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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43화 (243/250)

< 파괴신 -1- >

전장에는 오직 대적자들만 입장한다.

현신들은 따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르거스 행성을 유지시키던 게 24 고신이 뭉쳐 만들어진 파괴신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100 현신 밖에 없었다.

소환자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불가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100 대적자들끼리 알아서 해야 한다.

하다못해 전장에 미리 현신의 권속이나 권능을 숨겨두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힘이 부족해서, 아르거스 행성을 유지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것이다.

시혁은 한 가지 사실을 눈치 챘다.

‘여차하면 파괴신을 이계로 추방할 것 같은데?’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현신들이 처음부터 그 방법을 쓰진 않을 것 같았다. 대적자 군단이 지고, 파괴신이 아르거스 행성에 강림하려고 하면 극단적인 방법을 쓰겠지.

[시작하겠다.]

현신들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각자의 신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강렬한 빛이 솟구쳤다.

하늘에서, 바다에서, 땅에서, 혹은 이면 세계에서.

그 빛들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100가지 색의 광채.

구우우우웅.

행성 전체가 울부짖었다.

빛의 기둥이 혼란스럽게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방향을 틀어, 아직 복구되지 않은 땅덩이가 모인 곳을 향했다.

기존 아르거스 행성의 약 5%.

가장 처참하고 황량한 지형만 남아 있었다.

땅덩이들이 빛에 이끌렸다.

신위 경쟁 체계가 만든 법칙에 따라, 공중으로 부유하며 차원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공허도 건드렸다. 그 속으로 파고들어 마구 들쑤시자, 파괴신이 그것을 느끼고 천천히 부상했다.

땅덩이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덩달아 파괴신도 속도를 올렸다. 거뭇하게 보이는 공허의 바다를 벗어나, 저 우주 공간으로 접어들었다.

덕택에 그 기괴한 모습이 만천하에 노출되었다.

구 형태.

24개의 얼굴들이 곳곳에 자리 잡았다. 그 사이로 팔과 다리, 꼬리와 날개 같은 게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몸 전체에서 괴상한 파장이 토해져서, 어지간한 사람은 보는 즉시 미쳐 자살하고 말 터였다.

파괴신은 금세 땅덩이를 따라잡았다.

화산 지형.

용암이 드글드글 끓는 그곳을, 천천히 먹어치웠다.

24개의 얼굴이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용암을 마시고, 바위를 으깨먹고, 유황 연기를 들이마셨다. 음미하듯 화산을 다 먹은 다음에는, 전신에서 시꺼먼 공허 같은 것을 배출하기까지 했다.

대적자들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공허 속에서 괴이한 존재들이 태어났다. 파괴신을 닮아 얼굴도 많고 팔과 다리, 꼬리와 날개도 많았다. 날개가 없어도 나는 존재가 있고, 날개가 있어도 그저 허우적대는 존재도 있었다.

“혼돈, 그 자체로군.”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시혁도 공감했다.

파괴신은 몇 개의 땅덩이를 차례로 먹어치웠다. 그러고도 모자라다고 자기가 싸질렀던 공허와 권속들을 먹었다. 이번에는 공허 대신 순수한 마나가 탄생하며, 파괴신의 주변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였다.

시혁은 땅덩이 중 하나에 시선을 던졌다.

열사의 바람이 부는 사막.

그 아래에 거대한 구조물이 숨어 있었다.

하늘마루.

은폐 마법진을 가동한 까닭에 그 존재를 읽어내기는 힘들었다. 미리 장소를 지정해둔 시혁만 알았다.

시혁이 들어둔 보험.

최악의 경우, 하늘마루는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다.

조디악이 대적자들에게 말했다.

[곧 전장으로 이동할 것이오. 뭔가 필요한 것은 없소?]

이미 준비는 다 끝내 놓았다.

부하들을 데려가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하다못해 낫슈바켈과 싱트파헬만 데려가도 크게 도움이 될 텐데.

하늘마루와, 현신들이 숨겨 놓았다는 권속들을 믿어봐야겠지.

시혁은 대적자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보내주십시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좋소. 건투를 비오.]

조디악의 신전이 새하얀 빛을 뿜었다.

빛이 대적자들을 다른 세상으로 옮겼다.

이제 막 차원문 옆에 자리 잡은 세계.

눈을 떴다.

얼어붙은 세계가 보였다. 사방이 다 하얗고, 싸늘한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괴상한 광경이다.

설원 저편으로는 화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옆으로는 소용돌이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보였다. 저 하늘 위에는 큼지막한 바위들이 둥둥 떠다녔다.

시혁은 천사와 악마 대적자들을 불렀다.

“여러분들이 수고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파괴신의 위치를 파악해 주세요.”

“예, 다른 건 없습니까?”

“기왕이면 현신들의 성소도 찾아주시면 좋고요. 저희도 찾아보겠습니다만, 하늘에서 찾는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파괴신의 위치는 금방 알아냈다.

대적자들이 있는 곳에서 반대쪽 끝에 있었다.

수백 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진 세계.

지금은 늪지대 하나를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배가 제법 부른지 속도가 느렸지만, 몇 시간 내로 지역 하나가 완전히 박살날 듯했다.

천천히 진군했다.

정면 대결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다. 요 근래 호흡을 맞춘 마나 방출을 믿고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먼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가, 무지갯빛으로 물드는 것을 반복했다. 아까 신전에서 봤듯이 공허와 순수를 계속해서 토해내는 모양이다.

그만큼 파괴신의 존재감이 더욱 짙어졌다. 이제 보니 포식 행위 자체가 파괴신의 힘을 키우는 것 같았다.

“속도를 올리죠.”

다들 비행 마법을 사용했다.

가속 마법까지 걸고 날자, 수많은 지역이 쏜 살 같이 대적자들의 발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드디어 파괴신이 보였다.

바닷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물고기를 닮은 존재들이 태어나 깔깔대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크으으음.]

대적자들을 감지했나 보다.

파괴신이 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24개의 얼굴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리며, 톱니바퀴처럼 변형된 눈을 퉁방울처럼 굴렸다.

그러나 잠시 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땅과 바다를 물어뜯으며 파멸의 연회를 벌였다.

사정거리 안쪽까지 접근했다.

일렬로 쭉 늘어섰다.

지금 최대한 피해를 입혀놓아야 한다. 그래야 승리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저마다 무기를 들어올렸다.

연습한 대로 마나 방출의 기법 중 하나를 사용했다.

정확히 마음이 통했다.

1백 개의 무기가 색색의 빛을 뿜었다. 그 빛이 뭉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힘이 태어났다.

[크음?]

파괴신이 이쪽을 보았다.

일그러진 얼굴들이 마구 꾸물떡거렸다. 또렷한 놀라움과 탐욕, 적대감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힘이 대적자들의 무기를 떠났다.

화살처럼 날아갔다.

아니, 하늘로 솟구쳤다 싶은 순간 이미 목표를 직격하고 있었다. 색도 형태도 없이, 오로지 존재만 있는 힘이 파괴신을 제대로 덮쳤다.

[크우우우!]

파괴신이 비명을 질렀다.

그 흉악한 몸이 낱낱이 해체되었다.

얼굴이 박살났다.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손과 다리가 잘렸다.

살점이 빗물처럼 바다 위로 내렸다.

그 피와 살점에서 괴상망측한 존재들이 태어났다. 존재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스스로의 육체를 탐했다. 그러면서 더욱 비뚤어지고, 더욱 사악한 존재가 되었다.

효과가 있었다.

시혁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한 번 더!”

대적자들이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허무의 화살이 또 날아갔다. 파괴신은 으르렁대며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그 바람에 혼돈의 방어막이 형성되었으나, 허무의 화살은 방어막을 관통하고 파괴신의 몸에 꽂혔다.

또 피가 터지고, 괴이한 존재들이 태어났다.

파괴신이 이를 아드득 갈았다.

적잖이 기분이 상한 듯했다.

동시에 세계가 얼어붙었다. 몸이 마비되어, 의식은 멀쩡한데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파괴신이 입을 쩍 벌렸다.

입?

얼굴들에 달린 것이 아니다.

구 형태의 몸통이 벌어졌다. 위아래로 크게 틈을 만들고, 그 사이로 어금니 같은 흰 치아가 주르륵 나타났다.

이어지는 것은 외마디 탄성.

[꾸엑!]

돼지 울음소리 같다.

그러나 그로 인해 촉발된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파괴신과 대적자들 사이의 대지가 통째로 증발했다. 공기고 흙과 바위고 냇물, 생물들까지 다 거칠 것이 없었다.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그 힘이 대적자들까지 덮쳤다.

대적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놀랐다.

“피해!”

“막아!”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 앞에서, 최근의 수련은 의미가 없었다. 각자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다들 경험이라면 쌓을 대로 쌓은 인물들.

목숨은 건졌다.

대신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시혁도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어마어마한 격통이 뇌를 점령하여, 당장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대적자들에게 마법 전언을 보냈다.

[후퇴합니다. 집결지는 전장 중앙 설산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돌아오세요!]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빛들이 무수히 반짝였다.

그 위를 또다시 파괴신의 공격이 덮쳤다. 이번에는 폭탄처럼 터져서, 산이 아니라 지역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설산 위에서, 시혁은 피해 상황을 확인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전장을 이루는 지역은 그 넓이가 최소한 서울시 정도는 된다. 그런데 파괴신이 가볍게 하품하듯 날린 공격이 그 지역 전체를 폭파시킨 것이다. 지금은 그곳만 구멍이 뻥 뚫려서 저 아래의 아르거스 행성이 잘 보이게 되었다.

시혁의 옆으로 온 고블린 대적자가 툴툴대며 웃었다.

“미친…… 저런 놈을 우리끼리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자, 회복하고 다시 해봅시다. 저걸 봐요. 효과가 있었습니다. 파괴신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고 있어요.”

과연 그러했다.

파괴신의 몸 두 곳이 움푹 파여 있었다. 거기서 쉬지 않고 피와 살점이 흐르고, 괴상한 존재들이 비롯되어 앙앙앙 노래를 불렀다.

정비에 주력했다.

시혁은 돌아다니며 대적자들을 치료했다. 대부분의 대적자는 이쪽으로 바로 왔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어 그들도 챙겨주어야 했다.

그나마 죽은 이가 없어 다행이다. 한 명이라도 죽었다간, 시혁이 귀중한 환생을 소모했어야 할 것이다.

잠시 작전 회의를 했다.

“방금 전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맞아요. 파괴신의 공격이 엄청나요. 치고 빠지기로 나가야 해요.”

“공격 후, 피격 시점을 잘 잡아서 방어도 해야 합니다.”

“아예 전장 여기저기에 공간이동 마법진을 깔아놓는 건 어때요? 파괴신이 공격할 것 같으면 거기로 바로 이동하게요.”

괜찮은 의견이다.

다시 일전을 벌이기 전, 미리 공간이동 마법진을 설치했다. 아울러 함정 마법도 만들긴 했으나 아무래도 써먹기는 힘들 터였다.

정비를 마치고 날아올랐다.

아까 전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저공비행을 했다. 이번에는 파괴신이 그냥 공격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역시나였다.

대적자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길게 울음을 토하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꾸엑!]

가공할 만한 공격이 이어졌다.

무형의 힘이 세상을 훑었다. 산이 으깨지고 대지가 통째로 갈렸다. 하늘이 무너지면서, 세계가 박살나 우주 공간으로 폭포처럼 흩어졌다.

대적자들은 파괴신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혹시나 싶어 허무의 방패까지 동원했다. 파괴신의 공격은 그 위를 살짝 때리고 튕겨나갔다. 그러고도 저 정도 파괴력을 보였으니,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면으로 받으면 방패로 막더라도 그 후폭풍으로 내장이 다 터져나갈 지경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방금처럼 튕겨내는 것이다.

신중하게, 그러나 빠르게 파괴신을 향해 날아갔다.

공격이 연속적으로 날아왔다.

다행히 모조리 피했다. 약간의 충격은 누적되었으나, 이 정도는 버틸 만 했다.

드디어 반격을 시작했다.

< 파괴신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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