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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46화 (246/250)

< 승전보 >

그 시각, 시혁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늘마루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밀려드는 파멸의 힘이 무시무시했다. 이미 세계수 부분도 다 깎여나갔고, 남은 것은 심장과 그 주위 얼마뿐이었다.

알고 있는 마법과 이적을 총동원했다.

무지개 방어막, 반사 이적, 철의 수호, 물의 보호, 땅의 방벽 등등.

대적자들도 힘을 보탰다.

허무의 방패를 사용한 다음에야 숨을 좀 돌릴 수 있었다.

그 충격파를 해소하기만 하면 됐으니까.

이윽고 무한과 허무가 빚어낸 빛이 사그라졌다.

시혁은 고개를 들었다.

성공이었다.

파괴신이 있던 자리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돌 몇 개와 부서진 나무 뭉치가 부유하고 있었다.

대적자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이제 끝난 겁니까?”

“만세!”

“이겼다!”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누렸다.

이제 다 끝났다.

아르거스는 무난히 복구되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다.

수많은 생명들이 지상을 노닐겠지. 새들은 아침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새로운 문명이 번영하여 미래를 향해 질주하게 된다.

시혁은 그 와중에도 하늘마루의 심장을 챙겼다.

거의 망가졌다.

오행 순환체를 생산하던 다섯 개의 금속판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세 보물도 마찬가지.

천신의 보관은 찌그러진 깡통처럼 변했다. 무저갱의 핵은 납작하게 짜부라졌다. 그나마 칠대 위상의 용왕은 두 동강이 난 정도라 원래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심장을 보호하던 세계수?

가루 한 줌도 남지 않았다. 그 모태가 된 세계수의 가호는 영영 소멸한 것이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영웅 시절 얻은 것 최고의 보물들과, 반신 시절 만든 제일의 작품이 모두 사라졌으니까.

복구할 수 있을까?

세계수의 씨앗은 엘프들에게 다시 얻으면 된다. 세계수의 가호는 없지만, 이미 방법을 깨쳤으니 복원할 방법이 있었다.

문제는 무한의 힘을 구현하는 거다.

아직 시혁은 재료 없이는 안정적으로 무한을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세 보물에 준하는 신화적인 보물을 구해야 하는데, 어디 그게 쉽겠나.

“현왕님, 괜찮습니까?”

“너무 심려치 마세요. 현왕님이시라면 다시 만드실 수 있잖아요.”

기뻐하던 대적자들도 시혁을 위로했다.

이번 전투에서 손해를 본 건 시혁 밖에 없으니까.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자원과 노력이 들었을 요새를 잃지 않았나. 그것도 현신 한둘은 가볍게 찜 쪄 먹을 강력한 요새인데.

시혁은 기운을 차렸다.

문득 하늘마루를 어떻게 복구할지에 대한 구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그게 된다면 하늘마루라는 이름으로도 부족하다. 최고라는 뜻을 붙여 으뜸마루라고 해야 되겠지.

시혁이 이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전장의 움직임이 멈췄다.

거꾸로 되돌아갔다. 저 멀리 보이는 아르거스 행성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다.

파괴신이 소멸한 이상, 대적자들을 추방할 생각까진 없었나 보다. 하긴 그들의 무기에 자기들의 힘이 있으니, 그걸 버리고 싶진 않겠지.

얼마 후 망가진 땅덩이가 한참 복구 중인 아르거스 행성의 지역에 안착했다. 현신들의 힘이 작용하여, 땅덩이를 해체하여 여기저기에 덧붙였다.

[훌륭하네!]

조디악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본체를 드러낸 상태였다. 그 큰 몸이 움직일 때마다, 대기가 출렁이며 바람이 불었다.

시혁은 조디악에게 창을 들이댔다.

대적자들도 한 마음이었다. 무기를 겨누고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조디악이 당황해서 물었다.

[아니, 왜들 그러나?]

“몰라서 묻습니까?”

시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불리해지니까 바로 전장을 차원문 쪽으로 옮기시던데, 그 의도가 뭐였습니까?”

[아, 그건……]

조디악이 말을 더듬었다.

확 찔러버릴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조디악이 그 거대한 머리를 천천히 아래로 숙였다.

[미안하오. 그대들 중 7할 이상이 죽어서, 더 이상 전투를 속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소. 백색 현왕, 그대의 전원 환생 이적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우리가 제공한 육체로는 준신 계급 영웅

의 힘을 사용하는 게 다니까.]

“그래서 우리도 같이 무덤 속에 파묻으려고 한 거요?”

한 대적자의 성난 외침에, 조디악이 더 머리를 숙였다.

[미안하오. 모두 우리의 잘못이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소. 파괴신이 아르거스 행성으로 돌아오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막아내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섣부른 결정을 내려, 그대들을 위험하게 만든 것은 사과하겠소. 아울러

우리가 가진 보물들로 보상을 할 테니, 부디 용서해주기 바라오.]

이렇게까지 나오니 더 화를 내기도 좀 그랬다.

대적자 하나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신들은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을 한다면 한 번 다시 생각해 보지요.”

[아르거스의 복구에 막바지 힘을 쏟고 있소. 대부분 본신을 뺄 수는 없지만, 화신을 보낼 수는 있소이다. 그들이 곧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할 거요.]

조디악이 저자세로 나오자 마음이 좀 풀렸다.

하긴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던 현신이다. 뭘 하려고 하면 최대한 도와주려고 했었고.

시혁은 천천히 창을 거뒀다.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잊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보상은 톡톡히 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장담하건대, 여기 있는 그대들 모두 입이 떡 벌어지도록 보물을 안겨 주리다.]

천상도에서 축제가 벌어졌다.

비단 천상도만이 아니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신역들과, 새롭게 생긴 신역에서도 축제가 열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공허 속에 숨은 파괴신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각 신역의 주요 원주민들이나 그 존재를 추측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게 최근에 달라졌다.

파괴신을 육안으로 직접 관찰하게 되었으니까.

불과 몇 시간 전에는 파괴신이 땅덩이들을 따라 전장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당연히 그 죽음을 기뻐하게 되었다. 이제 아르거스 행성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니까.

반면 애도와 추모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스로를 희생한 신들께 영원한 안식과 축복이 있기를.”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합시다.”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다.

이미 공허에 오염된 상태라 선택의 여기가 없긴 했다. 그래도 스스로의 존재를 희생하여 신위 경쟁 체계를 만든 공이 있었다. 소환자들 입장에서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지만, 아르거스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위대한 희생이

겠지.

오랜만에 흥겹게 즐겼다.

현신들이 하나둘 찾아와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개중에는 억지로 하는 현신도 있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1백 대적자야말로 아르거스 최강의 전투 집단이니까.

1백 대적자가 모이면 현신도 못 당한다. 완전히 소멸당할 수도 있었다. 허무의 힘은, 신들의 불멸성을 손상시킬 정도로 막강한 힘이니까.

조만간 수를 쓰겠지.

무기를 회수하거나, 일부를 고향 세계로 영원히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어쨌든 좋다.

시혁에겐 두 가지 과제가 남아 있었다.

신위 등극과 하늘마루 재건.

특히 낫슈바켈이 크게 실망을 했다.

“하늘마루가 부서졌다고?”

“예. 파괴신이 무시무시했습니다. 파괴신을 쓰러뜨리는 대신, 하늘마루를 희생시켜야 했지요.”

“그래?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다.”

싱트파헬과 실라, 짝니도 성지에 들어오게 했다. 베리타스가 깃든 지팡이도 구석에 세워 둔 채,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다들 숨을 죽이고 이야기를 들었다.

공격 한 번으로 지역 하나를 부수던 파괴신.

대적자들의 공격.

파괴신의 변형과 하늘마루의 출격, 그리고 그 소멸까지.

베리타스가 신음을 내뱉었다.

[어마어마하군. 파괴신이라…… 그 이름에 걸맞은 능력이다. 예전의 나라도 당해낼 수 없었겠어.]

싱트파헬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랑 그 놈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뻔한 거 아닌가.

단 일격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하자, 싱트파헬이 입을 삐죽였다.

“에이, 그래도 조금은 버티지 않을까?”

“하늘마루도 불가능했어. 정면으로 싸웠으면 두 번만 얻어맞아도 박살이 날 걸?”

“체엣, 그래도.”

일단 급한 것은 칠대 위상의 용왕을 수리하고, 천신의 보관과 무저갱의 핵을 대체할 보물을 구하는 일이었다.

베리타스가 선뜻 나섰다.

[칠대 위상의 용왕은 내가 수리할 수 있다. 한 때 직접 쓰던 거라서, 원래 모습을 기억하고 있거든.]

“그래?”

“맞아. 내가 베리타스에게 마법을 배울 때 가끔 쓰는 걸 본 적이 있지. 진리의 보주를 만든 이후로는 쓰지 않게 되어서, 내가 물려받았지만.”

[그리운 이름이군.]

베리타스가 옛 일을 회상하는지 부드러운 광채를 뿜었다.

시혁은 고심 끝에 베리타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른 수리 방법을 찾기 어려웠으니까. 칠대 위상의 용왕을 수리할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는, 어떤 신역에서도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베리타스의 영혼석을 칠대 위상의 용왕에 박아야 했다. 외부에서 수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나.

‘이거 의심스러운데?’

시혁은 베리타스의 제안에 숨은 위험성을 눈치 챘다.

새로운 차원 요새, 으뜸마루의 핵에는 변함없이 칠대 위상의 용왕이 들어갈 것이다.

그 지팡이에 베리타스의 영혼이 깃든다?

그렇다면 나중에는 베리타스가 으뜸마루를 장악할 수도 있었다. 단순히 으뜸마루를 관리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 수준을 넘어서면 눈 뜬 채 으뜸마루를 빼앗기는 것이다.

시혁은 베리타스를 자신의 영혼에서 빼낼 때를 상기했다.

굉장히 창백하고, 음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지.

대비해야겠다.

지금 시혁이 하는 걱정이 단지 기우라면 좋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치명적이니까.

베리타스의 영혼석을 이식한 후, 대적자의 몸을 이용해 천상도를 방문했다.

마침 현신들이 꽤 모여 있었다.

그들을 찾아가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현신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갈비뼈를 달라?]

[내 독침으로 뭘 하려는 거요?]

신체의 일부.

아주 귀중한 곳은 아니고, 재생이 가능한 부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의 육체인 이상 그 가치를 따지기 어려웠다.

시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새로운 하늘마루의 재료로 쓸 겁니다.”

그렇다.

시혁이 떠올린 으뜸마루는 현신들의 육체를 바탕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기존의 하늘마루도 귀중한 자원이 들어갔다. 각종 마나 보석과 금속, 석재, 세계수로 만들어졌으니까.

그래봐야 현신들의 육체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재료로 쓴다니……]

현신들은 꺼림칙한 기색을 보였다.

시혁이 강하게 주장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육체의 일부를 내어 주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으니까.

미리 하늘마루를 준비해 놓은 시혁이 아니었으면, 파괴신을 잡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본인은 내어줄 게 없소.]

가끔 뻗대는 현신도 있었다.

유령 여왕 메를르가 특히 그랬다. 자기는 육체가 없으니 줄 것도 없다는 논리였다.

시혁은 말없이 미리 준비해 온 병을 내밀었다.

영체의 병.

유령이든 영혼이든 담을 수 있었다. 메를르가 댄 핑계는 안 통한다는 소리다.

메를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별 수 없다는 듯 본인의 눈물을 담아 건네주었다.

다른 현신들도 그러했다. 덕분에 고작 하루 만에 1백 현신의 보상을 다 받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태양 늑대 휴고가 넌지시 물었다.

[신위 등극은 언제 할 생각이오? 거의 한계일 것 같소만……]

휴고의 말대로였다.

성지가 발하는 빛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시혁은 고도의 집중을 통해 그 유혹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달해서, 이번 방문 내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쟁 종료를 선언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시혁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돌아가자마자 등극할 생각입니다. 사실 지금도 많이 늦었지요.]

다만 평범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한 일.

시혁은 현신들을 믿지 않았다. 원래 그랬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 의구심이 더욱 짙어졌다.

공허가 걷히면 신들이 깨어난다고 했겠다.

하지만 파괴신을 쓰러뜨린 후에도 공허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중심부가 특히 그렇고, 행성 주변에도 새카만 공허가 너울거렸다.

저걸 다 해소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아니면 깨어난 뒤의 시혁이 전혀 다른 인물로 변할 수도 있다. 지금 신들이 공허를 청소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녹스가 만든 공허 변환 마법이니까.

천상도에도 들렀다.

천신의 보관과 무저갱의 핵을 대체할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신의 권속들은 흔쾌히 시혁에게 협조했다. 파괴신을 무찌르는데 시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나라도 챙겨주지 못해 안달을 냈다.

덕분에 두 물건을 얻었다.

빛의 눈.

밤의 검.

충분히 천신의 보관과 무저갱의 핵을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오히려 빛과 어둠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어서, 더욱 강한 무한의 힘을 생성할 듯했다.

대밀림에도 들렸다.

엘프들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받았다.

그것으로 오늘의 일정은 끝.

성역으로 돌아오자, 칠대 위상의 용왕도 수리가 끝난 상태였다.

모든 재료를 한곳에 모았다.

1백 현신의 신체 일부.

네 개의 보물.

하늘마루를 복원하기 위해 준비시킨 각종 희귀 금속과 암석, 흙과 모래까지.

잠시 심호흡을 했다.

파괴신을 상대할 때만큼 긴장이 되었다.

아르거스에 묶여 허송세월을 하느냐, 의도한 대로 마무리를 잘 맺느냐가 이번 일에 달려 있었다.

입을 벌렸다.

낮은 목소리로 신위 경쟁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 순간, 성역 전체가 찬란한 빛을 뿜었다.

< 승전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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