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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49화 (249/250)

< 이계의 마신 >

시혁은 암담함을 느꼈다.

아르거스의 파괴신도 간신히 쓰러뜨린 참이다. 그런데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이계의 파괴신을 상대하라고?

으뜸마루를 제대로 써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본체가 소환되지는 않았다는 점.

원체 차원문의 크기가 작았다. 본체가 통과하기는 힘들었다. 베리타스와 녹스도 그걸 노린 거였다.

지금 차원문을 통과하는 것은 고작해야 파괴신이 뿜어내는 약간의 힘 정도.

그 정도는 자기들이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크흐흐흐.]

녹스가 괴이한 웃음을 토했다.

심연의 힘이 녹스의 영혼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굉장히 순일하고 막강한 힘이라, 시혁이 기존에 설치해 놓았던 모든 마법을 간단히 소멸시킬 듯했다.

베리타스는 공허 변환 마법을 사용했다. 막대한 힘이 으뜸마루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덕분에 시혁과의 권한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시혁은 기가 막혀서 한 마디를 했다.

[너희 둘, 아르거스 행성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거냐? 지금 상황을 모면하려고 재앙을 불러들여?]

녹스가 코웃음을 쳤다.

[아르거스 따위 무슨 상관이냐? 당장 내가 소멸한 판인데?]

이판사판이라는 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자신들도 심연의 힘에 더욱 노출이 된다. 녹스는 그렇다 치고, 베리타스도 벌써 어둑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될 텐데, 왜 이런 모험을 한 건지 몰랐다.

뭐 좋다.

시혁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정공법으로 대응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두 대종사에게 끌려 다니다가,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맞불을 놓았다.

방금 전 봤던 녹스의 마법을 그대로 흉내 냈다.

그 마법에 차원문 사이로 심연의 힘이 춤을 추었다. 급기야 거대한 촉수 하나가 차원문을 비집고 나왔다.

녹스와 베리타스가 그걸 보고 대경실색했다.

[무슨 짓이냐!]

[같이 죽자는 거냐?]

촉수가 탐욕스럽게 타원문 안쪽의 세상을 훑었다.

막 전투가 끝나고, 천천히 움직이던 전장 하나가 거기에 걸렸다.

당장 작살이 났다.

흙 한 줌, 물 한 모금 남겨놓지 않았다. 전장 안의 모든 것을 잘게 으깨어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전장에 남아 있던 생명체들이 공포어린 절규를 질렀다.

시혁은 차원문에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촉수가 더 커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차원문을 더 비집고 나왔다.

자연히 베리타스와 녹스가 다급해졌다.

[교활한 놈!]

[두고 보자!]

입장이 반전되었다.

시혁은 파괴신을 소환하려 하고, 베리타스와 녹스는 어떻게든 그걸 저지하려 했다.

만약 파괴신이 소환될 경우, 첫 번째 공격 목표는 다름 아닌 두 대종사일 테니까. 특히 녹스는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 필사적이었다.

시혁의 구상이 그대로 들이 맞았다.

촉수가 천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격렬히 반항하며 몸을 뒤틀지만, 두 대종사의 합공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놈들!]

시혁도 악다구니를 썼다.

진심인 것처럼 전력을 쏟아 부었다. 무한이고 불멸이고 가리지 않았다. 덕분에 촉수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 끝을 으뜸마루에 향한 채 꿈틀거렸다.

베리타스와 녹스가 시혁에게 차례로 소리를 질렀다.

[멈춰라, 백색 현왕! 여기서 더 하면 정말로 심연의 마신이 소환된다!]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죽어!]

무시했다.

그 둘이 이판사판이라면 시혁도 이판사판이다.

최악의 처지에 빠질 각오를 하고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그래서였을까.

음침한 목소리 하나가 시혁은 물론, 베리타스와 녹스의 영혼에 파고들었다.

[이거 재미있군.]

시혁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잔인한 맹수가 목덜미를 핥는 듯했다. 바로 마나를 움직여 대응하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마나가 꽁꽁 얼어붙은 듯 반응하지 않았다.

녹스가 절망어린 목소리를 냈다.

[끝이다……]

두 대종사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을 쪼갤 듯 솟구치던 기세가 잠잠해졌다.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섬뜩한 시선이 특히 녹스에게 쏟아졌다.

[너, 예전에 한 번 본 미물이구나. 이 세계의 시간으로는…… 대략 천오백년 전이었지?]

[으으……]

녹스는 잔뜩 질린 채 대답도 제대로 못했다.

흡족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잘 익었구나. 훌륭한 군주가 되겠어. 자, 이리 오너라.]

촉수 끄트머리가 쭈욱 갈라졌다.

네 갈래로 갈라진 촉수 끝에서, 흉측하게 생긴 입이 하나 나타났다.

칠성장어의 입과 비슷했다.

입이 꼬물거리자 가공할 흡력이 발휘되었다. 시혁은 본능적으로 으뜸마루를 가동시켜 버텼다. 덕분에 심장 제어실에 있던 존재 중 가장 심연에 가까운 녹스의 영혼만 빨려 들어갔다.

[아아아악! 안 돼!]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지만 소용없었다.

촉수가 녹스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몇 번 우물거린 뒤 뱉자, 거대한 그림자 같은 게 튀어나왔다.

낯이 익다.

언젠가 지구까지 쫓아와서, 아르거스로 돌려보낸 적이 있는 존재다.

심연의 마왕.

다만 그때 봤던 심연의 마왕보다 존재감이 더욱 강렬했다. 짙은 어둠의 망토를 후광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걸 봐선 같은 마왕이라도 다 같지는 않은 듯했다.

또다시 흡족한 웃음이 터졌다.

[투자한 보람이 있군! 오호, 덤도 있어?]

탐욕스러운 눈이 두 곳을 훑었다.

베리타스의 영혼석이 박힌 용왕 지팡이와, 저 위 상황실에서 떨고 있는 싱트파헬을.

‘그랬구나.’

어쩐지 베리타스의 자아가 뿜는 빛깔이 좀 이상하다 했다.

이미 공허에 의해 변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단순한 지식 기록 마법이 아닌 자아 전승 마법을 남겼고, 시야가 좁아져 심연의 마신을 소환하는 실수를 했겠지.

촉수가 길게 뻗어 왔다.

두툼한 으뜸마루의 허리를 한 차례 칭칭 감았다.

다소 흥분한 기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있는 장난감이구나. 내 군단에서도 석좌를 맡길 수 있겠어.]

촉수가 으뜸마루의 가슴 장갑을 뚫었다.

천천히 안쪽으로 파고들어오자, 세계수가 공포에 질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베리타스는 모든 것을 놔 버린지 오래.

덕분에 시혁은 으뜸마루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심장도 마찬가지여서, 무한의 힘이 으뜸마루의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영혼을 지키는 게 가장 관건이었다. 촉수가 파고들어옴에 따라 그 영향력도 강해져서, 심대한 압박이 시시각각 가해졌기 때문이다.

막 촉수가 세계수의 벽을 뚫고 심장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베리타스.]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왜 그러느냐?]

베리타스는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대로 심연의 마왕이 될 생각이냐?]

대답이 없다.

시혁은 차갑게 말했다.

[선택해라. 이대로 심연의 마왕이 될 테냐, 아니면 내게 협력하여 심연의 마신을 아르거스에서 쫓아내겠느냐?]

베리타스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한 가지 기억을 전송했다.

아르거스의 파괴신과 싸웠을 때.

도박처럼 성공시킨 무한과 허무의 조합.

베리타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그렇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마신을 몰아낼 수 있어.]

시혁이 베리타스에게 준 마지막 기회.

베리타스는 그걸 거부해 버렸다.

[마신이 강림한 이상 모든 게 다 끝난 것과 같다. 뭐 하러 아등바등 힘을 쓰느냐? 얌전히 종말을 기다리는 게 옳다.]

아예 파괴신에게 엎드려 경배해야 한다고 미친 소리까지 했다.

이미 심연의 마신에게 정신적으로 복속된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화신을 발동했다.

으뜸마루의 곳곳에 박힌 1백 현신의 육체가 백색의 빛을 따갑게 뿜었다.

그 빛이 금방 으뜸마루 전체를 뒤덮었다.

기세가 맹렬했다. 단숨에 심장을 꿰뚫을 것 같던 심연의 촉수를 저만치 밀어냈다. 구멍이 뚫렸던 부위도 순식간에 메꿔졌다.

[아니?]

마신이 놀라 탄성을 뱉었다.

시혁은 전투 자세를 취했다. 으뜸마루가 왼손을 내밀어 장착된 방패를 펼쳤다. 오른손으로는 허리에 꽂아두었던 장검을 뽑아들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1백 현신의 힘을 일깨웠다.

마나 방출의 기본 기법을 사용했다.

현신들의 힘이 하나로 뭉쳤다. 대적자 군단과 함께 할 때와 같았다. 창세 이전의 힘이 탄생하여, 칼날을 타고 촉수를 향해 쏟아졌다.

폭발도 폭음도 없었다.

그 흔한 섬광 한 번 터지지 않았다.

허무가 촉수를 지웠다. 가장 끝에서부터 서서히 녹아 사라졌다. 차원문 밖으로 나온 촉수 중 1/3 정도가 소멸한 듯했다.

그렇다고 유리해진 것은 아니었다.

촉수가 가볍게 몸을 털자, 지워진 부분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전부 다 재생될 때까지 채 1초도 걸리지 않는 듯했다.

아르거스의 파괴신과는 확연히 다른 재생력.

촉수가 뱀처럼 살랑거렸다.

[재미있구나. 한 번 더 해보아라.]

검을 몇 번이나 찔렀다.

드러난 결과 자체는 별로 신통치가 않았다.

촉수가 계속해서 재생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시혁도 노리는 게 있었다.

계속 밀어붙였다.

가까이 접근하여 방패로 때리고 검으로 찔렀다. 어깨로 밀치고 발로 차기까지 했다. 그 모든 공격에 허무의 힘이 깃들어서, 촉수가 차원문 너머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언뜻 실망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전부냐? 슬슬 끝내자. 자, 내 군단의 최고사령관이 되어라. 너라면 내 세계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마왕이 될 것이다.]

촉수가 수천 갈래로 갈라졌다.

얇지만 질긴 촉수 수천 개가 으뜸마루를 칭칭 감쌌다.

동시에, 아까 봤던 입이 나타났다.

허무의 힘을 갈겨 보지만 소용이 없다. 특수한 힘에 의해 보호를 받는지, 작은 상처가 난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가장 강한 곳이 돌파당하면 곧바로 약점이 드러나는 법.

시혁이 기다리던 때가 왔다.

눈을 빛냈다.

한 가지 마법 명령을 발동했다.

[파괴.]

으뜸마루를 만들 때 심어놓았던 마법.

베리타스의 영혼석이 콰직, 하고 박살났다.

으뜸마루의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무한의 힘이 미친 듯이 뿜어지며 뛰쳐나갈 곳을 찾아 헤맸다.

화신이 종료되기 일보 직전.

무한의 힘과 허무의 힘을 동시에 뿜어냈다.

다름 아닌 가슴에 달린 주포로.

두 빛이 소용돌이치며 날아갔다. 시혁이 의도한 대로, 정확히 촉수의 입을 강타했다.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이미 경험이 있는 바.

잽싸게 뒤로 으뜸마루를 이동시켰다.

[크아악!]

이번 공격은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이계의 파괴신이 지르는 비명소리가 시혁의 귀청을 때렸다.

폭주하는 무한의 힘을 계속해서 꽂아 넣었다.

찬란한 섬광 뒤로, 어둠이 서서히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주문을 외웠다.

이계의 파괴신을 추방하는 마법.

1분만 전 같았어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계의 파괴신이 아르거스를 주시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불의의 일격으로 본체까지 타격이 간 참이었다.

차원문이 서서히 닫혔다.

가느다란 촉수 몇 가닥이 허우적거렸다.

[이익, 이번에야말로 아르거스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한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잠시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인공 육체의 신이어, 내게 승리를 거둔 것 같으냐? 부질없다. 이미 내 마왕이 탄생했으니, 결국 네 행성은 심연의 어둠으로 물들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시혁은 코웃음을 쳤다.

녹스가 변해서 된 심연의 마왕?

진작 소멸시켰다.

심연의 마왕은 촉수 근처에 있었다. 무한과 허무를 섞은 주포를 쏘면서 같이 뿌려준 것이다.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소멸하고 말았다.

왜 그랬냐고?

당연한 거 아닌가.

녹스를 놔두면 미래에 지구로 쫓아올 수도 있었으니까. 또한 이건 아르거스에 주는 시혁의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다.

마신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이이익, 네 이놈! 언젠가 이 수모를 갚아주고 말겠다!]

글쎄.

아르거스의 반신 중에서도 두고 보자는 자는 많았지만 결국 위협이 되는 이는 없었다.

비웃음을 한 번 날려준 뒤, 최후의 공격을 가했다.

손도끼를 날렸다.

허무의 힘을 한껏 머금은 참이었다. 그걸 맞고, 검은 촉수가 흐릿한 비명과 함께 차원문 너머로 사라졌다.

차원문은 그 격전에도 불구하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잠시 멈춰 서서 으뜸마루의 심장을 안정시켰다.

세 용의 상태를 살폈다.

[셋 다 괜찮습니까?]

“난 괜찮다. 실라도 그렇고. 싱트파헬이 문제다. 정신에 꽤 타격을 입은 모양이야.”

“크르릉!”

낫슈바켈과 실라, 짝니는 괜찮은 것 같다.

다만 싱트파헬이 몸을 웅크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으……”

고유의 속성 탓에 파괴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까닭이었다.

가볍게 영령 이적을 걸어주었다.

숨소리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실라가 칭얼거렸다.

“언니, 언니. 괜찮아?”

“언니는 괜찮을 거야.”

[며칠 쉬면 돼. 영령 이적을 계속 걸어놓을 테니, 곧 회복되겠지.]

“베리타스는 어떻게 된 거냐?”

[베리타스도 마왕이 될 뻔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영혼석을 박살냈지요.]

“아쉽구나. 그에게 마법을 배우던 기억이 선한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심장이 안정되었다.

으뜸마루가 좀 손상된 곳이 있었다.

즉석에서 그것을 수리했다.

신들의 육체를 섞은 까닭에 손상 정도가 크진 않았다. 몇 시간의 수리만으로 제 기능을 되찾았다.

낫슈바켈에게 말했다.

[이제 끝내지요.]

“좋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낫슈바켈이 마법진을 기동시켰다.

두 가지.

영혼 인도와 차원 이동.

지구 출신의 소환자들이 여기에 이끌렸다. 아르거스에서의 임시 육체를 벗어나 으뜸마루로 날아왔다.

이만하면 됐지 싶을 때 차원 이동이 실행되었다.

으뜸마루가 빛으로 변했다.

차원문을 통과했다.

아득한 거리를 넘어, 은하계 귀퉁이의 한 태양계에 위치한 행성에서 구체화되었다.

아울러 차원문 안에 어떤 마법을 남겨두었다.

으뜸마루가 구체화되는 것과 동시에 그 마법이 발동했다.

아주 간단한 파괴 마법.

검은 천체가 폭발했다.

우주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그걸 보자 맥이 탁 풀렸다.

모든 게 다 끝났다.

약 3년.

아르거스에서 보냈던 일들이 꿈만 같았다.

치료사로 소환되어 어리바리했던 일, 불사의 역병에 걸려 살아남고자 아득바득했던 때, 의학자로서의 나날, 현자가 되어 공부하고 연구하던 시간들.

영웅이 되어 많은 인연을 만났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반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여러 진실……

결국 해냈다.

신위 경쟁에서 이겼고, 아르거스를 구했으며, 목표했던 대로 두 행성의 연결을 끊었다.

이제는 쉬어야 할 때.

벌써부터 부드러운 침대가 그리웠다.

으뜸마루를 천천히 강하시켰다.

첨벙!

바닷물에 내려앉자, 물보라가 크게 일었다.

소란이 났다.

방송국 헬기들이 요란하게 날아다니고, 인근에 떠 있는 배에 탄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낯익은 얼굴들이다.

손문철과 이미라, 채현애가 선두에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누리 공격대의 강찬과 신아영, 한세훈과 김미애도 보였다.

시혁의 한방 병원에서도 소식을 듣고 온 것 같았다.

군함이 아닌 민간 유람선 위에서, 박희정과 민수진, 김진택과 박성화 등이 손을 휘저었다.

최지혜도 있었다.

뭘로 만들었는지 앙증맞은 날개를 찼다. 그 날개가 쉬지 않고 펄럭였다. 수면 위에 살짝 떠서는, 도도하게 손만 살짝 까딱였다.

어떤 이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시혁 쪽을 쳐다보았다.

으뜸마루 때문이겠지.

한눈에 보기에도 강력한 요새이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으뜸마루를 정박시켜놓고, 스스로의 의식을 침잠시켰다.

자연히 또 하나의 시혁이 눈을 떴다.

인간 시혁.

선실에서 나와 으뜸마루를 바라보았다.

크다.

위압적이다.

저것은 또 하나의 분신.

그러나 앞으로 쓸 일이 없었으면 했다.

시혁이 으뜸마루를 써야 할 상황이 온다는 건, 또다시 지구가 멸망의 위기에 빠진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니까.

으뜸마루로 날아갔다.

“어…… 백색 현왕?”

“크릉?”

실라와 짝니가 시혁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느낌은 비슷한데, 그 존재감이 턱없이 작은 게 이상했나 보다.

그들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싱트파헬도 깨어나서, 낫슈바켈과 함께 시혁을 보고 있었다.

최지혜도 옆으로 다가왔다.

이계 종족들.

그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해.”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바다 저 편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지구도 이계의 종족들을 환영하는 듯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다가, 마중 나온 이능력자들에게 날아갔다.

이능력자들이 이계 종족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갈등의 소지는 남아 있지만……

시혁은 아르거스에서 그랬듯, 그리고 지구에서 그랬듯 언제나처럼 슬기롭게 헤쳐 나갈 것이다.

< 이계의 마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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