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못 말리는 검사님
태산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책상 위에 수북이 올려진 문서들이 태산을 무겁게 압박했다. 서류를 뒤적여 보았지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계장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태산은 배째라는 심정으로 깍지를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태산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예!”
문이 열리고 회색 바지 정장에 단화를 신은 여자가 불쑥 들어섰다. 앞머리 없이 단정히 한데 묶은 머리 때문에 유독 동그란 이마가 눈에 띄었다. 살짝 튀어나온 이마와 쌍꺼풀이 진 큰 눈,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귀여워 보였다. 영리한 학생 같은 인상이다.
“검사님, 오셨습니까?”
하지만 입을 열자 인상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목소리가 여자치고는 저음이었고 남초인 환경에서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여성 특유의 딱딱한 어투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유독 얇은 입술이 무척 고집스러워 보였다.
언뜻 봤을 때는 어려 보였던 인상이 비로소 제 나이로 보였다. 20대 후반쯤이었던가? 서른은 안 되었던 거 같은데…….
태산은 사전에 보았던 파일을 떠올리려 애쓰며 답했다.
“안 검사, 오랜만이에요.”
그렇다. 장 부장이 언급한 그 안소영 검사였다. 사진으로 봤기에 이미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보는 느낌은 새로웠다.
“나 없는 동안 수고 많았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태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 부장이 당부했던 대로 공치사를 건넸다.
“아, 예… 아닙니다.”
별로 기대치 않았던 인사인 듯 안 검사는 겸연쩍게 답하고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안 계신 동안 수사 중이시던 사건은 제가 대신 맡아서 진행했습니다. 거기 있는 건 이미 공판부에 넘긴 사건 제외하고 아직 진행 중인 사건들입니다. 만전을 기한다고 하긴 했지만 미흡한 부분은 없는지 보시고 확인해 주십시오.”
본다고 별수가 있을까마는 태산은 서류를 뒤척이며 대충 보는 시늉만 했다.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문자의 홍수들을 태산은 미간을 찡그리며 노려보았다.
그런 태산을 안 검사가 유심히 본다.
“그런데 검사님, 안경 안 끼셨네요?”
태산은 순간 아차 한다. 예전에 봤던 강 검사는 항상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시야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안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랜만의 출근이라 안경을 깜박했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업무 보기 힘들 것 같군요.”
마침 핑계가 잘 맞아떨어졌다 생각하며 태산은 얼른 서류를 밀어놓았다.
“평소에는 일상생활도 안경 없이는 힘들어하셨는데…….”
그렇다는 건 사고 이후 눈까지 좋아졌다는 말일까? 의사들이 회복력에 대해서 침을 튀며 호들갑을 떨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정말로 기적적인 회복력이었던 걸까?
“몸이 크게 아프고 나면 체질이 바뀌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태산은 그렇게 둘러댔지만 안 검사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체질이 바뀐다고 눈까지 다시 좋아진단 말인가. 아무래도 도수 없는 안경이라도 하나 맞춰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라서 당분간 업무에 차질이 있을 것 같군요. 그동안에도 잘 커버해 줬다고 들었습니다. 안 검사가 계속 좀 도와줘요.”
“네, 알겠습니다.”
이 계장은 업무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잠깐이긴 했으나 낭패감을 비쳤다. 하지만 안 검사는 귀찮아하는 기색조차 없이 담담히 답했다. 별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는 것이 빠르든가 아니면 책임이 주어지는 것을 즐기는 타입일지도 모르겠다.
태산은 구구절절 길게 변명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검사님 계시죠?”
안소영 검사가 506호 검사실에 들어서며 황수진 실무관에게 물었다. 요즘 강바른 검사 얼굴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뻑하면 현장에 나간다며 사무실에 붙어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담당 사건이 아니라 다른 검사가 주임인 사건 현장에도 기회만 있으면 지원을 나갔다.
몸이 덜 회복되어 업무를 볼 수 없다면서도 현장에는 뻔질나게 나다니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고 이전의 바른은 자신이 맡은 일에 무서울 정도로 몰입하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인간미나 사회성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소영은 바른에게 검사로서 존경심을 가지고 배우려 노력했다. 사고 후 돌아온 바른이 자신의 빈자리를 잘 채워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했을 때는 자랑스럽고 우쭐한 마음도 들었다.
그랬던 그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리고 나니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본인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이흥렬 계장에게는 강 검사님이 좀 변하신 것 같다고 은근슬쩍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달라지기도 해요. 이제는 현장이 더 좋으신가 보죠.]
이 계장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해 소영은 더욱 맥이 빠졌다.
이게 그냥 좀 달라졌다고만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는데?
“아, 네. 지금 안에 계세요.”
황 실무관의 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영은 바른의 집무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볍게 노크했지만, 답이 없다. 소영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른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낮게 코를 골며 잠이 들어 있었다.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오른손에는 조서가 아니라 악력기가 들려 있었다.
소영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바른은 드물게 사무실에 있는 경우에도 자고 있거나 아니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무슨 원수라도 진 것처럼 강박적으로 몸을 단련하고 있어서 혹시 사고의 여파로 생긴 트라우마가 표출된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딱하기도 했다.
소영은 들고 온 서류들을 바른의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도 깨지 않아 소영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그제야 바른이 번뜩 눈을 떴다.
“아… 안 검사!”
바른이 얼른 등을 떼고 앉는다.
“언제 들어왔어요?”
“방금요. 기척도 모르고 주무시던데요.”
소영의 말투에는 은근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맡기신 사건들 기록입니다. 조서 작성은 제가 한다 해도 검사님이 주임이신 만큼 대강이라도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요.”
바른의 얼굴에 귀찮아하는 기색이 비친다. 소영은 욱하는 기분이 들어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갑자기 이 계장이 들이닥쳤다.
“검사님, 연수동 강도 사건 현장검증 나간다는데요.”
바른이 반색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래요? 같이 가시죠.”
바른은 바로 양복 상의를 집어 들고 이 계장과 함께 집무실을 나간다.
“검사님! 이건 어떻게 하시고…….”
“거기 놔둬요. 나중에 볼 테니.”
나중에가 언제란 말인가. 소영은 씩씩거리며 바른을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검사님, 이거 시키신 거…….”
최진우 검사가 집무실에서 나온 바른에게 조서를 내밀었다. 바른은 걸음을 옮기며 눈으로 쓱 훑더니 그대로 진우에게 조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좋네요. 역시 실력파야. 그대로 갑시다.”
바른은 척 하니 엄지를 세워 보이고는 진우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진우는 우쭐해서 손가락으로 코를 쓱 훔쳤다.
이 계장에게 들은 바로는 처음에는 태도 문제로 지적받아 분위기가 썰렁했지만 워낙 최 검사가 일을 야무지게 잘하다 보니 금방 분위기가 반전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소영이 보기에는 바른이 수습검사 지도 책임을 소홀히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혼자 감당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소영이 의심하거나 말거나 바른은 이 계장과 함께 부랴부랴 사무실을 나갔다. 소영은 바른의 등을 노려보고 있다가 바른이 나가자마자 진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줘봐요.”
바른이 제대로 봐주긴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진우가 들고 있던 조서를 소영에게 건네주었다. 소영은 조서를 들여다보다가 미간을 모았다.
“이건…….”
소영은 바른의 담당 사건을 떠맡으며 컨디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바른이 쉬엄쉬엄 일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사건만 남겨두었다. 3년 차인 자신보다는 그래도 연차가 있는 강 검사가 주임을 맡아야 할 무게감 있는 사건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조서를 지금 햇병아리 수습검사가 작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어 입을 떡 벌린 소영의 속도 모르고 진우는 자랑스러운 투로 말했다.
“제가 일을 너무 잘한다고 좀 어려운 건도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소영은 골머리를 싸맸다.
‘이 인간이 진짜!’
* * *
“안 검사님이 워낙 영민하고 촉이 좋지 않습니까? 지금 눈치가 영 안 좋은데 이대로 가다가는 저까지 짜고 검사님 자꾸 밖으로 돌리는 거 눈치챌 거 같은데요.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시는 게…….”
연수동 강도 사건 현장검증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계장이 태산에게 조심스레 운을 뗐다. 태산은 고개를 저었다.
“많은 사람 알아봤자 좋을 일이 있겠습니까? 버틸 때까지 버텨보죠. 때가 되면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예, 뭐 검사님이 잘 판단해서 하시겠지요. 그 전에 빨리 기억이 돌아오시면 그게 제일 좋은데…….”
이 계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태산에게 기억이 돌아올 일은 없었다. 언제까지 업무를 안 검사와 최 검사에게 떠맡길 수는 없다. 최 검사야 우쭈쭈 해주면 신이 나서 열의를 불태우지만 안 검사는 만만치 않다. 계속 업무를 회피하면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뭔가 수를 내긴 해야 할 텐데…….
태산이 고심하고 있을 때 문득 무전이 울렸다.
-연수동 대동월드 근방 지원 바랍니다.
이 계장이 얼른 무전을 받았다.
“근천데 무슨 일입니까?”
-스포츠클럽 건물 오피스텔 압수수색 예정이라 영장 도착할 때까지 대기 중입니다. 그런데 안에서 눈치 까고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 문 앞에서 대치하면서 막고는 있는데 역부족입니다.
“인터넷 도박입니까?”
이 계장 대신 태산이 끼어들어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경찰에서 오랫동안 추적해온 센터인 모양입니다.
이 근방 스포츠클럽 건물에 있는 오피스텔이라면 분명 박중성 이사 산하의 인터넷 도박 센터 중 하나가 있던 곳이다. 해외에 서버를 두고 인천 시내 곳곳의 주택가에 운영 사무실을 분산해 둔 박 이사는 이 사업을 장래가 촉망되는 IT 산업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거길 치러 간단 말이지?
태산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지금 바로 갑니다.”
태산이 무전기에 대고 답하자 이 계장이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급히 차를 돌렸다.
* * *
“영장 가져오라고 이 새끼들아!”
“야! 포기해! 어차피 니들 다 잡혀 들어가게 되어 있어. 괜히 버티지 말고 순순히 문 열라고.”
“씨발! 누구 맘대로?!”
오피스텔 현관 앞은 문을 열려는 수사관들과 버티고 선 건달들이 뒤엉켜 북새통이었다.
태산은 성큼성큼 걸어오며 맨 뒤에 선 수사관을 향해 물었다.
“영장은요?”
“곧 나온답니다. 영장당직판사가 급똥이라도 때리는지 잠깐 자리를 비웠다네요.”
“그럼 뭘 기다리고 있어요? 이러는 사이에 서버 다 밀어버릴 텐데.”
“하지만 영장 없이 강제로 진입하면 주거침입이 문제 될 수도…….”
“법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태산은 중얼거리고는 바로 실랑이를 벌이는 수사관과 건달들 사이를 밀치고 들어갔다.
“뭐야, 이 새끼는?!”
덩치 하나가 현관으로 밀고 들어서려는 태산의 슈트 자락을 움켜잡았다. 태산은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놈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 놈은 현관 벽에 호되게 등을 부딪치고 그대로 주르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기절한 놈을 보고 어깨들이 멈칫했다.
“인천지검 강 검사다.”
태산은 그렇게 일갈해 놓고 홀로 진입했다.
다짜고짜 주먹부터 꽂는 검사의 행동에 수사관들은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하지만 태산이 일단 안으로 진입하고 보니 더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졌다. 수사관들이 일제히 와아~ 하고 달려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달들이 몸으로 벽을 만들며 막아섰다.
태산은 거실을 지나 안방 쪽으로 내달렸다. 닫혀 있는 안방 문손잡이를 잡고 돌려보지만 굳게 잠겨 있다. 안에서 뭔가 분주한 소리가 들린다.
“야, 들어온 거 같아. 빨리 빨리!”
등 뒤에서 누군가 덜미를 잡는다. 태산은 돌아서 또다시 주먹 한 방을 날려주었다. 민머리 사내가 저만치 날아가 거실 테이블과 함께 우당탕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여기! 빠루 갖고 와요!”
“예!”
태산의 요청에 빠루를 들고 있던 수사관이 바로 답하며 거실로 올라오려고 한다. 하지만 건달들과 얽혀 엎치락뒤치락할 뿐 좀처럼 이쪽으로 오지 못한다.
그러다가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빠루를 떨어뜨리고 만다. 건달들의 발밑으로 사라진 빠루를 찾지 못하고 수사관은 허둥대고 있었다.
“젠장.”
태산은 연장을 찾는 걸 포기하고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비틀기를 잠시, 으드득하고 잠금쇠가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태산은 마지막으로 강하게 힘을 가했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방금 전까지 두 명의 장정을 주먹 한 방에 날려 버리고 맨손으로 문까지 부쉈다. 옛날 생각만 하고 있는 대로 힘을 썼더니 바른의 몸이 버텨내질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길게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태산은 온몸을 날려 망가진 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에는 벽을 따라 컴퓨터가 주욱 늘어서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은 두 놈이 분주하게 하드를 지우다가 태산이 들어서는 순간 벌떡 일어났다. 그중 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놈이 눈치를 살피더니 갑자기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뛰어나갔다.
“저 새끼가!”
태산은 잽싸게 따라 나갔다.
노랑머리가 발코니 바깥의 난간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래에 주차되어 있는 차 지붕 위로 뛰어내릴 생각인 듯했다.
높이는 3층. 떨어진다고 해도 죽지야 않겠지만 정작 나가보니 생각보다 높아 망설여지는 것일 테다. 노랑머리는 난간에 매달린 채로 소리를 빽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
태산은 코웃음을 치며 난간으로 다가갔다.
“지랄 말고 그냥 올라와. 뛰어내려도 도망 못 간다. 다리나 안 부러지면 다행이지.”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태산이 난간 앞에 쭈그리고 앉아 타일러 보지만, 노랑머리는 들은 체도 않고 혼자 소리를 지르며 난리 법석이다. 그러다가 순간 삐끗 손이 미끄러진다. 노랑머리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치는 순간, 태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노랑머리의 손목을 잡았다. 노랑머리의 체중이 그대로 태산의 팔에 실린다.
으득!
아까부터 심상치 않던 오른팔에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어 태산은 이를 악물고 그대로 힘을 주어 노랑머리를 끌어 올렸다.
“하드 확보했습니다! 증거 아직 남아 있네요.”
수사관들이 방 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이 계장이 젊은 수사관들을 이끌고 발코니로 나왔다. 수사관들이 태산에게서 노랑머리를 인계받고 수갑을 채워 끌고 나갔다.
“어휴~ 검사님. 갑자기 뛰어드셔서 놀랐잖습니까? 그런 일은 수사관들에게 맡기실 일이지…….”
이흥렬 계장이 한 손으로 힘겹게 양복 상의를 벗는 태산을 보며 얘기하다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거… 검사님… 팔이… 왜 그래요?”
태산은 오른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아… 부러졌나? 뭐 괜찮아요. 침 발라놓으면 낫습니다.”
태산은 씨익 웃으며 장난 섞어 대꾸했다. 그리고는 뚝 소리를 내며 뼈를 제자리에 맞췄다. 이 계장이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한다.
“으아아~~~ 뭐 하시는 거예요? 뼈 함부로 맞추면 안 된다고요. 빨리 병원부터 갑시다.”
이 계장이 태산의 등을 밀어 급히 오피스텔을 나간다. 때마침 영장을 들고 달려오던 수사관이 일당이 줄줄이 연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영장 나왔는데…….”
이 계장이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갔다.
“여긴 이미 상황 다 끝났어.”
* * *
안소영 검사는 종일 벼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꼭 강바른 검사에게 일 똑바로 하라고 말해야겠다고. 만나기가 힘드니 시간이 날 때 찾아올 것이 아니라 아예 지키고 서서 기다려야겠다 싶어 일거리를 싸 가지고 와 506호 검사실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황수진 실무관과 최진우 검사가 내내 불편한 시선을 보냈지만 안 검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강바른 검사가 이흥렬 계장을 앞세우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안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검사님, 아무래도 오늘은 꼭 말씀을 드려야…….”
거기까지 말했을 때에야 강 검사의 팔에 감긴 깁스가 눈에 들어왔다. 안 검사는 말하다 말고 어리둥절해 물었다.
“팔은 왜 그러세요?”
“아, 예… 좀…….”
태산이 곤란해하며 얼버무리자 이 계장이 나서서 설명했다.
“아휴~ 글쎄 대단했다니까요! 현장검증 끝나고 들어오는데 지원 요청이 들어왔지 뭐예요. 그래서 가봤더니 덩치가 이런 조폭들이 기세등등하게 막고 서 있는 거예요.”
이 계장이 과장되게 몸집을 불려 보이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우리 강 검사님이 그놈들을 한 방에 제압하고 막 문을 때려 부수더니 뛰어내리는 놈 덜미를 잡아서 끌어 올리고! 아무튼 일당을 아주 일망타진하셨다는 거 아닙니까? 그 과정에서 좀 다치셨어요.”
안 검사는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설마 피의자를 폭행하셨어요?!”
“아니, 실랑이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폭행이라고 할 것까지야.”
이 계장이 은근히 태산의 역성을 들며 안 검사를 달랬다.
“그래도 수사 중에, 그것도 검사가 폭력을 행사하면 절차상 문제가 생긴단 말입니다. 불법 수사라고 확보한 증거 다 증거능력 부정되면 어쩌시려고요.”
“아니~ 영장도 곧 나올 상황이었는데 걔네가 너무 극렬하게 막으니까 그런 거죠.”
“…영장도 안 나온 상황에서 밀고 들어갔다고요?!!!!”
“거의 나온 거나 다름없었어요. 증거 확보한 후에 바로 영장 도착했다니까.”
이 계장과 안 검사의 다툼이 심상치 않게 격화되고 있었다. 태산은 그 틈에 은근슬쩍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 열을 올리다 씩씩거리며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안 검사는 아차 했다. 뜻하지 않은 강 검사의 부상 때문에 원래 하려 했던 말을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이다.
안 검사는 골머리를 앓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하나는 있었다. 부상 때문에라도 강 검사는 한동안 사무실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손을 다쳐 조서를 쓸 수 없다는 핑계를 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눈이 괜찮은 이상 서류는 볼 수 있겠지.
다음 날, 태산은 출근하자마자 형사 3부 장진호 부장의 호출을 받았다. 태산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장 부장은 태산의 오른팔에 감긴 깁스부터 유심히 보았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앉게.”
태산이 소파에 앉자 장 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태산의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현장에 나갔다가 다쳤다지?”
“예, 별것 아닙니다.”
“자네한테는 대수롭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회사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네.”
첫 출근 때만 해도 둥글둥글 사람 좋게 웃던 장 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영장 발부 시간은 수사관들과 얘기해서 말을 잘 맞춰놨네. 자네가 주먹을 쓴 것도 이미 몸싸움이 시작된 이후라고 하니 정당한 체포 과정에서 부득이 발생한 폭행으로 무마할 셈이고. 하지만 피의자 쪽에서 작정하고 문제 삼으려 한다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어.”
“죄송합니다.”
“됐네.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보다…….”
장 부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수사관들 말로는 요즘 현장 출입이 잦다던데…….”
“수사는 발로 뛰어서 직접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기본이니까요.”
태산은 되는 대로 둘러댔다.
“그건 경찰이 할 일 아닌가? 검사는 어디까지나 조서로 말하는 것이지.”
장 부장의 뼈 있는 말에 태산은 할 말을 잃었다.
“이번 일은 징계를 받아 마땅한 사안이지만 증거 확보에 공도 있고 피의자를 구하려다 부상도 당했으니 그냥 넘어가겠네. 대신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당분간 근신하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슬슬 잔소리가 끝나려나 보다 하고 태산은 덥석 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산이 집무실을 나가려는데 장 부장이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다.
“자네가 그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지나치게 절차를 따져서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들었건만.”
태산은 나가려다 말고 힐끗 돌아보았다.
“아닐세. 자네 요즘 정신과 치료는 계속 받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태산은 그렇게 말해놓고 얼른 집무실을 나왔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는 또 안 검사가 가져다 놓은 사건기록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들을 들춰보았지만 골치만 아팠다.
안 검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고 장 부장도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당분간은 집무실에 박혀 있어야 할 처지다. 뭔가 수를 내야 할 텐데.
곰곰이 생각하던 태산의 머리에 순간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태산은 일어서 집무실 창에 블라인드를 내리고는 대포 폰을 꺼내 범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 통화음이 울리고 난 후 범진이 전화를 받았다.
[예, 형님.]
낮게 억누른 목소리였다. 범진 역시 남의 눈을 피해 전화를 받는 모양이었다.
“범진아, 주변 요즘 뭐 하냐?”
[한가할 겁니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알바 안 하겠느냐고 한번 물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