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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38화 (238/250)

< 세 가지 함정 -1- >

시혁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한 손에는 베리타스의 지팡이가, 다른 손에는 유령 여왕의 창이 들려 있었다.

창을 내밀었다.

손잡이 쪽을 라무에게 향해서.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역공당할 수도 있는 자세.

라무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 뿐.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라무도 알고 있으니까.

여기 와 있는 시혁은, 단지 분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괜스레 호들갑을 떨며 창을 받아들었다.

“아이고, 영광입니다. 현왕님께 이런 보물을 받다니요.”

[이것도 받아라.]

시혁은 왼손에 든 지팡이도 마저 던졌다.

라무가 엉겁결에 지팡이를 받아들었다.

의문 어린 눈빛이 쏟아졌다.

“백색 현왕, 이게 무슨……”

첫 번째 함정이 발동한 것은 바로 그때.

베리타스의 영혼석이 옅은 광채를 발했다.

순식간에 여러 마법이 조합되었다.

혼령 고정, 혼백 봉인, 영육 괴리, 마법 봉인, 영력 봉쇄, 심연 분쇄, 공허 탈출 등등.

이 많은 마법이 찰나의 순간에 발현되었다.

과연 베리타스.

미리 마법을 심어두고 어쩌고 할 것도 없었다.

“아니?”

라무가 깜짝 놀랐다.

손을 휘젓자 어두운 파장이 올올이 풀려나왔다.

어둠이 구체화되는 것보다 마법이 라무를 덮치는 게 더 빨랐다.

베리타스의 마법과 시혁의 마법진이 엉겨 붙었다.

더욱 정교한 마법이 완성되었다.

오로지 라무, 아니 녹스를 위한 마법.

만약 여기 서 있는 게 라무라면 이 마법은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녹스가 이미 부활했을 경우, 그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게 된다.

[무슨 짓이냐!]

유령 여왕 메를르가 경호성을 질렀다.

손을 들어 영혼 칼날을 생성하려고 하자, 태양 늑대 휴고가 앞발을 뻗어 제지했다.

[기다려봐. 뭔가 이상하다.]

라무의 전신이 검게 물들었다.

옅은 그림자 같은 게 라무의 몸에 겹쳤다.

그림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의 힘이 육체를 옭아매고, 그 안의 영혼이 드러난 것이다.

이상하다.

아까 마법진으로 검증했던 영혼과는 느낌이 확 달랐다.

어둠 그 자체.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심연.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미지의 공포.

그런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녹스.

어둠 대종사의 영혼이었다.

휴고가 입을 쩍 벌렸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저건 라무가 아니라 녹스잖아!]

반면 다른 현신들의 반응은 좀 달랐다.

[흐응……]

[역시 그렇게 되었군.]

메를르는 콧소리만 냈고, 조디악은 이 일을 예측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휴고가 답답하다는 듯 땅을 벅벅 긁었다.

[뭐냐, 너희들? 설마 이럴 줄 알았다는 거냐?]

보고 있던 시혁의 눈이 깊어졌다.

현신들이라고 해서 의견이 모두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혹시 파벌이 갈려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어째서 위험을 감수하고 라무를 대적자로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질 라무의 패가 어떤 것인지도.

다들 라무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시혁은 지팡이를 회수했다.

검은 그림자가 지팡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베리타스냐?]

그 말에 현신들이 움찔했다.

유령 여왕이 지팡이의 영혼석에 시선을 던지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어찌 이런 일이…… 진리 대종사가 왜 거기 봉인되어 있지?]

[그렇게 됐습니다.]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몸 위에서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키득대며 웃었다.

[베리타스가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기껏해야 마법진에 수작을 부렸을 줄 알았더니…… 하지만 변하는 건 없어. 난 여전히 대적자이고, 파괴신을 막아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림자가 한 차례 짙은 어둠을 뿌렸다.

어둠이 공간 자체를 뒤흔들었다.

마법이 소멸되었다.

매우 정교한 마법이었으나, 베리타스가 깃든 지팡이의 능력이 제한적이라 힘은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압도적인 힘을 동원한다면 단박에 깨뜨릴 수 있었다.

베리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래서 지팡이를 좋은 걸 달라니까.]

그림자는 곧 육체로 돌아갔다.

마비되었던 라무가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그 사이 모든 결박이 풀리고 자유를 되찾았다.

휴고가 으르렁대며 외쳤다.

[우리를 속였구나!]

“천만의 말씀을.”

라무는 목소리를 내어 휴고의 말을 부정했다.

“저는 현신님들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조디악도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속인 적은 없지. 다만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야.]

[간교한 놈 같으니. 한 가지 물어보마. 너는 누구냐? 라무냐, 녹스냐?]

“당연히 라무지요. 무희 알란티스의 아들이자, 아비를 죽인 패륜아, 더불어 아르거스의 파괴신을 격퇴할 사명을 받은 정의의 대적자입니다.”

라무가 두 팔을 벌렸다.

가장 적의를 드러내던 휴고의 눈이 흔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현신들은 대개 진실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이 현신들에게 지금 이 라무의 말이 사실이라고 속삭였다.

싱트파헬이 시혁을 쳐다보았다.

“백색 현왕. 저 말이 진짜인가 봐. 진실의 향기가 느껴져.”

시혁은 혀를 찼다.

간단한 속임수 아닌가.

대놓고 질문을 했다.

[그래서 네가 녹스가 아니라는 말이냐?]

라무는 시혁을 한 번 쳐다보았다.

곧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라무다.”

[네가 라무냐고 묻지 않았어. 녹스가 아니냐고 물었지. 대답해, 정신 압제자. 넌 정말로 녹스가 아니냐?]

집요한 물음에, 현신들도 대충 그 뜻을 파악했다.

휴고가 으르렁댔다.

[라무. 네놈은 정말로 라무가 맞느냐? 아니면 이미, 저 반신이 주장하는 대로 녹스에게 흡수당해 사라진 거냐?]

라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시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녹스…… 이미 부활했었구나.]

“아아.”

더 이상 부인할 생각은 없나 보다.

라무, 아니 녹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됐지. 멍청이 노예 놈은 몰랐지만. 쯧, 네가 처음 라무의 영혼을 검사했을 때 귀띔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그럼 내 부활이 더 앞당겨졌을 테니.”

[너도 라무가 네 존재에 대해 아는 게 각성 조건이었나 보구나.]

“호오, 그 말은 베리타스도 동일한 조건이었다는 뜻이렸다? 뭐, 비슷하지. 단지 아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만……”

[그만! 이제 됐어!]

휴고가 노호성을 질렀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서더니, 타오르듯 빛나는 이를 드러냈다.

[녹스! 천 년 전, 네가 공허 변환 마법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릴 속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처음부터 네놈을 대적자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어! 이제라도 네놈을 대적자의 위에서 끌

어내려,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리겠다!]

휴고가 도약했다.

앗, 하는 순간 이미 저 하늘 높은 곳에 떠 있었다.

태양으로 변했다.

강렬한 불꽃이 내리꽂혔다. 창졸지간에 발한 공격임에도, 거의 낫슈바켈의 용암 숨결에 맞먹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성질 급하기도 하셔라.]

메를르가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직접 녹스의 몸에 깃들었다. 녹스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며 그 창을 휴고에게 향했다. 음울한 힘이 번지며, 낙하하던 태양을 비껴 때렸다.

고통어린 비명이 터졌다.

[메를르! 무슨 짓이냐!]

신 대 신의 격돌이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한쪽에게 유리했다.

휴고는 맨몸으로 부딪친 반면, 메를르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기를 쓴 것은 물론 녹스의 도움까지 받았으니까.

불타는 늑대가 진리 영탑 한쪽에 내려앉았다.

타격을 좀 입었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메를르와 조디악을 한 번씩 보더니, 성을 내며 울부짖었다.

[네놈들, 이제 보니 진작 우리를 배신했구나! 죽여 버리겠다!]

[배신은 무슨 배신? 멍청한 소리하지 마.]

[다 죽여 버린다!]

휴고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메를르와 조디악이 대응했다. 조디악은 소극적인 태도였지만, 메를르는 진심인 듯했다. 강렬한 영혼 칼날을 사방으로 날려댔다.

비록 본래 상태는 아니라고 해도 현신은 현신.

진리 영탑의 방어막이 무너질듯 흔들렸다.

“아아, 끝장이다.”

“현신들이시어, 자중해 주십시오!”

“진리 영탑이 무너지면 마법도도 멸망합니다!”

마법도의 마법사들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소용없었다.

현신들은 들은 척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 싸움에 골몰하고 있었다.

녹스가 차갑게 웃었다.

“내 정체를 밝힌 것은 용하다만, 단지 그걸로 일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거냐? 참 순진하군.”

싱트파헬이 발끈했다.

“네 눈엔 내가 보이지도 않나 보지? 너! 네가 날 암흑용으로 변이시킨 장본인이라며? 마침 잘 만났다. 널 씹어 먹고 말겠어!”

“섣불리 나서지 마라.”

낫슈바켈이 제동을 걸었다.

“저 자는 부활한지 얼마 안 되어 우리에게 상대가 안 된다. 그런데 저렇게 뻗대는 것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해. 조심해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베리타스에게 당해 영혼이 흔들린 다음이다. 지금은 육체와 연결을 공고히 하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이건 시혁이나 낫슈바켈에게 해당하는 이야기.

싱트파헬은 지금 상황이 더 위험했다. 녹스가 스스로의 영혼을 떼어, 싱트파헬에게 집어넣기 더 쉬워진 것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시혁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탑 아래가 시끄러워졌다. 임시로 봉인해 놓았던 문이 박살나고, 한 무리의 영웅들이 들어섰다.

시혁은 그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종족도 다양하고, 출신도 다양한 영웅들이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특이한 무기를 장비했다는 점.

형태도 속성도 다르지만, 그 본질은 비슷했다.

마나 흡수, 증폭, 공허 변환.

대적자들이다.

영웅들은 현신들을 보고 눈을 끔뻑이더니, 녹스를 향해 우렁차게 소리쳤다.

“라무, 구하러 왔다!”

적어도 스무 명 이상.

그 중에는 반신의 분신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대적자의 무구까지 감안하면, 싱트파헬과 낫슈바켈 둘 만으로는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쾅! 쾅쾅!

격돌 중인 세 현신까지 있으니 더 그렇다.

낫슈바켈이 시혁을 돌아보았다.

“돌아가는 게 좋겠다. 오래 있으면 위험해.”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두 번째 함정이 도착했으니까.

시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허와 바로 맞닿아 있는 마법도의 방어막.

거기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을 비집고 작은 관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 크기의 관이었다.

관들이 낙하했다.

진리 영탑의 꼭대기에 단단히 틀어박힌 후, 천천히 그 문을 열어 내용물을 드러냈다.

라무가 헛웃음을 지었다.

“골렘?”

그렇다, 골렘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늘마루의 새로운 로봇 선원들.

이번에 하늘마루를 개조하면서 로봇 선원으로 그 안을 채우지 않았나. 그 중 빼돌린 일부를 개조한 것이다.

로봇 선원들이 녹스를 둘러쌌다.

하지만 이들만으로 사태를 패결할 수는 없었다.

대적자들 때문이다.

대적자가 될 정도면 하나같이 이름난 영웅들이니까. 아무리 로봇 선원을 잘 만들었어도, 그들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혁은 낫슈바켈과 싱트파헬에게 마법 전언을 보냈다.

[녹스는 제가 맡겠습니다. 대적자들을 막아주세요.]

[알았어. 걱정 마! 내가 다 날려줄게!]

[저들과 싸워봐야 득 될 게 없어 보인다만, 좋다. 널 믿도록 하지.]

두 용이 대적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처음에는 얕잡아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예쁜 아가씨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한 대적자가 경고하는 소리를 내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조심해! 저 여자들, 보통 여자가 아냐! 최소한 고룡급의 용이야!”

“뭐?”

“누가 사주한 거지? 고룡급의 용을 둘이나 부릴 정도면 아르거스에서도 몇 안 될 텐데?”

대적자들이 용에게 막힌 사이, 로봇 선원들의 포진도 완료되었다.

완전한 원형.

녹스가 의문어린 얼굴로 시혁을 보았다.

“뭘 하려는 거지?”

기이이잉.

묘한 기계음이 울렸다.

로봇 선원들의 가슴이 일제히 열렸다.

그 심장이 드러났다.

오색으로 빛나는 돌. 정교한 마법진이 겹겹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이 무언가와 공명하며 옅은 빛을 발했다.

그걸 본 녹스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시혁은 베리타스의 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폭발하듯 섬광이 뿜어졌다.

아까 썼던 마법 조합이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로봇 선원들의 심장.

여기서 뿜어지는 힘이 베리타스의 제어 아래 마법으로 구현된다. 그로 인해 빚어지는 마법력은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 세 가지 함정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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