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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47화 (247/250)

< 백색 거신 >

막강한 힘이 휘몰아쳤다.

비단 시혁의 성역만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아르거스 행성 전체에서 그랬다. 중심에 남은 공허도, 저 위의 하늘도, 한결같이 막대한 힘을 뿜었다.

그 힘이 몽땅 시혁의 성역으로 쏟아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혁의 신전.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 신세가 된다. 백색 신전이나 백색 신상 정도로 불리면서, 하염없이 공허나 해제하겠지.

의식이 흐려지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쏟아지는 힘을 조종하여 방향을 뒤틀었다. 저 신전 앞쪽에 쌓아놓은 으뜸마루의 재료로 스며들게 했다.

재료들이 덜그럭거렸다.

가장 먼저 빛의 눈과 밤의 검에 힘을 투사했다.

두 보물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각자의 힘을 이끌어냈다. 빛과 어둠이 서로 얽히고, 칠대 위상의 용왕이 그걸 중재했다.

무한이 탄생했다.

이제는 굳이 피라미드를 만들고 오행 순환체를 생성시킬 필요가 없었다.

베리타스가 있으니까.

처음 겪어볼 텐데 무한의 힘을 완벽하게 조율하고 있었다. 힘이 구 형태로 뭉치며, 허공에서 그 존재감을 뽐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심장을 안정시킬 마법진이 새겨진 금속판.

조립은 쉬웠다. 말 그대로 신의 힘을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재료들이 날아가 척척 달라붙었다.

세계수를 발아시키고, 신의 힘을 이용해 성장을 북돋우고, 그나마 자기가 의도하는 대로 키워 으뜸마루의 내부를 이루게 하고……

어디 그뿐인가.

현신들의 신체를 아낌없이 가져다가 썼다.

조디악의 갈비뼈가 심장 주위를 보호했다. 길누아의 독침이 오른손 부위에 박혔다. 모리에타의 비늘이 외장갑 안쪽에 달라붙을 채비를 하고, 마를르의 눈물이 머리 인근을 보호했다.

마지막으로 금속들과 바위들까지 날아올랐다. 부족해 보이던 으뜸마루를 완전히 채우고, 방어 시설들까지 다가와 부착되었다.

채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온전하던 때의 하늘마루가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심장은 더욱 자유롭게 풀어놓고, 현신들의 신체까지 덧붙여져 실은 훨씬 강해진 상태였다.

시혁은 모든 힘을 으뜸마루에 들이부었다.

화신을 만들 때와 같았다.

으뜸마루 전체가 하얗게 달아올랐다.

참으로 지난한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그랬다. 몰려오는 힘에 당장이라도 휩쓸려 갈 것 같은 상황에서 간신히 집중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돕겠다.]

[아니, 됐어. 이건 내 일이야. 끼어들지 마.]

베리타스가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부담을 나누는 것은 좋지만, 그만큼 베리타스의 권한도 커질 것 아닌가.

으뜸마루는 오로지 시혁의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도 시혁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스스로의 의식을 확장한 채, 드넓게 펼쳐진 성역을 내려다보았다.

넓다.

처음 반신이 되었을 때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면적은 거의 나라 하나 정도에, 사는 인구도 많았다. 대한민국의 광역시 하나 정도는 되었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껏 경외시하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과, 약간의 불안감이 깃든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빛나는 손이 시혁의 신전을 감싸 쥐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안의 신상, 아니 또 하나의 작은 차원인 성지를.

시혁이 의도한 바는 간단했다.

이걸 그대로 뜯어내어 으뜸마루에 이식하는 것이다.

가능하냐고?

충분히.

최지혜에게 신이 되는 순간 가능한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때만큼은 아르거스의 모든 마나가 집중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전지전능에 가까워진다.

문제는 지속시간이 아주 짧다는 점.

그 안에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시혁은 신중하게 신상 너머를 더듬었다. 자신이 존재하는 성지의 위치를 찾자, 그 거대하면서도 작은 공간이 곧 시혁의 감각에 잡혔다.

그걸 들어올렸다.

신상이 빛을 잃었다. 대신 빛나는 두 손 안에 흰색의 작은 구가 생성되었다.

희뿌연 안개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구체.

이게 시혁의 성지였다.

잘못 다루어 깨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으뜸마루의 머리로 가져간 후, 그걸 으뜸마루와 융합시켰다.

바로 되지는 않았다.

성지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고 발광을 했다. 강렬한 빛을 뿜는가 하면 격하게 진동을 일으켰다.

한동안 씨름을 한 끝에 성공했다.

성지와 으뜸마루가 융합되었다.

순간, 세계가 침묵했다.

시혁에게 공급되던 막대한 양의 마나가 중단되었다.

신전에서 으뜸마루로 옮겨간 성지의 존재를, 아르거스가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나 공급이 재개되었다.

시혁은 본인의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는 격류 속에 몸을 담근 채 그걸 조절해야 했다. 지금은 격류에서 벗어나 그걸 관찰하는 것과 비슷했다. 자연히 난이도가 훨씬 더 내려갔다.

으뜸마루 건설을 마무리했다.

강력한 힘에 의해, 시혁의 머리도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꽤 시간이 걸릴 마법진 제작도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한 가지 더.

베리타스 모르게 그 영혼석과 하늘마루에 여러 조치를 취했다.

혹시라도 베리타스가 시혁을 배신하면 사용할 것이다.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베리타스의 영혼석을 원격으로 부수기도 가능했다. 만약 배신한다면, 말 그대로 영혼 자체가 소멸될 터였다.

[후우.]

시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으로 끝.

으뜸마루 건설이 완료되었다.

그 안에 있는 성지가 시혁을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다.

거부하지 않았다. 융합을 받아들이자, 시혁의 영혼이 천천히 으뜸마루로 이끌렸다. 으뜸마루에 깃들어, 그 거대한 요새를 몸으로 삼게 되었다.

시혁은 스스로의 몸을 살폈다.

융합은 당초 예정되어 있던 것보다는 훨씬 느슨했다.

지금까지 시혁이 깃들어 있던 성지와 비슷했다. 다른 신들과 다르게, 이 몸을 떠나 지구에 갔다가 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된 건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무렵, 예정되어 있던 변화가 일어났다.

구구구구궁.

세계가 진동했다.

공허의 바다에 남아 있던 땅덩이들이 일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성역이 신역으로 강화되는 것이다.

아울러 대지가 으뜸마루를 빨아들였다. 하반신이 땅에 파묻히고, 그곳으로 행성 중심에 있는 공허까지 집중되었다. 동시에, 으뜸마루의 몸에 한 가지 마법이 새겨졌다.

공허 변환.

그냥 써먹을 수는 없지.

시혁은 공허 변환 마법을 적당히 변형시켰다.

어쩌면 복원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베리타스가 처음 만들었던 공허 변환 마법으로 수정한 거니까.

공허가 순수한 마나로 변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느린 편.

그도 그럴 것이 시혁의 능력이 몽땅 집중되는 것은 아니니까. 공허 변환 효율로만 따지면 다른 신들보다 떨어진다.

“만세! 만세!”

성역의 주민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윽고 공허의 바다에 있던 땅덩이들이 모두 시혁의 성역에 붙었다.

그렇게 넓어진 것만 기존 성역의 수십 배 이상.

신역의 보호막이 그 땅덩이를 모두 감쌌다. 이마저도 공허가 모두 사라지는 날이 오면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시혁은 하늘의 달 모양 천체를 바라보았다.

많이 작아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투가 치러지는 전장이 확연히 줄었다.

앞으로는 새로운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 일반 소환자들은 아르거스에 올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광풍처럼 몰아치던 힘이 잦아들었다.

들떠 있던 세계의 분위기가 안정되고, 백색으로 빛나는 거신 하나만 남았다.

싱트파헬이 마법을 써서 날아왔다.

“백색 현왕! 괜찮아?”

다른 신들처럼 의식이 함몰되었을까봐 걱정이 됐나 보다.

시혁은 짧게 대답했다.

[난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목소리 들으니까 쌩쌩하네! 움직일 수는 있어?”

[당연하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하늘마루와 다르게 으뜸마루는 사람의 형상과 비슷했다. 손가락도 완벽히 재현되어 있고, 전신에 갑옷을 입고 있었다. 방패와 검, 투창과 도끼 등을 소지하여 무장도 충실했다.

낫슈바켈이 다가와 시혁을 살폈다.

“굉장하구나. 하늘마루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당연하지요. 들어간 재료에 차이도 있고, 소모한 마나도 훨씬 더 많으니까요.]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세상 모든 것을 손끝 하나로 부릴 듯한 느낌.

사물을 보면 그 구성과 기원이 낱낱이 파악되었다. 사람을 보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조리 읽어냈다.

마음만 먹으면 기후를 조작하고, 대지의 성분을 바꿔놓는 것도 가능했다. 심지어 새로운 신역에 있는 종족들을 합성하여 새로운 종족을 창조할 수도 있었다.

거의 전지전능에 가깝다고 할까.

스스로의 힘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시혁은 잠시 혀를 내두르다가, 가장 가까이 있던 분신으로 의식을 옮겼다.

“차원 이동은 언제 할 거냐?”

낫슈바켈의 말에, 시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지구로 오실 생각이십니까? 파괴신도 쓰러뜨렸으니, 아르거스도 더 이상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음……”

낫슈바켈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싱트파헬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했다.

“난 네 집에 갈 거야. 못 오게 할 생각하지 마.”

[하하, 알았어. 아르거스에서 공허만 좀 해결하고 나면 바로 지구로 가자. 얼마 안 걸릴 거야.]

공허는 원래 15가지 힘으로 이뤄져 있었다. 시혁은 그 중 권세의 힘만 해결을 해줄 참이었다. 단순히 의리나 동정심 같은 감정 때문은 아니었고, 그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시혁은 방금 막 신위에 올라서 그 힘이 불안한 편이다. 그걸 안정시키고, 더 많은 마나를 흡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싱트파헬의 말을 듣고, 낫슈바켈도 결정을 내렸다.

“원래 계획대로 하겠다. 지구로 가야겠어. 녹스는 봉인되었고, 공허 속의 파괴신은 소멸했지만 아직 꺼림칙한 것이 있어.”

[이계의 파괴신 말씀입니까?]

“그래. 단순히 내 기우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계의 파괴신은 아르거스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다가올 실라의 시대에 분명히 그 마수를 뻗칠 것이다. 비록 내가 죽은 뒤의 일이겠지

만, 그런 상황을 용납할 수는 없다.”

낫슈바켈도 공허에게 영향을 받았나 보다. 아니면 공허 속에서 혼자 알을 키우는 동안 모성애가 극도로 강해졌거나.

원래 아르거스의 용들은 매우 독립적인 성향을 보인다. 새끼용이 성룡이 되어 독립하면 그 이후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식의 미래까지 보장해주려는 것은 용답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에 가까웠다.

그게 낫슈바켈의 선택이라면 시혁 또한 존중해야겠지.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신위 등극의 마무리를 했다.

권력은 완전히 원주민들에게 이양을 했다. 앞으로 신역의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으나, 이미 준비하고 있던 일이라 혼란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현신들이 찾아왔다.

시혁이 멀쩡히 의식을 차리고 있자,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흑백 올빼미 자일이 인상 깊다는 듯 말했다.

[그대는 볼 때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구려. 전생의 베리타스보다 더 큰 위업을 달성한 것 같소이다.]

[과찬이십니다. 참, 혹시 차원문은 어쩔 예정입니까? 신위 경쟁도 끝났으니, 더 이상의 소환자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직 아르거스 행성에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오. 다른 방식으로 쓸 예정이오. 다만 그 수가 줄어들 거요. 굳이 많은 수가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그렇습니까.]

시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소환자들을 제멋대로 부려먹더니 맛이 들린 모양이다.

저러다 큰 코 다치지.

현신들은 곧 돌아갔다. 아르거스 복구 문제로 많이 바쁘다고 했다.

시혁도 귀환 시간이 되었다.

[베리타스, 난 지구에 다녀오겠다.]

[잘 다녀와라. 으뜸마루는 내가 관리하고 있으마.]

베리타스는 으뜸마루의 심장에 깃들었다.

자연히 관리 전용 영혼 정도가 되었다. 시혁이 부재중일 때에 한정하여, 으뜸마루를 움직일 수도 있었다.

물론 몇 가지 제한이 있다.

화신이나 주포는 물론, 무장을 못 쓴다. 그저 육박전이나 방어 시설 및 로봇 선원 가동, 이적 사용 정도가 가능했다.

하긴 그 정도로도 막강한 권한이지만.

지구로 돌아갔다.

시혁은 또 한 차례의 각성을 겪었다. 몸이 세 번째로 재구성되며 더 강한 힘을 쓰게 되었다. 심지어 궁극기 환생까지 사용이 가능해졌다.

‘이건 봉인해야겠다.’

환생을 썼다간 시혁을 떠받드는 종교가 탄생할 판이다. 그런 건 질색이었다.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검은 천체가 갑자기 두 배는 확장된 것이다.

시혁의 신위 등극이 미친 영향이었다. 자연히 세계 각지에서 괴수들이 출현해서, 그걸 해결하느라 한동안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신위에 등극하고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지구에서는 대응 마법진을 새긴 배가 동해를 떠다녔다. 아르거스의 공허도 해소할 만큼 했고, 으뜸마루도 완전히 안정화되었다.

차원이동 마법 말고 한 가지 마법을 더 연구해서 새겼다.

영혼 인도.

무턱대고 차원이동 후 검은 천체를 부수면 아르거스에 있던 지구 출신 소환자들에게 문제가 생긴다. 영혼이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지구에서는 식물인간이 되지 않겠나.

이제 차원이동을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시작하지요.]

탑승자는 딱 넷.

낫슈바켈, 낫슈실라, 싱트파헬, 짝니.

성 형태의 으뜸마루가 새하얗게 빛났다. 몸에 새겨진 마법진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으뜸마루는 천천히 하늘 위로 상승했다.

인간들이 그걸 보고 절을 했다. 천사들이 하늘을 날며 빛의 날개로 세상을 수놓았다. 예포 소리가 울리고, 정령들이 시혁을 배웅하는 노래를 불렀다. 오크와 고블린, 오우거와 트롤들도 북을 치고 고함을 질러댔다.

시혁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정든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지구로 돌아가서, 그곳의 생활에 충실해져야겠지.

가볍게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했다.

어느덧 차원문에 가까워진 상태.

낫슈바켈에게 전수 받았고, 지구에서 최지혜와 머리를 맞대어 보완한 차원 이동 마법을 실행했다.

강렬한 빛이 솟구쳤다.

무지개다리가 차원문과 으뜸마루를 이었다.

막 가속하여 그 안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였다.

[응?]

시혁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으뜸마루의 기동이 중단되고 있었다.

얼음물을 전신에 뒤집어쓴 것 같았다. 가슴 부위부터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그게 온 몸으로 퍼졌다.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되었다.

“백색 현왕?”

이상함을 느낀 낫슈바켈이 시혁을 불렀다.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스스로의 정신을 작은 보석에 복사했을 때처럼, 세상 전체가 영혼을 옥죄어 오는 듯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금방 이유를 알아차렸다.

[베리타스! 이게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긴? 뒤틀린 운명을 바로 잡는 것뿐이다.]

시혁의 물음에, 베리타스는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앙!”

짝니가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렸다.

크게 울부짖으며 벽으로 달려들지만 소용이 없다.

[오호, 안 되지 안 돼. 내 새로운 몸에 상처를 입히면 쓰나.]

베리타스가 조롱어린 말을 하며 구속 마법을 발현했다.

짝니의 전신이 흰 빛에 뒤덮였다. 빛의 고리가 무수히 감싸자, 뭘 해보지 못하고 결박되고 말았다.

낫슈바켈과 싱트파헬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베리타스!”

둘이 마법을 쓰려고 했으나 베리타스가 한 걸음 더 빨랐다. 절대엄금 이적을 이용, 둘의 마법 사용 자체를 제한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속박 마법까지 사용했으니, 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용들이 이를 갈았다.

“젠장, 칠대 위상의 용왕 어쩌고 할 때부터 네 흉계를 알아봐야 했는데!”

“베리타스. 왜 이러는 거지? 으뜸마루를 탈취하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넌 베리타스의 잔재일 뿐, 그 본인이 아냐. 넌 진리의 신이 될 기회가 없다고.”

[흥,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라는 법도 없지 않느냐? 운명을 바로잡기만 하면 된다.]

“너 설마……”

베리타스의 의도는 명백했다.

다시 시혁의 영혼으로 자신의 자아를 옮기겠다는 것.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다. 예전에 시혁의 영혼에 새겨졌던 자아 전승 마법만 응용해도 가능할 것이다.

베리타스가 으뜸마루의 심장을 조율했다.

무한의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힘이 으뜸마루의 전신을 하나의 마법진처럼 활용했다. 거대한 마법진이 시혁의 영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짜부라져 모든 기억이 초기화될 것 같았다.

‘흥.’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시혁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애초에 베리타스를 믿은 적이 없다. 당연히 으뜸마루에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설치했다.

지금 이 수법이 끝이냐?

그렇다면 마땅히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백색 거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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