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完] +후기 >
5년이 지났다.
2024년이 되었다.
“크아앙!”
시혁은 짝니가 으르렁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왜 그래?”
뭔가 했더니 원주민 꼬맹이들과 장난하느라 그러는 거였다.
꼬마들이 깔깔 대며 웃고 있었다. 짝니의 등에 올라타는가 하면, 꼬리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짝니는 성가셔 하면서도 꼬맹이들에게 순순히 몸을 맡겼다.
하긴 아르거스에서도 어린이들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이곤 했었지.
일어나서 길게 기지개를 폈다.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오늘도 쨍쨍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곳은 아마존.
1년 전부터 머무르며 의료 봉사를 하고 있었다. 최지혜가 따라왔고, 이능력자나 의료인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봉사를 하고 갔다.
최지혜가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어제도 밤 샌 거야?”
“어,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거의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연구는 그럭저럭 끝났는데, 다른 것 때문에 그래.”
“조바심 내지 말고 천천히 해 봐. 한 번 갔던 길이잖아. 금방 올라설 수 있어.”
“끄응,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요새 고민이 있나 보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몇 번 물어보았으나 최지혜는 시혁을 피하기만 했다.
별 수 없지.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옷을 갖춰 입었다.
둘 다 정장 차림.
오늘은 갈 곳이 있었다.
짝니는 놔두고, 둘만 사이좋게 으뜸마루 지하로 내려갔다.
으뜸마루는 최근에 임시 병원으로 썼다. 로봇 선원들은 간호사처럼 꾸며 놓았다. 인간 형태의 선원만 써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공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했다.
서울에 있는 시혁의 새로운 아파트와 연결되어 있었다. 주차해 놓은 자동차를 타고 인근의 중학교로 향했다.
최지혜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촉박해. 좀 늦을지도 모르겠어.”
“9시부터라고 했지? 차가 안 막혀야 할 텐데……”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색색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부모 손을 붙잡고 모여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졸업식에 참석하는 초등학생과 그 학부모 같았다.
그렇다, 졸업식.
누구 졸업식이냐고?
“시혁 삼촌!”
멀리서 한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타오르듯 붉은 머리.
눈동자도 루비처럼 적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많이 컸다.
낫슈실라.
요즘은 유럽식으로 실라 낫슈라고 불렀다.
아르거스에서 지구로 오고 얼마 후, 실라는 정식으로 대한민국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낫슈바켈은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어쩔 수 없었다. 지구에서는 아르거스에 있을 때처럼 권속들을 부려가며 고고한 생활을 기가 힘드니까.
좋든 싫든 지구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러려면 학교를 다니는 게 좋았고.
시혁은 실라에게 다가갔다.
실라가 시혁에게 답삭 안겼다.
“언제까지 어리광만 부릴래?”
최지혜가 옆에서 한 마디를 했다.
실라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었다.
겉모습은 변신 마법으로 바꾸어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지만, 그 속은 그저 새끼용에 불과했다. 아직은 체온이 그리울 때였다.
실라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짝니는 안 왔어?”
“응. 병원에서 쉬고 있어. 너무 커서 데려오기가 그렇지.”
“변신시켜서 데려오지.”
“알잖아. 짝니는 변신하는 거 싫어해.”
아르거스에서 변신시켜서 타고 다녔던 기억 때문일까. 짝니는 변신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굳이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하진 않았다. 나중에 집에서 만나도 될 일이니까.
“왔어? 곧 시작할 거다.”
낫슈바켈이 높은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걸어왔다.
옆으로 싱트파헬이 따라왔다.
어째 얼굴이 안 좋다.
인간으로 치면 며칠 밤을 샌 것 같았다. 눈 아래가 까맸다. 여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넌지시 질문을 했다.
“파헬, 지금도 악몽을 꾸니?”
싱트파헬이 눈살을 찌푸렸다.
“응, 점점 심해져.”
“큰일이네.”
지구로 온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악몽을 꿨다고 했다.
본래 용은 수면기와 활동기가 있어 활동기에는 잠을 잘 자지 않는다. 그런데 싱트파헬은 하루에 최소 몇 시간은 잠을 자야 했다.
꼭 누군가가 강요하는 것 같다고.
악몽의 내용은 똑같았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스스로의 영혼과 육체를 바치고, 자신을 경배하라고 속삭인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르거스를 빠져나오면서 잠깐 대면했던 심연의 마신 때문이다. 그때 영혼과 정신에 타격을 입어서, 그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시혁이 치료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
영혼의 미숙함까지 겹친 문제였다. 이걸 치료하려면 통상적인 치료가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다들 들어오십시오!”
학교 직원이 외치는 말에, 하나둘 강당으로 입장했다.
지루한 식순이 이어졌다.
주변 학부모들이 시혁을 알아봤는지 힐끔거렸다. 옆에 앉은 최지혜와 낫슈바켈을 보고 묘한 눈빛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졸업식은 금방 끝이 났다.
모여서 사진을 찍었다.
시혁도 몸을 일으켰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곰처럼 덩치가 큰 남자애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등 뒤에 숨겨놨던 작은 꽃다발을 꺼내더니 실라에게 내밀었다.
“실라, 이것 좀 받아주지 않을래?”
“뭔데?”
“그, 그냥 꽃이야.”
실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자기에게 이런 걸 주는지 모르겠다는 태도.
남자애가 전전긍긍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꽃을 받아들었다.
“먹지도 못하는 거, 왜 주는 건진 모르겠지만 준다니 고맙게 받을게.”
“고, 고마워!”
남자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시혁은 그걸 보고 슬쩍 웃었다.
실라가 성룡 단계에 접어들려면 아직도 백 년은 넘게 남았다. 그때까지는 인간으로 치면 다섯 살 정도 정신 연령인데, 과연 남녀 간의 애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옆에서 낫슈바켈이 도끼눈을 뜨고 있지 않나. 고룡의 방어막을 뚫으려면 고생 좀 해야 할 거다.
졸업식이 끝나고 싱트파헬이 실라를 놀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부터 연애질이니?”
“연애질? 꽃 받은 게 연애야?”
“그럼 뭔 줄 알았어?”
“공물인가 했지, 난.”
“어휴, 너 잘났다.”
집으로 돌아왔다.
실라의 졸업을 축하하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특히 대한민국의 이능력자 중 G급 이능력자들은 모두 초청을 받았다. 시혁은 물론 세 용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옛 모습 그대로였다.
딱 두 명만 달랐다.
신아영과 김미애.
둘 다 배가 불룩했다.
이미라가 둘의 배를 눈여겨보았다.
“두 분 다 다음 달이 예정일이라고 했죠?”
“네, 맞아요.”
“어휴, 얼른 낳았으면 좋겠어요. 몸이 말이 아니게 무거워요.”
“막상 낳고 나면 지금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걸? 신생아 키우는 게 임신했을 때보다 더 힘들어.”
“너도 참 극성이다. 난 보모 들일 거야. 돈 있는데 왜 아껴?”
신아영은 이번이 두 번째, 김미애는 첫 번째 출산이었다.
강찬과 신아영 부부는 세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그래서 둘째로는 딸을 소망했는데, 산부인과 의사가 분홍색 아기 옷을 준비하라고 해서 둘 다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김미애는 얼마 전에 한세훈과 결혼을 했다.
본래는 그저 친구 사이였지만 우연히 가진 술자리에서 눈이 맞았다던가. 가볍게 날린 킥이 대포알 슛이 되었다. 단박에 골인하는 바람에 둘이 아닌 셋이서 결혼식을 올렸다.
엉겁결에 결혼한 것치고는 잘 사는 모양.
하긴 둘 다 G급 이능력자이니 자기 눈에 차는 짝을 찾기도 어려웠다. 요즘은 신혼 때의 강찬과 신아영을 보듯 깨가 쏟아졌다.
신아영이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이미라를 보았다.
“미라 언니, 언니는 결혼 안 해?”
이미라가 난처하게 웃었다.
“남자가 있어야 하지.”
“내가 소개팅 좀 주선해 줄까?”
“아냐, 됐어. 필요하면 내가 잡아다가 할게.”
“에휴, 잡아서 하기는 뭘 잡아서 해. 우리 미라 언니 이래 가지고 시집은 제대로 가려나……”
신아영이 머리를 흔들었다.
순간적으로 시혁과 이미라의 눈이 마주쳤다.
한때 둘은 간단한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
옛 날 이야기.
이미라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했지만, 시혁은 부담스러워서 반응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떠나 세계를 떠도는 지금은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졌다.
아르거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 너무 강했나 보다. 결국 한 번의 인연이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손문철이 새파랗게 깎은 턱을 쓰다듬었다.
“실라는 중학교도 간다고 했지요?”
“그렇게 됐다. 난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만 실라가 워낙 가고 싶다고 해서.”
“인간 친구들이랑 놀면 재밌잖아!”
“후, 내가 보기엔 솔직히 쓸 데 없는 일이다만…… 좋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협회장님 딸은 이번에 대학 들어갔다면서요?”
“예. 다행히 머리는 제가 아니라 지 엄말 닮았는지 공부를 곧잘 해서요. 나름대로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요.”
손문철이 침을 튀기며 자랑을 했다.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의과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시혁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사실 최근 의사는 별로 각광받는 직업이 아니다.
시혁이 만든 생명의 물 때문이다.
복용하기만 하면 사람의 몸을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만들어 준다. 거의 대부분의 질환을 치료할 수 있었다. 뇌졸중, 치매, 말기 암도 마찬가지였고 가격도 매우 저렴했다.
그런 기색을 눈치 챘는지 손문철이 껄껄 웃었다.
“육체적인 병만 병이 아니지요. 앞으로 평균 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테니 당연히 새로운 병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제 딸은 그런 걸 치료하고 싶답니다. 위원장님이 괴수 질병을 정복한 것처럼요.”
그렇다.
이제 괴수 질병은 없다.
수년에 걸친 노력 끝에 드디어 박멸한 것이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개발도상국이나 빈곤한 나라에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시혁은 그런 곳을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막대한 금액을 기부하여 무료로 약을 풀 때도 있었다.
수익이 줄어서 어쩌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생명의 물 때문에 막대한 돈이 들어오고 있으니까. 누군가는 시혁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부자라고 할 지경이었다.
“흐아아암.”
싱트파헬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손문철이 안쓰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싱트파헬 님, 괜찮습니까? 얼굴이 계속 안 좋아집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내심으로는 걱정이 됐나 보다.
이능력자들이 다 떠난 후, 최지혜를 보고 말했다.
“저번에 네가 말한 대로 해야겠어.”
“그래, 그 수밖에 없다. 잘 생각했어. 단, 내 가르침은 혹독할 테니 각오하도록 해.”
“각오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싱트파헬의 치료를 위해, 최지혜는 한 가지 계획을 제안했다.
마법을 가르치겠다는 것.
아일리케 특유의 마법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싱트파헬을 신적인 존재로 진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지금 싱트파헬이 악몽을 꾸는 건 본인의 영혼이 너무 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진화시키면 증세가 호전될 것이다.
아마도 무한 쪽으로 나가겠지.
싱트파헬의 속성은 어둠.
그 역인 빛을 익히고, 둘을 융합시켜 무한의 힘을 각성한다면 어엿한 용신이 될 것이다.
실라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파헬 언니도 아마존으로 가는 거야?”
“그래야지. 매일 서울 왔다 갔다 하기는 힘드니까.”
“히잉, 공간이동 마법진 쓰면 되잖아.”
“그야 그렇다만……”
더 자주 왕래하는 것으로 결착을 보았다. 그제야 실라가 샐쭉하니 웃었다.
오랜만에 대한민국에 온 김에, 광주에 들르기로 했다.
직접 차를 몰고 내려갔다.
최지혜와 싱트파헬도 동행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시혁의 부모님과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싱트파헬이 신기해했다.
“너한테도 부모님이 있어?”
“당연하지. 나 혼자 어떻게 태어났겠어.”
“네 부모님도 이능력자야?”
“아니. 그냥 평범한 분들이야.”
“신기하다.”
가는 길에 우연히 창천대학교 한방병원을 지나쳤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방병원이 있던 자리.
이젠 사라졌다.
경영난 때문에 창천 재단에서 매각한 것이다. 지금은 요양병원이 되었으나, 그나마도 곧 망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입맛이 썼다.
어쨌든 시혁의 모교였다. 잘 됐으면 했는데 망했다고 하니 조금 안타까웠다.
반면 시혁의 병원 출신들은 아주 잘 나가고 있었다.
부원장 박희정은 서울에서 개원을 했다. 생명의 물이 공세를 퍼부어도 잘 버티는 모양이었다.
박성화 과장은 미국에서 에테르와 인체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를 한다고 들었다. 김진택은 특이하게도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민수진도 유명한 종합병원에서 간호팀장이 되었고, 다른 이능력자나 의사, 한의사들 모두 잘 되었다. 병원을 내팽개치다시피 접고 봉사 활동을 나선 참이라, 시혁으로서는 그런 그들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광주의 집에 도착했다.
최지혜와 싱트파헬, 둘을 보더니 아버지가 대뜸 질문을 했다.
“그래서 누가 새아기냐? 설마 둘 다 맞아들이는 건 아니겠지?”
결혼할 여자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나 보다.
시혁은 쓰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둘 다 친구들이에요.”
“친구?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냐?”
“에휴, 진짜에요.”
애초에 종족이 다른 걸?
싱트파헬은 용이고, 최지혜는 언데드였다가 인조인간의 몸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생각하는 바가 너무 달라서 연애 같은 건 꿈꾸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시혁아, 선 들어온 게 있는데 보지 않을래? 너랑 동갑이고, 서울에서 변호사 하고 있대. 로펌 출신인데 사람이 괜찮은가 봐.”
“됐어요. 전 선 볼 생각 없어요.”
“너도 서른다섯인데 결혼을 해야지.”
“전 꼭 결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서요.”
베리타스만 해도 죽을 때까지 결혼을 안 하지 않았나. 그 정도를 넘어, 아예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지도 않았지.
적당히 얘기를 나누다 아마존으로 돌아왔다.
싱트파헬은 적당한 방을 잡고 먼저 휴식을 취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시혁은 밖에 앉아 멍하니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최지혜가 그걸 보고 멈칫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응. 아르거스에 소환되었을 때 말이야.”
최지혜가 시혁의 옆에 와서 앉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실은 네게 말할 것이 있어.”
“뭔데?”
“얼마 전에 불멸을 깨닫는데 성공했다.”
“그래? 어쩐지! 축하해!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네? 아무리 그래도 십 년은 걸릴 줄 알았어!”
시혁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물론 불멸을 깨닫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그걸 구현할 재료와 힘이 필요했다.
그쯤이야 시혁이 해결할 수 있지. 으뜸마루의 심장을 기동시킨 후, 그 힘을 공급해주면 그만이니까.
진화 일정에 대해 논의하려고 하자, 뜻밖에도 최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난 아직 불멸이 되고 싶지 않아.”
“왜? 아르거스에 있을 때부터 신이 되고 싶어 했잖아?”
“그땐 그랬지……”
지금은 다르다는 걸까?
시혁은 가만히 최지혜의 말을 기다렸다.
최지혜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땅만 쳐다보았다. 그러다 힘겹게 겨우 입을 열었다.
“아일리케에서 내 삶은 고통과 절망의 연속이었어.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불행은 모두 겪었지. 그래서 사령 마법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쉽게 결단을 했다. 내 본래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몸을 만들어 거기로 넘
어갔지.”
시혁도 아는 이야기다.
무슨 소릴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걸까?
최지혜가 시혁을 곁눈질했다. 그러더니 슬쩍 얼굴을 붉혔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나도 이제는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행복을 찾고 싶다.”
“좋은 말이네. 그렇게 해. 나도 응원…… 어?”
잠시 후에야 시혁은 최지혜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과연 무슨 뜻이겠나.
뻔하다.
시혁에게 관심이 있다는 거겠지.
마법사 대 마법사가 아닌, 여자 대 남자로서.
시혁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지?
하지만 사실, 말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최지혜가 먼저 시혁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다.
죽음 지혜일 때 갖고 있던 차가운 금속 손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그걸 느끼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최지혜는 죽음 지혜와 다르다.
시혁과의 인연이,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의 세월이 최지혜의 영혼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인간성을 되살려 놓았다.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최지혜는 강력한 마법사이자 신적인 존재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여자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시혁은 반사적으로 최지혜의 손을 움켜쥐었다.
인조 육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 최지혜의 얼굴에 매혹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시혁도 그랬다.
지금껏 지어본 적 없는 산뜻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어둠이 내릴 때까지.
어쩌면 세상이 끝나도록.
새롭게 시작되는 관계에 설레어하며,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고 있었다.
<괴수 세계의 한의사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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