검사다.

여전히 숨이 막힐 듯 몸에 꽉 끼는 슈트 차림에 머리카락 한 올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바짝 올려붙인 올백 머리로 연신 누군가를 향해 허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곁에 있는 것은 아마도 형사 4부 부장인 것 같고. 맞은편에서 인사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은 태산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직속은 아니지만 강 검사의 상사인 제1차장 검사와 인천지검장이었다.

태산은 가만히 지검장을 노려본다. 제1차장 검사는 복직하기 전 강 검사의 주변인들을 조사하며 익힌 얼굴이었지만 인천지검장은 그 이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신임이신가 본데 위에 물어보시면 다 압니다. 괜한 고생 마시고 저희 회사엔 관심 끄십쇼, 영감님.]

태산이 과거 강바른 검사에게 조직에서 잘 구워삶아 놨다 암시했던 윗선. 그가 바로 인천지검장 우현중이었다. 큰 형님의 특별관리대상.

서동욱 검사는 비굴한 표정으로 연신 딸랑거리며 지검장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교통사고 사건을 담당한, 몹시 수상쩍은 검사가 바로 저 줄을 잡고 있다는 거지?’

서 검사가 시선을 의식하고 흘낏 이쪽을 쳐다보았지만 태산을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이내 고개를 돌렸다.

* * *

“그러니까 서 검사가 그 사건을 쥐고 있는 게 지검장의 지시일 거란 말씀이십니까?”

야심한 시간, 잠시 강 검사의 오피스텔에 들러 태산에게 그간에 알아낸 이야기를 듣던 범진이 되물었다.

“그래. 아마 사건 맡기면서 어떤 식으로 해결하라는 지침을 내렸겠지. 서 검사가 내막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역시 박중성 이사 쪽에서 지검장에게 사건을 덮어달라는 요청이 들어갔을까요?”

“그거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검장이 그런 로비가 통하는 인간이라는 건 확실하지. 누군가 사건을 덮기를 원했다면 지검장에게 접촉했을 거야.”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 태산을 범진이 가만히 바라본다.

“제가 한번 알아볼까요?”

태산은 범진을 돌아보았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눈빛은 결연하다. 태산은 그 속이 뻔히 비쳐 보여 피식 웃어버렸다.

“어쩔 셈이냐? 잡아다 매달기라도 하려고?”

“필요하다면 하겠습니다.”

“아서라. 검사장급을 건드렸다간 일이 복잡해진다.”

현직 검사장을 건드렸다가 자칫 조폭과의 전쟁 사태라도 벌어지면 범진이 간신히 살려놓은 조직이 크게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서 검사라면 얘기가 다르지.”

태산은 악의적으로 씨익 웃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 와라. 진솔한 대화를 한번 나눠볼라니까.”

며칠 후 밤늦은 시간, 범진은 퇴근 중이던 서 검사를 납치해 태산건설 소유의 공사장 한편으로 끌고 왔다. 손은 뒤로 묶였고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안대를 써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서 감사는 범진에게 덜미가 잡혀 비틀거리며 끌려왔다.

범진이 서 검사의 눈에서 안대를 벗기고 재갈을 푼다. 서 검사가 물러나는 범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누구야?! 현직 검사를 납치하고도 니가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너 딱 기억해 뒀어!”

서 검사는 애써 소리를 쥐어짜 냈지만 시선은 두려움으로 불안하게 떨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검사님, 납치된 건 처음이라 잘 모르시죠? 납치됐을 때는 상대방 얼굴을 자세히 보면 안 되는데. 범인 얼굴 기억하면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범진의 말에 서 검사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떨궜다.

“그쯤 해둬라. 검사님 놀라시겠다.”

기괴한 금속음에 서 검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창 앞에 놓인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도 그나마 역광이라 상대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체구가 크다는 것, 머리에 복면을 쓰고 있다는 것, 음성변조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우라만으로도 거대하고 위협적이라 서 검사는 등골을 따라 소름이 달리는 것을 느끼고 꿀꺽 침을 삼켰다.

“서 검사님,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얼굴을 가리고 익명으로 그 자리에 앉은 태산은 강 검사인 척하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눌러놓고 있었던 사투리 억양이 풀려나며 태산 특유의 말투가 완전히 돌아왔다. 범진은 경이롭다는 눈으로 태산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 * *

“서 검사,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아는 대로만 말하면 곱게 보내 드릴라니까 머리 굴리지 말고 싸게싸게 얘기하고 갑시다.”

태산은 위협과 회유를 반쯤 섞어 서 검사를 구슬렀다. 서 검사는 아무 대답 없이 침만 꿀꺽 삼켰다. 순순히 답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그래도 더 이상 소리를 지르거나 버둥거리지 않는 것을 보면 아는 대로 말하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있나 보다.

“최근에 청탁을 받은 사건이 하나 있을 것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 검사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간다. 무슨 건일까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눈치다.

“선뜻 안 떠오르나 보네. 청탁받은 건이 너무 많은가?”

“무슨 사건 말이오?”

청탁받은 적이 없다는 의미로도, 받았으나 정확히 무슨 사건인지 모르겠으니 힌트를 달라는 의미로도 들리는 말이었다. 약삭빠른 놈이다.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가 있을 텐데…….”

태산은 일단 그렇게 떠보았다. 서 검사의 눈이 크게 떠진다. 짚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기억나는 모양이군. 누가 어떤 청탁을 넣었는지만 말해주면 됩니다. 그것만 들으면 바로 보내 드릴라니까.”

“무슨 말씀인지…….”

서 검사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말은 그리 해도 이젠 무슨 사건인지 확실히 감을 잡은 듯하다.

“정 기억이 안 나시면 기억나게 해드려야지.”

태산이 자리에서 쓱 몸을 일으킨다. 그러고는 천천히 서 검사에게로 다가온다. 서 검사는 움찔 몸을 떨었다.

“자… 잠깐만요…….”

태산은 범진의 앞에 잠시 멈춰서 손을 내밀었다. 범진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고 허리 뒤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 건네준다.

가로등 빛에 칼날이 번쩍 빛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서 검사는 경악해 엉덩이걸음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기억나요… 기억납니다! 신흥동 사거리 업무상 과실치사 사건 맞죠? 검사장님이 다른 소리 안 나오게 되도록 빨리 처리하라고 하셨어요. 공판까지 제가 다 맡아서 하라고. 그래서 더 조사 안 하고 그냥 피의자 자백에 따라 사건 처리했을 뿐입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누가 청탁했는지 그런 건 전혀 몰라요. 정말입니다!”

서 검사는 필사적으로 털어놓았지만 태산은 개의치 않고 다가가 서 검사의 덜미를 잡았다. 돌려 앉혀놓고 칼을 든 채 자세를 낮추니 서 검사는 “으아악~”하고 다급한 비명을 지른다.

“엄살떨지 마쇼. 아직 시작도 안 혔는데.”

태산은 칼날을 서 검사의 손목 사이로 밀어 넣었다. 서 검사가 이번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잔뜩 움츠린다. 태산은 칼을 움직여 서 검사의 손목을 묶고 있던 케이블 타이를 잘라냈다.

손을 풀어주자 서 검사는 잠깐 안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태산이 손목을 잡아끌어다 놓고 새끼손가락에 칼날을 갖다 대자 금세 얼굴이 파리해지며 벌벌 떨었다.

“정말이에요. 정말이라고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태산은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칼날에 힘을 주었다.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배어 나오고 이내 칼끝에 뼈가 닿았다. 서 검사는 숫제 패닉에 빠져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으아악~ 잠깐만요. 다 말할게요. 다 말할 테니까…….”

서 검사가 거의 울먹이며 사정해 태산은 손을 잠시 늦추었다. 멈추는 기색이 보이자 서 검사는 급히 자신이 아는 것을 다 꿰어 읊었다.

“그 피의자,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정말 졸음운전으로 사망사고가 났으면 당황하고 괴로워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죽인 거니까. 그런데 피의자가 수사하는 내내 너무 태연했어요. 그래서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위에서 수사 지침까지 내려왔으니 든든한 빽이 있나 보다 하고 말았죠. 진짜 그것뿐이에요. 정말입니다, 선생님!”

서 검사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털어놓았다.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은 수사검사조차도 수상쩍게 느꼈다니 살인이라는 심증은 더 강화시켜 주었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이런 말이라도 쥐어짜 내지 않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는 건 서 검사 역시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저 충직한 심부름꾼일 뿐.

아는 게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약속대로 곱게 놓아주어야 하겠지만 태산은 잠시 망설였다.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도 해칠 수 있으면 해치는 게 맹수의 본능이다. 일단 피를 보니 오랜만에 잔인한 심성이 확 끓어오르며 그대로 칼날을 눌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태산은 간신히 충동을 눌러 참고 칼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다시 소파로 가 앉았다.

“뭐 믿어보지요. 약속대로 곱게 보내 드릴 테니 돌아가서 지금까지처럼만 하세요. 검사장 줄 잘 잡고 있다가 누가 시킨 건지 한번 알아봐요. 나중에 우리 쪽에서 먼저 접촉할 테니까 그때 알아낸 걸 얘기해 주면 됩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알아내겠습니다.”

서 검사는 머리가 땅에 닿을 뜻 조아렸다. 당장의 위험만은 피했다 싶어 안도한 모양이다.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 허튼수작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저 친구가 얼굴을 가리지 않은 이유가 있겄지요?”

태산이 범진 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범진의 눈이 어둠 속에서 승냥이처럼 번뜩였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았던 서 검사가 흠칫한다.

“저 친구는 처음부터 검사님을 죽일 작정이었는데 잠시 유예해 두는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죽이려고 맘만 먹으면 목 따는 거 안 망설여요. 언제 맘이 바뀔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무, 물론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서 검사는 머리가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이 고갯짓을 하자 범진은 다시 서 검사에게 안대를 씌우고 재갈을 물린 다음 끌고 나갔다. 태산은 복면을 벗고 창가에 서서 범진이 서 검사를 차 트렁크에 싣는 것을 지켜보았다.

* * *

“법원 가십니까?”

검사복을 입고 508호를 나서던 서동욱 검사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강바른 검사가 506호로 들어가려다 말고 이쪽을 보고 있다.

“아… 재판이 있어서…….”

서 검사는 애매하게 답하며 강 검사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강 검사 가까이로 다가간 순간 본능적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서 검사는 고개를 들고 새삼 강 검사를 유심히 보았다. 키가 큰 건 알았지만 이 자식 언제 이렇게 몸이 좋아졌지? 체구가 달라져서인지 몸에서 풍기는 아우라도 달라져 있었다. 어쩐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강 검사의 달라진 아우라가 자신을 납치해 손가락을 자르려 했던 정체불명의 사내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 보니 강 검사도 신흥동 사거리 사건을 궁금해했었는데… 설마…….

서 검사는 고개를 저었다. 사내는 전라도 사투리 억양이 강하게 느껴지는 억센 말투와 칼을 차고 다니는 심복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남도 출신 조폭이 아닐까 추정되었다. 강 검사와 체구는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너무나 다른 세계의 인간이다.

서 검사가 고민하고 있는 동안 강 검사는 영문을 모르고 눈만 끔벅끔벅한다.

“저 말이야, 강 프로… 혹시 저번에 물어본 신흥동 사건, 그거 왜 물어본 거야?”

강 검사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 그거요? 그 사고로 제가 조사하고 있던 사건의 피의자가 죽었거든요. 진짜 단순 사고일까 의심이 생겨서요.”

“그래?”

강 검사가 의심을 품었고 정체불명의 사내도 그 사건에 흑막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빨리 무마하라는 검사장의 지시도 있었고 서 검사 역시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단순 교통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왜요? 사건기록 보여주시게요?”

“미쳤냐?”

“에이~ 어차피 재판 끝나고 나면 기록 다 열람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냥 좀 보여줍시다.”

“내 손에서 떠나고 나면 찾아보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 내 손에 있는 이상은 못 내주니까. 남의 사건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야. 내가 수사를 제대로 못 했다는 거야, 뭐야?!”

서 검사는 쌀쌀맞게 답하고 돌아섰다.

“…근데 손가락은 왜 그래요?”

강 검사가 픽 웃으며 슬쩍 던져놓은 말에 목덜미에서부터 등골을 따라 소름이 쫘악 달렸다. 서 검사는 새끼손가락에 흰 붕대가 감겨 있는 왼손을 꽉 움켜쥐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강 검사는 딱히 대답을 들으려 한 말은 아닌 듯 이미 506호로 들어서 있다. 바로 코앞에서 문이 닫힌다.

‘과민 반응이야. 그냥 붕대가 감겨 있으니 한 소릴 가지고…….’

서 검사는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법원으로 가기 전에 801호 검사장실에 들를 계획이었다.

“검사장님.”

집무실에 들어서니 우현중 검사장이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 서 검사. 무슨 일인가?”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지시하신 교통사고 사건 말입니다.”

서 검사가 운을 떼자마자 우 검사장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선고공판일이라 법원에 나가는 길입니다. 피고인은 형량이 얼마가 나오든 항소는 안 하겠다 했고요. 당연히 저도 항소하지 않을 테니 곧 재판 확정될 것 같습니다.”

“잘했네. 마지막까지 수고 좀 해주게.”

“예,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 검사장은 흐뭇한 얼굴로 서 검사를 격려했다. 서 검사는 그대로 인사하고 나가려다가 정체불명의 사내를 떠올리고 멈칫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무슨 정보라도 건네야 무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검사장님… 그런데 그 사건은 무슨 이유로 빨리 처리하라고 하신 건가요? 피고인은 그렇게 유복한 집 자제 같지 않던데… 어떤 분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셨기에…….”

검사장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져 서 검사는 아차 한다. 너무 서둘렀던 건가?

“자네가 그걸 왜 궁금해하나?”

시키는 일이나 잘할 것이지 일개 평검사 주제에 분수 모르고 덤빈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너무도 잘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아, 아니요… 그게… 검사장님에게까지 말이 서는 분이면 굉장히 유력하신 분 아닌가 싶어서… 그런 분이면 저도 좀 알고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심코… 죄송합니다.”

서 검사가 얼른 자세를 낮추어 답하자 검사장은 금세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 참 서 검사답군. 누군지는 몰라도 줄을 한번 대보고 싶다? 자네도 혹시 후에 법복 벗으면 어디 출마라도 할 셈인가?”

서 검사의 눈이 번뜩 뜨였다. 방금 검사장이 한 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상대는 정치권 인사임이 유력했고 검사 출신일 확률도 있었다.

검사장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 싶었는지 얼른 말을 돌렸다.

“언젠가 만날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 자네가 이 사건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기회가 빨리 올 수도 있고.”

“예! 잘해보겠습니다!”

서 검사는 그렇게 대답해 놓고 얼른 검사장실을 나왔다. 더 캐보려다가는 오히려 경계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서 검사는 검찰청을 나와 코 닿을 곳에 있는 법원으로 향했다. 그날 최종 선고공판에서 피고인은 업무상 과실치사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피고인의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는데 슬퍼하지도, 그나마 형량이 낮은 데 대해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런 피고인을 보며 서 검사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의혹대로라면 저 사내는 사람 셋을 살해하고도 징역 6년도 아닌, 고작 징역 6월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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