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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40화 (240/250)

< 파멸 >

이어 당황한 어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이거? 왜 말이 나와?”

“어어? 누구야? 누가 말하는 거야?”

참 괴상한 광경이었다.

싱트파헬이 남자 목소리를 냈다가 자기 목소리를 냈다가 반복을 했다.

시혁은 가벼운 조소를 날렸다.

[녹스, 육체의 감옥에 갇힌 소감이 어떠냐?]

“육체의 감옥이라고? 이런!”

녹스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한 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혁은 싱트파헬에게 사과를 했다.

[싱트파헬, 미안하다.]

“어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녹스를 잡기 위해 네 육체에 마법 함정을 장치했다. 그 함정이 작동하는 한, 녹스는 네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해. 육체를 차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뭐야, 좋은 거잖아? 왜 사과하는데?”

[결과적으로 네게 좋은 일이긴 해도, 난 널 이용한 셈이니까.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괜찮아, 괜찮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이 녀석을 그냥 데리고 있어야만 돼?”

싱트파헬이 살기 어린 눈빛을 번쩍였다.

평소 공언하던 대로 녹스를 아작 내겠다는 태도.

시혁도 칼날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영혼 계열의 고문 마법은 다 통해. 뒷일은 내가 다 처리해줄 테니까 마음껏 즐겨.]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좋아, 성역으로 돌아가자. 얼른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싶어.”

“아, 안 돼!”

새된 비명소리가 터졌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새 옆으로 온 휴고가 히죽 이를 드러냈다.

[용 아가씨 성격이 마음에 드는군. 아무렴, 당한 게 있으면 갚아줘야지. 아주 박살을 내버려!]

조디악이 인상 깊다는 듯 말했다.

[설마하니 녹스를 완전히 제압한 거냐?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어둠 대종사는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만.]

[글쎄요?]

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 밑천을 공개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또, 시혁의 함정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비장의 함정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은 녹스가 싱트파헬의 육체를 벗어날 때 발동한다.

그때야말로 진정한 절망을 맛보겠지.

시혁은 싱트파헬에게서 유령 여왕의 창을 받아들었다. 그것을 조디악에게 내밀었다.

이제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라무를 검증하면 돌려주기로 했었고.

조디악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감하군. 기껏 모은 대적자 군단에 결원이 생기다니. 빨리 채워야 하는데……]

조디악이 문득 시혁을 보았다.

설마?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나 짐작한 상황이 벌어졌다.

조디악이 힘을 꾹꾹 줘서 말했다.

[자네가 책임을 져야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이긴? 대적자 군단에 들어오라는 얘기지. 자네 때문에 근 수백 년을 기다려서 완성한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어. 자네가 책임을 지게. 대적자 군단에 들어와서, 파괴신 처단에 힘을 보태도록 해.]

시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대적자가 되는 게 이익인가, 안 되는 게 이익인가?

당연히 거절하는 게 좋다.

녹스를 싱트파헬의 육체에 가둔 이상, 아르거스에서 볼 일은 다 봤으니까.

다만 현신들이 물귀신 작전으로 나오면 곤란했다. 셋만 몰려와도 하늘마루가 박살이 날 테니까. 그럼 차원 이동도 물 건너간다.

일단 반박을 했다.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저 때문이라고요? 오히려 제가 아니었으면 여러분은 녹스에게 당해 낭패를 당했을 겁니다.]

[그러나 네가 우리의 대적자를 죽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말은 똑바로 하시지요. 제가 죽인 게 아니라 녹스가 죽인 겁니다. 그리고 녹스에게 속아 대적자로 받아들인 것은 바로 그쪽이고요. 어디 본인의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웁니까?]

[으흠!]

면박을 당한 조디악이 얼굴을 붉혔다.

화가 났는지 조용히 뇌까렸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응징을 가할 수도 있다.]

[해보시죠. 최소한 셋은 움직여야 할 겁니다. 저도 그냥 당하고 있을 줄 압니까? 녹스의 영혼을 뽑아다가, 암흑 황제에게 주입하겠습니다.]

[뭐?]

조디악이 동요를 일으켰다.

지금 시혁은 되는 대로 말한 게 아니다.

새롭게 탄생한 신들은 아르거스 행성에 강하게 결박되어 있다. 그 근간을 이루는 게 녹스의 공허 변환 마법이었다. 힘의 변환이 너무나 강력하여, 의지를 잃은 채 봉인되는 것이다.

하지만 녹스 본인이라면 다르다. 그 공허의 힘을 발판삼아, 더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도 가능했다.

대신 심각한 변형이 이뤄지겠지. 24 고신이 그러한 것처럼.

그리 되면 끝장이다.

휴고가 조디악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멍청이! 지혜의 신이니 어쩌니 뻐길 때는 언제고, 뭘 되도 않는 자존심을 부리고 있어?]

그러더니 시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색 현왕, 그대에게 못 볼 꼴을 보였구나.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의 다급한 상황도 고려를 해줬으면 한다.]

뭐가 다급하다는 거지?

시혁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아르거스 행성은 이제 겨우 6할이 복구되었다. 아직도 4할, 즉 여섯 개의 신좌가 남아 있다.

새로운 신이 여섯은 더 탄생해야 파괴신이 나타날 터.

그 정도쯤이야 현신들이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려운 시련을 부여하든지 해서.

이런 의문을 표하자, 휴고가 씁쓸하게 웃었다.

[신위 경쟁 체계는 그렇게 쉽게 조작할 수가 없다. 24 고신이 만들어서, 우리가 손을 댈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

[1백 대적자가 채워진 이상 새로운 대적자가 선정되지는 않는다. 다시 작동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해. 그럴 시간이 없다. 이미 새로운 시련이 최종 확장을 한 반신들에게 부여되고 있어. 곧 새로운 신이 탄생할 테고, 공허 속의

파괴신이 표면으로 부상할 거다.]

이거 곤란하다.

시혁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구로 가기도, 남아서 파괴신과 싸우는 것도 난감했다.

조디악이 시혁을 보며 말했다.

[이건 비단 우리 일만이 아니다. 네게도 해당되는 문제다.]

[저와는 관계없는 일 같습니다만.]

[네게 떨어진 최후의 시련이 라무의 영혼을 지우고, 녹스의 영혼을 꺼내는 것 아니었느냐? 그게 충족되었다. 방금 전 새로운 권세 진영의 신이 탄생했는데, 내 생각에는 그게 너인 것 같다.]

이게 무슨 소리냐?

시혁은 분신에서 의식을 옮겨 성지를 살폈다.

성지 전체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확장할 때마다 보이던 광경.

아울러 최지혜에게 들었던 소리와 같았다.

여기서 시혁이 의지만 발하면 된다. 성지에 앉아 본인의 승리와 신위 경쟁 종료를 선언하면, 어마어마한 힘이 발생하며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시혁은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신이 되는 즉시 아르거스에 못 박히는 신세가 된다.

분신으로 돌아와 죽을상을 짓자, 낫슈바켈이 시혁을 위로했다.

“상황이 이상하다만, 신위 경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한다.”

[후우, 고맙습니다.]

“그럼 지구로 안 가고 신이 되는 거야? 우와, 멋지다!”

싱트파헬은 사정 모르고 기뻐했다.

곧 그 입에서 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이거 걸작이군! 백색 현왕이 신이 된다? 백색 현왕, 이걸 어쩌나? 넌 이제 아르거스를 벗어날 수 없어! 지구로 돌아간다고? 신위는 주인을 쫓아온다. 차원문을 부숴봐야 헛것이야. 수년 후, 결국 다시 뚫리게 되어

있어!”

“얌마, 조용히 안 해?”

싱트파헬이 혼자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뭘 했는지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그러면서 싱트파헬이 웃는 소리가 어우러져, 참 기괴한 장면을 연출했다.

휴고가 시혁을 설득했다.

[일이 이상하게 됐다만 이렇게 된 이상 너와 우리는 한 배를 탄 것과 같다. 네가 신위에 등극하는 것을 최대한 미뤄보겠다. 대신 대적자가 되어라. 그들의 지휘관이 되어서, 우리 아르거스 행성을 구해 다오. 그 다음 신위에

등극한다면, 신으로서의 권리와 권능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으음……]

나쁜 소리는 아니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이야……

뭐 좋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떠나기는 좀 찝찝하던 참이었다.

애초에 시혁은 신들에게 일격을 먹여주려 했다. 그들이 이미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접긴 했지만.

소환자들과 아르거스의 주민들만 불쌍했다.

그들을 돕고, 신들을 박살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더불어 현신들에게도 단죄의 철퇴를 내려야겠지. 아무리 아르거스를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이들이 주축이 되어 소환자들을 세뇌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이용해 먹었으니까.

[좋습니다.]

시원하게 승낙했다.

[단,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냐?]

대적자들의 지휘권, 신위 등극을 미루는 것, 여러 신화적인 보물, 천상도의 대대적인 지원, 그리고……

현신들의 지휘권까지.

조디악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현신들까지?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다들 자존심이 강해서 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어째서입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 너는 필멸자다. 당장 나 같아도 네게 지휘를 받느니, 차라리 나 혼자 돌격하고 말겠다.]

휴고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혁은 손을 슬쩍 흔들었다.

[전 이미 신위 경쟁에 승리했습니다. 제가 필멸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최소한 여러분과 같은 격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

두 현신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새롭게 탄생하는 신은 현신들보다 그 격이 높다고 봐야 한다.

지닌 바 힘도 그렇고, 신이 되면서 쌓은 경험도 그렇다.

대번에 둘의 기세가 꺾였다.

[그렇구려. 그 생각을 못했소.]

[우리는 전투를 얼마 겪어보지 못했으니 응당 그대의 지휘를 받아야겠지.]

[현신 회의에서 토론을 해봐야겠소만, 반대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오.]

조디악과 휴고는 곧 납득을 하고 진리 영탑을 떠났다.

마법도의 마법사들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방어막이 탄탄해서 진리 영탑이 크게 피해를 보진 않은 듯했다.

몰려왔던 대적자들은 한쪽에서 눈만 끔뻑였다.

두 현신이 떠난 뒤에야, 무기를 거두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중 우락부락하게 생긴 오크가 질문을 했다.

“이봐,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라무가 도움을 요청해서 구하러 오긴 했는데, 막상 와보니 사태가 이상하다 싶었던 것이다.

시혁은 간략히 설명을 해주었다.

오크가 뜨악한 얼굴을 했다.

“라무가 실은 어둠 대종사였다고? 그 자식, 엄청 나쁜 놈이라던데?”

[그렇게 됐습니다. 조만간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릴 날이 올 겁니다.]

“백색 현왕이라…… 몇 번 들어본 이름이야. 신위 경쟁에서 아예 승리했다고? 그럼 지휘를 못 받을 것도 없지.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시혁도 성역으로 돌아왔다.

낫슈바켈이 걱정을 했다.

“정말 파괴신과 싸울 거냐? 난 승산이 없다고 본다만.”

시혁은 유령 여왕의 창을 쓰다듬었다.

조디악에게 건네주려 했지만, 어차피 시혁이 쓰게 될 거 하루라도 빨리 익숙해지라고 남겨둔 거였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왜?”

“대적자의 무구에는 현신들의 신성이 담겨 있거든요.”

라크라가 그랬지 않나.

또 있다.

“그리고 이 대적자라는 거, 제가 생각하기에 녹스가 미리 만들어둔 것 같습니다.”

“녹스가?”

“예. 제가 볼 때, 대적자들을 동원해 파괴신을 공격하고, 거기서 나온 힘으로 유일신이나 그에 준하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지 싶습니다.”

“으음, 일리가 있다.”

[녹스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듣고 있던 베리타스도 한 마디를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싱트파헬이 잘 안 보인다.

지금도 자기 둥지에 박혀 있는 모양. 아마도 영혼 고문 마법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분신을 하나 싱트파헬의 둥지에 보냈다.

별 이상은 없었다.

싱트파헬은 신나게 녹스를 괴롭히고 있었다. 녹스의 영혼은 이미 처참하게 난자당해서, 재기가 불가능할 듯했다.

[쉬엄쉬엄 해. 빈틈은 절대로 보여주지 말고. 알았지?]

[응, 걱정 마.]

싱트파헬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좋다.

시혁은 뒷일을 기대하며 물러나왔다.

지구로 돌아왔다.

서울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오늘부터 열리는 세계 정상 회의 때문이었다.

< 파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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