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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37화 (237/250)

< 준비 속의 준비 -2- >

라크라가 천상도에 떠들썩하게 소문을 낼 테니, 라무 또한 그 소문을 들을 확률이 높았다.

당연히 대비를 하겠지.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정체를 파악할 수조차 없을 터.

라무를 위해 특화된 마법이나, 상상도 못할 고등한 마법을 써야 한다.

베리타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녹스의 정체를 까발린다? 그게 효과가 있을까? 녹스의 정체를 밝히기도 어렵고, 밝힌다 해도 후속 조치를 이미 취해놓았을 거다. 나도 몇 번이나 녹스의 심계에 당했지.]

방법이야 많다.

간교한 혀 놀림으로 현신들을 설득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현신들이지, 천상도 주민들의 여론이 아니니까.

천 년 동안 알게 모르게 공허 변환 마법을 썼을 현신들.

그들도 어느 정도는 변이가 되었다고 봐야 했다.

“괜찮아. 고민은 내가 할 테니 가장 가능성이 높은 마법을 알려줘.”

[뭔가 생각이 있나 보군. 좋다. 라무는 녹스의 인공 영혼이라고 했지? 아직은 녹스가 완전히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는 혼령 고정 마법진을 깔고, 혼백 봉인의 수정 가루를 뿌린 다음 영체 분쇄의 마법과 영혼 소멸 마

법을 사용하는 게 가장 상수다.]

시혁은 머리를 흔들었다.

“누가 녹스의 영혼을 소멸시키겠대? 정체만 드러낼 거야.”

[어이가 없군. 이 좋은 기회를……]

“섣부른 수를 썼다간 현신들이 차단할 거야. 검증하는 마법진을 가지고 당장 녹스를 어쩔 생각은 없어.”

[뭐, 좋다. 알아서 해라.]

베리타스가 새로운 마법 조합을 가르쳐 주었다.

한 육체에 깃든 영혼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치는 마법이다.

라무가 온전하다면 두 영혼이 나타나겠지.

그게 아니라면 녹스의 영혼만 그 짙은 어둠을 흩뿌릴 테고.

설령 라무의 영혼이 남아 있어도 상관없다. 라무의 영혼은 불완전하게 만들어져 심연의 힘으로 보완된 상태니까. 그 점을 짚으면 금방 절벽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

마법 조합을 확실히 기억했다.

베리타스의 지식을 수습하고는 있지만, 역시 응용 능력으로는 베리타스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이건 시간이 지나야 따라잡을 것이다.

더하고 뺄 것도 없었다. 이 마법 조합으로 충분했다. 영혼 대종사 네프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은 이것보다 뛰어난 마법을 찾기 힘들었다.

차분히 마법 조합을 재현했다.

무척 바빴다.

성지에서 준비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 성역에서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마루의 개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 단계로, 성역의 주요 원주민들을 면담했다.

첫 번째는 아달.

하늘마루가 개조되는 것을 참관하는 중이었다. 시혁이 슬쩍 존재감을 드러내자, 얼른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백색 현왕님, 오셨습니까?”

[그래. 하늘 도시는 잘 다녀왔느냐?]

제베와의 일전 이후, 아달은 광명지의 하늘 도시를 다녀왔다.

삼품으로 승급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성공.

시혁은 사심 없이 기뻐했다.

[축하한다. 곧 하늘 도시에서 고위 직책을 맡겠구나.]

“예. 백금 장성의 성주로 내정 되었습니다.”

[벌써?]

“다른 천사들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다들 품계가 높아져서, 광명지에서 공직을 맡으라는 압박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혁은 천사들의 날개를 몇 번이나 손 봐 주었다.

다들 노력을 했다. 그 덕에 마나 방출이나 신성 마법의 실력이 높아졌다. 자연히 전반적인 품계가 2~3 단계씩 높아져 있었다.

아쉽기는 했다.

열심히 키운 천사 군대가 남의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판이니까.

뭐 어쩔 것인가.

이제 작별인 것을.

차라리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지. 다들 출세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축하한다. 백금 장성이라…… 요지 중의 요지구나. 잘 지키도록 해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리고 아르거스를 떠나기 전, 네 날개를 마지막으로 손 봐 주겠다. 잘 하면 수십 년 후에는 일품 천사도 가능할

것이다.]

“현왕님에게 입은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니다. 나도 네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늘마루를 만들 때부터 시작해서 성역 내 갈등도 많이 중재를 했고, 길누아나 제베와 싸울 때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느냐?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천사들의 거취는 정해졌다.

다른 이들과도 차례로 면담을 했다.

대부분은 시혁의 성역에 남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엘프들도 그랬다.

대수림에서 세계수 씨앗을 하나 가져오더니, 원래 세계수가 있던 자리에 다시 심은 것이다.

대밀림에도 세계수가 있지만, 시혁이 떠나면 이 성역도 무주공산이 된다. 그걸 노리는 것 같았다.

이로써 시혁의 성역에 남는 종족은 총 다섯.

인간, 엘프, 드워프, 수인족, 오크.

시혁은 자신이 떠난 뒤에도 이들이 반목하지 않게 체계를 잘 만들어 두었다. 각 종족의 일은 종족 내에서 해결하되, 그 외의 일은 종족 의회에서 결정이 날 것이다.

성역의 일을 처리하는 동안, 성지에서의 일도 거의 끝났다.

함정을 완비했다.

베리타스는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모든 과정이 완성되자, 연신 감탄을 했다.

[그런 수가 있었다니, 상상도 못했다.]

“이걸로 끝낼 생각 없어. 이건 그냥 전초전에 불과해.”

[이건 내 방식보단 녹스의 방식에 가깝군. 녹스 놈이 자기 장기에 당하는 걸 구경하는 것도 쏠쏠하겠어. 좋아, 기대해보마. 하지만 방심하지 않는 게 좋아. 녹스야말로 음모의 귀재니까. 만약 완전히 부활했다면, 네 의도를 모

두 읽고 있을 수도 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대비도 하는 중이야.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야지.”

정확히 세 개의 함정.

아니, 실은 하나의 함정이 더 있었다.

이건 베리타스도 몰랐다. 싱트파헬에게 함정을 설치하게 해놓고, 시혁 혼자 작업을 했으니까.

싱트파헬은 그런 줄 어쩐 줄도 몰랐다. 베리타스가 보여주는 싱트레아의 기억에 취했다. 몇 번이나 그 기억을 재생해서 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지구 시간으로는 고작 며칠.

아르거스 기준으로는 한 달 이상.

거의 일을 마무리 했을 때, 마침 라크라가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셋을 대동하고 있었다.

할라드의 고위 권속, 네일룬의 신녀, 까뮈의 장로.

다들 시혁과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나이가 들어 외모가 변하긴 했으나, 알아보기에 무리는 없었다.

라크라를 포함하여 넷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백색 현왕님.”

[그래, 오랜만이다. 어떻게 됐지?]

“현신님들께서 현왕님의 제안을 수락하셨습니다. 사흘 후 정오에, 마법도에 있는 진리 영탑에서 검증을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진리 영탑은 마법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아르거스에 존재하는 모든 신역과 성역 중 가장 중립에 가까운 세계.

그곳의 마법사들은 극도로 자존심이 높아, 설령 현신이라 해도 외압을 가하기가 힘들었다.

시혁도 동의했다.

[좋다. 사흘 후 정오라고 했지? 진리 영탑으로 가마.]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예. 검증을 할 때, 현왕님께서 쓰실 마법을 저희가 미리 점검하는 조건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천상도 입장에서도 무턱대고 라무를 마법진에 내몰 수는 없을 테니까.

시혁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점검은 누가 하지? 설마 너희가 하진 않을 테고, 진리 영탑의 마법사들이 하는 거냐?]

“예, 그들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요.”

[좋다. 내 사자를 통해 진리 영탑에 마법진을 보내겠다. 사흘 후에 결과를 보고 놀라지나 마라.]

자질구레한 일정을 협의했다.

양측에서 세 명씩 참가하기로 했다.

시혁은 낫슈바켈과 싱트파헬.

현신 쪽에서는 고래 신 조디악과 다른 두 신이.

점검을 하는 대신, 그 결과와는 관계없이 유령 여왕의 창을 넘기는 조건이었다.

무대는 마련되었고, 준비도 완료되었다.

사흘 후.

시혁은 진리 영탑에서 라무와 마주했다.

이게 얼마만이냐.

라무가 대적자라는 것을 안지 보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그동안 하도 많은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시혁은 라무를 직시했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요란스럽게 하고 다니던 복장이 변했다. 거추장스런 장신구는 모두 떼버리고 검은 옷만 하나 뒤집어썼다. 머리덮개가 달려 있어, 얼굴을 가리는 것도 가능한 옷이었다.

몸에서는 자연스럽게 은은한 어둠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영혼술사가 아니라 흑마법사 다운 기세.

슬쩍 흔들어 보았다.

[많이 변했구나, 라무. 아니, 변한 게 아니라 본래 모습을 되찾은 거겠지?]

“흐흐.”

라무는 흐리게 웃었다.

흡사 세상에 달관한 듯한 태도.

시혁이 들고 온 지팡이에서, 베리타스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녹스…… 생전의 모습 그대로로군. 육체만 인간일 뿐이야.]

[완전히 부활한 거냐?]

[모르겠다. 영혼석에 묶여 있는 신세이니 놈의 육신을 제대로 탐색할 수가 없어. 이 따위 후줄근한 지팡이가 아니라 칠대 위상의 용왕 정도에는 들어갔어야 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라무의 뒤로, 세 존재가 따라왔다.

거대 고래 조디악, 태양 늑대 휴고, 유령 여왕 메를르.

본신은 너무 크니, 크기를 작게 줄인 상태.

우우웅.

시혁이 쥐고 있던 창이 나지막이 울부짖었다.

메를르가 교교한 웃음을 날렸다.

[물건은 틀림없구나.]

[당연하지. 약속은 지킨다.]

[동행자는 두 마리 용…… 틀림없군.]

지팡이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현신들이 보기엔 그저 자아가 깃든 무구에 불과할 테니까. 그 정도야 시혁 정도의 반신이면 누구나 한두 점 쯤 가지고 있었다.

낫슈바켈과 싱트파헬은 말없이 현신들을 노려보았다.

겉으로는 당당한 기색을 견지하고 있으나, 시혁이 보기엔 기가 꽤 죽은 상태였다.

그럴 만도 하다.

1대 1은커녕, 둘이 힘을 합쳐도 세 현신 중 하나를 당해내는 것도 힘들었으니까.

라무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이 바보 같은 일을 끝내지요. 겨우 1백 대적자가 모였는데, 언제까지 시간만 낭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현신들도 동의했다.

[그렇다. 서두르자.]

[바보 같은 짓이야. 대적자로 받아들일 때 내가 직접 검증을 끝냈거늘!]

[난 재미있는데?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말이야.]

진리 영탑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대기가 희박해지는 높이.

신역의 방어막과도 매우 거리가 가까웠다. 공허가 바로 눈앞에 넘실대고 있었다.

진리 영탑의 마법사들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준비는 끝난 상태.

제단이 하나 보였다.

시혁이 미리 전달한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졌다. 곳곳에서 마나 보석들이 색색의 빛을 뿜었다.

라무가 스스럼없이 그 위로 올라갔다.

시혁을 보더니, 입 꼬리만 비틀며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현왕님, 시작하시지요. 뭘 준비하셨을지 기대됩니다.”

[기대해도 좋다, 녹스.]

일부러 녹스라고 불렀건만, 라무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입 꼬리만 더욱 들어 올릴 뿐이었다.

마법진을 기동시켰다.

베리타스가 알려준 마법 조합이 담겨 있었다.

영체 진동이 라무를 흔들었다.

인과 단절이 모든 개입을 차단했다.

근원 탐색이 그 연원을 뿌리까지 찾아냈다.

운명 분석이 기록된 정보를 낱낱이 파헤쳤다.

진실 현현이 영혼의 정체를 드러냈다.

다섯 마법의 조합.

영혼을 분석함에 있어, 아르거스 최고를 자부할 수 있는 마법.

마법진 전체가 오색의 빛을 뿜었다.

그 빛이 라무에게 집중되었다.

오색의 빛이 어우러져 황금빛으로 변했다. 그 빛에 이끌려, 라무의 영혼이 점차 육체를 벗어났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법진에 의해 그 정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짙은 회색.

아니, 차라리 검은색에 가까웠다.

녹스?

영혼 파장은 동일했다.

하지만 마법진에 의해 분석된 결과를 보니, 녹스가 아닌 라무임에 분명했다.

전생이 녹스일 뿐이다.

라무의 영혼을 보완했어야 할 심연의 힘도, 그 영혼 아래 숨어 있어야 할 녹스의 영혼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라무의 영혼, 단 하나.

그걸 보고 현신들이 입방아를 찧었다.

[역시 헛짓이었어.]

[이런 일 때문에 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다니!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때인데!]

[간만에 좋았지 뭘. 천상도로 돌아가자. 할 일이 많아.]

이윽고 마법진의 빛이 그쳤다.

라무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더니 싸늘한 비웃음을 보냈다.

“현왕님, 생각한 대로 안 되어서 어쩝니까? 자, 어서 제 창이나 내놓으시죠. 고향 세계로 도망칠 생각밖에 없는 현왕님과는 다르게, 제게는 할 일이 많습니다.”

시혁도 웃었다.

생각대로 안 됐다고?

그럴 리가.

모든 것은 시혁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 준비 속의 준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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