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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39화 (239/250)

< 세 가지 함정 -2- >

어마어마한 힘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정신을 놓다시피 했던 현신들이 싸움을 멈추고 돌아볼 지경이었다. 대적자들도 경계하며 방어 준비를 했다.

“으아아아!”

녹스가 목 놓아 비명을 질렀다.

육체가 마비되고, 영혼이 제 자리에서 벗어났다.

검은 그림자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육체와 영혼, 그 사이에는 아주 가느다란 실만 한 가닥 연결되어 있었다. 워낙 가늘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하나 더.

시혁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존재가 나타났다.

아주 흐린 회색의 그림자.

군데군데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워낙 옅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사라진 녹스의 육체에 어린 채 해초처럼 너울거렸다.

시혁은 금방 회색 그림자의 정체를 간파했다.

라무의 영혼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거리지만, 분명히 아직까지는 남아 있었다.

즉석에서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한 가지 이적을 사용했다.

분신을 통해 쓰는 거라 이적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했으나, 라무의 영혼으로 제대로 들어갔다.

영령 이적.

영혼 치료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이적이다.

황금색 빛이 만신창이가 된 영혼을 감쌌다. 뚫린 구멍이 천천히 메워지고, 영혼의 색 자체가 짙어졌다.

육체에서 벗어난 녹스가 대경실색했다.

[무, 무슨 짓이냐!]

제대로 먹혔다.

녹스가 몸부림을 쳤지만 단시간에 육체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수십 개의 마나 심장이 발하는 힘을 베리타스가 직접 제어하고 있으니까.

마법 수준이 높으면 역으로 마법진을 지배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마법진을 제어하는 것은 베리타스다. 아무리 녹스가 대단해도 베리타스를 상대로 역지배를 걸 수는 없었다.

현신들도 아예 싸우던 것을 중지했다.

메를르가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영혼이 두 개가 있을 수 있지?]

[인공 영혼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더니 정말인가 보군. 새로 나타난 영혼을 봐. 여러모로 부족해.]

[어둠 대종사 녹스…… 너무 위험한 인물이다. 네놈들은 저걸 보고도 녹스의 편을 들 셈이냐?]

휴고가 비탄에 차 울부짖었다.

메를르는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치마를 나부끼며 날아들었다. 휴고도 울음을 터뜨리며 반격을 했다.

반면 조디악은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지금까지는 메를르 측에서 휴고를 공격했으나,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시혁은 꾸준히 영령 이적을 퍼부었다.

심장의 힘이 바닥나도록 이적을 쓰자, 라무의 영혼이 상당 부분 복구되었다.

[으으으……]

옅은 신음이 들렸다.

성대가 아닌 영혼으로 내는 소리.

라무가 의식을 차리고 있었다.

시혁은 조용히 라무의 이름을 불렀다.

[라무, 들리나?]

[으으으…… 누구……]

[나다. 백색 현왕.]

다행히 라무는 금방 시혁을 인지했다.

현 상황은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아프다고, 고통스럽다는 말만 반복했다.

시혁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정신 차려, 라무! 이대로 영혼까지 소멸될 셈이냐?]

[으으…… 그게 무슨……]

[녹스가 부활했다. 네 영혼을 소멸시키고, 거기서 비롯되는 힘으로 단번에 경지에 오르려고 한다. 지금은 내가 녹스의 영혼을 네 몸 밖으로 꺼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조만간 네 몸으로 되돌아 올 거야. 그러면 끝

이다. 어서 영혼 보호 마법을 써!]

[으으윽!]

시혁의 다급한 말에 라무가 안간힘을 썼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주저앉으면, 자신의 영혼 자체가 소멸되어 완전히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럴 수는 없었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악바리처럼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겨우 한 가닥 마나를 끌어 모았다.

시혁에게서 흘러드는 영령 이적의 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힘을 뿌리 삼아, 간신히 마법을 완성했다.

탁한 회색 빛이 라무의 머리 주변에서 일렁였다.

녹스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이놈! 이 멍청한 노예 놈! 감히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라무가 몸을 움찔했다.

[녹스?]

곧 이를 갈아붙였다.

[이 개 같은 새끼! 날 속여서 이 꼴로 만들어?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너한테 제대로 엿을 먹여주고 말겠다!]

실낱과도 같은 힘을 집중했다.

영혼 보호 계열의 마법을 연속해서 썼다.

녹스의 영혼에 달린 줄이 더욱 얇아졌다. 머리카락보다 가늘어져서, 육안으로는 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멍청한 놈! 넌 내 영혼의 복제에 불과해! 네 영혼을 봐라! 심연의 힘이 네 영혼의 반절을 차지하고 있어! 그 힘이 어디서 비롯된 것 같으냐? 바로 내게서 비롯되었다. 나와 연결이 끊어지면, 네놈은 그 즉시 소멸하고 말아!]

[그래서? 어차피 네놈은 날 자양분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잖느냐! 네게 죽느니, 차라리 내가 죽음을 택하겠다!]

라무가 길게 주문을 외웠다.

영혼 추방 마법.

녹스가 마구 몸부림을 쳤다.

저게 완성되면 아주 약하게 이어진 선마저 끊어진다. 과거에 대종사였든 뭐든, 그저 한낱 귀신이 되는 것이다.

급기야 메를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령 여왕! 맹약에 따라 나를 도와라! 어서!]

메를르가 녹스를 힐끔 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휴고가 당장 방해를 했지만, 한 줄기의 유령 화살이 새어나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시혁이 방해했다.

로봇 선원 중 하나를 조작했다. 힘을 공급하는 것을 멈추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유령 화살이 녹스를 직격하기 직전, 그 앞을 정확히 틀어막았다.

이미 영혼 속성의 방어막을 두른 상태.

자연히 유령 화살이 덧없이 소멸되었다.

녹스가 이를 갈았다.

[이, 이놈!]

거의 동시에, 라무가 영혼 추방 마법을 완성했다.

잠시 망설였다.

이 마법을 사용하면 자신의 영혼도 소멸된다는 사실이 라무의 발목을 붙잡았다.

녹스는 귀신 같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즉각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다.

[라무. 현실을 직시해라. 네 영혼은 불완전해. 결국 나를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 날 추방해봤자 내 손해는 별로 없어. 육체야 새로 구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넌? 평생 고생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덧없이 소멸할 셈이

냐?]

라무의 손이 벌벌 떨렸다.

죽는 것도 모자라 영혼이 소멸된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녹스는 그 점을 파고들었다.

[좋다,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마. 마법을 취소해라. 그러면 네 영혼을 새로운 몸에 옮겨주겠다.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조치도 취해주지. 그 다음에는 새로운 인생을 살든, 내 종복이 되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런 게 가능하다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가능하긴 했다.

대신 그 새로운 몸이라는 게 인간의 육체는 아닐 것이다. 라무의 영혼은 이미 누더기가 되었으니까. 지성 종족의 육체와 결합했다간 치명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라무가 몸을 벌벌 떨었다.

[그게 정말이냐?]

[정말이고말고! 너는 나와 영혼이 연결되어 있으니 잘 알 텐데? 내가 지금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라무는 한참 동안 갈등했다.

이미 넘어간 듯했다.

시혁은 차분히 세 번째 함정을 준비했다.

[좋다.]

결국 라무가 동의를 표했다.

스스로 마법을 철회했다.

녹스가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야지! 약속은 지키마. 잠시 자고 있어라. 네가 일어났을 때는 모든 일이 다 끝난 후일 것이다.]

시혁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베리타스에게 의념을 전달했다.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힘들게 잡은 승기이니 끝까지 밀어붙여야 했다.

녹스가 라무의 몸으로 복귀하기 전, 마법진을 폭주시켰다.

어마어마한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흥, 그 정도쯤!]

녹스가 몸을 움직였다.

아직 복귀하지는 못했으나, 영혼 연결을 통해 라무를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다. 비록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입으로는 주문을 읊고 손으로는 수인을 맺었다.

그러느라 연결된 부위가 도드라지며 드러났다. 검은 실이, 둘의 결속을 증명하듯 조금씩 두툼해지고 있었다.

시혁은 싱트파헬에게 마법 전언을 보냈다.

[싱트파헬.]

[왜?]

[저거, 잘라 버려.]

[뭐라고?]

[실 같은 거 보이잖아. 그거 잘라 버려. 그러면 녹스는 라무의 영혼과 괴리되고, 보잘 것 없는 유령이 돼.]

[내 마법 중에는 그럴 만한 게 없는데……]

[창을 써.]

[창?]

[그래. 녹스가 들고 있는 거.]

유령 여왕의 창.

그거라면 충분히 영혼의 실을 자를 수 있다.

대적자들은 지금 상황만 예의주시하는 상태. 낫슈바켈 혼자서도 막아낼 수 있었다.

“알았어!”

싱트파헬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땅을 박찼다.

날렵한 몸을 움직여 녹스에게 다가갔다.

낫슈바켈의 눈이 커졌다.

“무슨 짓이냐? 위험하다!”

싱트파헬이 창을 빼앗은 것은 찰나.

그걸 손에 쥐자마자 녹스의 머리 위쪽으로 크게 휘둘렀다.

창날에 실이 걸렸다.

또각.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실이 잘렸다.

녹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영혼도 흔들렸다.

라무의 영혼이 소멸되기 시작하고, 그 몸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섬뜩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아!]

검은 그림자가 입을 크게 벌렸다.

피눈물을 흘리듯, 짙은 비린내가 훅 하고 퍼졌다.

싱트파헬이 시위하듯 창을 흔들었다.

“흥, 그렇게 대놓고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바보가 어디 있어? 넌 이제 끝났어. 자, 어떻게 요리해줄까?”

“싱트파헬, 이 멍청이!”

낫슈바켈이 분통을 터뜨렸다.

싱트파헬이 어리둥절해 할 때, 검은 그림자가 길게 웃었다.

[으하하, 어리석은 새끼용 같으니! 내 수고를 덜어주었구나!]

이내 몸을 회전시키며 싱트파헬에게 달려들었다.

엉겁결에 창을 내밀었다.

창이 회색 빛을 뿜더니 녹스가 아닌 싱트파헬에게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정확히 싱트파헬의 이마를 꿰뚫었다.

“아!”

싱트파헬이 탄성을 질렀다.

상처는 없었다.

당연한 일.

방금 전 공격은 싱트파헬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공격했으니까.

녹스의 영혼이 날아들었다.

낫슈바켈이 움직였으나 녹스가 한 발짝 더 빨랐다.

콩알처럼 작게 변하여 싱트파헬의 이마 속으로 들어갔다.

싱트파헬의 몸이 일순 경직되었다.

눈동자가 완전히 풀렸다.

몇 번 비틀거리더니, 겨우 균형을 잡았다.

낫슈바켈이 급히 싱트파헬을 부축해 주었다.

“싱트파헬, 괜찮니?”

“어…… 괜찮은 것 같아.”

싱트파헬은 어지러운지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호호호호!]

갑자기 짤랑짤랑한 교소가 터졌다.

메를르였다.

휴고와 싸우면서도 상황을 남김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녹스가 싱트파헬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망하던 조디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이군……]

메를르가 다들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모든 것은 대재앙의 때에 결정된 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날렸다.

휴고가 뒤쫓으려 했으나 속도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유령 여왕의 자취가 사라졌다.

조디악은 싱트파헬에게 다가왔다.

[어린 용이여, 괜찮은가?]

“응? 아, 그런 것 같아.”

[괜찮을 겁니다.]

시혁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조디악이 시혁에게 책망하는 눈빛을 보냈다.

싱트파헬이나 낫슈바켈이 들을 수 없도록, 마법 전언으로 따지듯 물었다.

[저 어린 용은 자네의 수호룡 아닌가? 어째서 위험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지?]

[위험 속이라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녹스의 영혼이 저 어린 용에게 들어가지 않았는가? 암흑용은 어둠 대종사를 당해낼 수 없어! 채 며칠이 지나기 전에 암흑용은 어둠 대종사에게 잠식당할 거야! 어쩌면 이미 잠식당했을지도 모르고!]

시혁은 차갑게 웃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지금 사태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인데……]

[직접 보여드리지요.]

성큼성큼 싱트파헬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이봐, 녹스.]

“왜 불러?”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싱트파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세 가지 함정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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