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사가 법을 모름-9화 (9/78)

제8장 두 얼굴의 검사님

“검사님, 알아보라고 했던 그 교통사고 사건 말입니다. 재판 중이라 공판부로 넘어갔을 줄 알았는데 아직 수사부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복잡하거나 중대한 사건도 아닌데 수사검사가 공판까지 맡아서 진행하고 있더라고요.”

이흥렬 계장이 집무실로 들어와 은밀히 말했다. 태산은 반색했다.

“주임검사가 누굽니까?”

이흥렬 계장은 조금 난감해하며 답했다.

“형사 4부 서동욱 검사입니다.”

태산은 왜 하필… 하고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계장도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서동욱 검사는 좀 어려울 겁니다. 기억나시는지 모르겠는데 평소 그렇게 친하게 지낸 분은 아니라…….”

친하게 안 지낸 정도가 아니다. 서 검사의 말에 따르면 강 검사가 평소 자신을 소 닭 보듯 했다고 한다.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태산은 내색하지 않았다.

“다른 검사라고 해서 딱히 가깝게 지냈겠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만…….”

이 계장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원칙주의자는 아닌 듯하니 오히려 쉬울 수 있어요. 잘 구슬려 보면 넘어오지 않을까요?”

태산은 애써 희망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다.

고위급 검사들을 구워삶을 때 어떤 방법을 썼는지를 되새겨 보며. 떡값이 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비싼 밥과 술로 흐물흐물하게 녹여놓는 것이 먼저다.

태산은 바로 508호 검사실로 건너갔다.

“서동욱 검사님 계십니까?”

“예? 예. 계신데요.”

508호 검사실 식구들이 등 뒤로 술렁거렸다. 아무리 평소 교류가 없었다 해도 무슨 귀신 본 것처럼 굴 건 없잖아. 태산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노크도 없이 서 검사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고개를 번쩍 든 서 검사가 대번에 미간을 모은다.

“강 프로! 노크라도 하고 들어오라고! 개념 없네, 진짜.”

일부러 그런 것인 만큼 태산은 서 검사의 타박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씩 웃으며 용건을 꺼냈다.

“서 검사님, 오늘 저랑 저녁이나 같이하시죠.”

“뭐? 내가 왜?”

서 검사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서 검사님 말씀처럼 제가 병원에 오래 있다 보니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요. 바로 옆방에서 일하는 동료들끼리 언제까지 소 닭 보듯 하고 지내겠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친하게 지낼 기회를 좀 만들어봅시다. 오늘 저녁은 제가 거하게 쏘겠습니다.”

태산이 크게 쏘겠다며 호탕하게 선언하자 서 검사는 솔깃한 얼굴이었지만 바로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뭐 내키지 않으시면 관두시고요.”

태산이 미련 없이 자리를 뜨려고 하자 서 검사가 얼른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마침 저녁 시간이 비네. 그럼 강 프로가 자리 잡아놔.”

“예, 알겠습니다.”

태산은 씩 웃어 보이고는 서 검사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5성급 호텔 중식당을 예약해 두었다. 한국 관광 온 중국 갑부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식당으로 데려가자 서 검사는 입이 벌쭉 벌어졌다. 태산이 값비싼 코스 요리를 주문하자 더욱 기분이 좋아졌고 요리를 먹으며 독주가 몇 잔 들어가고 난 후에는 완전히 가드가 내려왔다.

“이야~ 우리 강 프로, 깐깐하고 답답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통이 크네. 말도 잘 통하고 말이야. 이래서 사람이 가까이서 대화를 나눠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난 사실 강 프로 처음 봤을 때부터 나랑 잘 통하겠다 싶었어. 옷 입은 스타일이나 차 타고 다니는 것만 봐도 알지. 집에 돈 좀 있나 봐? 그거 프라다 슈트지? 나도 그 브랜드 좋아해.”

명품 슈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지만 태산은 서 검사를 구워삶기 위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프라다 좋아하십니까? 그럼 제가 언제 한 벌 선물해 드리죠.”

“어휴~ 그래 주면 고맙지.”

서 검사는 껄껄 웃었다.

이거 뭐 떡값 더 준비할 것도 없이 말만 잘하면 바로 넘어오겠는데?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강 프로도 말이야. 앞으로 힘든 일이 있거나 그러면 어려워하지 말고 나한테 다 얘기해. 동기 좋다는 게 뭐야? 서로서로 돕고 사는 거지.”

게다가 본인이 자진해서 도와주겠단다.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을 놓칠 수 없어 태산은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안 그래도 제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 수사를 서 검사님이 맡았었다고 들었습니다. 수사 기록을 좀 보고 싶은데요. 수사 중에 뭔가 특이한 점은 없었는지도 좀 듣고 싶고요.”

나름대로는 조심해서 꺼내놓은 말인데 서 검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요리를 우물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사건인데?”

“신흥동 사거리 교통사고 사건입니다. 트럭 운전자의 졸음운전으로 승용차 운전기사와 동승자 2명 포함해 3명이 사망했어요.”

바쁘게 움직이던 서 검사의 젓가락이 순간 멈칫한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태산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야, 강 프로! 너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 불러낸 거였냐?”

갑자기 돌변한 서 검사의 태도에 태산도 당황했다.

“아, 아니. 도와주신다기에 마침 생각이 나서…….”

“이 새끼 이거, 큰일 날 놈이네. 누구 검사 인생 망칠 일 있냐? 남의 수사 기록 빼 가서 뭐 어쩌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서 검사는 더 듣지도 않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더러워서 니가 사는 밥 안 얻어먹는다!”

그렇게 소리치더니 젓가락을 내팽개치고 급히 자리를 뜬다. 이미 먹을 건 다 먹어놓고, 안 얻어먹는다더니 계산도 안 하고 나가 버렸다. 태산은 황당해서 한동안 멀뚱멀뚱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상쩍다. 분명 수사 기록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서 검사는 별것 아닌 양 무슨 사건이냐고 되물었다. 그런데 무슨 사건인지를 말한 순간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펄펄 뛰는 것이다.

강 검사처럼 융통성 없는 성격 같지는 않은데, 아니, 오히려 도덕적으로 매우 유연한 타입 같은데 어울리지 않게 심한 반발이었다.

뭔가 구린 데가 있는 것일까? 수사 기록을 못 보여줄 이유라도 있는 건가?

게다가 이흥렬 계장이 언뜻 했던 말도 계속 마음에 걸린다. 그럴 만한 중대 사건이 아닌데 이례적으로 수사검사가 공판까지 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혹시 수사 과정에서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일까?

“다음 코스 내올까요?”

일행이 갑자기 나가 버리자 매니저가 들어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식사를 중단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예, 부탁합니다.”

태산은 그렇게 답하고는 본격적으로 먹을 준비를 했다. 음식은 많이 남았고 바른의 몸은 아직 더 살찌워야 한다. 오늘 저녁은 수련하는 마음으로 양껏 먹을 셈이었다.

* * *

“뭐야? 어린애잖아.”

최진우 검사는 피의자의 중얼거림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최 검사는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경묵 씨, 5월 21일 밤 9시 30분경부터 12시 30분경까지 약 3시간 동안 아내인 김화순 씨를 폭행한 것이 사실인가요?”

피의자는 느물느물 답했다.

“어휴~ 사람을 어떻게 세 시간 동안 계속 팹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폭행했습니까? 아닙니까?”

피의자는 최 검사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취조실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채 최 검사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검사님 맞아요? 아무리 봐도 어린앤데?”

그러더니 피식 웃고는 속삭였다.

“너 학교는 졸업했냐? 수습이야?”

최 검사는 이를 악물었지만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미 무시당한 상황에서 멘탈이 흔들렸지만 이를 악물고 바락바락 목소리를 높였다.

“피의자! 지금 장난합니까?! 제대로 답 못 해요?!”

“어이구~ 무서워라.”

피의자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과장되게 몸을 움츠렸다. 무시하는 투가 역력하다. 최 검사는 숫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말을 잇지 못한다.

매직미러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태산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검사님, 어디 가세요?”

이흥렬 계장이 어리둥절해 물었지만 태산은 대꾸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태산은 이 계장이 취조하는 것을 참관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으므로 계장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운 후 차차 직접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산 외에도 취조법를 배워야 하는 이가 있었으니, 수습인 최진우 검사였다.

이 계장이 슬슬 최 검사에게도 취조를 맡겨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오늘은 최 검사가 처음으로 혼자 피의자의 취조를 맡은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 상대가 뺀질뺀질한 것이 영 만만치 않다.

태산은 성큼성큼 취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 기세 그대로 피의자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려 벽에 밀어붙였다.

최 검사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계장이 얼른 녹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켁켁거리는 피의자의 귓가에 대고 태산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대답 똑바로 못 해, 이 새끼야?!”

“켁켁! 이거 놔! 검사가 이렇게 함부로 사람 폭행해도 되는 거야?! 고발할 거야! 검사복 벗고 싶냐?”

태산은 손아귀 안에서 버둥대는 사내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이런 놈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고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른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성실히 돈 벌기도 싫어 쉽게 한몫 잡아보려고 조직 근처를 기웃거리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밤의 세계로 뛰어들 배짱도 근성도 없는 놈들. 그냥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며 자기보다 약한 대상은 기가 막히게 찾아 괴롭히는 놈들.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한번 해봐.”

“뭐?”

“한번 해보라고, 고발.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태산은 놈의 멱살을 코앞까지 들어 올려 이를 갈듯이 속삭여 주었다.

“내가 검사복 벗는 거 따위를 아쉬워할 거 같냐? 기왕 검사복 벗을 거 너 하나 죽여놓고 가면 딱 좋겠네. 니가 취조실에서 난동 부리는 걸 막으려다 정당방위로 그랬다, 뭐 그 정도로 설명하면 되겠지. 판사도 너같은 쓰레기를 치운 걸 내심 잘했다 생각할 거야, 안 그래?”

잡범으로 경찰서를 숱하게 들락거린 이력이 있는 피의자도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함을 느끼며 피의자는 더듬더듬 반발했다. 처음보다 기세가 확연하게 꺾여 있었다.

“지, 지금 협박하는 거야?”

“아니.”

태산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악의를 담아 씨익 웃어 보였다.

“진짜 죽이고 싶어져서.”

그 순간 피의자는 오금이 저릴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젊은 검사의 눈빛에는 정말로 살기가 등등했다.

먼발치에서였지만 피의자는 조직에서 날고 기는 살벌한 건달들을 본 적이 있다. 이것은 그런 맹수의 눈빛이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을 해쳐본 적이 있는 사람의 눈빛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고 다리가 풀렸다. 태산이 손을 놓자 피의자는 털석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태산이 으름장을 놓자 다리가 풀린 피의자는 이후 최진우 검사의 신문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때린 건 사실인데요. 3시간 내내 때린 건 아니고요.”

“신고한 분 얘기로는 3시간 동안 계속 맞는 소리가 들려서 신고했다던데요. 저러다 사람 잡겠다 싶어서.”

“그건 마누라가 혼자 지랄발광을 하느라 그런 거였어요. 하도 바가지가 심해서 홧김에 한 대 쳤는데 그걸 가지고 저녁 내내 악을 쓰는 거예요. 그래서 입 좀 다물라고 한 대 더 쳤습니다.”

최 검사의 옆자리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태산이 되물었다.

“그래서? 딱 두 대만 쳤다? 뭐로?”

피의자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손바닥으로…….”

“따귀 두 대 친 걸로 사람 얼굴이 이렇게 되냐? 전치 4준데?”

태산은 최 검사 옆에 놓여 있는 피해자의 사진을 피의자에게 툭 던져주며 말했다.

“그게… 딱 두 대는 아니었고…….”

“이 새끼가! 말 똑바로 하라고 했지?!”

태산이 반쯤 엉덩이를 일으키며 호통을 쳤다. 피의자는 움찔하고는 서둘러 덧붙였다.

“저도 화 나고 정신 없어서 정확히 몇 대나 때렸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아무거나 집히는 거로도 좀 때렸고…….”

“집히는 거 뭐요?”

최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뭐였더라… 맥주 컵이었던가…….”

‘각 나왔구먼.’

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리컵 같이 위험한 도구를 사용해 사람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특수상해죄가 성립한다. 경찰에서는 단순상해죄로 조서를 올렸지만, 특수상해죄로 죄명을 바꿔 기소해야 할 것이다. 자잘한 전과가 많은 데다 특수상해면 이번에는 꽤 중형을 받을지도 모른다.

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야 피의자는 목소리를 낮춰 최 검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마누라가 저 처벌받는 거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요. 그래도 재판을 받나요?”

최 검사는 경찰 조서를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답했다.

“단순폭행이라면 반의사불벌죄니까 불기소처분 하겠지만 댁은 안돼요. 지금 보니 단순상해도 아니고 특수상해인 것 같은데. 그래도 재판받을 때 참작 받을 수는 있을 거예요. 수사 성실히 받으시고 반성하는 모습 보이세요.”

“예…….”

피의자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태산은 매직미러가 설치된 취조실 옆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계장님, 보셨죠?”

“예! 아직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증거 확보하겠습니다.”

이 계장이 허둥지둥 나갈 채비를 한다.

“그리고 피해자 말도 좀 들어보시고요. 상습성이 있으면 상습폭행으로도…….”

태산은 거기까지 말했다가 멈칫했다. 매직미러 앞에 서 있던 검은 그림자가 이쪽을 쓱 하고 돌아보았던 것이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유독 까만 생머리를 뒤로 돌려 묶은 안소영 검사였다. 어두운 방 안이라 하얀 얼굴만 동동 떠 보였다. 귀신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안 검사. 언제 왔어요?”

안 검사가 팔짱을 낀 채로 태산을 노려보았다.

“아까부터 와 있었어요. 최 검사 오늘 첫 취조라고 해서요.”

어떤 말이 이어질까 하고 태산은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 검사가 가시 돋친 어조로 채근했다.

“검사님, 오늘도 손이 먼저 나가셨네요.”

“안 검사가 못 봐서 그래요. 최 검사가 아주 고역을 치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조금 도와준 겁니다. 저런 놈들은 구슬린다고 말을 들어먹지 않아요.”

태산이 변명하자 안 검사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다.

“아무리 그래도 폭력을 써서 수사해서는 안 됩니다. 치밀하게 압박하고 증거를 들이밀어서 불게 만드는 게 검사의 일이죠. 지금 강 검사님은 최 검사가 그런 취조의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신 겁니다. 당장은 좀 힘들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잖아요.”

안 검사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된다.

“그뿐이 아니에요.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폭력을 써서 자백시키는 것은 수사관들이 공들여서 진행한 수사 전체를 무위로 돌려 버릴 수 있는 위험한 일이라고요. 당장은 증거 잡아서 기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증거능력이 부정되면 말짱 도루묵이죠. 그런 민폐를 끼칠 셈은 아니시겠죠?”

역시나 검사는 검사다. 안 검사는 태산을 대꾸도 할 수 없을 만큼 몰아붙였다.

“이제부터 검사님은 직접 취조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 이 계장님께 맡기시고 참관만 하세요.”

“알았습니다.”

도리 없이 그러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울 것은 없다. 그만큼 업무가 줄어드는 셈이니까.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피의자 취조를 마무리하고 돌아온 최진우 검사가 상기된 얼굴로 들어섰다.

“와아~ 검사님! 오늘 진짜 너무 멋지셨어요. 오만불손한 피의자를 단번에 제압해 버리시는데 짱 세 보였다니까요.”

엄지를 치켜세우며 연신 호들갑을 떠는 최 검사다. 그러다가 자신을 흘겨보고 있는 안소영 검사를 발견했다.

“어? 안 검사님 오셨네요. 안 검사님도 보셨어요? 강 검사님 완전 멋있지 않았어요?”

눈치도 없이 떠들어대는 최 검사를 안 검사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한참 뒤에야 분위기가 썰렁한 것을 깨닫고 어리둥절해 입을 다무는 최 검사다.

안 검사는 그런 최 검사를 노려보며 뚜벅뚜벅 다가갔다. 최 검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맨다. 안 검사는 그대로 최 검사를 지나쳐 문을 나가 버렸다. 안 검사가 나가고야 최 검사는 울상이 되어 이 계장에게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뜬금없는 물음에 이 계장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 최 검사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아니에요. 잘했어요. 잘했어. 고생 많았습니다.”

최 검사는 은근히 기대를 가지고 강 검사도 한마디 해주기를 기다렸다.

대놓고 다정하게 말하는 건 원래의 강 검사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태산 또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살갑게 위로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 않았다.

“피의자한테 그렇게 무시당해서 되겠어요? 얼굴에서 연륜이 안 느껴져서 그런가?”

나름대로는 안쓰러워서 한 말이었지만 최 검사는 실의에 빠져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거군요. 안 검사님도 제가 취조하는 게 영 못 미더워서 그러셨던 거였군요.”

태산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멋대로 오해한 최 검사를 내버려 두고 취조실을 나왔다.

* * *

“계속 중고 매장에서 들고 나온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데요. 댁에서 압수한 물건 중 가전제품 4대가 중고 매장 소유라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습니다. 계속 부인할 것이 아니라 인정할 건 인정하시고 여죄를 고백하시면 정상참작은 해드리겠습니다.”

최진우 검사가 취조실에서 피의자를 앞에 두고 까칠한 태도로 물었다. 태도뿐만 아니라 얼굴도 까칠하다. 최근 수염을 기르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 연륜이 느껴지지 않아 피의자들이 무시하는 거 아니냐 라는 말을 태산이 무심히 던진 이후로 최 검사는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염이 얼굴을 무성히 덮기는커녕 입꼬리 주변에만 염소처럼 조금 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연륜이 생기기는커녕 꼬마가 애쓰고 있다는 느낌만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피의자도 전혀 최 검사의 취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신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두리번거리고 손을 쥐락펴락 가만히 두지 못한다.

“저기요. 저거 거울 아니죠?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저쪽 편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던데, 저기 누구 있는 거 맞죠?”

피의자가 태산이 서 있는 매직미러 저편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피의자!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최 검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쌓여 있는 수사 기록철을 손바닥으로 쾅 내리쳤다. 하지만 내리치기 전에 잠깐 망설여서 박자도 어긋났다. 손바닥이 서류철 모서리에 부딪쳤다. 최 검사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

옆에서 취조 내용을 기록하던 황수진 실무관이 입술을 앙다물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다.

그 꼴을 매직미러 건너편에서 지켜보며 안소영 검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 검사의 두 번째 단독 취조일, 이흥렬 수사관이 외근을 나간 덕분에 강 검사 혼자서 참관을 하는 것이 불안했던 안 검사가 함께 입회한 것이었다.

좀처럼 취조에 집중하지 못하는 피의자를 보면 강 검사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다. 안 검사는 매직미러 앞에서 무언가 생각에 잠겨 피의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강 검사를 흘낏 훔쳐보았다.

최 검사가 목소리를 높여도 피의자는 그저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멍하니 초점 잃은 눈으로 딴생각을 한다.

“이미 확인된 장물이 미니 냉장고 한 대, 전자레인지 한 대, 선풍기 한 대, 가스레인지 한 대입니다. 이 물건들 김선동 씨가 빼돌린 거 맞죠?”

피의자는 듣고 있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피식 웃더니 최 검사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검사님, 저보다 어리시죠? 진짜 젊으시네요. 저 이렇게 젊은 검사님 처음 봤어요. 공부 되게 잘하셨나 봐요.”

“지금 젊은 검사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왜 질문에 대답을 안 하죠?”

“에이~ 아니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제 동생 생각나서요. 이젠 연락도 안 닿는데… 어려서 헤어지는 바람에 어떻게 컸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컸으면 검사님 나이쯤 될 것 같아서…….”

가뜩이나 나이 얘기를 꺼내 최 검사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린 피의자가 이번에는 자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니 최 검사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이보세요! 자꾸 말 돌리지 말라고요! 당신 지금 범죄 저질러서 수사받으러 온 거야! 놀러 온 거 아니라고!”

최 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피의자는 눈을 크게 뜨고 최 검사를 올려다보았다.

“피의자! 이 물품들 피의자가 빼돌린 거 맞지요?! 대답하세요!”

최 검사는 경찰 조서를 피의자의 눈앞에 들이밀며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피의자는 대답을 하기는커녕 숫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최 검사는 답답해서 가슴을 친다. 머리 위에서 스팀이 올라오는 게 보이는 것 같을 정도다.

태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검사가 돌아보며 묻는다.

“어디 가세요?”

“최 검사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 교대해 주러 갑니다.”

“폭력은 안 된다고 말씀드렸죠?”

“압니다.”

태산이 취조실로 들어서니 최 검사가 돌아보며 안도한 얼굴을 한다.

“내가 계속할 테니까 최 검사는 잠깐 쉬어요.”

“예, 부탁드립니다.”

최 검사는 얼른 태산과 교대해 취조실을 나갔다. 그리고 매직미러가 설치된 옆방으로 들어갔다.

“어휴~ 저 진상 피의자! 이제 강 검사님이 개박살을 내주시겠죠?”

최 검사는 기대로 눈을 빛내며 안 검사에게 동의를 구했다. 안 검사가 지난 취조에서 자신을 노려봤던 이유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안 검사는 귀를 의심하며 다시금 최 검사를 노려보았지만 최 검사는 취조실 안 상황에 주의를 완전히 뺏긴 채였다.

* * *

태산은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워 앉으며 피의자에게 말을 걸었다.

“김선동 씨?”

피의자는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

“최 검사 또래의 동생이 있다고요?”

피의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 동생 얘기 좀 듣고 싶은데요.”

여전히 묵묵부답이던 피의자가 슬쩍 고개를 들어 태산을 보았다. 그러더니 모기만 한 소리로 묻는다.

“…왜요?”

태산은 무심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궁금해서요.”

피의자는 멀뚱멀뚱 태산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버렸다.

“싫어요.”

매직미러 밖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최 검사가 “저 자식이…” 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태산은 여유 있게 답했다.

“그래요. 싫으면 나중에 내킬 때 얘기해 줘도 돼요.”

그러고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배고프죠? 황 실무관님, 요 앞에 국밥 잘하는 집 있죠? 거기서 국밥 두 그릇만 시켜줘요. 그리고 실무관님은 식사하고 오시고.”

“예, 알겠습니다.”

진전이 없는 취조에 지쳐있던 황수진 실무관이 반색하며 일어섰다.

국밥이 도착하자 피의자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국밥을 입에 퍼 넣었다.

“천천히 먹어요.”

피의자는 대꾸도 없이 먹는 데만 열중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봐요. 아니, 배가 안 고팠어도 배고픈 시절이 길면 밥을 급하게 먹는 버릇이 생기죠.”

피의자가 그제야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서 적개심이 번뜩였다.

“검사님 같은 사람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잘 안다고 답해도 믿을 것 같지 않아 태산은 그저 쓰게 웃었다.

국밥을 먹고 나서도 피의자는 계속 입을 꾹 다문 채였다. 태산도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피의자와 마주 앉아서 가끔 실없는 이야기들을 툭툭 던질 따름이다. 이미 점심을 먹고 온 황수진 실무관이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옆자리에서 연신 하품을 할 지경이었다.

피의자가 식곤증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태산도 팔짱을 끼고 눈을 붙인다. 당장 피의자의 멘탈을 박살 내줄 것 같던 강 검사가 느긋하게 쉬고 있자 최 검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최 검사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계속 취조를 지켜보던 안 검사가 말했다.

“최 검사도 식사하고 와요.”

“안 검사님은 안 가세요?”

“저는 좀 더 지켜보다 갈게요.”

안 검사는 강바른 검사가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인 건지 궁금했다. 복귀 후의 행보를 생각하면 당장 피의자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도 모자랄 텐데. 저러다 혹시 인내심의 한계가 와 사고를 치는 사태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무료했던 최 검사는 두말없이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왔다. 점심을 먹고 온 후에도 상황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강 검사와 피의자는 조용히 대치하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해 최 검사는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다. 업무를 보다가 늦은 저녁을 먹고 와서 들여다보니 취조실 밖에는 신문지에 덮인 배달 음식 그릇이 나와 있었다. 취조실 옆방에서는 안 검사가 망부석처럼 서서 취조실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계속 여기 계셨어요?”

안 검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 검사는 못 들었나 하고 다시 물었다.

“아직 그대로예요?”

“쉿! 지금 시작될 것 같아요.”

안 검사가 급히 최 검사의 입을 막았다. 최 검사는 뜨끔해 어깨를 움츠리고는 취조실 쪽을 바라보았다.

“…동생은 그때 아직 어렸으니까 엄마가 데리고 나갔어요. 저도 처음에는 단단히 마음먹고 아버지랑 살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그 후에 바로 집을 나왔죠. 엄마는 내가 그래도 좀 컸으니까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도 어렸는데… 나도 많이 힘들었는데… 그래도 동생은 나처럼 힘들게 살진 않았겠지,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자고 공부도 할 만큼 하고 그랬겠지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고 있어요. 혹시나 나만큼 힘들게 살까 봐, 그런데 형이 되어서 도와주지도 못할까 봐 차마 찾아보지는 못하겠더라고요.”

태산은 피의자의 넋두리를 가만히 들어주고 있었다. 피의자가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쏟는다.

“이런 얘기까지 한 건 검사님이 처음입니다. 저 같은 놈 말을 누가 들어주겠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춥고 배고파서 어쩔 수 없이 훔쳤다고 얘기해도 누구 하나 귓등으로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소년원에서 만난 형의 꼬임에 빠져서 말려들었다고 해도 콧방귀도 안 뀌었다고요. 내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그걸 누가 믿어주겠어요. 어차피 아무도 안 믿어줄 거라면 차라리 아무 말 안 하는 게 낫죠. 기대도 안 할 테니까.”

피의자는 서러움에 어깨를 떨며 울었다. 태산은 피의자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말했다.

“억울한 점이 있으면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얘기해야 해요. 이번에는 내가 들어주겠습니다. 억울하지 않도록 잘 처리해 줄 테니까 한번 이야기해 봐요.”

피의자는 울음 섞어 더듬더듬 사건의 전말을 풀어놓았다.

“사장님은 정말 좋은 분이었어요. 전과가 있는 저를 따뜻하게 받아주셨고 그래서 저도 열심히 일했어요. 제 사정 다 아시니까 매입한 물건 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갖다 쓰라고도 하셨어요. 처음엔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가져갔었는데 따로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셔서 나중엔 그냥 가져갔어요. 그래도 미안하니까 상태 좋고 매입가 높은 건 안 가져갔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고소를 했을까요?”

“계기는 사소한 거였어요. 정산이 안 맞아서 사장님이 저를 내심 의심하신 것 같아요. 나중에 사장님 실수라는 게 밝혀졌지만 그때부터 태도가 바뀌시더라고요. 매입가를 너무 높게 잡는다, 매장 정리를 못한다, 태도가 나쁘다 온갖 꼬투리를 잡으셔서 한번 크게 말다툼을 한 적이 있는데 그 후에 바로 고소장 내셨더라고요. 분명 사장님이 가져가도 된다고 하신 거였어요. 전 정말 억울해요. 그런데 경찰들은 어차피 전과 있는 놈이니까 당연히 제가 훔쳤을 거라고…….”

피의자는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태산은 잠시 피의자가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침 이흥렬 계장이 외근을 마치고 들어온다.

“아직 취조 중이셨습니까?”

태산은 이 계장과 교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막 끝났습니다. 계장님, 중고 매장 사장에게 가서 사전에 매장 물품을 가져다 쓰는 걸 포괄적으로 허락하지 않았는지 확인해 주세요. 그런 사실이 있는데도 고소했다면 무고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고요. 필요하면 대질신문을 해도 좋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태산이 취조실에서 나오니 옆방에서 안 검사와 최 검사도 밖으로 나온다. 계속 보고 있었나 싶어 태산은 조금 머쓱하다. 최 검사는 눈이 붉고 콧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안 검사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러고는 전에 없이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존경심을 담은 안 검사의 인사를 태산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받았다.

* * *

“어? 안녕하세요. 김선동 씨 맞죠?”

검사실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 이흥렬 계장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예, 안녕하세요? 검사님 계신가요?”

“안에 계세요. 들어가 보세요.”

선동이 집무실로 다가가려는데 최 검사가 쭈뼛쭈뼛 일어서서 말을 건다.

“저기…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계속 딴소리만 했으니 검사님 입장에서는 화가 나실 수도 있는 문제죠. 신경 쓰지 마세요.”

선동이 그렇게 답하고 있는데 마침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태산이 밖으로 나왔다.

“어, 선동 씨. 웬일이에요?”

선동은 배시시 웃으며 비닐봉지에 담긴 것을 내밀었다. 박카스 한 상자였다.

“이거 드리고 가려고요.”

“아니, 뭐 이런 걸 가져와요. 맛있는 거나 사 먹지.”

“별것도 아닌데요.”

선동의 사건은 결국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사장이 사전에 물건을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해 놓고 홧김에 고소한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사장을 무고죄로 고소하겠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선동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미 사과도 받았고 다른 직장도 구했으니 미련은 없다는 것이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예, 저 지금 점심시간에 잠시 나온 거예요. 얼른 들어가 봐야 해서요.”

“그래요. 들어가요. 이건 잘 마실게요.”

선동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검사실을 나갔다.

태산은 선동에게 받은 박카스 상자를 열어서 검사실 식구들에게 한 병씩 돌리고 자신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런데 박카스 병을 꺼내며 보니 상자 안에 꼬깃꼬깃 접은 종이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태산은 병을 내려놓고 무심히 쪽지를 집어 펼쳐보았다.

[검사님, 제 말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반드시 말해야 된다는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좀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꼭 동생도 찾아볼 겁니다.]

쪽지 안에 빼곡히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아 태산은 눈을 깜박였다. 태산에게도 어린 시절 세상이 자신만 밀어내는 것 같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

이 계장이 태산의 눈치를 보고는 일부러 익살스럽게 말을 걸었다.

“검사님, 지금 우시는 거 같은데?”

“어휴~ 이 친구 왜 이렇게 악필이야? 이거 알아볼 수가 없어서…….”

태산은 눈을 더욱 깜박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쪽지를 가까이 들여다보는 척했다.

이 계장이 낄낄 웃고는 제안했다.

“오늘 저녁은 회식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신임 검사님 환영회 겸 강 검사님 복직 기념 회식 한번 하려고 내내 벼르고 있었는데 기회가 없었잖아요. 강 검사님 안 계신 동안 많이 도와줬던 안 검사님이랑 504호 식구들도 같이하시죠.”

“좋죠!”

“뭐 먹을까요? 제가 예약해 둘게요.”

태산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최진우 검사와 황수진 실무관이 반색하며 답했다. 태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까요?”

인천 검찰청 앞 고깃집에 모여 앉은 강 검사 일행은 모처럼 훈훈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으며 소주잔을 돌렸다.

최진우 검사는 태산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종알종알 말이 많다.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검사님만 취조실로 들어가면 피의자들이 그냥 술술 자백을 하잖아요.”

그런 인생들 너무나 많이 봤고 잘 알고 있다고는 답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강 검사는 곱게 큰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검사 경력도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다 보면 이 사람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대충 감이 와요. 말이 안 통하는 놈, 잘 달래면 넘어올 놈.”

최 검사가 취조하는 동안 김선동을 지켜보고 있던 태산은 배고파 보이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인정이든 관심이든 애정이든 무언가에 굶주려 있는 눈이었다. 이런 눈을 가진 놈들은 원하는 걸 보여주면 달라질 수 있는 놈들이었다.

꼬마 시절의 범진이 그랬고, 태산 자신도 언젠가 그런 눈을 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 수사관 경력 20년이 넘어가는 나도 잘 모르겠는 걸 검사님이요?”

이 계장이 놀리듯 말하며 껄껄 웃는다. 태산은 머쓱했다. 하기에 이 계장 입장에서는 10년 차도 안 된 검사가 그런 말을 하는 게 허세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하~ 진짜 너무 대단하세요, 검사님. 인간 티오펜탈이라니까요.”

“티오… 뭐요?”

“엥? 모르세요? 자백제요. 검사님만 나타나면 피의자들이 술술 부니까 그야말로 인간 자백제죠.”

최 검사가 호들갑을 떨며 소주병을 든다.

“제 술 한잔 받으세요. 존경하고 싸랑합니다아~~~!!!”

최 검사는 술을 잘 못하는 듯 벌써 알딸딸해져서 되지도 않는 애교를 연발하며 태산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최 검사, 취했어요? 이제 그만 마셔야 할 거 같은데?”

“아이~ 최 검사가 뭐예요? 사석에서만이라도 진우라고 불러주세요. 말도 애매하게 높이지 마시고 그냥 놓으시고요.”

“그, 그래, 진우야.”

진우가 헤헤 웃으며 몸을 배배 꼬더니 물었다.

“그럼 저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보자보자 하니까 이놈이 아주 기어오르네. 내가 첫사랑에 성공했으면 너만 한 아들이 있을 나이건만.

“안 돼!”

“히이잉~”

진우가 입을 삐죽 내밀며 어깨를 축 늘어뜨려 태산은 어쩔 수 없이 한발 양보했다.

“선배님 정도면 봐주지.”

진우는 반색하며 당장 불러보았다.

“네에~ 선배니임~~”

진우가 배시시 웃으며 태산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들이대는 정도가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해 태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돌아오면서 슬쩍 자리를 바꿔 앉을 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