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241화 (241/250)

< 정상 회의 >

조금 아쉽긴 했다.

어쨌든 신위 경쟁에서 승리한 상태.

섣부르게 지구와 아르거스의 연결을 끊자고 한 게 아닐까?

일단 공허 속의 파괴신을 쓰러뜨리면 시혁이 갖게 되는 권능은 무시무시할 텐데.

한편으로는 그냥 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현신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녹스가 그 조각을 소환했던 이계의 파괴신이 있으니까.

최지혜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신위 경쟁에서 승리했다고?”

“응. 등극은 유예를 얻었어. 사실 내가 지금 신좌에 등극해 버리면 현신들도 곤란할 거야.”

“난감하게 됐네. 지구와 아르거스의 연결을 끊는 것도 힘들어졌잖아?”

“그래서 고민이야.”

차원문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그러면 시혁은 좋겠지만, 지구의 상황은 계속 악화될 테니까.

최지혜가 의견을 냈다.

“어차피 아르거스 입장에서도 차원문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어졌잖아? 아예 다 없애버리면 어때?”

“그럼 내가 지구로 돌아올 수 없게 되니까 문제지. 차라리 일이 다 끝나면 신위를 버릴까 생각 중인데, 그러기에는 좀 아쉬워서.”

“하긴 고생해서 겨우 얻은 건데 버리기는 아깝지. 어떻게 지구로 가져올 수 없어? 가령 하늘마루에 이식하면 어때?”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물론 그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죽음 왕좌가 그랬듯, 새로운 신이 탄생해서 시혁을 밀어낼 테니까.

응용하면 되겠지.

하늘마루 자체를 시혁의 신좌로 삼는다거나……

시혁은 싱긋 웃었다.

“고맙다. 네 말대로 한 번 해봐야겠어.”

“조심해라. 나처럼 되지 말고.”

최지혜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시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최지혜는 본인의 강철 신체를 인간에 가깝게 개조했다. 지금은 거의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성행위와 임신도 가능하다고 했다.

이렇게 해야 마법을 익히기 더 좋다나 뭐라나. 두 번째 몸처럼 특수하게 만든 게 아니라면, 인간과 비슷한 게 더 좋다는 것이다.

“수련은 잘 돼 가?”

“그럭저럭. 생각보다 진전이 느린 편이다. 상반되는 마법을 동시에 익혀서 그런 것 같다.”

최지혜는 최근에 마법 수련을 시작했다.

빛과 어둠, 사령과 생명 마법을 동시에.

시혁이 잘 쓰는 무한과 불멸을 재현하려는 의도였다. 둘 중 하나만 깨쳐도 신이 될 테니까.

최지혜가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검은 차량이 도로를 지나 인근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

의전 차량인가 보다.

외국의 국기가 차량 앞뒤에서 펄럭였다. 교통이 통제되고 있지만, 시민들의 출입까지 통제되진 않았다. 인도를 걷던 시민들이 차량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가 하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최지혜가 그걸 보고 한 마디를 했다.

“이 세계는 일을 참 번거롭게 하는구나.”

정상 회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시혁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하게 말했다.

“아일리케라고 달랐을까? 만신전이라는 게 있다며. 거기서 결정이 됐겠지. 지구는 마나가 없어서 신이 존재하지 않으니, 각 국가의 원수들이 회의를 하는 거야.”

“흠, 듣고 보니 납득이 간다. 그런데 낫슈바켈이나 싱트파헬도 지구에 오는 거냐?”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하늘마루를 통째로 옮겨올 생각이야. 다른 주민들은 아르거스에 남겠다고 하던데, 희한하게 용들은 모두 아르거스를 떠나고 싶어 하더라.”

“내가 만났던 용들도 그랬지. 아르거스가 제대로 복구될 거라고 보는 용들이 없었다. 능력이 부족해서 실제로 아르거스를 떠난 용은 없었지만.”

여태 검은 천체 파괴의 결론이 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연결을 끊는 것도 논란거리인데, 지구에 나타났던 그 어떤 괴수보다 강한 존재가 딸려오는 셈이니까.

그렇다고 낫슈바켈 없이 차원 이동을 하는 건 힘들었다. 차원 이동을 하면서 차원문을 소멸시킬 거라서 더더욱 그랬다.

최지혜가 짖궂은 표정을 지었다.

“낫슈바켈이나 싱트파헬보다, 네 하늘마루가 진짜 문제 아니냐? 솔직히 둘이 같이 덤벼도 하늘마루는 못 이길 텐데, 겁 많은 인간들이 가만 보고만 있을까?”

“가만히 보고 있지 않으면?”

“개인이 갖기에는 너무 큰 힘이니 어쩌니 하면서 빼앗아 가려고 하겠지.”

시혁은 코웃음을 쳤다.

“누구 마음대로? 지킬 힘이 없다면 모를까, 하늘마루는 내 최대의 역작이야. 누구에게도 뺏길 생각이 없어.”

예전의 천왕봉 수정과는 상황이 다르다.

하늘마루는 오롯이 시혁만의 것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시혁의 땀과 고민이 들어갔다. 만약 부당하게 빼앗으려 한다면, 전쟁이라도 일으킬 심산이었다.

최지혜는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그거 아느냐? 네가 이기면 너는 제왕이 된다. 수백 개로 갈라진 지구를 통합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넌 이미 신이 되지 않았느냐?”

“그런 거 관심 없어. 황제가 돼서 뭐하게? 일만 늘어나지.”

“세계가 널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권력자, 대중, 지식인 할 것 없이 널 물어뜯겠지. 어디 그뿐일까? 널 추종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거다. 집단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는 법. 널 추앙하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

에 올려놓으려고 갖은 수를 다 쓰겠지.”

“신경 안 써. 난 하늘마루가 도착하면 병원으로 개조할 거야. 이동이 가능하니까,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봉사 활동이나 해야지.”

최지혜가 입을 쩍 벌렸다.

“농담이겠지? 기껏 신이 되고, 하늘마루와 두 마리 용을 데려오면서 고작 한다는 게 의료 봉사냐?”

“그럼 세계 정복이나 할까? 별로 그럴 생각이 없어. 난 환자들 치료할 때가 가장 좋아. 분신을 만든 것도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려고 만든 거야. 돈도 많이 벌었고, 이름도 꽤나 날렸으니까 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

휴, 아르거스까지 하면 벌써 백 년을 넘게 치열하게 살았잖아. 이젠 좀 쉬고 싶다.”

아르거스에 가기 시작한 게 벌써 3년 전.

전장을 거의 매일 같이 갔으니, 그 시간을 다 합치면 벌써 100년이 넘었다.

그래서였을까.

시혁은 부쩍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그저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쉬고 싶었다.

시혁의 경우에는 그게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

세계의 명소를 돌아다니는 것도 좋겠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고.

벌써부터 은퇴를 언급하는 시혁의 말에, 최지혜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패기 없기는. 하긴 나도 원수들을 다 죽이고 나니까 만사가 귀찮아지긴 했지. 제국 정복까진 가능했지만 포기하고 틀어박혀서 불멸의 연구에 매달렸어.”

“넌 어떻게 할래? 설악산 기지가 마음에 들면 계속 여기 있게 해줄게.”

“됐다. 널 따라가마. 무한과 불멸을 연구하는 것도 그게 낫겠지. 하늘마루에는 참고할 것도 있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

시혁도 바라던 바.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정상 회의는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렸다.

당연히 시혁과 최지혜도 이곳에 와 있었다. 다른 이능력자들도 코엑스에 들어와 사방을 경계했다.

무슨 일이 발생할 확률은 낮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G급 이능력자는 무려 8명.

중국은 물론 미국도 젖혔다. 지구의 모든 나라 중 가장 많은데, 이들이 모두 코엑스에 투입되었다.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으니, 뭘 하기도 어려웠다.

시혁이 각종 마법진을 설치한 다음이니 더더욱 그렇다.

이윽고 각국 정상들이 회의장으로 입장했다.

사전에 보고서를 올렸지만, 혹시 시혁을 부를 지도 몰랐다. 시혁은 회의장 근처에서 대기했다.

TV를 틀어보니 정상 회의 건으로 시끌시끌했다.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이능 물품을 생산하여 이익을 내는 회사들이 그랬다. 자기들의 생계가 달려 있으니, 죽일 듯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코엑스 바깥에서도 그랬다.

“정부는 생존권을 보장하라!”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에테르 산업 키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버리는 거냐!”

시위대가 외치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목소리는 크지만, 안타깝게도 대세는 아르거스와 연결을 끊는 거였다.

미국에서도 로비가 엄청나게 이뤄졌지만,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모든 매체가 검은 천체 파괴를 주장하고, 시민들도 그러했다. 오늘 있을 정상회의에서도 검은 천체 파괴 쪽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라가 창문을 닫았다.

“그거 아세요? 며칠 전부터 중국 주식들이 폭등하고 있대요.”

“중국 주식들이요? 왜요?”

“예전에 이능력자 대회에서 보여준 무한의 보주 때문에요. 검은 천체가 소멸하면 마나를 공급할 방법이 제한되잖아요. 지구에서 직접 생산해야 되니까 그러는 것 같아요.”

미국에서도 조만간 비슷한 물건을 발표한다고 했었지.

시혁도 오색 수정을 대량으로 찍어내던지 해야 할 모양이다. 얼마 전에 구한 오행 수정이 있으니, 이걸 활용하면 얼마든지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예측한 대로 일이 흘러갔다.

정상회의에서 검은 천체 파괴를 결의했다.

단, 낫슈바켈이나 그 외 딸려오는 아르거스 존재들에 대한 사실은 숨기기로 했다.

그 파급 효과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낫슈바켈이든 싱트파헬이든 본체를 드러내는 것은 금지되었다. 인간 형태로만 살아야 했고, 본체로 돌아가려면 비밀 유지가 되는 곳에서 해야 했다.

납득할 만한 결과다.

하늘마루에 대해서는 미리 얘기하진 않았다. 말하는 즉시, 어떻게든 빼앗으려고 머리를 굴릴 게 뻔했으니까.

미리 운만 떼어 두었다.

차원 이동을 하려면 그걸 시행할 시설이 필요하고, 그 시설이 지구로 함께 차원 이동해 올 수 있다고.

정상들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규모가 꽤 클 거라는 점은 눈치 챘지만,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으니까.

곧 일정이 잡혔다.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구에서도 대응 시설을 설치하기로 했으니까. 그러면 더 확실하게 차원 이동이 되고, 검은 천체도 깨부술 수 있었다.

장소는 동해 한 가운데로 정했다.

독도에서 가까운 곳.

규모가 클 필요도 없었다. 작은 어선을 매입해서 개조해도 충분했다. 마법진에 힘을 공급할 오색 수정 정도는 박아야 하니, 미리 설치해 놓기는 힘들겠지만.

정상회의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시위대가 더 극성을 부렸지만, 사회 각계각층에서 환영하는 발언이 쏟아졌다.

괴수 없는 세상.

더 이상 괴수 질병이나 괴수가 일으키는 재해에 의해 고통 받지 않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바라던 거니까.

각국 정상들이 하나둘 대한민국을 떠났다.

내내 긴장해 있던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이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라가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작년에는 이능력자 대회, 올해는 정상 회의. 일이 좀 많네요.”

“그만큼 우리나라 위상이 올라갔다는 의미죠.”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영국에서 G급 이능력자가 각성했다면서요?”

“예. 유럽 쪽이 문젭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이렇게 네 곳에서 각성을 앞두고 있어요.”

희한하게 G급 이능력자의 각성은 한꺼번에 몰려올 때가 많았다. 지난번에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이 1달 동안 5명이 각성하고 좀 뜸하더니, 이번에 또 몰린 것이다.

덕분에 제네바에 가 있는 분신을 쓸 때가 많았다. 자질구레한 일은 인공지능이 알아서 처리하지만, 중요한 일까지 다 맡겨 놓을 수는 없지 않겠나.

이러는 사이, 아르거스에서는 새로운 신들이 탄생했다.

강철 거상, 영혼 궁전, 흡혈 신왕……

이제 딱 세 진영 남았다.

아니, 시혁을 빼면 두 진영.

바다와 파괴.

각각 다섯이 넘는 반신이 최후의 시련을 수행 중이라고 했다. 조만간 신위 경쟁이 끝날 테고, 그럼 시혁의 등극을 더 미루기 힘들어진다.

촉박한 시간 속에서, 현신들은 시혁의 제안을 수락했다.

유령 여왕의 창을 꼬나 쥔 채, 시혁은 당당하게 현신들과 대적자 앞에 우뚝 섰다.

< 정상 회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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