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타 >
하늘마루가 당한 것일까?
이미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파괴신의 거대한 입에 삼켜져,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파괴신이 입을 오물거렸다.
그 안쪽에는 무수히 많은 어금니가 있다.
별철도 씹어 먹고, 용암이 빚어낸 금강석도 가루로 만드는 어금니.
아무리 하늘마루의 방어막이 강하고, 세계수와 금속의 결합이 견고하다 해도 소용없었다. 파괴신의 입에 들어간 이상, 곧 가루가 되어 완전히 소멸할 터였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파괴신의 몸을 뚫고 흰색 광선이 솟구쳤다.
광선은 격자무늬 하늘을 뚫고 우주 저 편까지 날아갔다. 근처의 전장 하나가 거기 맞더니, 그대로 불길에 휩싸여 소멸했다.
[쿠에엑!]
갑작스러운 사태에 파괴신이 비명을 질렀다.
광선이 뚫은 구멍에서, 거대한 철퇴 같은 게 튀어나왔다.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무적의 빛이었다. 이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그 빛을 범접할 수가 없었다.
철퇴에 이어 방패까지 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철퇴와 방패가 양쪽으로 벌어지고, 머리와 몸통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마루.
파괴신에 삼켜지는 순간 화신을 사용한 것이다.
하늘마루의 하반신이 여전히 파괴신의 입에 물려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파괴신을 마구 공격했다. 철퇴로 때리고, 방패로 후려치고, 마법포가 불을 뿜었다.
이적도 거푸 사용했다. 충전한 마나를 모두 사용할 듯이, 화염 폭격이나 번개 폭풍, 광휘 일격을 마구 먹였다.
일견하기에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
하지만 시혁은 이 상황을 지속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화신의 지속시간이 고작 3분에 불과하니까.
지금 최대한 타격을 줘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아까 전 상황이 반복될 뿐이다.
대적자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이거 굉장하네요! 잘 하면 이길 수도 있겠습니다.”
“힘듭니다. 이거 지속 시간이 3분이에요. 곧 끝납니다. 방어막이 있어도, 파괴신의 공격 한 번을 견디기가 힘들어요.”
“이런, 그럼 어쩌지요?”
“지금 우리도 공격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늘마루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랬다간 당장 곤죽이 되어 살해당할 판이다.
안에서 해결을 해야겠지.
어떻게?
마나 방출을 응용하기로 했다.
대적자들이 하늘마루의 심장에다 대고 직접 허무의 힘을 사용한다. 그러면 시혁이 마나 방출의 기법을 응용하여 주포에 섞어 쏘아내려는 것이다.
위험한 일이다.
단번에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오히려 하늘마루의 심장만 박살날 가능성이 9할 이상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제한된 시간 속에서 시도해 볼 게 그것밖에 없는데.
무모했지만 대적자들은 시혁의 의견에 찬성했다.
재빨리 하늘마루의 심장 앞으로 이동했다.
기회는 단 한 번.
시혁은 몸을 이완시키며 숨을 가다듬었다.
대적자들이 신뢰하는 눈빛을 보냈다.
“박살을 내버리십시다!”
“죽여 버려요!”
처음에는 데면데면 했던 사이다.
과정이 어떻고, 사정이 어쨌든 시혁은 그들이 보기에는 라무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갑자기 지휘관이랍시고 나타난 것도 그렇고.
그나마 이미 신위 경쟁에서 승리한 것과, 마나 방출을 도입하여 허무의 힘을 구현하는 것에 성공한 덕에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오늘 파괴신과 싸우는 것이 결정타.
이 험난한 위기를 함께 겪으면서, 비로소 전우애가 쌓이기 시작했다.
시혁은 유령 여왕의 창을 들어올렸다.
“갑시다.”
화신이 종료되기까지 1분도 남지 않은 시점.
대적자들이 마음을 모았다.
1백 무기가 오묘한 빛을 뿌렸다.
그 빛이 하나로 합쳐졌다.
공기 방울 녹듯이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그러면서 은은한 존재감을 뿌리는 힘이 너울거리며 나타났다.
슬쩍 밀었다.
허무가 파도처럼 밀려갔다.
바로 앞.
불멸의 세계수가 감싼, 무한의 심장을 향해서.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시혁은 정신을 집중했다. 스스로의 의식을 확장하여 하늘마루와 직접 연결했다.
하늘마루는 시혁의 정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둘이 거의 합일되다시피 했다. 시혁은 본인이 하늘마루가 된 듯한 착각을 느끼며, 다른 곳이 아닌 심장에 초점을 맞췄다.
힘차게 박동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막대한 힘을 쉬지 않고 생산하고 있다.
그곳으로 어떤 힘이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희미한 존재만이 느껴진다.
허무의 힘.
반항하지 않았다.
하늘마루의 심장이 대응하려는 것을, 부드럽게 다독이며 막았다. 세계수를 활짝 열어젖히고, 허무의 힘이 심장까지 도달하게 유도했다.
모든 것이 소멸했다.
허무의 힘은 용서가 없었다. 닿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며, 심장까지 쾌속으로 전진해오고 있었다.
하늘마루의 몸을 움직였다.
하반신까지 완전히 꺼낸 후, 방패로 파괴신을 밀쳤다. 오른팔의 철퇴를 뒤로 당겨, 회심의 일격을 먹일 준비를 했다.
마침내 심장과 허무와 맞닿았다.
무한과 허무가 반응하려는 순간, 시혁은 마나 방출을 시도했다.
가장 기본적인 기법.
처음 아달에게 배웠던 그대로.
일직선으로 팔에 밀어 넣었다. 난맥처럼 얽힌 세계수의 가지를 따라 무한의 힘이 질주했다. 그 뒤를 허무의 힘이 따라갔다.
순식간이었다.
두 힘은 하늘마루의 철퇴에서 만났다.
침묵이 흘렀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두 힘이 만난 부위에서 작은 불꽃이 어릴 때, 하늘마루의 철퇴가 파괴신을 정통으로 직격했다.
섬광이 터졌다.
허무는 태초 이전의 힘.
무한은 이미 태어난 세계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힘.
그 둘이 반발하면서 뿜어내는 힘은 막대하기 그지없었다.
철퇴가 으스러졌다. 완전히 지워져 분자 단위까지 해체되었다. 힘껏 뻗은 팔도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하늘마루를 보호하던 방어막도 유리창처럼 덧없이 깨져 나갔다.
방패도 마찬가지. 두 다리도 그러했다. 심지어 세계수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곳곳이 갈라지고 불이 붙은 채, 불멸의 힘으로 겨우 스스로를 보호했다.
이 정도는 약과.
진짜는 파괴신이었다.
과거와 미래가 부딪치며 발생한 힘이 파괴신을 낱낱이 해체하고 있었다.
[키에엑!]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렸다.
정통으로 맞았던 부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지금도 강렬한 섬광이 존재 자체를 지우고 있었다. 벌써 절반은 소실된 듯했다.
파괴신이 촉수를 뻗었다.
의미 없다.
강한 힘이 어려 있었으나, 섬광에 비추는 즉시 눈 녹듯 스러졌다. 입을 벌려 공격을 하려 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오히려 내부가 타격을 입으며 손해만 보았다.
시혁은 급히 하늘마루를 후퇴시켰다.
가장 핵심인 심장과 세계수 부위만 남은 터라 재빠른 기동이 가능했다.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수 킬로미터 밖으로 벗어났다.
이때 화신이 끝났다.
끼기기긱!
하늘마루 전체가 삐걱대며 신음을 토했다.
상태가 아주 처참했다.
특히 심장이 그랬다. 폭주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허무의 힘이 지나가면서, 마법진을 상당히 훼손시킨 영향이 컸다.
얼른 세계수를 움직였다.
거기 깃든 불멸의 힘을 응용하는 한편, 하늘마루 전체에 복구 명령을 내렸다. 당장 마법진이 작동하고, 로봇 선원들이 뛰어다니며 복구를 시작했다.
대적자들을 보고 말했다.
“자, 이제 끝장을 봅시다!”
“가죠!”
“승리가 눈앞에 있어요!”
기세를 올리며 하늘마루 밖으로 날아갔다.
로봇 선원들도 합세했다.
마나 방출을 이용하여 함께 날아올랐다. 거리가 꽤 멀지만, 마법총을 써서 공격을 시작했다.
수천 개의 광선이 파괴신을 강타했다.
그때마다 폭음이 울리고 맹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파괴신은 무력하기만 했다. 촉수를 꿈틀거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피해가 너무 컸다.
거대한 몸의 절반 이상이 소멸되었다. 24개의 얼굴 중 남은 것은 6개밖에 없었다. 내부가 훤히 드러나, 괴상한 고깃덩이 같은 장기들이 죄다 보였다.
기세도 약해졌다. 처음 봤을 때는 당장에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존재감이 느껴졌으나, 이제는 현신들 수준 밖에 안 되었다.
대적자들도 공격을 개시했다.
허무의 힘을 연거푸 발사했다. 이렇다 할 기법도 쓰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공격만 계속해서 날렸다.
효과가 있었다.
파괴신의 몸이 들썩였다.
그나마 온전하던 부위가 차근차근 깎여나갔다. 파괴신이 아니라, 거대한 걸레짝을 보는 듯했다.
[크아아아!]
파괴신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무한과 허무가 빚어냈던 섬광은 사라진지 오래.
푸들거리며 촉수 하나를 뻗었다.
방심하지 않았다.
즉시 허무의 방패를 만들며 수직으로 낙하했다.
촉수가 폭발하듯 쏘아졌다.
여전히 그 힘은 무시무시했다. 로봇 선원들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저 멀리 하늘마루까지 직격했다. 세계수가 보호하는 부위를 뚫고, 그 안의 로봇 생산 시설을 찢어발겼다.
대적자들이 무기를 겨눴다.
허무의 검이 허공에서 생성되었다. 가볍게 휘둘러져, 촉수를 간단히 끊어냈다.
[키이이익!]
파괴신이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사실이 분노를 부채질했다.
격렬한 분노가, 파괴신의 몸을 변형시켰다.
모든 촉수를 거뒀다.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동시에 중력이 사라졌다.
바위와 나무, 흙이 제멋대로 부유했다. 파괴신의 악의에 의해, 괴상하게 변질되었다.
공허가 탄생했다.
시꺼먼 공허가 전장 전체에 넘실거렸다. 진득한 악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뭘 하려는 거지?
허무의 힘을 몇 차례 더 쏘아 보냈다. 그때마다 상당한 상처를 입었으나, 파괴신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공허가 몰려들었다.
파괴신은 그 공허를 흡수했다.
그러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걸레짝 같던 파괴신의 몸이 재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속도는 느렸다.
하지만 대적자들과 로봇 선원들이 공격하는 것보다는 빨랐다. 몇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전력을 회복할 듯했다.
대적자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런 미친!”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종자야?”
“이러다 완전히 회복하겠어!”
숨통을 끊어야 했다.
시혁은 하늘마루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그래도 주포 한두 번은 쏠 수 있겠다.
그걸로 될까?
고룡의 숨결을 뛰어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파괴신의 숨통을 끊어놓기는 어려웠다.
시혁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까처럼, 무한과 허무의 반발 작용을 이용하는 것.
괜찮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화신 상태도 아니다. 허무의 힘이 훑고 지나가면, 그냥 다 망가진다는 뜻이다.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하늘마루를 포기하기로.
속이 굉장히 쓰렸지만, 이 정도 희생 없이 파괴신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장의 재료와 세계수의 일부만 보존하면 된다. 그걸로 하늘마루를 재건할 수 있었다. 시혁이 얻은 신위까지 하여, 더 강화된 하늘마루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
대적자들을 데리고 하늘마루의 심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공격을 날리자고 하자, 대적자들이 걱정어린 눈빛을 보냈다.
“괜찮겠습니까? 조금 전과는 상황이 좀 다른데요.”
“괜찮습니다. 파괴신을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하늘마루를 폭주시켰다.
화신의 바탕이 되는 일곱 유물.
그 중 권세의 지팡이와 질서의 홀은 좀 전의 공격에 소멸되었다. 오로지 다섯만 남았다.
이것을 이용해 화신을 일으켰다.
콰직! 빠지직!
유물들이 박살나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렸다.
빛의 거인이 나타났다.
평소와 비교하여 고작 절반 크기.
그 정도면 충분했다.
허무의 힘이 발현되었다.
무한과 함께 허공을 질주했다.
하늘마루가 먼저 소멸했다. 허공을 떠 있던 거대한 성이, 모래성처럼 덧없이 무너져 내렸다.
대신 그 대가는 톡톡히 받아냈다.
최후의 일격이 재생하던 파괴신의 위로 쏟아졌다.
세상 만물이 말을 잊었다.
멸망하던 세계가 엄숙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작은 불꽃이 생겼다.
불꽃은 이내 찬연한 섬광이 되었다. 세상의 중심을 흔들고, 세계의 끝까지 뻗어나가며 닿는 모든 것을 지웠다.
파괴신이 그 빛에 휩싸였다.
천천히 지워졌다.
살 한 점, 피 한 방울, 호흡 한 숨과 발악하며 흔드는 한 동작까지도.
모든 것이 허무 속으로 돌아갔다.
< 난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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